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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6.26호

소련 정치경제학 교과서에 대한 비판적 주석(1)

마오쩌둥 |
[역자 주]
지난 3월호에서 우리는 샤를 베틀렘의 ⌈서문⌋, 『소련에서의 계급투쟁, 첫 번째 시기 1917-1923』을 실었는데, 두 번째로 마오쩌뚱의 ⌈소련 정치경제학 교과서에 대한 비판적 주석⌋(1956)을 실으려 한다. ‘자본주의의 일반적 위기’와 ‘사회주의적 생산양식’ 개념을 중심으로 소련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재구성하도록 지시하는 스탈린의 『소련에서 사회주의의 경제적 문제』(1952)와 소련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가 출판한 『정치경제학 교과서』(1954)에 대해 마오는 비판하는데, 바로 이 저작이 그 내용을 구성한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뒤, 1956년 제20차 당 대회에 즈음하여 소련에서는 스탈린에 대한 공식적인 비판을 진행한다. 이때 소련공산당은 스탈린이 최초 사회주의 건설과 반 파시즘 투쟁 그리고 전후 재건에서 수행한 역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는 스탈린 말년에 강화된 개인숭배, 무오류의 신화, 독선적인 권력남용만을 문제삼았다. 동시에 당 대회에서 소련 공산당은 사회주의 이행 경로는 나라마다 다양하며, 사회주의 세계체제 출현으로 말미암아 (의회를 통한 길을 포함하여) 평화적인 이행이 현실적으로 가능할 수 있다며 ‘평화공존론’을 정식화한다. 이에 대해 중국 공산당은 10월 혁명 40주년 기념식(1957.11. 소련)에서 ⌈평화이행 문제에 관한 의견 요강⌋을 배포하는데 여기서 그는 ‘전술적 관점에서 평화이행을 제시하는 것은 유익하지만, 가능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프롤레타리아나 공산당의 혁명적 의지를 약하게 하고, 사상적으로 스스로 무장 해제 하는 것’임을 경고한다. 이어 1963년 3월, 중국 공산당은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총 노선에 관한 제안⌋(중소회담을 앞둔 중국의 회답서한 요지)에서 ①‘전 인민의 국가’ 및 ‘전 인민의 당’의 문제, ②‘반미통일전선’ 및 평화공존의 문제, ③‘사회민주주의’의 문제, ④‘군축문제' 등에 관해 소련과 이견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한편, 중국은 스탈린 식 노선을 운용한데 따른 내부 모순과 긴장에 직면해 있었다(농업과 공업의 불균형 발전, 과도한 중앙집권적 계획경제체제, 당-국가체제에서 비롯하는 긴장과 갈등 등). 또한 세계공산주의 진영에서 벌어지는 ‘자유화’(또는 ‘휴머니즘’) 요구와 대규모 소요 사태, 미국의 강경한 동아시아 냉전 정책 역시 중국에게 큰 도전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스탈린 편향을 개조하려는 중국 공산주의 운동의 본격적인 투쟁은 “삼면홍기(三面紅旗)”(사회주의건설의 총노선-대중노선, 대약진, 인민공사) 노선으로 드러났다. 대약진 기에 등장한 중국 사회주의 건설에서 총노선의 주된 특징은 ① ‘농업-경공업-중공업’이라는 순위 정립과 중공업에서 농업용 생산재 생산을 중시하는 것, ②농촌에 지방소형공업을 많이 건설하는, ‘두 다리로 걸어가는’ 공업화 정책, ③물질적 유인(incentive)에 대한 비판과 제한, ④인민공사 창설, ⑤‘기업장 단독 책임제’가 아닌 ‘민주적인 당 위원회의 집단적 지도 아래 기업장 책임제’라는 새로운 관리방식, ⑥‘자력갱생’의 방침 등이다.
이에 즈음하여 사회주의에서 계급투쟁 및 모순에 대한 마오의 인식도 심화된다. ⌈인민 내부의 모순을 올바로 처리하는 문제에 대하여⌋가 발표될 즈음 마오의 인식은 ①생산수단의 사회주의적 개조라는 소유제의 개조가 기본적으로 해결되었기 때문에 계급투쟁의 문제는 대체로 해결되었으며, ②다만 사회주의적 생산관계가 아직 불완전하므로 무산계급과 자산계급이의 계급투쟁이 소규모적으로 존재하며, ③사회주의에서의 주요모순은 적(敵)과 아(我)의 모순이 아니라, 인민내부의 모순이며, ④따라서 인민내부의 모순을 해결하는 주요형태는 사상투쟁으로 드러난다는 것이었다(‘부단혁명론’). (한편 1962년을 즈음해서는 부단혁명론과도 단절하는데, 사회주의 우클라우드 외부라기보다는 오히려 사회주의 우클라우드 내부에서의 모순과 계급투쟁에 대한 인식하기 시작한다. 다시 말해, ‘새로운 자산가계급’이 자본주의의 유제로서 ‘잔존’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영역의 내부’에서 나타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총 4 회에 걸쳐 연재될 기획 번역이 ‘오늘의 마르크스주의’를 둘러싼 진지한 논의에 작은 도움이 되기 바란다. 오역에 대한 책임은 물론 전적으로 번역 팀에게 있으며, 독자 여러분의 따가운 질책과 격려를 구한다.

소련 정치경제학 교과서에 대한 비판적 주석 (1)

1961-1962

저자 | 마오쩌뚱
번역 | 사회주의 문헌 번역팀

[영문판 역자 주] 이 저작은 『마오쩌뚱 사상 만세』(Long Live the Thought of Mao Tsetung)의 일부분이다. 『마오쩌뚱 사상 만세』는 1967년에 처음 나왔고, 1969년에 증보판이 나왔다. 여기에 번역된 것은 1967년 판이다. 두 종의 판은 대부분 같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일부는 인쇄상의 문제이며, 일부는 실재 차이다. 실재 차이는 각주로 표시해두었다. 소련 사회주의의 경제적 문제에 관한 마오의 발언은 아마도 1958년 11월 정주(鄭州)회의에서 이루어진 듯한데, 글로 쓴 것은 1959년이었다. 『마오쩌뚱 사상 만세』 1967년 판은 「소련 정치경제학 교과서에 대한 비판적 주석」이 1960년에 쓰여졌다고 나왔지만, 1969년 판은 1961-62년이라고 나왔다. 우리는 1960년이 거의 확실하다고 믿는다. 이 두 저작선의 서문은 이 글이 공식적으로 출판하려고 쓴 글이 아니라고 주의를 주었다. 누가 어떤 의도로 출판하였는지 알 수 없다. 우리가 입수한 것은 대만이나 홍콩을 통해 건너온 원본을 베낀 것이라고 생각한다. 번역의 한계를 언급하고 넘어 가야겠다. 마오가 인용한 소련의 정치경제학 교과서는 중국어로 나온 3판인데, 러시아어 원본이 무엇인지 언급이 없다. 우리는 중국어판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러시아어 원본과 비교할 수 없었다.

