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3.4.34호

김동인의 근대성

초기작 두편을 중심으로

김예니 | 편집부장
[짧은 질문으로부터 시작해보자. 예술은 무엇인가. 왜 하는가. 그리고 그 안에 문학의 위치는 무엇이며 우리는 앞으로 무슨 얘기를 하려하는가.
물론 아직 나는 이 모든 질문에 대해 무릎을 탁 치며 '그렇군!'이라고 반응할만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같이 고민하고 같이 생각해보자는 이야기를 던질 따름이다. 다만, 하나 전제할 것은 역사를 통해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념(특히 고등학교 문학공부를 통해 가지고 있었던 생각들)을 한 번쯤 의심해 봤으면 한다. 우리가 중고등학교 시절 배웠던 국사와 국민윤리가 그렇듯이 우리가 알고 있는 문학사란 그에 못지 않은 당파성을 담고 있으니까.
이 연재를 통해 개인적으로는 문학사를 좀 더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단초를 마련했으면 한다. 그리고 1930년대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이에 대립했던 소위 순수문학과의 논쟁이 그랬듯이 예술에 대해 도구적 관점이냐, 예술을 위한 예술이냐의 논점은 쟁점을 왜곡시켰다. 문제를 좀 더 다르게 던져보면 어떨까. 예술을 매개로 어떻게 대중과 만날 것이며 어떤 내용으로 대중과 만날 것인가. 예술이 그 자체로 절대화되지 않으며, 그렇다고 도구로 하락하지 않기 위해 작가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고등학생 때 '고등학생이 꼭 읽어야하는 한국 단편소설'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소설가는 바로 '감자', '배따라기', '광화사', '광염소나타', '발가락이 닮았다', '붉은 산'을 쓴 김동인이다. 당시 내 눈에 비친 김동인의 소설은 놀라움이었다. '아니, 어쩌면 1920년대에 이런 글을 쓸 수 있었을까.' 당시 필독서였던 이광수의 무정을 읽고 난 다음 김동인의 '감자'를 읽게 되어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김동인 문체의 세련됨과 그의 소설에 흐르는 알 수 없는 낭만적 분위기는 이광수의 그것에 비해 단연코 월등했다. 동인의 세련된 문체와 예술가가 갖는 광기와 같은 열정, 그리고 구성의 탄탄함 등이 김동인의 천재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또한 김동인은 자비를 털어 1919년에 '창조'를 발간하였고 '순문학 건설'을 기치로 이광수의 계몽주의적 문학에 반기를 들고 나름의 예술 세계에 정진한 소설가다. 그리고 흔히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감자', '광염소나타' 등의 작품을 들어 순문학자 혹은 예술지상주의자로 평가받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실상은 좀 달랐던 것 같다. 그는 평양 갑부의 아들로 호사스럽기 이루 말할 수 없었으며 '색'을 즐겼다고 한다. 그리고 예술로만 생계를 이었다고는 하지만 총독부에 직접 찾아가 '황군'을 방문하여 위로하겠다고 간청한 일화는 생계가 파탄나고 약에 취해 심신이 피폐해지면서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달려들었던 그의 삶의 끝자락을 잘 보여준다. 그의 후기작품들이 대부분 원고료를 위한 통속소설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의 타락상을 쉽게 살펴볼 수 있다. 하지만 다만 그의 생애를 들어 그의 작품을 평가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 작품 안에 내면화되어 있는 논리, 세계관을 살펴보는 것이 더욱 중요할 것 같다.
김동인의 초기작 '약한자의 슬픔'과 '마음이 옅은 자여'를 보자. 초기작을 보는 것은 오히려 김동인의 타락이 이루어지기 전, 그의 문학의 출발부터 노정하고 있는 문제는 무엇인지 살펴보기 위함이다. 이 두 개의 소설은 당시 그가 창간한 문예동인지 창조에 실린 작품으로 1919년에 발표되었다. 일단 두 소설의 제목을 보자. 약한 자, 그리고 마음이 옅은 자...이 소설들은 근대화의 과정에 쟁점화되었던 문제들(개항기 단편서사물류의 주된 내용이 되었던 문제들), 조혼의 문제, 여성의 문제 등을 소설화하면서 당대 독자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바로 이점에서 김동인도 당대 근대화의 중요한 화두였던 계몽주의를 우회하기 힘들다.) 이는 마치 우리가 나라를 빼앗긴 것은 우리가 약한 탓이며 우리가 강해지는 것이 나라를 되찾는 길이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소설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그가 갖은 생각의 위험함은 곳곳에서 보였다. 그리고 그의 결말을 살피면 무척 모호한 아이디얼리즘으로 맺어지고 있다.
일단 '약한 자의 슬픔'을 보자.
주인공인 엘리자벳은 가정교사로 일하던 남작댁에서 남작에게 순결을 잃고 그의 정부노릇을 하다가 잉태를 하게되고 이 때문에 시골 오촌 고모네로 쫓겨난다. 이에 주인공은 소송을 제기해보지만 남작 때문에 잉태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그녀는 재판에서 진다. 그리고 그녀는 평소 바라던 유산을 하게된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된 것은 자신은 약한 자라는 것! 하지만 자신이 왜 약한지를 알기 때문에 이제는 강한 자라는 것! 그리고 진정으로 강한 자는 참사랑을 아는 자이며, 사랑 안에서 살아야 한다며 결론을 짓고 있다.
