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든 행정부는 세계정세를 국제적 표준을 둘러싼 국가자본주의와 민간자본주의 그리고 자유민주정과 권위독재정의 경쟁으로 특징지으면서, 전략적 경쟁을 경제·안보·가치를 포함하는 장기간의 체제 경쟁으로 한층 심화했다. 또한 트럼프 행정부 시기 훼손되었던 규칙 기반의 다자적 질서와 동맹 질서를 복원하면서 양국의 경쟁은 양자적 차원을 넘어 세계적 차원으로 확대되었다. 중국은 지난해 10월 시진핑 집권 3기를 공식화한 20차 당대회에서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현대화 노선을 변함없이 이어갈 것임을 재차 강조했다.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는 미국과 중국의 행보를 볼 때, ‘전략적 경쟁’은 적어도 2020년대에 지속해서 세계정세의 변화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사회운동은 이렇게 변화하고 있는 정세를 어떻게 인식하고 대응할 것인가 깊이 숙고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은 먼저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중국의 국가자본주의 강화와 그에 대한 미국의 대응이라는 관점에서 전략적 경쟁의 형성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 재정립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전략적 경쟁의 특징을 짚고, 그에 대응하는 중국의 쌍순환 전략의 내용을 정리해본다. 마지막으로 최근 두드러지고 있는 이른바 ‘반도체 전쟁’의 경과를 살펴보고 전략적 경쟁이라는 측면에서 갖는 의미를 짚어본다.1. 미중관계의 결정적 변곡점, 2008년 세계금융위기
1) ‘국진민퇴’와 ‘군민융합’: 중국 국가자본주의의 강화
미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는 오늘날 중국의 경제체제를 가장 잘 설명하는 용어가 국가자본주의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중국을 국가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는 특징으로 ▲ 경제에서 민간과 공공 부문이 6:4의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 ▲ 금융자산의 85~90%가 국유기구에 의해 통제된다는 점, ▲ 국가와 당이 국유기업을 직접 통제하고 있을 뿐 아니라 민간부문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 ▲ 경제에 있어 정부의 큰 역할이 필요하다는 정치적 합의가 있다는 점을 제시한다.
나아가 중국공산당이 중국 경제의 기본 방향을 설정하는 기존의 역할을 넘어 구체적인 정책까지 집행하고 감독하는 경향에 주목해, 중국의 경제체제를 ‘당-국가 자본주의’로 규정하는 관점도 있다. 이러한 관점은 특히 중국 국가자본과 당 조직이 민간기업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막대한 권한을 행사하는 이른바 ‘대조타’(大操舵, Grand Steerage)에 주목한다. 이에 따르면, 최근 중국에서는 국가자본이 국유자산관리공사와 산업인도기금을 통해 민간기업 지분에 대규모로 참여하고 있고, 민간기업과 외국인 투자기업 내에 당 조직 설립을 강제하고 있다. 베리 노튼에 따르면, 산업인도기금의 규모는 2018년 1.34조 달러로 중국 GDP의 10%에 이른다. 또한 2018년 현재 민간기업의 48%가 공산당 조직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진민퇴’(國進民退)로도 일컫는 이러한 중국 당-국가 자본주의의 출현 또는 국가 자본주의의 강화는 세계금융위기를 전후로 후진타오 주석 집권기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본래 후진타오 정부는 경제성장 일변도에서 벗어나 균형발전과 질적성장을 이루겠다는 경제정책 기조를 내세웠으나, 2008년 금융위기에 대응하고 경제성장률을 유지하기 위해 4조 위안에 이르는 재정지출과 함께 무제한적인 유동성 공급을 시행했다. 또한 국유기업과 국유은행을 동원한 대규모 투자를 감행했다. 중국은 2009년 GDP의 33.4%에 달하는 국유기업 주도의 고정자본투자를 통해 2010년 10.8%의 경제성장률을 달성함으로써 금융위기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과잉투자가 극대화되었고, 국유기업의 수익성 하락과 부채율 상승이라는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또한 이 시기 대부분의 투자가 거대한 인프라 건설 사업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이때부터 대규모 건설 부문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 경제의 투자 의존성이 구조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에 따라 부동산 가격 급등과 불평등 증대라는 사회문제 역시 심화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산업생산량이나 생산요소 투입을 늘려 급속한 성장을 끌어내는 방식이, 이제는 중국 경제가 성장 속도가 둔화하는 ‘신창타이’(新常態, New Normal)에 진입하는 것을 가속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기술혁신과 제도개혁을 통해 새로운 성장동력을 발굴하지 못하면 중국 경제가 중진국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2013년 집권한 시진핑 주석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국유자본(주로 에너지, 건설 부문)의 해외진출 전략으로서 ‘일대일로’와, 첨단산업 중심의 기술적 도약을 위한 전략으로서 ‘중국제조2025’ 계획을 추진했다. 먼저 ‘일대일로’ 전략은 중국의 막대한 외환준비금과 대규모 과잉자본을 활용해 중국 경제를 지지할 세계적 공급망을 확립하는 한편, 중국식 국가자본주의를 하나의 모형으로 확립하고 세계화하려는 시도를 상징한다. 일대일로 전략에 따라, 중국의 국유기업은 국가와 당의 지침을 받아서 주로 부채가 누적된 주변부 국가를 목표로 기반시설을 건설하고 해외 영업을 수행하고 있다. 2022년 12월 현재 80개의 중앙정부 국유기업이 138개 국가 및 지역에서 4700개 이상의 일대일로 건설 프로젝트에 투자하거나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제조2025’ 계획은 중국의 제조업을 노동·자원집약형 산업에서 기술집약형 산업으로 도약시키려는 산업고도화 전략이다. 이를 위해 ▲ 정부 주도의 R&D 프로그램과 기업의 연구개발 투자 활성화, ▲ 반도체, AI, 신에너지 자동차 분야 등 보조금 확대, ▲ 해외투자 진출과 적극적인 인수·합병을 통한 기술 노하우와 브랜드 획득을 장려한다는 계획을 제시했다. 또한 이후 2018년에 갱신된 ‘중국제조2025’ 계획은 13차 5개년 규획(2016~2020)과 14차 5개년 규획(2021~2025)의 일부로서 2049년까지 3단계에 걸쳐서 핵심기술에서 세계적인 지배력을 획득한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과거의 산업정책과 달리, ‘중국제조2025’ 계획은 산업·기술·생산물의 우선순위에 대한 포괄적이고 세부적인 설명이 제시되었고, ‘자급목표’라는 형태로 국내에서 개발된 기술의 점유율 목표가 제시되었다. 또한 ‘군민융합’(军民融合)이라는 표어에서 드러나듯 군사 부문과 민간 부문의 혁신 역량을 통합함으로써 군사용 기술이 상업용 기술 개발로 파생될 수 있도록 하고, 역으로 상업 기술을 활용하여 첨단기술 기반의 군사 능력을 향상하는 것을 목표로 내세웠다. 이에 따라 산업과 안보가 결합되고, 국가자본과 당이 주도하여 민간자본도 참여시킨 대규모 국가기금이 투자에 활용되면서 당-국가-민간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이러한 맥락에서 ‘중국제조2025’ 계획은 ‘강군몽’(强軍夢)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시진핑 주석은 2013년 집권과 함께 중화민족의 부흥이라는 ‘중국몽’(中國夢)을 제시했고, 2015년부터는 그 핵심으로 ‘강군몽’을 강조하며 군사 현대화를 추진했다. 이는 ‘적극적 방어전략’으로서 반(反)접근·지역거부(A2·AD) 전략의 고도화와 첨단무기를 바탕으로 한 국지전쟁 전략을 골자로 하는데, 여기에는 첨단반도체 기술이 필수적이다. 이에 따라 2019년 말까지 약 1.5조 달러 규모의 정부 주도 산업발전기금이 파운드리 기업인 SMIC와 같은 전략부문에 투입되었다. 2) 중국에 대한 미국과 유럽연합의 인식 변화
중국의 첨단기술 확보를 위한 전략은 미국과의 극심한 무역갈등을 초래했는데, 핵심 쟁점 중 하나는 중국의 불공정한 기술이전 문제였다. 예를 들어 중국의 산업 스파이가 직접 기술을 탈취하거나 외국 기업 직원에게 뇌물을 제공해 영업 비밀을 도용하고, 외국 기업을 인수합병 해 기술을 이전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중국에 외국기업이 투자할 때 중국 기업과의 합작회사 설립을 강제하고 기술이전을 조건으로 내세우는 관행도 문제가 되었다. 이에 따라 지식재산권 문제로 중국 법인을 상대로 한 미국 기업의 소송이 급증하였고, 미국 기업들은 미국 정부의 대책을 촉구했다.
특히 ‘중국제조2025’ 계획이 발표된 이후, 미국은 이 계획이 단순한 산업정책을 넘어선 중국 국가안보 전략의 핵심이라고 인식하고 중국의 첨단기술 산업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먼저 미국 반도체 기업을 인수하려는 중국 반도체 기업의 시도에 여러 번 제동이 걸렸다. 2015년 중국 칭화유니그룹이 마이크론을 인수하려다 미국 외국인투자심의위원회의 반대로 실패한 일이 대표적 사례다. 2016년에는 오바마 행정부가 처음으로 중국의 통신 장비회사 ZTE에 대한 수출 규제조치를 발동하였다. 이러한 규제조치는 트럼프 행정부에서 본격화되었고, 바이든 행정부에서도 더욱 강화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후 장에서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한편 미국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에 더해, 매년 증가하는 대중 무역적자가 미국 제조업의 쇠퇴와 일자리 축소 그리고 그에 따른 여러 사회적 문제의 주요 원인이라는 인식이 확산하였다. 미국의 대중 무역적자는 중국이 2001년 WTO에 가입한 이후 빠르게 증가했고, 이러한 추세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2000년과 2017년을 비교하면, 대중 무역수지 적자는 820억 달러에서 3357억 달러로 네 배 증가했고, 전체적자 대비 중국의 비중이 22%에서 60.8%로 세 배 가까이 상승했다.
미국은 이렇게 대중 무역불균형이 심화한 원인으로 중국의 ‘불공정 무역관행’을 지적하기 시작했다. 즉 중국이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의 유지와 발전에 필요한 비용과 역할을 분담하지 않고 그 혜택만을 일방적으로 편취한 결과 무역불균형이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2018년 3월 발표한 국별 무역장벽보고서는 중국의 불공정 무역관행으로 ▲ 중국의 기술이전 요구, ▲ 지적재산권 보호 미비, ▲ 중국 시장에서 외국인 투자자에 대한 투자 제한 등 차별적 대우, ▲ 중국 정부의 부가세 환급정책과 보조금 지원 등 비관세장벽을 명시했다. 미국 정부는 이후 중국의 불공정 무역관행을 지적할 때마다 이러한 항목을 반복해서 제시하고 있다. 보고서는 또한 중국의 기술이전과 ‘중국제조2025’ 계획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도 명시했다.
유럽연합 역시 중국이 국가자본주의 체제를 강화할 목적으로 하는 기술이전을 더 이상 순수한 경제적 상호 이득의 차원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보고 적극적인 대응을 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2016년 이중용도(dual use) 품목에 대한 수출통제를 규정한 입법을 채택했고, 2019년 3월 역내 외국인직접투자 심사를 강화했다. 또한 유럽연합은 2019년 전략전망(Strategic Outlook)에서 중국에 대한 외교노선의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제시했다. 이에 따르면, 유럽은 여전히 중국을 협상 파트너로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경제적·체제적 경쟁자로 규정했다. 또한 중국이 글로벌 행위자이자 선도적인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 규칙 기반의 국제질서에 더 큰 책임감과 호혜성을 보이고 개방성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유럽연합은 중국의 국가자본주의에 따른 비시장적 관행을 시정하는 문제에 대해 미국과 행보를 같이 하고 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2016년 유럽연합이 WTO에서 중국에 시장경제지위(MES) 부여를 거절한 것이다. 2001년 중국이 WTO에 가입할 당시, 가입 의정서 15조는 “중국기업이 시장경제 조건으로 운용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지 못하면 반덤핑 절차에서 중국을 비시장경제로 취급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이 규정은 15년이 지나면 만료되는 것이었지만, 2016년 12월 유럽연합과 미국은 중국에 대한 시장경제지위 부여를 거부하면서 그 근거로 각각 ‘시장왜곡’과 ‘시장지향조건’을 들었다.
이후 2018년 5월 미국, 유럽연합, 일본은 중국의 시장경제 지위 부여와 관련해 산업보조금 규칙의 개정, 기술이전 정책과 관행에 대한 공동성명, 그리고 시장경제국가로 인정받기 위한 7개 조건을 담은 ‘시장지향조건에 관한 공동성명’을 채택했다. 공동성명은 중국을 시장경제로 인정할 수 없는 중대한 이유 중 하나로 국유기업의 시장 장악을 명시했고, 중국 공공기구와 국유기업 그리고 정부의 시장 왜곡 행위 개선을 위해 공동 대응할 것을 밝혔다. 시장경제국가로 인정받기 위한 7개 조건에는 기업의 자유로운 가격결정권, 투자결정권, 요소(자본, 노동, 기술 및 기타 요소) 가격의 시장 결정, 기업의 자율적 자본 배분 결정, 독립적 회계 등 국제기준에 부합한 회계, 기업법·파산법·사유재산법 준수, 기업의 의사결정에 있어 정부의 간섭이 없을 것이 포함되었다.
나아가 미국과 유럽연합은 2021년 9월 무역과 기술 분야에서 협력하고 중국의 비시장적·비민주적 행위에 공동으로 대응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무역기술위원회’(TTC)를 출범했다. TTC 공동성명은 민주주의 가치를 증진하는 방향에서 글로벌 차원의 기술과 무역 영역에서 협력하고 ‘비시장경제’의 불공정한 무역관행과 정책으로부터 기업과 국민을 보호하겠다는 방향을 밝혔다.
그러면서 6대 협력 분야로 ▲ 국가 안보 관련 분야에 대한 투자 심사, ▲ 이중 용도 분야 수출 규제, ▲ 인공지능 기술 남용 대응, ▲ 반도체 공급사슬 재조정, ▲ 비시장적인 무역 왜곡 정책 대응, ▲ 민간기업을 포함하는 모든 이해당사자 참여를 제시했다. 부속서와 10대 실무그룹의 세부 내용을 살펴보면, 민군융합 정책을 통한 기술 획득 전략을 경계하며, 인공지능이 사회 감시 체제 작동에 남용되는 것에 반대하고, 비시장경제가 기술이전 강요와 지식재산 절도·국유기업 우대·강제노동 정책 등을 추구하는 것에 대응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어 TTC가 직간접적으로 중국을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3) 소결
그러나 세계금융위기 이후 미국식 경제모델에 대한 회의가 확산하는 동시에 시진핑 주석 취임 이후 중국이 국가자본주의 성장 전략을 ‘중국몽’으로 일반화하고 중국식 경제모델로 부각하면서 미국과 중국의 정치적·경제적 긴장이 고조되었다. 중국의 변화는 국유자본의 팽창적 해외진출 전략으로서 일대일로와 상위 가치사슬로 도약하고 강군몽을 이루기 위한 군민융합을 내세운 중국제조2025 계획이라는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났다. 이러한 변화는 미국을 비롯한 자유주의 국가에 중국이 자유무역 질서에 깊이 편입되어 있으면서도 이를 악용해 배타적인 민족적 이익을 강화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확산시켰다. 또한 중국이 점차 책임 있는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기보다는 중국식 국가자본주의와 권위주의 체제를 강화하는 한편 국제질서를 교란하고 있다는 비관적 전망이 우세해졌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식은 중국의 불공정 무역관행에 대응하는 국내적 조치와 국제적 공조로 이어졌다.
미국에서는 특히 미중 무역불균형을 포함한 세계적 무역불균형이 부각되면서, 미국에 대한 중국의 대규모 무역흑자가 미국 제조업의 위기와 그에 따른 사회적 문제의 원인이라는 인식이 확산했다. 이러한 인식은 경제민족주의를 앞세운 인민주의와 탈세계화 요구를 등에 업은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중국과 무역분쟁을 벌이는 하나의 주요한 배경이 되었다.2. ‘무역분쟁’에서 ‘전략적 경쟁’으로
1) 트럼프 행정부의 무역분쟁
이러한 대중국 전략의 전환은 트럼프 행정부 시기부터 본격화되었다. 2017년 트럼프 행정부가 발표한 「국가안보전략 2017」은 지역 차원의 전략 중 첫째로 ‘인도-태평양 지역’을 다루면서 중국의 영향력 확대가 미국의 국익을 침해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2019년 미국 의회가 국방수권법에서 중국에 관한 포괄적인 전략을 수립할 것을 요구한 데 부응하여, 트럼프 대통령의 백악관이 2020년 5월 발표한 「중국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접근」은 미국과 중국이 경제·가치·안보 측면에서 ‘전략적 경쟁 상태’에 있다는 점을 명시했다. 2020년 국방수권법 역시 중국을 전략적 경쟁자로 규정하고 ‘인도-태평양 전략’을 실행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들에 예산을 배정했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국내의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하는 상황에서도, 대외정책에 대해서는 의회가 초당적 합의를 도출한 것이었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는 효과적인 경쟁전략을 채택하지 못하고 중국과의 무역분쟁에 몰두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의 ‘불공정 무역행위’를 근거로 무역법 301조에 따라 2018년 7월 이후 네 차례에 걸쳐 전체 대중 수입 중 약 3분의 2 이상에 해당하는 품목, 3600억 달러 규모의 중국산 제품에 최대 25%의 추가관세를 부과했다. 이에 중국 역시 추가관세 조치로 맞대응함으로써 본격적인 미중 ‘무역분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미국의 무역적자는 금융세계화와 달러 환류메커니즘이라는 구조적 요인으로 인한 것이기에, 무역적자 감축 자체만을 목표로 하는 것은 단기적이고 협소한 시도였다. 게다가 그 수단으로 활용한 관세전쟁은 미국의 소비자와 생산자에게 오히려 해를 가할 뿐 실제 무역수지를 개선하는 효과도 분명하지 않았다. 2018년 무역분쟁 이후 양국의 무역에서 상대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하락했고, 특히 미국의 대중국 수입 비중은 2017년 21.9%에서 2022년 상반기 17.3%로 하락했다. 그렇지만 미국의 대중국 전체 무역 규모와 무역적자 규모는 2019년과 2020년 감소했다가 2021년부터 다시 증가하기 시작하여 2022년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게다가 트럼프의 무역분쟁은 미국 우선주의를 추구하면서, 그간 미국이 강조해 온 ‘규칙에 기반한 세계질서’라는 원칙을 스스로 파괴했다. 나아가 2017년 무역확장법 232조에 따라 미국의 국가안보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철강과 알루미늄 수입에 부과한 관세와 무역법 201조에 따라 산업보호를 이유로 태양광과 세탁기에 발동한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는 한국과 일본 그리고 유럽연합과 같은 전통적 동맹국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다. 또한 WTO 상소기구를 사실상 기능정지 상태로 만들고 본래 미국이 주도했던 TPP에서 탈퇴하는 등 다자적 국제협력의 기반을 무너뜨렸다.2) 바이든 행정부의 전략적 경쟁
바이든 행정부의 전략적 경쟁 구상에는 2020년 발생한 코로나19 대유행이 큰 영향을 미쳤다. 코로나19 대유행은 두 가지 측면에서 전략적 경쟁을 한층 심화했다. 먼저 미중갈등의 성격을 무역분쟁에서 체제경쟁으로 확고히 바꿔놓았다. 트럼프 행정부 시기 미국은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인해 국내적으로도 큰 피해를 보았을 뿐만 아니라, 미국 우선주의를 고수하고 세계보건기구(WHO)를 탈퇴하며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라는 원칙을 스스로 저버리고 지구적 문제에 대응하는 데 명백한 리더십의 한계를 드러냈다. 중국은 국가 주도의 강력한 봉쇄정책인 ‘제로 코로나’ 정책으로 빠르게 코로나 종식에 성공했다고 선언하는 한편, 이를 자국 체제의 우월성으로 내세웠다.
