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 특집
  • 2015/12 제11호

건국 논란 비판

1919 VS 1948 우파들의 인정투쟁

  • 구준모 편집실장
 
8.15를 광복절이 아니라 건국절로 바꾸자는 건 2000년대 중반부터 뉴라이트 인사들이 줄기차게 제기한 주장이다. 이명박 정권은 2008년 광복 63주년 행사를 건국 60주년 행사로 바꾸려다가 큰 논란을 빚기도 했다.

최근 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 과정에서 극우 인사들은 1948년 건국론을 다시 부각시키고 있다. 이들은 1948년 이승만에 의한 단독정부 수립을 대한민국의 건국이라고 강조하며, 반공 분단국가 수립이 현재 남한의 번영의 밑바탕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에 맞선 반대 논리는 대한민국의 건국 시점을 임시정부가 세워진 1919년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1948년 건국론은 임시정부 법통 계승을 명시한 헌법의 부정’이라는 입장이다. 하지만 임정 정통성론은 건국 논란에 대한 설득력 있는 반론으로 보기는 어려울 뿐만 아니라, 오늘날 역사논란에 대한 진보적 대안도 담기 어려운 자충수이다. 
 

상해 임시정부의 정통성이 존재했나?

일제하 조선 민중들은 1919년 3·1운동 당시 만세시위에 광범위하게 참여했다. 3·1운동은 그 이전에 명망가 위주의 제한된 계층이 참여했던 독립운동을 대중화하는 물꼬를 텄다. 만세시위에 참여한 조선 민중들은 그 후 노동운동, 농민운동 등의 대중운동에도 참여해, 1920년대 독립운동에는 민중화 경향이 도드라졌다. 특히 20세기 초반 세계정세의 영향을 받아 의열단과 조선공산당으로 대표되는 아나키즘이나 사회주의가 대중화되었다. 

반면 3.1운동 직후 독립운동 명망가들에 의해 선포된 임정은 주로 상해를 근거로 활동했다. 임정은 주로 외교적 수단을 사용해서 일본을 제외한 제국주의 열강들에게 임정의 ‘정부’ 지위를 승인받는 방식의 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그들의 활동 근거지는 중국 전역이나 한반도에 펼쳐져 있지 않았다. 만주 등 북중국과 러시아에 퍼져있는 해외 독립운동 세력의 주력들은 임정을 ‘독립운동의 대표체’나 ‘임시정부’로 인정하지 않았고, 부분적 연계나 경쟁의 대상으로 여겼다. 또한 임정은 국내에 대중적인 연결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정 세력은 3.1운동을 계승한 망명정부를 자임하면서 27년간 일제와 투쟁해왔다는 이른바 ‘법통론’에 근거해 자기 정통성을 내세웠다. 이승만이나 김구 등 명망가들이 ‘임시정부’를 자임한 점은 실제 역할이나 대중적 영향력에 비해서 임정에 대한 인지도를 높여주었다.

임정의 지위에 관한 논란은 1945년의 해방정국에서 크게 불거졌다. 한반도 절반을 지배한 미군정은 임정의 정부 지위는 물론이고 독립운동 대표체 지위도 인정하지 않았다. 임정이 한반도 민중을 대표하는 정부가 아니라 경쟁적인 독립운동 그룹 중 하나일 뿐이며, 국내에 대중적인 기반이 결여되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1946년 3.1운동 기념식에 참가한 김구
 

1945년 11월 말 김구를 비롯한 임정 인사들이 귀국하자 민족통일전선에서 임정의 지위를 둘러싼 인식 차이가 본격적으로 드러났다. 해방정국의 주요 정치세력이었던 조선공산당은 임정은 국외에서 활동하던 하나의 독립운동단체에 불과했고, 국외 민족운동의 주력은 만주와 북중국에 있었다고 보았다. 여운형이 주도한 인민당은 임정과의 통일전선 형성의 가능성을 열어두면서도 (건국준비위원회가 선포한) 인민공화국과 마찬가지로 임정이 과도기적인 세력의 하나라고 여겼다. 

반면 지주층이 주축인 한국민주당(한민당)이나 역시 보수파였던 국민당은 임정을 중심으로 민족통일전선을 펼치고, 임정을 통해 과도기적인 정부를 만들고자 했다. 보수파들이 임정을 중시한 것은 당시 조선공산당과 인민당 등 좌파가 주도권을 쥐고 있던 민족통일전선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내 사정에 어둡고 기반도 없었던 임정 세력은 1945년 12월말부터 전개된 신탁통치 찬반 국면을 계기로 정국에 적극 개입했다. 임정은 ‘완전한 독립’을 즉각 이루자며 반탁운동을 주도하고. 임정 주도의 과도정부 수립 계획을 내놓았다. 이는 새로운 정부 구성에서 진보적 민족주의 및 사회주의 세력을 배제하는 안이었기 때문에 좌익들의 강한 반발을 불렀다. 결국 민족통일전선에서 임정의 위상은 한민당, 국민당, 이승만과의 관계로 좁혀지게 되었다. 그런데 임정은 자금과 조직력의 측면에서는 한민당에 밀리고, 미군정과의 관계에서는 이승만에게 밀리는 처지였다.

결국 반탁운동은 미군정, 한민당, 이승만 세력의 정치적 승리로 끝났다. 미군정은 반탁운동을 이용해 소련에 대한 반감을 키우며 정국 운영의 안정을 기할 수 있었다. 한민당은 해방 직후 민족 대 반민족, 혁명 대 반혁명의 정국 구도를 찬탁 대 반탁으로 바꾸어 반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이승만은 반탁운동을 통해 미군정 및 한민당과의 관계를 보다 긴밀히 해 우파 내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다.