1.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교과서는 327-8페이지에서 사회주의는 “불가피하게” 자본주의를 폐지할 것이며 “혁명적인 수단”으로 그렇게 될 것이라고 적고 있다. 제국주의 시기에는 생산력과 생산관계 간의 충돌이 이전에 비해 더욱 격화된다.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은 “객관적인 필연성”이다. 이 말은 꽤나 만족스러운 것이며 반드시 이 말대로 되어야 한다. “객관적인 필연성”은 물론 옳은 것이며 모두가 동의할 수 있다. 혁명을 객관적인 필연성으로 간주하는 것은, 단지 혁명의 방향이 개인들의 의도에 따라 결정되지 않음을 의미할 뿐이다. 좋아하건 좋아하지 않건, 혁명은 도래한다.
프롤레타리아는 “자본주의를 폐절할 목적으로 자신의 주변에 있는 모든 노동 인민을 조직”(p.327)할 것이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권력 장악의 문제를 계속 제기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이미 만들어진 사회주의 경제 형태가 갑자기 도래할 것이라고 바랄 수 없다.” "사회주의 경제의 구성요소는 사적 소유에 기반한 자본주의 경제 내부에서 성숙할 수 없다."(p.328) 단지 "성숙"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태어날 수도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협동조합 또는 국영 기업이라고 그것을 낳을 수 없다. 이 점이 우리와 수정주의자의 중요한 차이다.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역 내에 자치적으로 운영되는 공기업이 실제로 사회주의의 요소이며, 자본주의는 평화적으로 사회주의로 성장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마르크스주의의 심각한 왜곡이다.

2. 이행기

교과서는 “이행기는 프롤레타리아의 정치권력을 수립하는 것에서 시작하며, 공산주의의 첫 번째 단계인 사회주의를 수립하는 임무를 완수함으로써 끝난다”(p.328)고 말한다. 우리는 이행기 안에 어떤 단계들이 포함되는가에 대해 매우 주의 깊게 연구해야 한다. 단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만을 포함하는가, 아니면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이행도 포함하는가?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가는 기간을 "혁명적 전화의 기간"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현재 이 기간에 있다. 몇 년 내에 우리 인민공사는 생산대(生産隊) 소유에서 인민공사 소유로 개조를 수행해야하며, 나아가 전(全) 인민의 소유로 나가야 한다. 인민공사가 소유하는 개조는 이미 수행되었지만, 아직 이는 집단적 소유다. [아직 전 인민의 소유가 아니다]
교과서는 이행기 동안 “모든 사회적 관계들은 근본적으로 전화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원칙적으로 옳다. 모든 사회적 관계들에는 생산관계와 상부구조 -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 문화 등 - 를 포함한다.
이행기에 우리는 “사회주의의 승리를 보장하는데 필요한 생산력을 발전시켜야 한다.” 중국이라면, 나라면 대체로 우리가 최소한 1년에 1-2억 톤의 철강을 필요로 한다고 말할 것이다. 올해까지 우리가 이룩한 주된 성과는 생산력 발전을 위한 방법을 명확히 해왔다는 점이다. 중국 사회주의 생산력의 발전은 이제 겨우 시작했다. 1958-1959년 대약진 기간을 거치면서 우리는 1960년을 생산의 거대한 발전을 약속하는 해로 볼 수 있다.

