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3.3.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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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하는 신주류, 그들은 누구인가

김예니 | 편집부장
누가 386을 말하는가
중앙일보를 읽다보면 '기획'지면이 눈길을 끈다. 제목도 선정적인데 '운동권, 신주류로 뜬다.'가 제목이다. 그 기사를 잠깐 살펴보면 70년대 운동권을 1세대로, 80년대 초반을 2세대, 80년대 후반을 3세대로 분류하고 각 시대별로 그들이 어떤 운동을 했으며 현재 어떻게 변했는지를 추적한다. 핵심은 한 때 사회변혁을 위해 일신을 돌보지 않던 그들이 현재 노무현정권을 탄생시킨 공신들이고 인수위원회에 적극 참여하고 있으며 이 밖에도 과격한 변혁노선에서 탈피하여 온건한 시민운동, NGO운동을 하면서 사회의 신주류로 부상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과연 그들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 운동권 출신이 정계에 많이 진출했으니 노무현 정권도 진보적일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운동을 포기한 배신자로 낙인을 찍어버리는 것이 다반사인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기준들은 이들의 본질을 밝히는데 올바른 출발일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신주류가 된 운동권, 그들은 누구인가.
언제부턴가 386세대라는 말이 보편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386이란 어느새 87년 대투쟁을 이끌었던 운동권이라는 뜻이 되었고 그들은 군사독재에 맞서 저항했던 공통의 경험을 가진 세대로 지칭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소위 그들이 가지고 있는 386세대라는 동일성이 타당한가 하는 것이다. 그 구성을 면밀히 살펴야할 것인데 군사독재에 항거하면서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했던 이들과 386세대를 등치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80년대가 지금과는 많이 달랐겠지만 그때도 운동권과 비운동권의 논리가 있었고 그 당시에도 과격한 학생들의 투쟁에 대한 비판(화염병으로 상징되는 투쟁)이 제도언론에 의해 일고 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모두가 함께 한 목소리로 그 투쟁을 경험한 것도 아니고 비단 20대만이(그 당시의 대학생으로 표상 되는 그들) 그 투쟁을 경험한 것도 아닌데 유독 386세대는 87년의 투쟁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그를 중심으로 스스로의 세대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는가. 그 시점은 97년이라는 것을 확연히 알 수 있다. 97년은 정권교체라는 DJ정권의 화려한 등장과 IMF로 표상 되는 외환위기가 있었던 해다. DJ정권의 등장은 그 동안 남한사회 내의 재벌개혁과 기업지배구조 개혁에 대한 새로운 동인을 대중적으로 형성하면서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강력한 동의지반을 형성했다. 바로 이 시점을 계기로 386세대는 다만 그 시절의 젊은이를 지칭하는 시사용어를 뛰어넘어 386이데올로기가 되어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여기서 '신주류를 386이라는 이름의 세대로 비판하는 것이 합당한가'는 이론(異論)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재 신주류가 386이라는 세대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하기에 이에 대한 비판이 필요하다. 이는 오히려 80년대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최종적 결과로 하여 현재 그들의 조건과 상황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다만, 그들을 운동의 배신자, 주류로 흡수된 변절자로 비판하는 순간 더 이상 신주류의 등장이 왜 이루어졌고 노무현 정권이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게 된다. 오히려 질문을 다음과 같이 바꿔야한다. 386이데올로기가 왜 형성되었고 이에 대해 누가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있는가. 그리고 386이데올로기가 어떤 효과를 낳고 있는가.

