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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0.2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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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정치경제학 교과서에 대한 비판적 주석(4)

마오쩌뚱 | 번역| 사회주의 문헌 번역팀
59. 도시와 농촌의 차이의 제거

651페이지의 마지막 문단은 농촌 건설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보인다. 그들이 도시와 농촌의 차이(교과서는 "기본적 차이"라고 말한다)를 제거하길 원하면, 왜 교과서는 "대도시의 기능을 축소하는" 문제는 아니라고 주장하는가? 미래의 도시는 그렇게 거대할 필요가 없다. 대도시의 주민들은 농촌 지역으로 분산되어야 한다. 다수의 소규모 도시를 건설하는 게 핵전쟁에도 상대적으로 유리하다.

60. 경제 체계를 세우는 여러 사회주의 나라들의 문제

659 페이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각각의 나라는 그 나라의 가장 유리한 자연, 경제 조건을 발전시키는데, 그리고 생산 경험과 간부가 풍부한 부문을 발전시키는데 인력과 원료자원을 집중해야 한다. 각각의 나라가 다른 나라가 공급할 수 있는 상품을 생산할 필요는 없다."
이는 바람직한 생각이 아니다. 우리는 중국의 지방 정부에게조차 이러한 방식을 제안하지 않는다. 우리는 전면적인 발전을 옹호하며, 각각의 성이 다른 성에서 공급할 수 있는 상품을 생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전반적인 역효과가 없다면, 각각의 성이 최대한 넓은 범위로 생산을 발전시킬 것을 원한다. 유럽의 장점 중의 하나는 각각의 나라가 독립되어 있다는 점이다. 각 나라는 일련의 활동을 열렬히 하고, 따라서 유럽 경제는 상대적으로 신속하게 발전한다. 진나라[의 통일] 이후, 중국은 거대 권력의 형태를 취했고, 오랜 기간 동안 대체로 통일성을 유지해왔다. 그 단점 중의 하나는 관료주의였다. 관료주의의 숨막히는 통제 아래에서, 지방은 독립적으로 발전할 수 없었고, 모든 게 임시변통인 가운데 경제 발전은 매우 늦었다. 현재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통일성 속에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하며, 또한 각각의 성은 독립성을 획득할 것이다. 이는 상대적 통일성이며 상대적 독립성이다.
각 성은 자신의 문제를 독립적으로 해결해야 하며, 동시에 중앙정부의 결의안을 따르고 통제를 받아들여야 한다. 반면, 주요 문제에 관한 중앙의 모든 결의안은 중앙과 성의 협의를 통해, 공동으로 만들어야 한다. 일례로, 루샨(廬山) 회의의 결의안은 이런 방식을 따랐다.{{) 마오는 1959년 7-8월에 열린 루산(廬山) 회의를 다시 언급하고 있다. 류산 회의에서는 마오와 팽 더화이(彭德懷)와의 갈등이 핵심 문제가 되었다.
}} 결의안은 전국의 요구와 일치해야 할 뿐만 아니라, 각각의 지방의 요구와도 일치해야 한다. 지방이 아니라 오직 중앙만이 우익 기회주의에 반대해야한다는 입장을 누가 취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지방이 전국의 요구에 부합하여 통일된 계획 아래에서 일련의 활동에 완전히 전념하도록 하는 것을 옹호해야 한다. 원료와 시장이 있다면, 그리고 원료를 얻을 수 있고 판매가 지방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일은 가능한 한 모두 이뤄져야 한다. 이전에 우리의 생각은 지방이 발전하면, (예를 들면 상하이와 같은 지역에서 나오는) 다양한 공업, 공업 상품이 요구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현재 이러한 경우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상하이는 이미 고도의, 대규모의, 더 양질의 생산을 발전시키고 있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은 아직도 많이 있다!
나는 왜 교과서가 각각의 나라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최대한의 일을 하는 것을 옹호하기보다는 다른 나라에서 공급할 수 있는 상품은 생산하지 않기를 옹호하는지 의아하다. 올바를 방법은 자력갱생을 위한 수단으로 각각의 나라 스스로가 최대한의 생산을 이루며, 최대한 독립적으로 활동하며, 다른 이에게 의존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며, 그것이 진정으로 정말로 이루어질 수 없을 때에만 의존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농업은 가능한 최대한도로 이루어져야 한다. 식량을 다른 나라나 다른 지방에 의존하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
일부 나라들은 너무 작아서, 교과서의 정확한 표현에 따르면, "모든 산업 부문을 발전시키는 것은 경제적으로 불합리하며, 각 나라의 역량은 그 임무를 감당하기 어렵다." 물론 그러한 경우에는 그 나라는 그것을 억지로 해서는 안 된다. 중국의 지방 중 인구가 적은 지역-칭하이 또는 닝샤-을 포괄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은 매우 어렵다.

61. 다양한 사회주의 나라들의 발전은 균등해질 수 있나?

660페이지의 세 번째 문단은 "다양한 사회주의 나라의 경제적 문화적 발전의 총괄적 수준은 점차 비슷해지고 있다"고 말한다. 각 나라는 인구, 자원 기반, 역사적 조건이 같지 않다. 각 나라의 혁명 중 일부는 더욱 후진적이며, 다른 나라의 경우는 선진적이다. 어떻게 그들이 균등해질 수 있는가? 만약 많은 자식이 있을 때, 일부는 키가 크고 일부는 작으며, 일부는 덩치가 크고 일부는 작으며, 일부는 똑똑하고 일부는 둔한데, 어떻게 그들이 균등해질 수 있나? 이는 부하린의 균형 이론이다. 여러 사회주의 나라의 경제 발전은 균형적이지 않으며, 한 나라의 지방들의 경우도 그러하며, 그 지방 내부의 마을들의 경우도 그러하다. 쿠안퉁 성의 공중보건의 예를 들어보자. 포샨 도시와 치흘로 인민공사는 일을 잘 해내었다. 포샨은 성 전체와 균형을 이룬 것은 아니며, 치흘로는 샤오쿠안과 균형을 이루지 않았다. 불균형에 반대하는 것은 오류이다.

62. 궁극적인 문제는 체계의 문제다.

668페이지는 사회주의의 대부는 제국주의의 대부와 다르다고 말한다. 이는 사실과 일치한다. 사회주의 나라는 자본주의 나라보다 항상 바람직하다. 우리는 이 원칙을 이해하고 있다. 궁극적인 문제는 체계와 제도다. 체계는 그 나라가 취할 방향을 결정한다. 사회주의 체계는 사회주의 나라가 항상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위치에 서있게 할 것이며, 사회주의의 타협은 항상 일시적이라는 점을 결정한다.

63. 세계의 두 경제체계간의 관계

658페이지는 "두 세계체계간의 경쟁"에 대해 언급한다. <소련 사회주의의 경제적 문제>에서 스탈린은 두 세계시장에 관한 논쟁을 제기했다. 교과서는 두 체계간의 평화적인 경쟁과 경제적 관계에서 "평화적 발전"의 구축을 강조한다. 이는 실제로 현존하는 두 개의 세계시장을 통일된 세계시장 내부의 두 경제체계로 뒤엎는 것이다―이는 스탈린의 관점으로부터 후퇴하는 것이다.
두 개의 경제 체계 사이에는 사실상 경쟁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맹렬하고 광범위한 투쟁이 존재하지만, 교과서는 투쟁을 멀리하고 있다.

