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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2.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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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성당, 그 투쟁의 현장에서 이주노동자들을 만나다.

인터뷰와정리: 송강현주 | 노동차장
명동성당 들머리 오른쪽 계단에는 4동의 텐트가 세워져 있다. 약 80명이 넘는 사람들이 정부의 대대적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집중 강제 단속추방이 시작된 11월 15일부터 ‘강제추방 저지! 미등록 이주노동자 전면합법화!’의 요구를 내걸고 농성단(이하 농성단) 투쟁을 시작하였다. 농성 14일차를 맞는 오늘(11월 28일)은 늘 시끌시끌 분주하던 명동성당의 농성장이 유난히 조용하다.
‘외국인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이하 고용허가제)은 지난 7월31일 국회를 통과해 내년 8월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이 법률은 이주노동자에 대한 극히 부분적인 합법화에 불과하며 특히 산업연수생제도와 마찬가지로 사업장 이동의 자유가 없는 등 온전히 노동권을 보장하지 못한다. 특히, 현재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12만 여명의 4년 이상 체류자의 경우 11월 15일까지 무조건 이 나라를 떠나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강제추방 하겠노라 정부는 말하고 있다. 11월 11일부터 현재까지 무려 5명의 이주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오늘은 그들을 추모하며 1일 단식을 진행하는 날이다. 남한 사회 이 땅 위에서 일하고 있는 40만 이주노동자의 바램은 노동비자를 통해 합법적으로, 노동권을 보장받으며 노동하는 것이다.

명동성당의 농성단은 매일 오전 7시 반 하루 일정을 시작한다. 농성단의 하루 일정은 다음과 같다. 아침 출정식과 식사, 약간의 휴식 후 10~12시 교육, 12~1시 명동 거리 선전전, 1~3시 식사 및 휴식, 3~4시 노래 교육, 4~6시 group activity(노래, 마임, 드라마, 그림), 6~7시 식사, 7~8시30분 저녁 집회 이후 텐트별 미팅 및 간담회를 진행하고 11시 잠자리에 든다.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은 민중의료연합과 약국노조(준)에서 진료를 오고 미용사 노조 조합원분들이 오셔서 일주일에 한 번 이주노동자들의 머리를 손질해 준다.

현재 농성단은 많이 안정된 상태로 투쟁을 진행하고 있지만 이렇게 투쟁을 하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농성단의 공동 대표 샤말타파와 상황실장을 만나 이 투쟁의 의의와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농성단의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그 동안의 이야기와 앞으로의 결의를 들어보았다. PSSP

농성단의 요구는 다음과 같다.
-산업연수생제 폐지 !!!
-노동허가 쟁취 !!!
-이주노동자 노동3권 쟁취 !!!
-사업장이동의 자유 확보 !!!
-모든 이주노동자 석방 !!!



샤말 타파(평등노조 이주지부장, 농성단 공동대표, 네팔) 인터뷰

Q. 농성단 인원이 얼마나 되는지 그리고 지금까지 특별히 어려운 점은 없나요?
A. 지금 이주노동자가 80명 정도, 방글라데시, 네팔, 인도네시아 필리핀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국인을 포함하면 90명이 좀 넘습니다. 어려운 점이라면 감기 때문에 친구들이 아프기 시작한 것입니다. 빨리 난로 같은 것이 준비돼야 하는데 좀 걱정되요(현재는 텐트마다 난로가 구비되어 있습니다) 사실 가장 큰 문제는 세수나 샤워를 해야 되는데 아직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안 되는 것입니다. 샤워하고 싶다는 요구가 제일 크고 또 이주노동자 동지들에게 이전에 일하는 회사에서 돌아오라는 전화가 오고 있습니다. 내년 6월까지 단속추방이 연기됐으니 괜찮다고 자꾸 전화가 오니까 많은 친구들이 고민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내부 교육과 토론 등을 통해 극복해가고 있습니다.

Q. 장기적인 투쟁인 만큼 대표로서 어깨가 무거울 것 같습니다. 특별한 결의가 있다면?
A. 저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대표자, 각 텐트 대표자들이 함께 노력하고 있습니다. 일단 저는 나름대로 아프지 않고 항상 친구들 앞에 있을 수 있는 몸 상태를 유지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이 친구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어떻게 문제를 함께 나눌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저와 농성단 상황실장님이 함께 매일 아침을 먹고 텐트마다 방문해서 간단하게 회의나 토론을 하고 있습니다.

