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3.4.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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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철학에세이_최원.hwp

비극: 테러, 이라크, 미국

최원 | 회원, 미국 뉴스쿨대학 철학 박사과정
제 1막: 모하메드 아타(Mohammed Atta)

아타는 이집트의 한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수재였던 그는 카이로에서 건축학교를 마친 후 독일 함부르크로 유학을 가서 도시계획을 공부할 수 있었다. 그는 1995년 '이슬람 도시' 카이로를 관광지로 전환하려는 이집트 정부의 도시계획에 관한 연구를 위해 독일정부로부터 보조금을 지원 받고 다른 두 동료 학생들(독일인)과 함께 이집트로 돌아왔는데, 거기서 그는 그의 인생을 바꿔놓은 경험을 하게 된다. 당시 이집트 정부는 도시계획을 위해 많은 사람들을 거리에서 내쫓고, 양파와 마늘 상인들을 근절시키고, 문자 그대로 그들을 대신해서 문화적 풍모를 갖춘 시민을 연기할 배우들을 데려와 거리를 꾸미려 했다. 아타와 그의 동료들은 이에 거부감을 느껴 이집트 정부에 항의했지만 정부 관료들은 이러한 그들의 반대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게다가 아타는 모든 것이 세습되는 족벌주의가 만연한 그곳에서 졸업 후에 자신이 원하는 직장을 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에 절망했다. 당시 이집트는 자신의 경제가 처리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수의 고학력자를 배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카이로에서 연구를 계속할수록 아타는 정부에 대해 더욱 비판적이 되어갔다. 그는 정부의 계획이 유서 깊은 카이로를 이슬람식 디즈니랜드로 만들려는 것이며 이는 이집트 정부가 미국과 동맹관계를 맺으려는 데서 생긴 일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2001년 9월 11일, 그는 비행기를 몰고 세계무역센터를 향해 돌진해 들어간다. 그로 인해 3000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세계는 경악했다.
그것은 비극(tragedy)이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 정작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아타가 이집트에 돌아갔을 때 가졌던,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던 경험의 예외적인 성격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의 지독한 진부함이다. 제 3세계 혹은 '주변'에 속한 국가에서라면 어디서나 발견될 수 있을 만한 흔한 일―정부에 의한 도시빈민촌의 철거, 노점상 탄압, 실업자 양산 등의 문제들―을 겪고 그가 '테러리스트'가 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물론 나는 그것들이 '심각한' 사회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아니, 정확히 문제는 그것들이 심각한 '사회' 문제라는 점에 있다. 그가 '사회적' 운동과 결합하여 자신의 문제의식을 풀어나가는 대신 '반-사회적인' 테러리스트가 되었다는 결론만 제외한다면 마치 운동권 청년의 자기 고백을 듣는 듯 귀에 익은 아타의 뒷 이야기에는 따라서 무언가 설명되지 않은 것이 있다.
1952년 군주제를 전복시키고 정권을 잡은 낫세르(Gamal Abdel-Nasser)의 지도 하에서 이집트는 진보적인 아랍 민족주의의 유례없는 부흥을 경험했다. 과거 군주제 하에서는 2차 대전 이후 급성장한 이슬람 근본주의 운동―무슬림 형제단(50만 회원)―이 위세를 떨치고 있었는데, 낫세르는 집권 후 이들을 주변화시키는 데에 완전히 성공했던 것이다. 낫세르에 대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암살기도가 있은 후 그들에 대한 탄압이 심해졌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사정을 바꾼 것은 낫세르의 개혁정책이 가졌던 급진성이었다. 