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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1.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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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HWP

제국주의 반대와 평화의 경계에서 : 과연 '테러'란 무엇인가

이창근 | 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
[사회진보연대] 편집자로부터 9․11 사건에 대한 원고를 부탁 받고서, ‘우리는 왜 이 사건에 이렇듯 큰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라는 조금은 엉뚱한 생각을 해보았다. 노암 촘스키에 따르면, 9․11은 분명 “역사적인 사건”인데, 그것은 “총구의 방향이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그것이 새로운 것은 ‘희생자의 규모나 방법상의 잔악함’이 아니라, 단지 ‘미국 본토가 공격받았다’는 사실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그 규모와 잔악함으로 따지면, 9․11의 순위는 한참이나 뒤로 밀려나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른 어떤 ‘테러’ 사건보다 9․11에 대해 더 많이 얘기하고, 더 많은 글을 쓰고 있다. 이것도 미 제국주의의 프리미엄인가? 제국주의적 지배-착취구조의 사슬에서 살아가는 제3세계 민중으로서, 그들의 행보를 예의주시 해야만 하는 운명을 받아들이며, 이 글을 시작해보자.

국제적인 ‘반테러리즘’의 물결

국제적으로 ‘반테러리즘’의 물결이 거세다. 드디어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하원과 상원을 거쳐온 ‘반테러법안’을 지난 26일 서명함으로써 최종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연방수사국(FBI)과 경찰 등 수사기관의 권한을 대폭 강화했는데, 통신장비를 이용한 수사기관의 도․감청 권한을 크게 넓혔으며, 유선통신은 물론 구두․전자 통신까지 폭넓게 감청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법원도 미국내에서 어디서나 적용되는 전자감시 수색영장을 발부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테러 활동을 벌인 혐의가 있는 외국인들을 기소하거나 추방하기 전까지 구금할 수 있는 기간도 현재의 48시간에서 최고 7일까지 3.5배나 늘렸으며, 재무장관에게는 미국 은행 계좌를 갖고 있는 외국인에 대한 신분확인 요구권을 주고 미국에서 돈세탁을 한 외국인에 대한 사법관할권을 확대해 테러 관련 돈세탁에 대한 처벌을 강화했다. 이상 한겨레신문, 10월 27일(토) 자(字) 관련기사 인용
또한 미 제국주의와 함께 ‘대테러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영국 정부는 9․11 테러 이후, 신분증 도입을 고려하고 있고, 급진적 반자본주의 활동가들을 이미 ‘테러리즘법 2000’에 의거해 테러리스트로 규정해놓고 있는 상태이다. 인터내셔널뉴스 편집팀, [제국주의자들의 ‘대테러전쟁’ vs. 진보진영의 ‘반테러리즘/반전평화’?], PICIS 「인터내셔널뉴스」 144호, 원문은 http://picis.jinbo.net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일본도 지난 29일 ‘테러대책법’을 통과시켰고, 인도 정부는 유엔 인권위원회에 보고되어 사문화되어 있던 ‘반테러리스트법안’을 되살리려 발버둥치고 있다. 이러한 각국의 ‘반테러리즘’ 분위기는 유엔, 아펙 등 다자기구를 통해 국제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유엔은 테러의 항구적 예방을 위해 모든 회원국은 테러리스트의 자금줄을 봉쇄하는 조치를 취해야 하며, 테러리스트에 대한 직․간접적 재정지원을 형사범으로 규정하는 각국의 입법 조치를 요구하고 있다. 한마디로 모든 회원국에 대해 반테러법의 제정을 요구하고” 위의 글
나섰으며, 얼마전 상하이에서 열린 아펙 정상회담에서도 ‘반테러성명’이 채택되었다. 아펙 정상회담에서 채택된 ‘반테러성명’은―말레이시아, 중국 등의 견제를 받았지만―‘대테러전쟁’의 수행에 있어서 유엔의 역할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테러’는 없고 ‘대테러전쟁’만이 있다!

