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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2.3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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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과 대중: 미완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

최원 | 회원, 미국 뉴스쿨 대학 철학 박사과정
"하지만 '대중'만큼 추상적인 개념이 없다. 오히려 '계급'이 '대중'보다 구체적인 개념이다. '대중'을 계급으로서 볼 때에야 비로소 '구체적인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문제는 '대중'들이 존재하는 그리고 실천하고 자각하는 그 지형을 구체적으로 보는 것이다. 그럴 때에만 '대중'들은 '힘과 방향을 갖은 투쟁의 정치주체'로 조직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힘, 「공투본 제안 철회와 노동해방 대선실천단 해산에 대한 노동자의 힘의 입장」중에서)

철학사를 통해 우리가 접하게 되는 수많은 표현들 가운데 가장 당혹스러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의 의미와 그것의 역사적인 발전에 관해서는 Jean Laplanche, 'The Unfinished Copernican Revolution' in Essays on Otherness (Routledge, 1999)를 참조한다.
}}라는 표현일 것이다. 『순수이성비판』의 제 2판 서문에서 칸트가 자신의 인식론적 기획에 대한 하나의 유비로 채택한 이 표현은 독일 관념론의 혁명적 개시를 알리는 슬로건이 되었다.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란 인식적 객관성의 기준을 더 이상 객체 쪽에서 찾는 것을 멈추고 주체의 선험적 구조 내에서 찾기 위해 관심을 내부로 '돌리는 것'을 말한다. 주체가 고정된 사물의 주변을 도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사물이 고정된 주체의 주변을 돌게 만든다는 것인데, 이는 칸트에 따르면 지구가 태양의 주변을 돌게 만드는 코페르니쿠스적 사고의 전환과도 같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여기서 기만의 절정에 도달한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로부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로 옮겨가면서 우리는 정확히 도는 자의 위치에 서게 되었음에 반해, 칸트의 인식론적 '전회' 속에서는 우리가 오히려 고정되어 있는 중심의 위치에 서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프로이트가 말하듯 원래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가 인간 나르시시즘에 대한 치욕적인 3대 상처 가운데 하나였다면,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는 반대로 나르시시즘으로의 복귀, 그것의 강화로 작동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칸트의 저 유명한 표현이 단지 우스운 것이라고 말하고 돌아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사태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다. 사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의 혁명적 의미는 단번에 명확해지는 것이 아니다. 외양상 그것은 혁명 이후적이고 동시에 혁명 이전적이다. 그가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1543)를 쓰기 훨씬 전부터 지동설의 천문학적 모델이 이미 서양에 이단적인 소수견해로 어느 정도 수립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혁명 이후적(아리스타르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했던 것은 기원전 3세기의 일이다)이었고, 그의 지동설이 지구의 자전조차 이해하지 못한 (즉 밤낮의 교대조차 설명하지 못한) 원시적인 모델이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혁명 이전적이었다. 그렇다면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는 그가 생각했던 만큼 혁명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쉽게 단정하지 말고 논의를 이어가 보자. 여기서 경쟁하는 두 이론은 천동설과 지동설로 표현될 수 있지만, 동시에 그것이 지구중심론(geocentrism)과 태양중심론(heliocentrism)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는 점에 즉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구중심론을 '탈중심화'시킨 것의 결과로 나타난 태양중심론이 여전히 하나의 "중심론"이며, 따라서 우리가 새로운 중심 안에 형이상학적으로 봉쇄될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있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지고 보면 칸트가 주체를 중심에 놓는 자신의 인식론적 기획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부른 것은 단지 과학적 혁명에 대한 철학적 모방의 기만적 사례에 불과했던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러한 기만의 가능성의 조건이 그 표현의 애매함 속에 이미 주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태양중심론으로 협소하게 이해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란 엄밀하게 말해서 중심의 '해체'가 아니라 그것의 단순한 '전위'나 '전도'였으며, 그러한 한에서 칸트는 그 표현을 자신의 철학에 적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의 진정한 혁명적 성격은 천동설을 지동설로 전도한 그것의 최초의 시도 속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거기에 후속하는 또 다른 시도 속에 있었다. 이 점을 인식하는 것은 결정적이다. 천동설이 해명하지 못했던 난제들이 지동설의 도입에 의해 해결되었지만 풀리지 않는 문제가 남아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태양과 같이 원의 궤적을 그리지 않는, 움직이지 않는 듯 보이는 별들의 존재였다. 코페르니쿠스는 이러한 별들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또 한 번의 탈중심화(즉 태양중심론 그 자체로부터의 탈중심화)를 감행했다. 그는 이러한 별들은 태양계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지구의 공전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우리에게 보인다고 설명했고, 바로 이를 통해 그는 태양계가 무한한 우주의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냈던 것이다. 무한한 우주는 이제 그 자체로 어떤 중심도 갖지 않는 전체가 되었고, 무한한 우주가 우리 앞에 열리자 그 공간을 향한 인식의 무한한 진보의 가능성 뿐 아니라 인식의 최종적 완성의 불가능성이 함께 열렸다.