64. 스탈린의 비판

스탈린의 <소련 사회주의의 경제적 문제>는 다른 저작과 마찬가지로 잘못된 주장들을 담고 있다. 그러나 681 페이지의 두 가지 비난은 설득력이 없다.
하나의 비난은 스탈린이 "상품 유통은 이미 생산력 발전에 장애물이 된 것처럼 보인다. 산업과 농업간의 직접적인 생산 교환으로 점진적으로 이행할 필요성이 완전히 형성되었다" 말한 것에 관련된다.
스탈린은 그 책에서 두 종류의 소유체계가 존재할 때 상품생산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는 집단농장의 기업에서는 생산수단(토지, 도구 등)이 국가에 속하지만 생산된 상품은 각각 분리된 집단농장의 소유물이라고 말했다. 그 이유는 집단농장의 노동(예를 들어 씨뿌리기)이 집단농장에 의해 소유되며, 토지는 국가가 영구적인 사용을 위해 준 것이지만 사실상 집단농장의 소유물처럼 집단농장에 의해 통제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집단농장은 교환을 통해 그들이 원하는 상품을 획득하려는 기대 속에서, 그들이 오직 상품형태로 생산한 것들을 기꺼이 유통 속으로 풀어놓는다. 현재 시점에서 집단농장은 판매와 구매를 통한 교환의 경제적 관계로 진입하는 것일 뿐이다." 스탈린은 상품생산의 폐지를 옹호한 것이며, 소련의 최근의 관점 즉 상품생산을 발전시키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레닌이 선언한 30년 전만큼 지금도 상품생산이 필요하다는 관점을 비판한 것이다.
교과서는 스탈린이 상품의 즉각적인 제거를 옹호하였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이러한 비난은 올바르다고 말하기 어렵다. 상품교환의 문제에 관해서 스탈린의 주장은 단지 가설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이러한 체계를 즉각 촉진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도시에서 제작되는 물품들의 축적의 정도에 따라 결정되어야만 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비난은 스탈린이 생산 특히 생산수단의 생산의 범위에서 가치법칙의 작동을 과소평가 했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회주의 생산의 범위에서 가치법칙은 아무런 조절의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 이러한 역할은 계획된 균형발전과 국가의 계획경제에 의해 수행된다." 교과서의 이러한 주장은 사실상 스탈린 자신의 주장이다.
교과서는 생산수단은 상품이라고 말하지만, 그러함에도, 무엇보다도 생산수단은 전인민의 소유의 범주라는 점을 확인해야 한다. 생산수단의 구매와 판매는 결코 소유를 바꾸는 게 아니다. 두 번째로, 교과서는 생산의 영역 및 유통의 과정에서 가치법칙은 다르게 작동한다는 점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러한 점은 스탈린과 일치한다. 스탈린과 후르시초프의 진정한 차이점은, 스탈린은 트랙터 등의 생산수단을 집단농장에 판매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후르시초프는 그것들을 판매했다는 점이다.

65. 교과서의 일반 관점

교과서에 맑스-레닌주의가 없다고 생각하지 말자. 왜냐하면 교과서는 맑스-레닌주의의 관점을 많이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과서 전체가 맑스-레닌주의적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왜냐하면, 맑스-레닌주의를 이탈한 관점을 많이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교과서가 근본적으로 부정적이라고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교과서는 사회주의 경제가 소수 착취자의 이해타산에 봉사하지 않고, 전인민을 위해 봉사한다고 강조한다. 교과서가 논하고 있는 사회주의의 기본 경제법칙이 모두 오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법칙은 교과서의 근본 주제이다. 또한 교과서는 계획, 균형, 높은 속도의 발전 등을 설명하며, 이런 점에서 교과서는 사회주의적이며 맑스주의적이다. 그러나, 일단 계획과 균형을 인정하더라도, 어떻게 이를 이룰 것이냐는 매우 다른 문제다. 우리는 각각 다른 관점을 갖고 있다.
그렇지만, 교과서는 몇몇 기본 주장은 오류다. "정치 우선"과 "대중노선"을 강조하지 않았다. "두 다리로 걷기"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개인의 물질적 이해를 일방적으로 강조한다. 물질적 인센티브를 선언하였고, 개인주의를 지나치게 우선시한다.
사회주의 경제를 연구하면서 교과서는 모순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사실, 모순의 보편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사회적 모순이 사회발전의 원동력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다. 각 사회[*사회주의 사회, 1967년 판]에는 계급투쟁, 즉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유물간의 투쟁이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 사회[*사회주의 사회, 1967년 판]는 세 가지 소유 유형이 있다. 전인민 소유, 집단 소유, 개인 소유 등이다. 물론, 개인 소유는 집단화 이전에 농민들의 생활이 완전히 개인 소유에 기초했던 때의 개인 소유와 같지 않다. 현재 그들은 한발은 배에 한발은 물가에 두고 있으며, 주로는 집단 소유에 의지하고 있으나 동시에 개인 소유에 의지하고 있다. 서로 다른 유형의 소유가 있다면, 모순과 투쟁이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교과서는 이를 논하지 않는다. 대중운동을 고양시키는 데 대한 언급이 없다. 사회주의에서의 집단 소유를 사회주의의 공적 소유로 이행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으며, 공산주의의 전제 조건으로서 전인민의 불가분한 소유로 전체 사회를 전환해야한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다. 교과서는 "화해"와 "일치' 등과 같은 모호한 용어를 사용하며, 하나의 소유체계는 다른 소유체계로 변화하며 어떤 생산관계는 다른 생산관계로 바뀐다는 개념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이런 측면에서 교과서는 심각한 결점과 오류가 있으며, 맑스-레닌주의에서 크게 일탈했다.
교과서의 서술은 매우 빈곤한데, 설득력도 없고 흥미롭지도 않다. 교과서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에서 출발하지 않으며, 경제적 토대와 상부구조간의 모순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문제를 제기할 때나, 과제를 연구할 때, 교과서는 항상 일반적 관념이나 정의에서 시작한다. 교과서는 합리적인 설명 없이 개념을 제시한다. 사실, 정의는 분석의 결과로 나와야지, 출발점이 되어선 안 된다. 교과서는 근거를 제시하지 않으며, 일련의 법칙을 제안하는데, 이 법칙은 구체적인 역사발전에 대한 분석을 통해 발견되고 증명된 것이 아니다. 법칙은 스스로 설명하는 게 아니다. 구체적인 역사 과정과 발전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법칙을 분명하게 설명할 수 없다.
교과서는 주제를 총체적으로 다루거나, 문제를 능수능란하게 다루지 못한다. 문제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구성이 설득력이 없고, 우둔하며 비논리적이며, 심지어 형식논리마저 결핍되어 있다. 교과서는 다른 저자들에 의해 쓰여진 것 같은데 각각이 한 장씩 쓴 듯하다―통일성이 결여된 노동의 분할. 교과서가 가져야 할 체계적 질서를 결여하고 있다. 이 중 첫 번째는, 교과서의 방법이 정의에서 출발한다는 점이며, 마치 경제사전처럼 읽힌다. 저자들은 수동적이며, 많은 부분이 모순적이며, 전반부와 후반부는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협동적 노동분할과 집단적 저술은 하나의 방법이다. 그러나 가장 좋은 방법은 몇 명의 보좌인들과 함께 한 명의 지도자가 저술하는 것이다. 이것이 맑스와 그의 서클이 사용했던 방법이며, 그들의 작업은 통합적이며, 엄격하며, 체계적이고 과학적이다.
글을 쓸 때, 비판의 대상이 있을 때, 그 결과가 흥미로울 것이다. 교과서는 몇몇 올바른 주제를 잡았지만, 틀린 관점에 대한 비판을 전개하지 않았다. 따라서 교과서는 읽기에 지루하다.
많은 부분에서, 독자는 학자가 말을 하는 것처럼 느낄 뿐, 혁명적이라 느끼지 못한다. 경제적 실천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제학자는 진정한 전문가가 아니다. 교과서는, 실천적인 활동을 하지만 개념과 법칙이 부족하여 이를 일반화할 능력이 부족한 상황, 반면 이론적 활동을 하지만 실천적 경험이 부족한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두 가지 상황이 통합되지 않았다. 즉 이론과 실천이 통합되지 않았다.
교과서는 저자가 변증법적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경제학 교과서를 쓰기 위해서는 반드시 철학적으로 사고해야 한다. 철학자가 저술에 참여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만족스러운 교과서를 저술할 수 없다.
교과서의 1판은 1955년에 나왔다. 그러나 기본 틀은 그 이전에 잡힌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교과서는 스탈린이 과거에 만든 모델을 매우 새롭게 조명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오늘날 소련에서는 교과서를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해 불일치가 존재한다. 코즐로프(G. Kozlov)는 이 교과서를 비판하는 [사회주의 정치경제학 학습의 과학적 과정]이란 제목의 논문을 썼다. 그의 관점은 문제의 뿌리로 나아간다. 그는 교과서의 방법론적 오류를 지적하고 사회주의 생산과정에 대한 분석에서 시작하는 법칙의 설명을 요구한다. 그는 또한 [교과서의] 구성에 관해 제안한다.
코즐로프와 다른 이들의 비판의 관점에서, [교과서와는] 반대로 접근하는 다른 교과서가 소련에서 생산될 것이다. 반대는 항상 좋다.
이 교과서를 처음 읽을 때 독자는 그것의 방법과 관점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학습을 통한 것이 아니다. 앞으로 가장 최선의 방법은 핵심적인 쟁점과 논증을 취하며, 섬세한 연구를 진행하고, 여러 자료를 모으며, 이 교과서와 다른 관점을 갖는 유용한 논문, 책, 보고서 등을 조사하는 것이다. 모순적인 쟁점에 대한 다른 의견에서 생각을 취해야 한다. 쟁점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 최소한 두 편의 관점들이 이해되어야만 한다.
우리는 반드시 틀린 의견을 비판하고 반대해야 하지만, 또한 옳은 의견을 보호해야 한다. 격려와 주의가 모두 요구된다.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을 저술하는 것은 전체적으로 커다란 임무다. 교과서가 얼마나 많은 문제를 담고 있건 간에, 이 책은 최소한 토론을 위한 자료를 우리에게 제공하며, 이 책 덕택에 더 깊은 학습으로 나아갔다.

