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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1.9.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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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공세에서 노동시간 단축 투쟁의 오류

김도형 | 운영위원, 변호사
노동시간 단축은 과연 고용창출/고용유지의 효과가 있는가?

IMF 사태가 터지고 신자유주의의 공세가 본격화되면서 구조조정의 명분 아래 대량실업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 때,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공히 이러한 실업극복과 고용안정을 위한 대안으로서,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를 적극적으로 제기하고 나섰다. 그리하여 구조조정과 대량실업의 폭풍 속에서 노동자들은 하나같이 외쳤다. '고용안정 쟁취'와 함께 '노동시간 단축'을 목이 터져라고 외쳐댔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나라 망한다는 공갈협박에 얼이 빠져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도입에 도장 찍어주고 나와 우왕좌왕하던 때를 지나, 신자유주의적 자본의 탄압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과학적인 시각을 올바르게 확립한 때이다. 그렇다면 과연 노동시간 단축은 고용창출이나 고용유지의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의 여부에 대하여 냉정하게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부르주아 경제학의 갖가지 이론들과 그 틀 내에서 이루어진 실증적 분석들을 논거로 들이밀며, 노동시간 단축은 고용창출이나 고용유지의 효과가 없으며 오히려 경제위기 탈출을 위한 구조조정에 방해가 된다고 반박한 자본의 입장을 대변하자는 것이 결코 아니다1).
다만 분명한 사실은 경제적 성장국면(경기가 호황이거나 회복세에 있는)이라는 기본전제가 설정되어 있어야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기대하는 고용창출의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타의 수많은 경제변수들이 불변이라는 가정 하에서도, 노동시간 단축이 곧바로 고용창출의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단기적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 1989년 근로기준법 개정을 통해 1991년까지 2년간에 걸쳐 단계적으로 주48시간 노동에서 주 44시간 노동으로 4시간의 노동시간 단축이 이루어진 바 있다. 그러나,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그 당시의 경제상황에서도 노동시간 단축 자체로 인한 실업률 저하의 효과는 별반 없었던 것으로 나타났었다. 그 이유는 그 시기가 이미 3저 호황의 국면을 벗어나 경기침체 국면으로 전환되는 시점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할 것이다.
외국 사례를 보자. 1980년대에 들어와서 장기간의 고실업에 직면한 프랑스, 독일, 벨기에 등 유럽의 주요 국가들의 경우,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고용창출은 노동계의 가장 적극적인 정책이 되었고 그 결과 일정 정도의 노동시간의 단축을 이루어냈다2). 그러나 이러한 노동시간 단축을 통하여 실제 이루어진 고용창출 효과는 기대치보다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3). 프랑스에서는 노동조합들 내에서도 노동시간 단축에 대한 찬반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CGT-FO(프랑스노동자총동맹-노동자의 힘)은 노동시간 단축이 퇴직노동자를 대신하는 고용만 증가할 뿐, 실질적인 고용증가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것도 정규직의 60% 임금을 받는 임시직이 증가할 뿐이므로 고용창출 효과가 없고, 특히 임금 하락은 어떻게든지 발생하게 되므로 문제라면서,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러한 유럽 사례에서 우리가 포착해내야 하는 중요한 사실은, 노동시간 단축이 실시되었는데 과연 고용창출이나 고용유지의 효과를 실제로 가져왔는지 여부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노동시간 단축과 함께, 바로 노동시간에 대한 규제도 폐지·완화되는 노동유연화4) 조치가 병행되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한 노동유연화 조치 중에서 변형노동시간제의 확대 조치는 예외 없이 이루어졌다는 특성을 보편적으로 보이고 있다5). 즉, 신자유주의의 노동유연화 전략은 이미 선진 자본주의 국가 내에서 관철되어 있는데, 노동시간 단축과 교환하는 방법으로 그것이 이루어졌다는 점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결국 신자유주의 아래에서 노동시간 단축의 역사는 겉으로는 실업률 저하, 고용창출을 명분으로 내세워 진행되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강력한 노조의 저항을 무마하며 노동유연화 전략을 용이하게 관철시키는 수단으로 활용된 측면이 분명히 존재하였다. 이것이 그 속에 숨겨진 또다른 본질이다.


