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3.3.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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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금 개혁을 둘러싼 사회, 정치적 역학관계와 개혁모델 비판

정지영 | 정책부장
공적연금체계에 대한 공격

지속적인 팽창을 추구하는 금융의 세계화 과정은 기존의 연금 체계에 대한 직·간접적인 공격을 감행하고 있다. 1990년대 이래로 전 세계적으로 공적연금을 축소하고 사적 연금화를 확장하려는 흐름이 추진되어왔다. 공적연금의 비효율성, 재정적자, 세대간의 갈등 유발 등의 문제점이 끈질기게 지적되고 있으며, 1990년대 미국 경제의 장기호황 요인 중 하나로 거대한 사적 연금기금의 안정적인 투자가 꼽히고 있다. 한 마디로, 공적연금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한 방안은 사적연금 도입이고, 사적연금은 경제성장, 특히 자본시장 발전에 톡톡한 기여를 한다는 것이 이들 공격의 주된 논리다.
1994년 세계은행이 각 국의 연금체계에 대한 개혁안을 제시했을 때, 당시 주류를 이루고 있던 공적연금은 급속한 노령화와 과도한 연금급여, 수익률 저하 등에 따른 재정 불안정, 그리고 노동수요와 공급 행태 변화 등으로 변화의 압력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송원근, 2001) 이에 대해 세계은행의 개혁안은 기존의 공적연금만으로는 공적연금 체계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지적하며, "3층 보장체계(Three Pillars)"의 연금체계를 권고했다. 이 개혁안은 연금재정방식 및 내용에 있어서 기존의 공적으로 관리되던 부과방식의 확정급여형(Pay-As-You-Go Defined Benefits) 연금체계를 사적으로 운영되는 적립방식의 확정기여형(funded Defined Contribution) 연금체계로 전환하도록 강제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결국 이 의미는 기존 공적연금이 담당했던 역할 중 상당 부분을 사적 연금화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로부터 공적연금의 축소와 연금에 있어서 시장의 기능을 강조하는 사적 연금화의 흐름이 세계적으로 가시화되었다 할 수 있다. 실제로 세계은행은 각 국에서 이러한 연금개혁을 추진하는데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고, 사적 연금화를 주도한 세력이었다. 일례로 아프리카 대륙의 대부분의 국가들이 세계은행의 다층보장체계 안을 받아들일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것은 무엇보다 세계은행이 개발자금 지원을 명목으로 아프리카 국가들의 정책 결정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1990년대까지 3개국에 불과했던 사적연금으로의 개혁이 2000년대에는 20여 개국에서 진행되었으며, 세계은행 및 OECD를 필두로 한 사적연금으로의 전환을 권고하거나 강제하는 흐름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이제부터 사적연금으로의 전환이라는 연금개혁을 정당화하는 논리들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 속에서 우리는 너무나 타당하고, 객관적인 듯한 이 논리들이 사실은 연금개혁을 통해 이익을 보는 자들의 관점에서 동원된 것이라는 점을 보게 될 것이다.


