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1.12.21호
첨부파일
.hwp

라틴 아메리카의 더러운 전쟁 30년 : 콘도르 작전에 대한 개관

피에르 아브라모비치 | Pierre Abramovici
번역 : 장한일 (한반도팀)



<공동 방어를 위하여!>(For the Common Defense!)는 MGM의 “Crime Does Not Pay”라는 준-다큐멘터리 시리즈 중 하나였다. 이 영화는 칠레 정보국(Chilean Intelligence Service)의 까스띨로(Senor Castillo)를 모델로 1942년에 제작되어, 영화광에게 칠레가 서구 민주 국가의 일부로서 독재와 국가를 위협하는 외세에 맞서 싸웠다는 확신을 심어준다. 영화에서 까스틸로는, 험난한 투쟁의 가장 중요한 무기는 아메리카 대륙 전역에 걸친 경찰의 협력이라고 말한다.
FBI가 격찬한 이 영화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벌어진 나치 스파이의 공격에 대항하여 아메리카 대륙의 경찰과 정보국 사이의 협력을 묘사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1970년대와 80년대 라틴 아메리카의 독재 세력이 국제 공산주의라는 새로운 적에 대항하여, 대륙 차원의 탄압 열풍을 불러일으킨 '콘도르 작전(Operation Condor)'의 맹아가 존재한다.
콘도르 작전의 세부내용은 1992년 12월 처음 공개되었다. 이는 파라과이의 수도 아순시온에서 15마일 떨어진 람바레의 경찰서에서 발견되었다. 그곳은 수 톤에 달하는 스토에스네르(Stoessner) 독재 때 문서가 있었기 때문에, 이른바 ‘테러 기록 보관소’라는 이름이 붙게 된 곳이다. 그 문서의 내용은 지난 11월에 공개된 CIA의 기밀문서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미국 정부는 남미의 군 통수권자들에게 1945년 2월 멕시코시티에 있는 차풀테펙 성(城)에서 열린 ‘전쟁과 평화의 문제’라는 주제로 범아메리카적인 회의를 열고,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해 경고하기 시작했다. 1951년에는 상호간의 군사 지원 조약을 체결했다. 그 조약은 미국 군대의 지원과 라틴 아메리카 지역에 대한 투자 문제를 담고 있다. 또한, 미국의 군사 고문의 파견과 라틴 아메리카의 관료의 미국 교육, 그리고 파나마 카날 지역에 있는 미국의 군사학교에서의 교육을 담고 있다.

파나마 카날 지역의 아메리카 국가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대륙적” 방어를 위한 움직임은 1959년 카스트로의 혁명 역주 - 1953년 7월 26일 카스트로의 주도하에서 몬카다병영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지면서 게릴라전을 포함하는 권력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노선을 가진 ꡐ7월 26일 운동ꡑ이 결성되었다. 1956년 12월 2일 그란마호로 상륙한 후 카스트로, 체 게바라 등의 17명이 시에라마에스트라에서 출발한 게릴라운동은 1959년 1월 1일 바티스타정권을 축출하고 민주주의혁명을 이루게 되었다. 초기에는 토지개혁 등 민주주의혁명의 성격을 띠었으나, 1960년 후반 이후부터는 사회주의혁명으로 이행하기 시작하였다. 1961년 1월 미국과 국교를 단절하고, 이어 미국기업의 국유화와 농업의 집단화를 단행하였다. 4월 16일 카스트로가 혁명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선언함으로써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하였다.
이 성공한 이후 더욱 가속화되었다. 다음 해, 미국 남부 최고 지휘관 보가르트(Theodore F. Bogart) 장군은 카날 지역에 있는 그의 본부에서 공동 관심사를 논의하기 위한 ‘친선회담’에 라틴 아메리카의 관련 인물을 초대했다. 회담 결과, 매년 아메리카군사회의(Conference of American Armies, CAA)를 열기로 하고, 파나마의 아마도르항구에서 처음으로 열렸다. 1964년 회담장소는 웨스트 포인트(West Point) 역주 - 원래 웨스트포인트는 미국 뉴욕주(州) 남동쪽에 있는 도시의 이름이지만, 이곳에 미국의 육군사관학교가 소재하고 있는 데에서 일반적으로 미국 육군사관학교의 대명사로 쓰이고 있다.
로 바뀌었고, 1965년부터는 2년마다 열리게 되었다. 편집광적, 냉전적 사고방식의 증상이 엿보이는 웨스트 포인트 비밀 회담은 미래의 콘도르 작전의 심장부였다.