66. 정치경제학 교과서를 어떻게 쓸 것인가?

원칙적으로, 교과서가 소유체계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훨씬 더 좋은 방식이 있다. 자본주의 경제를 연구하기 위해, 맑스 역시 자본주의에서의 생산수단의 소유를 주로 검토했으며, 어떻게 생산수단의 분배가 상품의 분배를 결정하는가를 조사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소유의 사적 성격은 기본적인 모순이다. 맑스는 상품에서 출발하여, 상품(사물들간의 관계) 뒤에 숨겨진 인간들간의 관계를 밝히는 데로 나아갔다. 사회주의에서 상품은 여전히 이중성을 갖는다. 하지만 생산수단의 공적 소유가 확립되고 노동력이 더 이상 상품이 아니기 때문에, 사회주의에서 상품의 이중성은 자본주의에서 이중성과 같지 않다. 인간들간의 관계는 더 이상 상품관계 뒤에 숨어 있지 않다. 따라서 맑스의 방법을 모방하여 사회주의 경제를 상품의 이중성에서 출발하여 검토한다면, 문제를 더욱 혼란하게 만드는 역효과를 낳을 것이며, 사람들이 문제를 더욱 이해하기 힘들게 될 것이다.
정치경제학은 생산관계를 연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스탈린이 이해했던 것과 같이, 생산관계는 세 가지를 포함한다. 이는 소유, 노동 과정에서의 인간들간의 관계, 상품의 분배이다. 중국에서 정치경제학 교과서를 서술할 때, 우리 또한 소유체계로부터 출발할 수 있었다. 먼저 우리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에서 공적 소유로의 전환을 서술하였다. 우리는 어떻게 관료자본의 사적 소유와 자본주의적 소유체계를 전인민의 사회주의적 소유로 전환시켰는가를 서술했다. 그리고, 어떻게 지주에 의한 토지의 사적 소유를 개인 농민의 사적 소유로 전환시켰고, 그 후에 사회주의 집단 소유로 전환시켰는가를 서술했다. 그 다음에야 우리는 사회주의의 공적 소유의 두 형태간의 모순을 서술했고, 어떻게 사회주의 집단 소유를 공산주의의 전인민의 소유로 이행시킬 것인가의 문제를 서술했다. 동시에, 우리는 어떻게 전인민의 소유 그 자체가 변화하는가를 서술해야만 했다. 즉 간부의 하방 체계, 여러 차원의 기업 관리, 기업의 자율권 등을 서술했다. 우리의 기업들은 전인민의 소유라는 점은 똑같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관리된다. 일부는 중앙 부서에 의해 관리되며, 다른 일부는 성(省), 직할시, 자치구에 의해 관리되며, 기타 나머지는 특별행정구에 의해 관리된다. 일부 인민공사가 운영하는 기업은 반(半)은 전인민의 소유이며 반(半)은 집단소유다. 그러나 중앙정부가 관리하건 또는 지방정부가 관리하건 간에, 기업은 모두 통일된 지도를 따르고 있으며, 특정한 자율권을 갖는다.
생산 노동 과정에서 인간들간의 관계의 문제를 살펴보자. "동지적 협조와 상호지원의 관계"라는 언급은 논외로 둔다고 하더라도, 교과서 본질적인 문제를 파악하는데 완전히 실패했으며, 이 영역에 대한 조사와 분석을 전혀 하지 않았다. 소유체계의 문제가 해결된 후, 가중 중요한 문제는 관리의 문제다―전인민 소유 및 집단 소유 기업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이는 전인민 소유 및 집단 소유 체계에서 인간들간의 관계의 문제와 동일한 문제이며, 많은 연구가 행해져야 할 주제다. 특정 시기 동안 소유체계의 변화는 한계가 있는 반면, 생산 노동에서 인민들간의 관계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전인민 소유의 기업의 관리에 관해 우리는 일련의 접근 방식을 채택했다. 집중 지도와 대중운동의 결합, 당 지도자, 노동자 대중, 기술자의 결합, 간부의 생산노동 참여, 노동자의 관리 참여, 불합리한 규칙과 규제의 끊임없는 변화 등.
상품에 분배에 관한 한, 교과서는 새로 작성되어야 하며, 접근 방식 모두를 바꿔야 한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투쟁, 확대 재생산, 공산주의의 미래 전망 등이 강조되어야하지, 개인의 물질적 이해가 강조되어선 안 된다. 인민을 지도하는 목적은 "배우자, 주택, 자동차, 피아노, 텔레비전"이 아니다. 이는 자신을 위한 방식이지, 사회를 위한 방식이 아니다. "만리 길의 여행도 지금 서있는 곳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발끝만을 쳐다본다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제기된다. 혁명적 흥분과 열정 중 무엇이 남을 것인가? [*1967년 판은 "여행을 위해 어떤 에너지가 남을 것인가?"]