공적연금 체계를 공격하는 논리들

우선 기존의 공적 연금체계를 공격하는 가장 주된 논리는 사회가 급속하게 노령화되고 있기 때문에 부과방식의 확정급여형 연금체계의 재정 유지가 어렵다는 것이다. 인구구성의 비율상 퇴직한 노령층, 즉 연금을 받아야하는 사람들의 수는 증가하는데 비해 그들의 연금을 부담할 노동인구 층은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이 상태에서 정부가 연금 수급자들에게 약속된 급여를 제공하려면 엄청난 정부 재정 적자를 감수하거나, 이를 메우기 위해 노동인구 층에게 세금 또는 연금갹출금을 늘려서 더욱 큰 부담을 지워야한다는 것이다. 스웨덴 등 유럽의 선진국들의 경우 공적연금의 재정적자를 보존하기 위해 연금 지급 시기를 65세에서 67세로 상향조정하거나 연금 보험료(갹출금)를 높이는 방안을 택하고 있다. 하지만 세계은행 등은 이런 방식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며, 사적 연금체계로의 전환, 3축 연금체제 구축이 가장 올바른 길이라 주장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국민연금 재정 불안정 상황에 대해서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관리공단 등에서 연금 보험료율을 소득의 17~18%까지 단계적으로 올리고(현재는 소득의 9% 수준), 연금 수령액은 OECD 국가 평균인 소득의 40%(현재 소득의 60%) 정도로 내리는 방안이 제기되고 있는 현실에서, KDI의 경우에는 세계은행의 3축 연금체제를 근본적인 해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노령화와 이에 따른 공적연금의 재정 적자 문제가 아무리 객관적인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것이 곧 공적연금을 축소하고 사적연금을 도입할 이유가 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사적인 연금 체계가 늘어나는 노인 인구의 소득을 안정적으로 보장해줄 수 있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사적인 연금체계는 공적연금의 재정 불안정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개개인의 책임으로 떠넘기고, 공적인 책임을 해소하겠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노후는 전적으로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한 사회에서 노인의 비중이 늘어나면 그에 따른 부담 비용이 증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그 증가한 비용을 어떻게 충당할 것인가의 문제가 진지하게 논의되는 것이 당연한 순서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현재 추세가 되고 있는 사적 연금화는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오랜 기간동안 중단 없이 노인들에게 연금을 지급해 온 정부의 체제보다 자본의 필요와 입맛에 따라 극심한 변동성을 보이는 금융시장에 맡겨진 연금기금이 더욱 안정적이라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사적연금화가 이상적인 연금개혁의 방향성이라 주장한다면, 그 의도는 다른 곳에 있는 것이다. 이 문제는 사적 연금화가 과연 누구의 이해관계에 복무하는가를 살펴보면 명확해진다.
다음으로 연금체계가 가지는 경제적 효과에 관한 논의이다. 사적연금화를 주장하는 자들은 기존의 공적연금은 경제성장을 저해하는 반면, 적립식 확정기여형 연금체계는 경제성장을 촉진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1997년에 제출된 세계은행의 한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은행이 제안한 3축 연금체계 중 2축이라 할 수 있는 사적 관리의 적립식 확정기여형은 기존의 체계의 단점을 다음과 같이 극복할 수 있다. 우선 확정'갹출'형은 조기퇴직을 막고 자동적으로 퇴직연령을 높여주게 된다. 그리고 적립방식은 기존 부과방식이 연금 초기에 비용이 은폐된 채 미래로 이전됨으로써 이후 막대한 재정부담을 초래하는데 반해, 처음부터 미래의 조세(사회보장세 등)증가를 막고 현실적인 연금운용을 가능케 한다. 덧붙여 장기적인 국민저축을 형성하고, 저축을 통해 생산성을 높일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사적으로 관리되는 것이 중요한데, 그 이유는 정부는 자본을 가장 잘 분배할 수 있는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80년대 공적으로 관리되던 연금기금 대부분이 적자였는데, 이는 대부분의 공적 관리자들이 몰락하는 국유기업의 정부채권에 연금기금을 투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적으로 관리되는 연금기금은 높은 수익률을 위해 공채, 사채, 증권, 부동산 등에 포트폴리오가 가능하다.(James, 1997a, 1997b)
그러나 사적연금이 경제성장을 촉진할 것이라는 가설에 대한 실증적 연구의 결과는 분분한 상황이며, 각 국의 자본시장 발달 정도에 따라 상황은 매우 달라질 수 있다. 그럼에도 경제성장 효과를 말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의 진실이 있다면, 그것은 부과방식의 연금을 적립식으로 전환하는 것은 거대한 투자기금을 조성하여 자본시장에 든든한 버팀목을 세워준다는 것이며, 다양한 포트폴리오를 구성하는 연금기금의 경쟁적 투자활동은 금융시장을 매우 심화시킨다는 점이다. 즉, 적립식 확정기여형 연금이 실제 연금 수령자들과 노동자들의 삶을 향상시키는 경제성장(금융세계화 국면에서 이러한 경제성장 자체가 있을 수 있는지가 의문이다.)을 가져오는가는 매우 불분명하지만, 자본의 입장에서 보면 새롭고도 거대한 자금의 원천이 생길 뿐만 아니라, 금융시장을 발달시킬 수 있는 동력을 형성한다는 면에서 아주 커다란 이익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남미의 연금개혁

사적연금화가 가장 많이 진행되었다고 알려져 있는 남미의 연금개혁 과정과 그 결과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 과정은 연금개혁을 주장하는 논리가 연금 자체의 문제를 넘어선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맥락 속에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사적연금화를 주장하는 자들이 약속했던 '더 나은 연금, 더욱 안정적인 노후 소득'이 과연 실현되었는지 또한 알 수 있다.