정보 공유(Sharing intelligence)

라틴 아메리카의 군 지휘자들은 각 국의 정보국을 연결시키는 네트워크 설립에 관심을 두었다. 두 번째 CAA에서 정보와 지식을 교환하기 위한 기구를 파나마 카날 지역에 창설하기로 했다. 그 결과 대륙 차원의 연락망이 구축되었고, 아르헨티나와 파라과이,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파라과이와 볼리비아, 그리고 그 밖의 나라들 사이에서 상호간 일급 정보의 교환을 위한 회의가 열렸다.
이 나라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자료는 아그레밀(Agremil)이라고 알려진 군사 네트워크를 통해서 축적되었다. 정보는 대부분 군정보국(military intelligence service, G-2)에 의해서 공급되었고, 다른 것들은 비밀 경찰이나 Organismo Coordinador de Operaciones Antisubversivas(Ocoa)같은 암흑 조직 또는 주로 아르헨티나 지역에서의 심문과 고문 그리고 처형을 수행했던 우루과이 암살단(death squad)에 의해서 공급되었다.
1973년 9월 3일 카라카스에서 열린 CAA 10차 회의에서 브라질 군대의 통수권자인 포르테스 장군(Breno Borges Fortes)은, 공산주의에 대항한 투쟁이 각 개별 국가의 군사력으로는 전적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점에 동의했다. 이들은 “유일한 효과적인 방법은 필요할 때에 경험과 정보를 교환하고 기술적인 지원을 하는 것”이라며 단체 행동에 대해 합의했다. 이 기반 하에서 CAA는 테러리즘에 맞서고 각 국가에서의 국가전복의 요소를 통제하기 위한 정보 교환을 강화하기로 결정했다.
후안 페론(Juan D. Peron) 역주 - 이탈리아계(系) 이민자의 아들로 부에노스아이레스주(州) 남부에서 태어났고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1930년 일리고이엔 타도의 군부쿠데타에 참가하였고, 1943년의 쿠데타에서는 통일장교단(GOU)의 리더로 쿠데타를 주도하고 정계에 진출하였다. 1944년 파레르 군사정권하에서 부통령으로 재임하였고, 육군장관 겸 노동장관이 되어 노동조건의 개선과 임금인상으로 노동자의 인기를 독점하였다. 그에게 반대하는 세력으로부터 사임을 강요당하고 체포되었으나, 오히려 노동대중의 지지를 얻어, 1946년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국가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 언론․보도의 자유를 탄압하고, 외국자본의 배제와 산업의 국유화를 단행하였으며, 1949년 헌법을 개정하고 1951년 재선되어 독재정치를 행하였다. 1952년 부인 에바의 사후에 급격히 단행하였던 모든 개혁의 파탄이 차차 표면화되고, 1955년 교회억압을 계기로 하여 가톨릭교도와 군부의 지지를 잃게 되어, 9월 군사혁명으로 국외로 추방되었다. 그러나 망명 중에도 그의 내셔널리즘과 노동자정책 등에 대한 국민의 추억이 끈질기게 작용하여, 1973년 9월 대통령선거에 부통령후보인 이사벨 부인과 함께 기적의 부활을 이룩하였으나 1974년 7월 세상을 떠났다.
이 1973년 재집권에 성공한 시기부터 1976년 반란 역주 -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이자 남편인 후안 페론이 사망하고 나서 대통령이 된 그의 아내 이사벨 페론은 1976년 군부의 쿠데타로 권력에서 밀려나게 된다.
이 일어나기까지, 남미 대부분은 점진적으로 브라질의 모델에 따라 군정 통치 아래로 들어갔다. 그 때, 아르헨티나는 “신기한” 이행기를 거치며 살아남았다. 경찰과 무장군대는 점차적으로 탄압의 강도를 높여갔고 아르헨티나 반공주의자 동맹 같은 암살단(death squad)의 설립을 승인했다. 그러나, 동시에 아르헨티나는 남아메리카 남쪽 뿔 지역 국가 중에서 정치적 사회적 탄압으로부터 칠레와 우루과이의 희생자들이 피난할 수 있는 유일한 지역이기도 했다.