코로나19 대유행은 또한 글로벌 공급망 문제를 국가안보상의 과제로 부각했다. 대유행 초기에는 일부 국가가 다자적 협력보다는 마스크를 포함한 의료용품에 대한 수출금지 조치를 시행하는 보호주의적 움직임을 강화하면서 글로벌 의료공급망이 붕괴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이러한 우려는 이후 백신 개발과 보급을 둘러싸고 반복되었다. 2020년 하반기에는 세계적으로 반도체 공급 부족 현상이 나타났는데, 특히 미국은 차량용 반도체의 병목 현상이 심화하여 완성차 생산에 큰 지장이 생기면서 글로벌 공급망 교란의 피해를 절감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바이든 행정부는 민간자본주의의 중추가 되는 중산층을 복원하고, 코로나19에 대한 국제적 공동대응을 수행하며, 중국에 대한 세계적·지역적 대응을 강화하는 다양한 대내외적 정책을 종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바이든 행정부의 인식은 백악관이 2021년 3월 발표한 국가안보전략잠정지침 「미국의 우위/장점을 쇄신하자」에 집약되어 있다. 잠정지침은 세계의 안보 상황이 자유주의·민주정과 권위주의·독재정이라는 정치이념과 체제 경쟁이라는 특징을 보이며, 따라서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중심으로 동지적인 동맹국·협력국과의 협력을 강화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또한 잠정지침은 코로나19 대유행과 같은 세계적 의제의 등장으로 인해 국가안보전략에서 대내정책과 대외정책의 구별과 국가안보·경제안보·보건안보·환경안보와 같은 전통적 구별이 무의미해지고 있으므로 이를 통합적으로 조정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바이든 행정부의 대중국 전략은 트럼프 행정부의 대중국 전략과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차이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중국과의 전략적 경쟁을 양자간 무역분쟁을 넘어서 체제와 가치 그리고 종합적인 안보를 둘러싼 경쟁으로 좀 더 명확하게 규정하려 한다. 즉 바이든 행정부에서 다시 정립된 전략적 경쟁은 국제적 표준을 둘러싼 국가자본주의와 민간자본주의 그리고 자유민주정과 권위독재정의 경쟁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코로나19와 기후변화에 대한 공동대응, 일대일로로 대표되는 ‘중국특색의 개발협력’에 대응할 수 있는 대안적인 기반시설 구축계획, 5G와 인공지능 등 첨단기술과 관련된 국제적 표준을 설정하는 문제가 포함된다.
또한 바이든 행정부는 미국 국내외 공급망의 구조적 취약성이 미국의 경제 및 국가안보를 위협하고 있다는 인식에 따라, 글로벌 스탠더드 재건의 핵심으로 (중국이 아닌)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공급망의 구축’(Supply America)를 강조한다.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직후 ‘미국 공급망’ 행정명령에 서명하면서 4대 핵심품목(반도체, 배터리, 희토류 등 핵심광물, 의약품)과 6대 주요 산업(국방, 보건, ICT, 에너지, 운송, 농업)의 공급망을 점검하고 위험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을 범정부적으로 도출할 것을 촉구했다. 이에 대한 후속조치로 4대 핵심 품목에 대한 공급망 취약점과 대응방안이 포함된 100일 공급망 검토보고서가 작성되었다.
공급망 강화를 위한 대응방안의 핵심은 대내정책과 대외정책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대내적으로는 국내로 생산시설을 돌아오게 하는 ‘리쇼어링’(reshoring) 정책과 투자 지원을 통해 전략 부문의 미국 내 제조 역량을 중장기적으로 재건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이에 따라 2022년 반도체 및 첨단기술 생태계 육성에 총 2800억 달러를 투자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반도체 칩과 과학법’과 전기자동차 배터리 부문의 보조금 정책이 포함된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입법했다. 한편 두 법안에는 공통으로 보조금 지급 조건에 중국을 비롯한 ‘우려 국가’에 대한 의존도를 낮춰야 하는 규정이 포함되었다. 예를 들어 미국에 반도체 시설을 건립하여 보조금을 받으면 가드레일(안전장치) 조항에 따라 10년간 중국 같은 우려 국가에 반도체 시설을 투자하는 데 제한을 받게 되며, 전기차 보조금을 받기 위해서는 해외의 우려 국가에서 추출, 제조, 재활용된 광물이 배터리에 일정 비율 이하로만 들어가야 한다.
대외적으로는 동맹국과의 공급망 협력을 강화하는 ‘프렌드쇼어링’(friend-shoring) 정책으로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방안을 제시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도-태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미국과 체제와 가치를 공유하는 동맹국·협력국과의 다자간 협력이 대외정책의 핵심 과제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에 따라 바이든 행정부에서 구체적으로 가시화된 계획 중 하나가 바로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라고 할 수 있다.
IPEF는 2021년 10월 동아시아정상회의(EAS)에서 바이든 대통령이 처음 제안한 이후, 2022년 5월 23일 공식 출범하여 현재 미국을 비롯해 한국·일본·호주·뉴질랜드·인도와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7개국(브루나이·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필리핀·싱가포르·태국·베트남)과 피지가 참여하고 있다. IPEF는 시장개방을 핵심으로 하는 기존의 세계무역기구(WTO) 체제나 자유무역협정(FTA) 방식의 경제통합은 아니면서도, 행정협정이라는 형태로 무역, 공급망, 인프라 및 청정에너지와 탈탄소화, 조세와 반부패를 망라하는 다양한 영역에서 일정하게 구속력 있는 합의와 약속을 맺는 경제협력체를 표방한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역시 신뢰할 수 있는 공급망 구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난해 IPEF가 공식 출범한 이후 올해 5월 27일 공급망 협정이 네 개 부문 중 가장 먼저 타결되었다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공급망 협정의 핵심 내용으로는 ▲ 공급망 위기 극복을 위한 정부 간 공조기구인 ‘위기대응네트워크’ 구축, ▲ 평상시 공급망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불필요한 조치를 자제하는 한편 공급선 다변화를 위한 투자 확대와 공동 연구개발 노력을 위한 ‘공급망 위원회’ 설치, ▲ 공급망 안정화에 필수적인 숙련 노동자 육성과 노동권 개선 노력을 위한 ‘노사정 자문기구’ 구성이 담겼다.
바이든 행정부는 나머지 무역, 청정경제, 공정경제 부문의 협정도 마무리하여, 올해 11월로 예정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IPEF 최종 타결을 발표할 수 있기를 희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외에도 바이든 행정부는 2021년 12월 반권위주의, 부패 척결, 인권 증진을 의제로 하는 민주주의 정상회의를 개최하는 한편, 미국·인도·일본·호주 4개국의 안보협의체인 쿼드와 같은 다자협력의 틀을 활용하고 있다. 이에 따라 미중 경쟁은 양국의 무역분쟁을 넘어, 첨단기술, 공급망, 기반시설 투자와 같은 주제를 포함하는 지역 차원의 체제 경쟁적 성격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3) 쌍순환: 전략적 경쟁에 대한 중국의 대응
쌍순환 전략은 대내적으로 내수를 키우고 활성화해 국내경제(국내대순환)를 최대한 발전시키고, 대외적으로 수출과 개혁개방을 지속하며 세계경제와의 선순환(국내·국제 순환)을 상호 촉진한다는 새로운 발전전략이다. 즉, 미중 갈등의 심화와 장기화에 대응하기 위해 중국이 거대한 내수시장을 활용하여 자체적으로 선순환할 수 있는 경제체제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전략이다. 이를 위해 국내대순환의 측면에서는 핵심 원천기술을 자주화하고, 산업구조 고도화를 통해 공급망을 강화하며, 소비와 투자를 촉진해 내수를 활성화할 것을 강조했다. 국내·국제 순환과 관련해서는 핵심 부품과 원자재의 안정적 공급을 추구하는 한편 대내외 무역 규범을 일체화할 것을 강조했다.
그런데 소비 촉진을 통한 내수 활성화를 위해서는 가계의 소비역량 확대가 필요하다. 그러려면 다른 국가에 비해 상당히 강한 중국 가계의 저축성향을 약화할 필요가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2016년 중국의 총저축률은 세계 평균보다 약 20%p 높은 46%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그중에서도 가계저축률이 절반 정도를 차지하며 세계 평균에 비해 높은 편이다. 이렇게 중국 가계의 저축성향이 강한 이유로는 사회안전망 부족과 큰 소득 격차가 지적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경제성장을 지속하는 가운데 사회보장제도를 정비하고 소득 불평등을 개선해야 하지만,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정치적 안정을 우선순위에 두고 관련한 개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고 있다. 2021년 제시된 ‘공동부유’ 전략 역시 사회안전망을 구축하고 소득재분배를 강화하는 정책이라기보다는, 알리바바와 같은 민간 빅테크 플랫폼 기업을 불평등의 원인으로 지목하면서 이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국유기업이 주도하는 첨단산업 육성에 보조를 맞추도록 하려는 구상에 가깝다.
결국 쌍순환의 내수 확대 노력은 가계 저축률 감소로 이어지지 못하고 다시 투자 확대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 다만 부동산 부채와 과잉투자 문제가 심각한 상황에서 세계금융위기 이후처럼 대규모 기반시설과 부동산 건설투자가 중심이 되기보다는, 기술적 자립자강을 위한 첨단산업의 기술혁신과 기반시설 확충을 위한 투자가 중심이 될 것으로 보인다.
첨단산업의 기술혁신과 관련해서 중국 정부는 2021년 원천기술 확보를 위한 기초연구비를 전년대비 10.6% 늘리고, 반도체 분야를 전략적으로 육성하기 위한 대규모 기금인 ‘국가반도체산업투자기금’(国家集成电路产业投资基金, 빅펀드)을 조성했다. 14차 5개년 규획은 특히 반도체를 국가안보의 핵심 영역으로 규정하고, 그중에서도 반도체 설계(EDA), 소재, 첨단메모리와 차세대 전력 반도체(SiC, GaN)의 발전을 강조했다. 기반시설 확충과 관련해서는 2020년 중국 국가발전개혁위원회가 7대 신형 기반시설에 대해 2025년까지 총 10조 위안 규모의 투자계획을 발표했다. 신형 기반시설은 디지털 전환과 신산업에 중심인데, 세부적으로 4개의 정보통신망(5G 기지국, 산업 인터넷, 데이터센터, 인공지능)과 2개의 에너지망(특고압 송전설비, 전기차 충전시설) 그리고 고속철도 교통망으로 구성된다.
시진핑의 세 번째 집권을 확정한 자리이기도 했던 2022년 10월 중국공산당 20차 전국대표대회에서도, 중국공산당은 쌍순환 전략을 재차 강조한 가운데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현대화를 위한 전략 중 하나로 과학기술과 교육을 강조하는 ‘과교흥국’ 전략을 별도의 장으로 내세웠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당 중앙이 과학기술 작업에 대해 통일적으로 영도할 수 있도록 신형거국체제를 강화할 것이라고 밝힌 점이다. 거국체제란 정부가 국가의 자원을 모아 특정한 목표를 달성하는 체제를 의미하는데, 현재 중국이 직면한 새로운 도전, 즉 ‘조임목’(choke point)에 해당하는 관건 핵심기술을 확보하는 데 전력을 다하겠다는 것이다. 이어 2023년 3월 양회(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와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도 중국 정부는 ‘발전과 안보의 균형’을 강조하며 미국의 견제에 대응하기 위한 과학기술 자립, 공급망 안정, 신형거국체제 구축 등 경제안보 전략을 적극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내세웠다.4) 소결
중국의 쌍순환 전략은 미국의 전략적 경쟁에 맞서 대내적으로 첨단산업과 전략산업 분야의 자립자강을 추구하고 이에 적합한 기반시설을 확충하면서 자체적인 공급안전망을 확보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긴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중국의 전략은 대외적으로 국내대순환과 국제순환의 상호 촉진이라는 측면에서 주변국과의 협력을 확대하며 중국의 제도와 규정을 국제규범에 맞추어가는 방향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시진핑과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계속해서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구의 현대화와 다른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현대화를 강조하고 국가자본주의에 기초한 내적 체제 공고화에 힘쓰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중국의 전략이 규칙에 기반을 둔 ‘제2의 개혁개방’으로 이어지기보다는 국내공급망의 자급화에 집중하며 이른바 ‘홍색공급망’의 강화로 이어질 가능성도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반도체로 대표되는 첨단기술 영역에서 두드러지고 있다.3. 전략적 경쟁의 최근 쟁점: ‘반도체 전쟁’
1) 미국의 대중 반도체 산업 제재
또 하나 좀 더 중요한 이유는 반도체가 거의 모든 현대 산업과 군사 체계에 필요한 대표적인 이중용도 품목이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이 미국과 상이한 가치와 체제를 추구한다는 사실은 해당 기술을 어떤 목적을 위해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체제경쟁이라는 성격을 더한다. 이에 따라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기술은 경제·안보 복합체(nexus)로 묘사되기도 한다. 앞서 살펴본 대로 중국이 반도체 국산화율을 제고하고 글로벌 공급사슬에서 상위로 진입하며 강군몽을 실현하기 위한 계획으로 ‘중국제조2025’을 제시한 이후, 이에 대해 미국을 비롯한 각국의 우려가 커지면서 반도체 공급망에서 중국 위험을 줄이기 위한 일련의 경제안보 정책이 다각도로 제출되었다.
미국은 오바마 행정부 말기 중국 ZTE의 통신장비 수입을 규제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트럼프 행정부와 바이든 행정부를 거치며 중국의 반도체 산업에 대한 수출통제와 투자제한 조치를 강화해왔다. 미국에서 중국산 통신장비에 대한 우려는 미중 관계가 악화되기 이전부터 비교적 일찍 제기되었다. 미 의회는 2012년 중국산 통신장비의 안보 위협을 지적하면서 정부 조달에서 중국산 장비를 배제할 것을 권고하는 보고서를 발표했고, 2018년 8월에는 초당적인 지지 하에 정부 기관의 중국산 통신장비 조달을 금지하는 국방수권법을 제정했다. 나아가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의 군민융합을 명시적으로 비판하며 2019년 화웨이를 수출통제리스트에 올렸고, 이어 2020년에는 두 차례에 걸친 제재를 통해 화웨이에 대한 반도체 수출을 사실상 전면 금지했다.
미국의 대중 반도체 산업 제재는 점차 첨단반도체 기술을 표적으로 하여 ‘마당은 좁게, 담장은 높게’ 하는 방식으로 강화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의 최대 파운드리 기업인 SMIC와 D램 제조 기업인 푸젠진화를 수출통제리스트에 올리고 첨단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장비의 수출을 규제했다. 또한 2018년 네덜란드의 반도체 장비기업 ASML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생산하고 있는 최첨단 극자외선 노광장비(EUV)를 중국 기업에 판매할 수 있도록 네덜란드 정부가 허가하자, 트럼프 행정부는 네덜란드 정부와 협상을 벌였고 이후 네덜란드 정부가 ASML의 대중 수출 면허를 갱신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바이든 행정부 역시 2021년 4월 출범 이후 발표한 첫 수출통제리스트에 중국의 슈퍼컴퓨터 회사 7개를 포함한 데 이어, 2022년 10월에는 중국의 반도체 기업에 첨단반도체 장비 판매를 금지하고 AI와 슈퍼컴퓨터에 사용되는 반도체에 대한 수출을 제한하는 새로운 수출통제 조치를 발표했다. 이 조치는 먼저 미국 기업이 특정 수준 이상 반도체를 생산하는 중국 기업에 첨단반도체 제조 장비를 판매할 경우 별도의 허가를 받도록 했다. 특히 중국 내 생산시설을 중국 기업이 소유한 경우 ‘거부 추정 원칙’을 적용해 수출이 사실상 금지되었다.
올해 초에는 일본과 네덜란드가 이 수출통제 조치에 동참하기로 합의했다. 세부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일본은 니콘과 도쿄 일렉트론이 7월부터 23종의 반도체 제조 장비를 중국으로 수출하는 것을 제한하기로 했고, 네덜란드는 ASML이 생산하는 심자외선(DUV) 노광장비의 중국 수출 승인 요구조건에 대한 새로운 규정을 발표할 예정이라는 입장을 6월 말에 밝혔다. 중국의 반도체 장비 수입에서 일본에 대한 의존도가 37.2%에 달하는 한편 노광장비가 중국 반도체 산업에서 가장 취약한 분야라는 점에서, 일본과 네덜란드의 수출통제 조치는 중국의 첨단반도체 자립화 시도에 큰 영향을 줄 것으로 전망된다.
고성능 AI와 슈퍼컴퓨터용 반도체 칩에 대한 수출 제한 조치에는 화웨이에 부과되었던 제재와 마찬가지로 ‘해외직접생산규칙’이 적용되어, 미국의 기술을 사용했을 경우 제3국 기업이 만든 칩 역시 수출을 금지하도록 했다. 미 상무부는 중국이 첨단반도체, AI, 슈퍼컴퓨터 기술을 대량살상무기와 첨단무기 시스템을 생산하고 인권을 유린하는 데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수출통제 조치를 시행했다고 밝혔다.
이렇게 미국이 반도체와 관련해 개별 기업이 아닌 특정 기술을 기준으로 중국을 겨냥해 고강도의 수출통제 조치를 부과한 것은 이 10월 수출통제 조치가 처음이다. CSIS는 이 조치가 두 가지 측면에서 이전의 대중국 무역·기술 정책과 완전히 다르다고 분석했다. 첫째, 새로운 정책은 최종 사용자와 관련이 있는지와 관계없이 중국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 둘째, 이전의 정책이 중국의 기술 진보를 허용하되 속도를 제한하는 것이었다면, 새로운 정책은 중국이 특정 수준 이상의 최첨단 기술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제한한다.