386이데올로기의 등장, 그리고 진실
신자유주의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던 맥락과 NGO의 등장은 386이데올로기 형성의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한국의 경우, 6.25 이후 남북의 이념적 대립, 나아가 국제적 냉전체제로 인해 단 한번도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정책적 논쟁이 이루어진 적이 없다. 반공만이 미국에 의한 지원을 보장받는 길이었고 발전만이 남한체제의 정당성을 회복해줄 수 있는 근거였기에 한국사회의 보수주의 즉, 군부독재는 이에 대항하는 모든 대중운동을 억압하였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단 한번도 '자유주의 세력'이 하나의 집단적 정치세력으로 형성된 적이 없다. 하지만 1987년을 전후로 폭발한 민주화 운동은 여러 가지 면에서 복합적인 성격을 띠었다. 부분적으로 전두환 정권이후부터 재벌세력들을 중심으로 이른바, '시장세력'을 지원하는 정책들이 추진되었고 동시에 스스로를 '중산층'(사실 어느 누구도 중산층에 대한 객관적 기준을 제시하지는 못한다.)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의 사회적 불만은 '자유화'에 대한 요구로 수렴되었다. 최소한의 합리성과 자유민주주의적 절차에 대한 요구들이 존재했던 것이다. 1987년 이후의 사정은 누구나 알다시피 자유주의 세력과 민중운동진영이 분화되는 역사였다. 자유주의 세력은 의회 내 자유주의세력과 민중운동 내부의 급진자유주의세력 사이에서 끊임없이 분화되는 과정을 겪어왔다. 하지만 1991년을 기점으로 민중운동으로 독자정립한 변혁운동은 급속하게 해체되기 시작한다. 바로 이 상황에서 이른바 '문민정부'의 출현 이후 수구와 개혁의 대립을 핵심으로 한, 자유주의 세력의 재결집이 시작된다. 이 때 386세대를 개혁적 자유주의세력으로 규정해내면서 자신들의 지지기반을 구축해냈고, 그에 걸 맞는 모호한 합리성과 개혁성, 실용성 등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창조해냈다. 이렇게 볼 때, 한국사회에서 NGO가 등장하고 활성화된 것은 바로 YS와 DJ정권을 계기로, 자유주의 세력이 정치적으로 자기세력을 형성한 과정과 맞물려 있다. 바로 NGO란 시민의 이름으로 대중을 동원하는 역할에 주력하면서 국가운영에 참여하는 적극적인 역할을 자임하는 세력인 것이고 자유주의라는 대의 하에 '참여와 공생'을 이루겠다는 것이다. 이른바 '시민사회의 파수꾼'으로서 시민운동은 가치중립적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민중운동의 자유주의화, 탈계급화, 부르주아적 시민화'를 지향하는 가치함축적인 표현이다. 바로 386이데올로기를 조장하는 한 세력으로 기술 관료적인 NGO들이 결국 DJ의 계승자로 노무현을 적극 지지하는 데에는 재벌개혁, 기업내부 지배구조의 개혁 등으로 표현되는 미국식 법인모델의 합리성에 대한 이상(理想)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들의 역할이란 대중들의 갈등을 조직하기보다는 그 갈등을 시민사회로 내면화하여 갈등의 조정을 자처하는 식으로 정부의 정책자문 역할을 하게 된다. 현재 많은 NGO들이 노무현의 인수위원회에 정책적으로 상당수 결합하여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차원의 문제이며 결코 이를 진보의 척도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그들이 주장하는 386의 진보성이란 87년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그친 '좌절된 운동'의 결과 위에 놓여 있는 것이기에 그들이 인식하는 현실이란 당연히 누구나 자신의 견해와 이익을 공개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시대가 도래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오히려 이에 저항하는 기득권세력들을 제거하는 것이며 이번 대선에서 그들이 보인 행보는 이를 반증하고 있다.