1974년의 3월 칠레와 우루과이 그리고 볼리비아 경찰 수뇌부들은 아르헨티나 연방 경찰의 2인자인 빌라르(Alberto Vilar)를 만났다. 아르헨티나에는 수 천명의 정치 망명객이 있었는데, 경찰 수뇌들은 이를 체제 전복의 온상으로 보았고, 이를 파괴할 협력 방법을 모색하기 위한 만남을 가졌다. 칠레 측 대표는 경찰관이나 군인이 모든 대사관에 각 국 보안국과 경찰 사이의 협조를 조율하기 위한 보안 요원으로서 파견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동시에 그는 개별 맑시스트에 대한 정보와 프로그램의 교환 그리고 정치인들에 대한 정보 교환을 위해 정보 센터 설립을 제안했다. 게다가 그는 “우리는 볼리비아와 칠레 그리고 아르헨티나의 국경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어야 하며, 관계기관의 허가 없이도 세 나라 모두에서 임무수행이 가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빌라르는 아르헨티나 연방 경찰의 대외 업무국이 이 국가들이 원하는 형태로 피난민들을 처리하겠다고 약속했다. 1974년, 8월 특별히 볼리비아인의 것으로 보이는 외국 피난민들의 시체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9월 30일, CIA요원(혹은 전 요원이거나) 마이클 타운리가 이끄는 칠레 게릴라 부대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설치한 폭탄에 의해 대중통합정부(the Popular Unity governmnet)에서 칠레 군대의 책임자이며 최일선에서 피노체트 역주 - 발파라이소 출생.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 부교장을 지냈다. 1956년 미국 주재 대사관 무관에 이어 제6사단장, 1969년 육군참모장, 1973년 8월 대장으로 육군총사령관이 되었다. 9월 육군․해군․공군 및 경찰군 총사령관으로 군사평의회를 결성, 쿠데타를 일으켜 아옌데 정권을 전복하고 군사평의회 의장에 취임하였다. 1974년 12월 대통령에 취임하고 1980년 9월 국민투표로 장기집권을 노린 신헌법을 성립시켜 1981년 3월 신헌법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후 계속되는 국민들의 민주화요구에 저항하며 폭압적인 독재정권을 유지하다가 1988년 10월 대통령 집권연장찬반투표에서 패배하여 1989년 12월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를 반대하던 프라츠(Carlos Prats)장군이 살해되었다.
경찰과 군부대는 마음대로 국경을 넘나들었다. 1975년의 3월과 4월, 24명 이상의 우루과이 사람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경찰 관계자에 의해서 체포되었다. 이들은 아르헨티나 경찰서에서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경찰 관계자에게 합동으로 심문 받았다. 아르헨티나 군인인 아라르콘이 파라과이 국경에서 파라과이 경찰에 의해서 체포되었다. 1991년 2월 8일, 에일윈(Patricio Aylwin)에 제출된 보고서에 의하면, ‘신뢰와 협력을 위한 칠레 국민위원회’의 설립에 따라, 아라르콘은 파라과이 경찰과 아르헨티나 정보관료들에 의해 심문 받았다. 뿐만 아니라, 칠레의 국가정보이사회 (National Intelligence Directorate, Dina)에 정보를 제공해온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미국 대사관 관리에게도 심문 받았다.