바이든 행정부는 또한 중국의 첨단반도체 산업에 대한 투자 제한 조치도 강화했다. 2021년 6월에는 중국의 군 관련 반도체 기업에 대해 직·간접 주식투자 금지를 발표했고, 올해 8월에는 ‘우려 국가의 특정 국가안보 기술·제품에 대한 미국 투자 대응 행정명령’을 발표했다. 내년부터 시행될 것으로 보이는 이 조치에 따르면, 사모펀드와 벤처캐피털 등 미국 자본이 우려 대상 국가로 지정된 중국·홍콩·마카오의 첨단반도체, 양자 정보 기술, AI 시스템 3개 분야에 투자할 때 재무부의 허가를 받도록 해 사실상 투자가 금지된다. 2) 중국의 반도체 자립화 전략
중국 정부는 2014년 ‘국가 집적회로 산업 발전 추진 강요’에서 처음으로 반도체를 전략산업으로 규정하고, 2015년 ‘중국제조2025’ 계획에서 2030년까지 반도체 국산화율을 75%로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이를 위해 2014년 200억 달러 규모의 1기 국가반도체산업투자기금(빅펀드)을 설립했다. 빅펀드는 지방정부, 금융기관, 민간기업과 국유기업이 참여하는 한편, 기존의 보조금과 결합해 대규모 자금이 투입될 방향을 안내하는 역할을 했다. 1기 빅펀드는 반도체 제조 능력 확대에 중점을 두고 23개 기업의 70개 프로젝트에 투자되었다. 분야별로 보면 제조 67%, 설계 17%, 후공정 10%, 장비 및 소재가 6%를 차지했다.
이후 군민융합을 내세운 ‘중국제조2025’에 대한 각국의 우려가 커지는 한편 미국과의 전략적 경쟁이 촉발되어 중국의 반도체 산업에 대한 제재가 본격화되면서, 중국의 반도체 국산화 전략은 한층 더 국가안보적 성격을 강화했다. 2019년 설립된 2기 빅펀드는 자금 규모가 훨씬 더 커졌을 뿐만 아니라, 1기에서는 없었던 통신, AI 반도체, 차세대 전력 반도체 분야에 대한 투자를 강조했다. 나아가 중국은 해당 분야 혁신기업에 대한 자금 조달을 지원하고 미국 자본시장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2019년 상하이증권거래소에 중국식 나스닥이라고 할 수 있는 ‘커촹반’(科創板)을 개설했다. 커창봔은 중국의 주요 기술기업이 홍콩이나 미국 증시에 상장하는 관행을 끊고자 시진핑 주석의 지시로 추진된 정보기술 주식 전문 거래소다. 커촹반은 상장 절차와 규정을 간소화한 주식발행 등록제로 운영되어 반도체 기업 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중요 통로로 성장했다.
이러한 흐름은 앞서 살펴본 대로 2021년 14차 5개년 규획에서 종합되었다. 14차 5개년 규획은 반도체 분야를 국가안보의 핵심 분야이자 전략육성 분야 중 하나로 선정하고, 중국의 약점이 되는 반도체 설계 소프트웨어, 고순도 소재, 주요 제조장비와 기술, 첨단메모리 기술, 차세대 반도체를 개발할 것을 명시했다. 또한 쌍순환 전략의 일환으로 자국의 거대한 반도체 소비시장을 활용해 독자적인 반도체 산업생태계와 공급망을 구축하겠다는 방향 역시 제시했다.
이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점은 지난 7월 중국 정부가 갈륨과 게르마늄 관련 품목에 대해 상무부 허가 없이 수출을 금지하는 방안을 담은 수출통제 조치를 발표한 것이다. 이 조치는 일차적으로는 최근 확대된 미국의 반도체 수출통제에 대한 보복 조치로 볼 수 있지만, 동시에 중국의 첨단산업 공급망 내재화 전략과도 맞닿아 있다. 갈륨은 최근 중국이 육성하는 차세대 반도체 중 하나인 질화갈륨(GaN) 반도체의 핵심 재료로, 전 세계 매장량 가운데 중국이 80~85%를 점하고 있다. 차세대 반도체 분야는 기존의 실리콘 기반 반도체에 비해 고급 노광장비가 필요하지 않으며, 5G와 전기차에 주로 사용되기 때문에 중국 내수시장에서 향후 많은 수요가 존재할 것이므로 중국 정부는 관련 공급망을 구축하려 하고 있다.
종합해 보면, 중국은 미국과의 전략적 경쟁이 심화하는 가운데 미국의 제재가 집중되고 있는 첨단반도체 영역에서 장기적인 국가 전략으로 반도체 설계, 제조 장비, 소재에 대한 자체적인 기술 역량을 개발하려 하고 있다. 또한 내수시장을 기반으로 중국이 경쟁력을 갖춘 중저위 분야를 발판 삼아 독자적인 반도체 공급망과 산업생태계를 구축하겠다는 방향을 명확히 하고 있다. 3) 소결
이에 대한 중국의 반도체 굴기 전략은 기본적으로 미국의 전략에 비대칭적인 조건에서 수립되었고 점차 제재가 강화됨에 따라 수세적인 대응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은 대규모 투자와 지원을 통해 일부 소재와 장비 그리고 범용 반도체를 중심으로 자급률을 높이고는 있지만, 첨단반도체를 포함하는 자체적인 산업생태계와 공급망을 온전히 구축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2021년 칭화유니그룹의 파산에서 볼 수 있듯, 국가 주도 투자에 의존하며 수익성 하락과 부채위기가 나타나는 중국 경제의 한계가 반도체 굴기에서도 반복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장기적으로 자본시장과 기술 규범의 분리가 강화될수록 중국의 반도체 생태계는 혁신의 한계가 두드러질 것이며, 결과적으로 ‘적당히 작동하는 반도체와 인공지능에 기반하여 글로벌 서비스 플랫폼과 분리된 채 작동하는 권위주의적 체계’에 머무를 수 있다는 부정적 전망 역시 제기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반도체 전쟁’이 기술과 군사안보 경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가치와 체제를 지향하는 기술규범과 제도를 형성할 것인가를 둘러싼 체제경쟁의 성격을 포함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반도체를 기반으로 하는 디지털 기술이 경제, 군사, 사회 전반이 작동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요소가 되면서, 이를 조직하는 원리와 제도 역시 중요해진 것이다. 중국의 인터넷 관리·통제 제도인 ‘만리방화벽’과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한 감시 시스템이 권위주의적 디지털 기술 모델로 확산하면서 우려와 비판이 증대하는 가운데, 그러한 모델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첨단반도체 기술에 중국이 접근하는 것을 제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국제사회에서 커지고 있다.4. 결론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특히 미중 무역불균형을 강조하며, 2018년부터 무역분쟁이라는 형태로 양국 간의 대결을 폭발시켰다. 이후 코로나19 대유행을 거치며 양국의 대결은 무역분쟁을 넘어 정치·경제·보건의료를 아우르는 전략적 경쟁의 성격으로 심화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이를 자유주의·민주정과 권위주의·독재정의 대결로 특징짓고,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내세우며 동맹국·협력국과의 다자적인 규칙 기반 질서 재정립과 공급망 협력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대해 중국은 시진핑 주석과 중국공산당을 중심으로 권력을 더욱 집중하는 한편 경제에서도 국가와 당의 역할을 심화하고 쌍순환 전략으로 대표되는 중국 특색의 현대화와 자립자강의 길을 내세우고 있다.
이렇게 본격화된 미중 전략적 경쟁의 성격이 무엇인가에 대해 그간 많은 분석이 제기되어왔다. 과거 미국과 소련의 냉전처럼 미국을 비롯한 서방 진영과 중국을 비롯한 반서방 진영이 뚜렷하게 분리되는 ‘신냉전’으로 보는 견해나, 도전자 국가로 부상한 중국과 기존 패권 국가인 미국 간의 헤게모니 경쟁으로 보는 견해가 대표적이다.
미국과 중국의 전략적 경쟁은 국제적 표준을 둘러싸고 어떤 자본주의이며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가를 둘러싼 경쟁이라는 점에서 과거 냉전 시기와 마찬가지로 체제 경쟁이라는 성격을 갖고 있다. 하지만 전략적 경쟁은 세계 경제가 긴밀히 상호 연결된 가운데, 특히 중국이 세계 경제에 깊이 통합된 가운데 전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경제적·인적 교류가 막힌 봉쇄정책을 기본으로 했던 과거의 냉전과는 다르다. 최근 경제와 안보 결합의 최전선에 놓인 이른바 ‘반도체 전쟁’에서 첨단반도체 산업의 일부 영역을 중심으로 중국에 대한 미국과 동맹국의 수출통제와 공급망 분리 조치가 비교적 두드러지고 있지만, 이 역시 중국 반도체 산업 전반에 대한 탈동조화(decoupling)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주요 7개국(G7)은 지난 5월 정상회담에서 중국과의 전략적 경쟁의 성격을 탈동조화가 아닌 ‘위험억제’(de-risking)로 명확히 규정했다. 즉 “탈동조화가 아닌 위험억제와 다변화에 기초하여 경제 복원력과 경제안보를 위한 구체적 조치를 조율”하기로 합의하고 공급망 분야에서 과도한 중국 의존을 줄여나가는 동시에, “중국과 솔직하게 관여하고 우려를 직접 표명하는 것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가운데 중국과 건설적이고 지속가능한 관계를 구축할 준비가 되어 있다”라는 것이다. 또한 미국은 중국의 국가자본주의와 권위주의가 강화되면서 중국이 미국의 경제·가치·안보에 위협요인이 되고 있다고 판단하고 이에 대비하는 한편, 트럼프 행정부 시기 침식되었던 자유주의적인 규칙 기반 국제질서를 복원하고 재편하려 하고 있다. 이 점에서 전략적 경쟁은 분명히 관여정책의 완전한 폐기나 봉쇄정책으로의 복귀를 지향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관여정책이 작동할 수 있는 조건을 새롭게 창출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한편 미국과 중국의 전략적 경쟁은 진정한 의미에서 헤게모니 경쟁이라고 보기 어렵다. 헤게모니는 단순히 힘에 의한 패권이 아니라 제도적, 문화적 지도력을 바탕으로 동의를 끌어냄으로써 유지되는 지배 질서를 의미한다. 세계금융위기와 코로나19 대유행을 거치며 미국 헤게모니가 쇠퇴하는 가운데, 중국 특색의 현대화와 신형대국관계를 내세우는 중국은 그러한 의미의 헤게모니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시진핑 주석 집권 이후 중국은 중국몽의 실현을 추구하면서 ‘중국제조2025’ 계획에서 드러나듯 다양한 비시장적 수단을 활용해 첨단기술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부국과 강병을 연계하고 있고, 일대일로 계획에서 드러나듯 대외지원을 필요로 하는 주변국을 목표로 해외에서 기반시설과 공급망을 확충하려 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중국은 국제질서에서 규칙 기반의 다자주의적 질서를 존중하기보다는,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양자적 관계를 확대하며 자국의 패권적 지도력을 강화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
한편, 어떤 국가가 새롭게 헤게모니 국가로 부상하기 위해서는 대안적이고 안정적인 축적체계를 갖춰야 한다. 그러나 중국의 국가자본주의 모델이 대안적 체제가 될 수 있는지 역시 의심스럽다. 세계금융위기 이후 중국의 부상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커졌지만, 동시에 중국 경제가 중진국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전망도 제시되었다. 이는 중국 경제가 급속히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인 대규모 저임금 노동력 투입과 자본 투입에 의한 성장이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이었다. 이에 중국은 민간부문에 대한 당의 통제력을 강화하고 국유부문이 장악하고 있는 핵심 경제부문에 자원을 집중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그 결과 대규모 투자를 앞세운 일부 국유기업이 세계적 수준으로 성장할 수 있었지만, GDP의 약 25%를 차지하는 부동산 부문의 거대한 부채 문제와 국유기업의 낮은 생산성 문제가 잠재적 위험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러한 잠재적 위험은 최근 부동산 부문의 부채위기와 민간 투자의 감소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말 중국 정부가 ‘제로 코로나’ 정책을 포기하면서 중국 경제가 반등할 것이라는 기대가 높았지만, 현재 시점에서 볼 때 전반적인 성장세가 둔화하는 가운데 부동산 부문의 부채위기가 가시화되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대유행 시기를 거치며 중국의 저축률이 다시 증가하는 가운데 민간 소비와 투자가 상당히 저조하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중국은 민간 부문의 활력이 떨어질수록 정부의 재정 투입과 국유부문의 투자에 의존할 가능성이 큰데, 이는 수익성 악화와 부채위기 심화로 대표되는 중국 경제의 모순을 더욱 응축하는 방향이 될 것이다.
201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국가자본주의와 권위주의를 강화해 온 중국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정치적·군사적 위협을 증대할 뿐만 아니라, 장기 저성장에 빠진 세계경제의 불안정성을 심화하고 위기관리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무역분쟁과 코로나19 대유행 시기 미국과 중국의 갈등은 안정적이고 개방된 시장과 같은 세계적 공공재(public goods)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다자적 국제질서를 훼손하고 민족주의에 기반한 보호주의를 강화하는 공공악(public bads)을 제공하면서 ‘G 마이너스 2’의 세계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남겼다. 이후 바이든 행정부 들어서 다자적 동맹질서를 복원해 중국에 공동으로 대응하려는 미국과의 전략적 경쟁이 한층 심화하는 가운데, 중국은 계속해서 ‘제2의 개혁개방’보다는 당 지도부로 권력을 집중하며 중국 특색의 현대화와 자립자강 노선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세계적 위기에 대한 공조와 협력이 들어설 수 있는 자리를 좁히면서, 2020년대의 세계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하나의 ‘초거대 위협’이 되고 있다.
바그너 그룹의 반란과 그 결과에 관한 러시아 좌파매체의 성명
균형외교는 가능한가
윤석열 대통령의 한일, 한미정상회담은 한·미·일 간의 안보와 경제협력을 활성화하려는 구상 아래서 추진되었다. 정부는 중국과 러시아가 국제질서를 위협하고 있으며, 중국, 러시아가 미국과 대립하는 구도가 체제유지에 유리하다고 여기는 북한이 중·러와 밀착하는 것을 위협적이라고 판단했다. 특히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이 고도화되면서 한국 내 불안이 커지자, 핵무장 여론이 부상하는 것에 대응이 필요했다. 그래서 국내 반발을 무릅쓰고 일본과의 관계복원 의지를 밝히고, 북·중·러의 항의를 감수하며 한일·한미 정상회담을 개최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문재인 정부의 외교노선과 확실한 선을 그은 것이기도 하다.
문재인 정부의 외교노선을 계승한 민주당은 국익 중심의 실용외교를 표방하며, 윤석열 정부가 미·일에 치우쳐 북·중·러와의 관계가 나빠졌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민주당은 문재인 정부의 외교정책이 북한과의 관계개선에도 실패했고, 균형외교라는 명분 아래 중국과 러시아의 팽창주의적 행보를 묵인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무엇보다 실패한 정책을 어떻게 다시 적용할 수 있는지 답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상당수 사회운동은 민주당의 외교노선을 지지하면서 정상회담을 비판했다. 이런 비판은 반미진영론을 근거로 하며, 북·중·러가 국제질서를 흔들고 전쟁위기를 고조시킨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상당수 사회운동의 이와 같은 국제정세 인식은 국제연대를 통한 반핵평화운동의 건설을 가로막는다는 점에서 문제다. 적극적인 토론으로 사회운동의 국제정세 인식을 쇄신하는 것이 시급한 이유다. (이 글은 《사회운동포커스》 「한일정상회담에 대한 민주당의 비판은 타당한가?」와 「시대착오적 민주당의 한미정상회담 평가 비판」을 합쳐서 보강했다.)1. 민주당의 한일정상회담 비판의 문제점
3월 한일정상회담에서 일본은 한국에 수출하는 반도체 소재 3개 품목에 대한 수출규제를 해제했고, 이에 상응하여 한국 정부도 일본에 대한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를 취하했다. 중단되었던 셔틀외교도 재개하기로 했으며, 한일 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GSOMIA) 정상화와 경제안보 협의체를 출범하고, ‘한일 미래 파트너십 기금’을 설립하기로 했다.
5월 한일정상회담에서는 일본이 한국에 대한 화이트리스트를 복원했으며, 후쿠시마 오염수 관련 한국 전문가의 현장 시찰단 파견에 합의했다. 또한, 기시다 총리는 역대 내각의 역사인식을 계승한다고 밝히고, “고통스럽고 슬픈 일을 겪으셨다는 것에 마음이 아픕니다”라고 과거사 문제에 대한 개인적 애도를 표명했다. 그리고 G7 정상회의에서 윤 대통령과 함께 히로시마 원자폭탄 한국인 피해자 위령비를 방문할 것이라고 했다.
민주당은 한일정상회담에 비판적인데, 정작 문재인 정부 시기는 한일관계가 악화했으므로 비판의 정당성이 상당히 약하다. 그나마 그들의 비판이 힘을 얻기 위해서는 강제동원 문제 해결과 한일관계 개선의 방법도 함께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한일정상회담에 대한 거친 말만 난무할 뿐 책임 있는 대책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재명 대표는 일본과의 셔틀외교 재개를 “빵셔틀”이라 깎아내리고, 장경태 최고위원은 윤 대통령의 방일을 “나라 팔아먹으러 간다”고 격하했으며, 고민정 최고위원도 “친일대통령”이라는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이들은 2019년 조국 민정수석의 ‘죽창가’선동에 이어 반일선동을 반복했다.민주당의 ‘강제동원 제3자 변제안’ 비판은 타당한가?
제3자 변제안에 반대하며 민주당 의원들은 ‘윤석열 정부의 굴욕적·반역사적 강제동원 해법 철회 및 일본 정부와 기업의 사죄와 배상 촉구 결의안’(3/10)을 발의했다. 반대 근거로 첫째, 제3자 변제안이 2018년 대법원판결에 배치되며, 삼권분립에 대항하는 행위라고 지적한다. 사법부의 판결을 행정부가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주장인데 사실에 부합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공익과 관련된 재판인 경우, 국가기관과 지방자치단체는 의견서를 제출할 수 있고, 대법원도 제출을 요청할 수 있다. 미국도 외교 관련 사안에 대해서는 연방대법원이 국무부의 의견을 듣는 ‘법정 조언자’ 제도가 존재한다. 영국도 외교 문제나 국제법과 관련된 재판을 맡는 경우 외교부에 확인서를 보내 입장을 요청하는 것이 관행이다. 그리고 고도로 정치적인 사안일수록 국민의 정치적 대표자가 판단을 내리는 것이 대의제 민주주의의 원칙에 부합한다. 외교적 사안마저 사법부의 판단에 의존한다는 것은, ‘정치의 사법화’의 극단적 형태이며 실제로는 정치의 소멸이다.