이처럼 ‘대테러전쟁’, ‘반테러리즘’이 화려하게 치장되고 있지만, 정작 ‘테러리즘’에 대한 정의는 여전히 모호하다. ‘대테러전쟁’에서의 ‘테러’가 무엇을 말하는지 우리는 어떠한 설명을 들은 적이 없다. 단지 우리는 짐작만 할 뿐이다. 그것은 아마도 ‘9․11과 같이 미국 시민들에 대해 폭력․무력을 행사한 행위’를 의미할 것이다. 미국에 의해 저질러지고 지원되어져온 똑같은 행위는 결코 ‘테러’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테러’가 아니라 ‘저강도전쟁’ 등으로 불리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레이건 및 클린턴 행정부 시절, ‘저강도전쟁’이란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테러 행위’가 자행되었는지. 한편, ‘테러․테러리즘’에 대한 규정은 특히 다자간기구 및 포괄적 협정 등에서 합의를 도출해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 모두가 짐작하듯이, 어느 한편에서의 ‘테러리스트’가 다른 쪽에서는 ‘해방과 자유의 전사’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한 예를 들어보자. 1987년 12월, 유엔총회에서는 모든 회원국들은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테러리즘에 맞서 싸울 것을 요구하는 반테러리즘 선언이 채택되었는데, 그 중 단 두 국가만이 그 선언에 반대했다. 항상 그렇듯이 미국과 이스라엘이다. 이는 당시 레이건 행정부가 대외정책의 핵심으로 ‘국제테러리즘과의 전쟁’을 선포한 상황이어서, 이해하기 힘들 수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그 선언에 반대했던 것은 단지 선언문의 한 단락 때문이었다고 한다 유엔에서의 ‘반테러리즘선언’에 관련한 사항은, 노엄 촘스키의 「테러와의 새로운 전쟁」, MIT 강연회 녹취록에서 발췌한 것임. <원문 자료는 http://www.zmag.org>
. 그것은 “이 선언의 어떠한 구절도 인종주의적 식민주의적 체제 혹은 외국 군대에 의한 점령에 맞서, 외부 사람들 및 정당한 목적의 외부 국가들의 지원 속에서, 저항을 지속시키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는 민중의 권리를 침해할 수 없다” “nothing in this resolution infringes on the rights of people struggling against racist and colonialist regimes or foreign military occupation to continue with their resistance with the assistance of others, other states, states outside in their just cause."
라는 부분이었다. 이를 미국과 이스라엘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미국은 인종차별적 정부인 남아공 정부와 공식적인 동맹 관계를 맺고 있었고, 그곳에는 아프리카민족회의(ANC)라는 ‘테러리스트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스라엘은 이미 30여년 동안이나 남의 땅을 점령하고 있었고, 당시에는 특히 레바논 남부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미국이 ‘테러리스트 세력’으로 부르는 헤즈볼라-결국 이들은 이스라엘 군대를 철수시키는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가 이스라엘의 ‘불법적인 영토점령’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었다. 즉, 당시 유엔의 반테러리즘 선언에 따르면 ‘인종주의적 체제’에 맞서 저항하고 있는 아프리카민족회의(ANC)와 ‘불법적인 영토점령’에 맞서서 싸우고 있는 헤즈볼라를 ‘테러리스트 세력’이 아니라 ‘정당한 저항세력’으로 인정할 수 있었기 때문에,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위 사례는 ‘테러리스트’에 대한 포괄적 협정․선언이 사실상 불가능함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결국 헤게모니를 갖고 있는 세력에 의해 규정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다자간 질서 및 포괄적 협상에서 테러리스트에 대한 어떤 공식적인 정의를 사용하자마자, 우리는 전혀 엉뚱한 결론 혹은 아주 잘못된 정치적 결론에 다다르고 말 것이다. 이처럼 정치적으로 전혀 올바르지 못한 결론에 도달할 가능성은 지금도 다분하다. 왜냐하면 현재 국제사회에서 ‘테러리즘’에 대해 논의되고 정의된 적은 한번도 없음에도, 국제적으로는 미․영 제국주의 주도로 ‘반테러리즘’과 ‘대테러전쟁’이 실질적으로 수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어떠한 개념 정의가 있다면, 그것은 미․영 제국주의에 의해 정의된 일방적이고 편협한 것에 불과할 것이다. 7~8백만명의 아프가니스탄 민중들을 아사(餓死)직전으로 내몰고 있고, 무차별 공습으로 무고한 민간인을 살상하는 지금의 아프간 공습이 테러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또한 이라크에 대한 10여년에 걸친 경제봉쇄는 어떤가? 그로 인해 수백만명의 민중, 특히 어린이들이 죽어가고 있다면, 경제봉쇄도 테러행위임은 확실하지 않은가? 재미있는 것은, 미군사교범(US Army manual)에 나와있는 ‘테러’에 대한 정의이다. 그에 따르면 테러는 “정치적, 종교적 이데올로기적 목적을 위해 협박, 강압, 공포의 지속적인 주입을 통한 계산된 폭력의 사용 혹은 위협” “terror is the calculated use of violence or the threat of violence to attain political or religious ideological goals through intimidation, coercion, or instilling fear.”
으로 규정된다. 그들 스스로가 정의해 놓은 테러의 범주에 비춰 볼 때도, 미 제국주의자들의 행위는 충분히 테러리즘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현재의 국제적인 ‘반테러리즘’의 물결 속에 휩싸이는 것은, 자칫 진정한 테러리스트인 미제국주의의 본질을 간과할 수 있는 위험성이 상존해있다고 할 수 있다.