Q. 이주노동자들이 개별적으로 들머리 밖을 나가지 못하게 되어있는 만큼 하루하루 일정(프로그램)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소개 부탁드립니다.
A. 프로그램 중에서 친구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은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진행되는 교육프로그램인 것 같아요. 그리고 아침과 저녁 집회는 항상 한 명씩 다 돌아가면서 발언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친구들이 발언을 미리 준비하고 또 하고 싶은 마음까지 생기는 것 같습니다. 원래 12~1시까지는 선전전 시간이예요. 그제는 명동 사거리까지 전체대오가 나가서 선전전을 했어요. 근데 조금 걱정되는 것은 들머리 밖으로 나가면 단속에 걸릴 수 있기 때문에 걱정이 좀 되요. 그래도 거기까지 나가니까 친구들이 다들 좋아했습니다. 친구들은 밖에 나가고 싶어해요. 집회도 가고 싶고요. 하지만 우리는 여기 농성투쟁을 끝까지 지켜내야지만 나중에라도 우리가 연대하고 싶은 거 할 수 있기 때문에 많이는 못 가고 몇 명씩 가고 있어요.

Q. 시민들 반응이 좋은가요?
A. 네! 왜냐면은 성당오시는 신도들도 조금씩이라도 음식이나 투쟁기금을 주고 가시고 ‘힘내세요’라고 말씀해 주세요. 여기 성당 쪽으로 지나갈 때 웃으면서 파이팅이라고 말해주시는 거 볼 때 맘이 많이 좋아요. 우리를 지지해주는 사람 많이 있구나. 그러니까 우리가 하는 일이 잘못된 것 아니고 올바른 거구나 느껴서 친구들 많이 좋아해요

Q. 농성 투쟁 준비는 언제부터 하셨나요?
A. 오래 전부터 했죠. 지난 7월 31일에 정부가 고용허가제 발표하면서 3년 미만, 3년 이상 4년 미만, 4년 이상 이런 식으로 나눠서 정책을 실시할 거라는 얘기를 했잖아요. 그 때부터 진짜 단속추방이 실시되면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이 많이 됐어요. 회의할 때마다 집회할 때마다 그런 얘기했고, 바로 그 고용허가제 통과 이후부터 우리 농성해야 되는 거 아니냐 그렇게도 안되면 단식 등 높은 수준의 투쟁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 라고 그때부터 얘기됐어요. 구체적인 준비는 약 한달 전부터 했어요

Q. 강제추방 집중 단속(11월15일)을 앞두고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해고된 것으로 압니다. 그분들의 어려운 점을 소개해 주신다면?
A. 첫 번째는 월급을 받지 못한다는 겁니다. 두 번째는 회사 기숙사에 사는 많은 친구들이 갈곳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특히 남자보다 여성들이 많이 심각해요 여자들은 기숙사에서 나가라고 하면 어디 가겠어요?

Q. 그런데 농성단에 여성이 3분밖에 없죠?
A. 남자들도 적습니다. 지금 추방되어야 하는 이주노동자가 12만이잖아요. 그 중 여기서 우리와 함께 하고 있는 사람은 80여명, 전국적으로는 아마 1000명 정도. 이렇게 따지면 아직 이주노동자가 발전되지 못하고 우리가 노동자라서 투쟁해야 된다는 교육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하구요. 또 여성들이 더 그렇죠. 여성들의 경우 무서운 마음이 있고 또 아직은 동남아시아 쪽에서 사회적으로 여성과 남성의 차별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3명밖에 안 되는 것 같아요

Q. 농성단이 이주노동자 중심의 투쟁을 기획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간략히 설명 부탁드립니다.
A. 이주노동자가 스스로 운동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작년(농성)부터 됐었다고 생각해요. 전에는 우리가 상담소나 교회에 가서 임금체불 등에 대해 ‘도와주십시오’라고 했지만, 물론 아직도 그것도 더 많이 필요하죠, 이제는 이주노동자가 스스로 요구할 수 있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번에는 제가 농성조직하면서 그런 얘기했어요 제발 이번에는 반드시 이주노동자 중심으로 하자. 우리 목소리로 우리가 싸움 만들자. 그래야만 이주노동자도 더 좋아질 수 있다. 친구들도 그런 생각 가지고 있어요. 우리의 투쟁으로 만들자라는 거요.