구체적인 현실의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결과는 고도의 추상으로 맺어버린 것은 결국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 오히려 보편적인 문제로 이끌어낸다면 성공적인 것이고 그렇게 하기 어렵다면 어려운 상황자체를 드러내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식의 봉합은 결국 문제의 본질을 흐리거나 전반에 드러나지 않던 작가가 불쑥 튀어나와 "그리고 왕자님과 공주님은 결혼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하는 것 같다. 왜 결혼이 행복한 결말을 보증해주는 것인지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 이전의 모든 갈등이 '그래, 사랑'으로 해결되는 것은 다소 우습기까지 하다. 그리고 정신적인 사랑과 육체적인 사랑에 대한 갈등은 '마음이 옅은 자여'에서 주인공인 K군에게도 계속 드러난다. K는 조혼한 아내에게 실망하고 교편을 잡으면서 알게 된 Y와 사귀게 되지만 Y가 어린 시절 약혼한 사람에게 시집을 가자 K는 심한 고통에 빠진다. 그러다가 고향으로 돌아왔더니 아내와 아들이 유행하던 감기에 걸려 죽은 다음이었다. 처음에는 아내를, 그리고 Y를 마음이 옅은 자라,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며 원망하다가 결국 마음이 옅은 자는 스스로임을 알고 반성한다. K는 Y와 헤어지면서 이 사랑이 육신의 사랑이냐, 정신의 사랑이냐 고민하고 아내와의 사랑이 정신의 사랑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시 돌아갈 곳은 정신의 사랑이었던 아내에게로 향한다. 하지만 이런 이분법 자체는 사랑이 무척 이상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랑이 관계 속에 자리하지 못하게 만든다. 결국 K의 이기적인 사랑이 빚어낸 불행이었던 것이다.(그가 그녀를 원할 때, 육체적으로 원했다고 해도 그 스스로를 합리화하기 위해 육체적 '사랑'이 필요한 것이고, 이는 결국 '육체'적 사랑이 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는 김동인의 근대성에 대해 물음을 던져보자. 한국 현대문학에 있어 순문학을 출발시킨 작가로서 김동인은 과연 조선의 근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던가. 조혼의 문제라던가, 여성의 문제 등을 다루면서 그가 표현하고 있는 논리라는 것이 앞서 말했던 것처럼 왜 위험성을 가지고 있는가.
린다 간디는 <포스트식민주의란 무엇인가>에서 실제 포스트식민주의는 식민지 해방이후가 아니라 식민지가 되는 그 순간부터 시작된다고 이야기하면서 문제는 해방되는 순간 정신병적 억압, 혹은 신경질적 거부를 통해 과거에 대한 기억상실이 진행되는 것이라 말했다. 그리고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작업은 "현재의 외상을 이해하기 위해 조각난 과거를 짜맞추어 보는 것, 고통스러운 다시 떠올림"이라고 역설한다. 식민지 하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많은 어려움이 동반되는 행위이며 일종의 결의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 당시 많은 문인들이 차라리 붓을 꺾은 것은 그 이유 때문이리라. 하지만 김동인은 오늘날 생계도 건강도 팽개치고 예술만을 위해 살다간 현대문학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친일행각은 무척 병적이었다. 물론 친일을 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작품이 가치 없다고 말할 생각은 전혀 없다. 개인의 삶의 행적만으로 평가할 수 없는 작품의 고유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의 작품 안에 내면화되어 있는 논리, 식민지 시대 친일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던 그의 세계관에 대한 비판이다. 당시 친일을 한 많은 문인들을 살펴보면 고뇌 끝에 변절한 사람, 역사의 희생양으로 그려지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들의 작품 속에 내면화되어 있는 그들의 세계관은 어쩌면 친일을 정당화하는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특히 식민지배자와 식민지인의 관계는 식민지배자에 의한 것이지만 그 내적으로 이에 (무의식적으로) 동의하는 식민지인이 있다는 점을 환기해 볼 때, 김동인의 작품을 새롭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즉, 약한 자와 마음이 옅은 자로 나타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김동인은 일말의 동정도 느낄 수 없도록 만든다. 그리고 오히려 문제는 그가 강해져야 하는 문제이고 강해지기 위한 방법으로는 무척 이상적인 것, 사랑이라던가, 용서 등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권력자를 닮고자 하는 식민지인의 욕망은 어느새 그들의 가치를 내면화하게 된다. 사랑과 용서를 통해 진정 강한 자가 되는 길은 사실 식민지 상태의 유지일 뿐이다. 문제는 이를 어떻게 전변시켜낼 것인가와 새로운 가치형성과 새로운 관계맺음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를 고민하는 역할이 바로 식민지 지식인에게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대 '대동아공영'에 대한 환상이 지식인들 사이에 팽배했었다는 사실(일본의 패권에 반대하더라도)은 시대와 문학의 관계를 되돌아보게 한다. PS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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