저항의 목소리

9․11 사건 이후, 미국의 대테러전쟁에 대한 저항의 목소리가 높다. 그런데 그 언어와 기조,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유럽과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저항은 “전쟁은 안돼, 평화를 세우자”라는 구호로 상징되는 반전평화 시위의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즉, 9․11과 같은 테러리즘에 대한 퇴치 및 근절은 필수적인데, 그 방법은 ‘전쟁’이 아니라 ‘덜 억압적이고 덜 침략적이며, 보다 정의로운 방식’으로 구현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군사적 대응 혹은 전쟁은 결코 테러리즘을 근절할 수 없으며, ‘평화를 가르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맥락에서, 어떤 사람들은 테러는 전쟁행위가 아니고, 범죄행위이므로 테러리스트는 범죄인을 다루듯이 국제법적인 정당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지난 10월 13일 영국 런던에서 전개된 시위에서, 「핵무장 해제 운동」 의장인 캐롤 노턴이 “폭격은 빈 라덴을 법정에 세우지 못할 것이며, 테러리스트들은 국제법의 절차를 밟아 심판해야 한다”고 말한데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아프간에 보다 ‘민주적인 정부’를 세워서, 빈 라덴을 인도하도록 해야 한다는 소위 말하는 ‘인도주의적 개입’을 주장하기도 한다.

한편 제3세계의 저항은 그 분위기와 기조에 있어서 상당히 차별적이다. 특히 중동을 비롯한 이슬람 국가들에서의 저항은 심상치 않다. 예를 들어, 인도의 인민전쟁그룹(PWG)이라는 단체는 벵골만(灣)에 인접한 남부 안드라 프라데시주(州)에 소재해 있는 코카콜라 제조 공장을 폭파했다. 그리고 그들은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위에 저항하고 진짜 테러리스트를 규탄하기 위한 행동”이라는 메시지를 남겼다.(연합뉴스, 01/10/22) 또한 남미의 해방신학파 가톨릭 주교들 역시 23일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열린 해방신학파 모임에서, ‘정의와 연대, 평화를 위한 모든 민족의 외침’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는데, 이들은 “아프간 공습 등 미국의 보복공격은 정의를 위한 외침이 부당하게 왜곡된 것으로, 민주주의․문명․기독교 문화 등을 표방하는 나라들에 의해 자행되는 또 다른 형태의 테러행위”라고 비난했다.(연합뉴스, 01/10/23) 그리고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의 북부 도시 카노에서는 지난 12일 ‘금요 예배일’에 미국의 아프간 공급에 반대하는 시위와 유혈충돌로 모두 200여명이 희생되었다.

제3세계 민중의 경우, ‘반전․평화’보다는 ‘반미․반제’의 기운이 더 높다. 즉, ‘대테러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주체인 미제국주의에 대한 공격․반대가 주요 기조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미국의 아프간 공습 자체가 ‘테러’이며, 미 제국주의가 ‘가장 흉악한 테러리스트’라 규정짓고 있는 부분이 눈에 띈다. 또한 행동 양식도 결코 평화적이지 않다. 언론에 보도된대로, 투석전 및 총격전까지 불사하고 있다. 또한 태국 이슬람기구위원회(CMOT)가 조직하고 있는 ‘미국 및 그 동맹국 상품에 대한 불매운동’의 방식도 눈에 띈다. 즉, 제3세계 민중은 정면으로 미 제국주의의 테러리스트적 본질에 맞서 저항하고 있다. 이러한 저항을 단지 ‘그들 대부분이 무슬림이니까’라는 종교적인 배경으로 폄하해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미국 자본 주도의 금융세계화 체제로부터 완전히 배제 혹은 주변화 되어 버린 국가의 민중이 겪는 사회․경제적 고통을 배제한 채, 지금의 저항을 설명할 수는 없다. 그것의 촉발이 비록 ‘종교적인 이유’였다 하더라도 말이다.