67. 본질에 도달하기 위해 어떻게 현상을 연구할 것인가?

문제를 검토할 때, 현상의 뒤에 숨어 있는 본질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보고 느끼는 현상에서 출발해야만 한다. 즉, 현상에서 시작해야 객관적 사물과 사건의 본질과 모순을 밝힐 수 있다.
내전과 항일전쟁 시기, 전쟁 문제에 관한 우리의 연구는 현상에서 출발했다. 적은 크고 강했으며, 우리는 작고 약했다. 이는 당시에 가장 명백한 현상이었으며,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우리는 문제를 연구하고 분석했다. 현상에서 출발하여, 어떻게 작고 약한 편이 크고 강한 적을 패배시킬 수 있는가를 연구했다. 비록 우리는 작고 약했지만 대중의 지지를 받으며, 적은 크고 강했지만 특정 지역에서 습격에 취약하다는 점을 파악했다. 적이 수십만 명이고 우리가 수천 명일 때, 우리는 내전을 택했다. 전략적으로 적은 강하고 공격적이었고, 우리는 약하고 방어적이었다. 그러나 적은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몇 개의 부대로 나눠야만 했고, 또한 부대를 몇 개의 분견대로 나눠야만 했다. 일반적으로, 우리로 하나의 중대가 적의 강한 곳을 공격할 때, 나머지는 계속 이동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적의 한 부대를 공격하기 위해 수만 명을 집중했고, 심지어 적 부대의 한 곳을 공격하기 위해 우리 군대의 대다수를 집중하기도 했고. 동시에 나머지는 계속 이동 중인 적 기병대의 주의를 다른 데로 돌렸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특정한 곳에서 우월성을 획득했다. 적은 점차 작고 약해졌으며, 우리는 크고 강해졌다. 또한, 그들이 어떤 장소에 도착했을 때, 그들에게 불리한 조건이 있었는데, 대중이 그들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적을 완전히 쓸어버릴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데올로기는 현상의 운동을 본 따서 체계화된다. 생각과 지식은 물질의 운동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법칙은 현상의 운동 속에서 반복되어 나타나지, 우발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사물의 현상이 반복된 후에야, 그것은 법칙이 되며,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예컨대, 자본주의의 위기는 십 년마다 발생한다. 이러한 위기가 반복해서 발생할 때, 우리는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 위기 법칙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토지 개혁을 시행할 때, 우리는 토지를 노동력이 아니라 주민 수에 따라 분배해야만 했다. 그러나 우리는 토지개혁을 여러 번 시행하기 전까지, 이를 분명히 이해하지 못했다. 2차 내전의 후반부, "좌익" 모험주의는 노동력에 따는 토지 분배를 요구했고, 머리수로 나누어 토지를 분배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들의 시각에서 볼 때는, 주민 수에 따른 토지분배는 계급적 관점을 엄격하게 따르는 것이 아니며, 대중의 관점에서 불충분한 것이었다. 그들의 슬로건은 "지주에게는 토지를 줄 수 없다, 메마른 토지는 부농에게, 노동력에 따른 토지 분배"였다. 현실은 이러한 접근이 오류였다는 점을 증명했다. 우리는 반복되는 경험을 통해서, 어떻게 토지가 분배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분명한 관점을 수립할 수 있었다.
맑스주의는 논리와 역사가 일치할 것을 요구한다. 사고는 객관적 존재의 반영이다. 논리는 역사로부터 유래한다. 이 교과서는 객관 현실은 풍부하지만, 분석이 없고, 논리도 없으며, 법칙을 이해할 수 없으며, 불충분하다. 그러나 객관 현실이 부족한 것도 불만족스러운 요소다. 그러면 사람들이 단지 논리만을 이해하고, 역사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그것은 단지 주관적 논리가 될 것이다. 이 교과서의 결점은 정확하게 이것이다.
중국 자본주의의 발전의 역사를 제시하는 게 관건이다. 역사를 연구하는 자가 다른 사회들, 다른 시대들을 연구하지 않는다면, 포괄적인 역사를 훌륭하게 제시하지 못할 것이다. 다른 사회들을 연구하는 것은 이들 사회를 지배하는 특수 법칙들을 발견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단 특수 법칙이 연구되고 분명하게 이해된다면, 사회의 일반 법칙을 이해하는 것은 쉬울 것이다. 많은 특수성과 일반성을 구분하는 게 필수적이다. 특수 법칙이 분명하게 이해되지 않는다면, 일반 법칙 역시 그러할 것이다. 예컨대, 동물을 지배하는 일반 법칙을 연구하기 위해서, 척추동물, 무척추동물 등을 각각 분리해서 연구하는 게 필수적이다.

68. 철학은 반드시 우리의 당면한 정치적 임무에 봉사해야 한다.