노동자의 건강과 삶의 질의 개선·향상을 위해 노동시간 단축이 당연하다는 논리는 과연 신자유주의 하에서도 성립될 수 있는가?

신자유주의의 광폭한 기세가 맹위를 떨치고 있는 현 상황에서 노동시간 단축 주창론자들은 노동시간 단축 도입의 근거로, 이제는 더 이상 '실업극복, 고용창출이나 고용유지'를 이야기하지는 않는 듯하다. 이는 신자유주의 노동유연화 전략이 일정 성공을 거둔 결과 나타난 비정규직의 대량양산이라는 현실 때문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설령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고용창출의 효과가 발생하더라도, 제대로 된 고용창출이 이루어질 리가 만무하다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기 때문이다. '정리해고를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노동시간을 단축하여 고용을 유지하도록 하자'는 말도 정리해고라는 피맛의 실상을 톡톡히 경험한 마당에는 더 이상 나올 수 없는 말일 터이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노동자의 건강과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동시간 단축은 당위적 명제'라는 고전적 논리가 슬그머니 고개를 쳐들고 있다. 그러더니 지금은 노동시간 단축이, 투쟁해야 하는 절대적인 명분으로 확고한 자리를 잡았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 비하여 장시간 노동이 행해지고 있는 우리나라 현실에서, 노동시간 단축은 산재 위험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노동자의 건강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비단 산재율 감소만을 위해서만 아니라, 여가시간이 늘어나면서 노동자의 삶의 질을 높여준다는 면에서도 노동시간 단축은 절대 선의 명제라는 것이다. 감히 반박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그러나 문제는 신자유주의의 정치적 성격이라고 할 것이다. 노동유연화는 금융세계화와 더불어 신자유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본질이다. 그런데 노동시간 단축은 노동의 불안정화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며, 이에 따라 노동유연화라는 신자유주의 논리에 포섭가능한 성질이 있기도 하다. 즉 노동시간 단축은 노동유연화와 모순·충돌을 이루지 않는다. 오히려 비정규직의 대량 양산이 이루어진 상황에서는, 훨씬 더 싼값에 훨씬 더 용이하게 노동력을 착취할 수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더욱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자본측에서도 일정 정도의 법정노동시간의 단축은 필요하다. 결국 신자유주의 아래에서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것은 정규직의 단축된 노동시간을 비정규직이 대신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처럼 신자유주의라는 것은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절대 선(?)의 명제마저 왜곡하고 희석화하여 자본의 논리로 수용하는 무서움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 아래에서 노동시간 단축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과연 노동자의 건강과 삶의 질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할 것인가? 관점을 바꾸어서 우리의 현실을 직시해 보자. 전체 노동자의 과반수를 훨씬 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주5일 근무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비정규직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여성노동자들에게 노동시간이 단축되면, 육아나 가사노동에 대한 부담이 덜해질 수 있으니 삶의 질의 향상을 가져온다고 떠들어대는 것은 그들이 처한 현실자체를 모르는 소리이다. 신자유주의의 시장경제 논리는 사회적 관계의 총체를 시장경제적 관계로 재편하거나 시장경제적 관계에 최대한 종속시키고 있다. 이로써 자본운동의 자유를 극대화하려고 하며, '생산적 복지'라는 표현에서 나타나듯이 복지라는 개념마저 시장화시키고 있는 상황이다. 신자유주의하 에서 노동유연화로 표출되는 노자간 모순의 총체적인 극복 없이, 단지 부분적인 노동시간 단축 -상층노동자 일부만이 실질적으로 혜택받게 되는 토요일에 일하지 않고 쉴 자유- 만으로 노동자의 삶의 질에 획기적 개선이나 향상이 도래한다는 주장은 현실을 망각하고 외면하는 관념주의적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정권과 자본의 꿍꿍이는 바로 노동유연화의 법제도적 완성

지난 7월 김대중 대통령은 노사정 합의를 통해 주40시간으로의 노동시간 단축을 연내에 반드시 입법화하겠다고 천명하였다. 그리고, 8월에 들어와서 김호진 노동부장관은 만일 노사정 합의 방식에 의한 노동시간 단축이 용이하지 않게 되면, 정부 독자적으로 노동시간 단축 입법을 상정하겠다고 밝혔다. 연내 입법화 관철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며, 어서 빨리 노동시간 단축에 대한 노사정 합의안을 도출해내라고 노사정위원회를 압박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 정치적 의도를 간파해내야 하는 바,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는 정권의 의도는 무엇일까? 결국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법적 완성을 위한 노동법 개악작업을, 본격적인 선거국면으로 들어서는 내년이 도래하기 전, 연내에 반드시 끝내겠다는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조직화에 발목을 잡는 복수노조금지 유예 조치와 여성노동에 대한 유연화 작업을, 전혀 문제없이 성공적으로 끝마친 상황이다. 이제 남은 것은 노동유연화 정책을 법제도적으로 공고화하는 마무리 작업이다. 노조전임자 임금지급금지 유예조치와 극히 형식적인 모성보호 조치를 노동자들에게 던져주었듯이, 주5일 근무라는 노동시간 단축을 노동자에게 떡고물로 던져주면 그 마무리 작업에 박차를 가하는 데 거리낄 게 없는 상황이다.
