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2021 여름. 1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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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대의 미국은 어디로 나아가는가?」 독자에게

한지원 |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1. 글에서 미국의 대규모 경기부양책과 그로 인한 정부 부채가 위험할 수 있다고 전망했습니다. 또, 한국 경제는 미국 경제보다도 불안정성이 훨씬 크기 때문에 바이든의 정책에 대해 ‘미국이 했으니 우리도 하자’는 식으로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최근 현대화폐이론(MMT)을 보면, 정부 재정적자에 대해서 필자의 글과 완전히 다른 전제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노동운동 내에서도 이러한 논의를 배경으로 이런저런 요구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정부 빚을 걱정하면 종종 듣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노동운동이 그런 것까지 걱정해야 하나? 노동자의 절박한 요구를 관철하는 게 더 중요한 게 아니냐?” 저는 이런 이야기가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무엇보다 정부가 빚 문제로 곤란한 상황에 빠지면 노동자도 엄청난 고통을 겪기 때문입니다. 정부가 빚을 해결하기 위해 지출을 줄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면, 취약계층, 사회보험 지원부터, 공공부문 고용이나 투자까지 부정적 영향을 받습니다. 남부유럽이나 남미의 사례들이 대표적이죠. 

다음으로 노동자 생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정부 빚을 늘리는 것만 있는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상위 소득 계층에게 세금을 더 걷는 방법도 있고, 소득 분배를 조정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빚으로 요구를 해결하는 건, 누구도 불편하지 않은 쉬운 방법일 수는 있지만, 유일한 방법은 아닙니다. 가만히 따져보면, 정부 빚을 선호하는 주장들에는 상위 소득 계층의 기득권을 건드리지 말라는 심보가 숨어 있는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사실 현대화폐이론(MMT)은 이런 심보를 숨기는 데 효과적인 이론이기도 합니다.

본론으로 들어가 정부 빚의 성격과 그 상한선에 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먼저 용어부터 정리하면, 빚은 debt, liability로 나뉘는데, 전자를 채무, 후자를 부채로 번역을 합니다. 채무는 직접 갚아야 하는 것으로 주로 국채(국고채) 잔액을 뜻합니다. 부채는 채무에 더해 잠정적으로 갚을 의무가 있는 것을 포함하는데, 한국에서는 공공부문 노동자가 퇴직할 때 지급해야 할 연금이 핵심입니다. 다만, 연금은 일시에 지급할 일이 없으니, 일반적으로 정부 빚을 다룰 때는 부채보다는 채무가 중요합니다. 한편 이 빚의 범위가 어디까지냐도 중요한데, 일반정부와 공공부문으로 나뉩니다. 전자는 중앙과 지방의 정부만을 포함하고, 후자는 여기에 비금융공기업까지 합한 것입니다. (일반정부에는 비영리공공기관도 포함되지만, 우리가 아는 대형 공공기관은 대부분 비금융공기업입니다.) 

참고로 한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지표는 일반정부의 채무(D2)입니다. 그런데 한국은 다른 선진국과 비교해 공공사업에서 공기업이 부담하는 몫이 크고, 또 다른 나라보다 공무원 연금 부담도 큽니다. 그래서 항상 다른 OECD 국가와 정부 빚의 규모를 비교할 때 논란이 있는데요. 정부 빚의 규모가 과소 추정된다는 거죠. 일반정부 채무가 아니라 공공부문 채무(D3)나 가장 넓은 범위의 공공부문 부채로 비교하면 한국이 부채 규모가 다른 나라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더 커진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공공부문 부채는 공식 통계가 없습니다.)