1956년 외국에 넘어가 있던 수웨즈 운하 소유권의 회복과 그에 이은 이스라엘-프랑스-영국 삼자 동맹의 이집트에 대한 공격은 오히려 낫세르를 제 3세계 해방 운동의 영웅으로 만들었다. 그는 토지를 재분배하고 외국 소유의 산업들을 차례로 되찾아옴으로써 이집트인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을 수 있었고 교육 체계의 민주적 개혁을 통해서 이집트를 진보의 길로 안내했다. 이 모든 것들이 이집트 내의 이슬람 근본주의를 약화시켰고, 더 나아가 아랍 및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에서 다양한 민족주의 운동들을 고무시킬 수 있었다.
한 편 친미적인 사우디 아라비아는 그 당시 정치·군사적 권력을 쥐고 있던 사우드 왕가와 종교적 권력을 쥐고 있던 와하비족 사이의 뿌리깊은 분쟁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이집트에서 일어난 민족주의 운동의 부흥과 5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이집트-소련의 동맹 형성이 이들의 협력을 강제했다. 이때부터 반민족주의적이고 반공주의적인 와하비족의 이슬람 근본주의가 사우디 아라비아의 지배이데올로기로 자리잡는다. "아랍 냉전"이라고 불리는 친미-사우디와 친소-이집트 사이의 이러한 대결은 1962년에 절정을 맞이한다. 이집트는 반제국주의적 아랍민족주의와 결합된 "사회주의"를 선언하게 되고, 그 반대편에서 사우디 아라비아는 무슬림 세계연맹(Muslim World League)을 창설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미국 CIA의 지원을 받아 활동했던 무슬림 세계연맹의 목표가 민족주의, 공산주의에 대항하여 반동적 이슬람주의를 선동하는 것에 있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결정적으로 힘의 균형이 무너진 것은 67년 이스라엘이 거둔 6일 전쟁에서의 승리를 기점으로 해서였는데, 이 사건은 아랍권의 이슬람 근본주의에 불을 지름으로써 사우디 아라비아의 입지를 획기적으로 강화시켜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1979년 호메이니에 의해 주도된 이란 혁명이 상황을 복잡하게 만든다. 호메이니의 이슬람 근본주의는 반공주의적인 사우디의 그것과 구별되는 반서구적 성격을 갖고 있었고, 그것은 세력이 약화된 이집트의 반-제국주의를 우익적으로 전위된 형태 하에서 다시 취하는 것이었다. 이란 혁명과 동시에 발발한 소련의 아프간 침공이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지형의 변화를 완전히 굳혀버린 것은 당연했다. 아프간전에서 사우디와 이란은 누가 더 급진적인가라는 근본주의 경쟁에 연루되었고, 이러한 경쟁은 그 양자를 서로 대립시키면서도 끊임없이 닮아가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내가 적보다 더 급진적이기 위해서는 적이 가지고 있는 것을 내가 이미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논리가 작동했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과정의 배후에 소련을 의식한 미국의 다양한 지원이 있었다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미국은 반-서구적 이슬람 근본주의의 창궐에 대해 이중적인 책임이 있다. 그들은 이슬람 근본주의를 직접적으로 지원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아랍권 내의 좌파적 운동 및 민족주의 운동을 붕괴시킴으로써 이슬람 근본주의 이외의 그 어떤 이데올로기적인 대안도 가질 수 없는 상황으로 대중들을 몰아넣었던 것이다. 사회적인 모순과 적대를 해결하지 않고 투쟁하는 진보적인 사회운동세력들만을 파괴했을 때, 불만은 전위된 다른 경로를 통해 스스로를 표현할 수밖에 없게 된다. 왜냐하면 억압된 것은 반드시 돌아오게 마련이며, 그것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일그러지고 왜곡된 병리학적인 형태로 복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불쌍한 '아타'가 잔혹한 테러리스트 '아타'로 변하게 된 것도 이렇게 설명될 수 있다. 진보적인 운동세력의 총체적인 부재라는 상황 속에서 전망을 찾을 길 없는 그의 분노가 반서구적 이슬람 근본주의에 자신을 결합시켰던 것은 거의 자연적인 필연성을 갖는 과정이었다.