국가 안의 국가(State within a state)

그 동안 칠레는 자국의 탄압 시스템에 최후의 손길을 더했다. 미국 대통령 리차드 닉슨과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에게 직접적인 책임이 있던 1973년 9월 11일의 반란 후에, 피노체트는 콘트레라스(Manuel Contreras) 장군에게 공산주의라는 암을 뿌리뽑을 수 있도록 막강한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디나(Dina), 칠레 국가정보이사회는 곧 국가 안의 국가가 되었다.
특히 칠레는 해외의 수많은 반대자의 존재 때문에 독재체제를 강화하였다. 프라츠 장군을 살해하는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1975년 2월에는 추방된 칠레 사회주의당과 공산당 지도자인 알태미라노(Carlos Altamirano)와 테이텔보임(Volodia Teitelboim)을 고용된 반 카스트로 쿠바인들이 암살하는데 실패했다. 4월 초, 콘트레라스는 남미 국가의 수도를 방문해서 망명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보안국을 설득하고 나섰다. 8월 25일, 그는 워싱턴에 있는 CIA본부를 방문했고, 라틴 아메리카 지역 책임자인 월터스(Vernon Walters)를 만났다.
이틀 후, 그는 카라카스에서 베네주엘라 정보국의 지원 책임자인 바스께즈(Rafael Rivas Vasquez)를 만났다.: “그는 해외에 있는 모든 칠레 대사관에 정보 요원을 배치하길 원했다. 만약 필요하다면, 정보 요원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대사관 직원을 이미 훈련시키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라틴 아메리카 국가의 정보국(intelligence service) 지원을 획득하는데 있어서, 이미 수 차례 방문을 통해 성공했다고 말했다. 모든 것은 기록하지 않은 합의였다”고 설명했다 Orlando Letelier 살해에 대한 재판 동안 워싱턴 법정에 1979년 6월 29일 제출된 증언.
. 리바스에 따르면 베네주엘라 정부는 베네주엘라의 정보국 책임자에게(Disip) 콘트레라스의 제안을 거부할 것을 명령했다. 이것은 유일한 거절이었다. 다른 모든 나라는 이에 동의했다.
동시에 칠레는 이탈리아 지역의 우익 테러 조직을 기반으로 유럽에 반 국가전복 협조망을 구축하려 했다. 독일 연방정부의 무장 보호 아래서 살고 있는 알타미라노(Carlos Altamirano)를 제거하는데 실패하자, 암살자들은 관심을 전 칠레 부통령이자 기독교 민주당의 설립자인 레기그톤(Bernardo Legighton)에게 돌렸다. 1975년 10월 6일, 레기그톤과 그의 아내는 로마에서 파시스트 저격대의 공격을 받았다. 그들은 저격으로부터 살아남았으나, 그의 아내는 영원히 마비상태로 남게 되었다. 이러한 실패에도 피노체트는 치아이(Stefano Delle Chiaie)라는 이탈리아 게릴라 조직 지도자와 회담을 가졌다.
1975년 10월 19일부터 26일까지 몬테비데오 회담에서, CAA는 콘트레라스에 의해 준비된 국가 정보국 운영회의를 열기로 했다. 그것은 11월 25일부터 12월 1일까지 칠레의 산티아고에서 열렸으며, 1급 비밀이었다. 콘트레라스의 주된 제안은 파리에 있는 국제 경찰의 정보 센터처럼, 그러나 국가전복과 같은 사안에 집중한 대륙적인 정보 센터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콘도르 작전의 맹아를 만들어내는데 있어서 이것은 칠레인의 중요한 기여였다.
1976년까지 콘도르 작전에 대해 알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CIA에 따르면 이러한 그들의 주장이 사실인지 거짓인지간에, 2000년 9월 19일 미국 의회에 제출된 비밀 해제 문서에 따르면 콘트레아스가 1974년부터 1977년까지 CIA의 정보 제공자였으며 1975년까지 돈을 지불 받은 기록이 남아있다.(CIA는 실수라도 주장하지만)
, 칠레와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등 3개국이 참가했다. 그리고 이 모임은 유럽에 망명해서 살고 있는 최고 수준의 국가전복 활동가를 암살하는 문제로 확장되었다. 수 년 동안은 정보를 상호 교환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럼에도 콘도르 작전의 일급 비밀 제 3단계는 회원국으로 구성된 특별 팀이 국가전복 활동가와 동조자에 대한 암살 훈련을 명시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어떤 회원국이 암살 대상을 확인했을 때, 특별 팀은 이들의 위치를 확보하고 감시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 즈음 저격부대는 해체되었다. 콘도르 작전의 회원국은 특별 팀의 신분을 위장해서 보냈고, 바로 이렇게 위장된 사람으로 특별 팀이 구성되었다.
CIA는 특별 팀이 설치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제 3단계를 위한 콘도르 작전 본부가 있다고 말했다. 라틴 아메리카 남부 지역 국가의 상호 협력이 지속되는 동안, CAA의 후원아래 이런 시도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1976년에는 많은 콘도르 회담이 열렸다. 그 회담에는 CAA 상호 회담에 참가한 똑같은 인물이 참가했다. CIA에 따르면, 정보국과 안보국 사이의 다양한 협력이 오랜 기간동안 지속되었음에도, 1976년 칠레 산티아고의 콘도르 회담에서야 정형화되었다고 한다. 칠레의 산티아고 회담은 정보교환을 넘어서 참가국 사이의 장기적인 협력이 핵심 논의 주제였다
할 수 있는 한 어디로든지 피난을 가야만 했던 정치적 반대세력에게 그 해는 불운한 해였다. 무장한 테러리스트들을 공격한다는 명분 아래, 살인자들은 국경을 건너는 사람 누구든지 임의로 쏴 죽였다. 죽거나 실종된 정치적 반대자의 수는 계속 증가하고 있었다. 6월 8일에 있었던 산티아고의 친선 회담 과정에서, 키신저는 피노체트에게 “미국의 국민은 진심으로 당신을 후원할 것이며 당신이 하는 일마다 성공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1999년 2월 28일, El Pais에 인용된 비밀 해제 문서에서.