그러므로 관념철학의 나르시시즘에 '사망선고'를 내리는 것은 최소한 두 번 이상의 탈중심화를 통과해야 한다. 최초의 탈중심화 이후 그것의 봉쇄(재중심화)와 급진화를 둘러싼 관념론과 유물론의 일대 격전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전투에서 유물론이 패한다면, 최초의 탈중심화는 역으로 하나의 '알리바이'가 되어 관념론의 공고화에 이바지할 수도 있다. 어린아이의 순진한 얼굴을 하고 마침내 달성된 '철학'으로부터의 해방을 과학이 선언할 때마다 그것은 자신의 해방이 언제든 다시 후방으로부터 공격받을 수 있다는 점을 쉽게 망각한다. 그러나 '단절'을 통해 생산된 과학적 지식은 비록 그것이 '비가역적인 것'이라고 할지라도 하나의 고립되고 결정화된 실체(entity)를 이루는 것은 아니며 미완성된 유동적인 경향으로서만, 즉 그 자체로 열려 있는 하나의 과정으로서만 존재한다는 점을 잊게 되는 순간, 관념론은 과학에 맞선 쿠데타를 감행할 수 있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를 맞게 된다. 과학의 과학주의로의 전도 속에서 '회귀하는 것'은 과학 스스로가 억압했던 자신의 고유한 '무의식' 이외의 어떤 것도 아닌 셈이다.
맑스주의에 있어서도 사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인민의 "일반의지"를 정치의 선험적 기초("인민을 인민으로 만드는 것")로 제시했던 루소의 사상은 맑스 이전까지 정치철학을 지배했던 패러다임이었고, 맑스는 이러한 정치의 자율성에 대한 '탈중심화'를 행함으로써 그것의 이편에 있는 계급의 존재를 '정치'에 폭로했다. 그는 정치가 갖고 있던 중심성을 경제 쪽으로 이동시켰으며 정치가 경제의 주변을 돌게 만들었다.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열 한 번째 테제가 '이제까지 철학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했을 뿐이지만 문제는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라고 핵심적으로 선언하면서 철학으로부터 실천 쪽으로의 탈출을 감행한 것에 이어,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및 그 발전을 근본적인 설명원리로 삼는 이데올로기 발생의 계보학으로서 『독일이데올로기』가 전면에 등장한다. 맑스와 엥겔스는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독일 철학과는 정반대로 […]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최초의 혁명적인 탈중심화가 다시 봉쇄되고 재중심화로 귀결되기 시작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린 것이 아니다. 심지어 우리는 그러한 봉쇄가 탈중심화 시도의 바로 한복판에서 지체없이 자라 나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독일이데올로기』에 존재하는 '계급으로서의 계급'은 둘이나 셋이 아닌 단 하나 부르주아지이며, 프롤레타리아트는 분업과 교환의 발전에 의한 사회(가족, 지역, 민족적 유대관계)의 해체의 최종적 생산물인 고립화되고 동형화된 개인들로 규정되는 "대중"으로서만 등장한다. 물론 프롤레타리아트는 확실히 하나의 '계급'으로 규정될 수 있지만, 그것이 계급으로 존재하길 지속하고 '특수한 계급이익'을 고집하는 한, 지배계급(즉 자신의 '특수이익'을 '일반이익'으로 전체 사회에 강요하는)인 부르주아지와 다를 바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는 '계급이길 멈추는 계급', 일종의 '비계급(non-class)'이 되어야 하며 해체된 "대중"으로 사회 '바깥'에 대규모로 집적되어야 한다. 