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 특집
  • 2016/04 제15호

허깨비 재벌개혁론 걷어차기

진보경제학자 김상조 장하준 비판

  • 이상욱 사회진보연대 서울지부 조직국장
 
보수·진보 가릴 것 없이, 한국 경제가 뉴노멀 시대를 어떻게 버텨내야 하는지가 화두이다. 그 중심에 한국 경제를 지배하고, 국민경제의 부를 부당하게 독점해 온 ‘재벌’이 있다. 오래전부터 진보 경제학자들은 ‘재벌개혁 논쟁’을 벌였다. 대표적으로 김상조와 장하준의 입장을 중심으로 검토하고, 두 사람의 재벌개혁 방안이 노동운동의 대안이 될 수 있는지 평가해보자.
 

재벌이 투자하면 경제가 성장할까

최근 금속노조는 제조업 발전을 위해 재벌의 적극적 투자를 유도하자며 제조업발전특별법을 요구한 바 있다. 노동운동 내 이런 주장은 국민경제를 위해 재벌의 적극적 투자를 유인해야 한다는 장하준 교수의 주장과 묘하게 공명한다. 두 주장은 성장과 고용, 이를 위한 재벌의 투자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방법은 다르지만,  비슷하다.

장하준은 한국 경제가 지난 50년 동안 과잉투자를 통해 성장했다고 본다. 주요 전략산업(철강, 자동차, 조선)의 고속 성장 배경에는 재벌의 선도적인 모험투자가 있었고, 박정희식 국가주도의 산업·금융 정책이 주효했다는 평가다. 따라서 재벌을 통한 한국적 성장방식은 여전히 필요하며, 대규모 투자로 제조업 중심의 고부가가치 산업 육성에 나서야한다는 입장이다. 

이는 한국 경제가 장기적인 성장성을 잃어버렸다는 평가에서 기인한다. IMF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개혁으로 인해 주주자본주의(영·미식 금융자본주의)가 확산되면서 발전주의 전략을 포기하고 주주가치 극대화를 최대 목표로 삼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재벌은 경영권의 위협으로 인해 적극적·장기적 투자를 기피하고, 단기 실적주의로 경영을 한다는 지적이다. 이는 재벌이 노동자·중소기업을 더욱 쥐어짜는 원인이라고도 본다. 

따라서 주주자본주의의 위협에서 재벌을 지켜내는 것이 한국 경제가 성장을 지속할 수 있는 방향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노동자운동의 주적은 재벌이 아니라 초국적 금융자본과 시장 근본주의가 되어야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대립 구도는 재벌과 초국적 금융자본을 선과악의 구도로 파악하고, 박정희식 경제모델이 국내적 축적을 목표로 했다는 인식에서 나온다. 결국 초국적 금융자본으로부터 재벌의 경영권을 보호하고, 이를 대가로 국민과의 사회적 타협(생산적 투자 확대, 생산기지 해외 이전 제한, 설비 및 연구·개발 투자 증진, 복지국가 건설 및 부자 증세 협조 등)을 제시하면서 재벌을 압박하자는 결론이다.
 

장하준의 세 가지 오류

장하준 교수
하지만 이런 주장은 세 가지 점에서 잘못됐다. 첫째, 한국 경제 고성장이 가능했던 특수한 역사적 조건을 무시한다. 1970~80년대 고성장은 미국의 한국에 대한 역개방정책, 1980년대 중후반의 3저 호황, 매판 자본과 결탁하기보다 국내 자본 축적을 통해 통치 자금을 확보하려 한 독재정권의 특성 덕분에 가능했다. 지금은 이를 재현할 수 없고, 설사 재현된다 하더라도 시대적 조건이 변했기 때문에 이것이 고성장으로 이어질 것이라 장담할 수 없다. 

둘째, 현재 한국 자본주의는 과소투자가 아니라 과잉투자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의 주장처럼 더 과감하게 투자를 한다면 새로운 단계의 성장이 아니라 산업자본의 이윤율 폭락, 금융자본의 해외도피, 유휴 설비로 인한 사회적 비용 증가 등 거시경제적 어려움만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1990~96년 과잉투자가 결국 국가부도로 이어진 것이 대표적 사례다. 한국 재벌들은 세계경제위기 전후인 2007~12년에 유형자산을 자그마치 두 배로 늘렸다. 장하준 주장대로라면 우리 재벌들은 세계에서 가장 성장 친화적인 자본가들일 것이다. 외환위기 때도, 2016년에도 위기는 저투자와 금융자본의 투기 때문에 벌어진 게 아니라, 재벌의 고투자와 탐욕, 재벌 투자에만 목을 메는 정부 탓에 발생한 것이 된다.

셋째, 재벌이 부를 축적해 온 방법이 출혈적인 저임금·장시간·고강도 노동으로 수출 경쟁력을 확보하는 방식이었음을 간과했다. 한국의 재벌은 태생부터 구조적으로 수탈적이었다. 경영권을 보장한다고 해서 재벌이 수직적 하청 구조를 바꿀 이유도, 투자 확대와 생산기지 이전 제한에 합의할 가능성도 없다. 재벌은 이미 외주화와 고용 불안을 심화시키고, 저임금 지역으로 공장 이전을 상당히 진행한 상태이다. 
 

딜레마에 빠진 재벌개혁론

재벌 편향적 시장 제도를 먼저 바꿔야 그 다음 조치가 가능하다는 주장도 있다. 이는 한국 진보 진영 다수의 의견이다. 