콘도르처럼 날기(Flying like a condor)

그러나 이러한 탄압 행위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콘도르 작전의 존재를 더 이상 숨기기 어려웠다. 결국 콘트레라스의 특정 목표를 대상으로 한 암살 정책은 현실화 하였다. 1976년 9월 21일, 그는 칠레의 전 외무부 장관 레뗄리에르(Olando Letelier)를 위싱턴에서 살해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실수였다. 미국은 이에 대해 책임을 묻기로 결정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FBI의 고위 관료는 콘도르 작전의 제 3국면에 대해 특별 보고문을 작성했고, 이것은 미국의 언론으로 흘러 들어갔다. 신속하게 의회 조사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칠레는 DINA를 해산하고, 다른 형태의 조직으로 교체했다. 콘트레라스는 사라졌다.
미국의 대통령으로 새로 뽑힌 지미 카터는 인권을 그의 주요 정책적 과제로 결정했다. 그는 콘도르 작전과 같은 것을 지원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최소한 그는 미국이 참가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카터 행정부는 라틴 아메리카 국가에게 콘도르 작전을 그만두라는 압력을 넣었다고 알려져 있다.
1976년 12월 13일부터 15일까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콘도르 작전의 모든 회원국 대표가 새로운 상황에서 미래의 계획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모였다. 3월 23일의 전복 이후, 야만적인 방법에 있어서 다른 모든 독재국가를 능가하는 아르헨티나는 문제 해결에 착수했다. 아르헨티나는 파라과이의 도움으로, 세계 반공산주의 동맹(WACL)의 한 갈래인 라틴 아메리카 반공산주의 동맹(CAL) 속에서 반 국가전복 작전을 위한 세심하고 안전한 방법을 추구했다.
CAL은 1977년 3월 아순시욘에서 3번째 회담을 가졌다. 그 회의에는 구스타포 라이히(Gustavo Leigh) 장군 같은 독재정권의 고위관료가 참가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새로운 민주주의를 재건하려는 미국의 신전략이었으며, 중앙 아메리카에서 게릴라 운동의 확장, 그리고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한 부분으로 드러난 카톨릭 교회의 등이 핵심의제였다.
볼리비아 대표는 볼리비아 독재자의 이름을 딴 계획을 제출했는데, 이것이 채택되었다. 계획의 목적은 자유주의적 인사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반제르(Banzer)계획에 의해 산살바도르에 사는 오스카 로메오 대주교 살해 사건 역주 - 1980년 3월 24일 군사독재에 항거하는 국민과 가난한 이들의 편에 서서 정의와 진실을 외치다 암살당했다.
으로 절정에 이르게 되었고, 수많은 성직자와 수도사 수녀, 그리고 종교 단체와 주교들이 살해되었다.