계급이 아닌 대중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자신의 해체된 '존재' 그 자체로부터 무매개적으로 발생하는 "혁명적 의식"을 획득할 수 있고 "혁명적 행위"(세계를 변혁하는 실천!)로 나아갈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무소유'가 자신의 '무환상'을 선험적으로 보장해주는 "역사의 주체"로 정립된다. 공산주의란 이 주체의 투명한 (자기)의식에 다름 아니다.{{) "더 이상 사회 속의 한 계급으로 상정되지 않으며, 하나의 계급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계급, 따라서 자기 스스로 현 사회의 모든 계급, 모든 국가 등등의 소멸을 표현하고 있는 계급", "이 계급이야말로 사회로부터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한 채 사회의 온갖 무거운 짐들을 다 짊어지고 있으며, 사회로부터 추방되어 다른 모든 계급들과 가장 날카롭게 대립하지 않을 수 없는 계급이다 […] 이 계급으로부터 근본적인 혁명의 필연성에 대한 의식 즉, 공산주의 의식이 발생되어 나온다." 『독일이데올로기 I』(청년사) 70-71쪽 (강조는 인용자). 이 글에서 전개되는 '계급과 대중' 문제에 관해서는 에티엔 발리바르, 『역사유물론의 전화』(민맥)를 참조한다.
}} 따라서 '전회'는 완전하다. 이데올로기 일반은 (독일)관념철학과 직접적으로 동일시되고 프롤레타리아트는 그것의 절대적 타자로 사회 '바깥'에 자리잡는다. 그리고 그렇게 되자마자 '전회'는 봉쇄된다. '바깥'이 다시 역사의 '중심'으로 나타나고 탈중심화는 재중심화 쪽으로 기운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정치로부터 경제를 향한 탈중심화의 논리적 결과로서 이러한 봉쇄가 동시에 '프롤레타리아적 정치'의 봉쇄로 귀결되었다는 점이다. 모든 정치는 지배계급의 것이며 본래적으로 환상적이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실천'은 하나의 '정치'는 아닌 것이다. 이는 엄밀하게 말해서 '계급투쟁'조차 아니다. 왜냐하면 사실상 존재하는 유일한 계급은 부르주아지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회적이고 단번에 달성되는 혁명적 행위가 있을 뿐이다. 이러한 위험한 이론적 구상을 맑스와 엥겔스가 오래 지속할 수 없었다는 것은 당연하다. 나중에 엥겔스가 『루트비히 포이에르바하와 독일고전철학의 종말』에서 이 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독일이데올로기』의 출판에서 그들이 겪었던 곤란을 설명하고 그것을 '생쥐들의 갉아먹는 비판'에 맡겨놨다고 말했을 때, 우리가 그의 말을 어느 정도까지 신뢰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나의 몫이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1848년에 쓰여진 「공산당 선언」은 '역사유물론'이라기보다는 '정치유물론'으로 제시되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이 『독일이데올로기』에 대한 중대한 교정을 가하려고 한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최초의 탈중심화의 시도 속에 포함되어 있던 봉쇄의 효과를 뚫어내기 위한 이론적 시도가 「선언」에서 행해진다.
