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 특집
  • 2016/04 제15호

재벌이 진짜 두려워하는 것

  • 노동자운동연구소 재벌연구팀
삼성 서초사옥 앞에서 손피켓을 들고 있는 삼성전자서비스 수리기사들
사진 : 삼성전자서비스지회 해운대분회 정지훈 조합원
 
재벌에 맞선 노동자 투쟁은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다. 노동시장 구조개악도 경제위기 속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생존권도, 결국 사태 해결의 끝에는 재벌이 있다.

하지만 재벌에 맞서 싸운다는 게 말처럼 쉽지는 않다. 재벌 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재벌의 사회화, 부와 소득의 재분배, 노동자계급의 단결 모두에 도움이 되는 투쟁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한국에서 재벌은 경제 위기의 원인이자 불평등을 확대하고 노동자를 분시키는 촉매다.

시민운동은 지분에 따른 공정한 사적소유, 원·하청 공정거래를 통한 낙수효과 확대, 유연안정성으로 표현되는 하향평준화를 통한 노동자 격차 축소 등을 재벌개혁 과제로 제시한다. 좌파 운동 일부는 (사내유보금 환수로 완곡하게 표현되기도 하지만) 몰수에 의한 국유화를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전자는 미국식 자본주의나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공정한 시장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후자는 소련 사회주의와 다르지 않은 당에 의한 계획경제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크다. 

물론 주식회사를 통한 자본주의적 사회화와 국가 소유에 의한 소련 사회주의식 사회화, 이 두 역사적 실패를 당장 넘어서기는 쉽지 않다. 새로운 사회화 전략이 현실에 출현하기에는 이념적 혁신과 대중운동 수준을 볼 때 아직은 무리다. 부의 재분배 역시 세계경제위기 이후 전통적 경제정책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고, 재벌 상당수도 재무적 위기가 심화되고 있어, 현실적 수단을 찾기 쉽지 않다. 재분배 정책이 자본주의 체제 내부에서 합리성을 가지려면 수요 확대로 이어져야 하는데, 현재 세계경제는 마이너스 금리에도 수요가 늘지 않는 이른바 구조적 수요 부족 상태다.

따라서 이런 조건에서 우리는 당분간 노동자를 더 크게 단결시킬 수 있는 투쟁을 우선으로 대(對)재벌 전략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 노동운동의 다양한 투쟁이 재벌에 대한 공동의 요구와 교섭으로 모일 수 있도록 민주노총과 산별노조들이 힘과 지혜를 모으는 것이다. 노동자 투쟁이 더 커지고, 단결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그 이상의 것들을 도모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진 : 정지훈
 

진짜 사장을 불러내자

올해 재벌과 관련된 노동자 투쟁의 특징 중 하나는 재벌 또는 원청을 상대로 노조가 직접 교섭하기 위해 여러가지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삼성, SK, LG 등에 간접 고용된 수리설치기사 노동자들이 진짜 사장과 교섭하기 위한 사회적 캠페인과 투쟁을 준비 중이다. 금속노조에서는 현대차그룹 계열사 노조들이 현대차 본사를 상대로 공동교섭을 결의했다. 작년에 원청을 상대로 다업종 공동투쟁을 시도해 본 건설노조 일부 지역조직들은 올해 산업안전보건위원회를 매개로 본격적인 원청에 맞선 투쟁에 나서고 있다. 

구체적으로 보면,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와 희망연대노조가 공동투쟁체를 꾸리고 재벌의 간접고용 문제를 사회의제로 만들려 하고 있다. 이들의 핵심요구는 고용형태 문제와 더불어 간접고용 노동자들의 노조가 노사관계에 실질적 영향을 미치는 원청과 교섭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희망연대노조는 재작년에 소속 사업장 일부에서 원청, 하청 사용자와 노조가 함께 테이블에 앉는 협의체를 만들기도 했었다. 삼성전자서비스지회는 노조 자체를 여전히 부정하는 원청과 어떻게든 접점을 만들기 위해, 올해부터 시행 중인 근로자공동복지기금에 삼성전자서비스 원청이 공동 출연하고, 원하청 사용자와 지회가 공동 기금운영위원회를 건설하자는 요구를 마련하기도 했다.
 
 
사진 : 홍진훤
 

 
안전 책임을 원청에게 묻는다

건설노조 경인지역본부는 지난해 대원청 투쟁을 발전시켜 각 현장에서 산업안전보건위원회를 건설하는 투쟁을 준비 중이다. 건설 현장은 잘 알려졌다시피 대표적으로 다단계 하청 구조에서 건설기계, 타워크레인, 토목 등 다양한 업종이 뒤섞여 일하는 곳이다. 원청이 나서야 대부분의 문제가 해결되지만, 원청이 책임을 지는 것은 거의 없다. 