둘째로 윤 정부의 해법이 일본의 ‘합법적 식민지배’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2018년 대법원판결은 청구권협정으로 불법적 식민지배 피해가 보상된 것이 아니므로 피해구제가 가능하다는 취지인데, 이러한 법원 판결을 수용하지 않아서라는 이유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대법원판결대로 일본 피고 기업의 압류 자산을 현금화하는 것 이외의 모든 외교적 해법은 ‘합법적 식민지배’를 인정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민주당은 압류 자산 현금화로 일본과의 단교를 불사하는 것을 강제동원의 해법이라고 여기는지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 동시에 문재인 정부도 한국기업과 일본기업이 공동으로 자금을 마련하는 소위 ‘1+1안’을 제안했는데, 문재인 대통령도 ‘합법적 식민지배’를 인정했다는 것인지도 답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피해자가 동의하지 않아서 문제라는 비판이다. 그러나 대법원에서 승소를 확정한 피해자 15명(생존자 3명 포함) 중 10명은 일본의 피고 기업 대신 재단으로부터 판결금과 지연이자를 받는 방안을 수용했고, 최근에는 생존자 한 명도 기존 생각을 바꿔 판결금을 수용하겠다고 했다. 정부의 해법을 수용한 피해자의 뜻도 존중할 필요가 있다.해법제시 없이 반일 여론몰이에 몰두하는 민주당
민주당은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 반일 정서에 의존하여 정략적 이해를 추구하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특히 민주당이 일본 언론 보도로 촉발된 독도와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 쟁점을 집중적으로 부각하는 모습은 문재인 정부 시기 반일선동과 흡사하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대법원판결 이후 일본기업의 자산 현물화 시기가 도래하여 일본이 수출제한 조치를 결정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외교적으로 무능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강제동원 배상판결에 외교적으로 개입하면 지지율이 하락할까 우려해서 외면하다가 파국을 초래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일본과의 관계악화를 ‘정치적 호기’로 간주한 정황이 포착되었다는 점이다. 2019년 한일 갈등이 고조되던 시점에 “일본에 단호하게 대응하는 것이 내년 총선에 유리할 것”이라는 민주연구원 보고서를 민주당 의원 전원에게 배포했는데, 강력한 반일 메시지를 토해내라고 신호를 보낸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조국 민정수석의 ‘죽창가’선동을 필두로 민주당 의원과 지지자들은 반일선동에 앞장섰다.
이처럼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은 외교적 무능으로 일본과의 관계악화를 초래했으나, 수습보다는 정치적 이해를 좇아 반일민족주의를 선동했다. 오늘날에도 민주당에서 반성과 책임감 있는 대응을 찾아보기 어렵다. 윤 정부가 제시한 해법이 문제라고 여긴다면 대안을 제시하고 진지한 논의에 임해야 하지만, 한층 과격해진 반일민족주의 선동만 난무했다.2. 민주당의 한미정상회담 비판의 문제점
워싱턴선언은 미국의 확장억제를 강화한 것으로 최근 국제정세의 변화, 특히 북핵 위협의 새로운 단계에 대한 반응적 조치라는 측면을 외면한 채로 평가할 수 없다. 북한이 미국을 타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개발하자, 미국이 북한의 핵공격 위험을 무릅쓰고 핵우산을 발동할지 불확실해지면서 한국의 자체핵무장 여론이 확산했다. 이처럼 북핵에 대한 불안감이 고조되자 워싱턴선언에서 미국의 핵보복을 명문화하여 핵무장 및 전술핵 배치 여론을 진정시키고, 한국의 핵무기비확산조약(NPT) 체제준수를 재확인한 것이다.
그러나 민주당은 국제정세 변화의 맥락을 무시한 채 한미정상회담을 혹평했다. 이재명 대표는 “아낌없이 퍼주는 글로벌 호갱 외교”라고 깎아내렸다. 또한 무력에 의한 현상변경 반대는 국제사회 일원으로서 책무임에도, 민주당은 윤석열 대통령이 러시아 침공과 대만문제를 언급해 중국·러시아와의 관계가 얼어붙게 되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워싱턴선언이 나토식 핵공유에 미치지 못해 성과가 없고, 자체핵무장의 길을 닫아서 문제라고 비판하면서 동시에 확장억제 강화가 한반도 핵전쟁을 초래할 것이라는 모순적인 주장을 했다.우크라이나와 대만 침공 반대가 국익 포기란 말인가?
이에 대해 이재명 대표는 “우크라이나, 대만 문제에도 매우 큰 불신을 남겼다”며 “감당하지 못할 청구서만 잔뜩 끌어안은 채 많은 부분에서 국가가 감당하지 못할 양보를 했다”고 비판했다. 27일 민주당 대변인 논평도 동일한 맥락에서 “중국과 러시아 관계 포기가 국익입니까”라고 했다. 그러나 이는 근시안적인 태도다. 민주당의 논리대로라면 우크라이나와 대만 침공을 반대하면 국익을 포기하게 된다. 즉,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무력에 의한 영토와 주권침해를 반대하는 책무가 국익에 반한다는 의미다. 제1 야당이라는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 무책임한 발언이다.
또한, 지금은 근시안적으로 주변국인 중·러와 관계가 껄끄러워지는 것만 염려할 때가 아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데 이어 중국까지 대만을 침공한다면, 힘에 의한 현상변경 시도가 확산되면서 2차 세계대전 이후 수립된 국제질서가 붕괴할 수 있다. 따라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앞으로 국제질서는 걷잡을 수 없는 혼돈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동아시아 평화를 위해서도 전쟁반대가 중요하다. 만약 중국이 대만을 무력으로 침공할 경우, 중국과 북한이 미국의 대응을 분산시키기 위해 남한에 대한 군사행동을 취할 위험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만을 향한 중국의 무력행동을 저지하는 것이 오히려 민주당이 강조하는 국익, 즉 평화와 직결된다고 볼 수 있다.워싱턴선언에 관한 모순된 평가
대통령실은 워싱턴선언이 “특정한 하나의 동맹국에 핵억제를 실현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플랜을 담아서 선언하고 미국 대통령이 약속한 최초의 사례”라며 방미의 최대성과로 꼽았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핵협의그룹만으로는 자체 핵무장 여론을 불식시키긴 역부족이라며, 앞으로 핵연료 재처리 능력을 보장받거나 전술핵 재배치를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전술핵 반입과 핵무장에 정부가 선을 그은 것은 불가피하고, 앞으로 미국과 정보공유 및 기획·실행 과정에서 핵협의그룹의 실효성을 갖춰나가야 한다는 평가도 있다.
민주당은 대변인 브리핑을 통해 “전술핵 배치가 골격인 나토식 핵공유보다, 독자 핵개발이나 한반도 내 핵무기 재배치가 불발된 워싱턴선언이 어떻게 북핵 대응에 더 효과적인지 납득되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나토처럼 전술핵을 배치하지 못해서 성과가 없다는 평가로 보인다. 연장선상에서 민주당 안민석 의원은 언론 인터뷰에서 워싱턴선언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며, “미국과의 협상에 있어서 (자체핵무장 카드를) 계속 쥐고 있으면서 협상용으로 써야 했는데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이 카드를 포기해 버렸다”고 비판했다. 워싱턴선언 수준을 넘어 자체 핵무장도 고려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러나 동시에 상반된 주장도 한다. 안민석 의원은 같은 인터뷰에서 “북한이 핵을 공격하면 핵으로 강력히 대응하겠다는 것인데 한반도는 핵 전쟁터가 되고 우리 민족은 말살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워싱턴선언이 자체 핵무장의 길을 닫아 문제라면서, 미국의 확장억제력으로 북핵에 대응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주장은 모순적이다. 민주당에 일관된 입장이 있다기보다 정략적 비판만 내세우다 보니 앞뒤가 맞지 않은 주장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3. 민주당식 균형외교, 실체가 있나
‘가치외교’행보는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 직후 한미정상회담을 개최하여 미국과 글로벌 포괄적 전략 동맹을 확인하고,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에 가입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해 한국 정상으로서는 처음 나토 정상회의에 참석했으며, 올해 3월에는 강제동원 제3자 변제안을 제시하면서 한일관계 정상화의 길을 열었다. 이러한 과정을 토대로 한·미·일 동맹을 일정한 궤도에 올리는 것이 이번 정상회담의 목표로 보인다.
민주당은 문재인 정부의 외교기조와 확실한 선을 그은 윤석열 정부의 가치외교에 비판적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한반도 운전자론은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한미동맹 의존도 줄어들고 미국과 중국과의 균형외교를 전개할 공간이 확대되면서, 한국이 역량을 발휘해 미·중 협력관계의 선순환구도를 조성할 수 있다는 구상이다. 민주당은 이러한 노선을 계승하며 균형외교를 주장하고 있다.
한미정상 공동선언이 발표된 4월 27일, 문재인 전 대통령은 판문점 선언 5주년 기념사에서 “한반도 평화를 위해 중·러와 협력”해야 한다고 밝혔다. 민주당도 28일 대변인 논평에서 “자유의 나침반을 자처하며 미국의 대외 전략에 무조건적 동참 의지를 표명한 것은 균형외교에 파산선고를 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비판했다. 미국과 중국의 경쟁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균형외교를 통해 실리를 추구해야 하는데, 윤석열 정부가 미국 편향적 외교노선을 취해서 문제라는 취지다. 민주당이 주장하는 균형외교로 추구할 수 있는 실리란, 안보 측면에서는 북한과 관계개선을 위해 중국과 러시아가 중재를 서는 것이고, 경제 측면에서는 중국 수출을 확대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균형외교의 실체가 있는지 의문이다. 우선 중국과 러시아에 북한 비핵화에 관한 의지를 확인하기 어렵다. 단적으로 2022년 3월 북한이 ICBM을 발사하여 2018년 선언한 모라토리엄을 파기했음에도 UN안보리는 대북 경제제재를 부결했고 규탄성명도 채택하지 못했다. 중국과 러시아가 반대해서다. 이들은 북한에 동조적인데, 오히려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과 경제협력을 강화했으며, 북한이 러시아로 무기를 판매하고 러시아는 군사기술을 제공하는 등 군사적 측면에서도 밀착하고 있다. 이에 힘입어 북한은 미국에 대항하는 북·중·러 진영이 구축된다면 UN 경제제재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하여 비핵화를 거부하고 있다. 현재 구도에서 중국과 러시아에 북한 비핵화를 위한 역할을 기대한다는 것은 망상에 가깝다.
또한,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기대가 최근 좌절된 것이 아니라 문재인 정부 시기에도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점도 짚어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임기 동안 중국에 북한과의 중재를 바라며 그들의 심기를 거스르는 행동을 삼갔다. 그 결과 문재인 정부는 홍콩민주화 시위에 대한 중국의 폭력적 탄압, 신장위구르 강제노동 문제, 대만 무력침공 위협에 침묵하거나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중국은 북한과의 관계개선에 나서지 않았다.
경제적 측면에서 실리추구라는 주장도 실체가 불분명하다. 중국과 관계가 경색되면 수출에 타격이 발생한다는 주장은 대만의 사례만 보더라도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대만에 무력통일도 불사하겠다고 중국이 엄포를 놓고 있고, 작년에는 펠로시 미 하원의장이 대만을 방문해 중국이 공격적 군사훈련을 감행했음에도, 대만은 막대한 대중 무역흑자를 보았다. 특히 대중국 반도체 수출이 20.9% 증가했다. 중국은 경제적 필요가 있다면, 정치적 관계만 따져 손해 보는 선택을 하진 않는다는 점이 확인된다.
따라서 작년 한국의 대중국 무역적자가 윤 대통령이 균형외교를 저버린 결과라는 비판은 문제가 있다. 한국무역협회의 분석(2022.11)에 따르면 무역적자는 중국의 실물경기 회복 부진과 국제경제 환경 불안정에서 기인한 일시적 성격이 크다고 진단한다. 경기적 요인이 달라진다면 수출은 어느 정도 회복될 것이다. 그런데 동시에 한국무역협회는 대중국 수출이 점차 고기술 중간재로 변하고 있어 수출을 확대하려면 고기술 품목에 주력해야 한다며 기술혁신을 강조했다. 즉 대중국 수출확대는 궁극적으로 기술혁신에 달려있다는 의미다.북핵 대응을 위해 ‘판문점선언’으로 돌아가야 하나?
그러나 이번 한미정상회담 결과가 남한에 전술핵을 배치하거나 독자적으로 핵무장을 하는 식의 급격한 현상변경은 아니다. 오히려 한국의 핵무장 여론을 진정시키고 NPT체제를 준수한다는 점을 재확인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또한, 핵전쟁을 우려한다면, 그 일차적 원인에 주목해야 한다. 다시 강조하자면, ‘워싱턴선언’은 북한의 핵무장 고도화에 대한 반응적 결과라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북한이 핵무력을 고도화하면서, 핵무기 사용의 문턱을 낮추고 남한을 향해 사용할 수 있다고 협박하지 않았는데, 미국이 핵우산을 강화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리고 한미정상은 공동성명에서 북한과의 외교협상을 부정하지 않았다. “한반도에서의 지속적인 평화를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서 북한과의 외교에 대한 의지를 재확인하며, 북한이 협상으로 복귀할 것을 촉구”하면서, 윤석열 정부의 담대한 구상에 대한 지지를 밝혔다.
북한과의 관계를 외교로 풀어가야지 강 대 강을 고수하다가는 전쟁위기가 높아진다는 우려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확장억제를 구체화하는 과정이 핵전쟁을 원하지 않는 민중에게 불안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북한과의 협상 노력은 필요하다. 그러나 대화의 물꼬를 트려면 북한의 핵보유를 현실로 인정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은 경계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를 달성하기 위해서 북한 비핵화가 필수라는 원칙을 무시하고 북한의 요구인 ‘조선반도 비핵화’(북한의 핵보유를 인정하고 핵동결·핵감축 협상을 하자는 북한의 접근법)를 두둔하는 방식으로 대북정책을 추진했다. 하지만 이는 북한의 핵보유가 NPT체제를 위협한다고 국제사회가 판단하면서 좌초했다. 핵전쟁을 피하고자 핵으로 무장한 상대에게 투항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는, 핵을 막기 위해서 핵을 가져야 한다는 교리에 따라 연쇄적인 핵무장 흐름으로 이어진다. 가령 러시아의 핵위협이 성과를 거두면, 비핵보유국은 우크라이나의 비핵화를 ‘역사적 실수’로 인식하게 되고, 북한을 비롯하여 비공식 핵무장을 했거나 시도하는 국가에겐 ‘핵이 만능’이라는 신호를 주게 된다. 즉, 핵무장 국가에 투항하는 것은 오히려 모두가 핵을 더욱 절박하게 보유하려고 하는 상황을 낳는 역설을 불러온다. 마찬가지로 북한 비핵화라는 목표를 포기하면 남한도 핵무장으로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주장이 곧바로 제기될 수밖에 없다.
정리하면, 민주당의 주장대로 북한의 핵보유를 인정하는 협상을 하더라도 확장억제는 강고해질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한반도 핵전쟁의 위험은 영구화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북한이 핵전력을 고도화하는 한, 어떤 식으로 협상이 진행되더라도 그에 비례하여 동북아의 핵태세는 강화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판문점선언’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은 바람직하지도, 실현할 수 있지도 않다. 판문점선언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을 미화하면서 과거와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자는 주장일 뿐이다.
민주당의 균형외교는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운전자론을 계승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 운전자론은 출발점인 북한과의 관계개선부터 좌초했다. 또한 중국과 러시아에게 북한과의 중재를 기대했으나 실현되지 않았고, 팽창주의적 행태를 묵인하는 결과만 초래했다. 이처럼 문재인 정부의 외교노선은 실패했으며, 북·중·러의 공조가 한층 강화된 현재 국면에서 적용은 더욱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민주당은 지난 정부의 대외정책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기보다 정상회담을 비난하기 바쁘다. 민주당이 책임감 있고 진지하게 대응한다기보다 정략적 이해만 좇는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운 이유다. 4. 사회운동 대응 평가
그러나 사회운동이 민주당식 외교노선을 추종한다면 평화를 위한 대안적 길을 만들 수 없다. 균형외교라는 핑계로 사회운동이 중국과 러시아의 팽창주의적 행보를 묵인한다면, 우크라이나와 대만 민중과의 연대가 불가능해진다. 또한, 북한과 대화가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북한의 핵무장을 인정하고 핵동결 협상으로 전환하자고 한다면, 한국의 반핵평화운동이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핵무장 담론이 거세질 것이다.
하지만 상당수 사회운동은 민주당의 외교노선을 지지하면서 한일, 한미정상회담을 비판했다. 시민단체와 민주당은 3월 7일 강제동원 피해배상 해법을 성토하는 공동기자회견을 시작으로, 3월 11일, 18일, 25일, 세 차례에 걸쳐 ‘대일 굴욕외교 규탄 범국민대회’를 개최했다. 기시다 총리 방한을 앞둔 5월 4일에도 정의당, 진보당, 시민단체가 민주당과 공동기자회견을 열어 윤석열 정부의 굴욕외교 중단을 촉구했다. 동참한 진보정당과 시민단체는 강제동원 제3자 변제안이 사법주권을 부정하고, 식민지배가 합법이라는 일본의 주장을 수용한 것이며, 피해자의 요구를 외면했다고 민주당과 한목소리를 냈다. 강제동원 해법을 토대로 성사된 한일정상회담 또한 굴욕적인 외교 참사라고 비판했다.
한미정상회담에 대해서도 균형외교에서 벗어난 미국 편향적 외교노선으로 국익을 상실했다는 민주당의 평가에 상당수 사회운동이 동조했다. 한미정상이 공동선언문에서 중국의 대만침공 위협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했다고 비판한 것이다. 전국민중행동은 윤석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살상무기 지원, 대만 문제는 국제문제, 힘에 의한 현상변경 반대 등의 발언으로 러시아와 중국을 적국으로 돌렸고”다고 지적했고(4.27), 진보당도 공동선언문에서 대만과 우크라이나 언급은 반중 반러 태도를 분명히 한 것이라며, “중국과 러시아의 보복으로 한국은 경제와 평화에 심각한 위협이 도래할 것”이라고 비판했다(4.27).
대북정책에서도 문재인 정부의 판문점선언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민주노총은 한미정상회담을 비판하면서 판문점 선언 5주기를 “동맹의 핵무기가 없이도 한반도는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로웠던 시기였음을 상기”(4.27)해야 한다고 했다.
이들이 민주당의 균형외교를 지지하는 것은 국제정세를 반미 진영론에 근거하여 분석하기 때문이다. 쇠락하는 미국이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고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을 유도했고, 대만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그러나 러시아가 전쟁에서 선전하면서 미국의 패권이 약화하고 있으며, 그 결과 미국 중심의 세계가 중러가 주도하는 다극화로 이동한다고 진단한다. 러시아의 침공을 미국 패권에 대항하는 정당한 행동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반미 진영론은 중국과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을 균형외교라는 명분으로 묵인하는 외교노선에 친화성을 보인다.