Q. 현재 무수히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숨어있거나 여전히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 분들에게 한마디.
A. 많은 친구들이 어쩔 수 없이 숨어있고, 계속 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려줘야 합니다. 숨어있는 친구들에게 정말 우리가 언제까지 한국에서 단속될 때마다 숨고 도망가고 이런 식으로 살아야 할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죽지말고 우리의 목소리로 우리의 투쟁으로 한국 정부에게 알려줘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해야되는 것입니다. 왜냐면 이 투쟁은 나를 위한 투쟁 아니고 모든 이주노동자들 위한 것이니까요. 이제는 숨지말고 당당하게 나서서 우리와 함께 투쟁했으면 합니다



김 혁(민주노총 조직부장, 농성단 상황실장) 인터뷰

Q. 농성투쟁에 돌입하기까지의 과정과 배경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A. 지난 7월 31일 고용허가제가 통과된 이후에 단속추방이라는 상황이 예상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이 문제를 민주노총 차원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많이 논의되었고, 특히 민주노총 내부에 이주노동자 조직화를 위한 기획단 회의를 구성해서 논의를 해왔습니다. 그 논의에서 일정하게 단속추방 고용허가제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어떤 틀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되었습니다. 민주노총 내에 이주노동자에 대한 대책본부를 먼저 구성했어요. 이것이 상임집행위와 중앙집행위를 거쳐서 중앙위원회에서 결의가 되었고 대책본부의 핵심사업으로 단속추방 반대와 미등록이주노동자 전면합법화를 위한 농성투쟁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외국인노동자협의회 공동대책위원회(이하 외노협 공대위) 등에 적극적으로 제안을 했어요. 외노협 공대위에서 이 투쟁을 받아들여서 농성단을 구성했고 지난 11월 15일 명동성당에 진입해서 농성투쟁단 발족식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약간의 견해차가 발생을 해서 외노협 공대위를 중심으로 한 농성단은 성공회 쪽으로 옮겨갔습니다. 지금 여기는 이주지부 및 한국이주노동자인권센터, 네팔공동체 등이 남아서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Q. 외노협 공대위분들이 분리되어 나가게 된 쟁점이 궁금합니다.
A. 역사적으로 얽혀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근본적인 것은 평등노조 이주지부와 외노협 공대위의 고용허가제를 둘러싼 요구안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민주노총은 이런 갈등 자체를 조정하고 하나로 만들어가는 역할을 하려고 했으나 실제로 농성투쟁단이 발족하는 과정 속에서 서로간의 주장이 계속 있었던 것 같다. 발화점은 자격문제였는데 실행위 위원회(현재 농성단과 유비하자면 집행위원회)회의에서 실행위원 자격을 두고 문제제기가 되고 그 과정에서 사업방식 등 여러 문제가 비화되면서 외노협 공대위 쪽 분들이 성공회로 가게 되었습니다.

Q. 작년 여름에도 이주지부가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는 이주지부에서 독자적으로 진행했다고 볼 수 있을 텐데 지금은 여러 단체들이 연대를 하고 명칭 자체가 민주노총 대책본부 산하 농성단입니다.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A. 올해 민주노총은 비정규실을 독자적으로 구성을 하고, 비정규 사업에 많은 비중을 두었습니다. 그 비정규사업 중의 하나로 이주노동자 사업도 기획이 되었고 비정규실의 주요한 핵심사업으로 이주노동자 운동을 설정을 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민주노총 자체의 싸움으로 이주노동자 싸움을 받아 안은 것이죠. 이것은 지금까지 민주노총이 조직된 노동조합 중심의 활동을 했다면 비정규․이주 등 불안전 노동자와 관련해서 실제로 조직되지 못한 그리고 가장 바닥에 있는 노동자들의 문제를 핵심사업으로 가져가겠다는 의지이며 현실적으로 자기 내용을 밝힌 것이라고 생각이 합니다.
또한 역으로 얘기해서 이주노동자 문제가 이제 이주지부나 외노협 공대위만이 소화할 수 있는 수위를 넘어버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사회적 문제가 되어있고 민주노총이 그것을 받아 안을 수밖에 없는 조건이라는 거죠.

Q. 농성단의 체계나 운영은 어떻게 되어있나요?
A. 최고 의결기구는 총회가 있구요. 만약 이후에 정부와의 협상 등 중요한 사항들이 발생할 때 총회를 통해 방향을 이주노동자 스스로가 결정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적으로 총회를 열 수 있는 구조가 아니예요. 그래서 총회에 준하는 집행위원회가 있습니다. 집행위원회는 이주노동자 10명당 1인 씩 선출하고 지원단체의 경우 상근 역량을 파견한 단체에 한해 1인씩 대표자격(불안정노동철폐연대, 사회진보연대, 한노정연, 미래연대)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1주 1회 회의를 진행합니다. 그리고 농성단 공동대표로 민주노총 홍준표 부위원장님과 이주지부 샤말동지가 선출되어 있습니다.
집행위는 의결기구 성격을 갖고 농성단 일정을 매일 집행하기 위해 상황실이 있습니다. 상황실 산하에 투쟁조직팀, 선전팀, 교육팀, 연대사업팀, 총무팀을 두고 있습니다. 그 외 여러 연대하는 단위들 연대로 배치해서 나가는 체계입니다.