3. 여러 나라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보편성과 특수성

교과서는 10월 혁명이 “기준을 세웠으며”, 모든 나라는 사회주의 건설에서 특수한 형태와 구체적인 방법을 갖는다고 적고 있다. 이러한 진술은 논리적으로 옳다. 1848년에 <공산주의자 선언>이 있었다. 백년 그리고도 10년 후, 1957년에는 다양한 공산당들이 만든, <모스크바 선언>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공산주의자 선언이 있었다. 이 선언은 일반 법칙과 구체적인 특수성을 통합하는 문제를 다루었다.
10월 혁명의 기준을 인정하는 것은 모든 나라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기본 내용"이 동일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수정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에 서는 것이다.
혁명이 왜, 높은 생산력과 다수의 프롤레타리아가 있고,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 서방 나라가 아니라 동방, 예컨대 러시아와 중국과 같이 자본주의적 생산력이 비교적 낮고 프롤레타리아도 비교적 소수인 곳에서 최초로 성공했는가? 이 문제는 연구가 필요하다. 왜 프롤레타리아는 러시아에서 최초로 승리했는가? 교과서는 “제국주의 모든 모순이 러시아에서 함께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혁명의 역사는 혁명의 초점이 서방에서 동방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18세기 말 초점은 세계 정치 생활의 중심이 된 프랑스에 있었다. 19세기 중엽에 초점은 마르크스주의를 태동한 프롤레타리아가 정치의 무대로 뛰어 든 독일로 이동했다. 20세기 초반에는 레닌주의를 잉태한 러시아로 초점이 이동했다. 마르크스주의의 발전이 없었다면 러시아 혁명의 승리도 없었을 것이다. 20세기 중엽에 이르러 세계 혁명의 초점은 중국으로 이동했다. 말할 필요도 없이, 미래에는 초점이 이동할 것이 분명하다.
러시아 혁명이 성공한 다른 이유는 폭넓은 농민 대중이 혁명의 동맹세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교과서는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빈농과 동맹을 형성했다”고 적고 있다(p.328-9, 1967판). 농민 가운데는 몇 개의 계층이 있는데, 빈농은 프롤레타리아가 동맹해야 할 하나의 세력이다. 혁명이 시작될 때 중농은 항상 동요한다. 그들은 사태를 멀리 보고 싶어하며 혁명이 얼마나 강력한지, 혁명이 지속될 수 있을지, 혁명에 가담하는 것이 유리한지 등을 알고 싶어한다. 그러나 중농은 비교적 명확한 상황에 직면하기 전까지 프롤레타리아트의 편으로 이동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10월 혁명이 어떠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아울러 우리의 토지 개혁, 협동조합, 인민공사에서 그러했다.
볼셰비키와 멘셰비키가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조직적으로 분리된 것도 10월 혁명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다. 그리고 멘셰비키와 제2인터내셔널의 수정주의자에 맞서 볼셰비키가 투쟁하지 않았다면, 10월 혁명은 절대 승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레닌주의는 모든 형태의 수정주의와 기회주의에 맞서 투쟁하는 과정에서 생성되고 발전했다. 그리고 레닌주의가 없었다면 러시아 혁명의 승리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교과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러시아에서 최초로 성공하였고, 혁명전의 러시아는 혁명을 가능케 할 만큼 충분한 자본주의의 발전 수준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가 반드시 고도로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에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교과서는 레닌을 인용하는데 있어서 꽤나 정확하다. 현재까지,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나라에서 오로지 동독과 체코슬로바키아만 비교적 높은 수준의 자본주의였다. 그 밖의 나라들은 비교적 낮은 수준이었다. 혁명은 자본주의 발전이 비교적 높은 수준에 도달한 서방 국가 어디에서도 발발하지 않았다. 레닌은 “혁명은 제국주의 세계의 약한 고리에서 최초로 일어난다”고 말했다. 10월 혁명 시기에 러시아는 바로 그런 약한 고리였다. 10월 혁명 이후 이것은 중국에게도 똑같이 해당된다. 러시아와 중국 모두 상대적으로 많은 프롤레타리아가 있었고, 거대한 농민이 있었으며, 그들은 억압받고 고통받았다. 그리고 두 나라 모두 광활한 나라다.
하지만 이점은 인도도 상당히 비슷하다. 그렇다면 왜 인도는 레닌과 스탈린이 설명한대로 제국주의의 약한 고리를 파괴하고 혁명을 완수하지 못했는가? 인도는 단일 제국주의 국가에 예속된 식민지, 영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인도와 중국의 차이가 있다. 중국은 여러 제국주의 국가가 통치하는 半식민지였다. 인도 공산당은 인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않았으며, 인도 프롤레타리아트가 민주주의 혁명에서 지도세력의 위치를 차지하도록 만드는데 실패했으며, 독립 후에도 인도 공산당은 인도 프롤레타리아트의 독립을 위해 끈질기게 노력하지 않았다.
중국과 러시아의 역사적 경험은 성숙한 당의 존재 역시 혁명의 성공을 위한 중요한 조건이라는 것을 입증했다. 러시아에서 볼셰비키는 민주주의 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1905년에는 부르주아와 뚜렷이 구별되는 혁명 강령을 제안했다. 그 강령은 단지 짜르 체제를 전복하는 문제뿐만 아니라, 짜르를 타도하는 투쟁과정에서 입헌민주당의 지도력을 빼앗는 방법까지 풀고자 했다.
1911년 혁명 시기에도 중국은 여전히 공산당이 없었다. 1921년 공산당이 창설된 이후, 중국공산당은 급속하고도 정력적으로 민주주의 혁명에 가담하고 최전선에 섰다. 중국 부르주아의 황금기는 그들의 혁명이 한창 활기를 띠던 때인 1905-1917년에 이르는 기간이었다. 1911년 혁명 이후 국민당은 이미 쇠퇴하고 있었다. 그리고 1924년에 이르러 그들은 활로를 찾기 위해서라도 공산당 편으로 돌아서는 것말고는 어떠한 대안도 없었다.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를 대체했다. 프롤레타리아 정당은 민주주의 혁명에서 지도세력으로서 부르주아 정당을 대체했다. 1927년 우리는 중국 공산당이 아직 성숙기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종종 말했다. 이 말은 우리 당이 부르주아와 동맹하는 동안 부르주아가 혁명을 배반할 가능성을 살펴보지 못했고, 게다가 그에 맞서 전혀 준비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여기서(p.331) 교과서는 전(前)자본주의 경제형태가 지배적인 나라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할 수 있는 건 선진 사회주의 나라의 지원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불완전한 설명이다. 중국에서 민주주의 혁명이 성공한 이후 우리는 제국주의, 봉건주의, 관료자본주의를 전복했기 때문에 사회주의를 향할 수 있었다. 내부적 요인이 중요하다. 우리가 성공한 사회주의 국가로부터 받은 지원은 중요한 조건이지만, 단지 우리가 걸어가는 전진 속도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을 뿐이다. 도움이 있다면 우리는 좀더 빨리 전진할 수 있고 지원이 없다면 조금 덜 빠를 뿐이다. 여기에서 지원의 의미는 경제적 지원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국가의 성공과 실패의 경험을 신중하게 적용할 수 있다는 점도 포함된다.

4. “평화이행”의 문제

교과서는 330페이지에서 “일부 자본주의 국가와 과거 식민지였던 나라에서, 노동자계급이 평화적이며 의회를 통한 수단으로 정치권력을 획득하는 것이 실제로 가능하다”고 적고 있다. 여기서 “어떤 나라”가 어느 나라인지, 말해 보라. 유럽과 북미 주요한 자본주의 국가는 완전무장 상태이다. 당신은 그들이 당신에게 권력을 평화적으로 허락할 것이라고 기대하는가? 모든 나라의 공산당과 혁명적인 군대는 한 손에는 평화적으로 승리하는 것을, 한 손에는 폭력으로 권력을 획득하는 것을 양손에 준비해야 한다. 어느 하나도 없어서는 안 된다. 부르주아가 자신의 정치권력을 이양할 의지가 없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임을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은 싸울 것이고 게다가 그들 자신의 삶이 위태로워질 텐데, 왜 그들이 폭력에 의존하지 않겠는가? 우리와 마찬가지로 10월 혁명도 ‘양손’(두 가지 수단 모두) 모두 준비했다. 1917년 7월 이전에 레닌은 승리를 위해 평화적인 방법을 분명히 사용했지만, 7월 사건은 프롤레타리아가 평화적으로 권력을 양도받는 게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점을 증명하였다. 그리고 레닌이 자신의 생각을 바꾸고 삼 개월 동안 군사적 준비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그는 10월 혁명을 승리할 수 있었다. 10월 혁명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가 정치권력을 획득한 후에 레닌은 자본주의를 폐절하고 사회주의로 효과적으로 이행하기 위해서 “다시금” 평화적인 방식을 택했다. 하지만 14개의 제국주의 권력과 결탁하고 있던 부르주아는 무장을 강화하고 간섭을 통해 반혁명에 착수했다. 그리고 10월 혁명의 승리가 확정될 수 있을 때까지는 러시아 …[원문 누락]… 의 지도 하에 3년의 무장 투쟁이 필요했다.

