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3.3.33호
첨부파일
33철학에세이_최원.hwp

거리의 정치학 : 네티즌 이데올로기 비판

최원 | 회원, 미국 뉴스쿨 대학 철학박사과정
딴지일보는 '울카맨'이라는 아이디를 가진 필자(이하 울카맨)에 의해 작성된 "네티즌의 정치학"이라는 글을 2회에 걸쳐 연재했고 지금은 3회를 앞둔 채 잠시 멈춰있는 상태다. 1회분은 주로 인터넷의 게시판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네티즌들의 활동이 어떻게 정보의 생산, 유통, 소비과정을 민주적으로 혁신함으로써 새로운 정치공간 및 집단 정체성을 형성해내는 데에 성공했는지를 분석하고 있으며, 2회분은 이러한 관점에 입각해서 소위 '운동권'이 대중들에 접근함에 있어 사용하는 선전선동은 역사적 유효기간이 만료된 낡은 것이 되었다는 관점을 제출한다. 그러나 이러한 울카맨의 글은 그가 스스로 밝히듯 작년 12월 촛불시위에서 발생한 '깃발논쟁' 및 그에 이어진 앙마의 분리집회 선언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논쟁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논쟁의 지형은 매우 구체적이며, 우리는 그의 글을 읽자마자 곧바로 지난 12월의 촛불시위 현장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개인적으로 나는 '우리교육'지(1월호)에 기고한 글 및 게시판에 쓴 몇 편의 글에서 '네티즌 對 운동권'이라는 구도가 미디어에 의해 조작된 허구적인 대립구도라는 점을 밝힌 바 있다. 그리고 물론 딴지일보가 여기에 상당한 책임을 갖고 있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네티즌 이데올로기'라고 부르려고 하는 것이 엄연히 실존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며, 그것이 촛불시위를 통해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는지, 그것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분석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나는 인터넷이라는 공간을 전부 아니면 전무의 방식으로 찬양하거나 기각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네티즌 이데올로기'라 부르는 것은 정확히 이런 양자택일에 입각해서 구성되는 이데올로기들 전체(기각이든 찬양이든)를 말한다.
촛불시위에서 울카맨이 문제로 삼은 것은 단적으로 범대위 측에 의해 주도된 집회방식이 '중앙집중식'이었다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집회방식은 단지 범대위만의 것이 아니며 '운동권' 전체가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과 상관없이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중앙집중식 집회방식은 엘리트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관점을 통해 조직되는 것으로, 거기서 정보의 흐름은 그것을 소유하거나 생산하는 자들(단상 위의 사람들 혹은 '지도부')로부터 그것을 소비하는 자들(일반 집회참가자들)에게로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선전선동"의 특징을 갖고 있다. 여기에 그가 대립시키는 것은 네티즌들에 의해 인터넷에서 실천되는 "펌질의 정치학"인데, 거기서 정보활동은 그 생산 및 소비의 주체가 동일한 개인들로 구성됨으로써 일방성이 해체되고 강한 의미에서 호혜성이 발생하는 특징을 보여준다. 따라서 촛불시위에 참가했던 '네티즌들'이 범대위 측의 집회방식에 염증을 느끼고 다수의 소규모 집회들을 요구하게 된 것은 당연하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범대위 측의 경직된 태도야말로 종국적으로 시위에 참여했던 시민들을 대규모로 이탈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 장본인이라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이러한 그의 판단이 상황을 매우 단순화시키고 있다는 점을 먼저 분명히 하자. 사실상 시민들의 다수가 대열을 이탈하게 된 사태는 대선 당선이 확정된 후 기다렸다는 듯이 터져 나온 노무현의 촛불시위 자제 요청과 정부에 의한 시위 강경 진압으로의 선회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정작 문제로 삼고 싶은 것은 이러한 그의 정세판단의 오류(거의 고의적인 왜곡이라고까지 보이는)가 아니다. 또 나는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네티즌의 정보활동에 대한 그의 분석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려는 것도 아니다. 물론 나는 그의 다분히 형식주의적인 분석에 상당부분 동의할 수 없다(이 점에 관해서는 재론하겠다). 내가 여기서 일차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인터넷이 아니라 오히려 촛불시위가 진행되었던 광화문이라는 '거리'(street)다. 