남미대륙의 연금개혁을 선도한 것은 칠레였다. 칠레는 1981년 피노체트 정권 하에서 연금개혁을 실시했고, 뒤이어 남미의 여러 나라가 칠레와 유사한 제도를 채택하는 개혁을 실시했다. 연금 체제의 개혁은 국가 예산뿐만 아니라 연금 개혁으로 이익을 본 사람과 손해를 본 사람들의 정치적 행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이런 이유로 연금개혁은 매우 논쟁적인 문제가 되며, 따라서 선진국들에서는 기존의 연금 체계를 심각하게 개혁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1980년대 이전에는 남미에서도 연금개혁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1990년대에 남미 대륙에서 연금개혁이 널리 퍼지게 된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혁의 배후에 있는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맥락을 이해해야만 한다. 1980년대 남미의 연금체계가 노령화, 실질임금 하락 등의 심각한 문제에 직면해있었지만, 연금개혁이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동기로 추진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오히려 남미의 연금개혁은 외채위기의 결과로 남미 정부들이 추진했던 구조조정 프로그램에 있어서 핵심적인 부분이었으며, 국제적인 금융기관들의 지시에 충실히 따른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연금개혁에 대한 국제기관들의 압력이 남미에 비해 훨씬 덜한 선진국들은 다른 형태의 개혁들을 선택할 수 있는 조건이라는 점과 비교하면, 그 의미가 더욱 두드러진다.
1970년대 말에 남미 국가들의 연금체계는 수많은 문제점들을 드러냈고, 이러한 문제점들은 1980년대 경제위기를 맞으면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우선 남미 국가들의 연금제도가 보여주었던 특혜적 성격이 문제가 되었다. 특정 부문의 노동자들과 공무원들에게 높은 연금을 지급해왔던 기존 연금제도는 높은 사회적 지출과 다른 연금수령자들의 손해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정부는 종종 연금기여금의 부족분을 재정 적자를 통해 보존하려 했고, 이것은 부채를 늘리는 결과를 낳아 인플레가 높았던 시기에 연금의 재정건정성이 심각하게 위기를 맞이했다. 이러한 상황은 외채위기와 그에 따른 불황의 국면에서 더욱 악화되었다. 공식부문의 고용이 감소했고, 연금기여금을 납부하는 노동자의 수도 급격히 감소했다. 게다가 실질임금의 감소와 함께 연금기여금의 실질가치 또한 하락했다. 인플레이션은 기존 연금체계의 원칙과 급여의 실질가치를 혼란에 빠뜨렸다. 덧붙여 구조조정 프로그램에 집중된 무역자유화 조치들은 고용주들이 사회보장에 대한 기여 비용을 부담하기 어렵게 만들었으며, 이에 따라 고용주들은 정치적 압박을 이용하여 자신들에게 부과된 규제들을 줄이기 시작했다. 이 모든 요소들이 혼합되어, '연금체계의 위기'라는 관념을 만들어냈다.
'연금체계의 위기'를 극복하는 대안은 사적연금화였다. 신자유주의적 개혁론자들과 국제적 금융기관들은 다른 어떤 처방보다 사적연금화를 선호했다. 그들은 사적연금화가 연금체계의 재정적 생존능력을 보장하고, 연금체계를 좀 더 효율적으로 만들며, 기여와 급여 사이에 좀 더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자본시장의 발달을 촉진하기 때문에 다른 형태의 개혁에 비해 월등하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에 따라 강제적이고, 완전히 적립되며, 사적으로 운영되는 개인계정의 연금 체계가 남미 국가들의 연금개혁의 방향성으로 제시되었다. 물론 이런 형태의 연금개혁을 반대하는 노조들과 연금가입자들, 그리고 정당들이 있었고, 이들과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주장하는 분파들 사이의 정치적 역학관계에 따라 구체적인 연금형태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연금개혁을 주장했던 자들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연금개혁이 가져다줄 것으로 예상되었던 중장기적인 효과들이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사적연금이 보상범위를 확대할 것이라는 약속, 사적연금이 경제성장에 기여할 것이라는 약속, 공적연금의 과다한 관리비용을 해소할 수 있다는 약속은 실현되지 않았다. 사적연금은 노후소득 보장을 철저히 개인의 문제로 만들면서 오히려 저소득층 등을 보상범위에서 제외시키는 효과를 나았다. 게다가 경제성장을 둘러싼 평가는 분분하지만, 결국 이를 통해 노동자 민중들의 삶이 나아지는 경제성장을 이루었느냐는 관점에 서면, 답은 명확해진다. 그리고 사적연금은 가입자를 유치하기 위한 과도한 경쟁과 개인계정을 관리하는데 있어서 광고 및 관리 비용이 엄청나게 증가하여 공적연금의 관리비용을 초과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덧붙여 사적연금은 집합적인 사회보장체계를 해소하고,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과정에서 사회적 연대를 파괴시켰고, 소득 재분배 문제를 고려하지 않았다.
결국 남미는 외채위기 등의 복합적인 상황 속에서 각 국가들의 사회적 필요와 합의와는 무관하게 강제적이고 완전적립식의 확정기여형 연금체계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남미의 엘리트들과 초민족적 자본들 사이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면이 있었음은 자명하다.