모든 철학은 당대의 임무에 복무한다. 자본주의의 철학은 이러한 기능을 한다. 모든 민족, 모든 시대에는 당대의 정치적 임무를 위해 새로운 이론을 생산하는 새로운 이론가가 있다. 영국에는 베이컨과 홉스와 같은 부르주아 유물론자가 있었다. 그리고 18세기 프랑스에는 백과사전파와 같은 유물론자가 등장했다. 독일과 러시아에도 부르주아 유물론자가 있었다. 이들은 모두 부르주아 유물론자였으며, 부르주아 계급의 정치적 임무에 봉사했다. 영국의 부르주아 유물론이 있다고 하여 프랑스 유물론이 필요가 없었던 건 틀림없이 아니었으며, 영국과 프랑스의 부르주아 유물론이 있기 때문에 독일 또는 러시아의 유물론이 불필요했던 것도 아니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맑스주의 철학은 더욱더 당대의 정치적 임무에 복무하기 위해 힘쓴다. 중국에서 맑스, 레닌, 스탈린[*1967년 판에선 삭제됨]은 필수적으로 읽혀지고 있다. 그것은 우선이다. 그러나 모든 나라의 공산주의자와 프롤레타리아 철학 집단은, 그들이 당면한 정치적 임무에 봉사하기 위해, 새로운 이론을 창조하고, 새로운 글을 쓰고, 그들 스스로 이론가를 생산해야만 한다.
어떤 민족도 항상 오래된 것에 의존할 수만은 없다. 레닌의 <두 가지 전술> 및 다른 저술 없이 단지 맑스와 엥겔스만으로는, 1905년과 그 후의 새로운 문제를 풀 수 없었다. 1907년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만으로는 10월 혁명 전후의 새로운 문제에 충분히 대처할 수 없었다. 당대의 요구에 부합하기 위해 레닌은 <제국주의>, <국가와 혁명> 등을 저술하였다. 레닌 이후에, 스탈린은 반동에 대항하고 레닌주의를 지키기 위해 <레닌주의의 기초>와 <레닌주의의 문제>를 저술하였다. 중국에서 2차 내전이 끝나고 항일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우리는 <실천론>과 <모순론>을 썼다. 그 저술은 당시의 요구에 부합하기 위한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사회주의의 시기에 돌입했고, 새로운 문제가 등장했다. 새로운 요구에 부합하여, 우리가 새로운 문헌을 저술하고 새로운 이론을 형성하지 않는다면, 사회주의는 성공할 수 없다!

부록

1. 중국의 산업화 문제

소련의 1차 5개년 계획이 완료된 후, 대규모산업의 생산물 가치가 모든 산업과 농업생산물 가치의 70%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산업화가 실현되었다고 즉각 선언했다. 우리 역시 그러한 표준에 빠르게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설사 그렇게 한다해도, 우리는 여전히 산업화가 실현되었다고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농업에 헌신하는 5억 이상의 농민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산업생산이 70%일 때 산업화가 주장된다면, 국가 경제의 실제 조건을 정확히 반영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부정확한 분위기를 조성될 것이다.
8차 전인대 1차 총회에서 우리는 2차 5개년 계획에서 사회주의 산업화의 견고한 토대를 건설할 필요성에 대해 말했다. 또한 대략 15년 내에 통합된 산업체계를 건설할 것이라고 했다. 이 두 가지 진술은 다소 모순되는데, 왜냐하면 완전히 갖춰진 산업체계 없이 사회주의 산업화를 위한 "견고한 토대" 건설을 말할 수 있겠는가? 지금 상태로는, 3년이 지나면 우리는 기초 산업생산품에 있어서 영국을 능가할지도 모른다. 그 다음 5년이 지나면 우리는 산업체계 건설 과업 실현을 완료할 수 있을 것이다.
장기적으로 우리는 산업적 농업국으로 알려지길 바란다.[*1967년 글에서는 "... 우리는 산업국가로 알려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철강 1억 톤 이상을 생산하더라도 여전히 그럴 것이다. 만약 1인당 생산이 영국을 능가하려면, 우리는 적어도 철강 3억5천 톤을 생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한 나라를 골라서 경쟁하는 것은 특별한 중요성이 있다. 우리는 항상 영국을 따라잡는 것에 대해 얘기한다. 그 첫 걸음은 기초 생산품에 있어 따라잡는 것이요, 그 다음은 1인당 생산을 따라잡는 것이다. 조선과 차량 제조에 있어서는 우리가 여전히 영국에 훨씬 뒤져있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따라잡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심지어 일본처럼 작은 나라도 4백만 톤의 상업선박 용량을 갖고 있다. 우리같이 큰 나라가 그 상품을 나를 선박이 부족하다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1949년에 우리는 9만 혹은 그 이상의 공작기계 세트를 보유하고 있었다. 1959년까지 그 숫자는 49만으로 증가하였다. 1957년에 일본은 60만이었다. 공작기계의 숫자는 산업 발전 수준의 중요한 지표이다. 샹하이를 보고 우리의 기계화 수준은 여전히 아주 낮다고 단순히 말할 수 있는데, 가장 최근의 조사에 따르면 상하이에서는 기계화된 노동, 반기계화된 노동, 수작업 노동이 각기 1/3씩 구성하고 있다.
소련의 산업에서 노동생산성은 아직 미국을 능가하지 못했다. 우리는 훨씬 뒤져있다. 우리 나라 인구가 거대함에도 불구하고 노동생산성은 다른 나라와 비교할 때 아직 갈 길이 멀다. 1960년부터 우리는 13년 동안 집중적으로 일해야 할 것이다.

2. 사회적 위치와 개인 능력

488페이지에서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한 개인의 위치는 노동과 개인 능력에 의해서만 결정된다고 한다. 이것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열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은 항상 낮은 지위로부터 유래한다. 그들은 다른 이들에 의해 멸시받고 경멸에 고통받는다. 그리고 그들은 젊다. 사회주의 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옛날 사회에서 억압받은 사람들이 빈약한 문화를 가졌지만 더 열정적이었다. 억압자들은 높은 수준의 문화를 가졌지만 다소 지체하는 면이 있었다. 오늘날 이것에 대한 얼마간의 위험이 존재한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높은 급여를 받는 계층은 좀더 많은 문화지식이 있지만 낮은 계층에 비교할 때는 좀 더 지체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우리 당세포의 아들, 딸들은 당세포가 아닌 이들의 자식들과 비교도 안 된다.
소규모 설비로도 많은 창조와 발견을 했다. 대규모 공장은 우수한 설비와 새 기술을 가질 수 있다. 바로 그 이유로 직원들은 너무 자주 자기중심성을 뽐내고, 그들의 처지에 만족하며 진보를 구하지 않고 야심차게 뻗어나가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창조성을 소규모 공장과 비교하려 하지 않는다. 최근에 장쩌우에서는 직조기의 효율성을 높이는 장치를 고안한 노동자들이 있는 직조공장이 있었다. 이것은 면방적, 직물제조, 인쇄와 염색에서 균형적인 능력을 달성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새 기술은 샹하이나 톈진이 아니라 장쩌우 같은 작은 곳에서 개발된 것이다.
지식은 역경을 거쳐 획득되는 것이다. 만약 츄 유안(屈原)이 공직에 남아있었다면 그의 작품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츄 유안(쿠 유안, 屈原)은 기원전 3세기 초 무렵의 주나라 귀족이었다. 그는 공직을 박탈당한 후, 통치자를 생각하며 공상적이며 기발한 음미인 리사오(애가)를 저술했다. 그리하여 그는 절망에서 벗어나 저술에 몰두하였다.
}} 오로지 그가 지위를 잃고 "노동을 수행하기 위해 아래로 이전"되었기 때문에 그는 사회의 삶에 접근해서 리 사오와 같은 훌륭한 작품을 생산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공자는 많은 나라에서 거절당하고 나서야 방향을 돌려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이곳 저곳으로 노동력을 팔러 돌아다니는 아무런 자리가 없는 자를 규합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을 쓰려하지 않았다. 모든 시도에서 절망한 그는 아무런 대안이 없었지만 지금 '시경(詩經)'이라고 알려진 민요를 수집했고 '춘추(春秋)'라고 알려진 사료를 정리했다.
역사적으로, 많은 진보는 진보된 나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비교적 후진국에서 나왔다. 맑시즘은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그 시대의 비교적 발전된 나라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 있었던 독일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것에 대한 이유가 있다.
마찬가지로 과학적 발명은 높은 문화와 교육 수준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다. 오늘날 아무 것도 발명하지 못한 대학교수들이 많이 있다. 물론, 이것이 기술자와 노동자 사이의 차이점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기술자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 진정한 질문이 있다. 역사적으로, 대개 문화적 우수함을 이기는 것은 문화적 열등함이었다. 내전 당시 다양한 수준의 지휘자들은 국내나 국외 군사학교 출신의 국민당 장교들에 비해 문화적으로 열등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물리쳤다.
인간이라는 동물은 타인을 멸시한다는 결점을 가지고 있다. 작은 일을 성취한 사람은 아직 그렇지 못한 이들을 멸시한다. 거대한 권력과 부자 나라들은 작고 가난한 이들을 멸시한다. 서구 국가들은 역사적으로 러시아를 멸시한 것이다. 중국은 그와 여전히 비슷한 위치에 있다. 이유가 있는데, 우리가 아직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나라는 크지만 철강생산은 소량이고 너무나 많이 문맹이다. 사람들이 우리를 멸시하는 것은 우리에게 득이 될 것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나아가게 할 것이다.