앞서 지적하였듯이, 현재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것은 자본이 획책하고 있는 노동유연화를 보다 용이하게 이루기 위해 자본의 입장에서도 필요한 사항이다. 노동자에 대한 거래수단의 하나로 전락되어 있을 따름이며, 아직까지 자본이 노동시간 단축에 반대하고 있다는 주장은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는 소리이다. 자본은 노동시장 유연화를 위한 7대 조건의 수용을 전제로, 노동시간 단축에 동의하고 나선 지 이미 오래다. 다만, 더 많은 노동유연화 조치를 따내기 위해 노동시간 단축에 반대하는 척하고 있을 뿐이다.
주5일 근무라는 노동시간 단축의 대가로 자본이 내심으로 진정 원하고 있는 바는 월차휴가 폐지, 주휴 및 생리휴가 무급화, 초과근로수당에 대한 할증률 인하, 휴가 상한선 도입 등 단축되는 노동시간에 대응하는 또는 그 이상의 임금 삭감조치를 따내겠다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더 본질적으로는 자본의 의도가, 변형노동시간제의 확대6)와 근로시간·휴게·휴일의 적용 제외범위 확대라는 노동유연화 제도 도입에 있음을 제대로 꿰뚫어 보아야 한다.
6개월~ 1년 단위의 변형노동시간제(탄력적 근로시간제)가 도입되면, 노동시간의 제한이라는 것 자체가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이제 자본은 상시고용 하에 두고 있는 노동자일지라도, 필요할 때 원하는만큼 자유자재로 노동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앞서 지적하였듯이 신자유주의의 공세 아래에서 노동시간 단축을 실시한 나라들은 그와 더불어 예외 없이 변형노동시간제를 확대하였다. 그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자본이 노리고 있는 노동유연화의 핵심 사안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변형노동시간제의 확대가 이루어지느냐의 여부는 매우 중요한 문제인데도, 노동계는 이 문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노동조건 개악 없는' 노동시간 단축을 주장하면서도, 선진국이 이미 채택하고 있는 제도인데 뭐가 문제될 게 있느냐는 자본측의 반박에 난처해하며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으로 치부해버리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노동유연화의 본질과 핵심이 무엇인지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의 도입에 도장 찍어주고 나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자본이 왜 그렇게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의 법제화를 원하는지, 그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노동 현실에서 이미 불법적으로 만연해 있는 것인데 정식으로 법제화한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며 안이하게 생각하지 않았던가? 현 시기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정권과 자본이 획책하고 있는 꿍꿍이는 바로 노동유연화의 법제도적 완성이고, 그 핵심은 변형노동시간제의 확대에 있음을 각인하고 그 저지를 위한 투쟁에 나서야 한다.