제 2막: 크레온

테바이의 궁전 앞으로 이스메네를 불러낸 안티고네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방금 왕[크레온]께서 테바이에 선포하셨다고 하는 새로운 포고는 무엇이냐? … 우리 친구들이 우리 원수가 될 운명이라는 것을 너에게는 감추더냐? … [전쟁에서 죽은 두 오빠 가운데] 에테오클레스 오빠는 바르고 법도에 맞는 정당한 의식으로 땅에 묻어 저 세상에서 고인들과 함께 영광을 누리게 한다는 거야. 그러나 폴류네이케스 오빠의 불쌍한 시체는 거리에 내놓고 매장도 못 하게 하고 조상도 금지한다는 소문이야."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의 서두에 나오는 이 몇몇 구절들 속에서 우리는 이미 무한한 테마(혹은 차라리 무한히 다르게 반복될 수 있는 테마)를 만난다. 전쟁, 통일된 삶(united life)의 파괴, 국가와 가족 간 갈등의 출현, 공동체 내부의 소속들의 경합, 즉 '전쟁의 내전으로의 전화'라는 일련의 테마를 말이다. 헤겔이 『정신현상학』의 '진정한' 출발점(현실 역사의 출발점)에 위치시켜 분석했고, 레닌이 그의 눈앞에서 전개되던 제국주의 전쟁의 성격을 분석하고자 활용했던 이 테마는 바로 '비극'의 테마였다. 그러나 비극은 '운명의 인과율'을 통해서만 비극이 될 수 있다. 폴류네이케스 오빠의 시신을 땅에 묻으려고 한 안티고네에게서 국가의 "정당한" 권위에 대항한 반-사회적 개인의 이미지만을 본 크레온이 주변의 모든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동굴 속에 산채로 '매장'하려고 했을 때, 그가 보지 못하고 있던 것은 정확히 안티고네의 존재가 자신의 외부가 아닌 내부라는 점이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아들 하이몬의 약혼녀인 안티고네를 죽이면서 그것이 역으로 자신의 존재에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은 채 깨끗이 사라져 주리라고 크레온이 믿을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자신의 정당함만을 보게 되는 의식의 맹목성에 지배되는 내란(소속들의 경합)의 상황 속에 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이몬이 안티고네와 함께 자살하고 이어 자신의 아내 에우류디케가 자살한 것을 전해 들은 크레온은 이렇게 울부짖는다. "아, 이 죄는 도저히 다른 사람한테 전가할 수 없는 것이구나! 내가, 그렇다, 내가 죽였다."
비극 혹은 운명의 인과율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것과는 달리 타자와 동일자의 차이가 언제나 '내적인 차이'라는 점이다. 양자의 존재는 단순하게 분리될 수 없으며, 그들이 각각 가지고 있는 동일성이란 과정으로서 차이화(differentiation)가 가져오는 상대적인 결과일 뿐이다. 그렇다면, 자기자신과 내적인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 타자에게 해를 가하는 행위가 곧 자신을 파괴하는 행위로 드러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타자의 존재가 억압될 수는 있다고 할지라도 파괴될 수는 없으며 다시 돌아와 동일자의 뒷덜미를 잡아채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자기와 분리 가능하다고 믿었던 타인의 존재('주체'란 이러한 착각을 우리가 이름짓는 하나의 방식일 것이다)가 사실은 동일자 자신의 내부를 항상 이미 구성하고 있는 상황에서 투쟁하고 있는 당사자들이 비극적인 파국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그들이 모종의 상호 인정(mutual recognition)에 도달함으로써 일방성 없는 시민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경우뿐이다. 발리바르는 최근에 쓴 자신의 글 「유럽: 사라지는 중재자」에서 이렇게 말한다. "비극의 교훈 … 그것은 "내전"에 관련된다 … 장기 20세기의 "유럽적 내전"으로부터 하나의 교훈이 도출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떠한 "절대적 승리"도 불가능하며, "적(敵)"에 대한 어떠한 최종적 억압이나 중화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언제든 "최종적" 해결책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순간 당신은 더 많은 파괴와 자기-파괴의 조건들을 창출한다. 그러한 상호절멸에는 "끝"이 없다. 아니, 차라리 이렇게 말하자. 그것은 오직 그 상호절멸의 적법성이 근본적으로 제거될 때, 그리고 제도화된 집단적 대항-권력들이 나타날 때에만 끝날 수 있다고."