형식적인 억제의 끝(an and to formal restrain)

대륙 차원의 압력에 밀려, 아르헨티나는 모든 형식적인 억압을 포기했다. 이런 형태의 조정은 암살단에게도 적용되었다. 심지어 어떤 암살단은 경찰이나 군인으로 구성되었음에도, 반 국가전복 활동을 사유화하는 것과 같았다. 동시에 국가 안전보장 요원의 상호 정보 회담이 CAA의 회담처럼 미국의 비호 아래 계속되었다. 1977년에 CAA는 니카라과의 마나과에서, 1979년에는 콜럼비아의 보고타에서 열렸다. 아르헨티나는 역시 중앙 아메리카의 지역 무장세력과 정치 경찰을 지원하기 위해 몇 차례 지원단을 파견했다. 1979년 봄, 그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미국의 전쟁학교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서 반 전복 교육 과정을 신설했다. 1979년의 7월 소모사 체제 역주 - 부유한 커피농장주의 아들로 미국유학을 하였다. J.B.사카사 정권 때인 1933년 과르디아 나시오날(니카라과 군대인 국민방위군) 사령관의 직책을 이용, 군대를 움직여 사카사를 축출하고 1937년 정권을 장악, 대통령이 되었다. 친미(親美)정책을 취하고, 20년간 니카라과를 독재적으로 지배하다가 1956년 암살당하였다. 그후에도 그의 아들과 동생이 정권을 장악, 니카라과에서는 사실상 소모사가(家)에 의한 독재가 1979년까지 계속되었다.
가 붕괴됨으로써 라틴 아메리카의 독재자들은 그들의 반 전복 방법을 표준화하는 움직임에 박차를 가했다.