정부 채무는 간단하게 말해 정부의 빚 증서인 국채 규모입니다. 국채는 원금과 이자가 정해져 있는 것이 일반적이며, 만기가 2년부터 50년까지 다양합니다. 정부는 세금으로 원금과 이자를 지급하기 때문에, 국채의 많고 적음은 당연히 정부가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 상대적으로 결정됩니다. 그래서 정부 채무는 일반적으로 국내총생산(GDP)에 대한 상대적 비율로 많고 적음을 판단하게 됩니다. 2020년 말 한국의 일반정부 채무는 GDP 대비 45%입니다. 미국의 경우 130%에 이릅니다. 그리고 OECD 평균은 110%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율은 높은 걸까요, 낮은 걸까요? 한국의 진보진영은 한국이 OECD 평균보다 한참 낮으니, 정부가 적극적으로 빚을 늘려서라도 복지 확대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MMT을 근거로 정부 빚은 어떤 경우에도 문제가 되지 않으니, 아예 정부가 재정을 통해 완전고용 책임도 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정부가 국채를 계속 발행할 수 있는지는 국채를 구매할 금융기관이 있느냐에 전적으로 달려있습니다. 정부 채무 비율의 상한선은 얼마까지 금융기관이 국채를 구매할 의향이 있느냐와 같은 이야기라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국채를 구매하는 기관은 국내 금융기관(은행, 보험사, 연기금), 외국인, 중앙은행, 이렇게 셋입니다. 국채 보유자를 국내 금융기관, 외국인, 중앙은행으로 나누어 보면 미국은 각각 50%, 30%, 20%, 일본은 각각 40%, 10%, 50%, 한국은 80%, 15%, 5%를 세 기관이 보유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특징은 외국인과 중앙은행이 막대한 국채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세계화폐인 달러를 보유하기 위해 가장 안전한 달러 금융자산인 국채를 각국 정부와 금융기관이 경쟁적으로 구매하기 때문인데요. 특히 일본, 중국은 무역수지 흑자의 상당 부분을 미국 국채를 구매하는 데 이용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달러 환류입니다. 중앙은행도 엄청난 양의 국채를 보유하고 있는데요.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정부가 위기 대응 과정에서 발행한 국채를, 비전통적 양적완화 정책에 따라 중앙은행이 화폐 발행을 통해 흡수한 결과입니다. 

일본의 특징은 중앙은행이 국채의 절반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세계금융위기 이후 일본 정부는 무지막지한 적자재정으로 경기 활성화에 나섰습니다. 처음에는 이를 국내 금융기관들이 모두 사들였는데, 후에 민간 소비 부양을 위해 일본은행이 미국보다 더한 비전통적 수량완화 정책을 사용했습니다.
한국의 경우 국채 대부분을 국내 금융기관이 보유합니다. 은행, 보험, 연기금, 증권사 순입니다. 기축통화국이 아니라 외국인이 한국 국채를 다량으로 보유할 이유가 없고, 중앙은행도 화폐 안정성 문제로 비전통적 양적완화를 사용할 수 없어서입니다. 한국은행은 자산 대부분을 외국증권(미국 국채가 핵심)으로 채워 넣는데요. 일종의 외환위기 트라우마입니다. 한번 부도가 났던 나라이다 보니, 원화 현금의 가치 대응물로서 국채가 불안합니다. 사실 원화는 달러, 엔화, 유로화, 파운드화 등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불안정한 화폐이죠. 이들 나라처럼 중앙은행이 과감한 양적완화 정책을 쓸 수 없는 이유입니다.

미국에서는 2020~21년 코로나19 대응 과정에서 천문학적으로 국가 채무가 증가했습니다. 국채를 사들인 핵심은 중앙은행이었습니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 당시에는 중앙은행과 함께 외국인이 핵심 역할을 했었습니다. 이번에는 외국인이 빠졌습니다. 선진국 모두가 코로나19에 타격을 입어 미국에 투자할 여력이 감소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바이든은 추가 경기부양책과 대규모 정부 투자 계획을 밝혔습니다. 백신 접종으로 집단면역에 접근함에 따라 경기가 풀리는 상황이라, 금융기관들이 국채보다 실물 경제에 투자를 확대하려고 하는 중이기도 합니다. 무제한적 양적완화로 풀린 현금이 부동자금으로 묶여 있다가(초과지급준비금으로 중앙은행에 잠겨 있었죠), 이제 시장으로 진출할 준비를 하는 중이죠. 경제성장이 없이 유통되는 현금이 증가하면, 당연히 인플레이션을 부릅니다. 국채 수요가 줄어 가격이 하락하면, 이는 곧 금리의 상승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이 인플레이션과 금리 상승의 폭풍 전야라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물론 실물 경제가 바이든 대통령이나 폴 크루그먼 같은 학자들의 기대처럼 쭉쭉 성장한다면, 인플레이션과 금리 상승에 그럭저럭 대처를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1970년대 이상의 스태그플레이션이 발생할 수 있겠죠.