문제설정의 차이 - ‘반전․평화’와 ‘반미․반제’

이처럼 ‘전쟁 반대․평화실현’과 ‘미국 및 제국주의 반대’ 사이에는 9․11 사건 및 미․영 제국주의의 아프간 공습에 대한 규정과 대응에 있어서 상당한 간극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유럽 및 미국의 ‘반전평화’ 운동 세력들은 ‘전쟁이라는 행위 자체’에 대한 반대에 주안점을 두는 반면, 제3세계 민중의 경우는 ‘반전을 포함하고 있지만, 핵심적으로는 반미․반제’ 즉 ‘행위의 주체’에 대한 타격을 목표로 하고 있다. 주류 언론에서도 유럽 및 미국에서의 시위는 ‘반전’ 시위로, 제3세계의 시위는 ‘반미’시위로 다루는 것도 여기에서 연유할 것이다.

이러한 차이의 근원에는 물론 다양한 이데올로기적․정치적․지정학적․종교적 맥락이 개입되어 있음은 확실하다. 따라서 그 차별성의 배경을 선험적으로 단정지을 수는 없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양자(兩者)간 문제설정의 차이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제3세계 민중들은 ‘현재의 아프간 공습 자체, 나아가 이라크에 대한 경제봉쇄’도 하나의 ‘테러’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미 제국주의야말로 ‘진짜 테러리스트’라고 규정하면서 정면에서 공세적으로 저항하고 있는 것에 비해, 유럽 및 미국내 ‘반전평화’ 운동 세력들의 문제의식은 ‘방어적’일 뿐만 아니라, 자칫 본질적 대립구도를 왜곡시킬 우려까지 자아내고 있다. 유럽과 미국내 좌파세력들의 문제설정의 오류와 문제점에 대해서는, 에드워드 S. 허먼(Edward S. Herman)과 데이비드 페터슨(David Peterson)이 공동 작성한 「누가 누구를 테러하고 있는가?(Who Terrorizes Whom?)」의 문제제기에서 많은 도움을 얻었다. 원문은 http://www.zmag.org에서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첫 번째로, 유럽 및 미국의 반전평화 운동세력은 ‘미국은 시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테러리즘에 맞서 싸우고 있고, 테러리즘에 의해 희생당한 국가’라는 지배엘리트의 문제 설정과 개념 규정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전제를 인정하면, 사회운동진영에게는 “지배엘리트들에 의해 정의된 테러리즘에 맞서 싸우는 것은 시민의 안전을 위해 필연적인데, 그것은 폭력적․침략적이지 않은 보다 정의로운 방식으로 수행되어야 한다”는 부수적인 문제설정만이 남는다. 즉, 테러에 의해 희생당한 미국이 테러리스트 근절을 목표로 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그 방법론에 있어서는 의견을 달리한다는 문제설정이다. 하지만 이러한 부수적인 문제설정 속에서 사회운동 세력이 움직일 때, 우리는 보다 본질적인 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된다. 그것은 “테러리즘을 옹호하고, 테러를 자행해왔으며, 테러리스트들을 훈련시켜왔던” ‘진짜 수퍼테러리스트’인 미 제국주의의 본질을 폭로하고 대중을 교육․조직할 수 있는 계기를 놓치고 있다는 의미이다.