울카맨은 범대위를 비롯한 '운동권'들이 네티즌의 정보공유방식 및 그들의 언어, 정서 등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문제였다고 말하고 있지만, 나는 거꾸로 광화문이라는 거리의 물질성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야말로 그를 비롯한 네티즌 이데올로기의 주창자들의 문제였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그들은 광화문이 넷이 아니라 거리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그 거리가 갖는 물질성이 넷의 물질성과는 판이한 것에 입각해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따라서 여전히 자신들이 사이버 스페이스에 있는 양 착각하면서 그들은 오프라인의 거리에 이러저러한 "게시판들"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주장했던 '다수의 소규모 집회 요구'를 내가 최종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넷과 거리가 무엇이 다르다는 것인가? 넷(어쨌든 울카맨이 말하는 그 좁은 의미에서의 넷)이라는 공간은 게시판을 통한 메시지들의 교환과 '펌질'로 채워진다. 바꿔 말해서 그곳은 원칙적으로 말 혹은 글을 통한 정보 및 의견들의 교환이 이루어지는 교통의 공간이다. 하버마스 식으로 표현하면 일종의 '공론장'(public sphere)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공간은 따라서 정보교환과 논쟁과 설득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반면 거리(어쨌든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장소로서의 그 거리)는 원칙적으로 교통을 목적으로 하는 공간이 아니다.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거리에 모여든 사람들은 모종의 '진실'(미선이와 효순이를 살려내라! 불평등한 소파를 개정하라!)을 자신의 눈으로 이미 본 사람들이며, 따라서 서로를 설득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거리는 강한 의미에서 행동(action)의 공간인 것이다. 물론 거리에도 '말'이 있지만, 그것은 이미 그 자체로 행동인 말이다. 따라서 거리의 말은 누군가를 설득하려는 말이 아니며 누군가와 토론하기 위한 말이 아니다. 그것은 심지어 누군가에게 정보를 전해주려고도 하지 않는다. 정보라고 부를만한 많은 양의 무엇인가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몇 마디의 구호로 완전히 요약될 수 있는 '요구'(demand)다! 정부에게, 미국에게, 기업에게, 지배자들에게 거리는 요구한다. 그리고 대중들은 그 요구를 선창, 제창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을 물리적인 압력으로 조직화해낸다. 영어로 대중이 무엇인가? 그것은 mass다. 즉 덩어리다. 그것은 뭉쳐진 힘이며, 지배자들에게 가하는 대중의 움켜쥔 주먹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대중들은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자신의 숫자를 과시하고 함성을 지르며 몸싸움을 벌인다. 그리고 자신의 요구가 지속적으로 무시될 때에는 심지어 폭력적인 수단(대항-폭력)을 동원해서라도 그것을 관철시키기 위한 싸움을 벌여내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마자, 우리는 앙마 및 울카맨 자신을 비롯한 일군의 사람들이 새로운 촛불시위를 위한 분리집회를 선언했을 때 그들이 단지 소규모의 집회들과 집회형식의 다양화만을 주장했던 것이 아니었음을 기억하게 된다. 즉, 그들은 미대사관 앞으로의 평화행진을 거부했으며 경찰과의 불필요한 충돌을 피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한 주장이 어떤 본질을 가지고 있는가는 이들이 가진 첫 번째 집회에서 적나라한 방식으로 형상화되었다. 경찰에 완전히 포위 당한 채 평화를 사랑하는 서로의 마음을 무기력하게 확인하는 소규모의 "게시판"을 거리에 만들어 냄으로써 그들은 단지 '폭력'만을 기각한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전투성'을 기각해 버렸고 정치적 '행동' 그 자체를 포기해 버렸던 것이다. 그들에게 남아있던 것은 단지 '말' 뿐이었다. 그러나 과연 그 '말'은 온전하게 남아 있을 수 있었는가? 그것은 강한 의미에서 정치적인 '발언'이 될 수 있었는가? 스피노자는 『윤리학』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육체가 행동할 수 있는 역능(power)을 ... 감소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동시에 정신이 사유할 수 있는 역능을 ... 감소시킨다."(3부, 정리11) 그들의 육체가 경찰에 포위되어 어떤 곳으로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됐을 때, 그들의 사유(말) 또한 체제가 강요하는 규칙들에 둘러싸여 어떤 곳으로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렇다면 거리의 정치를 표현하는 주된 방식은 원칙적으로 중앙집중식의 집회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내가 집회의 형식들을 보다 다양한 방식으로 조직하는 것이 필요 없다거나 자발적인 문화적 공간들을 집회 내에 만들어 낼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다양성들은 다시 하나의 힘으로 집중될 수 있어야만 하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중앙집중적인 집회는 거리의 정치에서 결코 생략될 수 없는 핵심적 계기로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앙마나 울카맨 등은 운동권의 집회문화를 비판하면서 거기에 서구의 집회문화를 대립시킨다. 