5.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주의 혁명으로: 몇 가지 문제

330 페이지 말미에서 교과서는 민주주의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화하는 것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데, 어떻게 전화가 이루어지는지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다. 10월 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으로부터 넘겨받은 과제를 동시에 완수한 사회주의 혁명이었다. 10월 혁명이 승리한 후 바로 토지 국유화가 선언되었다. 그러나 토지 문제에 관한 민주주의 혁명을 매듭짓기까지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해방전쟁 기간 동안 중국은 민주주의 혁명의 과제를 해결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은 민주주의 혁명이 기본적으로 완수되었고 사회주의로 이행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했다. 토지 개혁을 마무리하기 위해서 3년이 더 걸렸으나, 공화국이 수립되던 그 때에 우리는 즉각적으로 산업 및 운송 자산의 80%를 차지하던 관료자본주의 기업의 고정자산을 몰수하여 전 인민 소유로 개조했다.
해방전쟁 동안 우리는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와 함께 반관료자본주의 슬로건을 내걸었다. 관료자본주의에 맞선 투쟁은 두 측면의 성격이 있었다. 매판(買辦) 자본주의 반대의 측면에서는 민주주의 혁명이었으며, 대(大)부르주아 반대의 측면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이었다.
저항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국민당은 일본, 독일 그리고 이탈리아로부터 관료자본의 상당 비율을 획득하였다. 관료 자본 대 민족[즉 중국] 자본의 비율은 8 대 2였다. 해방 이후 우리는 모든 관료 자본을 몰수하였고, 이로써 중국 자본주의의 주요 구성부분을 제거했다.
그렇다고 모든 나라가 해방 이후 “혁명의 초기 단계에서 오로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격을 지니고, 그 후에야 비로소 점진적으로 사회주의 혁명으로 발전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6. 폭력과 프롤레타리아 독재

333 페이지에서 교과서는 폭력의 개념을 사용하는데 있어 더욱 엄밀해야 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일찍이 “국가는 계급투쟁에서 지배계급에 봉사하는 기술적 의미의 도구로 정의된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착취자를 다룰 때 오로지 폭력만을 이용하지는 않으며, 심지어 폭력을 아예 사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해선 절대로 안 된다.
착취계급은 자신의 삶이 위태로워질 때면 항상 폭력에 의존한다. 실제로, 그들은 혁명의 발발을 보자마자 폭력으로 그것을 짓누른다. 교과서는 “역사적 경험에 따르면 착취계급은 정치권력을 인민에게 결코 양도하려 하지 않으며, 인민들의 정치 권력에 대항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한다”고 적고 있다. 이것은 사실을 설명하는 올바른 방식이 아니다. 착취계급이 폭력으로 반대세력에 대항하는 것은 인민들이 혁명적인 정치 권력을 조직한 이후만이 아니며, 인민이 정치권력을 장악하려고 봉기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착취계급은 즉시 혁명적 인민을 탄압하려고 폭력을 사용한다.
우리 혁명의 목적은 사회의 생산력을 증진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 목표를 위해 우리는 첫째 적을 제거해야 한다. 둘째 우리는 적들의 저항을 막아야 한다. 인민들의 혁명적인 폭력 없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여기서 교과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본질”과 사회주의 혁명에서 노동계급과 노동 인민의 첫째 임무에 대해 논의의 방향을 맞춘다. 그러나 그 논의는 계급의 개조는 물론, 적을 진압하는 문제도 그대로 남겨둘 정도로 불완전하다. 지주, 관료, 반혁명분자들, 그리고 바람직하지 못한 요소는 개조되어야 한다, 자본가계급, 소부르주아의 상층, 중농 역시 동일하다.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봤을 때 개조는 어려운 일이다. 끈질기게 투쟁을 수행하지 않는 자들은 적절히 개조될 수 없다. 잔존하는 부르주아지가 지니고 있을 강력한 힘과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서 최소한 10-20년 심지어 반세기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농촌 지역에서, 기본적으로 인민공사의 소유가 실효를 거두자, 사적 소유는 국가소유로 전환되고 있다. 나라 전체는 새로운 도시와 새로운 거대 산업이 많이 있다. 국가 전체를 위한 운송과 통신은 현대화되었다. 사실, 경제 상황은 완전히 변화했고, 농민의 세계관은 차츰 차츰 완전히 변화되어 왔다. (여기에서 “첫 번째 임무”에 대해 교과서는 레닌의 말을 본래적 의도와는 다르게 사용하고 있다.)
자신이 속한 계급을 무지의 상태로 버려 두고 적들, 제국주의자들의 취향을 맞추기 위해서 쓰고 말하는 것은 대중을 속이고 적들을 도와주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7.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형태

334페이지에서 교과서는 “프롤레타리아 국가는 다양한 형태를 가질 수 있다”고 적고 있다. 물론 사실이지만, 인민민주주의 하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10월 혁명 이후 러시아에 수립된 프롤레타리아 독재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는 거의 없다. 또한 소련의 소비에트와 중국의 인민대회는 모두 의회이고, 단지 이름만 다를 뿐이다. 중국에서 인민대회는 부르주아, 국민당에서 분리한 분파, 민주인사 대표를 포함하고 있다. 이들 모두 중국공산당의 지도를 받아들이고 있다. 이들 중에서 한 집단이 문제를 일으키려 했지만 실패하였다. 이러한 포괄적 형태는 소비에트와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10월 혁명 이후 멘셰비키 우파, 사회혁명당, 트로츠키 분파, 부하린 분파, 지노비에프 분파 등의 대표가 소비에트에 포함되어 있었음을 기억해 보라. 그들은 이름만 노동자와 농민의 대표였지, 사실상 부르주아의 대표였다. 10월 혁명 이후에 프롤레타리아는 대부분 부르주아의 구성원이었던 대단히 많은 케렌스키 정부 인원을 받아들였다. 우리의 중앙인민정부는 북 중국 인민정부에 기초해서 수립되었다. 각 부문의 모든 성원들이 기층에서 나왔고, 주요 간부의 다수는 공산당원이었다.

