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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3.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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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전쟁'을 둘러싼 편향

장진범 | 편집부장
암운: 두 개의 전쟁
이라크는 누군가의 말처럼 '자정(子正) 직전'이다. 미국의 전폭기들은 2월 10일에 이어 11일, 이라크 남부 바스라 인근의 이라크군 지대공미사일 발사대를 레이저유도폭탄 등으로 타격했다. 같은 날 `인간 방패'를 자원한 14명의 미국인·유럽인 들이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에 도착했고, 전 남아공 대통령 만델라도 참여를 고려하고 있다고 알려지고 있다. 한편 지난 10일 김석수 총리는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이라크전 파병을 사전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개전의 초읽기 작업들….
동시에 한반도에도 전운이 감돌고 있다. 지난 11일 콜린 파월 미국 국무장관은 상원 예산위원회의 청문회에 출석해 미 고위관리로서는 최초로 북한에 대한 핵사용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또한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12일 밤(한국시간) 오스트리아 빈에서 특별이사회를 열고 북핵 문제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부를 결정했다. 현재의 사태 전개를 보면서 한국전쟁 이후 전쟁가능성이 가장 높았다는 94년 전쟁위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까. 더구나 당시 해결책으로 제시되었던 제네바 협의가 파기되었고 여러 조건을 고려해볼 때 이런 협정으로는 현재의 위기를 봉합할 수 없다는 점에서, 상황은 결코 낙관적이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의 강한 의미에서 '두 개의 전쟁' 가능성과 대면하고 있다. '이라크 공격 반대·한반도 전쟁 위협 반대'를 기치로 15일 열리는 '국제 공동 반전 평화 대행진'이 어느 때보다 긴급한 의의를 갖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12일 현재 세계 354개 도시에서 예정되어 있는 이번 집회는, 앞으로 전개될 반미-반전 운동의 기본적인 침로를 상당 부분 규정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어떤 원칙 하에 이 집회 및 앞으로의 투쟁을 조직·개입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특히 한반도에 있는 우리로서는 더욱, 우회할 수 없다.
몇 가지 전제조건들. 우선 당면 목표는 (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 '평화 일반'이 아니라, 이라크와 한반도의 전쟁 발발을 막는 것이다. 이는 즉각 아주 구체적인 인식을 요구한다. 이라크 전쟁위기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가? 마찬가지로, 한반도 전쟁위기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가? 이를 사고하고 그것에 적합하게 행동할 수 없다면, 너무 당연하기 때문에 무력하기까지 한 '평화'를 외치는 것에 머물 뿐임을 우선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한편 '반미 對 반전(또는 평화)'이라는, 너무나 부당하지만 일정하게 대중화된 대립구도가, 지난 촛불시위를 거치면서 형성되었음을 간과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이번 2·15 평화대행진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도 작동했으며, 심지어 앞으로 투쟁에 대해서도 악영향을 미칠 소지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부당한 대립이 허구에 불과하다고 치부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다. 이런 구도가 형성되게 된 조건들을 적극적으로 제거해야만 위의 목표가 대중적으로 공유될 수 있다.

반미 없는 반전(평화)은 불가능하다
잘라 말하자. 반미 없는 반전(평화)은 불가능하다. 전쟁이 도덕적 문제가 아니고 구조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인 한, 더구나 현재 문제가 되는 전쟁이 미국에 의한 이른바 '예방전쟁'인 한 말이다. 만일 현재의 상황이 19세기말 20세기 초에 있었던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전쟁과 유사하다면, 특정한 민족국가를 주되게 비판하는 것이 부적합했을 수 있다. 또 20세기 중반 에 구축된 미국과 소련 양극 간의 (핵에 의한) '절멸전'이었다면, 기본적으로 미국에 주된 책임이 있었다 하더라도, 또한 양상이 좀 달랐을 수 있다. 하지만 소련이 붕괴하면서 미국이 세계 권력에의 지배적인 개입을 누리고 있는데다 금융적 세계화로부터 배제되고 버려진 민중들의 고통과 증오가 넘쳐나는 상황에서, 미국이 후자의 잠재적 대항폭력(그들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비대칭적 전쟁')을 두려워하면서 '예방폭력', 더 이상 전통적인 의미에서 분명한 목적도 심지어 끝도 없는 전쟁을 막 개시하고 있는 지금이라면, 미국 스스로 선과 악이라는 (기독교적 혹은 어쨌거나 종교적인) 근본주의 담론을 재도입함으로써 자신들이 증오해 마지않는 이슬람 근본주의를 포함하여 각종 극단적 이데올로기가 번창할 수 있는 토양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는 지금이라면, 해당 국가의 모든 문제를 일종의 '적그리스도' 최근 뉴스위크지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Dr. Evil이라 이름붙임으로써 곧 무저갱(無底坑)으로 쫓겨날 후세인을 대체할 새로운 악마 후보생을 만들어 냈다! 