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 특집
  • 2017/06 제29호

소득주도성장론의 한계와 노동자운동의 과제

  • 한지원

문재인 정부의 경제개혁론

박근혜 정부의 무능과 퇴행에 지친 국민은 새 정부의 적폐청산과 민생개혁에 기대가 크다. 하지만 역대 모든 정부가 그랬듯 결국 문제는 경제다. 문민정부 이래 집권 초기 권력기관이나 정치권 개혁으로 지지를 얻다가도 경제개혁에 성과를 얻지 못해 실패한 정권으로 평가받는 경우가 많았다.

문재인 정부가 내세운 경제개혁 총론은 소득주도성장이다. 미국 민주당이 대중화시킨 ‘포용적 번영’ 정책과 국제노동기구(ILO)가 몇 년째 밀고 있는 ‘임금주도성장론’을 참조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수출 대기업의 국제 경쟁력을 성장의 시작점으로 삼았는데, 문재인 정부는 노동자 임금과 자영업자 소득의 증대를 성장의 출발점으로 삼겠다고 밝혔다.

물론 소득주도성장론이 정부 경제정책 기조로 사용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는 2014년 소득주도성장론을 언급하며 가계소득 증대 정책을 발표했다. 하지만 초이노믹스라고 불린 당시 정책은 결국 부동산 가격만 올려놨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렇다면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은 성공할 수 있을까? 필자는 두 가지 이유로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소득주도성장론의 이론적 지반 자체에 문제가 있을 뿐더러 중도를 강조하는 정부로는 성장 이전에 소득 조정부터 실패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하락하는 자본생산성, 반등될까?

소득주도성장론은 두 가지 선순환을 이야기한다. 첫 번째는 ‘임금 상승 → 소비(판매) 증가 → 설비가동률 상승 → 설비투자 확대 → 고용 증가’로 이어지는 수요의 선순환이다. 그런데 더 이상 고용이 증가될 수 없는 상황(완전고용)이 오면 선순환은 중단되고, 임금 상승은 장기적으로 물가 상승을 일으킨다.

그래서 두 번째 선순환이 필요하다. 두 번째는 ‘임금 상승 → 노동절약적 투자 증가 → 자본집약도 상승 → 노동생산성 상승’으로 이어지는 생산성의 선순환이다. 임금 상승으로부터 유발되는 노동생산성 상승은 국민경제의 장기적 성장을 보장한다. 임금 인상이 수출경쟁력을 약화시킬 것이라는 우려 역시 생산성 상승이 보완하기 때문에 큰 문제가 안 된다. (참고로 전자산업과 자동차산업에서 해외생산이 늘어 임금 인상이 국내에 미치는 효과가 매우 줄어들었다.)

소득주도성장론은 자본집약도 상승이 언제나 충분한 노동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진다고 너무 당연하게 전제한다. 하지만 지난 역사를 보면 노동생산성과 자본집약도의 비율인 자본생산성은 기술과 제도가 크게 혁신된 시기를 제외하고는 하락하는 경향이 컸다.
 
 
미국의 자본생산성은 19세기 중반 폭락, 20세기 초중반 대상승을 거쳐 20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다시 하락하고 있다. 20세기 초반에는 내연기관·전기·석유화학·상하수도시스템 기술이 발명되고, 테일러주의 생산·법인기업 일반화·세계적 금융제도 등 사회적 분업을 조직하는 제도가 혁신됐다. 이에 따라 자본생산성이 크게 상승했다. 반면 20세기 후반부터 혁신의 효과가 줄어들면서 자본생산성이 다시 하락세로 반전되었다.

‘따라잡기 성장’을 계속해온 우리나라는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 이래 단 한 번도 제대로 자본생산성이 상승한 적이 없다. 1970년대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산업을 재편하며 자본생산성이 폭락했고, 1990년대 재벌의 중복과잉투자로 또 한 번 폭락했다. 1980년대는 3저 호황 덕분에, 2000년대에는 전자산업 수출호황과 재벌개혁 덕분에 가까스로 하락을 막았다. 만약 우리나라 자본주의가 따라잡기 성장을 넘어 생산기술과 사회적 분업을 조직하는 제도를 대대적으로 혁신할 수 없다면, 자본생산성의 상승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자본생산성은 하락하는데 임금이 상승한다면?