8. 자본주의 공업과 상업의 개조

335 페이지에는 중국에서 자본주의적 소유가 국가 소유로 변화하는 과정에 대해 부정확한 설명이 실려 있다. 교과서는 민족 자본에 대한 우리의 정책을 다룰 뿐, 관료 자본에 대한 우리 정책(몰수)을 설명하지 않는다. 관료자본가의 소유물을 공공 소유로 전환하기 위해 우리는 몰수라는 방법을 선택했다.
335 페이지 두 번째 문단에서 자본주의를 전화하려고 국가자본주의 형태를 경과한 경험이 특이하고 특수한 경험으로 취급되고 있으며, 그것의 보편성을 부정한다. 서유럽 국가와 미국은 고도의 자본주의며, 소수 독점자본가가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러나 굉장히 많은 중소 자본가들 역시 존재한다. 그래서 미국 자본은 집적되어 있지만, 넓게 분포되어 있다고 한다. 이런 나라에서도 성공적인 혁명이 성공한 후에 독점 자본은 의심할 나위 없이 몰수해야겠지만, 중소 자본도 통일적으로 몰수해야 할까? 그들을 개조하기 위해서 국가자본주의 어떤 형태가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중국 동북부 지방은 높은 수준의 자본주의 발전이 이루어진 지역으로 볼 수 있다. (상하이와성의 남부에 중심을 둔) 기앙수도 그렇다. 국가자본주의가 이 지역에서 가능하다면, 왜 똑같은 정책이 다른 나라에 적용될 수 없는가?
일본이 중국 동북부 성을 점령할 당시 사용한 방법은 주요한 지역 자본가를 제거하고, 그들의 기업을 일본 국영으로 전환하거나 몇몇 경우에는 독점자본 기업으로 바꾸었다. 또한, 일본은 중소자본가들을 강제로 통제하기 위해 자회사를 설립했다.
우리는 민족 자본을 개조하기 위해 세 단계를 거쳤다 : 국가 통제에 기반한 사적 수공업, 사적 생산물에 대한 단일화된 정부 구매와 판매, (개별 단위와 전체 복합체 차원에서의) 공사합영. 각각의 단계는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졌다. 이것은 생산에 있어서 어떤 피해도 예방했는데, 개조가 진전되면서 실제로 생산은 발전했다. 우리는 국가 자본주의에서 많은 새로운 경험을 얻었다. 예를 들어, 공사합영 수립 단계에서 자본가에게 고정된 이익을 제공하는 것이 그렇다.

9. 중농

토지개혁 이후 토지는 화폐 가치를 띠지 않았고, 농민은 “그들 스스로 보여주는” 것을 두려워했다. 한때 이러한 상황이 불만족스러웠던 동지들도 있었지만, 지주와 부농을 격하하는 계급투쟁에서 실제 일어난 일은 농민이 빈곤을 고귀한 것으로 그리고 부를 수치스러운 것으로 보게 된 것이었다. 이는 빈농이 부농을 정치적으로 전복하고 마을에서 그들의 지배를 수립한 환영할만한 징후다.
339 페이지는 부농에게서 획득하여 빈농과 중농에게 쥐어진 토지는 정부가 몰수한 뒤 분배한 토지였다고 적고 있다. 이러한 시각은 토지 문제를 왕실의 하사로 보는 것과 유사하며, 계급투쟁과 대중 운동이 벌어지고 있음을 망각하는 것이며, 우편향적 관점이다. 우리의 접근법은 빈농에 의지하여, 다수의 중농(하층 중농)과 단결하여, 지주계급에게서 토지를 몰수하는 것이었다. 당은 지도적 역할을 하지만, 당이 모든 것을 하면서 대중을 대체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리고, 당의 구체적인 실천은 “가난한 자들의 불만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적극적 요소를 발견하는 것, 근간을 공격하며 단결을 도모하는 것, 핵심을 강화하는 것, 불만의 목소리를 고무하는 것, 그리고 계급을 조직하는 것이었다―이 모두는 계급투쟁을 전개할 목적이었다.
교과서는 “중농이 농촌에서 주요한 세력이 된다”고 적고 있다. 이것은 만족스럽지 못한 주장이다. 중농이 핵심세력이라고 주장하는 것, 그들이 제일이라고 하는 것, 그들을 감히 공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전에 빈농이었던 사람들을 수치스럽게 하는 것이다. 필연적으로 이런 방식은 중농이 지역의 지도세력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교과서는 중농을 분석하지 않는다. 우리는 상층 중농과, 하층 중농을 구별하고 나아가 그 범주에서 신구를 구별하며, 신 중농을 약간 선호한다. 계속된 운동에서 경험은 빈농, 새롭게 형성된 하층 중농, 그리고 오래된 하층 중농이 비교적 좋은 정치적 태도를 지녔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인민공사를 기꺼이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상층 중농과 부유한 중농 중에는 인민공사를 지지하는 집단과 반대하는 집단이 있다. 호페이성(省)에서 나온 자료에 따르면, 그곳에는 4만 이상의 생산대가 있는데, 그 중의 50%는 인민공사를 조건 없이 환영하고, 35%는 기본적으로 수용하지만 특정 문제에 대해서 반대 혹은 회의를 갖고 있으며 15%는 인민공사를 반대하거나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
이 마지막 집단의 반대는 생산대의 지도력이 부유한 중농이나 바람직하지 못한 구성원에게 넘어갔기 때문이다. 두 길 사이의 투쟁 속에서 교육이 진행되는 동안, 생산대 사이의 논쟁이 확장된다면, 그들의 지도권은 변화해야 할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리고 나서 중농에 대한 분석이 수행되어야 한다. 누구 수중에 농촌의 지도권이 있는지는 사태의 진전 방향에 중대한 관련을 맺는다.
340페이지에서 교과서는 “본질적으로 중농은 양면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적고 있다. 이 문제 역시 구체적인 분석을 요한다. 가난하고, 중하, 중상 그리고 부유한 농민은 어떤 의미에서 모두 노동자지만, 다른 의미에서 그들은 사적 소유자다. 사적 소유자로서 그들의 관점은 각각 다르다. 가난한 중하 층의 농민은 비교적 쉽게 변하는 관점을 가진 반(半) 사적 소유자들로 묘사될 수 있을 것이다. 대조적으로, 중상 층 농민과 부농은 사적 소유자로서 견해가 더 본질적이고, 그들은 지속적으로 협동화에 반대했다.