에게 전가함으로써 해당 국가의 구조적 모순 및 그것에 대한 자신들의 책임을 체계적으로 회피하고 오히려 민중들의 삶을 더욱 악화시키는 지금이라면, 반미 없이 반전(평화)은 불가능하다. 특히 이라크와 북한의 전쟁위기를 막는 것은 불가능한데, 알다시피 이들은 바로 '깡패국가', 즉 미국이 비대칭적 전쟁의 잠재적 행위자로 자의적으로 간주하고 예방전쟁을 통해 아예 절멸시키려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미국을 어떻게 비판할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비판의 방식은 훨씬 더 숙고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현재 이라크 전을 지지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세력은 (그 지지도가 주목할 만큼 떨어지긴 하지만) 미국의 '민중들'이라는 점이다. 9·11 사건 이후 미국 사람들은 안전(security)과 관련한 심각한 공포에 시달리고 있으며, 바로 이 명분과 공포에 기반을 두어 미국의 지배계급들은 한편으로 (테러방지법과 MD로 상징되는) '요새화'로, 다른 편으로는 예방전쟁에 나설 수 있는 것이다. 특히 테러방지법의 경우 시민권의 심각한 축소를 포함하고 있는데, 이는 현재 미국 사람들이 공포로 인해 스스로의 권리의 파괴에 (주로는 수동적으로) 동의하는, 일종의 도착상태에 빠져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므로 안전이라는 쟁점에 대한 적합한 대응책 및 미국 사람들의 공포를 완화시킬 수 있는 종별적 입장 없이 공허한 '평화주의'를 외친다거나, 미국에 대한 '증오'(물론 그 이유는 충분하지만)를 퍼붓는 것은, 전쟁위기를 막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거나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다.
미국이 내세우고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명분은 이라크 민중들의 '인권' 및 '민주정부'의 수립이다. 확실히 배제된 국가들의 민중들의 상태는 끔찍한데, 앞서 살펴보았듯 미국의 지배계급들은 이를 해당국가의 지배계급 탓으로 돌리면서 그들의 대체를 통해 민중들의 상태를 개선할 수 있음을 주장함으로써 전쟁에 대한 동의를 형성하고 있다. 이것은 물론 기만적인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나름의 입장 없이 역시 평화와 증오를 읊조리는 것은 유효하지 않다.
관련하여 우리는 두 가지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우선 미국의 지배계급들이 내세우는 명분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명분이 허구적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통해 사태가 더욱 악화되고 명분이 목표한 것과 정반대의 결과가 초래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며, 이를 공세적으로 제기해야 한다. 안전에 대한 위협은 요새화와 예방전쟁으로 방지될 수 없고, 사실 9·11의 진정한 교훈은 바로 그것임을 재확인해야 한다. 배제된 이들의 고통과 증오를 적합하게 해결하지 않는 한 9·11은 항상-다시 돌아올 것이다. 또한 미국의 지배계급이 '민주정부'의 수립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자국과 초민족적 기업의 이익에 부합할 수 있도록 오히려 국가를 해체하고 있으며, 분쟁지역의 정치적 권리를 오히려 파괴함으로써 그/녀들의 인권을 파괴할 뿐임을 제기해야 한다. 더욱 문제는 이러한 개입의 전제로서 해당 지역 민중들이 스스로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을 결여하고 있다는 오만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라크뿐만 아니라 가깝게는 아프간 전쟁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모든 분쟁지역의 문제는 해당 지역의 몇몇 지배계급을 교체하거나 압박을 가할 수단을 개발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인민은 오직 자신의 힘으로만 자신을 해방할 수 있을 뿐이다.' 분쟁지역의 민중들 자신이 지배계급을 통제할 수 있는 역량을 확대하는 것이 관건이며, 그렇지 않은 모든 오만한 개입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세계적 결정에 대한 지역적 결정의 우위를 주장한다
거듭 강조하지만 요컨대 전쟁을 막는 길은 오직 '미국에 대한 적합한 비판' 뿐이다. 관련하여 우리가 집중적으로 쟁점화해야 할 것이 있는데, 즉 모든 분쟁에 접근할 때 '세계적'(global) 결정보다는 '지역적'(local) 결정에 대해 체계적인 우위를 부여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실재적 분쟁은, 비록 세계적 조건에 의해 규정되긴 하지만, 일차적으로 지역적 갈등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인데, 세계적 결정은 분쟁의 원인을 외면한 채 (갈등의 결과로서) 현상적 분쟁만을 섣불리 억압하려 든다. 더구나 앞서 살펴보았듯 이것이 미국 중심의 패권전략에 의해 좌지우지되며, 해당 분쟁 지역의 민중들의 문제해결능력이 사실상 결여되어 있다는 전제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키기 일쑤다.