연금개혁의 효과

우선 현 시기 금융의 팽창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의 세계화가 노동자들의 조건을 어떻게 악화시키고 있는지 살펴보자. 금융세계화는 전통적인 복지국가의 통화정책 및 재정정책의 기반을 붕괴시킴으로써 더 이상 고용 중심적인 정책추진을 불가능하게 한다. 더불어 금융의 팽창은 자본파괴를 수반하는 구조조정을 통해 실업과 소득불평등을 야기하며, 불안정한 노동 층을 양산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적연금을 도입하는 것은 금융자본에게는 거대한 시장이 창출되는 것이지만 저임금 노동자들의 노령급여의 불안정성은 심화된다. 이것은 계속적인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악순환에 대응하는 노동자들의 상황은 매우 분열적이고, 모순적이다. 자본의 금융화에 따라 노동계급 다수는 금융시장에 자산을 투입하게 되고(사적연금의 도입은 연금가입자 모두가 금융시장에 투자하는 자신의 계좌를 가지는 것이다.), 그 양은 계속 증가하게 된다. 이로 인해 그들은 종종 생산부문에서 자신의 이해관계와 금융시장에서의 이해관계가 분열되는 경험을 겪는다. 금융시장은 주주가치의 극대화라는 이름으로 생산과 고용의 파괴를 동반하는 구조조정 추진을 촉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재산과 노후보장의 더 많은 부분을 금융시장에 의존하기 때문에 금융시장을 수호하고, 나아가 금융시장의 규율에 맞춰 효율적인 기업통치, 즉 현장 노동자들에 대한 강도 높은 착취에 기반을 두어 수익률을 높일 것을 요구하게 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진다.
그러나 이렇게 금융시장에 투자할 자산을 가지고 있는 노동자들의 수도 점점 줄어들고 있는 추세인데, 이는 신자유주의가 추진하는 노동의 유연화, 불안정 노동의 확대에 기인한다. 늘어가는 저임금의 불안정 노동 층은 사적 연금체계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는데, 이들은 기업연금의 혜택을 받을 수도 없고, 개인연금에 가입할 만큼의 여유 재산도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노후는 알아서 책임져야 하는 사적연금 체계에서 노후보장의 안정성은 판돈의 크기에 따라 천차만별인데, 저소득 불안정 노동 층은 갹출금의 액수도 적을 뿐더러, 직장 및 소득이 불안정하기에 이마저 안정적으로 납부할 수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사적연금체계는 연금을 운용하는 기준이 철저하게 시장의 법칙에 따르기 때문에 저소득층에 대한 보장성 문제 및 소득 재분배 효과는 사적연금의 가장 큰 취약점이다. 일례로 사적연금들은 여성의 평균수명이 길다는 이유로 여성에 대한 연금지급액수를 낮춘다. 이렇게 보았을 때, 사적연금은 저임금 여성노동자들에게 최악의 상황을 가져다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노동자민중들의 삶과 연대에 커다란 악영향을 미치는 연금개혁은 누구의 이익에 복무하는 것인가? 우선 연금개혁론자들이 이야기하는 자본시장 발달의 측면을 짚어보자. 적립식의 사적연금은 적게는 임금의 2%에서 많게는 10%에 이르는 보험료를 강제로 금융기관에 적립하게 만드는 것이므로, 국내외 자본시장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자금원이 된다. 연기금의 금융시장 투입은 자연스럽게 자본시장의 급작스러운 팽창을 가져온다. 미국의 경우 1990년대 장기호황의 기반에는 연기금의 안정적인 자금공급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나라가 적립식 확정갹출형 연금을 통해 자본시장의 발달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미국은 자본시장의 인프라가 충분히 발달해있는 나라였으며, 주식시장 및 금융시장의 전 세계 핵심을 차지하는 나라라는 조건이 있다. 남미를 비롯한 제3세계 국가들의 경우, 연기금의 자본시장 투자가 기대했던 자본시장 발달과 경제성장을 가져다주진 못했다. 연금개혁을 통해 자본시장 확대를 꾀하며, 금융의 팽창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려했던 남미의 많은 나라들이 90년대 말과 2000년대에 들어서 또 다시 경제위기를 경험하고 있는 상황은 이를 잘 보여준다. 물론 이들 국가에서 연금의 사적 전환이 자본시장의 심화를 가져온 것은 사실이지만, 자본시장 심화는 경제성장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개방되고 자유화된 자본시장으로의 변모 속에서 국내 경제의 불안정성을 가중시키고, 구조조정 정책의 엄격하고 실행을 강제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그러나 현 시기 자본주의의 일반적 위기를 금융의 팽창을 통해 지연시키려는 초민족적 자본들에게 사적연금의 도입은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초민족적 자본들에게 선진국의 자본시장의 발달뿐만 아니라, 제3세계 및 신흥시장의 자본시장이 활성화되는 것은 아주 긍정적인 것이며, 더불어 자신들의 팽창을 지속하기 위해 사활적인 것이다. 결국 세계은행을 비롯한 많은 논자들이 안정적인 노후소득보장, 경제 성장, 세대간의 갈등 완화 등의 온갖 미사여구로 치장하는 연금개혁이 가장 필요한 것은 초민족적 자본 분파다. 2000년대 들어서 보이고 있는 세계경제의 불황의 조짐은 사적연금을 주장하는 논지의 허구성을 또 한 번 보여주었다. 자본시장이 가장 발달한 미국에서조차도 지난 2년 반 동안 주식시장 하락으로 인해 미국의 은퇴자들이 준비해놓은 자금 중 6780억 달러가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월스트리트 저널, 2002년 9월 9일) 적립식의 사적연금이 다양한 포트폴리오 투자를 통해 높은 수익률을 높일 수 있다는 가정은 전혀 사실 무근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1990년대 거대한 연기금의 형성과 자본시장에의 투자를 통해 미국이 보여주었던 호황과 높은 수익률은 극히 예외적인 현상이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하지만 자본의 입장에서는 계속해서 자본시장을 지탱해줄 원천이 필요한데, 아직까지 개혁되지 않은 수많은 국가들의 연기금이 그 대상이 되고 있는 상황이다.

