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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3.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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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농성, 그 끝은 어디에? -18일간의 글리벡 농성을 돌이켜보며

조영민 | 민중의료연합 공공의약센터
그들은 왜, 국가인권위로 향하게 되었나

2001년, 처음 글리벡(Gleevec; imatinib mesylate)이란 약물이 문제가 되기 시작한 지도 벌써 2년이 다 되어 간다. '만성골수성백혈병'이란 희귀한 질환을 고치는 (그 이후에 더 많은 암에도 "무척" 효과적임이 밝혀지고 있음) 획기적 신약인 글리벡. 그러나, 지나치게 높게 책정된 약가, 과도한 본인 부담금, 한계가 많은 보험적용 등의 문제가 산적해 있었고, 이에 만성골수성백혈병 환자와 '글리벡 문제 해결과 의약품 공공성 확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글리벡 공대위)'는 그간 글리벡 관련 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정부 및 노바티스를 상대로 싸움을 벌여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2003년 1월 21일. 올해 들어 처음 열린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에서 글리벡의 보험 약가가 23,045원으로 결정되었다. 이와 함께, 며칠 후인 2월 1일부터 결정된 보험약가가 적용된다는 말과 함께, 본인부담금 인하와 노바티스의 환자부담분 10% 지원이란 달콤한 말이 덧붙여졌다. 하지만, 2002년 한차례 정부가 17,862원이란 고시가를 노바티스에게 권고한 바 있음에 비교해 볼 때 정부는 애초의 입장조차 견지하지 못하는, 다국적 제약회사의 이윤을 보장해 주며 오히려 후퇴한 모습을 보여준 것에 불과하다. 또한, 노바티스의 무책임한 공급중단을 겪으며 글리벡을 무상공급받고 있던 대다수의 만성골수성백혈병 환자들은, 2월 1일부터 당장 글리벡의 살인적인 약가를 몸소 감내해 가며, '죽음이냐, 비싼 약값을 내느냐' 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이에 따라, '보험이 적용이 되지 않을' '만성골수성백혈병의 초기(만성기)' 환자들의 경우, 당장 한달에 최소 276만원(4캅셀 기준), 최대 553만원(8캅셀 기준)을 내게 된 것이다. 환자들은, 1년여 전 글리벡의 인권침해부분에 대해 진정을 접수하였던 국가인권위원회에, 이번에는 '글리벡 약가 인하/보험적용확대/본인부담금인하'를 내걸고 농성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

농성을 진행하던 중 정부 보도자료에 따른 추가조치(보험적용 만성기/GIST까지 확대, 본인 부담 인하 확인 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상태다. 한 캅셀당 23,045원, 한 달에 553만원에 달할 수 있는 비싼 약값의 문제에 대해선, 정부 측은 일절 논의의 대상으로 삼지 말 것을 종용하였다. 수많은 과학자와 개발자의 연구 및 기여, 세금혜택에 의해 글리벡은 비로소 개발될 수 있었다. 한편 전세계적으로 극소수의 사람이 걸리는 병임에도, 그 질환에 대한 약물인 글리벡으로 인해 노바티스사는 1조 440억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수입을 뽑아냈다. 정부는 이렇듯 이미 신약개발비용을 회수하고도 엄청난 돈을 벌고 있는 노바티스의 모습을 보고도, 약을 먹어야 할 환자와, 보험재정의 큰 몫을 차지하는 민중 두 주체에게서 등을 돌리고 '공개적으로' 노바티스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문제는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약가가 결정되고 난 후, 약국에서는 글리벡이 워낙 고가이므로, 취급이 어렵다는 점을 내세워 환자가 약을 구하는 일이 하늘의 별따기가 되어가고 있다. 환자에게는 높은 약값, 약국에게는 취급곤란한 애물단지가 된 글리벡은, 이렇듯 높은 약가로 인해 필요한 곳에 약이 공급되기 힘든 상황을 만들고 있다.
높은 약가 고수의 비밀 - 특허

어떻게, 노바티스사는 정부를 상대로 완강하게, 1캅셀당 23,045원이라는 가격 정책을 (거의) 그대로 고수할 수 있었을까. 높은 약값의 비밀은 바로 특허다. 즉, 만성골수성백혈병을 획기적으로 낫게 할 수 있는 약물인 글리벡에 대해 노바티스사는 독점적 권한인 특허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무역기구(WTO;World Trade Organization) 산하 무역관련지적재산권협정(TRIPs; Agreement on Trade-Related respects of Intellectual Property)에 의해, 우리나라 역시 WTO 회원국과 동일한 수준의 지적재산권 보장을 요구받고 있다. 단적으로 서술하자면, 특허라는 지적재산권을 가진 노바티스사가 전세계적으로 고가의 글리벡 약값을 요구할 때, 남한 정부가 단독으로 이를 무시하고 비교적 싼 약값을 정하면, WTO는 다른 방법, 즉 무역보복조치 등을 통해 실력행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허제도 내의 보완섹터-강제실시