교정의 핵심은 혁명을 더 이상 일회적인 "행위"가 아닌 하나의 '과정'으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점진적인 구성(계급 형성 투쟁으로서의 계급투쟁)의 결과로 제시하는 것이다. 정치가 전면화된다. "모든 계급투쟁은 정치적 투쟁이"고 그것은 장기적으로 (국민국가의 "형식" 속에서) 국가권력의 장악을 목표로 한다. 따라서 『독일이데올로기』와는 달리 「선언」은 프롤레타리아트가 계급이길 멈춰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특수한 계급이익이 인류해방의 보편이익과 경향적으로 일치하게 된다고 말한다(프롤레타리아트만이 유일하게 혁명적인 계급이며 모든 계급을 폐지하여 그들을 해방시킬 수 있는 계급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치를 무엇이 보장하는가? 하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적대의 단순화'로부터 주어진다("모든 계급들로부터 차출되는 인구"로 구성되는 "거대한 다수자"로서의 프롤레타리아 계급). 하지만 이는 부족하다. 왜냐하면 바로 『독일이데올로기』가 끊임없이 지적했고 「선언」이 반복하는 이유, 즉 "경쟁"으로 내몰리는 노동자들은 다시 개인들로 끊임없이 분해된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치를 보장하기 위한 또 다른 핵심적인 요소로서 공산당("가장 선진적이고 단호한" "의식"으로서의 당)의 전략적 지도가 필요하다. 공산당은 자본주의에 내재적인 계급적대를 계급폐지의 초월성으로 확장시키기 위한 필연적 매개고리가 된다. 그리하여 고립적인 "개인들"로부터 시작되는 최초의 투쟁이 "노동조합", "정치정당" 등의 조직화를 차례로 통과하면서 점점 더 단결된 행동으로 나아가 마침내 혁명을 달성하는 선형적이고 진화적인 계급투쟁의 대서사가 나온다. 출발점에는 극단적으로 분해된 개인들로서의 '대중'이 있고 종착점에는 극단적으로 단결되고 조직된 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 '대중'이 있다. 그리고 이 양자를 매개하는 것이 노동계급의 '자기-의식'으로서의 당이다.
그리하여 맑스와 엥겔스는 최초의 탈중심화의 봉쇄를 극복했는가? 대답은 명백히 '아니다'이다. 그것이 비록 정치를 무대에 복귀하게 만들었지만 여전히 정치는 '비정치'의 정치, 무소유/무환상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투명하고 독립적인 '자기-의식'이라는 정의를 전혀 넘어서지 못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여전히 역사의 주체/중심으로 등장하며, 이러한 재중심화는 '당의 목적론'에 의해 오히려 완결된 형태를 부여받는다. 즉 「선언」은 『독일이데올로기』를 다른 방식으로 한 번 더 반복한다.
「선언」 이후 역사 속에서 실제로 전개된 혁명적 대중운동들을 분석한 맑스의 일련의 텍스트들, 계급과 대중의 관계의 문제 및 무엇보다도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다시 제기한 맑스 사후 엥겔스의 텍스트들 또한 이러한 이론적인 봉쇄를 결정적으로 극복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 텍스트들은 이제 그러한 극복을 위한 단서들을 마련하기 시작한다. 특히 『자본』을 통해서 전개된 '노동의 구체성'(각종의 노동분할에 의해 발생하는 환원 불가능한 노동의 다수성과 더욱이 그것들 사이의 '갈등성')에 대한 분석들 및 계급과 대중의 탁월한 매개로서의 "인구" 개념의 분석(산업예비군의 실존양태 분석) 등은 극단적으로 분해된 대중과 극단적으로 조직된 대중 사이에서 역사의 주체를 목적론적으로 형상화시키는 대신 대중운동을 종별적인 정세 속의 이질적인 요소들의 '마주침'의 효과로 사고하고 거기에만 유일하게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름을 부여하는 완전히 다른 형상화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발리바르가 지적하듯 『자본』의 유일한 주인공은 "자본"이며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이름은 아주 제한된 전략적인 지점(인구의 운동이 계급투쟁을 대중운동으로 매개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지점)에서만 등장한다.
