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3.3.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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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섭 | 노동차장
작년 말 난생 처음으로 새해 계획을 세워 보았다. 별건 없는데 그 중 하나가 학생 시절에 함께 운동했던 동기들을 사회운동에 어떤 방식으로든 참여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사실 학생 때 운동을 하다가 졸업을 하고 군대를 갔다 왔을 때 사회에 진출하여 여전히 사회운동을 하고 있던 동기는 손에 꼽기조차 힘들었다. 물론 '활동가'로만 국한시켜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 사회에 나와서 자기가 속해 있는 공간 - 그것이 회사가 되었든 혹은 무슨 시험을 준비하고 있든 - 에서 기존의 문제의식을 새로운 공간과 처지에 맞게 변화시켜 운동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어느새 동기모임도 전반적인 사회 이슈를 얘기하기는 하지만 각자가 고민하고 전망하는 것을 허심탄회하게 나누기가 힘든 곳이 되었다. 기왕에 여기저기 흩어져서 살아온 세월이 몇 년 지나다 보니 서로가 서로의 삶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어져 버린 것이다. 그래도 나는 나랑 평생 함께 가야 하는 친구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엇이든 함께 하자고 앞으로 얘기할 생각이다.

그 친구들 몇 명을 살펴보자.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있는 친구. 이 친구는 작년 1년 활동하면서도 계속 노동운동에 대한 고민과 지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몇 번 그와 관련된 제안을 했고 - 예를 들어 민주노총 조직활동가 양성학교라든지, 철폐연대라든지, 어느 노조 상근자라든지 - 그렇게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최근에 이놈은 의문사위를 1년 더 하기로 했단다. 내가 극구 반대했더니 그래도 어쩔 수 없단다. 또 1년을 더 설득해야 하겠다. 그리고 모 제약회사에 다니는 친구. 사회운동에 대해 본격적으로 얘기해 본 적이 없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알지 못했다. 그래도 만날 때마다 우리업계 소식을 전해주고 얼마 전에는 사회진보연대 회원을 제안했더니 그러마고 했다. 무언가 더 슬쩍 제안해 봐야 할 텐데. 그리고 소위 벤처회사에 다니는 친구들. 노동운동 쪽에 있다가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모회사에 들어간 친구는 벤처노조위원장 기치를 들고 갔는데 아직 적응 중이다. 사장이 경영부실로 짤려서 회사분위기가 뒤숭숭하고 노조에서 닥쳐올 구조조정에 대한 대응을 모색하고 있다는데 자기 역할도 고민 중일 것이다. 또 한 친구는 벤처기업과 그 노동자에 대한 고민이 많다. 만날 때마다 거의 그런 얘기를 나한테 하고 사회진보연대에서도 그런 고민을 해 줄 것을 요구한다. 요새는 뭔가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겠다고 생각했는지 회사랑 싸워서 한달이나 휴가를 내고 암중모색중이다. 사무실에 한번 온다는데 교육국장한테 한번 만나보라고 해야겠다. 또 한 친구는 내 사고로는 잘 포착되지 않는다. 낭만파라고나 할까. 운동도 낭만적인 면이 있으니까 그 길에서 만나자고 해 볼까. 나머지 한 친구는 최근에 결혼해서 난곡에 집도 얻었다. 얘네들은 비슷한 벤처업계이니 뭔가 공통의 문제의식을 가져볼 수 있지 않을까?
한편, 고시 쪽으로 방향을 잡은 친구들도 있다. 한 친구는 군대도 갔다 오고 결혼도 해서 애도 있는데 행정고시 공부를 한다. 농담으로 나중에 노동부 가서 잘 해 보라고 하는데 아닌게 아니라 그런 고민도 있나 보다. 세상 돌아가는 얘기나 운동 관련한 얘기도 많이 한다. 그래, 행정부 내에 우군도 있어야지. 또 한 친구는 사법시험에 합격해서 올해 연수원에 들어간다. 이 친구도 결혼했다. 비정규 투쟁, 노동운동에 법적 투쟁도 중요하니 철폐연대 법률위를 제안해서 밀어 붙여 봄직도 하다. 건설회사에 다니는 친구도 있다. 이 친구는 머리도 물들이고 웨이브도 주는 변신을 했고 얼마 전에 결혼했다. 처음에는 머리 물들인 게 생각이 바뀐 것을 나타내느냐는 물음에 그렇다고 해서 가슴아픈 적이 있었는데 요샌 내가 얘기하면 잘 들어 준다. 회원활동을 넌지시 얘기했을 때 긍정하는 것 같았다. 사회진보연대 활동을 하다가 다른 데로 옮겼다가 지금은 활동을 잠시 중단하고 있는 친구 같은 경우에는 삶과 운동에 대해 무척 많이 고민하는 것 같은데 잘 소통이 안 되서 안타깝다. 그래도 끈이 있으니 얘기를 계속 해봐야겠다. 사회복지 관련 대학원에 있는 친구한테는 민중복지연대 활동을 해 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었는데 그 친구는 자기가 아직 그런 활동을 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자기 역할을 연구하고 공부하는 것으로만 생각하든지.