'노동조건 개악 없는 노동시간 단축', 전술적 슬로건의 문제점

아무리 노동시간 단축의 명분을 설파한다고 할지라도,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창출 또는 일자리 지키기라는 목표로 1998년도에 시작된 노동시간 단축 투쟁은 제대로 평가되어야 한다. 즉, 그 시기에서 구조조정을 반대하고 저지하는 투쟁 전술이었던 것이 아니라 구조조정은 하되 고용안정형으로 구조조정 해줄 것을 요구하는 수세적 전술로 평가해야 한다. 그 후, 이러한 수세적인 고용안정 투쟁이 일정한 한계와 비판에 부딪치게 되고 노동시간 단축을 위해서 필요한 노동법 개정논의에 있어서 그 주도력이 자본과 정권에게 완전히 넘어가게 되었다. 동시에 노동조건의 총체적인 후퇴와 악화라는 그들의 음모가 전면적으로 가시화되자 이제는 '노동조건 개악 없는' 노동시간 단축을 투쟁전술로 삼고 있다.
현재 '노동조건 개악 없는 노동시간 단축'을 전술적 슬로건으로 세우는 방식은, 무엇보다도 먼저 정권과 자본도 노동시간을 단축하겠다고 나서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노동조건의 개악 없는'이라는 조건을 그 앞에 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어떠한 전제조건을 달아야 한다는 것 자체가 특정 시기에 투쟁을 집중시키는 전술적 슬로건으로는 부적절하다. 이러한 오류가 나타난 이유는 정권과 자본도 하겠다고 나서고 있는 노동시간 단축에 여전히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의 노동유연화 전략이 공고한 법제도적인 틀의 구축을 이루느냐 마느냐 하는 중요한 기로에 놓여 있는 현 시기에 있어서, 노동시간 단축은 제대로 된 가치를 가질 수 없다. 노동유연화의 법제도적 완성이 이루어진 후에 주5일 근무로 표출되는 주4시간의 법정노동시간 단축이라는 것을 통해서, 즉 토요일에 일하지 않고 쉴 자유를 통해, 삶의 획기적인 개선을 이룰 수 있는 노동자가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그것은 20대 80의 사회에서 20에 속하고자 하는 상층노동자 일부의 바램에 지나지 않는다. 그 동안 신자유주의의 공세를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면서, 이제는 자본의 노동유연화 전략의 거래수단으로 전락되어 버린 왜곡된 노동시간 단축을 결코 수용할 수 없다. 이것이 안타까운 현실임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즉 현 시기 노동시간 단축은 구조조정을 효과적으로 타격하기 위한 전술도 아니고, 정리해고를 막고 노동자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도 아니다. 다만 노동유연화 전략을 법제도적으로 공고히 하기 위해 필요한 전제조건이라는 자본의 요구로 전환되어 있을 따름이다. '임금 삭감 없는' 또는 '노동조건 개악 없는'이라는 표현 속에서 어떠한 전제조건을 내걸더라도, 노동시간 단축 주장이 현재 신자유주의의 저지를 위해 목숨걸어야 하는 노동자 투쟁의 대안이 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실적으로 부딪치게 되는 또 하나의 문제는 노사정 합의의 틀을 벗어나서는, 노동조건 개악 없는 노동시간 단축을 결코 이루어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민주노총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민주노총이 노사정위원회로 복귀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명분이 필요하다. 그런데 단병호 위원장마저 감옥에 갇히는 마당에 일말의 명분도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다. 그래서 나온 민주노총의 궁여지책이, 노사정위원회 밖에서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노사정 간담회'를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노동시간 단축을 위해서 노사정 3자간의 합의과정에는 참가하겠지만 기존의 노사정위원회로는 못 들어가니 새로운 논의의 틀을 만들어달라는 것이다. 정권과 자본의 입장에서는 생떼쓰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일이다.