반미진영론자들은 한·미·일의 군사협력 강화가 전쟁을 유발한다고 비판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미국이 그러한 것처럼, 한·미·일 군사협력 강화는 대만에서 미국이 유사한 행태를 반복할 위험이 있다는 주장이다. 동아시아 지역의 군사대응 수준 강화를 우려하는 것은 타당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무력으로 우크라이나 국경을 침범한 것은 러시아이며, 대만침공을 위협하는 것 역시 중국이라는 사실이 명백하다. 또한, 우크라이나 침공은 푸틴이 대러시아 애국주의를 통해 장기집권의 명분을 마련하고, 러시아 시민사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주변국의 탈권위주의 흐름을 억제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중국의 대만침공 위협도 시진핑의 통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라는 점에서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사회운동이 사태를 거꾸로 보면서 중국과 러시아가 전쟁 위험을 고조시킨다는 사실을 부정한다면, 팽창주의를 저지할 수 없게 된다. 결국, 세계 각지의 팽창주의 세력은 힘에 의한 현상변경을 시도하면서 지속해서 국제질서를 허물 것이고, 팽창주의에 대항하는 군사적 동맹은 더욱더 강화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평화운동의 대안적 길은 요원해질 것이다.
북한에 대한 상황인식도 거꾸로 서 있다. 반미진영론자들은 워싱턴선언을 동아시아에서 한미일과 북중러의 진영대결 구도를 형성하려는 미국의 패권전략으로 해석하면서 전쟁위기가 극대화된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북중러 진영구축이 핵보유와 체제수호에 유리하다고 판단해 군사행동의 수위를 높인 것은 북한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북한은 국제질서의 판도가 바뀐다고 봤다. 북중러 진영이 구축된다면 UN 경제제재를 피할 수 있다는 계산 아래 2022년 3월 ICBM을 발사하여 2018년 선언한 모라토리엄을 파기했다. 이후에도 북한은 ICBM·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극초음속미사일과 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이어갔고, 핵무력 정책을 법제화했으며, 한국을 겨냥해 전술핵 공격위협을 가했다. 이로 인해 남한에서는 미국의 핵우산조차 믿을 수 없다는 불안감이 고조되면서 자체 핵무장을 바라는 여론이 치솟았다. 그 결과 워싱턴선언이 채택되었다. 즉, 북한의 핵위협이 가증되지 않았다면 워싱턴선언도 없었다는 의미다.
북한의 핵위협이 전쟁 위험을 고조시킨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북한의 요구대로 ‘조선반도 비핵화’를 위한 협상을 진행한다면, 한반도 평화가 아니라 핵전쟁 위험이 영구화된다. 북한을 대화 테이블로 불러들일 수는 있다더라도 한국의 핵무장으로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주장이 곧바로 제기될 것이며 이는 NPT체제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은 북한과 대화를 위해 북한의 비핵화를 포기하자는 의미로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사회운동이 반미진영론에 근거해 민주당의 외교노선을 지지한다면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의 침략을 물리치고, 중국의 대만침공 야욕을 저지하며, 북한의 비핵화를 요구하는 평화운동을 건설하기 어려워진다. 사회운동은 적극적인 토론을 통해 국제정세 인식을 전면쇄신하고 국제연대를 모색해야 한다. ●
대만연대전선노총 건설준비회에는 어떤 노조들이 참여하고 있습니까? 참여하는 노조들의 최근 대표적인 투쟁이나 활동은 무엇입니까?
“작은 회사의 파업이었지만, 전체 노동운동의 티핑 포인트”
“‘파업’에 관한 대만 대중의 인식을 바꾼 소방관들의 투쟁”
“모든 행정구역의 노동자를 조직하는 것이 목표”
대만연대전선노총 건설준비회에 참여하는 노조들은 그동안 어떤 공동의 활동을 했습니까?
[%=사진6%]새로운 전국적 노총을 설립하는 데 있어서 난점과 과제는 무엇입니까?
대만연대전선노총의 내부 구조는 어떻게 구상하고 있나요? 여러분이 말했듯 다양한 종류의 노조들이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모습이 될지가 궁금합니다.
대만연대전선노총은 대만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자 합니까? 어떤 목표와 과제에 집중할 계획입니까?
마지막으로, 대만-중국 관계, 대만-미국 관계와 같은 사안은 대만 노동운동 안에서 어떻게 논의되고 있습니까? 국제정치 속 대만의 행보에 대해 노조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나요?
먼저, 대만연대전선노총 건설준비회를 결성한 배경을 듣고 싶습니다. 한국 독자들에게는 대만에 자주적인 전국적 노동조합총연맹이 없기 때문에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는 평가 자체가 생소할 수 있습니다.
“자주적이고 전투적인 전국 노총을 새롭게 건설할 것”
새로운 전국적 노총을 건설하려는 시도를 구체화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변화를 만들어낸 것은 기존 노조가 아닌 독립노동자들과 사회운동의 투쟁”
“새롭게 노동자를 규합하려는 시도는 대만 사회운동의 희망”
대만연대전선노총 건설준비회는 현재 차이잉원 민진당 정권의 노동정책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 ‘대만 사회운동의 새로운 희망, 대만연대전선노총(臺灣工人鬥陣總工會) 건설준비회 인터뷰②’로 이어집니다.
역자 해설
이 글은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마르크스주의자 에티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가 편집위원으로 함께하는 반연간지 《위기와 비판》(CRISIS AND CRITIQUE)의 4권 2호(2017년 11월)에 실린 글이다. 발리바르는 “100년이 지난 시점에서 볼셰비키 혁명을 ‘기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글을 시작한다. 1917년 10월은 이제 먼 과거에 속하게 되었지만, 이에 대해서는 여전히 잔혹하고 완전한 실패라는 평가와 탁월한 반(反)자본주의 혁명으로서 현존 질서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라는 평가가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대조적인 담론이 동일한 현실에 적용될 수 있는가?
이를 따져보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의 방법을 따라, 10월 혁명에 대한 표상 또는 이미지로부터 거리를 두고 세 가지 시간성을 고려하는 비판적 분석이 필요하다. 발리바르가 설정하는 세 가지 시간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역사적 ‘사건’으로서 볼셰비키 혁명의 시간, 둘째, 10월 혁명의 흔적이 남은 20세기라는 ‘극단의 시대’라는 시간, 셋째,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공산주의 혁명이 세계적으로 만들어낸 역설적 ‘결과’로서 ‘사회주의 이후의 자본주의’라는 시간이 그것이다.
먼저 첫 번째로, 발리바르는 역사적 ‘사건’으로서 볼셰비키 혁명의 시간성을 검토한다. 그는 볼셰비키 혁명이 봉기적 상황과 소비에트라는 주역이 처음 등장하는 1905년에 시작하여, 스탈린이 유일한 지도자로 등장하고 5개년 계획과 집단화 과정이 시작되며 신경제정책이 종료되는 때 끝이 나는 것으로 설정한다. 이러한 시간성에서 그가 주목하는 것은 어떻게 혁명이 단기간에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전위와 대중을 결합해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시도할 수 있었는지, 그런 결합이 파괴되고 혁명이 국가화되며 혁명적 과정이 끝나게 된 것은 언제인지, 마지막으로 무엇이 이 혁명에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부여하는지다.
이 대목에서 발리바르는 알튀세르적 개념인 과잉결정과 과소결정을 가져온다. 과잉결정은 사회 변혁 과정을 시작할 힘을 집중시켜 결정화하는 이질적인 역사적 요인들의 복잡성을 의미하며, 과소결정은 만약 어떤 요인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혁명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그런 ‘우연적’ 사실을 의미한다. 발리바르는 혁명의 조건과 내용이라는 측면에서 러시아혁명을 과잉결정한 것은 다름 아닌 전쟁이었다고 지적한다. 무엇보다 러시아혁명은 전쟁의 결과였다. 동시에, 전쟁을 억누르려던 혁명은 내전으로 인해 또 다른 전쟁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혁명적 조직은 군사화되었고, 공산주의 지도자와 활동가들은 전쟁을 정치의 최고 형태로 여기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이는 혁명이 국가화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변질되는 데 분명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한편 과소결정과 관련하여, 발리바르는 당과 소비에트라는 대립물의 통일을 실천적으로 이루어냄으로써 러시아혁명을 결정화한 것은 다름 아닌 역사적 개인으로서 레닌이었다고 단언한다. 달리 말해, 당시의 정세에서 전위와 대중, 조직과 자발성을 종합적으로 결합한 레닌의 역할이 없었다면 러시아혁명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본다면, 1917년 혁명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의해 만들어진’ 혁명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결정화한’ 혁명이다. 즉 전쟁이라는 조건에서 형성된 혁명의 요인들이 레닌이라는 역사적 개인이 담지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통해 실천적으로 결합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조직되고 혁명적 과정이 지속되었다. 반대로 내전을 거치며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물리적으로나 이데올로기적으로 파괴되었을 때 혁명적 과정도 끝났으며, 그 역으로도 그러했다.
두 번째로, 발리바르는 10월 혁명의 ‘흔적’을 포함하는, 20세기의 ‘극단의 시대’라는 시간을 검토한다. 그에 따르면, 20세기의 특유한 역사적 궤적에는 혁명과 반혁명의 대립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1차 세계전쟁 이후 세계 각지의 혁명적 시도들은 그 형태에 있어 볼셰비키 혁명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그러나 동시에 볼셰비키 혁명의 성공은 그러한 시도들이 실패한 주요한 조건이기도 했다.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그러했는데, 하나는 혁명에 맞서 반혁명이 세계적 무대에서 조직되었기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후의 혁명적 시도들이 볼셰비키 혁명의 승리를 보장했던 ‘당 형태’를 모방하고 반복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발리바르는 파시즘의 발전과 소련의 ‘주권’ 국가로의 변형이라는 요인을 지적하며 이러한 설명을 보충한다. 전쟁의 산물 그 자체로서 반혁명 정치를 대표하는 파시즘의 등장으로, 1929년 이후 세계는 자유주의, 파시즘, 공산주의라는 세 유형의 정치 체제가 민족국가라는 형태로 갈등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공산주의 운동에 파괴적인 효과를 낳았는데, 특히 ‘사회주의 조국’ 소련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파시즘과 타협함으로써 민주주의 세력으로서 공산주의의 권위를 추락시켰다.
여기에는 스탈린 치하에서 소련이 주권 국가화된 효과가 결부된다. 스탈린 시기 소련, 더 나아가 공산주의 운동에서 당은 혁명적 조직에서 지배 기구로 변형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독재’ 사상에 공백으로 남아 있던 실제 권력의 행사라는 측면을 채우고 지배했다. 이는 혁명을 과잉결정했던 요인들의 결합을 급속하게 붕괴시켰다. 결국 당은 정치권력에 대한 군사권력의 종속, 계획당국과 공장 내 당 기구에 대한 경제권력의 종속, ‘사회의 적’을 규정하는 국가에 대한 사법권력의 종속, 국가 철학으로서 ‘변증법적 유물론’을 형성한 정부에 대한 정신적 권력의 종속이라는 네 겹의 예속을 혁명에 부과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과정은 자본주의와 파시즘과의 이중적 대결이라는 조건에서 이제 소련이라는 주권국가 자체가 필수적이고 영구적인 혁명의 도구이자 중심이 되었다는 생각과 함께 진행되었다.
이 대목에서 발리바르는 20세기 공산주의의 혁명적 과정에서 일어난 하나의 분기로서 1920년 바쿠에서 열린 코민테른 동방인민대회에 주목한다. 그는 이 대회가 볼셰비키 혁명을 복제하려 했던 유럽 혁명의 실패를 상쇄, 보완하고자 했다고 본다. 아울러 마오쩌둥과 중국혁명은 시간성과 혁명의 주역이라는 측면에서는 10월 혁명과 완전히 다르지만, 그때와 같이 대중의 참여와 당의 지도력의 결합을 재현하면서 러시아 모델과의 분기를 만들어냈다.
또한 발리바르가 보기에, 1917년 혁명 모델의 모순적인 현실화로서 중국혁명은 유럽에서 비롯된 공산주의라는 정치적 언어가 더는 유럽 중심적이지 않은 맥락에서 간직된다는 ‘역사적 전환’을 의미한다. 이러한 ‘유럽의 지방화’가 세계화 시대의 자본주의 이전에 공산주의에서 먼저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그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또한 공산주의와 1917년 혁명의 흔적을 지닌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는 발리바르가 마지막으로 검토하는 오늘날의 시간성으로 연결된다.
발리바르는 결론을 대신하여, 오늘날 세계화 시대에 새겨진 1917년의 사건과 그 흔적을 논의하기 위해 ‘거꾸로 뒤집힌 이행’이라는 공식을 빌린다. 그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그리고 그 반대인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두 가지 연속되는 전환이라는 공식으로부터, 종종 신자유주의의 승리로도 묘사되는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를 ‘사회주의 이후의 자본주의’로 개념화하고자 한다. 이는 공산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체제가 패배하여 세계 시장에 장악당한 것으로 이어졌지만, 단순히 다시 자본주의로 ‘복귀’했다는 것을 넘어 20세기 자본주의 역사에 계급투쟁을 반영하는 일정한 노동력 보호와 국가의 경제정책이라는 형태로 그 흔적을 남겼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사회주의 이후’의 시대에, 어떤 이는 여전히 1917년 혁명을 망각의 역사로부터 부활시켜야 할 이상적인 모델로 보거나, 반대로 급진적인 대안이 요구되는 반면교사로 본다. 또한 이 양자를 매개하며, 1917년 레닌의 결정적 개입을 통해 작동한 전위와 대중의 ‘결합’이 미완으로 남았음을 제기하고 소비에트의 자율적이고 ‘반권위주의적’인 기능을 강조하는 대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발리바르는 사회주의와의 대립을 무시하고서는 다룰 수 없는 20세기 자본주의의 역사를 조사함으로써 다른 길을 찾을 수도 있다고 본다.
