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829] 후속기획 - <문재인 이후 교육> 서평 "교육, 학생은 문제가 아니다"


교육, 학생은 문제가 아니다

- 『문재인 이후의 교육』 서평


학생도 교사도 학부모도 불행하다. 그러나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인고의 시간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대학생들도 불행하다. 좋은 직장에 다니기 위해서니 그 불행도 어쩔 수 없다. 취준생은 당연히 불행하다. 그렇다면 직장인은 행복할까?

 대학 취업 결혼 출산 육아 노후 준비… 삶의 단계에서 퀘스트처럼 달성해야 하는 것들의 나열은 이제 새삼스럽지도 않다. 날 때부터 부를 보장받지 못한 사람들은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 수고하는 것이 미덕을 넘어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노력은 최초의 말을 떼기 시작한 순간, 교육과 학습으로부터 시작된다.

 다시, 대한민국 학생들은 불행하다. ‘헬조선’이라고들 한다. 외국의 하이틴은 졸업파티와 낭만으로 넘치는 로맨스고, 한국의 하이틴은 ‘스카이캐슬’이라는 자조는 처음부터 농담이 아니었다. 그러나 ‘불행한 학생’은 타파해야 할 이미지가 아니라, 하나의 밈으로 소비되며 학생의 이미지로 고착되었다. ‘불행한 학생’에서 ‘불행’을 지우는 게 아니라, ‘학생’이 아니게 되는 것이 불행을 벗어나는 방법이 되었다. 그들의 ‘노오력’을 신성화하여 수능 날 아침 비행기가 뜨지 못하게 하고 학교 앞에서 엿을 나눠주는 게 기성세대가 하는 전부다. 그러나 당연히 그것만으로는 학생이 행복해지지 못한다. 수험생들에게 “모두 시험 잘 보라”고 해 봤자 수능은 상대평가고, “노력은 보답 받는다.”고 하기엔 모두가 너무나 노력했다. 학생들에게 필요한 건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더 좋은 직장에 가기 위해 더 이름값 있는 대학에 가기 위해 더 공부하”라는 격려가 아니라, 교육 제도의 개혁을 통해 그 말도 안 되는 연쇄를 끊어주는 일이다.

 책에서는 이 연쇄를 끊고 제도를 개혁하기 위해 몇 가지 대안을 제시한다. 먼저 교사에게 자율권을 부여함으로써 교권을 높이고 창의적 교육을 가능하게 할 것, OECD 국가 중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만 시행하는 내신 상대평가 제도를 없애 교육의 다양성을 보장할 것, 자율화의 주체가 기관이 아닌 개인이 되게 하며, 고교평준화와 고교학점제를 통해 고입과 대입을 연속적으로 치러야 하는 학생들의 부담을 덜어줄 것, 포용적 상향 평준화를 통해 대학의 서열화를 완화할 것, 공교육에서 기초교육을 부담할 것이 그것이다. 또한, 대입으로 끝나지 않고, 입사 과정에서의 불필요한 경쟁을 줄이기 위해 직무기반 수시채용, 비정규직과 정규직 대우 차별 완화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이는 전부 저자가 상상해낸 것, 창조해낸 것이 아니다. 지난, 그리고 현 정부들이 언급했지만 시행하지 않았거나, 시행하려다가 반발에 부딪혀 그러지 못했던 것들이다. 즉, 대안은 이미 제시되어 있고, 미래는 이미 다가와 있지만 외면하고 우리가 외면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왜 대안을 알면서도 외면해 왔을까? 우선은 정치인들부터가 교육 제도 하에서의 엘리트 코스를 밟아 성장한 경우가 많으며, 그러므로 근본적인 문제점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을 수 있다. 동시에 그들은 대입이 뭔지 모른다. 진보 세력이 대안으로 제시하는 통합 국립대학인 ‘한국대’는 소위 명문대 안에서의 학연을 고려하지 않았기에 사립대의 위상을 높일 뿐이며, 다른 대안으로 제시하는 절대평가는 변별력을 떨어지게 해 사교육과 ‘학종’으로 학생들을 내몰아 더욱 피 말리게 할 뿐이다. 그렇다고 보수 세력이 똑 부러지는 대안을 내놓는 것도 아니다. 수능이 절대 공정하지 않은 시험이라는 것은 수능 성적으로 줄 세운 학생들이 속한 급으로 손쉽게 드러난다. 무조건 경쟁을 없애는 것, 또는 경쟁하게 하는 것만이 정답이 아니다. 같은 목표를 가진 학생들에게는 경쟁이 존재할 수밖에 없지만, 기성세대가 그것을 부추겨서도 안 된다는 간단한 사실이 이토록 은폐되어 있다.