설령 정권과 자본이 양보하여 민주노총의 요구를 수용하고 노사정 간담회를 만들면, 그 논의과정에서 민주노총은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가? 노동조건 개악 없이 노동시간 단축을 이루어낼 수 있도록 모든 힘을 쏟겠다는 것인데, 그와 같은 협조와 양보의 틀 내에서 어떤 방법으로 노동조건 개악을 저지하겠다는 것인가? 결국 정권과 자본이 노동시간 단축과 연계하여 노동조건을 개악하려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으면, 투쟁으로 저지하겠다고 협박하는 것 이외에 방법이 없다. "노동조건 개악 없이 노동시간 단축해라, 안 그러면 이번에는 정말로 파업한다, 진짜 총파업한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 말이 정권과 자본에게 위협이 될 수 있을까? 그저 제대로 되지도 않는 총파업하지 않도록 명분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가열찬 투쟁의 전개 속에서 정권과 자본이 협박을 느끼는 것이지, 일단 말로 협박하고 안되면 투쟁하겠다는 소리는 협박도 아니고 투쟁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현 시기 노동시간 단축 투쟁을 내건다는 것은 노사협조주의, 현실타협주의라는 기회주의적이고 개량주의적인 기조가 그 근본바탕에 있을 수밖에 없는 전술 슬로건임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노동조건 개악 없는 노동시간 단축'을 투쟁전술로 배치하는 것은 민주노총이 노사정위원회에 복귀할 것을 줄기차게 요구해 온 노사협조주의라는 개량주의 세력의 입맛에 딱 맞는 것이다. 정권과 자본이 노동시간 단축을 못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노동시간 단축을 하겠다고 나서는 판에, '노동조건 개악 없이' 노동시간 단축을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노사정위가 아니더라도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노사정 3자간의 대화와 협조에 나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노사정 3자 합의방식으로 이루어지는 한, 노동시간 단축의 대가로 노동시장 유연화가 이루어지는 것을 저지할 수는 없다. 현실의 상황은 자본이 원하는 노동유연화를 위한 노동조건의 개악을 받아들일 것이냐, 아니면 노동유연화를 위한 자본의 노동법 개악 시도를 저지할 것이냐, 이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개량주의자들은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명분을 포기할 수 없는 일이라며, 그나마 노동조건 개악의 폭을 줄이기 위해서는 민주노총이 노사정위원회에 들어가야만 한다고 외쳐댔다. 결국 민주노총은 '노동조건 개악 없는 노동시간 단축'을 이루기 위해 노사정 간담회를 요구하고 나서 개량주의 세력에 의해 굴복해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안 그래도 현실타협주의라는 개량주의와의 싸움도 힘든 판에 '노동시간 단축하고 임금 인상하여 경제위기 돌파하자'는 주장이 좌파 내에서 버젓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신자유주의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지 않는 한에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이야기다. 노동시간도 단축하고 임금도 인상하자는 말 자체에 누가 어찌 감히 반박할 수 있겠는가마는, 이러한 이야기는 자본의 평균이윤율 저하를 유효수요 창출을 통해 극복하자는 케인즈주의적 전략과 맥락을 같이 한다. 좌파로 알려져 있는 세력들이 어느 순간에 케인즈주의와 결탁하는 사민주의자가 되었는지 영문을 알기 어렵다. 노동자들에게 노동시간 단축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쟁취해야만 하고 투쟁의 제일 순위에서 내려설 수 없는 절대 선으로 각인되어 있는 것인가?
혹자는 노동운동의 역사는 노동시간 단축 투쟁의 역사라는 말을 하곤 한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획기적으로 이루어진 노동시간 단축 이면의 의미를 잊지 말자. 그것은 국가의 적극적인 복지정책 등을 통하여 노동자들에게 일정한 개량을 약속함으로써 노동운동과 타협을 모색한 케인즈주의적 자본의 전략이었으며, 완전고용·실질임금 상승 등 노동자의 요구를 이러한 자본주의의 번영과 안정을 수용하는 대가로써 달성하고자 하는 사민주의가 결탁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한 타협의 산물 중 하나로 노동시간 단축이 이루어졌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환상으로 좌파마저도 비과학적이고 안이한 정세인식에 매몰되어 버리는 모습에, 이 글을 쓰는 어려움은 더욱 크기만 있다.