그렇다면 자본생산성이 하락하는 가운데 실질임금이 지속적으로 상승하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먼저 자본금 규모 대비 국민경제의 생산이 충분하지 않으니 노동자의 몫을 빼면 투자에 사용될 생산물이 불충분해진다.

예를 들어 보자. 자본생산성이 80퍼센트일 때 100만 원 가치의 설비로 80만 원 상당의 생산물을 만들면, 50만 원을 소비하고도 설비투자는 30퍼센트(30만 원) 늘릴 수 있다. 하지만 자본생산성이 30퍼센트일 때는 앞의 예보다 10배 많은 1000만 원 가치의 설비로 300만 원 상당의 생산물을 만들어도, 50만 원을 소비하고 나면 설비투자는 25퍼센트(250만 원)밖에 늘릴 수 없다.

자본생산성이 낮아지면 기업 내부의 투자기금(이윤)이 줄어든다. 따라서 기업이 노동을 절약할 목적으로 투자를 늘리려면, 가계 저축이나 해외로부터 자금을 가져와야 한다. 소득주도성장은 소득이 가계 소비로 이어지는 것을 목표로 하므로, 정책적으로 가계 저축을 늘리기보다 기업이 해외에서 투자금을 가져오도록 유도한다.

그런데 기업이 이런 식으로 자본 투자를 늘리려면, 죽기 살기로 시장점유율 경쟁에 나설 수밖에 없다. 생산성 경쟁을 통해 이윤을 늘리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윤율이 낮아 시장을 독점하는 길만이 생존의 방법이다. 자본생산성이 더 낮아지더라도 개별 기업들은 과잉투자를 해서 시장점유율을 높인다. 소위 ‘대마불사’ 기업이 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의 경제는 소득과 투자가 늘기 때문에 겉으로는 크게 성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내부에서는 지속가능성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자본주의는 필요를 충족시키게 아니라, 이윤을 위한 경쟁 결과 필요가 충족되는 체제다. 이자 지불조차 불가능해질 정도로 (자본생산성이 하락 때 노동의 몫을 줄이지 못하면) 이윤율이 폭락하면 기업은 도산하고 경제는 위기에 빠진다.
 

우리가 경험한 소득주도성장

사실 이와 같은 자본주의 축적의 모순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1980년대 후반부터 재벌이 국가부도 사태를 가져온 경로가 이러했다. 1987년부터 1997년까지 경제성장은 소득주도성장이라 일컫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 이후의 높은 임금상승률이 소비 증가와 자본의 투자 확대를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89년 이후의 자본생산성 폭락은 결국 소득주도성장의 지속가능성을 내부에서부터 파괴했다.

IMF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 자본생산성은 10년 넘게 상승과 하락이 없다. 이런 국면이 계속 이어진다면 임금 인상을 통한 소비와 투자 확대가 어느 정도 가능하다. 특히 사내유보금이 많은 상위 재벌들이 곳간을 풀면 단기적으로는 거시경제의 활력이 높아질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의 자본생산성은 2004년 이후 계속 하락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미국보다 나은 방향으로 생산기술과 사회적 분업의 제도를 혁신할 수 있을까? 소득주도성장의 장기적 효과는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4차 산업혁명과의 모순

소득주도성장론의 이론적 문제를 제쳐두더라도, 우리나라 경제구조는 소득 자체를 재분배하기도 쉽지 않다. 먼저 문재인 정부가 산업정책의 전면에 내세우는 4차 산업혁명은 소득주도성장과 모순된다.

최근 연구 결과들에 따르면, 디지털 경제를 주축으로 한 4차 산업혁명은 소득불평등을 확대하는 경향이 강하다. 예를 들어 애플,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페이스북 같은 미국 디지털 선도 기업은 미국 노동자의 소득 증가에 거의 기여하지 않는다. 지적재산권과 정보망 독점을 통해 돈을 버는 이 기업들은 숙련이 낮은 노동자를 고용할 필요도, 전후방 효과를 낳는 생산설비에 돈을 쓸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이들이 버는 엄청난 이윤은 설비투자와 고용 대신에 기관투자자에 대한 고액배당과 자본시장 투기를 위한 금융자산으로 사용된다. 즉, 디지털 기업이 성장하는 만큼 노동자 소득이 증가할 가능성은 줄어든다는 의미다.

결국 소득주도성장과 디지털경제가 공존하려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지적재산권과 네트워크 독점으로 발생하는 이윤에 높은 세금을 매겨 재분배하거나, 아예 지식과 네트워크를 소유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 ‘소유권의 변혁’이 필요하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소유권 변혁은 두말할 나위도 없고, 과세에 대해서도 매우 소극적이다.
 

