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 특집
  • 2016/09 제20호

단골집을 잃고 나는 우네 가엾은 내 사랑 빈 도시에 갇혔네

  • 김윤영 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

쫓겨나는 사람들

서울 곳곳을 지날 때면 얼마 지나지 않은 과거가 눈앞에 스친다. 아직도 펜스만 쳐져 있는 이곳은 칼국수집 두리반이 있던 자리였지, 종로1가 르미에르빌딩이 선 저 넓은 자리엔 생선구이집이 즐비했었는데, 서초구청 정문 앞자리는 헌인가구공단 철거민들이 매주 노래를 부르던 곳이었지, 용산구청 맞은편 으리으리한 아파트가 들어선 입구엔 신계동 철거민의 작은 텐트가 있었지…. 신계동 달동네에 살다 집이 헐린 그 언니는 용산참사로 구속된 동네 사람 몫까지 다 해내야 한다며 참 억세게 농성을 했었어, 내가 좋아하던 닭칼국수집이 있던 이 자리는 언제 이렇게 헐리고 빌라가 들어선 걸까, 할머니는 어디 가셨지?

서울의 역사는 강제퇴거의 역사, 전광석화와 같은 개발의 역사, 쫓겨나는 사람들의 역사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에 관한 역사는 제대로 쓰이지 않았다, 아니 기억조차 쉽지 않다. 거대한 담장을 아무리 넘겨봐도 이곳에 어떤 사람들이 있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불량주택’, 판자집과 벌집

해방과 전쟁, 산업화를 거치며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들었다. 1960~70년대 가난한 이들의 풍경을 대표하는 판자촌은 한때 서울 200곳, 전체 주택의 40퍼센트를 차지할 정도였다. 50년 전인 1966년, 서울 인구 380만 명 가운데 3분의 1에 해당하는 127만 명이 무허가 주택에 거주했다.
 
“몇 집만이 움막을 치고 살던 곳이 어느새 수백 세대의 천막촌으로 변해갔다. 몇 년 사이에 큰 동네가 생긴 것이다. 천막과 움막을 차차 판자조각으로 막고 덮고 하더니 점점 온 동네가 판자집으로 꽉 들어찼다. 가끔 단속반이 와서 구둣발로 부수고 차고 갔지만 소용없었다. ‘미나리 꽝’이라는 동네가 생긴 것이다. 제멋대로 터를 잡아 집을 짓는 바람에 골목길이 반듯하지 못하고 꾸불꾸불 뱀 기어가는 것처럼 중구난방이었다. 밤이면 석유 등잔으로 불을 밝히고, 물은 골목 입구와 샛물목에 펌프를 장치해 지하수를 사용했다. 몇 집이 어울려 돈을 모아 펌프를 장만한 것이다. 하룻밤만 자고나면 판자집이 몇 채씩 늘어나고 사람들로 붐볐다.”
- 《꼬방동네 사람들》(1981), 이동철

판자촌은 넉넉하지 않은 돈을 들고 시골에서 서울로 이주하는 사람들의 첫 주거지였고, 가난한 서울 사람들의 마지막 주거지이기도 했다. 남의 벽에 또 벽을 대고, 방 뒤에 다시 방을 내 세입자를 들이던 판자촌은 개발도시 서울의 대표적인 슬럼이었다. 가난한 이들이 모여 살던 이곳은 낙후한 시설과 위생, 야간 방범조차 돌지 않는 ‘서울 내 비(非) 서울’ 같은 공간이었다. 하지만 여기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나와 비슷한 이웃과의 교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도 있었다.
 
“반장의 장인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왔는데, 여비가 없다고 한다. 반장 집이 지난번 화재에 타버려서 아직도 복구 중이라 여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한 남자가 장 씨에게 와서 사정을 전하면서 모금을 좀 하면 어떻겠느냐 물었다. 장 씨는 좋은 생각이라며 몇 집을 다니고 자신의 것을 합하여 금방 1500원을 마련했다. 장 씨가 돈을 가지고 반장을 찾아가자 반장이 말했다. “나는 쌀가게를 하는 동생이 있지만 그에게 가서 사정하기는 싫소. 차라리 우리 동리 이웃들에게 부탁하는 것이 마음이 편해.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속을 알아 이해를 잘하지.” 동리 사람들은 반장이 보수도 없이 일하고, 또한 이번에 큰 변을 당했으니 자신들이 더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 《판자촌 일기》(2012), 최협

당시 판자촌의 기억을 낭만화할 순 없다. 60~70명이 하나의 화장실을 사용하고, 천에서 오물이 솟고, 불타버린 집에 대한 보상은커녕 복구조차 힘든 상황이 판자집의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헐리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거대한 포크레인이 얼기설기 지은 판자집을 번쩍 들어 올리거나 쿡 찍어 쓰러뜨리는 것은 간단했다. 1980년대 정부 주도하에 시작된 재개발은 ‘불량주택’을 일소했다. 천장 낮은 집에 웅크리고 살던 이들의 삶도 그렇게 납작하게 망가졌다.

판자집에 살던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서울의 불량주택은 수치상 줄어들었지만, 가난한 이들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수원 신동에는 ‘벌집’이 있었다. 넓은 단독주택과 농지가 많은 동네에 어색하게 서 있던 그곳은 단층짜리 긴 건물에 똑같은 문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전형적인 외양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부엌과 화장실이, 그리고 작은방 한칸이 나오는 구조다. 