신자유주의 저지투쟁의 핵심전선, 비정규직 투쟁에서의 노동시간 단축 문제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의 도입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신자유주의 자본의 노동유연화 전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비정규직을 확대하고 그들의 노동조건을 급격하게 하락시키는 것을 통해 경제위기를 극복하고자 하였으며, 더욱더 열악해지는 노동조건 속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스스로 생존권을 확보하고자 노동조합을 만들고 투쟁에 나서게 되었다. 그런데 종전까지 생존권 쟁취 투쟁의 성격을 띠던 비정규직 투쟁이, 2000년도를 넘기면서 신자유주의 자본의 구조조정에 대항하는 투쟁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조합의 투쟁이다.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들은 민영화의 前단계로 7,000명 계약직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선로 보수와 114 안내 등을 도급으로 전환하는 한국통신 구조조정에 대한 전면 반대를 내걸고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양상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저지 투쟁의 주체로 일어서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땅의 개량주의자들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신자유주의에 본질적으로 맞서 싸우는 주체로 자리매김하는 과정에 주목하지 못한 채, 비정규직 투쟁의 의의와 가치를 폄하하려 는 데에만 몸부림치고 있다. 현 시기에서 '비정규직 철폐'를 주장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이고 비현실적인 좌익소아병주의자들의 발상이라고 매도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법제도 개선을 통해 비정규직과 정규직 사이의 차별을 없애나가는 '차별 철폐'에 주력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올바른 투쟁이라고 설파한다. 이러한 차별 철폐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만으로 이룰 수 없는 정치적 문제이고, 따라서 노사정위에서 대화와 타협으로 개선책을 만드는 것이 현실적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무리들은, 안 그래도 민주노총이 노사협조와 현실타협을 외면하면서 노사정위에 들어가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불만이 팽배해 있다. 노사정위 안에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한 비정규직특위가 구성되었는데도, 여기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이라며, 뻔뻔스럽게도 민주노총이 노사정위에 들어가도록 협박하는 수단으로 비정규직 노동자의 문제를 거론하고 나선다.
우리가 비정규직 철폐를 슬로건으로 외쳐야 하는 이유는 비정규직 문제의 근본원인이 신자유주의 자본의 노동유연화 전략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신자유주의에 반대하여 어떻게 투쟁해야 하는지에 대한 올바른 방향을 피력하기 위함이다. 신자유주의는 비정규직을 다양한 형태로 계속 양산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끊임없이 하락시키고 있다. 즉, 대부분의 노동자들을 비정규직으로 만드는 것 자체가 자본이 노리고 있는 본질적인 목적이다. 따라서 당장 비정규직 노동조건의 개선에만 연연하는 데에 머물러서는 안되고, 왜 자본이 비정규직을 확산하고자 하는지 그 본질을 폭로·선동하여야 한다. 그래서 신자유주의의 저지와 반대를 위해서 궁극적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비정규직 철폐'를 현 시기 당면한 신자유주의와의 싸움에서 가장 핵심적인 전술적 슬로건으로 주장하고 나서야만 한다.
비정규직 '차별 철폐'를 외치는 것은 신자유주의 노동유연화 전략의 본질적인 산물인 비정규직 양산 자체는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신자유주의적 자본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과거 케인즈주의적 자본에 대해 사민주의 입장으로 타협을 모색하여 노동조건의 일정한 개선을 이루었듯이, 신자유주의 아래에서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새로운 타협책을 강구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차별' 철폐라는 논리가 나온다. 이와 같이 '비정규직 철폐'냐 '정규직과의 차별 철폐'냐의 문제는 개량주의자들이 매도하고 있는 것처럼 비현실적인 투쟁을 벌일 것인가, 현실적으로 가능한 투쟁에 주력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이는 결국 신자유주의를 거부하고 저지할 것인가, 아니면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인 것인가의 문제 즉 신자유주의에 대한 분명한 태도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2001년 들어서 전개되고 있는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들과 레미콘 노동자들의 투쟁을 통하여 알 수 있듯이, 현 시기 비정규직 투쟁은 단순히 비정규직이라는 열악한 노동조건을 극복하기 위한 생존권 쟁취 차원의 투쟁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이 투쟁들은 신자유주의적 자본과 정권에 전면적으로 대항하는 투쟁으로서의 성격을 확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비정규직 문제가 노동유연화라는 신자유주의의 본질과 직결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너무나도 당연하다. 그러나 비정규직 투쟁이 신자유주의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투쟁인 한편, 정규직 노동자들이 이 문제를 함께 부여안고 가야만 제대로 된 투쟁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당위적 문제가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만의 싸움으로는 될 수 없고, 정규직과 함께 할 때에만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는 것은 지난했던 비정규직 투쟁의 경험이 온몸으로 우리에게 알려주는 바이다.