노동조합 없이 소득주도성장 없다

다음으로,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론은 소득 주체의 힘을 키울 현실적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다. 앞서 언급했던 임금주도성장론과 포용적 번영 정책에서 임금(소득)을 경제성장의 결과가 아니라 원인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이유는, 임금이 시장의 수요-공급 법칙만이 아니라 시장 밖의 다양한 제도에 의해서도 결정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 핵심 제도는 당연히 노동조합의 교섭력이다. 그래서 정책개혁도 노조의 교섭력을 키우는 방향으로 잡힌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가 노조를 대하는 태도는 정반대인 것 같다. 소득주도성장론을 이야기하면서 정작 노조 할 권리, 노조의 교섭력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안 한다. 대통령 지지자나 주변 인사들의 분위기는 노조에 적대적이다. 하지만 노조 없는 소득주도성장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소득주도성장의 이론적 토대 자체를 허무는 것이기도 하다.
 
 

서비스산업의 딜레마

마지막으로, 노동자 임금소득이 증가하려면 서비스산업 노동자의 임금이 올라야 한다. 우리나라는 자영업자·소기업이 몰려 있거나, 고령 또는 여성 노동자가 밀집되어 있는 숙박음식·시설관리·사회복지·소매업 등에서 저임금이 일반화되어 있다. 그래서 수출제조업보다 서비스업에서 임금 정체가 더 심각하다.

문제는 우리나라의 서비스산업은 저임금 비중이 높을 뿐 아니라 생산성이 낮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중소상인보호 식의 소극적 보호 정책 외에는 성장전략을 가지고 있지 않다. 서비스산업에서 법정최저임금 인상 등으로 임금 인상 효과를 부분적으로 보더라도 이것이 투자 증대와 노동생산성 상승으로 이어지는 데 한계가 있다.

우리나라는 국내총생산(GDP)의 30퍼센트 가까이가 고정자본에 투자되고 있다. 대부분은 대기업 중심의 수출제조업에 집중 투자되어 있다. 서비스산업에서도 자본집약도를 높이려면 규모의 경제를 이루는 것이 불가피하다. 그래서 노무현부터 박근혜까지 이전 정부에서는 ‘서비스업 선진화’라는 이름으로 대기업의 서비스업 진출을 지원해왔다. 옳고 그름을 떠나 서비스업의 현실을 반영하여 추진한 정책이다.

반면 문재인 정부 정책은 서비스업 구조조정보다는 자영업, 소기업의 소득을 보호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현재와 같은 자영업, 소기업 보호 정책으로는 투자 기금을 재분배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것이 문재인 정부의 딜레마다.
 

더 왼쪽에서 대안세력으로 성장하자

당연하게도, 노동운동은 소득주도성장에 매우 친화적이다. 국제노동기구가 임금주도성장론을 내세운 이후 임금교섭이나 법정최저임금 결정 과정에서 소득주도성장론을 근거로 내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소득주도성장론은 자본생산성 저하라는 오늘날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를 우회할 수 없다. 더군다나 중도를 지향하는 문재인 정부는 소득 주도의 성장은커녕 가계소득 증가 또는 소득재분배를 실현하는데도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저성장과 지대추구가 일반적인 오늘날의 자본주의에서는 부(자산)의 재분배, 소유권의 제약, 높은 과세, 노동조합의 강력한 힘 같은 급진적 정책이 없으면 작은 소득 재분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저임금과 불평등을 우리가 감내해야 한다는 건 아니다. 공정한 시장 형성이나, 체제 내적 논리에 따른 임금 상승으로 불평등을 완화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자본’이 조직하는 사회적 분업만이 절대선이라고 전제하면, 우리는 어느 순간 소득주도성장이 실패한 지점에서 다시 박정희를 소환할지 모른다. 이 시대는 이윤율에 제약되지 않는 물적·인적 투자, 공동체의 물질적·정신적 풍요를 위한 노동을 상상할 수 있는 동기부여가 더 절실하다.

노동운동은 소득주도성장이 말 그대로 실현되기 위해서 더 급진적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정부에 요구해야 한다. 더 나아가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바꿔야 노동자가 행복해지는 성장도 가능하다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
 
 
필자 소개

한지원 | 마르크스주의와 노동자운동의 결합을 위해 불철주야 연구하고 떠드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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