오늘날 자본주의가 사회주의와 대립하며 만들어온 역사적 타협을 생산의 탈영토화와 금융화로 역전하려는 가운데, 새로운 사회주의적 역전과 공산주의적 대안은 여전히 자본주의 사회 관계와 통치 형태의 망에 얽혀있다. 따라서 발리바르는 공산주의 혁명의 충격과 흔적에서 비롯된 ‘역사적 사회주의’의 모순된 효과들에 대한 조사야말로, 사회주의 이후의 시대에 다른 길을 시도할 수 있는 정치적 상상력의 조건이라고 강조한다. 이것이 바로 발리바르가 이 글을 열며 내밀었던 첫 질문, 즉 100년이 지난 시점에서 볼셰비키 혁명을 ‘기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예비적인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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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석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나는 마르크스주의를 통해 훈련받았으며,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적 구성요소였던 혁명을 비판하는 데 있어서 (몇 없는 예외를 제외하고) 마르크스주의의 무능력함이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그저 현실에 대한 (사죄와 유토피아적 항변 사이에서 진동하는) 이데올로기적 비평으로 몰락하게 된 주된 이유라고 믿기 때문에, 나는 우리가 기본적인 방법론적 원칙을 마르크스 본인(『정치경제학 비판』의 서문)으로부터 빌려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어떤 개인이나 역사적 시대에 대한 판단과 마찬가지로, 어떤 혁명에 대한 ‘판단’(해석)은, 혁명 이후에 생산되거나 발생한 혁명 그 자체에 관한 표상(representation)을 따라서는 안 된다. 혁명은 아름답든 추악하든 혁명의 이미지로부터 반드시 거리를 두고 떨어져야 한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이, 예를 들어 오래된 공산주의자로서, 그 사건이 낳은 사후적 효과의 범위 안에 주관적으로 깊이 자리 잡고 있다면, 그리고 그 사건이 커다란 열정과 판단을 동반했다고 한다면, 그것이[혁명의 이미지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이] 가능할까? 나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완전히 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중립성이나 객관성을 가장한다고 해서 더 나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10월 혁명에 대한 어떠한 평가에도 영향을 미치는 세 가지 시간성(temporality)에 대한 검토를 안내선으로 삼아서, 혁명의 영향과 거리를 결합하는 전략을 시도해보려 한다. 첫 번째 부분에서는 역사적 사건으로서 혁명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논한다. 이는 10월 혁명의 시간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그리고 ‘프롤레타리아’라는 혁명의 주역의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로 시작한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그 사건의 흔적을 논할 것인데, 이는 우리를 10월 혁명의 특이점과 연결시키기도 하고 분리시키기도 한다. 달리 말해, 나는 ‘극단의 시대’(‘단기’ 20세기에 대한 에릭 홉스봄의 신조어)로 돌아갈 것이다. 이러한 성격 규정은 주로 혁명의 비극적 발전과 혁명이 상대 세력과 맞서는 과정에서 나타난 극단적 폭력에 기인한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 글의 작업을 이어가는 것을 준비하며) ‘공산주의’ 혁명이 세계적으로 생산해낸 역설적 결과를 공식화하려 할 것이다. 이 ‘공산주의’ 혁명의 결과는, 적어도 현재의 관점에서는, 공산주의도 아니고 심지어 사회주의도 아닌 자본주의의 새로운 조직 양식이다. 이는 실로 극적인 ‘역사의 간지(奸智)’다. 여기가 바로 우리가 가장 어려운 쟁점을 마주하는 곳이다. 이러한 비판적 관점은 우리를 어떠한 정치적 결론으로 이끄는가? 이것이 우리의 정치적 상상력에 무엇을 의미하는가? 혁명적 사건의 시간
이는 우리가 ‘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의 시간적 경계를 규정하는 문제로 이어진다. 사건의 시간성을 결정하는 데에는 물론 혁명적 힘으로 ‘(정치적) 권력을 획득’하고, 이 권력을 반혁명의 맞불로부터 지켜내고, 이 권력을 사회 변혁을 시작하는 데 사용한 순간들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 기준은 너무 짧다. 여러 이유로(이러한 이유는 불가피하게 순환논리를 따르는데, 즉 그 이유 자체는 내가 혁명의 역사적 성격에 결정적이라고 생각할 행동들에 달려있다), 나는 혁명적 사건이 비록 하나의 문제(하나의 사회-정치 체제를 파괴하는 것과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또 하나의 체제를 창조하는 것)를 중심으로 ‘집중’되어 있긴 하지만, 에피소드들의 특정한 연쇄를 포함하고 있다고 제안한다. 그러한 연쇄에서 상황, 세력들의 성격과 세력들 사이의 관계는 계속해서 변화한다. 이러한 연쇄적인 사건들은 적어도 ‘2월’과 ‘10월’ 양자를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 이 둘은 두 개의 혁명(하나는 ‘민주적’이고 다른 하나는 ‘쿠데타’, 혹은 좀 더 마르크스주의적 표현으로 전자는 ‘부르주아’[혁명]고 후자는 ‘공산주의’[혁명])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봉기로 차르 체제가 무너지고, 페트로그라드에서 ‘이중권력’의 상황(임시정부 대 소비에트)이 나타날 시기에 발생한 하나의 혁명이다. 이는 이중권력의 마지막 잔재가 제거되면서, 즉 볼셰비키가 (1918년 초) 제헌의회를 해산하면서 끝이 났고(이를 로자 룩셈부르크가 비판한 것은 유명하다. 그렇지만 그녀가 [러시아혁명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것은 아니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공식적으로 확립되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시간을 끊는 것은 불충분한데, 왜냐하면 봉기적 상황과 이중권력의 형성은 이미 1905년에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 ‘혁명’(연대기에도 ‘혁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의 발전은 차르의 탄압에 의해 잔혹하게 중단되었다. 그러나 이 혁명은 (전쟁으로 인해) 다른 조건들이 주어지고, 그 이면으로, 혁명적 병사들이 군대 내에서 등장했던 1917년에 다시 시작되었다고 간단히 말할 수 있다. 따라서 ‘1917년 혁명’은 1905년에 시작되었으며, 혁명의 주역들은 이미 그때부터 식별할 수 있는 형태로 활성화되어 있었다고 관찰하는 게 타당하다. 이는 대칭되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사건’을 형성하는 완전한 순환, 즉 혁명적 과정이 끝나는 때는 언제인가? 1918년 초는 중요한 의심할 여지 없이 중요한 기점인데, 왜냐하면 위에서 언급한 이유와 함께, 이때 단독강화(브레스트 리토프스크 조약)와 당의 ‘공산당’으로의 변형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역시 아직 아무것도 달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즉 이 시기에 절대적인 불확실성을 가진 내전이 시작되었다. 내전은 특정한 폭력의 형태들과 제도들(적군, 체카), 제국주의 강대국(프랑스, 영국, 폴란드, 일본)의 반혁명적 개입, 노동자와 농민 간의 교환과 과세 ‘체제’, 또는 상호의존 ‘체제’를 확립하려는 연쇄적인 시도 등등을 동반했다. 그래서 [혁명적 과정의] ‘끝’은 언제인가? 나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데, 각각은 그 근거가 있다. 하나는 1922년이다. 이때 내전이 실질적으로 승리를 거두고, ‘전시 공산주의’가 신경제정책(NEP)을 위해 폐지되고, ‘소비에트 연방’이 공식적으로 새로운 국가로 탄생했다. (비록 새로운 국가의 체제가 과도적이고, 그 [영토적] 경계가 잠정적이었다고 볼 수 있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다른 하나의 가능성은 신경제정책의 종료다. 이때 스탈린이 (서로 긴밀히 연결된) 당과 국가의 유일한 지도자로 등장하고, 5개년 계획이 준비되고, (불균형적이었지만 그래도 소비에트 권력과 농민이 맺었던 ‘동맹’을 끝낸다는 함의를 지닌) 집단화 과정이 시작되었다. 나는 이 두 번째 가능성, 즉 ‘더 넓은’ 시기 구분을 택하고자 하는데, 왜냐하면 신경제정책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변증법적 발전으로 보기 때문이다. 즉 이때까지는 혁명적 이행을 위한 새로운 전략이 시도되었으며, 당은 아직 국가기능의 위계질서를 통제하고 주민에게 국가의 명령을 분배하는 국가의 최고 기관이 되지 않았다. 다른 한편, 이 시점에 이르면, 혁명에 그 이름을 부여했던 대중기관, 즉 소비에트가 이미 오래전에 자율적인 기능을 잃었다는 사실도 인식해야만 한다. (그것은 아마도 1921년 초로, 이때 크론슈타트 수병 봉기와 그에 대한 진압이 발생했다) 나아가 문제의 일부분으로서 첫 번째 시기 구분[즉 1922년까지]에서는 레닌 본인이 아직 살아 있었던 반면 (우리가 알고 있듯, 레닌은 심각한 병마와 싸우면서도, 모셰 르윈(Moshe Lewin)의 표현에 따르면, ‘최후의 투쟁’을 대비하고 있었다), 두 번째 시기 구분[즉 신경제정책 종료까지]에서는 레닌이 이미 사망하여 미라가 되었다는 사실에도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볼셰비키 지도자 간에 발생한 ‘승계 투쟁’에서 스탈린이 부하린의 도움을 받아 승리했다. 당시 부하린은 [스탈린의 권력 장악 후] 무엇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이렇게 더 복잡한 시간적 경계 설정을 통해서, (알튀세르적 방식으로 표현하면) 내가 혁명적 사건의 ‘과잉결정’과 ‘과소결정’이라고 부를 논의의 틀이 마련되었다. 물론 나는 극도로 도식적이고 부분적이게 될 수밖에 없다. 즉 이것은 [1917년] 혁명의 역사가 아니라, 그 역사서술을 조직할 수 있게 하는 문제제기의 몇 가지 노선에 대한 논의일 뿐이다. 과잉결정을 통해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질적인 역사적 ‘요인들’의 복잡성인데, 이런 요인들이 결정체를 이루어, 앞으로 권력을 장악할 세력들을 집적하고, 낡은 제정 체제를 파괴하고, ‘부르주아적’ 대안의 발전을 저지하고, 기존에는 없었던 (따라서 그 효과를 예측할 수 없었고, 단지 ‘계급 없는 사회로의 전환’과 같은 추상적인 공식만 있었던) 유형의 사회적 변형 과정을 개시했다. 과소결정을 통해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연성’(또는 불확정성)인데, 이는 그런 요인들이 결정체를 이루지 못할 수도 있었고, 다른 무엇보다도, 그 요인들의 효과가 융합되거나 조합되지 못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즉 만약 정치 행위자가 그 전략적 순간에 남겨졌던 ‘공백을 채우지’ 않았다면, 동일한 기회(chance)에서 혁명이 일어날 수도 있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뜻이다. (오래된 수사학의 언어로 말하자면, 우리는 이러한 기회를 카이로스[Kairos, 기회 또는 특별한 시간을 의미하는 그리스어]라고 부를 수 있다) 도식적으로 말해서, 나는 과잉결정의 핵심적 구성요인이 억압적인 ‘봉건적 자본주의’ 질서에 대한 사회적 반란과, (조지 모스(George Mosse)의 범주를 빌면) 전쟁의 ‘야수화’ 효과의 결합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 전쟁[1차 세계대전]은 전 유럽에서 대규모 파괴와 살육을 동반했고, (러시아에서 벌어진 전쟁처럼) 종종 ‘절멸주의’라는 지경에 도달하기도 했다. 그 결과는, 러시아혁명이 처음부터 끝까지 전쟁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는 사실이다. (전쟁에 저항했고, 그러나 또한 새로운 형태로 전쟁을 수행했다) 이야말로 [즉 전쟁과 맺는 불가분의 관계야말로] 전적으로 러시아혁명의 담론이나 이데올로기, 제도, [러시아혁명과 함께 등장한] 역사적인 정치 ‘스타일’ 또는 정치 개념 등의 틀을 구성했다. 그리고 이러한 특성은 혁명 초기의 경계를 넘어 혁명을 확장하려는 정치운동(즉 20세기 공산주의)에 대체로 전달되었고, [혁명의] 비극적인 결과도 함께 전달되었다. (물론 이는 혁명에 대한 적대자들의 본성이라는 또 다른 요인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나는 과소결정의 ‘우연적’ 요소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제시하는 것처럼,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역사에서 위인의 역할’을 강력히 주장하기를 두려워하는 역사학자들이 제시하는 것처럼) 볼셰비키 정당이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또는 볼셰비키 정당이 단독으로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왜냐하면 정당은 아무리 지식을 갖추고, 조직적이고, 급진적이고, 기존 질서와의 단절을 준비했더라도, 전통적인 제도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레닌이라는 이름의 우연적 개인(혹은 전 생애 중 특정 순간의 우연적 개인[즉 특정 순간의 레닌], 이 순간에 그는 죽을 때까지 책임져야 할 선택을 했다)이 대표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즉 레닌이 없었다면, 볼셰비키 정당은 전통적인 정당의 발상을 뛰어넘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와 같은 슬로건을 제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이 때문에 레닌은 완전히 ‘예외적인’ 역사적 인물이 되는데, 아마 레닌이 유일하지는 않더라도 그에 견줄만한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이 두 가지 차원[과잉결정과 과소결정](두 차원은 물론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나며, 그렇지 않으면 혁명은 있을 수 없다)에 대한 몇 가지 세부 사항을 덧붙이고자 한다.
내가 과잉결정이라고 부른 것을 통해 강조하고자 하는 하나의 측면[즉 전쟁]은 물론 잘 알려져 있고, 혁명의 조건과 내용, 양자의 측면에서 이러한 측면[전쟁]이 결정적 기능을 했다는 사실을 반드시 강조해야 하지만, 항상 이런 강조가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혁명을 촉발한 것은 전쟁을 지속하기를 거부하는 부대들의 반란이었고, 이는 전체 주민의 격분을 배경으로 했다. 일반적으로 전쟁의 마지막 해에 러시아군은 200만 명을 잃었다고 여겨진다. 물론 다른 교전국들에서도 엄청난 손실이 있었고, 1917년에는 프랑스 전선에서도 반란이 일어났지만, 프랑스 공화국의 장군들은 (아무리 야만적이고, 오만하고, 무능하고, 자기 병사들을 총알받이로 소모하더라도) 병사들을 열등한 인간(moujiks, 제정 러시아 시대 농민)으로 간주하는 귀족이 아니었다. 그렇게 병사들을 취급한 러시아 장군들이야말로 러시아 농민들로부터 그들이 경작하는 땅을 빼앗은 귀족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봉기의 혁명적 기관은 ‘노동자와 병사의 소비에트’였다. 그러나 병사들은 농민이었고, 전쟁을 위해 그들의 공동체로부터 대규모로 뿌리 뽑혔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급속한 ‘산업혁명’의 산물이었고, 이 산업혁명은 20세기 초 러시아에서 비참하고 고도로 집적된 프롤레타리아를 창출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다른 유럽 국가들이 차례로 (남성) 주민에게 부여했던 완전한 시민권이 전혀 없었다. 봉기의 요구는 평화, 보통선거권, 노동자의 권리, 그리고 토지의 분배였다. 특히, 대중은 2월 이후 새로운 임시정부가 전쟁을 중단하지 않을 것임을 깨닫자 임시정부를 강력하게 거부했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볼셰비키가 일방적 평화(브레스트 리토프스크 조약)를 선언하자 곧바로 내전이 뒤따랐고, 외국군이 러시아를 침략했다. (처칠은 볼셰비즘을 “그 요람에서 교살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백군’ 장군들은 학살을 일으키는 군벌이 되고, 농민들은 두 진영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받았다. 혁명은 반혁명세력들을 진압하기 위한 고유한 군사장치(적군)와 경찰을 창출했다. 따라서 전쟁을 억누르려던 혁명은 직간접적으로 수백만 명의 사망자를 내는 또 다른 전쟁이 되었다. (사망자 비율은 미국 남북전쟁과 비슷하다) 1915년 (짐머발트 대회에서) 제기된 레닌의 역사적 표어, “제국주의 전쟁을 혁명적 내전으로 변형하자”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얻게 되었다. 어떻게 해서든, 모든 혁명적 기관은 ‘군사화’되었으며, 공산주의 지도자와 활동가들은 ‘전쟁’을 정치의 최고 형태로 여기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그들은 바로 이러한 틀 안에서 주도력을 행사하고, 연대를 실행하고, 상상력을 발휘했다.
이는 과소결정이라는 다른 측면으로 우리를 이끈다. 여기서 우리는 ‘혁명적 주체’, 즉 ‘혁명을 창출했던’ 집단적 행위자가 누구냐는, 고도로 민감한 주제를 다루게 된다. 이 주제는 봉기 그 자체로부터 시작된다. (이는 끊임없는 논쟁의 대상 중 하나다.) 토론은 전위를 강조하는 입장(오직 볼셰비키 당만을 강조하거나, 10월 이전 몇 주 동안 헤게모니를 쥐게 되었던 대중조직들과 함께한 볼셰비키 당을 강조하는 입장)과, 혁명의 대중적 성격을 강조하는 입장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나는 둘 다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당이 매우 조직적이고 기강이 있었기 때문이고, (비록 우리가 알고 있듯 전술이나 당면 목표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러한 전술 또는 당면 목표에 따라 레닌은 동지들이 봉기에 나서도록 ‘밀어붙였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와 농민이 (초반에는) 대규모로 볼셰비키의 편에 섰고, 심지어 볼셰비키가 계속 전진하도록 밀어붙였고, 집단적인 정치 행동을 펼치는 데 적절한 형태(‘소비에트’ 또는 평의회)를 전국에 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더 말해야 할 것이 있다. 즉 당과 소비에트 양자가 모두 활발하게 운동하는 한, 혁명은 낡은 정치행동 양식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사실, 또는 혁명 그 자체가 새롭고, 공산주의적인 ‘정치적 실천’을 수반한다는 사실 말이다. 그러나 특히 당과 소비에트의 실천적 종합은 대립물의 통일이었고, 이는 저절로 일어난 것도, 안정적인 것도 아니었다. 이것이 바로 내가 개인으로서 레닌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사적 기능을 부여하는 이유다. 레닌은 4월 테제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통해 [혁명의] 주도권을 다른 혁명적 요소들에 넘겨주었고, 이를 꺼리는 (이는 소비에트가 순수한 ‘노동자 계급’이 아니라는 사실로 인해 촉진되었다) 자기 당에 맞섰다. 이 시점에서 레닌은 당이 언제 어떻게 ‘지도자’로서 역할을 되찾을지 알 수 없었다. 레닌이 진정으로 예외적인 역할을 하도록 한 것은 (단지 그의 이론뿐만 아니라) 바로 이 도박(wager)이다. (하지만 그의 이론도 특히나 제국주의에 대한 그의 해석을 통해서, 상황에 맞도록 개작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또 다른 측면에서도 이러한 우연적 특이성을 살펴볼 수 있다. 즉 당과 소비에트 사이, 대립물의 통일이 결정적인 순간에 창출되었다는 사실은, 권력을 장악하고 역사의 경로를 바꿀 수 있는 혁명적 역량의 중심에 간극 또는 ‘공백’이 존재했음을 사후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이 간극은 레닌의 제안(initiative)에 의해 메워졌고, [당과 소비에트] 양측이 모두 이를 듣고 따를 수 있었다. 분명히도, 간극의 존재는 그러한 간극을 채우기 위한 충분조건이 아니다. 간극이 채워지기 위해서는 ‘적절한’ 주도력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레닌이 올바른 방향을 제시할 때, 그는 그 주도권의 ‘담지자’가 될 것이었다. 즉 그는 결코 되돌아가거나 후퇴할 수 없을 것이며, 오로지 그 모든 결과를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주장하는 것은 단지 외견상의 역설에 불과하다. 즉 널리 공유된 의견과 달리, 레닌이 혁명에서 행한 역할은 대립적인 힘과 논리를 통일했다는 점이고, 바로 이 때문에 혁명을 쿠데타라고 부를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역할은 곧 전위와 대중의 참여를, 조직과 자발성을 ‘종합하여’ 결합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혁명을 정의하는 데 결정적이다. 왜냐하면, 경향적으로, (자본주의적인) 계급 사회를 ‘무계급 사회’로 ‘변형’하는 공산주의라는 프로젝트를 정의하고 창도하는 것은 당이지만, 그러나 급진적인 민주적 경험을 구현하는 것은 소비에트이며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대중이] 공적 기관에 참여하기 위한 집단적 구조들이며), 그러한 [즉 소비에트와 대중 참여라는] 경험이 없다면 공산주의란 존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몇 가지 중간 설명이 필요할 것이지만 이를 그냥 남겨둔 채, 바로 이로부터 나는 네 가지 언급과 질문을 도출하고 싶다.
1. 왜 단지 며칠, 몇 주 만에 권력 이양을 달성할 수 있었는가? 이에 대한 답은 다시금 사회적 위기와 전쟁의 결합으로 되돌아간다. 즉 볼셰비키가 성공적인 쿠데타를 ‘음모’했거나, 그람시(Gramsci)가 나중에 주장했듯 러시아에 ‘시민사회’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전쟁이 국가권력을 군사화된 형태로 집중화하고, 국가권력의 생존이 군사기관의 작동과 성공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또한 경제 활동의 전 부문(군수산업에서부터, 인간과 생산물의 징발에 이르기까지)도 군사기관에 종속되었다. 이는 [즉 군사화·집중화된 국가권력은] 환상이 아니라 (비록 전쟁이 환상을 발생시킬 수 있다고 하더라도) 현실이며, 이러한 현실은 전쟁의 패배라는 도움을 얻는다면, 봉기에 그 대상[즉 군사화·집중화된 국가권력]을 ‘제공’하고, 그 대상에 접근할 수 있게 한다. 이와 동시에, ‘종합된’ 혁명적 행위자[즉 당과 소비에트]는 정치적 ‘의지’나 결정능력이라는 측면에서 중앙집중화된 국가를 능가했고, 대중의 지지라는 측면에서도 그것을 압도했다.