그러나 투쟁의 현실은 불행하게도 그렇지 못하다. 정규직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비정규직으로 내몰리고 있는 현실이 두려워 그 현실 자체를 부정하고자 함인지 비정규직 투쟁을 여전히 외면하고 있다.7) 그 이면에 자리매김된 것이 바로 노동시간 단축 투쟁이다. 신자유주의 아래에서 '오늘의 정규직'은 '내일의 비정규직'을 의미할 뿐, 따라서 비정규직 투쟁은 비단 현재의 비정규직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노동자계급 전체의 투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규직은 '노동시간 단축'에 매몰되어 -'매몰되는 척'이라는 표현이 보다 정확할지 모른다- 이러한 투쟁의 현실을 부정하고 있다. 정규직에게는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그것도 노동조건 개악 없이 쟁취해야 할, 매우 힘들고도 중요한 당면 투쟁과제가 있으므로 비정규직 투쟁에 소홀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이해해 달라는 것이다. 그것은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지키기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비정규직은 자신들의 고용유지의 안전판 역할을 하는 것으로 사고하는 것일 뿐이다. 이와 같이 현 시기에 신자유주의 저지 투쟁의 핵심전선으로 구축해야 하는 비정규직 철폐 투쟁을 외면하고, 노동자계급의 통일성 확보를 방해하는 왜곡된 슬로건이라는 점 때문이라도 '노동시간 단축' 슬로건은 이제 정말 깃발을 내려야만 한다.


노동유연화 반대를 전면에 걸고 신자유주의와의 투쟁에 나서야

현 시기 올곧은 정세인식을 통한 투쟁 방향은 무엇인가? 정권과 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맞서서 기회주의와 개량주의 세력들과 확연하게 선을 그을 수 있는 전술적인 슬로건을 내세워야 한다. 노동시간 단축에 집착하여 투쟁을 볼모로 자본 및 정권과의 대화에 나설 것인가, 아니면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자본과 정권이 기만적으로 획책하고 있는 노동유연화 전략의 법제도적 완성이라는 음모의 본질을 폭로해 내고 현실적인 투쟁에 나설 것인가? 그 선택의 기로에서 더 이상 주저하며 방황하고 있을 시간이 남아있지 않다. 더욱이 2000년 연말의 구조조정 저지투쟁의 패배를 딛고 철도와 전력 등 공공부문에서, 다시금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저지 투쟁의 불씨가 지펴지고 있는 지금, 이를 위한 투쟁 전선의 재구축이 시급하게 필요하다. 그리고 비정규직 투쟁과 함께 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의 통일성을 확보해야만 신자유주의 저지를 위한 투쟁전선이 구축될 수 있다.
이 긴박한 상황에서 투쟁을 전개하는 올바른 전술적 슬로건의 기치는 '노동유연화 반대'가 되어야 한다. 비정규직 투쟁국면에서는 비정규직 '철폐'가, 비정규직 양산이라는 신자유주의 노동유연화 전략에 정면으로 맞서는 전술적 슬로건이 된다. 노동시간 단축을 빌미로 이루어지는 노동법 개악을 저지하는 투쟁국면에서는, 노동시간에 대한 탈규제화의 대표적 제도인 '변형노동시간제(탄력적 근로시간제) 확대 반대'를 투쟁구호로 외쳐 법제도적으로 노동유연화를 공고히 하려는 본질을 폭로해야 한다. 이 투쟁들이 노동자계급의 전체적인 목소리로 현실적으로 전개될 때, 자본과 정권이 민영화라는 허울로 마무리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공공부문 구조조정에 있어서도 신자유주의의 본질이 낱낱이 폭로될 것이다. 그 결과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을 저지해 낼 수 있는 투쟁동력을 진정으로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PSSP


1) 다만, ILO의 경우에도 국가 차원에서 강행적인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고용유지 또는 고용창출 정책은 실질적인 고용창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또, 노동자들 사이에도 이해관계가 엇갈릴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는 사실은 언급하고 넘어갈 필요성이 있어 보인다.