옛날 구로공단, 가리봉동에 즐비했다던 벌집이 어쩌다 이 허허벌판까지 밀려났던 것일까. 그마저도 재개발로 헐린 지금, 그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서울역사박물관 <가리봉오거리>展 가리봉동 133-52(벌집) 1층 평면도
 

이름 없는 새로운 도시빈곤 

2016년 한국에서 도시빈곤층의 주거란, 더 이상 얼기설기 지은 판자집과 골목골목 이어지는 낮은 담장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서울은 가난한 이들의 삶을 보여주지 않는 도시로 변모했다. 대신 가난은 방 속으로 숨었다. 옆방의 소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고시원, 벽 한쪽은 까맣게 곰팡이에게 내줘야 하는 반지하, 더위와 추위를 막을 수 없는 옥탑방으로 사람들은 각자각자 밀려났다. 개수대 하나 갖춘 벽을 부엌 삼고, 변기에 앉아 맞은편 벽에 무릎이 닿는 차가운 감촉을 느끼는 것, 세탁기는 사정 되는대로 집 어디든 올려놓아야 하고, 싱크대에 신발이나 책을 우겨넣기도 하는 삶의 모양새가 우리의 가난이 되었다. 발 디딜 틈 없이 잡다한 물건이 좁은 방에 꽉 들어차 가난의 냄새를 풍긴다.
 
“신림2동 월세 28만 원짜리 단칸방. 화장실 문을 열어야 햇빛이 들었다. 원래 해가 들어야 할 자리에 보일러실이 있어 해를 가렸다. “그래도 뭐, 싱크대도 있었고.” 나쁘지 않았단다. 거기서 한 학기를 얹혀살았다. 좁은 방에서 공부하는 첫째와, 둘째 딸을 같이 두는 게 맘에 걸렸던 부모님이 묘안을 찾았다. 둘째만 다른 방을 구해주긴 상황이 어려웠기 때문에 지인에게 민영 씨를 부탁했다.

그곳은 가정집을 개조한 식당이었다. 주인 내외는 식당 2층에 살았고, 민영 씨는 식당 한편 칸막이 방을 썼다. 영업시간엔 손님을 받고, 영업이 끝나면 뒷정리를 하고 이불을 깔았다. 옷장이 따로 없어 사과박스를 썼다. 한 박스 분량으로 짐을 줄였다. 손님이 없는 시간에 필요한 것만 꺼내 쓰고 다시 다락방 선반에 올려 두는 것이 매일 저녁, 매일 아침의 일상이었다. 그 시기 그에게 집은 ‘공간’보다는 ‘시간’의 개념에 가까웠다. 일정 시간만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 밤 열한시가 되어야 집이 생겼고 집은 아침이면 다시 사라졌다. 사과박스를 다락방에 올리고 나면 다시 그 방은 식당이 됐다. 민영 씨는 그 시기, 반쯤은 학교에서 살았다. 학교에 안 나오는 선배 사물함 하나를 얻어서 세면도구와 책을 잘 쑤셔 박아 놨다.”
- 《청년, 난민 되다》(2015), 미스핏츠

이들에겐 아직 이름이 없다. 청년 빈곤율이, 그중에서도 주거빈곤율이 심각하고, 노인 빈곤율, 그중에서도 1인 가구 노인의 빈곤율이 심각하다. 장년층의 몰락, 40~50대 1인가구 남성의 고독사 비율이 가장 높지만 그들 모두가 살고 있는 풍경에 대한 이름은 아직 없다.
 
서울역사박물관 <신림동 청춘: 고시촌의 일상> 展

그들은 판자촌 주민도, 철거민도 아니다. ‘월세가구 세입자 평균 거주기간 3.5년’(〈2014년 주거실태조사〉, 국토교통부)이라는 조사에 포함되는 장삼이사 중 하나일 뿐이다. 세상은 이것을 문제 삼지도 않았다. ‘반지하에 살지 옥탑에 살지’, ‘고시원에 살지, 2시간이 넘는 출근시간을 감내할지’는 사회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선택에 불과하다고 세상은 말하기 때문이다.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한 선수는 자신의 꿈이 건물주라고 말했다. 이 세계는 솔직한 욕망을 더 이상 포장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이 되어가고 있다.

반면 정말 곤궁한 사람들은 언어를 잃고 있다. 서울의 노른자 같은 땅에 비닐하우스가 즐비한 것은 ‘개선 과제’가 되었다. 월세를 내지 않고 장사하는 노점상은 세상에 무임승차라도 한 양 취급된다. 공공시설물에서 노숙인들을 쫓아내는 검은 옷의 청원경찰을 저지하는 사람은 드물어졌다. 도리어 사람들은 쫓겨나는 사람들의 몸에서 나는 냄새와 거친 외모를 비난한다. 특별대우를 바라지 말라고, 그건 도둑놈 심보라고. 평온한 내 일상을 깨지 말라고, 나도 피곤하다고.
 
“집 평수 넓히려는 사람들 마음 속에 폭력이 있어요.”
- 17년에 걸쳐 투쟁한 한 철거민

열심히 돈 벌어 건물주에게 바치는 세입자들이, 위치를 바꿔 월세 받는 미래를 꿈꾸는 세계. 전체 인구의 50퍼센트나 되는 집 없는 사람들이, 쫓겨나는 철거민, 세입자들의 저항을 보며 ‘그래도 법은 지켜야 한다’고 훈계하는 세계. 여기에서 우리는 도시의 미래를 어떻게 그려갈 것인가?

어떤 도시를 만들 것인가? 이 질문은 자본주의 대도시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욕망을 어떻게 대면하고 개조해야 하는가’라는 숙제를 동반한다. 비뚤어진 욕망을 주조한 세계에 대한 몇 겹의 이해와 더불어서 말이다. 그 두꺼운 벽을 넘어서는 것이 이름과 언어를 잃은 노동자, 도시빈민이 온전히 ‘도시에서 살 권리’를 찾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곳에 대해 이야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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