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언니를 만나러 인천공항으로 향하던 새벽과 끊임없이 몰려드는 손님들로 발 디딜 틈 없던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그 장면들로부터 2년이 지났다는 게 실감이 잘 안 나요.

저는 그때 이후로 한 번도 언니한테 편지를 쓴 적이 없어요. 미안해요. 말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랐어요. 분명 횡설수설 할 것 같지만 오늘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조금은 얘기하고 싶어서 편지를 써요.

언니의 장례를 마치고 얼마 후에 저는 먼 곳으로 긴 여행을 갔어요. 언니의 자취방을 정리하면서 챙긴 책 한권도 들고 갔어요. 그래서였는지 틈만 나면 언니 생각이 밀려들었어요. 생각이라고 해봤자 그냥 멍하니 언니를 떠올리고 있는 거예요. 몇 달 동안 떠돌던 낯선 풍경과 사람들 속에서 가장 많이 보고 싶었던 것은 가족도 친구도 애인도 아니고 민영언니였어요.

근데 일상으로 돌아와 하루하루 바쁘게 지내니까, 언니가 사라졌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더라고요. 언니가 지금 내 눈앞에 없다 뿐이지, 어디 집회에 가 있다든가 신나게 술에 취해 춤추고 있을 것만 같아서요. 그래서 오히려 아무렇지 않은 날도 있었어요.

그래도 문득문득 언니 생각이 나요. 찬바람 부는 연남동 거리에 하나 둘씩 뱅쇼를 파는 가게들이 생길 때라든지, 언니가 좋아하던 가수의 새 노래가 나왔을 때, 언니한테 너무 잘 어울릴 것 같은 옷이나 모자를 발견했을 때, 꿈에 환하게 웃는 언니가 나타났을 때도요.

올해 저는 언니의 부재에 대해 생각하는 순간이 유난히 많았어요. 사회진보연대에서 언니가 했던 일들 중 몇 가지를 제가 맡아서 하게 됐거든요. 언니만큼 해낼 실력과 깜냥이 나에게 없는 것은 알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니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해보자는 마음으로 시작을 했어요.

뭐가 뭔지 모르겠고 막막한 순간마다 마음으로 제일 먼저 언니를 찾게 되더라고요. 언니가 있던 때의 회의 자료를 찾아볼 수도 있고, 그때 있던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수야 있고 그렇게 했어요. 하지만 나는 전임자인 민영언니가 그때 어떤 구체적인 고민을 했는지가 알고 싶은데, 지금은 또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의견을 구하고 싶은데. 그걸 물어볼 언니가 이 세상에 없다는 걸 떠올리면, 언니가 없는 게 언니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손실이기만 한 게 아니라 사회진보연대에게도 너무 큰,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이라는 게 뼈저리게 느껴졌어요. 언니랑 잠깐 마주앉아 얘기하면 될 문제도 더듬더듬 돌아가며 해야 하니까요. 언니가 있었다면 차근차근 성과가 쌓여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 일도, 그렇게 헤매고 놓치면서 지체되는 것들이 눈에 보이니까요.

언니를 보내며 ‘우리 모두 민영이가 되자’고 약속했지만 사실은 잘 안 돼요. 2년이 지난 지금, 그걸 그냥 솔직히 인정하고 싶었어요. 나에게든 남에게든 마음이 삐뚤어질 때도 많고, 술 마시는 자리가 시시할 때도 많아요. 언니가 없으니 역시나 그래요.

언니, 언니도 알잖아요. 살다보면 사실은 시시하고 지겨운 때가 그렇지 않은 더 많다는 걸. 근데 언니는 그런 날들 사이사이에 빛나는 순간들을 정성을 다해 만들어내는 사람이었어요.

어느 날 페이스북이 ‘3년 전 오늘’이라며 언니랑 인천 송도국제마라톤 가서 찍은 사진들을 올려주더라고요. 의료민영화저지 범국민대책본부에서 추진한 사업이었는데, 단체로 송도영리병원에 반대하는 등벽보를 붙이고 송도국제마라톤에 참석하는 거였어요. 별 생각 없던 나한테 같이 한 번 나가보자고 한 것도 언니였죠. 마라톤 날 숨이 차 헐떡이는 내 옆에서 훅 훅 침착하게 숨을 내뱉으면서 잘도 뛰던 언니 모습이 기억나고, 끝나고는 언니가 계획한 대로 사회진보연대 인천지부 회원들 모아 ‘닭알탕’이라는 처음 보는 음식을 먹으러 가서 낮술을 마셨던 것도 기억나요. 그리고도 헤어지기 아쉬워 차이나타운까지 가서 키득거리면서 해지도록 놀던 기억, 그리고 그날 밤에 깨어나서 느꼈던 극심한 허벅지 근육통까지. 언니랑 찍었던 사진 몇 장에 갑자기 너무 많은 기억이 쏟아지더라고요. 언니랑 있으면 투쟁도 그렇게 깨알같이 재밌었는데. 그래서 속상하고 지치는 순간들도 잘 이겨낼 수 있었는데.

언니가 아니었다면 저는 잘 몰랐을 거예요. 어떤 조직이 움직인다는 건, 작은 것을 놓치지 않는 관찰력, 내 입장을 이해하는 말 한마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고 조정하고 설득하기 위한 수고로움이 쌓이고 쌓여 비로소 가능한 거라는 사실을요. 언니에게조차 그다지 살갑지 못했던 내가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다정한 적이 있었다면 그건 아마 언니를 흉내 낸 거예요.

내가 아무리 흉내를 내 봐야 언니처럼은 못 된다는 것을 알아요. 그렇지만 어려운 선택을 할 때에는, 언니가 있었다면 뭐라고 했을까를 한번 더 생각해봐요. 그러니까 언니는 나에게 이정표 같은 존재예요. 그렇게 언니는 여전히 우리 곁에 있어요.

물론 이정표 같은 걸로 말고, 같이 울고 웃고 취할 수 있는 언니가 더 그립고 보고싶어요. 언니도 같은 마음이겠지요. 지금 여기에 있는 모든 분들도 같은 마음이겠지요.

그 마음들을 모아서 언니에게 말하고 싶어요.

언니.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