두 번째로, 테러리즘은 악이므로 그것의 근절 필요성은 인정하되, 그 방법론을 둘러싸고 투쟁하는 전술은 다분히 ‘실용주의적’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실용주의적’ 전술은 국내외를 포함하여 전세계 진보적 노동․사회운동진영의 ‘반테러리즘’ 선언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진보진영의 ‘반테러리즘 선언’은 지금까지 노동․사회운동 진영이 쟁취해온 정치적 성과물을 ‘무고한 시민을 학살한 테러리스트들’과 차별화시켜, 최소한이나마 방어해낼 절박한 필요성과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 지배엘리트들에 의해 규정된 테러․테러리즘에 포섭된 대중들에 정면으로 맞서서는 그들을 설득하기 힘들 것이라는 정치적 판단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즉, ‘우리들의 정부가 진짜 테러리스트이며, 지금까지 숱한 테러행위를 자행해왔다’고 얘기하면서, 대중들을 교육하고 조직하는 것은 효율적․실용적이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용주의적’으로 지배 엘리트들이 정의해 준 전제적인 문제설정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의 급진화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술은 비록 대중들이 극단적으로 흐르는 경향을 제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이익은 있겠지만, 장기적인 차원에서 사회변화를 위한 계급역관계를 역전시키는데는 별다른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 제국주의적 본질을 정확히 꽤 뚫고, 그에 맞선 저항이 조직되지 않는 한, 현재의 계급 역관계 및 사회․경제적 조건은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진보진영의 반테러리즘 선언은 “테러리즘에 대한 정의 자체가 불분명한 상태에서, 테러리즘에 대한 반대는 모든 형태의 폭력에 대한 반대와 동일시되어, 자신의 삶과 생존을 위해 국가의 폭력에 맞서 억압받는 민중들이 최후의 수단으로 기댈 수밖에 없는 방어적 폭력까지도 부정하게” 인터내셔널뉴스 편집팀, [제국주의자들의 ‘대테러전쟁’ vs. 진보진영의 ‘반테러리즘/반전평화’?], PICIS 「인터내셔널뉴스」 144호, 원문은 http://picis.jinbo.net에서 볼 수 있다.
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또한, 이탈리아 수상 실비오 베를루스쿠니의 “이슬람․테러리스트 그리고 지구적 자본주의 반대자들은 모두 똑같이 ‘문명의 가치’를 위한 ‘서구 십자군’의 공격 목표”라는 발언에서 확인되듯이, 반자본주의․반신자유주의 투쟁을 억압하는 영구적인 수단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많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다면화되고 있는 ‘대테러전쟁’과 우리의 대응

‘대테러전쟁’은 다차원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아프간에 대한 공습만이 ‘대테러전쟁’의 모든 것은 아니다. 부시 미국 대통령은 지난 26일 미국의 적들은 종교,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다원적 자유와 개방을 두려워하는 자들이라고 지목하면서,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는 다양한 전선이 형성되고 있으며, 그 같은 전선 중 하나가 경제라고 밝혔다. 그는 이어서 또 다른 대테러전선인 경제전선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경기부양을 위한 세제감면’ 방안, ‘교역확대와 개방경제를 위한 대통령에 대한 신속무역협상권 부여’ 등이 시급히 처리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9․11 이후 국제질서도 ‘대테러전쟁’이란 명분아래 작동하고 있다. 아펙 정상회담에서, 부시는 “9․11 테러범들은 위대한 경제의 상징물 두 곳을 공격함으로써 세계경제체제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려 했지만 실패했다”고 지적하면서, 시장경제체제의 유지와 지속적인 자유화․개방화 등을 강조했다. 그리고 아펙 정상들은 카타르 WTO 각료회의에서 뉴라운드를 연내에 출범시킬 것을 합의했다. 이러한 상황은 미국의 대테러전쟁이 결코 아프간 공습으로 한정되지 않고, 다차원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난 10월 20일 서울에서 조직된 「전쟁반대․평화실현․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범국민대회」는 9․11 사건과 미․영 제국주의에 의한 아프간 공습에 대한 한국 노동․사회운동 세력의 다층적 문제의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미 제국주의에 의한 정치․군사적 종속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제기해온 국내의 반미투쟁과 1997년 경제위기 이후 활발하게 전개되어온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투쟁, 그리고 NGO 중심의 ‘교과서적인’ 평화운동 세력이 다층적으로 결합된 집회였다. 비록 기계적인 결합의 한계를 극복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미․영 제국주의의 ‘대테러전쟁’의 본질과 제국주의에 의해 자행된 역사적․현재적 ‘테러 행위’를 비난하는 내용이 중심 기조였다는 점에서, 제3세계 민중들과의 연대를 강화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국내 노동․사회운동세력이 어떻게 민족주의적 시각을 극복하고, 국제주의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반미․반제투쟁과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투쟁을 결합시킬것인가는 여전히 남는 문제이며, 관건적인 문제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그동안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투쟁의 정치적 성과를 보전하면서도, 현재 진행되고 있는 미 제국주의의 ‘테러행위’에 맞선 세계 민중들의 저항을 국제적으로 수렴하는 데 일조해야 할 것이다.
주제어
평화 국제
태그
신자유주의 공공 공공운수 의정포럼 야권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