한국의 경우 양적완화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정부가 경제성장 이상으로 국채 발행을 늘리려면, 국내 금융기관들이 국채를 더 구매해야 합니다. 사실 한국에서 MMT를 말하는 분들은 이 점을 아예 무시한 건데요. 어쨌든 한국에는 국내 금융기관에도 치명적 문제점이 셋 있습니다. 첫째, 가계부채 비율이 너무 높다는 점입니다. 가계부채가 높으면 은행 자산의 더 많은 부분이 정부 채권이 아니라 가계 대출 채권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보험사나 증권사도 국채를 구매할 여력이 떨어지죠. 둘째, 고령화 가속과 국민연금의 구조적 취약점으로 연기금이 국채 구매가 아니라 정부의 빚더미로 돌아설 시점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겁니다. 지금 국가의 지불여력을 키워놓지 않으면 후에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를 일입니다. 셋째, 미국의 인플레이션과 금리 상승은 한국에도 그대로 전이됩니다.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한국의 정부 채무 비율이 반드시 40%대여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채무 비율이 빠르게 증가하는 부분에 대해 별 문제가 아니란 식으로 대응하는 것은 매우 무책임한 태도입니다. 채무 비율이 급상승하는 건 분명 위험하며, 한국의 노동운동은 필요한 요구를 정부에 하되 정부 채무의 증가에 대해서도 그 위험성을 인지해야 합니다. 
 

2. 글의 결론으로 “금융세계화에 적합한 비판과 대안, 2천 년대 초에 대안세계화 운동이라도 불렀던 세계적 운동의 재건이 절실”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참고할 만큼 눈에 띄는 국제적 흐름도 없고, 대안세계화 운동을 어떻게 다시 구축할 수 있을지 논의도 되고 있지 않아 막연하게 느껴집니다. 구체적으로 지금 시기에 어떠한 국제적인 요구들에서부터 세계적 운동 재건의 단초를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해 필자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저 역시도 대안세계화 운동의 재건을 이야기하는 건 지금 시점에서 실체가 없는 막연한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대안세계화 운동의 재건을 이야기하는 건 두 가지 점에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반세계화 운동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글에서도 썼듯이 반세계화 운동의 필연적 결과 중 하나가 트럼프의 등장이었습니다. 세계경제의 어려움이 커지면, 이런 흐름은 언제든 다시 나타날 수 있을 겁니다. 노동자계급의 국제적 운동에 필요한 세계화의 조건을 만들어야지, 국제적 무역이나 이동을 거부하는 방식으로는 좌파든 우파든 트럼프와 같은 함정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둘째, “미국보다 중국”이라는 한국 진보진영의 잘못된 태도를 경계하기 위해서입니다. 국제적인 자유와 평등의 기준, 특히 국제적 노동 표준을 만드는 운동을 대안세계화 운동으로 이해한다면, 독재와 노동 탄압, 그리고 새로운 형태의 제국적 확장을 도모하는 현재의 중국은 철저한 비판의 대상입니다. 홍콩, 미얀마 등에서 중국이 하고 있는 일들을 생각해보면 미국의 세계화보다 낫다고 말할 수도 없는 지경이죠. 대안세계화 운동에 대한 강조가 ‘반미친중’ 같은 관성적 태도에 긴장감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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