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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0.2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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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전제품은 여성을 가사노동에서 해방시켰는가

김준범 | 편집부장
가전 제품은 여성을 가사노동으로부터 해방 시켰는가?

김 준 범 | 편집부장

주부 "ㄱ"씨의 하루일과

아침 6시 반에 일어나 대강 세수를 하고 전날 타이머로 맞춰놓은 밥이 다 되었는지 확인한다. 현관문을 열고 우유와 신문을 가져와 우유는 냉장고에 신문은 식탁에 올려놓는다. 남편이 일어나기 전에 어제 만들어 놓은 찌개를 데우고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돌린다. 남편은 언제나 그렇듯 일어나기 전에 한바탕 투정을 부린다. 귀엽기는커녕 화가 나지만 가정의 행복은 아내가 만들어 간다는 말을 되새기며 그냥 참는다. 남편이 씻으러 간 새 아침상을 차려놓고 남편 양말과 손수건 넥타이와 양복을 골라놓는다. 남편이 옷을 입는 동안 밥을 퍼놓고 아이들 도시락 준비를 한다. 작은 아이는 급식을 하지만 큰아이 도시락을 싸야하니 아침이 바쁘다. 남편이 밥을 먹고 출근을 하면 아이들을 깨워 밥을 먹이고 학교에 보낸다. 준비물이며 옷가지를 챙겨주고 나니 어느덧 9시다. 대강 남은 밥과 반찬으로 아침을 때우고 설거지를 끝낸 후 빨래통에서 빨래를 꺼내 정리한다. 양말을 뒤집어 놓지 말라고 아무리 말해도 뒤집혀진 양말을 보니 속이 뒤집어 진다. 그나마 빨래통에 가져다 놓는 것이 그간 투쟁의 성과이면 성과일까? 빨래를 대강 정리해 세탁기를 돌리고 나면 창문을 열고 청소를 시작한다. 어지러운 애들 책상과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터리개로 곳곳을 털고 진공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을 하니 11시다. 빨래를 꺼내 널고 또 세탁기를 돌린다. 남편이 구겨던진 신문을 정리해 신문을 보며 커피를 끓여 먹는다. 마지막 빨래를 널고 냉장고 속에 오래된 반찬들을 꺼내 대강 점심을 챙겨먹고 설거지를 마친 후 , 화장을 하고 좀 떨어진 곳에 있는 대형마트로 저녁거리와 필요한 물건들을 사러 나간다. 이것 저것 물건을 고르다 보니, 식기세척기랑 새로 나온 드럼형 세탁기와 볼 때 마다 마음이 가는 문 두개 짜리 냉장고가 눈에 밟힌다. 홀린 듯 마트를 빠져나와 부산하게 애들 저녁 준비를 한다. 오늘은 남편이 식사를 하고 들어온다 하니 한시름 놓았지만 큰애가 비실비실 한 것 같아 이것저것 아이들이 좋아하는 걸 만들다 보니 제법 일이 많다. 정신 없이 애들 밥상을 차려주고 음식냄새로 입맛이 없어 밥에 물을 말아먹으며 저녁 드라마를 본다. 언제나 예고편이 아쉬운 드라마가 끝나면 저녁설거지를 하고 남편 와이셔츠와 애들 교복을 다림질한다. 10시쯤 되니 남편이 들어온다. 남편 와이서츠를 걸어놓으며 세탁기 얘기를 꺼낼까 하다가 얼마 전 홈쇼핑으로 싸운 일을 생각하니 말을 건낼 수가 없다. 손수건을 다리고 나니 11시다. 식구들 간식으로 과일 깎느라 다림질하랴 보는 둥 마는 둥 하던 드라마는 예고편으로 대신하고 나니 어깨가 저려온다. 아무래도 나는 게으른 것 같다. 남들은 집안일 하면서 공부도 하고 부업도 하고 한다는데 나는 집안일 만으로도 하루가 정신없으니...