대표적인 재벌개혁론자인 김상조 교수는 한국 경제가 IMF 외환위기 이후 실패를 거듭했고, 재벌의 변화 없이는 새로운 성장 경로로 진입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박정희식 권위주의 모델(재벌 중심 성장)이 과거 고도성장을 가져온 건 사실이지만, 현재는 재벌이 군림하여 공정한 시장 질서를 오염시키면서 국민경제의 성장을 가로막는다는 것이다. 

또 낙수효과가 사라진 재벌의 성장이 오히려 대기업-중소기업 간 격차와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를 심화시키고, 성장과 분배의 악순환을 낳는다고 본다. 따라서 재벌의 지배구조 개혁(더 작은 단위로 분리), 투자자에 의한 재벌 감시(주주 행동주의), 중소기업 상생 전략을 해법으로 제시해 왔다.

더욱이 최근 상위 4대 재벌(삼성, 현대차, SK, LG)로의 경제력 집중이 높아지고, 나머지 재벌은 부실 징후가 커지고 있음에 주목한다. 재벌을 그대로 둘 경우 국민경제 침체가 지속되고, 구조조정의 지연은 부실의 만성화·악성화를 불러일으킬 것이란 전망이다. 그로 인해 근래에는 재벌의 경제력 집중 현상 억제, 부실징후 재벌그룹의 효율적 구조조정을 강조한다. 스스로 “새로운 산업도, 새로운 시장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며 뾰족한 수가 없음을 실토한다. ‘신상필벌’의 법·제도로 재벌을 압박하여 ‘공정한 질서’, ‘정상화된 사회’를 만들고, 새로운 성장모델을 확립해보자는 제안만 반복할 뿐이다. 
 

박근혜 구조개혁에 동조한 김상조

김상조 교수
이런 주장의 문제는 재벌의 구조조정과 박근혜 정부의 4대 구조개혁을 정당화한다는 데 있다. 김상조는 재벌그룹의 구조조정을 위한 원샷법에 독소조항이 대부분 제거되고, 보완 대책도 들어있다며 찬성 입장을 밝히기까지 했다. “지금은 구조조정이 한국 경제의 최우선 과제”라며, 원샷법은 합리적 조정을 위한 정책의 도입이라는 것이다. 사실 현실에서 재벌은 정리해고에 일반해고까지 도입하며 손실을 떠넘기는 상황인데, 이에 손을 들어주는 꼴이다. 하지만 자본축적이 둔화된 재벌은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를 높여 이윤을 늘리려 하고, 소득불평등과 고용불안을 크게 만드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그는 보수와 진보 모두가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있다고 본다. 보수는 재벌을 통한 낙수효과만을 고집하고, 진보는 만병통치약식 해법에만 골몰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환경(뉴노멀)은 경제민주화의 과제와 전략 설정을 어렵게 하기 때문에, 경제민주화가 아무리 절박하더라도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보진영의 우선적 과제는 경제정책의 합리성 제고와 시장의 제대로 된 작동을 위한 노력이라고 충고한다. 진영 논리를 벗어나, 보수와 진보 모두가 공동의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자본의 확대재생산이 한계에 봉착했고 전통적인 경제정책인 재정·통화정책조차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구조적 위기의 원인을 간과한 주장이다. 따라서 김상조의 재벌개혁론은 오히려 재벌의 숨통을 열어주는 역효과만 낳을 것이다.
 

 
허깨비 재벌개혁론 걷어차기

재벌 중심 구조를 바꾸고, 독점에 관한 시장 제도를 바로 세움으로써 성장과 공평함을 달성하겠다는 김상조의 주장은 이제 표류하다 못해 후퇴하고 있다. 부실 징후 재벌을 시장의 원리로 구조조정하여, 시장 교란 요인과 더 큰 부실화를 막아야한다는 입장이 확고해 보인다. 세계경제의 침체와 동아시아 국가 간의 상호 의존 및 경쟁 심화라는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한국 경제의 체질개선을 통한 경제성장 미망을 버리지 못하는 상황이다. 

장하준은 세계경제가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금융 부문의 영향력이 큰 나라들의 탓으로만 돌린다. 한국의 재벌이 왜 국내가 아니라 해외 생산을 선호하고, 금융적 축적을 강화해왔는지에 대한 분석도 없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는 영·미식 금융자본주의가 아니라, 구조적 위기에 대응한 자본축적의 변화를 의미한다. 물론 사회적 세력 관계와 제도적 차이에 따라 신자유주의가 확산되는 양상은 달랐지만, 구조적 위기에 대응한 자본이 실물경제적 축적에서 금융적 축적으로 변모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도 이에 편입한 반주변부 국가의 위치에서 재벌과 정부의 역할을 재구성한 것이다. 

이처럼 진보경제학자로 불리는 김상조·장하준의 재벌개혁에 대한 접근법은 현실을 제대로 분석하지 못할뿐더러 그 해법도 틀렸다. 무엇보다 재벌의 손실전가로 가장 직접적인 피해를 입는 노동자운동에 대안이 될 리 만무하다. 두 축의 접근법은 공통적으로 노동자들을 사회변화의 주체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객체로만 취급한다. 

재벌을 변화시는 것이나, 무소불위의 재벌이 뉴노멀 시대에 자행할 구조조정에 맞서는 것도 첨예한 계급투쟁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시장의 올바른 작동을 위한 신상필벌, 재벌과의 타협은 노동운동의 선택지가 될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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