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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9.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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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미술에 대한 조곡[3]-1980년대 민중미술; 현장 2001

구정화 | 회원
행복한 후일담

대학교 4학년 때였던가? 찾아가기도 힘든 과천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민중미술 15년>전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그 먼 곳을 후배 한 명과 찾아갔던 기억이 있다. 당시 필자는 B급 대학의 사범대 졸업생이 흔히 빠지기 쉬운, 미래에 대한 불안과 우울증에 연일 방만하고 나태한 날들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경애해 마지않던 선배 운동가들의 찬란했던 예술작품을 볼 수 있다는 설렘은 금새 웅장한 미술관의 분위기에 눌려버렸다. 그렇지만 전시장 중앙에 걸려있던 이한열 열사의 목판화 걸개그림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다. 선배들을 통해 때로는 책을 통해 보았던 그 걸개그림은 뜨거웠던 1980년대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 했다.
최근 이 걸개그림의 주인공 최병수가 인사동의 관훈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1987년 당시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던 이 걸개그림의 제작자 최병수. 그는 국졸의 목수출신 작가이다. 그는 20여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환경미술운동가로 변신해 활동하고 있는데 1980년대 미술운동이 남긴 수많은 뒷이야기 중 제일 흐뭇하고 행복한 후일담이라고 할 수 있다.
<민중미술 15년>전은 민중미술이 지난한 세월을 통해 투쟁해왔던, 제도권 미술의 상징인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되었다는 이유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방대한 자료 수집과 언론을 통한 대대적인 홍보, 끊이지 않는 관람객의 발길 등 전시자체의 성공과는 대조적으로, 미술계 내부의 시선은 싸늘했다. 이는 1990년대 들어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제도권으로 흡수되거나 개별화, 파편화 되어가던 민중미술운동 내부의 문제가 포괄된 비판이었다.
1994년이라면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서서히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밀려들고 있던 시절이었다. 미술계 내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 논의조차 시들해지고 신세대 미술이라는 새로운 이슈들이 제공되어 이른바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던 때였다. 제대로 진행된 평가도 없이 미술관으로 들어간 민중미술에 대해, 많은 이들이 안타까와했던 것은 오히려 당연해 보인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미술계 내부에서 민중미술에 대한 논의가 정리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술, 민중과 대화하다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중요하게 언급되고 있는 민중미술은 세계사적 흐름과는 다소 차이를 갖는 한국적 상황에서 탄생한 미술운동이다. 흔히 우리는 민중미술을 두고 멕시코 벽화운동과 멀게는 중국의 목판화운동을 언급하지만, 그보다는 좀더 자국의 조형언어에 기댄 측면이 많다.
1980년대 민중미술의 시작은 1979년 서울대 중심의 화가와 이론가들이 결성한 <현실과 발언>(이하 현발이라고 칭함. 임옥상 성완경 최민 윤범모 김정헌 민정기 등 초기 회원이 40여명, 이후 20여명으로 축소)에서부터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현발은 민중미술사에서 뿐만 아니라 한국현대미술사 안에서도 선구적인 미술운동단체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과거 현발 회원들의 활동상 역시 재평가해 볼만큼, 이들은 지금까지도 미술계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현발의 회원들은 미술이 사회적 산물이라는 데에 동의하면서 상아탑 안에 갇힌 미술을 반대하였다. 미술은 사회와 함께 호흡해야 하고 예술가는 사회를 향해 발언해야 한다는 데에 그 취지를 같이 하였던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1960-70년대 실험미술가들이 제도권 미술에 반발은 하였지만, 사회를 향해 발언해야 한다는 데에서는 이견을 갖고 있었던 점과는 대별된다. 그리고 특히 단체를 결성하고 조직을 통해 활동했던 점에서도 차이를 갖는다.
현발의 창립전은 1980년 동숭동 문예회관에서 열렸는데 당국의 방해로 무산되어 이후 동산방 화랑에서 다시 열렸다. 이들은 지식인으로서 시대의 아픔을 느끼고 미술현실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막연히 4.19를 계승하는 차원에서 20주년 기념전을 자신들의 창립전과 연결시켰다. .
한편 이들보다 약간 뒷세대에 속하는 두렁이나, 임술년 등의 주로 대학가를 중심으로 결성된 단체들이 있다. 이들은 우리가 기억하는 걸개그림과 판화운동 등 민중미술의 대표적인 조형언어들을 만들었다. 김봉준을 중심으로 한 홍익대 학생들의 모임이었던 두렁이나 광주지역의 광주시민학교, 자유미술인협회 등의 단체들은 예술작품과 대중이 함께 하기를 꿈꾸고 일반대중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미술작품을 제작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주로 시민미술학교나 야학 등을 통해 일반대중들과 미술창작의 기쁨을 같이 나누고자 하였으며, 예술작품의 생산과 소비를 일치시키고자 하였다. 1980년대 급변하는 정치적 상황 속에서, 이들의 활동은 미술이 시대의 아픔을 같이 나누고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다하길 바라는 것이었다. 그 미술사적 의의는 현대미술사 안에서 처음으로 미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공개적으로 토론하고 실천하였다는 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들 작품들이 미술양식에 있어서는 신즉물주의나 신표현주의, 극사실주의 등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작품 속에서 발견되는 독특한 서사성이나 모티브는 다분히 한국적인 미술사조 내에서 자생적으로 탄생한 것이다. 이들이 한국적 모티브들을 자주 사용하였던 배경에는, 그 전개가 다르기는 하지만 1970년대 한국성에 대한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의 연구 성과와 관심사들이 든든한 토대가 되었다.
한국성에 대한 관심은 1970년대에도 강조되었던 이슈였지만 그 관점의 차이는 현격한 차이를 갖는다. 민중에 대한 관심이 싹트면서 장승이나 민간신앙 등 주로 상위문화가 아닌 하위계층들이 나누었던 문화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이러한 연구 성과들이 대학가를 통해 전파되면서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탈춤이나 굿, 민간신앙, 전통사상에 대한 관심이 대두되었다.
1980년대 민중미술을 논의할 때 빠지지 않는, 自문화에 대한 깊은 애정과 탐구는 일제시대를 포괄하는 한국근대사에 대한 지식인의 뼈아픈 반성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또한 이들은 한국현대미술사에서 본격적으로 대중과 미술의 소통을 다루었다고 볼 수 있다. 부르조아 취미의 모노크롬이 1970년대 경제성장 속에서 등장한 아파트의 실내장식으로 소비되었던 것과 달리(1970년대 제도권 미술을 대표해온 모노크롬, 또는 미니멀리즘, 단색회화는 미술사적으로는 일본 모노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1970년대 경제성장을 토대로 등장한 중산층의 든든한 후원 아래, 경제적으로 윤택한 삶을 누렸으며 이후 대학의 교수로 자리잡으면서 모노크롬의 영원한 번창을 꾀했던 행복한 화가들이다), 이들은 대중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 즉, 대중이 그림을 감상하는 것뿐만 아니라 대중이 직접 예술가-이때의 예술개념은 생산의 개념이 된다-가 되어 작품을 생산하고 자신의 예술의지를 표현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던 것이다. 이들은 확신에 그치지 않고 이를 직접 실천에 옮긴 세대이기도 했다. 이 점은 1990년대 들어 예술작품과 관객의 소통이, 열병을 앓듯 미술계의 화두가 되었던 점을 생각해볼 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들이 행했던 방법이나 예술작품에 대한 관점에는 여전히 교조적인 측면이 잔존하지만 당시 시대상황 안에서 미술운동이 가질 수밖에 없었던 한계들은 분명 고려되어야 한다.