3. 대중에게 의지하는 것

레닌은 그가 "사회주의는 원기왕성하고 생기있고 창조적이다 - 이는 대중 스스로의 창조이다"라고 말했을 때 이를 잘 표현했다. 우리의 대중노선은 이와 같다. 이것이 레닌주의와 일치하지 않는 것인가? 이 진술을 인용한 후 교과서는 "광범위한 노동 대중은 생산 관리, 국가 사무, 사회 모든 부문의 지도에 있어 직접적이고 활동적인 방식에 점점 참가하고 있다"고 말한다(p.332). 이 또한 잘 표현된 것이다. 그러나 서술과 실천은 다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쉽지 않다.
1928년에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당과 노동자와 농민 대중이 한계까지 동원될 때에만 우리는 자본주의 국가를 기술적이고 경제적으로 따라잡는 과업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p.337). 이것은 아주 잘 표현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확히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당시 스탈린은 대중 이외에는 의지할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당과 대중의 전체 동원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어느 정도 이득을 얻게 되었다고 실감하게 된 후, 그들은 점점 덜 대중에 의지하게 되었다.
레닌은 "진정한 민주집중제는 다방면의 진로와, 형태와 방법 - 이것에 의해 지역적인 창조력과 주도력의 정신이 일반적 목표를 달성한다 - 이 충분히 방해받지 않고 발전할 것을 요구한다"고 말했다(p.454). 잘한 말이다. 대중이 길을 창조할 수 있다. 대중이 러시아 소비에트를 창조한 것이다. 그리고 대중이 우리의 인민공사를 창조했다.

4. 소련과 중국 : 발전 과정상의 몇 가지 비교지점

422페이지에서 교과서는 레닌을 인용한다. "만약 국가권력이 노동계급의 손에 있으면 국가자본주의를 통해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기타 등등. 이것은 잘 표현된 것이다. 레닌은 견실한 노동자였다. 10월 혁명이후 프롤레타리아는 경제를 관리하는 경험이 없었다는 것을 그가 인식했기 때문에 그는 국가자본주의 방식으로 이 영역에 있어 프롤레타리아의 능력을 발전시키려 시도한 것이다. 러시아 부르주아는 그 당시 프롤레타리아의 힘을 과소평가 했다. 레닌의 조건을 거부하면서 그들은 경기후퇴와 파괴적 행위를 자행했고 노동자로 하여금 재산을 몰수하게 했다. 이것이 국가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없었던 이유이다.
내전기간 동안 러시아의 문제는 정말 막대했다. 농업은 파탄났다. 상업 연계는 붕괴되었다. 통신과 운송은 거의 기능하지 못했다. 원자재는 보관될 수 없었고 몰수된 많은 공장은 가동을 시작할 수 없었다.
이것에 대해 그들은 실제 해답이 없었기 때문에 농민의 잉여농산물을 요구하는 체계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이것은 농민이 노동한 성과를 아무런 보상도 없이 취하는 방식이었고, 농민의 항아리와 궤짝을 샅샅이 뒤지는 방법이었다. 건전한 실천이 아니었다. 내전이 끝났을 때에야 이 체계는 곡물세로 대체되었다.
우리의 내전은 러시아보다 훨씬 오래 지속됐다. 22년 동안 공공 농산물을 징수하고 잉여 농산물을 구입하는 게 기층에서 우리의 실천이었다. 우리는 농민에 대해 올바른 전략을 세웠고 전쟁동안 그들에게 크게 의존했다.
22년 동안 우리는 기층에서 정치권력을 발전시켰고 기층의 경제를 관리하는 경험을 축적했다. 우리는 당세포가 경제를 관리하도록 훈련시켰고 농민과 동맹을 형성하였다. 그리하여 나라 전체가 해방된 이후 우리는 신속하게 경제회복 과업을 완수하였다. 그 후 즉시 우리는 이행기의 총노선을 제기하였는데, 즉 1차 5개년 계획 아래에서 건설 초기의 우리의 주된 노력을 사회주의 혁명에 투여한 것이다. 사회주의 이행을 수행하면서 자본가를 처리하기 위해 우리는 농민과 함께 했다. 어쨌든 레닌은 쁘띠부르주아의 자발성에 대처하는 방법으로서 자본주의를 국가자본주의로 변화시킬 희망으로 자본과들과 협상도 감내할 수 있다고 말했을 때가 있었다. 상이한 역사적 조건에서는 상이한 정책이 제기되는 것이다.
신경제정책(NEP) 기간 동안 소련은 식량이 필요했기 때문에 부농에 대해 자제된 정책을 펼쳤다. 해방 이후 초기 단계에서 우리는 국가 부르주아를 향해 비슷한 정책을 펼쳤다.
집단농장과 국영농장이 식량 4억 푸드(소련의 무게단위, 1푸드=16.38kg -역자)를 생산하고서야 그들은 부농의 제거와 총체적인 집단화 실현의 슬로건을 내걸고 부농에 대항했다.(*){{) * "소련 토지 정책에 관한 몇가지 문제" (1929년 겨울)에서 스탈린은 "1927년에 부농은 식량 6억푸드 이상을 생산했는데, 그중 1억3천만푸드는 농촌 교환을 통해 팔렸다. 이것은 우리가 경시할 수 없는 실질적인 힘이다. 우리 집단농장과 국영농장이 그 당시 얼마나 생산했던가? 약 8천만푸드이고 그중 3천만푸드는 필수량이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스탈린은 "이러한 상황하에서 부농을 단호하게 공격할 수 없다"고 결정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들을 공격할 충분한 물직적 기반이 있다"고 계속했다. 그것은 1929년에 집단농장과 국영농장이 4억푸드나 생산했고 그중 1억3천푸드 이상이 필수량이었기 때문이었다. (스탈린, 전집, 12권, p.142) [필사자의 주석 : 스탈린의 "소련 농업정책의 문제에 관하여"를 보라 - DJR])
}}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달랐는데, 실제로 토지개혁만큼 일찍 부농을 제거했다.
소련 협동조합 운동에서는 "농업이 처음에 커다란 희생을 했다"(p.397). 이것은 동유럽국가들로 하여금 협동조합화 문제를 대단히 걱정스럽게 했고 거대하게 조직하는 것을 두렵게 했다. 그것이 시작되었을 때 천천히 진행되었다. 우리의 생산은 협동조합에 의해 감소되지 않았다. 반대로 막대하게 증가했다. 처음에 많은 이들이 반신반의했다. 지금은 그렇지 않은 사람의 숫자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