가전제품의 도입과 달라진 양상

가전 제품의 도입으로 가사일이 훨씬 간편해지고 여유가 생겼다고 말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물론 개별 가사 노동의 노동강도는 이전보다 어느 정도 나아졌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전체 기혼 여성의 가사노동시간은 오히려 증가했다. 세탁기의 등장은 세탁이라는 고된 일을 단순하게 만들었지만 빨래를 가족 모두가 함께 하는 일에서 가정주부가 매일 해야 하는 일로 만들었다. 냉장고와 전자레인지의 등장은 음식 만드는 일에서 여성을 해방시키지는 않았으며 조리 시간 역시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가족 구성원들에게 색다른 요리에 대한 기대를 갖게 했다. 예전 같으면 식당에서나 먹을 수 있었던 요리를 식탁에서 기대하게 된 것이다. 또한 진공청소기의 등장은 미세 먼지와 진드기의 공포를 환기시켰을 뿐 결코 걸레질로부터 가정주부들을 해방시키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미신-가전제품의 등장이 여성을 가사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켰다-은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고 또 어떠한 방식으로 강화되었는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작용한 이데올로기는 무엇일까? 물음에 답하기 위해 가전 제품이 가사노동을 변화시켰던 과정을 미국의 사례를 통해 살펴보자.

-세탁기

수돗물도 없이 단지 빨래판과 빨래통만 있었던 과거에는 옷을 세탁하는 일이 허리가 휘어지는 노동이었다. 19세기동안 다양한 수동식 세탁기가 시장에서 판매되었다. 그리고 자동 세탁기는 제 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던 시기가 되어서야 시장에 등장했다. 세탁기의 등장은 중산층 가정{{) 여기에서 논의는 중산층가정으로 한정하자 왜냐하면 처음으로 세탁기가 등장한 후, 이것이 미국의 모든 가정으로 보급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의 주된 세탁방식이었던 세탁소 이용과 세탁을 도와주는(혹은 전담하는) 가사노동자(하인과 같은 가정고용인)를 밀어냈다. 이것은 물론 세탁기를 사면서 가사노동자에 대한 임금 지출과 세탁소이용을 통한 지출을 줄였다는 비용의 측면도 있었겠지만 주로 가족을 위해 직접 정성껏 빨래를 하는 여성에 대한 강조를 통해 이루어졌다. 즉 노동자의 더러운 옷과 아기의 옷이 함께 세탁되는 세탁소보다는 가정용 세탁기의 청결함이나 직접 빨래를 하면 꼼꼼하게 가족을 보살필 수 있다는 선전이 이 시기 주되게 이루어 졌다. 이는 아직도 발간되고 있는 미국의 『레이디스 홈 저널』등에 실린 세탁기 광고나 혹은 당시 가사노동자들의 불만이 고조되던 현실과 어우러져 세탁이라는 노동을 세탁기를 통해 주부에게 전담하게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세탁기의 등장은 단지 세탁과정을 주부 혼자 담당하게 하는 것 뿐만 아니라 청결의 새로운 기준을 만들었다. 그것은 보다 복잡하고 용도가 다양한 세제의 등장으로 대표된다. 다양한 소재의 옷에 맞춘 다양한 세제를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이 요구되었고 그와 동시에 청결의 기준 역시 변하였다. 노동자들의 경우 세탁은 6개월에 한번 혹은 1년에 한 번 꼴로 이루어졌고 중산층가정의 경우에는 1주일에 한번 세탁 노동자에 의해 행해졌다. 하지만 세탁기의 등장이후 세탁이 얼룩을 지우는 과정뿐만 아니라 옷에 묻은 세균을 없애는 과정으로 확장되었다. 그리고 세탁은 가끔 하는 일에서 매일 해야 하는 일로 변하였다. 그리고 과거에 있었던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칼라와 소매단이 달린 와이셔츠는 퇴장하게 되었다. 이처럼 세탁기의 등장은 물론 등골이 휘어지는 노동이었던 세탁을 보다 손쉽게 만들었지만 오히려 가정 주부의 가사 노동시간을 증가시켰다.

-진공청소기

청소 혁명이라고도 불리는 진공청소기는 처음 등장에서 지금까지 청소과정을 간소화하는 것 대신 청결의 새로운 개념을 만들었고 청소(집안을 정리하고 화장실 바닥을 문지르는 일까지)를 전적으로 여성에게 전가했다. 아래는 1926년 미국의 진공청소기 광고내용과 현재 한국에서 시판되고 있는 진공청소기 광고이다.