}} 프롤레타리아트는 "결코 자기 자신과 일치하지 않는 계급"이 되며 따라서 더 이상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없다. 물론 프롤레타리아트는 여전히 "정치의 주체"다. 하지만 그것은 역사를 통해 스스로의 실천들을 축적하여 자신의 최종목표(공산주의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적분적 주체'가 아니라, 특정한 정세들(지속적이든 일시적이든)에 연계된 한정된 "효과"로서, 즉 그 자체 변화하는 정세의 내부로부터 갈라져 나오는 '변화에 대한 미분적 주체'로서 사고되어야만 한다. 혁명과 이행은 포기되지 않지만 혁명과 이행을 위한 '목적론'은 포기될 수 있다. 이것이 대중들로 하여금 '봉기'로 나아가게 하는 조건들을 사고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은 아니다. 그 반대다. 계급투쟁은 대중운동으로 조직될 때에만 혁명적이 될 수 있고 맑스주의자들은 구체적인 정세 속에서 대중의 무의식을 사로잡을 수 있는 집단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표상'에 대한 사고를 해야할 '의무'를 지니게 된다. 단 이러한 이데올로기적인 표상은 항상 다시 해체되어야 할 것이라는 점을 잊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 말이다. 맑스와 마찬가지로 엥겔스도 과학적 사회주의의 자명성(과학주의적 자명성!) 내에서 역사의 주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를 상정하는 것으로부터 끝까지 벗어나지 못했지만, 그는 적어도 계급과 대중의 관계를 다시 사고하고자 했으며 『루트비히 포이에르바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 "행동하는 대중과 그 지도자인 소위 위대한 인물들의 머리 속에 명료하든 명료하지 않든, 직접적이든 이데올로기적인 형태로든, 심지어 환상적인 형태로까지 반영되는 동인들을 연구하는 것이 곧 역사 일반과 개별적인 시대 또는 개별적인 지역에서 지배하는 법칙을 인식하는 유일한 길이다." (4장, 강조는 인용자)
코페르니쿠스는 혁명이 단번에 완성될 수 없다는 것 뿐만 아니라 완성될 수 있는 혁명에 대한 그 모든 믿음은 형이상학적 '중심'(수렴점)의 설정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쳐 줬다. 맑스주의자들의 임무는 '대중을 계급으로 보고' 의심할 바 없이 중심에 놓여있는 '추상적인' 프롤레타리아 계급{{) 즉 '임노동제'라는 개념에 의해 정치경제학적으로 정의되어 비역사적으로 유지되는 '이데아'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
}}의 주변에 대중을 조직하여 '투쟁의 힘과 방향'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지속적으로 이행과 혁명의 목적론(결국 당의 목적론)으로 복귀하는 것이고 계급존재를 '역사의 주체'로 끊임없이 재중심화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반대로 계급 그 자체를 각각의 정세 속에서 매번 다시 탈중심화시켜야 한다. 대중과 대중의 운동은 형성된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체성을 항상 초과하며 그것을 낡은 것으로 만든다. 기실, 우리가 지난 15년의 긴 세월을 통해 이것마저 배우지 못했다면 도대체 무엇을 배웠다고 할 수 있을까? 대규모 정규직 남성 노동자의 신화를 넘어서 대중운동을 재구성하고 해체된 전선을 복구하는 것이 운동의 제 1번 과제로 제시되고 있는 오늘 변함없는 낡은 계급적 담론으로 대중의 욕망과 목소리를 억압하려 든다면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통해 운동을 진전시킬 수 있단 말인가? 맑스와 엥겔스는 『독일이데올로기』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그 모든 재중심화로 봉쇄되는 정의들을 완전히 뛰어넘는 놀라운 정의를 주었다. "공산주의란 우리에게 있어 조성되어야 할 하나의 '상태'가 아니며, 혹은 현실이 따라가야 할 하나의 '이상'도 아니다. 우리는 공산주의를 현재의 상태를 폐기해 나가는 '현실의 운동'이라 부른다. 이 운동의 여러 조건들 역시 지금 현재 존재하고 있는 전제들로부터 생겨난다." 이것이 맑스주의가 행한 최초의 탈중심화의 정수이며 요체다. 잊혀지고 억압된 이 공산주의의 정의를 우리는 우리 자신의 "현재" 속에서 재발견하고 확장시켜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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