물론 386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스스로의 정당성을 획득하려는 분야가 비단 NGO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이것은 금융과 IT산업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다. 남한의 증시부양은 'IT혁명', '벤처창업'이라는 바람을 탔고, '지식산업', '고부가가치산업'육성이라는 김대중정권의 전략은 386이데올로기와 만나게 된다. 벤처-금융업의 확대는 이른바 '386세대'를 일종의 '비즈니스네트워크'로 전환시켰다. 386의 노무현지지 토대는 바로 이 지점이다. 386은 DJ의 정책개혁, 신자유주의 정책을 이어나갈 것을 지지했고 이를 계승하여 보완할 사람으로 노무현에게 지지를 보냈다. 대개의 386세대는 물질적 성장을 경험하였고(80년대 말 삼저호황) 그들에게 진보란 미국처럼 잘 사는 것, 미국식 생활양식과 소비문화의 확대, 그리고 미국식 법인모델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들의 자유주의적 경향은 김대중의 신자유주의 정책과 맞아떨어졌고 노무현은 그들의 이권(이제는 기득권이 되어버린)을 지켜줄 수 있는 적임자였던 것이다. 물론 386이데올로기는 비단 몇몇 정보통신기술자나 벤처사업가, 금융업 종사자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었다. 이들이 파생한 효과는 바로 벤처산업이 기존 경영조직과 관행의 일반적인 대안이라는 관념을 낳았고 기업 내부의 권위주의적 '지배구조'와 고루한 기득권에 대한 불만과 갈등을 유발했다. 바로 이런 점이 문화적인 동질성을 형성하면서 다른 집단에 비해 386세대라는 동일성을 형성, 상대적으로 강한 결속력을 갖게 하였다. 이런 면에서 386은 무척 정치적인 집단일 수밖에 없다. 사실 이 안에서 금융화의 수혜를 입고 있는 자들은 소수에 불과하지만 386이데올로기 하에 움직이고 있는 세력들은 사실 이런 흐름에 동승하고 있기에 신자유주의 정책의 수혜자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들이 '순수'한 열망과 과거에 대한 향수로 '순수'하게 모여 노무현을 지지했다고 말하지만, 이는 금융화된 초민족적 법인기업(TNC)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조응하는 매력적인 투자처로의 변화를 동의하는 것이었다. 때로는 향수 어린 포크송(운동가요)를 부르면서 스스로를 386 동일성으로 표상하지만 이미 그 안에 있는 것은 진보가 아닌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적극적인 지지자가 되어버린 '신주류'일 따름이다.

이런 면은 예술가와 지식인이 어떻게 DJ정권 하에 제도권 내로 흡수되는지를 살펴보면 잘 드러난다. 80년을 경험한 젊은이들은 대개 유학을 다녀오고 이 유학지식층은 문화예술 산업에 포진하거나 남한사회의 비판적 지식인으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게 된다.
문화예술운동의 경우, 91-92년 계투패배로 인해 자신의 발전방향을 모색하지 못하고 있던 중에 DJ정권을 만나게 된다. 이전의 정권이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을 거의 하지 않았다면, 김대중 정권은 상대적으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문제는 문화예술운동이 정부의 지원을 받은 것에 머물지 않았다. 지금까지 스스로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하기 위해 몸부림쳤던 문화예술운동의 독자적인 역량이 그 스스로 더 이상 운동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고 예술의 사회비판의 역할은 적극적으로 체제 내로 흡수되었다는 것이다.
문화예술운동의 경우, 개량의 토대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영화산업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은 다만 예술이 아닌 예술의 산업화, 금융화를 동반하면서 민중예술의 대중화 기치를 들고 민중예술과 대중예술을 고의적으로 혼돈에 빠뜨린다. 그래서 결국 80년대 말부터 문화예술인들의 논쟁은 표현의 자유로 집중되고 그들의 억압에 대한 저항은 '표현의 자유'아래 포르노로 흐르는가 하면, 이제는 문화예술운동을 운동의 형태로 찾는다는 것이 어려워진 상황이다. 이것은 개혁적 지식인으로 자처하는 학자들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단적인 예로 언제나 과거 정권 말기에 비판의 목소리를 서슴지 않았던 지식인들은 DJ정권 말기 침묵했다. 고부가가치 산업의 핵심으로 소위 개혁적 지식인을 중심으로 한 정부의 지원은 그들로 하여금 사회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거세하면서 기껏해야 정책조언 수준을 지켜줄 것을 요구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있다면 학술진흥협의회다. 현재 이들은 노무현 정권의 인수위원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고 주류로의 빠른 편승을 판단한 것이다.