이렇다 보니 노조의 노력이 한계에 부딪히는 경우가 많고, 업종별로 문제를 각자 해결하는 것도 일반적이다. 경인지역본부는 이런 조건에서 원청이 법적으로 책임을 지게 되어 있는 안전 문제에 주목했다. 산업안전보건법 시행령은 공사금액 120억 원 이상, 토목공사 150억 원 이상 현장에서는 원청이 하청노동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산업안전보건위원회를 반드시 설치하도록 하고 있다. 현장에서 많이 무시되고 있는 법령인데, 경인지역본부가 올해 대원청 투쟁의 발전을 목표로, 사문화된 법령을 현장투쟁으로 살려보려고 계획 중이다.


금속노조의 현대차그룹 공동교섭

금속노조는 정체된 중앙교섭을 돌파할 우회 전략으로 현대차그룹 계열사 노조의 공동교섭을 추진 중이다. 키를 쥔 현대차지부가 강한 의지를 보이며 금속노조 핵심 사업이 되었는데,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고 있다. 우려는 이미 노동시장에서 상대적으로 안정적 지위에 있는 현대차그룹의 고임금 정규직 노동자가 자신들만의 실리를 추구해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금속노조 15만 중 10만 이상을 포괄하는 공동교섭이기 때문에 사실상 금속노조가 현대차 계열사를 위한 교섭과 투쟁만 하게 될 것이란 우려도 있다. 

이에 반해 이 공동교섭에 기대를 거는 사람들은 현재 금속노조가 실제 정세에 변화를 줄 수 있는 통로가 많이 줄어든 상황에서, 이렇게라도 공동교섭을 성사시켜 현대차 정몽구 회장을 상대로 투쟁 전선을 확대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 교섭이 발전해 사내하청 노동자와 그룹 내 비정규직 공장들까지 포괄한다면 교섭 주체가 확대될 것이며, 나아가 국민경제에 대한 현대차그룹의 책임을 사회적 의제로 만들 수 있다면 적지 않은 성과를 낼 수도 있다는 전망을 내고 있다.
 

노조할 권리, 진짜 사장과 교섭할 권리 

원청의 사용자로서 법적 책임이 강화되고, 노동조합이 이를 전략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최근 핫한 세계적 흐름이기도 하다. 작년 8월 미국 연방노동관계위원회(NLRB)가 원청이 간접고용 노동자 노동조건에 궁극적인 통제권을 보유하고 있는 점에 주목해 원청이 하청노동자의 단체교섭 상대방에 해당한다는 결정을 내리기도 했고, 세계노동기구(ILO)도 국제공급사슬에서의 원청 사용자의 책임을 강화하자는 캠페인을 최근 몇 년간 벌이고 있다. 

한국에서 원청은 대부분 재벌사일 수밖에 없다. 이 재벌에 영향을 받는 다양한 노동자들이 단체교섭을 요구할 수 있게 되면 두 가지 점에서 노동자 단결에 고무적인 일이 될 것이다. 

첫째, 원·하청 공동투쟁의 제도적인 기반을 갖출 수 있다. 하청 노동자들은 많은 경우 원청 사용자와 교섭하기 위해 원청 노조에 교섭을 기대야 했고, 원청 노조 역시 제도적 한계를 돌파하지 못하면, 시혜적 수준에서 하청과 연대해야만 했었다. 원청 사용자가 하청 노동자의 교섭 상대방이 될 수 있다면 원청과 하청 노조는 제도적으로 보장된 공동교섭, 공동투쟁을 할 수 있게 된다.

둘째, 다수의 노동자가 노조를 만들 수 있다. 중소사업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조 만들기가 힘들었던 가장 큰 이유는 임금과 노동조건에 실제 영향을 미치는 원청과 어떤 교섭도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노조를 만들어 진짜 사장과 교섭하고 투쟁할 수 있다면, 더 많은 노동자가 노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비정규직 중소사업장 노동자의 노조할 권리는 어떤 점에서는 원청과 교섭할 권리를 전제한다고 할 수도 있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올해 투쟁들이 재벌 또는 원청의 사용자로서 책임을 제도적으로 확대하는 것은 아니다. 이 투쟁들은 여전히 사업장별 특성이 강하다. 한국 사회 노동자 다수의 원청이라 할 재벌을 상대로 노조할 권리, 교섭할 권리를 요구하는 이 운동들의 발전 가능성은 크다. 이 투쟁들을 사회적 쟁점으로 보편화하는 것은 민주노총이나 산별노조들에게 주어진 과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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