그러나 지난 1월 18일 미국에서 진행된 반전집회만 해도 중앙집중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연단을 중심으로 각종 정치 단체의 대표자들의 목소리(울카맨의 표현대로 "짱급들의 의례적인 연설")를 전달하기 위한 집회가 약 2시간 동안 진행된 다음에 평화행진이 이어졌다. 엄청난 규모의 군중들에게 연설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사람들을 "쎄워버리는" 앰프와 스피커들이 동원되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물론 희한한 복장과 재치 넘치는 피켓을 들고 나온 사람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집회 안에는 그러한 문화가 전혀 배제되어 있는가? 그렇지 않다. 존레논의 '이매진'이라는 노래 대신 우리에겐 '아침이슬'이 있고 사물놀이가 있고 심지어 자신의 머리에 구호를 새기고 나와 좌중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사람도 있다. 당연히 더 많은 다양한 기제들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에 반대할 이유는 없지만, 마치 우리의 (혹은 '운동권'의) 집회는 단지 우중충하고 지루한 것인 양 말하는 것 속에는 명백한 왜곡이 있다. 또한 주변 여건과 필요에 따라서는 이러저러한 소규모의 토론들을 조직하는 것도 가능하다. 문제는 울카맨이 그것을 중앙집중적인 집회와 대립시키면서 하나의 양자택일의 문제인 양 만들어 나가는 그의 독선적인 방식에 있다.
그렇다면 울카맨의 '네티즌 이데올로기'의 본질은 무엇인가? 나는 앞서 그의 착각이 행동의 공간으로서의 거리를 말의 공간으로서의 넷과 구별하지 못한 것에 있다는 말을 했다. 사실 이는 울카맨이 간접적인 방식으로 시인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글에서 "게시판 속으로 세상이 들어오다"라고 선언하면서, 네티즌들은 "게시판 몇 개만 둘러보면 그날 하루의 세상 이야기를 대충 섭렵한다"고 말한다. 나는 이 말도 전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백 번 양보해서 이러한 그의 말을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정확히 그가 무엇을 섭렵한다는 것인가? 그는 단지 "이야기"만을 섭렵할 뿐이다. 그렇다면 세상이 게시판 안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이러 저러한 이야기만이 게시판 안으로 들어온 것이며, 게시판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세상의 그 모든 싸움들은 현실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게 된다. 왜냐하면 자본과 노동의 대결의 제 1번 싸움터는 노동과정 그 자체 내에 있으며, 가부장제에 대항한 여성들의 투쟁의 제 1번 싸움터는 가족 그 자체 내에 있고, 심지어 지적 차이를 둘러싼 대중들의 인식을 위한 투쟁의 제 1번 싸움터도 책과 교육과정 그 자체(이에 관해서는 재론할 것이다) 내에 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싸움의 '소식들'이 전해질 뿐, 싸움 자체가 게시판에 전해질 수는 없다. 그 소식들 가운데 어떤 것이 화제가 된다면, 그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논평들이 이어지고 "펌질"이 이어지고 비판과 반비판이 이어질 테지만 그것은 육체적인 방식으로 전개되는 싸움이 아니다.
나는 인터넷에서의 논쟁은 쓸모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갖는 내적인 한계를 우리가 정확히 인식해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둘은 완전히 다른 말이다. 세상이 인터넷 안으로 들어왔다고 울카맨이 선언하는 순간, 그는 '말할 자유'를 우리 사회의 자유 일반을 측정하는 보편적 기준으로 승격시킨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욕설을 비롯하여 (물론 슬프게도 '국가보안법'에 위배되지 않는 말들을 한다는 조건하에서) 아무 말이나 내뱉을 수 있는 절대 자유를 누리는 환상 속에서 신나게 웹을 써핑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말할 자유'는 그것이 '행동의 자유'(아무 짓이나 할 수 있다는 방종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개인들의 실질적인 역능으로서의 자유―즉 "자유의 필연적 생성")를 동반하지 않을 때 단지 하나의 환상으로 전락하고 말뿐이다. 그리고 바로 이렇게 '말할 자유'와 '행동의 자유'를 구별하고 전자로 후자를 대체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자유주의이다. 지금으로서는 신자유주의와 공명할 수밖에 없는 자유주의가 바로 울카맨의 네티즌 이데올로기의 본질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인터넷 그 자체에서 드러나는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 글을 맺고자 한다. 