신주류가 된 386을 비판한다
이처럼 NGO, 벤처, IT산업/금융업, 문화예술/학계와 같은 분야에서 386이데올로기는 발언되고 있었다. 미국 신경제에 대한 환상은 금융시장부양을 중심정책으로 한 IT/BT 관련 벤쳐 사업의 집중육성으로 복사되었다. 또한 DJ정권은 고부가가치산업(지식산업)을 통해 비판적 지식인과 예술가들에 대한 지지/지원을 확대했다. 이는 DJ정권으로서는 서비스시장개방에 따른 문화시장개방을 앞두고 예술 산업의 육성과 예술가들의 제도화를 이뤄낸 일거양득인 셈이었다.
현재 노무현 정권을 준비하는 인수위원회의 대부분은 과거 운동권 출신으로 정치력에 대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이는 선거과정에서 대중들에게 선전하고 대중을 동원하는 능력에서부터 그 실력을 입증 받고 있다. 소위 386이 노무현 정권 탄생의 일등공신이라는 점인데 그들은 때론 진보적인 듯한 발언을 조직하기도 하고, 때론 이상주의에 대한 현실적 대안으로 설득력을 갖기도 하면서 합리적인 세력으로 스스로를 표상했다. 하지만 그들의 '진보'를 되돌아보면 그것은 386세대로 동일성을 강조하고 과거 87년 민주항쟁을 팔아 자신을 정당화하면서 대중적으로는 대투쟁의 향수로 스스로의 진보성을 드러낼 뿐이다.
아니, 오히려 더욱 적극적인 의미에서 그들의 이념은 진보는커녕 과거퇴행적인 관념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민주주의는 87년 대투쟁에 머물러 있을 뿐이고 따라서 91-92년 대중운동의 실패, 계급투쟁의 패배는 그들로 하여금 유학을 길을 떠나게 하거나 새로운 대안, 자유주의적 전망에 자신의 변혁전망을 가두는 상황을 연출하게 된 것이다.
결국 386은 신문지상에서 떠드는 것처럼 신주류임에 확실하다. 그것은 다만 변혁노선의 포기에 따른 주류로의 편입이라는 의미를 뛰어넘는다. 이미 386으로 대표되는 세대가 주류가 될 수 있는 사회문화적 토대가 바뀌었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남한사회가 자본유치형 국가로 변모하면서 금융을 중심으로 하는 이해관계에 우선순위가 결정되었음을 의미한다. 바로 이 실질적인 수혜자가 바로 현재 신주류로 부상하는 386이데올로기를 유포하는 자, 386세대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토대란 노무현의 지지세력이 상호 이질적인 것처럼 아직은 불안하다. 그들의 취약성이란 바로 자본유치형의 한국경제의 앞날, 그리고 노무현에 대한 지지의 철회에 따른 불안과 같은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 분절적인 관념들은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는 중이다. 우리가 386이데올로기의 본질을 알려고 하는 이유도 노무현 정권의 등장과 함께 합리화되는 새로운 수탈-착취구조에 대한 비판의 각을 예리하게 하기 위함이다. 지난 대선 당시 노동운동 내에서의 술렁임을 되돌아보자. IMF 이후 현상유지에 대한 요구는 잠재된 현실주의적 지지로 귀결되었다. 오히려 문제는 IMF 이후 스스로의 급진성을 잃어버린 민중운동의 무능력함이지 않을까. 노무현정권의 출범은 우리에게 자유주의와의 투쟁, 그리고 상징화된 진보와의 대결을 요구한다. 오늘날 신주류는 바로 91-92년 사회주의권 몰락 이후, 운동에 대한 전망을 밝히지 못하면서 대중투쟁을 포기하고 사민주의적 전략이나 신자유주의로 투항한 것이다.PS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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