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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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3.4.34호

또 다시 아내의 생일을 앞둔 감옥의 봄날에

박용진 | 회원, 민주노동당 강북을 지구당 위원장
제국주의의 공격소식이 들려온 날, 이란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 핫산은 하루종일 어눌한 한국말로 '가슴 아파요'와 '부시 나쁜 사람이예요'를 반복했다. 같은 사동의 한국인 재소자들은 그의 하소연을 마주하게 되면 '능숙한 한국어'로 '부시 개새끼야!'라는 맞장구를 쳐주며 그를 위로했다. 바로 옆 스탠리 미군기지에서 하루 종일 긴장된 미군헬기의 이착륙 굉음이 들려오는 의정부 교도소. 적어도 이곳에서는 한국과 아랍의 반제국주의 기층민중 국제연대가 공고해진 셈인가. 감옥에 갇힌 사람마저도 느끼는 전쟁과 학살의 잔인한 기운이 가을햇살 같이 좋은 초봄 하늘을 씁쓸하게 한다. 갇힌 사람 환장하게 무슨 날씨는 이토록 좋은지.

양심수 석방에 대한 이야기가 간간이 흘러나오고 있지만 이 달 말일이면 어느새 구속되어 징역살이 시작한지 딱 2년이 된다. 너무 바쁘다는 핑계로 못 봤던 책 읽는 것에서 위로를 받으려 했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고 갇힌 세월이 쌓여 갈수록 오히려 감을 놓치고 날카로움을 잃어간다는 불안함이 커졌다. 아내에게 한탄하듯 써 보낸 적도 있지만 내 징역살이는 참 어중간하다. 무엇하나 내보란 듯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투쟁을 하고 징역살이를 하는 것도 아니다. 박노해처럼 새로운 화두를 집어들기엔 내 가슴속 칼이 여전히 시퍼런 날을 세우고 있고 신영복처럼 삶의 밑둥을 흔드는 깨우침을 얻기엔 내 징역이 오히려 짧다. 장기수 선생들처럼 모질고 모진 신념을 세워가기에 내 의지는 또 얼마나 보잘 것 없는가. 내 징역살이의 어중간함과 가벼움은 나를 슬프게까지 한다. 이년동안 무얼 얻었는가 돌이켜보면 손에 쥔 모래알처럼 다 빠져나가고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다행히 서른 셋의 나이지만 스무살 초반에 세운 착한 의지가 지난 두 해 동안의 힘겨움 속에서도 하나 다치지 않았고 지구당의 동지들, 지역주민들의 응원도 있어 외롭지 않았다. '동지'라기보다는 차라리 친구 같은 이들의 여전한 우정도 그렇고 결혼 여섯 달만에 홀로된 아내의 한결같이 흔들리지 않는 모습도 나에겐 웃음 잃지 않게 하는 힘이다. 그 고마운 힘들을 밑불 삼아 세상에 돌아가면 다시 세상을 들쑤시고 민중을 일으키는 봉홧불을 피워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얻은 것은 없지만 잃은 것도 없어 참 다행인 징역살이. 시작한지 두 해째 되는 날을 앞두고 돌아보니 그래도 한숨만큼 웃음도 있었고 절망에서 날 일으키는 자신감도 더 커져 있었다. 모든 이에게 고마운 일이다.

아내는 내 구속사실을 가족들에게 숨겨야 했다. 구속되고 일주일 뒤에는 아버님이 환갑기념으로 3남1녀의 우리 형제들과 조카들까지 모두 모여 가족여행을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걸 망칠 수는 없었기에 당에서 급한 출장이 있다는 핑계로, 나중에 여행지로 온다는 거짓말로 가족들을 속여야 했다. 그러고도 그 여행의 온갖 뒷 수발을 다해야했던 아내는 결혼하고 첫 이사도 혼자 해야했고 여동생 결혼식도 혼자 챙겨야 했다. 또한 온갖 집안 대소사 때마다 채 익숙하지도 않은 집안 어른들 틈바구니에서 남편 없이 혼자 고군분투했다. 결혼 전 약속한 평등한 부부관계는 이미 그렇게 아내의 일방적 희생으로 무너져 버렸다. 몸이 편찮으셔서 아직도 내 처지를 알리지 않아 사위가 당에서 보내주는 '해외유학'을 가 있는 것으로 알고 계시는 장인어른께서 명절 때마다 홀로 찾아온 딸을 보고 속상해 하신다는 말을 들을 때면 나는 아내에게 숨쉬기조차 미안할 뿐이었다. 아마 그래서였나보다. 나를 유학보낸(?) 당 지도부가 제대로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마다 내 반응이 격해졌던 것은.

앞으로 일년이 남았다. 소박하게 바라는 게 있다면 결혼하고 미처 챙겨줄 기회마저 없었던 아내의 생일과 결혼기념일을 그냥 남들처럼 같이 할 수 있었으면 하고 둘이 한번도 못 가본 동해바다를 가보는 것이다. 물론 일년 뒤에는 가능하겠지만 올해 이 바람이 이루어질 수 있었으면 더 좋겠다. 누구에게도 말못할 고단한 옥바라지에 지쳐있는 아내에게 노래하나 불러줄 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토요일은, 격주로 한번씩 한 달에 두 번 오는 아내의 면회일이다. 이번엔 지구당과 중앙당의 소식을 묻기 전에 가만 물어 봐야겠다. 당신 오는 길에 봄꽃이 피었더냐고.
그렇게 두 해 동안 계속된 우리 부부의 너무 긴 겨울에도 봄은 곧 올 거라고 다짐하면서 봄 이야기로 두 주만의 그리움을 녹여봐야겠다. 그리고 태산같은 무게를 담아 사랑한다는 말도 건네 봐야지. 봄이니까...PS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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