제 3막: 어떤 이름 모를 요르단 남자

냉전 이후 미국은 지구상의 유일한 헤게모니 국가로 독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미국은 오래지 않아 이를 제국적 지배의 야심으로 전환시켰다. 중동에 대한 미국의 전략은 1990년대 중반부터 패러다임의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다. 클린턴 정권 하에서 제출된 1996년 Joint Vision 2010과 1997년 4년차 국방 보고서에 등장한 이러한 변화는 '방어'(defense) 개념을 대신하여 (사실상 지배(domination)의 완곡 어법인) US의 '우세'(dominance) 개념을 자신의 군사전략 목표로 설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에 따라 적에 대한 '저지'(deterrence) 개념의 의미 자체가 변하는데, 과거에는 적들의 행동(acting)을 막는 것이 과제였다면, 이제 적들을 반응(reacting)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과제가 된다. 바꿔 말해서, 미국이 자의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면서 거기에 대한 '반응'으로 나오는 적들의 저항을 분쇄시키는 방향으로 군사정책이 이동한 것이다.
2001년 9·11 테러공격이 발발한지 며칠 후 미 국방장관 도널드 럼스펠드에 의해 제출된 4년차 국방 보고서는 이러한 US의 '비대칭적 우세'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식별된 적들의 실제적인 위협에 기반한 대응전략(threat-based-strategy) 대신 가설적인 적들의 잠재적 군사 역량에 기반한 대응전략(capabilities-based-strategy)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방 전쟁" 및 "선제 공격" 개념을 정당화하기 시작하는 이러한 계획은 따라서 (테러리즘과 같은) '비대칭전'에 대한 허점을 커버하기 위해 기존의 군사·외교 정책들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강화하는 방향을 취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다윗의 작은 돌멩이를 걱정한 골리앗은 이제 자신의 미련한 덩치를 보다 더 크게 만들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군사정책 상의 변화는 1999년이래 나타난 기하급수적인 국방비의 증가로 이어진다. 현재 부시 행정부는 2002년-2003년 회계연도에 3790억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국방비를 책정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미국을 제외한 나머지 15개 강대국의 국방비를 모두 합친 금액과 맞먹고 EU 및 NATO의 회원국들의 국방비를 전부 합친 것의 두 배가 넘는다. 한 마디로 미국은 현재 제국으로 전환 중이다. 그리고 이러한 제국으로의 전환은 경제적인 측면이 아닌 군사적인 측면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는 어느 정도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초민족적인 금융자본에 의해 주도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속에서 경제적인 수단을 통해 하나의 민족국가가 제국으로 전환한다는 구상은 앞뒤가 안 맞는 것이기 때문이다.
2001년 9월 11일 세계무역센터 테러는 이러한 미국의 제국으로의 전환에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으며, 미국은 아프간 침공을 필두로 "끝없는" "테러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2003년 3월 20일 마침내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한다. UN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유례없는 전 세계 시민들의 반전의사 표명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결국 이라크를 침공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그들이 석유에 눈이 멀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많은 전쟁의 비판가들은 이라크 침략전쟁의 목적이 단지 석유에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는 사태를 너무 단순화시키는 것일 수 있다. 석유는 탐나는 훌륭한 전리품임에 분명하지만, 미국이 그 모든 국제사회의 법들을 명시적으로 어기고 모든 반대를 무릅쓴 채 침략전쟁을 감행할 수 있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도덕적으로 정당화시킬 수 있는 이데올로기를 반드시 지니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우익적인 인사들은 기만으로 가득 차 있고 그들이 내뱉는 말들은 언제나 다른 속내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습관에 젖어있지만, 사실 나는 이것이 하나의 함정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배 이데올로기는 무엇보다도 지배계급 스스로가 믿을 수 있는 이데올로기여야 한다. 근본적으로 우익적 인사들도 자신의 올바름을 신실하게 믿고 있지 않다면 그들은 끝까지 일관된 행동을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말로 무서운 것은 그들이 그것을 철저하게 곧이곧대로 믿고 있다는 사실이며, 자신의 정당성만을 바라보려는 의식의 맹목성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라크 침공 사흘째가 되던 날 미국의 ABC방송은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떤 요르단 남자와 가졌던 인터뷰를 방영했다. 미국 코네티컷의 한 대학에서 엔지니어링을 공부하고 귀국한 그는 이슬람 근본주의와는 아무 관련도 없을 뿐 아니라 미국식 생활 방식에 충분히 노출되어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인터뷰에서 매우 격앙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지금 나는 엄청나게 화가 나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기 전에 TV를 통해 9·11 테러를 보면서 어떻게 저런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나는 나 자신이 그러한 테러리즘을 저지르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역사의 행위자들은 종종 너무 늦게 비극의 교훈을 깨닫는다.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는 크레온 왕에게 거듭해서 안티고네를 용서해줄 것을 권유하다 마침내 이렇게 말하고 돌아선다. "왕께서는 저의 화를 돋우었기 때문에 노한 나머지 저는 왕의 심장을 겨냥하고 궁수처럼 화살을, 그 아픔을 피할 길 없는 빗나가지 않는 화살을 쏘았습니다." 크레온은 그제서야 자신의 결심을 바꾸면서, "운명과 공연한 싸움을 벌여서는 안되지"라고 말하고 안티고네가 갇혀 있는 동굴 쪽을 향해 달려간다. 이미 당겨진 화살이 자신의 심장을 향해 시시각각 날아오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오직 자신의 아들의 주검을 발견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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