2. 레닌(과 다른 많은 볼셰비키)이 생각하고 있던 혁명의 표상은 무엇이었나? 그리고 그들이 [10월 혁명이라는] 사건을 갑작스럽게 촉발된 시간(precipitated time)이라고 인식하게 한 혁명의 표상은 무엇이었나? (그러한 시간 속에서는 (종말론적 함의를 지닌 유명한 마르크스적 표어를 따르자면) “일 년이 걸릴 일을 며칠 만에 이룰 수 있다.”) 내 생각에, 여기에는 사실상 서로 연결된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 이들은 ‘제국주의 사슬’의 ‘가장 약한 고리’에서 일어난 (또는 오히려 시작한) 러시아혁명이 하나의 세계혁명이라고 확신했다. 10월 혁명이 성공하기 위한 조건과 그 목표는 완전히 이러한 [세계혁명이라는] 본질에 의존했다. 그러나 세계혁명이, 적어도 지금 당장은, 일어나지 않으리라 깨닫는 것은 이들에게 매우 극적이고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실행 불가능한 딜레마에 처했다. 즉, 공산주의 혁명으로서 그들의 혁명을 포기할 것이냐(그러나 어떻게 혁명을 ‘중단’할 수 있는가?), 아니면 그들의 혁명을 ‘세계화’하는 데 있어 빠져있는 조건들을 가능한 한 빠르게 창출할 것이냐(그러나 혁명의 세계화는, 코민테른의 도움을 받더라도, 오직 그들에 의해 달성될 수는 없었다). 둘째, 이들은 20년 전에 벌어졌던 그 유명한 ‘수정주의 논쟁’의 중심, 즉 (장기적인) ‘운동’과 ‘최종 목표’ 사이의 딜레마를 역사가 해결해주었다고 믿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이를 경험했다.) 베른슈타인의 용어로 말하자면, 운동(Bewegung)과 최종 목표(Endzweck)는 이제 하나의 동일한 실천으로 재결합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공산주의적 미래를 향한 ‘이행’의 시작이 그 자체로 공산주의가 될 수 있다(그리고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새로운 ‘레닌주의적’ 개념은 이러한 생각을 명료하게 밝히고 실행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공산주의로의 이행의 개시가 곧 공산주의라는 생각은 그러한 레닌주의적 개념보다 더 오래 살아남아 있다)
3. 언제 두 혁명적 힘[당과 소비에트]의 결합이 붕괴되고, 또는 양자 간의 공산주의적 종합이 변질되고, 또한 그에 따라 당이 (레닌이 『국가와 혁명』에 썼던 것처럼, ‘이미 비국가인 국가’라는) 이행의 모순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조직에서 국가의 형성을 기대하고 따라서 혁명의 국가화를 야기하는 ‘기계’ 또는 장치(dispositif)로 변형되었나? 국가주의적 경향은 매우 초기부터, 사실상은 [혁명의] 기원에서부터 존재했던 것이 분명한데, 왜냐하면 국가주의적 경향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그녀의 선견지명을 보여준, 1918년 가을에 쓴(그러나 그녀가 죽고 난 뒤 1922년에야 출판된) 「러시아혁명에 관해」(On the Russian Revolution)에서 제기된 비판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후에 이 문제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이는 질문을 다음과 같이 변형하게 한다. 즉, 언제 국가화를 향한 경향이 그 대립적 경향, 즉 우리가 ‘자치론적’ 또는 ‘무정부주의적’ 경향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경향을 압도하게 되었는가? ([국가주의적 경향과 자치론적·무정부주의적 경향] 양자는 [당이든 소비에트든 간에] 하나의 동일한 제도들 내에 함께 존재하고 있었다) 1921년에 이르면, 비가역적인 지점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하나의 전환점에 도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레닌의 ‘최후의 투쟁’은 대체로 새로운 권력체제의 양식을 협상하는 것이었다) 1921년, 크론슈타트의 ‘반혁명’ 소비에트와 농민 반란(탐보프)을 진압했을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과 공장 자주관리의 역할을 둘러싸고 당의 주요 세 분파 사이에 결정적인 분쟁이 일어난 뒤 볼셰비키 당에서 ‘분파’ 형성을 ‘임시적’으로 금지했다(10차 당대회). 나는 국가화에 대한 초기 충동(따라서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개념의 점진적인 무력화)은 볼셰비키의 활동에 작용하는 삼중의 제약에서 발생한다고 제시한다. (1) 초민족적 ‘국가 체계’가 가하는 외부적 제약. 이에 맞서 볼셰비키는 [초민족적 국가 체계가] 그들의 존재를 받아들이게 해야 했다. (이는 당장에는 전쟁에 대한 저항을 [즉 내전에 대한 외국의 개입 중단을] 의미했고, 나중에 그것은 외교와 경제관계가 [즉 정상적인 외교·경제관계 수립이] 되었다.) (2) 경제적 상황이 가하는 국내적 제약. (기근과 같은) 사회적 긴장이 커졌고, 그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민 내부의 모순’을 억압하기보다는 ‘관리해야’만 했다. (그에 따라 신경제정책은 이를 실험하고자 시도했고, [인민 내부의 모순을] ‘조절하는’ 국가장치로 가는 길을 닦는다) (3) 마지막으로, 혁명운동 그 자체에 내재된 이데올로기적 제약. 특히나 당-형태는 [즉 당이라는 특수한 조직형태는] 두 가지 관점 사이에서 진동했다. 즉 한편으로는, 전략적 프로젝트를 고려하면서 ‘구체적 상황’을 해석하는 사회 변혁의 지도부라고 보는 관점과 다른 한편으로, 혁명이 직면한 [서로 대립하는] 대안들이라든가 사회에서 전개되고 있는 갈등이 기층 당원을 통해서 반영 또는 표현된다고 보는 관점 말이다. (나중에 그람시는 후자를 ‘집단지성’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볼셰비키 당이 (혹은 ‘당 형태’ 그 자체가) (자치론자들이 판결하듯이) 국가화의 벡터(vector)는 아니고 [즉 당이 그 자체로 국가화라는 일정한 크기의 방향성을 가진다고 볼 수 없으며], (트로츠키주의의 주문(呪文)처럼) 당이 그 본질을 잃고 ‘관료화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세 가지 제약이 교차한 결과, 볼셰비키 당은 국가화되고, 또한 사회와 소비에트 국가 내에서 ‘주권적’ 기능을 획득했으며, 이 양자는 서로를 강화하는 악순환을 낳았다. (또는, [스탈린주의라는]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는 소비에트 국가를 탄생시킨 ‘선순환’이었다)
4. 마지막으로, 아마도 가장 어려운 질문은 이것이다. 무엇이 이 혁명에 (혁명의 사상, 조직 형태, 그리고 이후에 미친 영향력이란 측면을 포함하여)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부여하는가? 나는 내전 말기에 도달한 (부정적인) 상황에서 계급 결정의 모순적인 양상을 읽는 것 외에는 다른 가능성이 없다고 본다. 내전 말기에 이르면, 외부의 적들이 패배하고 내부의 반혁명은 분쇄되었지만, 사회는 피폐해졌고 경제는 산산조각이 났으며, 농민과의 계급 동맹은 (아르노 마이어(Arno Mayer)가 ‘반혁명’이라고 말하기를 선호한) 상호불신이 되었고, 무엇보다도 “프롤레타리아가 사멸해버렸다.” 이는 레닌이 극적이었던 10차 당대회 중간에 외친 절규였는데, 분명히 두 가지를 의미했다. (1) 혁명 이전부터 파업을 통해 계급의식을 강화하고 2월과 10월 봉기의 주역을 맡았던 전투적인 노동자, 특히 소비에트의 구성원들이 내전에 ‘먹혀버렸다’[죽거나 사라졌다]. 그들은 내전에서 적군과 적군 내 정치간부의 중추를 형성했다. (2) 경제가 황폐해졌고, 산업은 새로운 노동계급과 함께 재건되어야 했다. 이는 결정적인 문제다. (리타 디 레오(Rita di Leo)는 그녀의 책, 『세속적인 실험: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그리고 그 반대방향으로』(L’esperimento profano. Dal capitalismo al socialismo e viceversa), 2012에서 이를 적절하게 강조했다) 이는 혁명 이후 ‘사회주의 건설’에 있어 결정적인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나는 나중에 이 문제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산업의 재건이 국가의 결정에 의한 노동계급의 ‘형성’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비록 급속한 공업화와 집단화가 당의 이데올로기([스탈린주의적 의미의] ‘레닌주의’)와 함께 ‘계급의식’이라는 역할을 했지만 말이다. 이러한 강한 주장으로부터 더 중요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마르크스의 이론에서 ‘프롤레타리아’라는 이름은 ‘노동계급’이나 ‘임금노동자 계급’과 동의어가 아니며, 오히려 프롤레타리아는 그와 다른 역사적 기능을 가진 집단을 형성한다. 이러한 집단에서, ‘프롤레타리아’라는 이름은 대립물들의 통일체를 포함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즉 한편에서, 프롤레타리아는 어떤 ‘본원적 축적’이라는 형태에 의해 ‘소유를 박탈당하고’ 불안정한 삶에 내던져진 궁핍화된 대중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이들은 부르주아의 지배(사실은 모든 계급적 지배)에 도전하는 근본적으로 착취 받는 계급이며, 다양한 (넓은 의미의) 정치적 조직을 형성함으로써 자신을 표현한다. 혁명적 ‘사건’의 ‘혁명적 순간’에는 이 두 가지 양상이 놀라울 정도로 연속하여 나타난다. 왜냐하면, 특히나 전쟁에서 벌어진 농민에 대한 강제 동원은 이례적인 수준, 즉 그전보다 훨씬 더 야만적인 프롤레타리아화라는 수준에 이르렀고, 2월 이후와 10월 이후의 집단적 행동은 전투적인 노동자들이 혁명적 행동과 논쟁에 높은 수준으로 참여하게 했다. 바로 이 때문에 나는 우리가 1917년을 (낡은 마르크스주의 도식을 뒤따라서, 또는 오히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사회학적’ 해석을 뒤따라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의해 이뤄진 혁명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라는 결정체를 형성한 혁명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달리 말해, 1917년 혁명은 정치적 행위자로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창조한 그들 자신[프롤레타리아]의 ‘독재’였다. 그러나 또한 그 프롤레타리아를 해체한 것은 그러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변질이었다. 혁명적 과정이 전개되었을 때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그 자신을 형성하고 조직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물리적으로나 이데올로기적으로 파괴되었을 때 혁명적 과정도 끝났으며, 그 역으로도 그러했다. [그 후] 완전히 새로운 과정, 즉 ‘사회주의 건설’이 시작되었다. 그중에서도 사회주의적 노동자 계급의 형성이 핵심적 부분이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적인 이유들 때문에, 같은 명칭,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보존되었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그 이전에 혁명 전략을 지칭하는 것이었다면, 이제 정치·경제 체제를 의미하였다. 이는, 스탈린이 이론화한 것처럼, 그들을 [즉 혁명전략과 정치·경제 체제라는 이질적인 과정을] 하나의 동일한 프로젝트를 실현하는 연속적인 ‘국면들’로 보게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우리는 이 두 과정이 사실상 서로 매우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왜 후자[정치·경제 체제를 건설하는 과정]가 전자[혁명전략으로서 프롤레타리아를 형성하는 과정]의 흔적을 유지했는지 이해해야만 한다.소극이 아닌 비극으로서의 반복
내가 주의를 환기하고 싶은 첫 번째 지점은, 세계에서 다른 혁명들이 부상할 때 볼셰비키 혁명이 끼친 양면적인 효과다. 다른 혁명들은 나중에 임마누엘 월러스틴과 여러 사람들이 ‘자본주의 세계체계’라고 부르게 되는 것의 ‘중심부’와 ‘주변부’, 양자 모두에서 일어났다. (이는 본질적으로 유럽-아메리카 세계와 식민지를 의미한다) 우리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많은 사회와 국가에서 반란과 봉기, 혁명이 벌어질 환경이 무르익었지만, 그 가능성의 조건은 서로 달랐고, 이는 그들이 [전쟁의] 승자와 패자 사이의 경계에서 어느 쪽에 서게 되느냐에 달려 있었다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세계 각지에서 시도되었던 그러한 혁명들은 그 형태에 있어 볼셰비키 혁명의 직접적인 반향, 혹은 결과였다. 그러한 혁명들이 계속 이어 나간 강령, 이데올로기, 집단적 상상력은 볼셰비키 혁명이 낳은 가장 가시적인 성과물인, (그리고 세계의 지배계급들 위에 출몰하는 새로운 ‘유령’이 되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을 구성하게 한 한 가지 원인이 되거나, 또는 코민테른의 조직과 계획에서 파생되었다. 그런데 실상은 이러한 혁명 대부분이 실패했다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전의 마지막 사례이자, 가장 비극적인 사례 중 하나는 파시스트가 공화국에 맞서는 쿠데타를 일으킨 이후 발생한 1936~1939년의 스페인 혁명이다)
내가 논증하고자 하는 바는, 만약 볼셰비키 혁명이 이러한 혁명적 시도들에 대해 긍정적 조건이었다고 한다면, 볼셰비키 혁명은 그 시도들이 실패하게 한 가장 중요한 조건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정적인 측면을 주목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새로운 혁명들은 실패했는데, 왜냐하면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했기 때문이며,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을 죽이려는 시도들을 이겨내고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먼저 한 가지 측면을 살펴보면, 반혁명이 세계적 무대에서 조직되었으며, 여기저기에서 혁명이 벌어지리라 예상하면서, 이를 견뎌내거나 분쇄하기 위해 힘을 모았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예상치 못한 혁명이라는] 기습 효과는 없었다. 이것은 음모론이 아니다. 이는 자본주의의 사회적 모순들이 ‘보통의’ 수단으로는 처치 곤란한 지점에 다다랐다는 생각을 지배계급(자본주의 부르주아 계급, 제국주의·식민주의 열강)이 이제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였다는 사실의 증거다. 또한 이는 지배계급으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이 지역적 현상(예를 들어, 전쟁 전 러시아의 낡은 제국체제가 낳은 산물)이 아니라 (어쨌든 당시 세계에는 러시아와 맞먹는 체제가 많이 있었다), 사실상 세계혁명을 예고하거나, 지정학적 문제를 드러낸다는 생각을 공유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는 다른 한 가지 측면을 검토하도록 이끈다. 즉 볼셰비키 혁명의 성공은 그것을 반복하거나 복제하려는 시도를 낳았다는 점에서 [다른 혁명들에 영향을 미치는] 부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앞에서 내가 지적했듯, 볼셰비키(그리고 다른 나라의 동지들, 즉 독일의 스파르타쿠스단, 1919~1920년 토리노 봉기에 참여한 로르딘 누오보(L’Ordine Nuovo, 신질서)에 속한 이탈리아 사회주의자[그람시 그룹] 등등)는 공산주의 혁명이 자본주의 착취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이자, 정치권력의 신경중추들을 목표물로 삼을 때만 의미가 있다고 확신했다. 이는 볼셰비키의 승리를 보장했던 전략과 조직형태들, 특히 당 또는 ‘당 형태’의 구조를 모방하려는 강력한 동기였다. 제2인터내셔널에서 독일 사회민주주의가 ‘모델’의 지위를 점했던 것처럼, 사실상 그 이상으로, 소련 공산주의는 코민테른 내에서, 그리고 코민테른을 넘어서 하나의 ‘모델’이 되었다. 민족적, 사회적 차이에 따라 (지배계급이든 피착취계급이든) 계급들은 매우 상이한 역사와 경제적 기반에 처하게 되는데, 이러한 민족적, 사회적 차이는 운동의 통일성과 보편성이라는 이름으로, 만약 무시되지 않았다면, 상대화되었고, ‘구체적 분석’에 기초하여 [볼셰비키와 다른] 대안을 발명하려는 시도는 모델로부터의 일탈로 인식되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예외는 중국에 대한 마오의 전략인데, 나는 나중에 이 문제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제약은 ‘계급 대 계급’ 노선과 ‘인민전선’ 노선이라는 두 극 사이에서 진동하기 시작했던 코민테른(후에는 각국 공산당)의 연쇄적인 ‘전략들’에 압력을 가했다. ‘세계혁명’이라는 관념이 정밀하지 않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을 때, 그 관념은, 세력들을 [각국에 맞는] 특정한 방식으로 축적함으로써 (이는 그람시가 ‘진지전’으로 부르게 되는 것의 일부분이다), 각 국가에서 혁명을 반드시 재창조해야만 한다는 관념으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다른 요인들을 도입해야만 한다. 다른 요인들은 이처럼 추상적이며, 사실 여전히 너무 단순한 설명방식을 비틀어 버린다. 첫 번째는 파시즘의 발전이다. 두 번째는 소련이 그 자신의 지정학적 이해관계와 방위전략을 갖는 ‘주권’(sovereign) 국가로 변형된 것이다.
파시즘(특히 독일에서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한 후 가장 중요한 세력이 된 나치즘)은 분명히 ‘순수한’ 형태의 반혁명 정치를 표상한다. 그러나 파시즘은 그 자신이 ‘혁명적’ 전술을 활용한 [반혁명적 정치]형태였고, 따라서 파시즘은 자본주의적 자유주의 체제들이 통제할 수 없었고 (심지어 자본주의적 자유주의 체제들이 공산주의보다는 파시즘과의 ‘타협’을 선호할 때도 그러했다), 나아가 자본주의적 자유주의 체제에 파시즘은 [공산주의와 마찬가지로] 위협이 되었다. ‘자유 군단’이나 준군사조직인 ‘동맹’ 등등의 형태를 취했던 파시즘(특히 유럽의 파시즘)은 그 자체가 전쟁의 산물이며, [전쟁에서] 민족적으로 패배하고 반혁명적 광풍이 불었던 지역에서 확산되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파시즘의 중추는 인종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이며, 특히 (1929년) 거대한 경제 위기의 맥락에서 자신의 대중운동을 모으는 데 성공한다. 혁명 이후의 공산주의는 파시즘의 모습에서 치명적인 적대자를 발견할 것이며, 러시아 내전 때와 마찬가지로, 그들과 생사를 건 대립을 [내전보다] 더 큰 규모로 벌일 것이다. 그러나 그 대립은 이제 세 유형의 정치 체제(자유주의, 파시즘, 공산주의) 간의 삼각 갈등이라는 모습을 취하고, 민족국가(와 국민군)의 형태로 서로 싸우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극적인 결과를 낳았는데, 그중 일부는 혁명의식의 바로 그 핵심에 파괴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는 특히 ‘사회주의 조국’이 다른 선택지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이유로 (또는 없는 체하면서), 또는 ‘반파시스트 동맹’이 실패했다는 이유로 파시즘과의 ‘전술적’ 동맹을 선택할 때마다 그러했다. 프랑스가 소련과의 협정을 거부하고, 히틀러와 프랑스, 영국 사이에 뮌헨 협정이 체결된 이후, 독일-소련 간의 협정이 맺어졌다. 이 협정은 공산주의 투사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들을 절망에 빠뜨렸다. 또한 이는 공산주의가 민주주의 세력으로서의 권위를 잃게 했으며, 비민주주의적 이데올로기의 한 가지 종류로서 [파시즘과 공산주의가 모두 속하게 되는] ‘전체주의’라는 정의를 예비했다. 이는 1945년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냉전의 틀 속에서 단지 부분적으로만 상쇄되었다. 1920년대 초 ‘세계혁명’의 실패가 20세기의 첫 번째 비극이었다면, 반파시즘 전략에서 나타난 [파시즘과의] 타협은 두 번째 비극이었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이 두 비극은 우리에게 두 가지, 이율배반적인 사실을 생각하게 한다. 하나는, 수백만 명에 이르는 소비에트 군인의 희생, 혁명의 자손들, 그리고 사회주의 계획화에 따른 군수산업이 없었다면, 유럽에서 나치즘에 맞서 민주주의가 승리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공산주의와 나치즘, 둘 다 자국 주민에게 테러와 극단주의 정책을 가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두 번째 ‘과잉결정 요인’, 즉 스탈린 치하에서 소련이 ‘주권’ 국가화되면서 나타나는 효과가 개입한다.