이러저러한 나의 언급과 제안에 대해 몇 가지 반응이 있었다. 하나는 나나 사회진보연대를 보면 활동가 아니면 참여할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반응은 특히 스스로를 '생활인'으로 규정하고 20대말 30대초 사회적 자리잡기와 결혼 등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에게서 보인다. 뭐, 타당한 지적이지만 나는 그런 얘기를 들으면 기본적으로 의지부족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생활인이라는 규정은 사회적 이데올로기이고 보통 운동에서 멀어졌거나 혹은 미안함 때문에 더 거리를 두는 사람들이 정당화하는데 딱 맞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러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저러저러한 계기와 사업을 마련해서, 한명한명의 구미에 딱 맞는 '패키지 프로그램'이 있어서 바쁜 시간을 내 몸만 오면 되는 그런 운동은 애당초 불가능하거니와 그렇게 해서까지 매달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기본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현실적으로 무엇을 함께 할 수 있는지 논의해서 역량에 맞게 실천하면 되는 것 아닌가. 몇 년간 활동가로서 활동하지 않은 것에 대해 가질 수 있는 복잡한 감정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이 현실에서 더 멀어지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어떤 운동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부터 고민해야 할 것이다. 올해는 사회진보연대에서 좋은 강좌나 교육을 중점사업으로 추진하기로 했으니 '여지'는 더 넓어진 셈이다.

두 번째는 왜 동기들을 중심으로 그러냐는 것이다. 농담처럼 '동기식'이 아니라 '비동기식'이 낫다고도 한다. 맞습니다, 맞고요. 물론 사람들을 만나서 한 명이라도 우리편으로 만들고 더 나아가 함께 활동하게 하는 데 있어 특정 집단을 선호할 이유가 있겠냐마는 나는 그래도 공통의 경험이 있고 비슷한 결의를 가진 적이 있는 사람들이니 신경을 더 써야하지 않겠냐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그 일만 하는 건 아니니까. 그리고 그동안 너무 소홀했다는 내 나름의 반성의 발로니까 너무 확대해석할 필요는 없다.

세 번째는 상당한 부담감을 표시하는 경우다. 겉으로 드러내놓고 그러지는 않지만 그런 걸 느낄 때가 있다. 사실 걱정되는 때도 종종 있다. 이러다가 386화 되는 게 아닌가 하고. 그런데 386들이야 민주화 투쟁이라는 사회적 후광에다가 주식호황을 타고 금융적 수혜를 많이 보았으니 지금에 와서 주류로 편입되는 물질적 이데올로기적 기반이라도 있는데 497들이 그런 게 있나? 흔히 말하는 '후일담' 류도 형성할 수 없는 처지 아닌가. 누군가는 작년에 공투본이 무산되고 대선에서 노무현 당선되는 걸 보고는 '역사가 90년대 세대를 버리는 카드로 생각하는 것 같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사회주의 몰락, 문민화된 정부와 내리막길 경제 속에서 90년대 운동권들은 어떤 공통점이 있는 것일까? 대결해야 할 과제가 너무 어렵고 다양해서 다수는 불안정한 삶 속으로 산개해 가고 소수만 일선에 있는 건가?
여하간 산개해 있는 친구들에게 중요한 것은 외부적 자극과 스스로의 변화 노력이 맞물려 스파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한발 내딛기가 어렵지 한발 내딛고 나면 그 때부터는 신천지가 될 것이다. 왜? 옳고 재미있는 일이니까.

"너는 처음부터 여기 있었지. 비록 나와 마주 하지는 않았지만. 새벽별에 비친 그림자 되어 우리는 나란히 나란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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