10. 노농동맹

340페이지의 세 번째와 네 번째 문단은 노농동맹의 중요성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으나, 동맹이 발전, 통합되기에 앞서 무엇을 해야할 것인지는 서술이 부족하다. 교과서는 소생산자를 개조하여 농민을 압박할 필요성에 대해 다루고 있지만, 전 과정을 어떻게 진전시켜야 하는지, 개조의 각 단계에서 어떤 종류의 모순이 드러나는지, 그리고 어떻게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지를 다루지 않고 있다. 그리고, 교과서는 전 과정에 관한 방법과 전술을 논하지 않고 있다.
우리의 노농동맹은 이미 두 단계를 통과했다. 첫 번째는 토지 혁명에 기초하고 있었고, 두 번째는 협동조합운동에 기초하고 있었다. 협동화를 이루지 못했다면 농민은 불가피하게 양극화되었을 것이며, 노농동맹은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사적 생산에 대한 국가의 단일화된 구매와 판매”에 관한 정책은 지속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정책이 지속되고 철저히 이루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협동조합화에 기인한다. 현재 노농동맹은 다음 단계를 밟고 있으며 기계화의 기초가 수립되었다. 기계화 없이 그저 협동조합과 인민공사 운동만 있다면, 이 또한 노농동맹이 유지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계속해서 협동조합을 인민공사로 발전시켜야 한다. 우리는 꾸준히 인민공사 생산대의 소유를 인민공사 전체의 소유로, 나아가 국가의 소유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국가 소유와 기계화가 완성된다면 우리는 정말로 노농동맹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며, 노동자와 농민 사이의 차이는 점점 확실히 사라질 것이다.

11. 지식인의 개조

341페이지는 노동자와 농민 내부에서 지식인의 발전을 촉진하는 문제와, 동시에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 부르주아 지식인을 포괄하는 문제로 할애되었다. 그러나 이 교과서는 지식인의 변화 문제를 다루는데 실패했다. 부르주아 지식인들뿐만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 출신의 지식인들도 변화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부르주아의 여러 영향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예술과 문학 서클에서 활동했고, 후에 작가가 된 리우 샤오탕이 사회주의의 주요한 반대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예증한다. 지식인은 대개 지식을 바라보는 관점을 통해, 자신의 일반적인 전망을 표현한다. 지식은 사적으로 소유될 것인가 공적으로 소유될 것인가? 몇몇 사람들은 지식을 가격이 괜찮으면 팔고 그렇지 않으면 팔지 않을 수 있는 자신의 재산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들은 "전문가“(專)일 뿐이지 ”공산주의자“(紅)는 아닌데, 당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그들은 “당 외부인”이며 결코 “당원들을 선도할 수 없다”. 영화분야의 전문가들은 당이 결코 영화를 지도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뮤지컬이나 발레 분야의 전문가들은 당이 이들 분야에서 어떠한 지도력도 발휘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원자과학의 전문가들도 마찬가지로 주장한다. 요컨대, 그들 모두 당은 어디서도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지식인 개조는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 전 기간에 걸쳐 가장 중요한 문제다. 마찬가지로 이 문제를 과소평가 하거나 부르주아 지식인들에게 양보하려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커다란 잘못이다.
341페이지로 돌아와 보면, 여기서 이형기 경제의 근본적인 모순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모순이라고 말하고 있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이 구절은 그저 ‘경제적’ 생활의 전 영역에서 누가 승리자로 부상할 것인지를 둘러싼 투쟁을 개시해야 할 것만을 말하고 있다. 이 구절의 어느 것도 완전하지 않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회주의 혁명의 전 과정은 반드시 정치, 경제, 그리고 이데올로기 전선, 이 세 전선으로 나가야 한다.
교과서는 부르주아 구성원을 흡수해서, 기업 및 국가의 관리에 참여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357페이지에서도 반복된다. 하지만 우리는 부르주아 요소를 개조하자는 임무를 주장하려고 한다. 우리는 그들이 자신의 삶의 방식, 일반적인 전망, 더불어 특정 쟁점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바꿀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교과서는 개조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는다.

12. 산업화와 농업 집단화의 관계

이 책은 사회주의적 산업화를 농업 집단화의 선행조건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소련 내부의 상황과도 전혀 일치하지 않는데, 소련에서 집단화는 기본적으로 1930-32년 사이에 실현되었다. 당시 소련은 우리보다 많은 트랙터를 갖고 있었지만, 총경작지 중 기계화 개간을 이룬 것은 20.3%에 불과했다. 집단화는 결코 기계화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산업화는 집단화의 선행조건이 아니다.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에서 농업 집단화는 매우 더디게 성취되었는데, 이는 주로 토지 개혁 이후, 쇠가 뜨거울 때 내려치지 않고 시간을 너무 오래 끌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몇몇 오랜 기초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농민 부문은 토지 개혁에 대해 만족했고 그 이상 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전적으로 산업화와 관련된 문제도, 그렇다고 관련되지 않은 문제도 아니다.