이런 식의 접근법이 갖는 폐해는 굳이 멀리 가지 않더라도 아프간 전쟁에서 보인 미국의 행태, 더 가깝게는 북핵 문제를 둘러싼 갈등에서 보이는 미국의 행태에서 여실히 발견된다. 제네바 협정을 무력화시킨 주체가 미국이며 이에 대한 책임 역시 미국 자신이면서도, 더 나아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정치적·군사적 위협을 통해 세계경제질서에서 북을 체계적으로 배제하고 있는 주체가 미국 자신이면서도, 미국은 이런 문제를 도외시 한 채 그저, '북한이 핵을 개발하려 하고 있고, 이것은 미국의 안보에 위협이다'는 식의 주장만 반복하고 있다. 이것이 다른 분쟁지역과 동일하게 북미간의 긴장고조에 대한 미국 사람들의 정치적 비판 능력을 무력화시키고 있는 것도 문제지만, 더 심각한 것은 이것이 해당지역에 살고 있으며, 정치적 주체인 한국 사람들조차 동일하게 한반도 전쟁위기를 진지하게 고민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미국의 군사적·정치적 위협을 기각하는 단순한 상황인식은 전쟁에 대한 한반도 민중들의 정치적 권리를 박탈하는데, 문제는 이것을 미국이 되레 자신의 정치적·군사적 개입을 정당하게 하는 근거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와 동반하는 미국의 갖가지 조치들이 한반도의 갈등을 증폭시키면서 전운을 드리울 것임은 자명하지 않은가?
모든 분쟁지역에 대한 미국의 접근이 다 이런 식이고, 예외 없이 파국적인 결과만을 초래해 왔다. 우리가 지역적 결정, 즉 분쟁을 유발한 구체적 갈등 요소를 인식하고 그것을 당사자들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식의 접근법에 우위를 부여하자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물론 이것이 사태를 고립적으로 접근하자는 것은 아니다. 세계적 결정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분쟁 당사자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효한 조건을 구축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그것 없이 섣불리 현상을 제거하는 것으로 일관한다면, 해당 분쟁 지역은 물론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에도 크나큰 재앙이 닥쳐올 것이며, 우리는 이것을 소리 높여 발언해야 한다. 이라크 민중을, 그리고 물론 우리 자신을 전쟁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말이다.

전국민중연대(준)를 중심으로 반미-반전투쟁을 조직하자!
이상에서 우리는 반미 對 반전(평화)의 부적합한 대립구도를 지양하는 몇 가지 원칙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담론적인 수준이 아니라, 구체적인 투쟁의 방식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따라서 이와 관련한 언급 역시 필요하다.
일각에서 반전(평화)은 우리의 문제와 얼마간 동떨어진 것이므로, 한반도의 구체적인 사안으로 국한되는 반미에 보다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견해는 이라크 전을 막아내는 것이 오직 적합한 미국 비판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말의 강한 의미에서 직접적으로, 한반도 전쟁위기를 해결하는 데 있어 관건적 문제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사실 이런 견해의 이면에는 '설마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겠느냐'는 식의 낙관적 견해가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한반도 위기의 열쇠는 미국이 쥐고 있는 바, 이라크 전을 정당화하는 근거들이 (또 다른 '깡패국가'로서) 북한에 대해서도 정확히 동일한 방식으로 적용될 수 있다는 것, 더구나 이라크전이 실제로 발발한 후에는 더욱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더구나 구체적 사안과 (하나의 정치적 기치로서) 반미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촛불시위를 거치면서, 미선이·효순이의 죽음에 대한 분노가 정부와 언론의 개입에 의해 '등미(等美)'라는 희대의 말장난으로 변형될 수 있음을 우리는 뼈저리게 체험하지 않았던가? 더욱 중요한 것은 많은 대중들이 이것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위 현재의 '반미정서'를 낙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지극히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미국을 둘러싼 대중들의 관념은 단지 이제 막 동요하기 시작했을 뿐이며, 아직까지 자유주의에 의해 크게 규정받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필요한 것은 그 어느 때보다 '무기의 비판'이다. 즉 SOFA 개정이나 이라크전, 혹은 미국과 관련한 구체적 사안 속에서 더욱 민중적이고 적합한 방식으로 미국을 비판할 수 있는 세력을 형성함으로써, 미국에 대한 대중들의 동요를 급진적으로 영유할 수 있는 실천이 관건이란 말이다. 그랬을 때 현재 가장 문제가 되는 실천 방식은 (정치적 기치로서의 의미가 희석된 채) 사안으로 환원된 반미, 반미 및 민중적 비판과 부당 대립된 반전을 중심으로 별도의 캠페인을 조직하려는 경향이다. 우리는 이것의 부적합성을 위에서 누차 지적했거니와, 더구나 이런 식의 접근이 (노동자)민중/시민, 또한 민중운동/NGO운동의 부당대립을 재도입한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다. 엄격히 말해 독립된 '반미운동'이나 '평화운동'이란 없다. 그런 정치적 기치를 받아들인 노동자운동, 여성운동, 학생운동과 같은 대중운동이 있을 뿐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현재 각종 대중운동들의 상설적 공투체로서 전국민중연대(준)가 반미-반전(평화)운동의 선두에 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만이 우리를 전쟁으로부터, 그리고 이 지긋지긋한 정치적 무기력으로부터 구원할 것이다. PSSP
주제어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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