나는 주권(sovereignty)이야말로 국제주의 혁명이 민족국가로 변형된 것을 (그리고 점점 더, 제국주의적 요소를 지니게 된 것을) 분석하는 데 있어 핵심 범주라고 믿는다. 충분한 여유를 갖고, ‘프롤레타리아 독재’ 사상의 핵심부에 존재하는 형이상학적이고 정치적인 딜레마로 되돌아가는 게 필요할 것이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법보다 상위에 존재하는 계급권력’이라고 정의했고 (따라서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분보다도 상위에 존재한다), ‘평화적 수단과 폭력적 수단’의 결합을 통한 사회의 변형을 추구했다. 물론 여기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사상은 ‘주권자 없는 주권’, 즉 주권을 유일하게 보유하는 주권자는 곧 혁명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사상이며, 또한 이는 계급 없는 사회로 나아가는 역사적 과정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이 실제로는 권력의 행사에서 빈 공간을 낳았다. 이러한 빈 공간은 매우 상이한 방식으로 ‘채워’지거나 점유될 수 있었는데, 그러한 방식 중 일부는 사실상 반혁명적이었고, 또는 ‘혁명당’이 그 대립물인 지배장치로 변형되는 것이었다. 근본적으로, 이것이 바로 스탈린 시대(와 그 이후)에 소련(그리고 더 나아가 공산주의 운동)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혁명의 최후 단계에, 레닌의 죽음 전후로, 공산당은 정치적 주도권을 ‘독점’했고, 순식간에 이는 혁명의 민주적 성격과 양립할 수 없게 되었고, 달리 말하면, 혁명에서 나타난 다양한 양상의 행위자들을 결합하는 ‘종합’을 붕괴시켰다. 다음 단계에서, 주권의 논리가 더 심화됨에 따라, 당은 자신의 위계제와 지배에 네 겹의 예속을 부과했다. [첫째] 군사권력은 정치권력에 종속되었다. (이는 ‘인민위원’을 통해 이루어졌고, 정치권력은 대조국전쟁에서도 여전히 결정적인 힘을 발휘했다) [둘째] 경제권력은 공장 내 당 기구와 계획당국(고스플란)에 종속되었다. [셋째] 사법권력은 ‘사회의 적들’을 규정하는 국가에 종속되었다. 부르주아는 범죄와 정치적 반대를 구별하는데, 사회의 적들에 대한 규정은 이러한 구별을 제거했다. (그에 따라 집단수용소 제도가 창출되었다) [넷째] 정신적 권력은 국가 철학(‘변증법적 유물론’)의 형성을 통해 정부에 종속되었고, 국가철학은 모든 지적 활동의 공식적 코드가 되었다. 이러한 종속은 소련이라는 국가가 다른 인민들에게도 혁명의 중심이자 아성이 되었다는 생각과 함께 심화되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커다란 역설이 있다. 즉, 소련 국가 내부의 ‘주권적 기능’이 (자본주의의 폐지가 명확한 목표였고, 지도자와 간부들이 혁명적 봉기의 주인공이었던) 공산당에 의해 행사되었다는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소련 안팎의 수백만 노동자와 투사는 그 국가 그 자체가 혁명의 도구이며, 자본주의와 파시즘과의 이중적 대결이라는 조건에서 혁명은 그 자신의 대립물[국가]도 포함할 필요가 있는 ‘영구적인’ 과정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는 역설 말이다.
과거에 스페인의 공산주의 지도자였던 페르난도 클라우딘(Fernando Claudin)은 여전히 귀중한 성찰의 수단으로 남아있는 그의 탁월한 저서 『코민테른에서 코민포름까지, 공산주의 운동의 역사』(History of the Communist Movement from Comintern to Cominform, 1970년 스페인어로 출판)에서 정당하게도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강조했다. 즉 디미트로프와 톨리아티가 이끌던 1935년 코민테른 7차 대회는 파멸적인 ‘계급 대 계급’ 전략을 파기하고 ‘인민전선’ 혹은 반파시즘 민주동맹 전략을 지지했다. 하지만 심지어 7차 대회 이후에도, 코민테른의 전략들은 스탈린이 규정한 소련의 국가이익에 전적으로 종속되어 있었고 (즉,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벌어지는 노동운동의 이익에 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소련의 국가이익은 코민테른 전략들의 한계와 진동을 좌우했다. 당연하게도, 클라우딘은 스페인 혁명(1936~1939)의 과정에서 이러한 종속이 미친 영향에 특히 관심을 두었다. 스페인 혁명은 2차 세계전쟁 이전 유럽에서, 1917년 러시아의 봉기에서 나타난 특징이었던, 무장한 민주적 운동과 정치조직 간의 일종의 ‘종합’이 다시 나타났던 아마도 유일한 계기였을 것이며, 모든 측면에서 거대한 장애물에 직면하고 있었다. 소련은 무기(와 정치위원)를 보내고, 국제여단을 조직하는 것을 돕기는 했으나, 서유럽의 세력 균형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조심했고 (그리고 소련은 2차 세계전쟁이 끝날 무렵 그리스에서 다시금, 훨씬 더 명확하게 그런 식으로 행동했다), 이는 파시즘(그리고 행위자로서 나치즘)의 승리를 가능하게 했다. 이와 같은 사태의 전개과정에서, 또한 그는 7차 대회가 다른 대회들보다 더 혁신적이기는 하지만 (왜냐하면 7차 대회의 노선은 1930년대 자본주의의 거대한 위기에 따라 나타난 노동계급의 ‘독창성’에 의해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가장 유럽 중심적’이었다고 강조한다. 이에 따라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도, 저서의 마지막 절을 바로 중국의 ‘마오주의’ 혁명에 할애한다. 그것은 볼셰비키 혁명을 반복하려는 도식과 효과적으로 결별하고, 혁명운동이 소련의 국가이익으로부터 사실상의 독립을 획득할 수 있도록 한 (또는 심지어 소련의 국가이익과 모순을 빚기도 한) 유일한 사례다. 마오주의 혁명은 세계적인 수준에서 사회적·정치적 세력분포에 거대한 영향을 끼쳤고, 그 영향력은 지금까지도 작동하고 있다. 나도 이 점에 대해 몇 가지 언급하며 이 절을 마치고 싶지만, 이를 위해서는 혁명의 흔적이라는 문제의 ‘원점’으로 잠시 되돌아가야 할 것이다.
1917년 봉기가 앞으로도 계속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지면서, 또한 (이것이 더욱 중요한데,) 소비에트 형태의 사회주의가 (집단적 상상이라는 측면에서) 공산주의 사상과 연결된 근본적 해방의 열망과 직접적으로 모순을 빚었다는 것이 사실로 나타나자, 우리가 혁명 속에서 혁명(revolution in revolution)을 달성하려는 시도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이는 두 가지를 의미하는데, 이 두 가지는 다양하게 조합될 수 있다. 즉 [첫째] 현존하는 혁명이 전도되거나, 배신을 당하거나, 혹은 단지 ‘얼어붙어’ 버렸으므로, 본래의 이상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현존 혁명 모델을 되살리기 위한] 내적 혁명을 해야 한다. 아니면 [둘째] 새로운 혁명은 전략과 정의(definition)라는 측면에서 현존 모델과 단절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내전과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반제국주의 전쟁을 결합했던 ‘대장정’ 이후, 1949년에 승리를 거둔 중국혁명이 두 번째 길의 골자를 잘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마오주의자’로 불리는)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찬미자와 지지자의 눈에는 그것이 결국 첫 번째 길의 의미를 구체화한 것으로 보였다. 왜냐하면 중국혁명은 그것이 대체하기를 원했던 바로 그 모델[러시아혁명]의 몇 가지 핵심적인 특성과 다방면의 관습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복잡성을 추적하려면, 우선 10월 혁명, 바로 그 과정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지금까지 나는 10월 혁명은 연쇄적인 계기들로 구성된 사건이며, 하나의 계기가 반드시 그다음의 계기에 이른다는 필연성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국가 혹은 ‘프롤레타리아’ 국가로 나아가는 하나의 단일한 경향이 존재했다는 생각을 따랐다. 나는 이러한 표상에, 혁명적 과정의 분기가 (가상적으로라도) 일어날 가능성을 포함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상 적어도 한 가지 분기가 실제로 일어났다. 비록 그 결과가 즉각적으로 인지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것은 바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 개최하여 1920년 바쿠에서 열린 동방인민대회의 의미였다. 여기에는 28개국(아시아가 아닌 나라도 있었다)의 대표단이 참가했는데, 당시 내전은 승리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소비에트 연방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내가 시사하고자 하는 바는, 이 대회가 볼셰비키 혁명을 복제하려던 유럽의 혁명들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는 유토피아적인 방식으로) ‘상쇄’하고, (넓은 의미에서) 피식민지 인민의 특수한 이해를 고려하면서 동양으로의 혁명의 이전을 기대했다는 점이다. 이는 ‘세계혁명’ 개념이,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는 혁명운동이 확장되는 국제적 과정이라는 개념으로 전환될 때 나타난 하나의 중요한 양상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전환의 결과는 즉각 나타나지 않았고, [사실 즉각적 성공과는] 거리가 멀었다. 특히 중국에서는 혁명과정이 피로 물든 실패로 시작했는데, 이는 중국공산당이 모스크바의 지시에 따라 국민당과 동맹을 맺었다가, 나중에 국민당의 헤게모니에 맞서 도시에서 봉기한 노동자들이 학살당했다는 사실에 부분적으로 기인했다. (이 사건은 말로(Malraux)의 유명한 소설 『인간의 조건』(La condition humaine)의 주제이기도 하다) 그 후 일본의 침략이 뒤따랐는데, 마오쩌둥은 본질적으로 소농에 의한 공산주의 혁명이라는 역사적 괴물(monster)을 창안하기 위해서 이러한 파국을 움켜잡았다. 마오의 혁명은 의심할 여지 없이 공산주의적이고, 이는 ‘공산주의 체제’의 수립으로 이어진다. 게다가 이 혁명은 비록 시간성이나 주역이라는 측면에서는 완전히 다르지만, 대중의 참여와 당의 지도력을 연합한다는 측면에서는 10월 혁명이 보인 ‘종합’이라는 특성을 재현한다. 그러나 중국혁명은 비록, ‘프롤레타리아적’ 용어법을 유지하지만 (중국혁명은 그 모델이라는 측면에서 [러시아혁명과] 분기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이러한 분기는 성공으로 판명되었다), 자신이 공식적으로는 1917년의 흔적과 ‘레닌주의’라는 틀 속에 있다고 보았다), 어떠한 유의미한 물질적 측면에서 보더라도 분명히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아니다. 이것은 역사에서 기표(記標)들의 자율적 힘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며, 특히 그 기표들이 [사회가] 비가역적으로 변형되는 과정들에 대한 기억을 통합하고 있다면 그러할 것이다. 왜냐하면 중국 역사에서 ‘문화혁명’이라고 알려진 훗날의 사건에서 ‘프롤레타리아적인 것’이라는 자격[즉 기표]이 중심적인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경우에, 그 이름이 사회 세력이나 계급의 존재와는 별로 관련이 없을 것이다. (소련의 계획적 산업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공장에서 청년 노동자들이 ‘생산되고’, 그들이 학생들과 함께 ‘홍위병’ 운동에서 적극적 역할을 할 것이지만 말이다) 사실상, ‘프롤레타리아적인 것’은 이제 본질적으로 이데올로기적 형성물을 지칭하게 되는데, 이는 급진적 평등주의 요소뿐만 아니라 허무주의적이고 반지성주의적인 요소를 담고 있었다. 이는 국가와 당의 전문가라는 ‘새로운 계급’이 (다른 사회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등장했기 때문인데, 그들을 프롤레타리아라고 지칭할 수 없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중국혁명은 1917년 혁명 모델을 이율배반적으로 실현하는데, 이는 그 모델에 예측할 수 없는 영향을 끼치고, 그 핵심적 측면들에서 1917년 혁명 모델과 모순된다. 이러한 핵심적 측면들은 ‘공산주의 사상’이 이제 완전히 다른 ‘세계’ 속에 자리를 잡게 된다는 사실과 관련을 맺는다. 즉 이 다른 세계는 대체로 유럽의 역사에서 영향을 받은 정치적 언어를 계속 사용하지만, 더 이상 유럽 중심적이지 않다. 나아가 이러한 위대한 역사적 ‘전환’(디페시 차크라바르티의 말에 따르면, 유럽의 지방화)이, 세계화된 세계에서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특징으로서 등장하기 이전에, 공산주의에서 (그리고 그것의 쌍둥이 개념인 ‘사회주의’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롭다. 이는 오늘의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따라서 1917년 혁명)의 흔적을 지녔으며, 공산주의가 없이는 오늘의 자본주의는 존재할 수도 없고 이론적으로 정의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시사할 것이다. 거꾸로 뒤집힌 이행
나는 이것이 ‘사회주의 이후’의 시대에서 (종종 ‘신자유주의’가 승리를 거둔 시대로 묘사되기도 한다), 정치적 상상력의 조건을 명확히 밝히기 위해 우리가 수행해야만 할 결정적 논의라고 제안한다. 지배적인 서사에 따르면, 공산주의 혁명들(1917년, 1949년, 그 외 혁명들)은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 실패했거나, 파괴되었다. 그러한 서사는 종종 ‘2단계’ 시나리오로 제시되기도 한다. 먼저 [1단계에서] 공산주의 혁명들은 (특히 후기 제국주의라는 지정학적 맥락에서 권위주의 국가가 됨으로써) 반혁명적 체제들이 되었고, [2단계에서] 그 반혁명 체제들은 다른 국가들에 의해 이데올로기적으로,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전복되었다. (여기서도 다시금 중국이라는 예외에 주목할 수 있다) 따라서 완전한 과정은 [공산주의 혁명의] 자기 파괴와, 자본주의와 그 담지자들과의 대치에서 발생한 패배의 결합일 것이다. 이러한 서사에서 내가 특히 놀란 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급진적인 반대자들도 이런 서사를 쉽게 채택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이제 1917년 ‘세계를 바꾸려’ 했던 ‘공산주의적 시도’를 역사의 망각으로부터 부활시켜야 할 이상적인 모델로 보거나, 아니면 급진적인 대안이 요구되는 반면교사로 본다. 물론 이 양자를 매개하는 해법도 존재하는데, 전형적인 해법은 1917년 레닌의 결정적 개입을 통해 작동한 ‘종합’이 실제로는 완성되지 않았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것이다. (최근 들어 이는 대체로 [당의 기능을 위해 소비에트의 기능을 희생시키는 방식보다는] 오히려 소비에트의 ‘자율적이고’ ‘반권위주의적’인 기능을 위해 당의 ‘이론적’이고 ‘중앙집중적’ 기능을 희생시키는 방식으로 제안된다) 이에 따라 두 가지 대립적인 표어가 제기된다. 즉 지젝이 제시한 베케트풍의 명령(“다시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 [극작가 사뮈엘 베케트는 비관적인 부조리극을 남겼다] 아니면, 네그리가 포스트 산업시대에 맞게 번안한 프란치스코식 이상(“새로운 공유자원(commons)을 창조하자”). [프란치스코파는 작음과 청빈을 추구하는 가톨릭교회의 수도공동체로, 기독교적 공산주의로 여겨지기도 한다] 나는 이러한 표어들 중 어느 것도 불합리하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지만, ‘역사적 사회주의’의 모순적 효과들을 조사함으로써, 하나의 다른 길을 찾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데, 역사적 사회주의는 공산주의 혁명의 충격과 흔적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논의에서 열쇠가 20세기 자본주의 역사의 두 가지 중심적인 측면이라고 믿는데,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은 사회주의와의 대립을 무시하고서는 다룰 수 없다. 그러한 측면들은 디 레오와 다른 저자들이 명확히 지적했다. 첫 번째는 러시아혁명이 자본주의 사회들의 ‘정치적 구성’에 대해, 특히 ‘선진’ 국가들에서 벌어지는 계급투쟁의 형태와 결과에 미친 완곡한 효과와 관련이 있다. 이는 [선진국이] 절대적인 불안전에 대비하여 노동보호(복지정책과 공공서비스)를 수용했다는 사실로부터, 순수하게 시장에 의존하는 노동관계와 경쟁하면서 ‘간접임금’이 상당히 발전했다는 사실(따라서 임금노동 형태 그 자체가 상당히 변형되었다는 사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두 번째는 20세기 사회주의가 (권위주의적이긴 하지만) 급진적인 경제계획 형태를 실제로 실행했고, 이를 위한 공식적인 수단 중 일부를 발명했으며, 이러한 수단들은 자본주의에 의해 국가의 경제정책이라는 변형된 형태로 사용될 수 있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두 가지 현상[즉, 선진국에서, 한편으로는, 정치적 구성에 변화가 나타나 노동보호와 간접임금이 도입되는 과정과,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정책의 형태로 경제계획이 도입되는 과정]이 서로 만나 혼합되었던 결정적인 순간(아마도 또 다른 카이로스)은, 우연이 아니라, 바로 1929년[대불황]이었다. 이때 자본주의는 순수한 자유주의 경제에서 발생하는 민족적, 국제적 위기를 피하기 위해 국가의 규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파시즘이 부상하고 있었으며, (비록 갈등이 있긴 했지만) 공산주의와 많든 적든 조직적인 관계를 맺고 있던 계급투쟁의 수위가 고조되어(프랑스의 사례처럼 특히 여러 총파업이 벌어졌다) 노동권을 인정하도록 강제하고 있었다. 또한 이는 반파시즘 민주전선을 창조할 필요성을 의미하기도 했다. ‘부르주아 계급의 마르크스’로서 케인스는 두 가지 필요성을 모두 인정했고, 시장과 국가정책의 새로운 결합을 이어나가기 위한 방법을 고안했다. 이는 동시에 공산주의의 위협을 ‘중화’시키고 공산주의가 낳은 결과를 활용하는 것이기도 했다. 자본주의가 이러한 역사적 타협을 극복하는 데는 50년이 걸렸는데, 이는 특히 자본주의적 생산을 ‘탈지역화’, ‘탈영토화’함으로써, 그리고 탈식민화 과정을 통해서 착취를 위해 ‘해방’된 빈곤한 노동자 대중을 [자본주의적 생산에] 편입함으로써 가능했다. 오늘날 우리는 레닌, 스탈린, 마오, 히틀러, 케인스나 루스벨트의 세계가 아니라 하이에크의 세계에 살고 있다. 하이에크에게 소련의 계획경제, 뉴딜과 사회복지정책, 나치의 ‘전쟁경제’는 진정한 자유주의로부터의 이탈이며, ‘농노제로 가는 길’에서 서로 대체될 수 있는 사례들이다. 그러나 탈규제와 금융화의 최근 형태들이 ‘순수한’ 시장경제(또는 보편적 상품화)라는 새로운 사건으로 이어지는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사회주의적 역전, 따라서 아마도 공산주의적 대안은 여전히 자본주의의 사회적 관계들과 통치형태들의 망과 서로 얽혀있다. 아마도 20세기에 보여준 형태들에 못지않게 폭력적인 형태들을 취하는 그것들이[즉 자본주의의 사회적 관계와 통치형태가], 어떻게 혁명적인 정치를 발생시킬 수 있는지는 가까운 미래에 가시화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