임정은 완전한 독립을 추구한다는 명분으로 반탁운동을 주도했지만 실제로 얻은 것은 없었다. 민족통일전선을 좌우 양극단으로 크게 분열시키고, 반공 반소 우익세력에게 정국의 주도권을 내주는 계기를 만들었을 뿐이었다.  
 

건국 논란의 다른 전선: 식민지 조선경제 평가

뉴라이트 역사학자들은 식민지 근대화론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좌익 공산주의 세력을 제거하고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한 것이 한국의 오늘을 있게 만든 성공의 역사적 출발점이라고 본다. 반면 진보적 민족주의자들은 식민지기 수탈과 일제에 맞선 민족투쟁의 역사를 강조하고, 분단 이후 독재와 왜곡된 성장을 강조한다. 물론 후자가 정직한 역사 기록이다. 하지만 수탈과 착취 속에서 이루어진 근대화를 설명하는 분명한 틀이 없어, 뉴라이트 역사학자들의 공격에 노출되고 있다.

식민지 근대화론의 본산지인 낙성대학파는 조선의 1911~40년 경제성장률이 2.3퍼센트로 계산하고, 이 시기에 상당한 경제성장을 이루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1941~45년 태평양 전쟁기의  전시 체제를 제외한 것이다. 경제사학자 메디슨의 계산에 따르면 1913~50년 조선의 경제성장률은 –0.4퍼센트였다. 어떤 사람들은 생활수준의 향상을 나타내는 지표를 들어 식민지 근대화론을 지지한다. 하지만 생활수준이 일부 향상되었다는 게 착취나 수탈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 수탈의 구조는 화폐와 소유권에 있었다. 식민지 조선의 화폐는 일본 엔화에 종속된 엔본위제 통화였다. 경제 관계를 지배하는 화폐를 일본이 쥐고 있다 보니 수탈도 그만큼 구조적으로 쉬웠다. 또한 극심한 쌀 수탈이 이루어졌고, 대부분의 기업들도 일본인 소유라 생산한 만큼 일본으로 부가 빠져나갔다.
일제강점기 쌀 수탈 기지인 군산항에 세운 3차 축항 공사 기념탑(1926년)

즉 일제 강점기에 한반도에는 일본에 의해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이식되고, 식민지 자본주의가 발전했다. 특히 1930년대부터는 일본 대자본의 조선 진출이 크게 늘어났고, 대륙침략을 위해서 한반도 북부를 중심으로 공업화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노동자의 수도 1931년 14만 명에서 1938년 73만 명으로 급증했다. 이런 자본주의의 전개 속에서 1930년대 노동조합운동이나 농민조합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제국주의적 수탈과 착취에 대한 대중 저항이었다.

여기서 자본주의 자체가 제국주의적 속성을 가진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특히 19세기 후반 20세기 전반에는 러시아 혁명 등의 예외를 제외하면 제국주의적 자본주의의 길과 식민지 자본주의의 길이 지배적이었다. 일본은 제국주의적 자본주의 발전을 위해 조선에 식민지 자본주의를 이식하고 발전시켰고, 그 속에서 임금노동뿐만 아니라 교육, 의료, 교통, 통신 등의 근대적 제도들이 도입되었다. 일본에게는 제국주의 확장을 위해서 조선의 자본주의적 발전을 통한 수탈과 착취의 증대는 필요했고, 그것의 극단적인 형태가 1930년대 후반부터의 전시체제였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한반도는 일본 제국주의에 포섭된 자본주의 체제에서, 분단 이후 남한은 미국 제국주의에 포섭된 자본주의 체제로 변화하게 되고 그 속에서 경제 성장과 착취가 이루어졌다. 식민지 근대화론과 1948년 건국론자들은 이런 식민지 수탈과 착취, 일본 제국주의와의 협력이라는 역사를 지우고, 반공주의 분단국가의 수립과 미국 제국주의 체제로의 전환을 ‘번영의 기반’으로 정당화한다. 


건국 논란의 덫에 빠지지 말아야

건국이라는 프레임은 기획된 것이다. 미국이든 프랑스이든 혁명이나 독립을 국가 기념일로 삼는다. 근대 민주주의의 기념일은 혁명이나 독립이 일반적인 것이다. 반면 건국을 강조하는 것은 반공 분단국가 건설을 한국 민중들에게 필연적인 선택지처럼 강조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을 기점으로 해서 현재 한국 자본주의의 성공을 기념하고자 하는 것이다. “헬조선이 싫으면 북한으로 가라”거나 “개도국에서 한 달만 지내 보면 자부심이 생긴다”는 식의 말들은 1948년 건국을 강조하는 극우세력의 욕망을 그대로 보여준다. 한국 근현대사는 계급투쟁과 국제 정세의 변화, 그리고 우연적 사건들과 그에 대한 여러 세력의 대응이 누적된 결과였다. 역사에서 다른 가능성이 존재했다는 것을 잊게 만드는 것은 현재에 대한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지 못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역사 교과서 논쟁이 역사에서 끝나지 않고 경제, 사회 교과서 논쟁으로 이어지는 맥락을 생각해봐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1919년이냐 1948년이냐 하는 잘못된 선택지를 강요하는 것은, 역사 속에 등장했던 많은 목소리들을 감추는 수법이자 현재를 다르게 인식하고 변화시키려는 욕망을 파괴하는 수법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20세기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한반도의 정치 변동과 자본주의 변화, 그리고 그 과정에서 대안을 추구했던 민중들의 운동에 관한 인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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