울카맨 스스로가 말하듯 인터넷에서 전달되는 것은 정확히 "정보"이다. 그런데 정보가 그 자체로 인식과 동의어인가? 이 문제를 생각해 보기 위해서 나는 인터넷의 문서들이 작성되는 물질적인 형식에 관해 논해보고자 한다.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책을 발명하기 전에 인류는 양피지 등의 두루마리에 글을 써서 생각을 교환했다. 이는 기본적으로 한 페이지로 구성된 문서였기 때문에 많은 양의 생각을 전달하는 데에 한계를 가지고 있었고, 책이 발명되자 곧 사멸해 버렸다. 그런데 인터넷이 생겨나면서 우리에게 돌아온 것은 바로 이 두루마리 문서들이다. 한 페이지에 모든 정보가 다 담겨 있다. 이용자들은 스크롤을 하면서 모니터를 쫓아 내려간다. 물론 원칙적으로 여기에는 어떤 양적 제한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히려 문제는 양적인 무제한성으로부터 발생한다. 수없이 인터넷에 널려있는 두루마리 문서들을 펼치면서 사람들은 어느새 생각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울카맨이 제시한 어떤 예가 말하듯 글이 너무 길면 "실격"이 되는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내가 인터넷을 읽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이 나를 읽는다. 모니터를 통해서 글을 읽어나가는 호흡은 두루마리 문서를 읽어나가는 호흡만큼 짧아질 수밖에 없고 그 많은 문서들을 통해 나는 매우 나르시시스트적인 방식으로 단지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기존의 신념과 취향을 반사시켜 재확인할 뿐이다. 당연히 우리는 뭔가를 배우고 있다는 느낌을 항상 갖게 된다. 왜냐하면 무엇인가를 읽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상 진정한 인식을 위한 싸움들이 일어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렇기 때문에 소위 "떼거리" 문화라는 것도 생겨난다. 특히 남성 이용자들의 여성이용자들에 대한 잦은 사이버 린치들(페미니즘을 표방하는 단체들에 대한 예비역들의 집단 폭력 사건들)은 바로 이러한 현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지만, 안티조선 운동이나 노사모와 같은 경우에도 그 배타성과 자기애적 성격은 마찬가지다. 따라서 나는 인터넷이 이런 면에서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방향으로 비민주적인 교통의 일방적 성격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한 편으로 그것은 지식인들의 지적 작업들에 대한 일관된 경멸의 방향을 취하고(지식 혐오적 인민주의), 다른 한 편으로 그것은 주류를 형성하지 못하는 주체들(여성, 노동자 등)을 넷의 시민권으로부터 배제하는 집단적인 실천의 방향을 취한다.
여기에 또 다른 요인이 결합해 들어온다. 인터넷은 당연히 사회의 한 부분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수많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혹은 제도들) 및 억압적 국가장치가 그것을 에워싼다. 울카맨이 선전선동의 역사적 유효성의 만료를 선언하는 바로 그 순간, 부르주아지들은 방송과 언론(이는 인터넷 내부에도 있다)을 통해서 공중파와 케이블과 위성중계와 지면으로 끊임없는 선전선동을 하고 있으며, 그것을 믿지 않는 자들은 별 "이야기"조차 전달되지 않은 채 감옥에 가두어지고 있는 현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미선과 효순의 사건만 두고도 촛불시위가 있기까지 폭로전(선전선동!)을 펼치다 구속된 사람들이 수십 명에 달하고 있는 것을 울카맨은 전혀 인지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단지 미국과의 월드컵 대결에서 반미감정을 가져서는 안될 것이라는 조선일보의 사설을 비판하기 시작한 붉은 악마의 기특한 변화일 뿐이다.
나는 울카맨이 말한 것과 같이 인터넷이 교통의 중요한 수단으로 떠올랐다는 점에 완전히 동의하며, 그것을 잘 활용한다면(그러나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유례없는 대중적 발언권의 강화를 실현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넷이라는 공간이 그 자체로 주어진 하나의 유토피아라도 되는 양 찬양으로 일관하면서, 그 이외의 정치적 공간들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급진적 사회운동들에 대한 경멸을 선전선동하는 일에 몰두하는 그의 네티즌 이데올로기는 오히려 자신의 꿈의 공간에 끔찍한 민중들의 디스토피아를 건설하는 것으로 귀결될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소한 감동이 아니라 그 자동적인 감동들에로의 정치적 개입이며, 정보의 바다의 무서운 물결들 속에 삼켜져 밑으로 가라앉는 들리지 않는 인민 중의 인민의 목소리를 다시 발견하고 발언과 행동으로 끊임없이 물질화시키려는 작업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당연하게도 자기자신에 대한 끝도 없는 감동을 깨고 넷의 타자를 찾아 헤매는 지난한 정치적 작업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주제어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