5. 총노선 형성과 강화의 과정

지난 2년 동안 우리는 위대한 실험을 지도해왔다.
해방의 초기단계에서 우리는 전국 경제를 관리할 경험이 없었다. 그래서 1차 5개년 계획 기간동안 소련의 방법을 모방하는 것 이상을 할 수 없었는데, 우리는 전혀 그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1955년에 기본적으로 (그 해의 마지막과 다음해 봄에) "3개 이행"{{) "3대 이행"은 농업, 사적 공업, 수공업의 전화를 말한다.
}}을 달성했을 때, 우리는 30명 이상의 자문 요원을 찾아냈다. 그러한 토론의 결과로 우리는 "10대 관계"와 "더 많이! 더 빠르게! 더 낫게! 더 경제적으로!"를 제출했다. 그 당시 우리는 스탈린의 1949년 선거연설을 읽었는데, 짜르 러시아가 해마다 4백만 톤의 철강을 생산했다고 나와있었다. 그 숫자는 1940년까지 1천8백만 톤으로 증가한다. 1921년부터 계산한다면, 20년 동안 1천4백 톤의 증가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기간 내내 그들은 사회주의였다는 것을 생각하자! 우리는 좀더 낫게, 빠르게 할 수 없었는가? 그 후 우리는 "두개의 방법"에 관한 문제를 내놓았고 동시에 농업발전을 위한 "40개조"을 제안했다.{{) "40개조"는 마오가 지지한 농업발전 계획을 말한다. "40개조"는 중국의 산업화에 필요한 축적이 가능하도록 해외시장보다는 농업생산과 국내 농업시장에 의지할 것을 옹호했다. 또한 40개조는 생산력을 발전시키고 농업집단화를 증대하기 위한 조건으로 생산관계의 변화를 옹호했다. 농민의 압도적 다수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수입의 증대를 얻을 것이었다. 비록 "40개조"는 1956년과 1957년의 대부분의 시기 동안 보류되었지만, 대약진에 통합된 일부가 되었다.
}} 그 당시 다른 방법은 제안되지 않았다.
1956년의 약진 이후 모진(冒進)에 대한 반대[*1967년 교과서에만 있음]가 나타났다. 부르주아 우익들은 우리를 물고 늘어졌고 사회주의 건설의 완수를 부정하는 시도로 사납게 공격하였다. 1957년 6월 전국인민대표자회의에서 주은래 총리의 보고는 우익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같은 해 9월 3중전회는 "더 많이! 더 빠르게! 더 낫게! 더 경제적으로!"와 같은 구호, "40개조"의 일반 프로그램, 진보를 촉진시키기 위한 사회["대약진", 1967년 교과서] 등등을 되살렸다. 11월 모스크바에서 우리는 인민일보의 "더 많이! 더 빠르게! 더 낫게! 더 경제적으로!"에 관한 사설을 수정했다. 그리하여 겨울에 우리는 대규모의 하천 관리를 위한 전국적 대중운동을 착수했다.
1958년에 처음에는 난닝에서, 그 다음에는 쳉투에서 회의가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치열하게 다루면서, 모진에 대해 반대하는 자들을 비판했다. 우리는 모진에 대한 더 이상의 반대를 허락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사회주의 건설의 총노선을 제안했다. 난닝회의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총노선을 제안하지 못했을 것이다. 5월에는 중앙위 대표자[*1967년 교과서에서는 유소기]는 8차 전인대 2차 회의에 보고했다. 그 회의은 공식적으로 총노선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총노선은 강화되지 못했고, 따라서 구체적인 조치가 뒤따랐는데, 주로 중앙과 지역 사이의 권한 분배에 관한 것이었다. 페이타이호에서 우리는 철강생산을 2배로 증대하는 것과 철강 부문에서 대중운동을 진행하는 것을 제안하였다. 그것은 서구 언론이 뒷마당 철강(backyard steel)이라 부른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인민공사에 착수했다. 직후에 [중국-대만해협의] 퀘모이에서 포격 사건이 발생했다. 이러한 일들은 일부를 혼란에 빠뜨렸고, 다른 이들을 성나게 하였다. 우리 과업에 실수가 나타났다. 식량에 값을 지불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곡물과 부식 생산에 큰 위기에 빠졌다. 극좌의 바람이 불었다. 몇 퍼센트*[*1967년 교과서에서는 12퍼센트]의 생필품이 공급되지 못했다. 1959년 페이타이호에서 철강생산량을 3천만 톤으로 정했다. 우창 회의는 이것을 2천만 톤으로 낮추었다. 샹하이 회의는 1천6백5십만 톤으로 낮추었다. 1959년 6월에는 1천3백만 톤으로 다시 삭감되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동의하지 않은 이들에 의해 이용되었다. 그러나 "좌익"이 중앙위에 대항했을 때 그들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두 번의 쳉초우 회의, 우창 회의, 북경 회의, 샹하이 회의에서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좌익"이 비판을 받고 목표가 확실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좌익"에 대한 반대가 심화되는 상황은 우익에 대한 반대의 필요성을 낳았다. 루샨회의에서 우리가 우익에 대해 반대할 필요가 있었을 때, 그들은 "좌익"에 반대하여 나타났다.{{) 여기서 마오는 1958년 11월부터 1959년까지 열린 여러 차례의 회의를 언급하고 있다. 이들 회의에서 대약진의 오류가 비판되었고 오류를 시정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오류에 대한 비판과 시정이 이루어진 직후, 우익은 마오가 대약진에 대한 기회주의자의 공격이자 마오가 지지했던 지도력에 대한 공격으로 보았던 것에 착수했다. 우익적 비판에 대한 마오의 인식은 마오가 루샨회의에서 행한 두 개의 담화의 제목, 즉 "왜 지금 우익기회주의는 공격을 감행하는가?"와 "기관총, 박격포와 다른 것들"(공격의 적대적 성격을 반영하는)에 반영된다.
}}
이 모든 것은 우리 세계에서 사물이 평화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며, 총노선은 확실히 강화되지 못했다. 지금은 우리가 어려운 혼란기와 루샨회의를 지나온 이상, 총노선은 비교적 강화되었다. 그러나 "사물은 세 번 온다", 따라서 아마 우리는 세 번째 혼란기를 준비해야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총노선이 한층 더 강화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체키앙 지방위원회 정보에 따르면 "평등화"와 "무분별한 재산이전"은 몇몇 공사에서 가장 최근에 다시 나타났다. 극좌의 바람은 벌써 다시 출현한 것일지도 모른다!
폴란드와 헝가리의 사태는 1956년에 발생했는데, 이 때는 모진(冒進) 대항한 운동의 혼란기였다. 그러자 세계는 소련에 반대하여 돌아섰다. 1959년의 혼란기 동안 세계는 우리에 반대하여 돌아선 것이다.
하나는 1957년도에, 하나는 루샨에서 있었던 정풍운동과 반우익운동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와 그들의 남은 영향력을 비교적 철저한 비판 아래에 복종시켰고, 대중은 그 위험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그 시기에 우리는 또한 소위 마 안샨 철강법[*"대다수 소비에트 제조공장에서 사용된 권위적인 제련 방법"-1967년 교과서 주석]{{) 마안샨철강법은 소련의 마그니토고스크(Magnitogorsk) 철강회사의 권위주의적인 법을 참조한 것인데, 중국의 가장 선진적인 철강회사인 안샨회사는 1950년대 이 것을 채택했다. 이 법은 1958년까지 도전 받지 않은 채 유지되었다. 1명의 관리 및 기술 지도자를 둔다는 "마-안" 원칙은 대약진 시기 동안 중앙지도부로의 보고서에서 도전을 받게 된다. 1960년 3월 마오의 참여와 함께, 새로운 안산의 법이 작성된다. 이는 다섯 개의 원칙을 결합하였다. (1) 정치 우위, (2) 당 지도의 강화, (3) 왕성한 대중운동의 착수, (4) "양참일개삼결합"(간부의 생산노동 참여와 노동자의 경영참여, 비합리적이고 낡은 규정의 개혁, 노동자, 간부, 기술자간의 협력), (5) 기술혁신을 향해 최고의 속도를 올릴 것 등. 1960년 3월 마오는 새로운 안샨의 법률의 발행, 출판, 이행을 승인했지만, 문화혁명 때에나 대규모로 출판되었다.
}}을 포함하여 많은 미신을 쓰러뜨렸다.
과거에 우리는 사회주의 혁명을 지속시키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우리는 협동조합 이후에는, 공사(公私)합병 이후에는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르주아 우익의 맹렬한 공격에 의해 우리는 사회주의 혁명을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노선으로 제기하였다. 실제로, 루샨회의는 이 혁명을 진행시켰으며 그것은 격렬한 혁명이었다. 우리가 루샨에서 우익기회주의 노선을 쓰러뜨리지 않았다면 사정은 아주 악화되었을 것이다.