"일렉트로닉스는 현대사회의 상징입니다. 일렉트로닉스는 하녀가 하는 일을 대부분 대신해주기 때문에 여성들은 힘들이지 않고 짧은 시간에 집안을 깨끗하게 청소할 수 있습니다.....일렉트로닉스-청결의 새로운 개념"-『The Home』1926년 4월 호 광고-

"우리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세수하고 양치하는 등 위생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그러나 이불, 시트, 베게, 침대 매트리스에는 집먼지진드기, 박테리아, 바이러스, 곰팡이류 등이 서식하기 적당한 온도와 습도 등 최적의 환경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또 피부각질, 먼지, 땀 등 일일이 열거하기 곤란한 물질들이 집먼지진드기의 영양공급원이 됩니다. 하루 24시간 중 약 1/3 정도를 침대에서 보내게 되므로 깨끗한 침대 매트리스의 위생관리를 위하여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불, 시트, 베게 등은 2주마다 55℃의 더운물로 세탁을 하거나 ***터보로 주기적인 청소를 해야합니다. 매트리스 세탁을 자주 할 수 없기 때문에(6개월에 1회 권장) 패드나 시트를 깔아 사용하시고 세탁하여 사용하시면 더욱 쾌적하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또한 월 1회 정도 ***터보로 주기적인 확인 청소를 하여야 합니다....결국 때는 계속적으로 먼지가 쌓이고 이를 제거하지 않은 상태에서 문질러짐 현상으로 생깁니다. 최근 우리나라는 처음 사용할 때와 보관할 때 세탁을 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으나, 이는 집 먼지 진드기 배설물 등 인체에 유해한 것들로부터 안전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번거로움으로 자주 세탁할 수 없었으나 토탈 침대 클리닉이 해결합니다.(세탁 권장주기 2개월에 1회)"
-진공청소기 "***터보" 광고-

미국에서 이전까지 중산층 가정의 청소는 우선 가정주부가 대강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난후 매일 방문하는 가정 고용인이 구석구석의 청소를 전담하는 형태였다. 그리고 이러한 청소형태에서 여성은 가정 경영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에 새로이 등장한 진공청소기는 집안을 정리하고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욕실 바닥을 박박 문지르는 모든 일을 가정 주부의 일로 만들었다. 능력 있는 여성은 굳이 하인(가정고용인)에게 집안일을 맡기지 않고 홀로 할 수 있다는 광고는 『레이디스 홈 저널』등의 기혼여성을 대상으로 한 잡지에서 화려한 이미지로 실렸다. 또한 진공청소기는 과거 집안을 쓸거나 닦는 등의 활동으로 이루어 졌던 청소과정을 눈에 보이지 않고 또한 반드시 집에만 있는 것은 아닌 미세 먼지나 진딧물로 눈을 돌리게 했다. 즉 청결의 새로운 기준을 만듦으로서 보다 많은 노동시간을 투여하게 만들었다. 여기에서 불결함에 대한 공포는 가전제품의 등장에 있어 상당히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아이의 질병이나 남편의 피로와 같은 일상적인 질병이 불결한 환경에서 기인한다는 선전은 보다 청결한 환경을 만들지 못하는 여성에게 죄책감을 갖게 했다. 이 결과 이전에 가정고용인이 담당했던 역할까지 홀로 떠맡게 되고 미세먼지와 진드기 박멸이라는 새로운 청결기준의 제시로 인해 여성의 노동시간은 증가했다.