세계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연금개혁이 노동자민중의 생계와 노후소득에 가하는 공격이 더욱 가시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남한도 예외일 수 없으며, 이미 연금개혁을 위한 이데올로기 공세는 진행되고 있다. 기존의 공적연금을 더욱 노동자민중의 이해에 걸맞은 방향으로 재편하기 위한 우리의 논의와 투쟁도 시급히 준비되어야 할 것이다. PSSP





<참고자료>
송원근, 2002, 「미국 연기금의 주식투자 현황과 함의」, 『미국자본주의 해부』, 풀빛
주은선, 2001, 「세계의 공적연금 민영화의 쟁점과 동향」, 『사회복지와 노동』 제3호 2001년 가을
Huber, Evelyne and John D. Stephens, 2000, 「The Political Economy of Pension Reform: Latin America in Comparative perspective」, Geneva, Switxerland, United Nations Research Institue for Social Development
Minns, R. 2001, 『The Cold War in Welfare Stock Market versus Pensions』, Verso
James E. 1997a, "New System for Old Security - Theory, Practice and Empirical Evidence", World Bank Policy Research Working Papers, No. 1766
1997b, "Pension Reform: Is There An Efficiency - Equity Trade-off?", World Bank Policy Research Working Papers, No. 1767
주제어
경제 민중생존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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