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1.11.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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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길.HWP

발길 닿는 대로 가다보면....

류미경 | 집행위원, 국민행동 사무국
얼마 전 나는 제3세계 외채 거부운동 네트워크인 주빌리 사우스(Jubilee South) 아시아 태평양 지역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홍콩에 갔었다. 올해와 같이 1월말-2월 초에 브라질 포토 알레그레에서 내년에도 열리게 될 세계사회포럼(World Social Forum)의 한 프로그램에 대한 준비계획과,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의 외채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맞선 투쟁을 어떻게 전개할 것인가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말을 주고받는 것이 쉽지 않은데 회의 일정은 빡빡하고, 게다가 위장병까지 가져오는 바람에 하루하루 지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던 끝에, 뜻하지 않은 행운을 얻게 되었다. 마지막날 예정되어 있던 일정이 취소되는 바람에, 모처럼의 여유를 만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위장병 덕분에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게 되어 몇 푼의 여유 돈(?)도 생겼다.

높다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고, 볼 위를 내리쬐는 따스한 햇살과 이를 흐트러뜨리는 상큼한 바람이 느껴지는 가을이 되면, 하던 일을 훌훌 털어 버리고 어딘 가로 훌쩍 떠나기를 꿈꾼다. 익숙하지 않은 곳이면 더욱 좋을 것 같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발 길 닿는 대로 흘러가다, 색다른 풍경을 마주하는 감동은 더없이 신선할 것만 같다. 그러나, 그런 낭만을 만끽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무작정 길을 나서 발길 닿는 대로 걸어서 다다를 수 있는 곳이라면, 그리 낮선 곳이 아닐 것이리라. 지구는 어렵지 않게 갈 수 있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으로 구획되어 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펼쳐든 전단을 보니 몇 군데 볼만한 곳을 찾아가는 일은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일단 처음에 갈 곳을 정하고 나서기로 마음을 먹었다. 짐을 꾸리고, 몇 가지 일들을 처리하고, 몇 군데 전화를 하고, 짐을 맡겨두고 숙소를 나서니 시간은 훌쩍 지나 점심시간이 되어버렸다. 이제 나에게 남은 시간은 8시간. 마음은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MTR이라 불리는 지하철을 타고 구룡반도에서 가장 이것저것 볼거리가 많다는 침사 추이로 향했다. 낮선 곳에서 만끽하게 될 신선한 감동을 기대하며 발길 닿는 대로 무작정 열심히 걸었다. 그러나 웬걸... 2층 버스가 지나다니는 걸 제외하면 새로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걸으면서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주욱 늘어선 상점들이었다. 익숙한 브랜드의 옷가게들, 패스트푸드점, 액세서리 점…. 지도 위에 숱하게 있던 ○○中心은 모조리 쇼핑센터였다. 미국의 보복전쟁으로 인하여 부쩍 주목을 받고 있는 이슬람 사원에서 잠시 눈을 쉬고 발걸음을 다시 재촉했다. 또 한번 수많은 中心과 편의점, 패스트푸드점을 지나쳐 그 유명한 해변 가의 산책로에 이르렀다. 바다 바람이 제법 쌀쌀하게 느껴지는 산책로를 여유롭게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니 오른쪽으로는 관광객들을 기다리는 높다란 호텔이며, 백화점들이 줄을 이루고 있고, 왼쪽으로는 저녁햇살을 담은 빅토리아항구 건너편에 주욱 늘어선 삼성, LG 등의 각종 초국적 기업 간판이 번쩍이고 있었다. 지하철역에서 출발해 홍콩 섬으로 건너갈 수 있는 스타페리 호를 탈 수 있는 선착장까지 가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였다. 걷거나 무엇을 사거나.

홍콩 섬으로 건너왔다. 벌써 어둑어둑해졌다. 홍콩 상하이은행, 방콕 은행 등 높다란 건물과 더욱 화려한 백화점들이 빼곡이 들어선 이곳은 구룡반도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내가 묵었던 숙소 주변에 가득하던, 한자로 쓰여진 지저분한 간판들은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제 홍콩 섬, 구룡반도, 신계의 야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는 빅토리아 피크로 갈 수 있단다. 1층 버스 위에 의자만 놓여진 뚜껑 없는 2층 버스를 타고 피크로 오르는 트램(전차)을 탈 수 있는 곳으로 갔다. 버스에는 이어폰을 꼽고 가이드의 안내를 듣는 한 무리의 영국인 관광객들이 함께 탔다. 그들을 따르면 길을 헤매지 않고 무사히 피크트램에 올라탈 수 있을 것 같았다. 과연 그랬다. 트램을 내려서 자연스레 발이 향하는 곳으로 가다보니 어느새 한 종업원이 자리를 안내하고, 무슨 종이를 갖다주며 음식을 가져올 때마다 그곳에 도장을 받으라고 설명한다. 이상하다. 분명 야경을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가 나와야 할 텐데, 왜 나는 식당 안에 앉게 되었단 말인가? 아무것도 먹지 않고 그냥 나오기는 왜 이렇게 민망한지…. 암튼 가장 싼 샐러드를 하나 먹고 재빨리 나와 왔던 곳을 다시 거슬러 가보니, 트램에서 내린 곳은 ‘빅토리아 타워’라는 건물 안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제부터 또 그 건물 밖으로 나가는 출구를 찾기 전까지 눈을 사로잡는 각종의 상품들을 맞딱드려야만 했다. 여기서 할 수 있는 일도 두 가지였다. 무엇을 사거나, 아니면 그냥 지나치거나.

낯설고 아름다운 경관에 감탄할 그런 곳을 마주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는 순전히 나의 바램이었다. 무엇을 사야한다고 강요받지 않고 고요히 사색에 잠길 수 있는 그런 곳은 철저한 계획 하에 가지 않으면 쉽게 다다를 수 없었다. 어느덧 면세점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공항으로 향해야 하는 시간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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