 저자가 가장 먼저 제시했으며 또 마지막에 다시 언급함으로써 방점을 찍은 대안은 교사에게 자율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아주 사소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교사에게 교육에 대한 자율권이 없으면 획일화된 시험 문제를 낼 수밖에 없으며, 학생들은 사교육으로 도피하게 된다. 이는 창의적 교육을 억압하고, 공교육의 위상을 낮추어 사교육이 공교육의 역할까지 떠맡게 되는 아이러니를 낳는다. 사교육에서 시작된 경쟁이 과열될수록 제도는 공고해진다. 입시는 대입이 아닌 고입으로까지 내려가고, 최소한의 공정을 찾기 위해 더 많은 입시의 방법들이 제시되지만, 이는 한쪽의 사교육을 억누르면 한쪽이 부풀어 오르는 풍선효과를 부추길 뿐이다. 결론적으로, 무엇도 개선하지 못한다.

 나는 책의 마지막 장에서 언급한, ‘성취도 낮은 학생들이 다닌다.’고 낙인찍힌 혁신학교를 학원 하나, 인터넷 강의 하나 없이 졸업해 대학에 입학했고 학원과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며 사교육 받는 학생들의 공부를 돕고 있다. 내가 졸업한 혁신 고등학교는 실제로 주변 다른 학교들보다 소위 명문대 진학률이 낮았고, 자율학습을 강제하지 않아 ‘노는 학교’로 찍혀 주변 인식도 좋지 않았다. 사교육 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구할 때도 출신 대학교도 아닌 고등학교가 걸림돌이 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사실 나는 소위 ‘뺑뺑이’로 학교를 배정받았고, 이는 주변 학교들과 다를 바 없는 방식이었다. 학생들의 수준에 유의미한 차이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니 우리 학교의 명문대 진학률이 더 낮았던 건 정말 우리 학교가 공부를 덜 시켜서 그런 것일 수 있다. 더 채찍질했다면 더 ‘좋은’ 학교에 갔을 수도 있는 학생들이 그러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학교는 자유로웠다. 우리 학교의 특징은 예체능 계열의 학생들이 문과의 3분의 1 이상일 정도로 많다는 것이었다. 야간 자율학습이 강제가 아니니 남는 시간 동안 진로를 고민할 수 있었고, 여러 예체능 학원에 다니며 적성을 찾기도 쉬웠기 때문이라 유추할 수 있다. 혹은 예체능 학생들이 처음부터 그것을 알고 이 학교를 1지망으로 기재했을 수도 있다. 무엇이 먼저든, 학생들이 다른 학교만큼 공부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에 시험의 난도는 비교적 낮았고, 덕분에 나는 사교육 없이도 학교 공부를 따라갈 수 있었다. 그렇기에 대입 후 사교육 현장에서 일하며 주요하게 느낀 감정은 경외감이었다. ‘이렇게까지 한다고?’ 그건 첫째, 사교육에 이렇게까지 의존한다고? 둘째, 이렇게까지 공부를 한다고?를 모두 포괄한 놀라움이었다. 학생들은 내가 학교에 다닐 때와는 다르게 문·이과를 구분하지 않았으며, (그러나 탐구 과목의 선택을 통해 암묵적으로는 존재하고 있었다) 국어 영역에서 화법과 작문, 문법을 모두 치르는 것이 아닌 둘 중 하나를 선택해 시험을 볼 수 있었고, 1학년의 경우 탐구 과목은 절대평가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장난으로라도 ‘나 때는 말이야’를 언급할 수 없었던 이유는 학교 끝나고 학원 갔다가 학원 끝나고 학원 가는 그들의 일상이 ‘나 때’, 그리고 나 이전의 때와 뭐가 다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가 바뀌긴 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정부가 아무리 ‘교육적’으로 올바른 정책을 펴고 싶다고 할지라도 사교육 걱정, 불공정 걱정, 불평등 걱정과 상충하는 한 실현하기 어렵다. 그러나 대입 경쟁은 원인인 동시에 결과다. 스타트 라인에는 대학의 서열화가 있고, 피니시 라인에는 양극화된 노동시장이 있다. 따라서 대입 경쟁은 하나의 교육 정책 정도로 해결될 수 없다. 우선 대입 경쟁 자체가 줄어들어야 청소년이 과열 경쟁에서 벗어나게 되어 사교육이 줄어들고, 한국 교육이 선진화되며, 그 방법으로는 앞서 제시한 대안들이 있다. 과한 경쟁은 결론적으로 득 될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학생들은 분열되고, 비례성을 공정성과 혼동해 노동시장의 양극화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그저 경쟁하게 된다. 학생은 학생이라는 지위만을 가지지 않는다. 그들은 나아가 시민이며 주체다. 더 나아갈 것 없이 우리가 최소한 그들을 동등한 주체로 인정한다면, 과열된 경쟁 체재라는 기형적 구조에서 학생들이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우선된다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