13. 전쟁과 혁명

352-354 페이지는 동유럽의 다양한 인민민주주의 형태들이 “내전이나 외부로부터 군사개입 없이 사회주의 건설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러한 국가들에서 사회주의로 이행이 내전이라는 호된 경험 없이 실현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이러한 국가들에서 발생한 것은 국제적인 전쟁의 형태로 수행된 내전이었다고, 내전과 국제적인 전쟁이 동시에 수행되었다고. 동유럽 국가들 내부의 반동세력은 소련 적군의 지원 하에 제거되었다. 말하자면 동유럽 국가에 내전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본질을 무시하는 단순한 형식주의적 사고가 될 것이다.
그 교과서는 혁명 이후 동유럽 국가들에서 “의회는 인민들의 이해를 광범하게 대변하는 기관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의회들은 과거 부르주아 의회와는 판이하게 다르며, 이름만 유사할 뿐이었다. 해방 후 초기국면에 우리가 경험한 ‘정치협상회의’는 국민당 시기의 ‘정치협상회의’와 이름이 같았다. 국민당과 협상하는 시기 동안 우리는 그 회의에 무관심했지만 장개석은 매우 높은 관심을 나타냈다. 해방 이후 우리는 그 간판을 접수했고 전국적인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이 회의는 임시인민대회로 운영되었다―를 정식 소집했다.
교과서는 중국이 “혁명투쟁의 과정에서 인민민주주의 통일전선을 조직했다”(357페이지)고 적고 있다. 왜 “혁명전쟁”이 아니라 “혁명투쟁”인가? 1927년부터 전국적인 승리를 달성할 때까지 우리는 장기간에 걸쳐 중단 없는 전쟁을 22년 간 수행하였다. 그리고 그보다 앞서서, 1911년에 부르주아 혁명이 시작되면서, 우리는 15년 간 또 다른 전쟁을 치른 바 있다. 제국주의자들의 지도를 받는 군벌들의 극도로 혼란스러웠던 전쟁도 또한 중요하게 언급되어야 한다. 결국, 1911년부터 미국을 반대하고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 연속적인 전쟁들―혁명전쟁과 반혁명전쟁―이 40여 년 간 중국에서 수행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위대한 혁명은 반드시 내전을 경유한다. 이것은 법칙이다. 그리고 전쟁의 부정적인 측면만을 보고 긍정적인 측면은 보지 않는 것은 단편적인 견해이다. 전쟁의 파괴성만을 말하는 것은 인민의 혁명이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14. 후진국에서 혁명은 더욱 어려운가?

서양의 다양한 국가에는 혁명 및 [사회주의] 건설 운동을 펼쳐 가는데 거대한 장애물이 존재한다. 즉, 부르주아의 ‘독’은 너무나 강력하여 영향이 구석구석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전체적으로 중국의 부르주아는 오직 세 세대들을 거친데 반해, 영국과 프랑스는 250-300년이라는 발전의 역사를 거쳤고, 그들의 이데올로기와 처리 방식은 사회의 모든 양상과 계급․계층에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영국의 노동자계급은 공산당이 아니라 노동당을 지지했다.
레닌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은 후진국에서 더욱 어렵다”고 말했다. 이것은 오늘날 보기에 올바르지 못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행은 후진적인 경제를 갖는 국가에서 덜 어려우며, 인민들이 빈곤할수록 그만큼 혁명을 원하기 때문이다. 서양 자본주의 국가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비교적 높은 임금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국가의 노동자들은 교묘하게 부르주아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이러한 점은 [선진국에서] 사회주의적 개조를 수행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또한 기계화 정도가 매우 높기 때문에, 성공적인 혁명 이후에 가장 중요한 과제는 기계화의 진전이 아니라 인민의 개조가 될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와 같은 동방의 국가들은 후진적이고 가난하다. 하지만 오늘날 그들의 사회 체계는 서양 국가의 사회 체계를 충분히 앞질러 나갔을 뿐만 아니라, 생산력의 발전 비율도 서양을 훨씬 앞서 나가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자본주의 국가의 발전 역사를 보면, 후진국은 선진국을 앞질러 나갔다. 예컨대 20세기 초에 미국이 영국을 앞지르고 독일이 영국을 앞질렀듯이 말이다.

15. 거대규모의 산업이 사회주의적 개조의 기초인가?

교과서의 365페이지는 “사회주의 건설의 길에 접어든 나라들은 (경제의 사회주의적 전화의 기초가 되는) 거대 산업 발전을 가속하려고, 아직 남아있는 자본주의적 지배의 효과를 가능한 신속하게 제거해야 하는 과업에 직면한다”고 말하고 있다. 거대산업의 발전이 경제의 사회주의적 전화에 기초가 된다고 단언하기에는 부족한 것이 많다. 모든 혁명의 역사는 새로운 생산력의 완전한 발전이 후진적인 여러 생산관계의 전화를 위한 필수조건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선전․선동과 함께 우리 혁명은 시작했고, 선전․선동은 혁명의 대의에 복무하는 새로운 여론을 창출하는데 기여했다. 게다가, 오직 혁명의 과정에서 후진적인 상부구조를 전복한 후 낡은 생산관계를 파괴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낡은 생산관계가 파괴된 후 새로운 생산관계가 나타날 것이며, 이것들은 새로운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을 위한 길을 닦을 것이다. 그 후에야 비로소 거대 규모에서 새로운 사회적 생산력들의 발전을 위한 기술적 혁명이 가능할 수 있다. 동시에, 우리는 여전히 생산관계 및 이데올로기의 전화를 지속해야만 한다.
이 교과서는 오직 물질적 선생조건들에 대한 논의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상부구조, 예컨대 국가, 철학 그리고 과학의 계급적 성격 같은 것들에 대한 의문은 거의 외면하고 있다. 경제학에서 주요 연구대상은 생산관계이다. 동시에, 정치경제학과 역사유물론의 관점사이의 관계는 가까운 친척 관계다. 만약 상부구조에 관한 질문이 무시된다면 경제적 토대와 생산관계들의 문제를 명확하게 다루는데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16. 사회주의로 길에 있어 독특한 특징에 관한 레닌의 논의

375페이지 한 구절은 레닌을 인용하였다. 그 인용문은 매우 훌륭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우리의 활동 방법들을 옹호하는데 매우 유용하다. “주민들의 의식수준은, 그들 스스로 이러저러한 계획들을 실현하기 위해 수행하는 여러 가지 노력들과 함께, 그들이 사회주의로 들어서는 경로의 독특한 양상들로부터 영향을 받게 된다.” 우리 자신의 “지도(指導)의 정치”는 정확히 말해서 우리 이웃들의 의식성을 고양하기 위해서다. 우리의 대약진운동은 정확히 말해 “우리의 계획을 실현하려는 노력”이다.