-냉장고
현재와 같은 전기 냉장고의 등장에 얽힌 몇 가지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냉장고가 앞서 예를 들었던 가전 제품과 비슷하지만 기능성 대신 문화로서 보급되기 시작했다. 이는 지금의 냉장고 광고에 비춰보면 시사하는 점이 크다. 1925년까지만 하더라도 미국에서는 가스공급체계가 전기공급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가스냉장고(흡수식 냉장고)가 전기냉장고(압축식 냉장고)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었다{{) 냉장방식에 따른 구분인데 흡수식 냉장고는 가스가 연소될 때 주위의 열을 빼앗아 가는 것을 이용한 것이다. 그리고 압축식 냉장고는 모터를 이용해 냉매를 압축한 후 이것이 기화하면서 주위의 열을 빼앗아 가는 것을 이용한 것이다. 모터를 이용하기 때문에 압축식 냉장고는 소음이라는 문제를 현재까지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 하지만 당시 거대한 독점기업이었던 제너럴 일렉트릭의 강력한 후원하에 전기냉장고는 가스냉장고를 밀어내고 냉장고의 주류(표준)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하게 보아야 하는 것은 당시 전기냉장고가 정착하면서 사용한 마켓팅 전략이다. 비록 압축식 냉장고가 경쟁과 대량생산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이 되었다 해도 대공황기의 미국에서는 여전히 다른 가전제품에 비해 비싼 편이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무렵 미국 가계의 45%정도가 냉장고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냉장고의 성공을 만든 마켓팅의 비결은 바로 "세련된 가정 주부"라는 이미지였다. 이것의 대표적인 예는 1935년에 만들어진 광고로서 냉장고의 기능보다는 당시 헐리우드의 유명한 스타들을 동원하여 "낭만이 있는 완벽한 전자부엌"이라는 이미지를 1시간 분량의 광고로 방영한 것이다. 이처럼 앞서 청결의 새로운 기준이라는 가전의 이미지와 함께 세련되고 자유로운 부엌이라는 이미지로 냉장고가 자리잡게 된다. 하지만 냉장고의 등장은 여유있는 주부의 상을 만들지 못했음은 자명하다. 왜냐하면 냉장고가 주부를 대신하여 요리를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과거 저장음식으로서 통조림을 식탁에서 밀어내고 가사노동에 드는 시간을 증가시켰기 때문이다. 주로 조리된 상태로 판매되던 통조림 대신 직접 보관해둔 재료를 가지고 정성껏 요리하는 것이 하나의 덕목처럼 된 것이다. 냉장고가 표준을 이루게 됨에 따라 과거 통조림제조법을 소개하던 기혼 여성 대상 잡지의 내용이 보다 호화스럽고 신선한 요리를 만드는 내용으로 변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양상은 현재 two-door 대용량 냉장고 시장의 성장으로 반복되고 있다.
"당신이 꿈꾸던 생활, 인터넷 디지털 ***에 담았습니다. 대형냉장고의 편리함과 ***의 우아함에 홈 네트워킹의 중심까지! 인터넷 디지털 ***가 이끌어 갑니다. 냉장고에 저장해 놓은 ‘메모, 스케쥴, 보관식품’을 집 밖 어디서나 인터넷을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냉장고 광고-

가전제품의 등장이 가져온 변화

가전 제품의 등장이 가사노동의 개별 과정에 있어 노동강도를 감소시키는 것에 일정정도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가전제품은 청결에 대한 더 높은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전반적인 노동시간을 늘렸고 또한 '간편함'이라는 수사를 통해 가사노동을 여성이 전담하게 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그리고 이렇듯 부당한 가사노동의 집중을 당연하게 여기도록 불결함에 대한 공포를 조성하고 차 한잔의 여유-문화-라는 이데올로기를 동원했다. 바쁜 일상과 고된 집안일을 가전제품의 도움으로 덜었다는 환상은 슈퍼 우먼(연예인이나 성공한 여성으로 대표되는)의 모델제시를 통해 강화되었고, 가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질병에 대한 강조는 청결에 대한 강박을 불러왔다. 그리고 간소화된 노동이라는 것을 통해 모든 집안일을 전담하는 여성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가사노동의 전화에 있어 대안을 찾을 수 있는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으로서 모 아파트 광고에서처럼 가정 설비를 설계하는데 여성이 참여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결코 가사노동에서 여성을 해방시키는 데에 기여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가사노동의 편리함보다는 가사노동의 분담이 여성의 절대적인 가사노동시간을 줄이는데 절실하기 때문이다. 하기에 생각할 수 있는 것은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까지 미국에서 실험되었던 종교적 협동조합의 공동 가사노동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몇 가지 장애요인이 존재한다. 그것은 가전제품이 등장할 때 수많은 여성들을 자극했던 가족의 안락한 생활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여성이라는 이데올로기이다. 결국은 가부장제가 존속하는 이상 가사노동의 굴레를 깨는 현실적인 대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가사노동시간을 줄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가전 제품 기술 생산의 진척보다는 합리적 가사분담이 될 것이다. PS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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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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