1980년 9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CAL의 4번째 회의는 “아르헨티나식 해결 방법”을 모든 라틴 아메리카에 적용하기로 결정했다. 1980년 4월부터 미국 방위국은 칠레와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 그리고 브라질이 “국제 반 테러 조직”-새로운 형태의 콘도르 작전-이라는 계획을 다시 추진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CAL은 중앙 아메리카에서 암살단과 보안대가 수많은 사람을 학살하는 대참사를 조정한다. 아그레밀 파일은 수감자를 교환하고 국제적인 고문 기술자를 국경에서 체포했다는 성과를 보고하는 가운데, 관련 인사들의 손에서 손으로 건네졌다.
1981년 CAA의 회담은 워싱턴에서 열렸는데, 로날드 레이건이 미국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니카라과에서 산디니스타의 승리 역주 - 산디니스타는 1927~1933년 반미 ․반정부 게릴라투쟁을 벌였던 산디노(Augusto Csar Sandino)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이 단체는 1962년 아마도(Carlos Fonseca Amador)를 중심으로 소모사의 독재와 미국독점자본의 지배에 반대하는 소규모 무장조직들이 모여 결성되었으나, 1970년대 초반까지도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받지 못하고 간헐적으로 반독재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78년을 계기로 반독재진영의 중심으로 급속히 성장하여 이듬해 소모사정권을 타도하고 혁명정부를 수립하였다. 혁명정부는 설탕분배의 국유화를 포함한 경제계획과 농업협동조합의 국가관리, 산업국유화에 따른 제한정책, 토지개혁정책 등을 실시하였다.
는 콘도르 작전을 새로운 국면을 이끌었고, 반 전복 협력에 새로운 동력을 불어넣었다. 1981년 미국 행정부는 아르헨티나 관리들에 의해 니카라과 반혁명 세력들을 훈련시킬 수 있도록 1900만 달러를 지원하는 것을 승인했다.
회원국은 소위 테러리스트라고 불리는 사람들에 대한 정보 교환에 상호 합의하고, 영구적인 CAA 비서국을 새울 것을 결의했다. 이는 1984년 5월 24일 칠레의 산티아고에서 시작되었다.
아르헨티나가 1985년 민주주의화되면서, 칠레 군부 정권은 파라과이를 제외하면 남아메리카에서 반공주의의 마지막 보루로서 남게 되었다. 레이건 행정부는 중앙 아메리카에서 비밀 전쟁을 수행하는 작전을 CIA와 CAL에게 승인했다. CAA는 좌익활동가나 종교계 반대인사 뿐 아니라 인권 활동가까지 포함한다는 점에서 오늘날과 차이가 나는, 국제 반공주의 전쟁에서 이데올로기 부분을 맡았다.
미국이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와의 전투를 끝내게 되자, 중앙 아메리카 정글에서도 콘도르 작전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냉전의 종말이지만, 냉전의 축적으로 인해 그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엄밀히 말해, 콘도르 작전은 몇 십 명 정도 혹은 몇 백 명 정도의 인물이 직접적인 목표 대상이었다. 그러나 콘도르 작전 기간동안 남아메리카 남부 지역에서 자행된 탄압의 결과로 5만 명이 살해되었고, 3만 5천명이 실종되었으며, 40만 명이 투옥되었다.
대륙에서 고문과 처형이 더 이상 외형적으로 존재하지 않음에도, 그것이 영원히 사라졌다고 믿을 아무런 근거도 없다. 콜롬비아의 무장 병력과 연결되어 있는 콜롬비아 민병대의 범죄를 보면 더욱 분명하다. 2000년 5월 8일, 미국 OAS에 제출된 보고서에는 중앙 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사이에서 10년 동안 자행된 반 국가전복 활동이 나타나 있다. 오늘날은 공산주의자보다 마약 거래상이 적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인권에 대해 언급되고 있을 뿐, 변한 것은 별로 없다.
많은 라틴 아메리카 국가가 테러리즘과 돈 세탁 그리고 마약 거래에 대항한 상호간 혹은 다자간 협력을 목표로 미국과 협정을 맺는데 합의했다. 이러한 협정은 여전히 무력을 사용하여 사회를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1990년대 중반부터 미국의 비호 아래, 라틴 아메리카 국가는 상호 협정을 증진해왔다. 정보 분야에서만 수 십 개의 협정이 효력을 발휘하고 있고, 게다가 OAS 회원국의 적에 대한 정보국 연례 회의도 열린다. CAA는 여전히 (1995년 아르헨티나에서, 1997년은 에콰도르에서) 개최되고 있다. 1975년 콘트레라스가 회의를 처음 제안한 이후, 정보국의 다자간 군사 회담은 1999년 3월 8일부터 10일까지 볼리비아 군대에 의해 주최되었다. 거기에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콜롬비아, 에콰도르, 파라과이, 미국, 우루과이 그리고 베네주엘라 대표가 참가했다.
미국에 여러모로 의존하고 있는 “아메리카 대륙의 안전”은 결코 민주주의를 우선 순위에 두지 않았다. 잿더미에서 콘도르 작전이 부활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주제어
국제 이론
태그
북한 미사일 로켓 위성 자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