17. 산업화 비율이 핵심적인 문제다

교과서에서는, “소련에 관한 한, 산업화 비율이 핵심적인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현재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실상, 그 문제는 산업이 후진적일수록 더욱 첨예해진다. 이것은 국가 간뿐만 아니라 지역 간에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우리의 북동쪽 지역들과 상하이는 비교적 강력한 기반을 갖고 있고, 그래서 그곳에 대한 국가의 투자가 다소 더디게 증가하였다. 그 밖의 지역, 즉 산업적 기반이 매우 취약한 지역에서는 [산업] 발전이 매우 긴급하고, 국가의 투자가 급속하게 증가하였다. 상하이가 해방된 후 10년 간 22억 위안이 투자되었으며, 이는 자본가가 5억 위안을 투자한 것을 훨씬 뛰어넘는다. 당시 상하이에는 50만 명의 노동자가 존재했으며, 수십만 명이나 되는 노동자의 왕래를 포함하지 않더라도, 현재 그 도시에는 백만 명의 노동자가 존재한다. 이는 초기 노동자 인구의 두 배에 해당한다. 우리가 이를 노동력이 엄청나게 증가하고 있는 어떤 새로운 도시와 비교해 볼 때, 우리는 산업의 기초가 부족한 지역에서는 산업화 비율이 가장 핵심적인 문제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교과서는 오직 여러 정치적 환경이 높은 산업화 비율을 요구하고 있다고만 말할 뿐, 사회주의 체계 자체가 산업화의 높은 비율을 획득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는다. 이것은 일면적인 설명이다. 만약 오직 요구만 있고 능력이 갖춰져 있지 않다면, 어떻게 높은 비율을 달성할 것인가? 내게 말해 달라.

18. 소규모, 중규모, 대규모 기업을 동시에 장려하여 산업화의 높은 비율을 달성하라

381페이지에서 교과서는 우리의 소규모―그리고 중규모―기업의 광범한 발전에 대해 논하고 있지만 국내기업과 국외기업, 소규모, 중규모, 대규모 기업들을 동시에 장려한 우리의 철학을 정확하게 성찰하는데 실패한다. 교과서는 우리가 “우리의 기술적 경제, 우리 인구의 규모, 그리고 매우 심각한 고용문제 같은 절대적 후진성 때문에 소규모․중규모 기업들의 광범한 발전을 결정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결코 기술적 노후, 인구의 크기, 혹은 고용 증대의 필요성에 있지 않았다. 대규모 기업들의 지도 아래 우리는 소규모․중규모 기업들을 발전시키고 있다. 외국기업의 지도 하에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토착적 방법―주로 고도의 산업화를 달성하기 위한 목적을 위해―을 채택하고 있다.

19. 사회주의적 소유의 두 유형간의 장기적 공존이 가능한가?

386 페이지에서는 “사회주의 국가와 사회주의 구조는 서로 다른 두 토대 위에서 아주 짧은 시간 동안이라도 성립될 수 없다. 즉 사회주의 국가와 사회 구조는 사회주의적 산업, 거대하고 고도로 통일된 토대 그리고 분산되고 후진적인 농업 소상품 경제의 토대 위에서 수립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것은 올바른 지적이며, 따라서 다음의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해 그 논리를 확대해야 한다. 사회주의 국가와 구조는 서로 상이한 소유의 토대인 전 인민 소유의 토대와 집단적 소유의 토대 위에서는, 아무리 긴 시간동안이라도 성립될 수 없다.
소련에서는 소유의 두 가지 상이한 유형이 공존하던 기간이 너무 오래 지속되었다. 전 인민의 소유와 집단적 소유 사이의 모순은 노동자와 농민 사이의 모순으로 드러났다. 교과서는 이러한 점을 인식하는데 실패하였다.
이와 같이, 전 인민의 소유와 집단적 소유의 공존이 연장되는 것은 점점 생산력의 발전에 적합하지 않게 되며, 소비 및 농업 생산에 관련된 농민의 점증하는 요구 혹은 원료에 대한 산업의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러한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소유의 두 가지 형태 사이의 여러 모순을 해결해야 한다. 즉, 집단적 소유를 전 인민의 소유로 전화하고, 결코 분할될 수 없는 전 인민의 소유에 기초하여 산업과 농업에서 생산과 분배의 통일된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은 거침없이 펼쳐져야 한다. 한 때 생산력에 적합했던 생산관계였다고 그 이후의 상황에도 적합하지는 않을 것이다. 중국에서는, 여러 가지 고급 협동조합의 건설을 마치고 난 후에도, 크고 작은 단위의 문제가 모든 특구와 지방에서 발생했다.
사회주의의 사회에서, 노동, 상품 생산, 가치법칙 등에 따른 분배의 형식적인 범주는 지금 생산력의 요구에 조응한다. 하지만 발전이 진행됨에 따라, 이렇게 여러 형식적인 범주가 더 이상 적합하지 않는 날이 올 것이다. 이 때가 되면 이러한 범주는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파괴될 것이며, 그 생명력을 다할 것이다. 우리는 사회주의 사회에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경제적 범주가 있다고 믿어야만 하는가? 우리는 ‘노동에 따른 분배’, ‘집단적 소유권’과 같은 경제적 범주들이―역사적인 [그러므로 상대적인] 다른 범주와 달리―영원하다고 생각해야만 하는가?

20. 농업에서 사회주의로 이행은 단지 기계화에 의존하는 게 아니다

392 페이지에 “기계와 트랙터 사업은 농업에서 사회주의로 이행을 관철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라고 적혀있다. 그 글은 기계가 이행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그러나, 만약 농민 계급의 의식이 상승되지 않는다면, 이데올로기가 변형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기계에만 의존한다면 무슨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인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투쟁, 인민의 개조와 재교육은 중국의 중요한 문제다.
395 페이지는 전반적인 농업집단화 초기 단계의 과업을 관철할 때, 적대적인 부농에 대한 투쟁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이는 물론 옳다. 그러나 협동조합이 형성된 이후 농촌의 상황을 설명할 때, 부유 계층 문제는 누락되고, 국가와 집단농장, 개인 사이의 모순 그리고 축적과 소비 사이의 모순에 대해서는 어떠한 언급도 없다.
402 페이지는 “농업 협동조합 운동이 고조된 조건 하에서 중농계층의 광범한 대중은 다시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다. 이것은 너무도 일반적이다. 지금도 흔들리고 있고 미래에도 흔들릴 부유한 중농이 있다.(다음호에서 계속)PS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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