다행히도, 특허라는 제도의 과도한 독점성을 경계하여, 특허 본래의 취지인 '개발자에 대한 보상과 공공의 이익에 기여'를 넘어선 일들이 벌어질 때, 이를 보완할 수 있는 장치로 '강제실시(Compulsory Licensing)'라는 것이 존재한다. 이는 TRIPs 제 31조, 국내 특허법 제 107조에도 명기되어 있는 권리다. 2002년 1월 30일,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평등사회를 위한 민중의료연합, 인도주의실천을 위한 의사협의회 3단체는 글리벡에 대한 강제실시를 청구하였다. 이는, 특허권자의 특허실시허락이 없이도 특허를 실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음을 가리킨다. 즉, 글리벡의 경우 노바티스사의 허락 없이도 글리벡과 동일한 성분의 의약품을 제조하여 싼값으로 공급할 수 있게끔 되는 것이다. 단, 이러한 강제실시권은 엄격한 발동요건을 가지고 있다. '공공의' '비상업적'이라는 최소한의 요건을 만족하여야 하고, 특허권자에게 정당한 보수(로열티)를 지급하여야 한다. 우리가 강제실시에 주목하는 이유는, 특허권자에 의해 남용될 수 있는 권리 중 특히 우리의 생명과 연관된, '의약품'이라는 상품에 대해 직접적으로는 약을 먹게 되는 환자, 보다 보편적으로는 민중이 자율권,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약을 반드시 먹어야 하는 환자의 목숨을 담보로, 자신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무소불위의 권력인 특허권으로 약을 쥐락펴락하는 현실은 한편, 최대한의 이윤을 뽑아내기 위해 노동의 현장에서 가차없이 노동자를 밀어내는 천박한 자본주의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하다.

인도에서 희망의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18일간의 농성이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 인도에서 기쁜 소식이 들어왔다. 바로 인도의 '낫코(Natco)'라는 제약회사에서, '비낫(Veenat)'이라는 글리벡의 카피약이 시판되었다는 소식이 그것이다. 비록, 일부에선 비낫이 과연 글리벡과 동일한 약인지, 특허법 위반이 아닌지 우려의 목소리가 있긴 하나, 이는 올바른 문제제기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비낫은 FT-IB, HPLC, MS분석을 통해 글리벡과 동일함이 입증되었으며, 비낫을 제조한 인도라는 국가는 전세계적으로 제약산업이 발달한 국가이며, 엄연히 특허가 존재하는 국가라는 점이다. 인도에서의 특허에 대해 부연하자면, 인도에는 '물질 특허'는 존재하되, '방법특허'가 존재하지 않아서, 특정 물질에 대해 특허가 걸려 있어도 다른 방법을 써서 그 물질을 만들면 특허에 위배되지 않는다. 이 비낫은 한국에는 2달러로 공급하기로 약가가 결정되었으며, 이후 5~6개의 다른 인도제약사에서도 연이어 1000원 미만의 글리벡 카피약을 시판할 예정에 있다. 인도의 '비낫'은 이미 인도의 13개 정도의 병원에서 의사들이 처방하여 환자들이 약을 복용하고 있는 상황이다.

환자 생존의 문제이자 자본에 맞선 요구로

지난 2월 10일, 18일간의 국가인권위 농성을 마치며, 애시당초 내걸었던 세 가지 문제 중 두 가지는 상당부분 해결되었다. 즉, 만성기까지 보험적용 확대, 20%로 본인부담금 인하라는 부분이 그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발목을 잡는 근본적이고도, 실제 환자의 약품 접근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게 될 약가라는 부분은 미해결이다. 비록 국가인권위 농성은 끝이 났으나, 약가인하/강제실시허여투쟁은 계속될 것이다. 또한, 이미 가시화되고 있는 환자들이 인도의 저렴한 글리벡 카피약 '비낫'을 먹는 직수입 과정 역시 강제실시가 허여되기 이전의 대안으로 활발하게 진행될 것이다. 약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약을 못 먹는 현실은 한편으로는 제약회사의 문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위기에 몰린 자본이 환자의 호주머니에서 돈을 앗아가 환자의 생명과 인권을 짓밟는 과정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지속적인 실천을 통해 연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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