6. 제국주의 국가 간의 모순과 여러 문제들

각 제국주의 사이의 투쟁은 중요한 문제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관점이 레닌이 바라본 방식이며 스탈린 역시 그러했으며, 그들은 이를 간접적인 혁명의 저수지이라 불렀다. 혁명적인 기층을 획득함에 있어서 중국은 이 유리한 상황을 향유했다. 과거에 지주와 매판계급의 다양한 분파간의 모순이 있었다. 이 국내적 모순의 배후에는 제국주의 사이의 모순이 존재했다. 우리가 그 모순을 적절하게 이용하는 한, 우리는 적 전체가 아니라 단지 일부와 특정한 시간에 직접적으로 싸울 수 있었으며, 이는 제국주의 사이의 모순 때문이었다. 덧붙여, 우리는 휴식하고 재조직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제국주의간의 모순은 10월 혁명이 강화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였다. 그 당시 14개 국가가 간섭을 목적으로 군대를 보냈다. 그러나 아무도 많이 보내지 않았다. 더욱이 그들의 목적은 조정되지 않았다. 그들은 음모에 휘말려 들었다. 한국전쟁 동안 미국의 목적은 그들의 동맹국과 조정되지 않았다. 전쟁은 가장 큰 규모로 수행되지 않았다. 미국은 자기의 진로를 결정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와 영국도 그렇게 열성적이지 않았다.
국제적으로 부르주아는 극도로 [서로] 불편해하며, 형세를 휘저을지도 모를 바람을 두려워한다. 그들이 서로 경계하는 수준은 높으며 혼란하다.
2차 대전 이후로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위기는 맑스의 시대와는 다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위기는 7,8년 혹은 10년마다 오곤 했다. 2차 대전 종결과 1959년 사이의 14년 동안에는 세 번이 있었다.
현재는 국제무대는, 자본주의가 여전히 상대적 안정기였고 러시아를 제외하고는 혁명이 어디서나 실패했던 1차대전 이후보다 훨씬 더 긴장되어 있다. [1차 대전 이후] 영국과 프랑스는 활기로 가득 찼고 다양한 국가부르주아 모두는 소련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독일의 식민지 상실을 제외하면 전체 제국주의 식민 체계는 여전히 빈틈없었다. 2차 대전 이후 패배한 제국주의 세나라는 붕괴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약화되었고 쇄락했다. 사회주의 혁명은 10개국 이상에서 승리했다. 식민체계는 산산이 깨지고 있었다. 자본주의 세계는 1차대전 이후의 상대적 안정성을 다시는 누리지 못할 것이다.

7. 중국의 산업 혁명이 왜 급속도일수 있는가.

서구 부르주아의 공공연한 의견에 의하면 "중국은 가장 빠른 산업발전을 하는 나라중의 하나"라고 인정하는 이들이 현재 있다. (미국 외교정책에 관한 미국의 콘론 보고서는 이를 언급했다.)
산업 혁명을 수행한 많은 나라들이 있다. 이전의 모든 국가적 산업혁명과 비교하면 중국은 가장 빠른 나라 중의 하나일 것이다.
왜 그런가? 주된 이유중의 하나는 우리의 사회주의 혁명이 완전히 철저하게 수행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부르주아 세력을 뿌리뽑기 위해 우리의 최선을 다하면서, 부르주아에 대항해 혁명을 철저히 수행했다. 미신을 쓰러뜨렸으며 대중들로 하여금 모든 영역에서 철저한 해방을 하도록 정력적으로 추구하였다.

8. 인구문제[*이 부분은 1969년 글에만 있다.]

과잉인구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농촌 인구는 주요한 문제이며, 그 해결책은 커다란 생산의 발전을 요구한다. 중국에서 5억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해마다 고생함에도 불구하고 양껏 먹지 못한다. 이것은 가장 부당한 것이다. 미국에서는 농업 인구가 13퍼센트밖에 안되고 개인은 평균적으로 2,000캐티{{) 1캐티는 1.1 파운드이다.
}}의 곡물이 있다. 우리는 그렇게 많이 갖고 있지 않다. 농촌 인구를 줄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들이 도시로 몰려들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농촌에서도 농부들이 노동자가 될 수 있도록 산업 분배를 막대하게 해야할 것이다. 이는 주요한 정책 이슈를 제기한다. 우리는 농촌 생활 조건을 도시보다 낮게 유지하기를 원하는가, 그 양자를 거의 동일하게 유지하기를 원하는가, 농촌이 도시보다 약간 높게 유지하기를 원하는가? 모든 공동체는 그만의 경제 중심을 가져야 하고 지식을 훈련하기 위해 높은 수준의 학교를 가져야 한다. 농촌 과잉인구를 해결할 다른 방법은 진실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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