현장 2001 건너간다

올해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 <1980년대 리얼리즘과 미술>전은 여러모로 미술판의 민중미술에 대한 회고와 정리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는 전시였다.
이 전시는 지난 20여년간 가나아트대표 이호재씨가 소장하였던 민중미술 작품들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면서 열린 것이다. 기실 가나화랑은 지난 20년간 민중미술 작가들을 후원하고 이를 통해 성장한 미술가들이 가나의 이미지를 대변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최근 들어 이미지 쇄신을 꽤하고 있는 가나로서는 이들 작품이 부담스러웠을테고, 오히려 공공적인 성격이 강한 미술관에 넘기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했다는 뒷이야기이다. 그럼, 이제 더 이상 미술계는 거리의 이야기에, 사회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지 않는가?
1990년대 들어 민중미술의 반대급부로 등장한 신세대 미술과 포스트모더니즘 논의도 요즘은 자취를 감추었다. 미술비평이 사라진 미술계에는 대규모 국제전이나 비엔날레와 같은 박람회형식의 전시만이 판치고, 젊은 작가들은 너도나도 유학길에 오르며, 오로지 자신의 주체할 수 없는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만이 나돌 뿐이다.
그러던 중 성곡미술관에서 <현장 2001-건너간다>라는 제목의 전시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했다. 전시를 보기 전 읽었던 전시서문이 386후일담처럼 느껴져 386주창론의 미술판 버전인가, 약간의 거부감이 일었다. 최근 새만금갯벌에서 작업하는 최병수가 그 전시에 함께 참여한다는 소식을 듣고 미술관에 결코 어울리지 않을 그의 작품이 어떻게 전시장에 설치되었을 지 궁금하기도 했다. 10여 년 전 과천현대미술관 중앙에 걸려있던 그의 걸개그림이 생각나 발길을 돌렸던 것이다.
기획자는 정태춘의 "건너간다"라는 노래제목을 부제로 달아 그의 노랫말이 의미하듯 고단한 1990년대를 기억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 고단한 시대를 지나 현장에 서있는 작가들을 모아 전시를 기획했다. 전시는 후일담 버전은 아니었으며, 정확하게 얘기하면 1980년대 민중미술의 끝자락을 접했던 젊은 30대작가의 미술현장 이야기였다. 전시는 1990년대 들어 현란한 수식어로 포장된 많은 전시들에 비해 소박할만큼 단순하고 명쾌한 입장을 갖고 있는 전시였다.
참여작가들은 대체로 치열했던 1980년대의 마지막 어디쯤에 대학을 다니거나 청년기를 보냈으며 혼란한 1990년대에 세상으로 나와 작가로서 작업을 시작한 세대들이다. 이들은 치열하게 온몸으로 시대를 살아왔던 1980년대의 앞세대들은 아니지만 80년대의 의미들을 가슴에 간직하고 주변현실에 눈을 돌려 작업하는 현장의 작가들이다.
갯벌이라는 구체적인 현장에서 작업하는 최병수나 최평곤 외에 노숙자수첩을 배포하거나 유행가시리즈로 작업하는 배영환, 이주노동자들의 삶을 표현한 박경주와 가정 안에서 여성의 삶을 그린 방정아까지 이들의 주제는 다양하였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노출되어 있는 계급적 인종적 모순들도 구체적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이들도 미술관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전시를 하고 작가라는 이름을 달고 활동한다. 그런 의미에서 미술작품이 제도권을 벗어나 생존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과연 미술관을 벗어나 현장성을 담보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작가를, 우리사회는 배출할 수 있을까? 그것은 여전히 우리의 몫인 듯하다.PS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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