Q. 아무래도 투쟁이 장기화 될 것 같습니다. 전망이나 계획은?
A. 민주노총이 이 투쟁을 자기 사업으로 하겠다고 했지만, 현재까지 민주노총 산하 평등노조 이주지부의 이주노동자에 대한 영향력이 높은 것은 아닙니다. 아직 외노협 공대위 및 인권 단체들의 영향력이 높은 상태죠. 바로 이런 것들이 명동성당의 농성투쟁 자체가 전국적 집중 구심이 되지 못하고 분산되게 하는 요인일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이 투쟁을 최대한 하나의 방향으로 모아나게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할 것 같아요. 이후에 거점들간의 연대를 최대한 도모해야 할 것 같고 더 나아가서 방향성을 일치시키고, 투쟁수위를 높여나가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대정부와의 교섭같은 경우도 적극적으로 해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어차피 농성투쟁은 장기적인 국면입니다. 오히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이주노동자) 내부에서 거점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들을 어떻게 모아서 공동행보를 할 수 있는가가 가장 관건일 것 같고 그 과정에서 투쟁수위도 조절해 가면서 긴호흡으로 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스하나(여성, 인도네시아) 인터뷰

Q. 현재 농성장에 여성노동자들은 몇 명이나요?
A. 3명입니다. 인도네시아에서 온 사람이 2명이고, 네팔에서 온 사람이 1명입니다.
그 중 2명은 결혼을 해서 부부로 농성장에 참여하고 있고, 저는 혼자입니다. 그 여성들을 보면 부러워요

Q. 외롭지 않으세요?
A. 외로워요. 외롭지만 그래도 우리가 여기 오기 전에 결의 가지고 왔잖아요. 힘들고 외로워도 같이 우리 약속했잖아요. 동지들과 서로 얘기하고 서로 변혁하고 우리 끝까지 투쟁하자고 했어요. 노동자로서의 권리 받을 때까지 우리 포기하지 않고 도망가지 않고 계속 같이 있을 거예요

Q. 한국에는 언제 왔어요?
A. 96년에 왔는데요. 3년 동안 산업연수생 했어요. 99년 1월에 돌아갔다가 99년 5월에 다시 한국에 연수생으로 왔어요. 2년 비자 받았는데 3년하고 싶어서 한국말 시험 보려 공부했는데 많이 어려웠어요. 그래도 합격했어요. 그래서 비자가 1년 연장됐어요. 그때 저는 어차피 3년 있으면 돌아가야 되쟎아요. 그래서 회사 나왔어요. 그때 불법체류자 됐어요. 2002년 5월 달부터 지금까지 불법체류자 신분이예요.

Q. 산업연수생 때, 무슨 일을 했어요?
A. 사철 스타킹 만드는데 연수생 월급 조금 줘요. 많이 일하면 월급 조금 많아요. 어차피 기본급이 작아서 잔업을 많이 해도 70만원 정도로 줬어요.

Q. 이주지부 운동을 어떻게 시작하게 됐어요?
A. 저는 2002년 5월 달에 연수생이었는데, 그 때 회사에서 나왔어요. 그때 통장 가지고 나왔어요. 통장에 돈 있잖아요. 그거 되찾아야 되는데 무섭고 걱정되고 불안하고 그랬어요. 어딜 갈 때 계속 뒤에 보고 누구 따라오나 보고 계속 그랬어요.
그때 고딜을 만났어요. 이주지부에서 아마 도와줄 수 있다고 했어요. 그렇게 했는데 거기 언니가 은행 가서 돈 찾아 주었어요. 그때는 한 두 번 집회에 갔지만, 심적으로는 같이 투쟁해야지 마음 없었어요. 2003년 1월부터 모임에 나가고, 조합원은 7월 달에 됐어요

Q. 근데, 여기 농성장에 왜 여자가 별로 없어요?
A. 그 동안에도 집회에 나가도 여성이주노동자들은 별로 없었어요. 저는 집회 나가잖아요. 그러면 여자가 멀 그렇게 나가는 거야 그런 소리도 있구요. 여자들은 남자가 안 나가면 안가요. 남자가 가면 따라가고 저는 남자 친구 없어도 몰래 집회 갔다오고 해요. 남자친구는 이런 거 싫어해요

A. 힘든 점은 없어요?
Q. 힘들지만 조금 재밌어요. 여자끼리 많이 있으면 말 좀 안 통해요. 여기도 남자끼리 싸우잖아요. 여자 숙소 따로 있고 이런 거는 좋아요.

Q. 한국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부탁해요?
A. 우리는 똑같은 인간이잖아요. 우리는 불법체류자가 아니고 인간이예요. 그냥 한국인과 같은 노동자니까 함께 연대합시다. 우리 권리 얻을 때까지 함께 했으면 좋겠어요.