2) 프랑스는 정부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입법을 통해 노동시간 단축을 시도한 전형적인 사례이다. 1982년 주 39시간제가 도입된 이후 1993년에 노동시간을 39시간 이하로 단축하기 위한 5개년 계획이 시도되었고 1998년에 드디어 주 35시간 노동의 입법(Aubry법)이 이루어져 2000년부터 실시되고 있다. 프랑스가 국가 주도적으로 법정노동시간 단축을 추진한 것과 달리, 독일은 산업별 단체협약을 통해 노동시간의 단축을 추진하였다. 그 선두에 선 것은 금속노조(IG Metall)였다. 금속산업의 1987년 협약에는 1989년부터 주당 노동시간을 37시간으로, 1990년 협약에서는 주당 노동시간을 1995년부터 주당 35시간으로 단축하는 내용으로 갱신되었다. 벨기에는1983년에서 1986년 사이에 고용창출의 수단으로 임금 삭감과 노동시간 단축을 기본틀로 하는 '3-5-3'플랜이 제시되었다. 이에 의거해 50명 이상을 고용하는 회사는 3%의 임금 삭감과 5%의 노동시간 단축으로 3%의 고용창출을 추진하였다.
3) 벨기에의 경우, 3%의 임금 삭감은 제대로 이루어졌지만 5%의 노동시간 단축은 제대로 지켜지지 못했다. 그리고, 고용창출 효과는 기대치였던 3%의 절반인 1.5%의 수준에 머무른 것으로 나타났다. 독일의 경우,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고용유지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고 있는 폴크스바겐 회사에서는 1만명의 고용유지에 대한 대가로, 노동자들이 16%의 임금 삭감을 받아들여야 했으며 실근로시간은 그다지 줄어들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4) 신자유주의의 핵심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노동력의 유연한 이용을 통한 생산성 향상을 통해서 자본의 위기를 극복해 나가겠다는 것으로, 통상적으로 노동유연화 전략이라고 표현한다.
5) 프랑스, 벨기에, 스웨덴 등 주요 국가에서도 노동시간 단축의 대가로 1년 단위 탄력적 근로시간제의 도입이 이루어졌고, 독일의 경우에는 6개월~ 24주 단위의 탄력적 근로시간제가 실시되고 있다.
6) 변형노동시간제란 1개월 등 일정한 기간을 단위로 그 기간 내의 총노동시간이 그 단위기간으로 평균하여 법정노동시간 이내로 이루어진 경우에는 특정일 또는 특정주의 노동시간이 법정노동시간을 초과하더라도 사용자는 연장수당을 지급하지 않아도 되고 법정노동시간을 초과한 연장노동을 시킨 것에 대한 형사처벌도 받지 않게 되어 사용자로서는 그 단위기간 동안에는 노동시간을 탄력적으로 배치하여 운용하는 것(즉, 생산과정에서 노동강도를 강화할 필요성이 있는 시기에 집중적으로 노동력을 투여하더라도 초과수당을 지급하지 않아도 되고, 노동력 투입의 필요성이 덜한 시기에 휴일을 부여하는 것으로 대체함으로써 특정시기에 있어서 초과노동 사용에 대한 임금비용의 압박을 전혀 받지 않게 된다)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러한 변형노동시간제의 도입은 1997년에 이루어졌는데 근로기준법에서는 '탄력적 근로시간제'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현행법상 탄력적 근로시간제는 그 단위기간을 2주일 또는 1개월이라는 단기간으로 한정하고 있기 때문에 자본의 입장에서는 현행 제도의 활용이 별반 효과를 가져올 수 없는 실정이다. 이에 자본은 탄력적 근로시간제의 단위기간을 6개월 및 1년으로 대폭 늘려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7)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 투쟁과 캐리어 사내하청 노동자 투쟁에서는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투쟁을 철저히 외면하는 차원을 뛰어넘었다. 자본의 편에 서서 오히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짓밟는 비극적인 상황까지 연출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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