쇼학(방글라데시) 인터뷰

Q. 자신의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A. 농성장에서 교육팀 팀장 맡고 있습니다. 능력은 없지만 동지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Q. 언제 한국에 왔고 이주지부 운동을 시작하게 됐나요?
A. 95년에 왔고, 98년부터 불법체류자가 됐어요. 이주지부 운동은 2002년 8월부터 시작했어요 2002년 2월 달에 성수지역 멤버가 됐어요. 단속기간 되면서 안산지역 맡아서 조직화를 했어요.

Q. 교육시간에 대한 평가가 굉장히 좋잖아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A. 동지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여러 나라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교육이 뭔지 몰랐던 것도 있고, 조합활동하고 있지만 교육을 많이 받아보지 못했어요. 또 종이와 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나의 경험도 누구한테 가르쳐주고 이런 것이 교육이라고 생각하고, 동지들이 어떤 생각하고 있는지, 동지들이 어떤 식으로 우리 활동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지 그런 내용을 가지고 재미있는 프로그램으로 하는 방식이라 좋고 재밌게 받아들이는 거 같아요

Q. 앞으로 계획은?
A. 먼저 리더 교육이 있고 앞으로 여러 단체, 조합에서 활동가분 섭외해서 동지들에게 유니온(노동조합) 왜 해야하는지 강의할 거예요.

Q.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A. 나의 라이프 스토리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도 다시 떠올리고 되돌아보는 거 기억에 남는 거 같아요.

Q. 한국인들에게 한마디 해주세요?
A. 우리는 외국사람이지만 여기 한국에 와서 많은 고통과 많은 어려움 갖고 있고 그리고 이것이 우리 같이 진행하지 못하더라도 같이 어울리지 못하더라도 우리 시민들과 모든 분들한테 이런 문제를 갖고 있다 이런 거 알리기 위해서라도 투쟁을 통해 쟁취하는 거 뿐만 아니라 우리도 사람이다 보여주고 느끼게 해주려고 나섰습니다.
사실은 누구나 내가 도와준다 이렇게 얘기하면 어떤 도움받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 불쌍한 해서 여기 온 거 아니라 우리 노동 운동 하러 온 이유도 우리도 떳떳한 사람이고 노동자다 나아가기 위해서 이렇게 운동하고 있고 우리도 도와주는 거 뿐 아니라 사람이니까 아픔이 잇고 이 아픔을 같이 나누고 느낄 수 있길



라티카(네팔) 인터뷰

Q. 언제 한국에 왔어요?
A. 92년에 관광비자로 와서 불법체류했어요

Q. 한국에서 어려웠던 어떤 거에요?
A. 월급 못 받은 경우도 많구요. 아파서 일 못한 것도 있어요

Q. 농성단에 여성이 3명밖에 없는데 그것 때문에 힘든 것은 없나요?
A. 처음엔 그런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런 생각 안해요. 여기 뭐하러 왔어요 고생하러 왔는데 괜찮아요

Q. 교육팀 리더인데 힘든 것은 어떤 거에요?
A. 친구들이 시간 안 맞추고, 말 안 들어서 힘들어요. 그래도 점점 맞춰서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Q. 성당에 어떻게 결합하게 되었나요?
A. 저는 이주지부 멤버는 아니구요. 한달 전에 샤말 만나서 많은 얘기 듣고 관심 가지게 됐어요. 네팔 공동체가 있어서 거기서 2년 일했어요.

Q. 처음에 무섭지 않았나요?
A. 조금 겁이 났어요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오래되니까 지금 괜찮아요. 다른 지역 친구들도 많이 만나고 힘이 나요.

Q. 투쟁이 길어질 수도 있는데요?
A. 어차피 투쟁하러 왔으니 아무리 길어도 끝까지 같이 할거예요

Q. 정부에게 한마디 한다면?
A. 이렇게 자꾸 강제추방하면 우리 힘드니까 우리에게 자유를 줬으면 해요

Q. 한국인에게 한마디한다면?
A. 우리 많이 사랑하고 좋아해 줬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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