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평등주의와 혁명적 폭력이라는 프랑스혁명사의 쟁점

김응종, 『프랑스혁명사는 논쟁 중』

임지섭 | 정책교육국장
 

1. 프랑스혁명사를 돌아보는 이유

 
보수주의자든 공산주의자든 프랑스혁명이 ‘모든 근대 혁명의 어머니’라는 사실에 대부분 동의한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이 어떠한 역사적 유산을 남겼는지를 두고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프랑스혁명은 20세기의 ‘전체주의적 민주주의’의 토대를 놓았는가? 프랑스혁명은 사회적인 결과를 갖는 정치적 격변으로서, 자유주의 세계의 기초를 닦았는가? 아니면 대중의 빈곤을 없애고, 발전하는 자본주의 세계 체계의 굴레로부터 모든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인, 정치적 결과를 수반하는 일련의 ‘사회 혁명’ 가운데 최초의 것이었는가?
데이비드 파커 외, 『혁명의 탄생』, p.201.
 
프랑스혁명은 위로는 18세기의 계몽사상에, 아래로는 러시아혁명과 중국혁명까지 닿아 있다. 확실히 프랑스혁명은 계몽주의의 세례를 받아 ‘인간과 시민의 권리’로서 자유와 평등을 천명하였다. 또한 프랑스혁명은 이후 19세기와 20세기의 혁명에서 반복될 정치혁명과 사회혁명, 부르주아와 민중이라는 구도를 남겼으며, 보수주의·자유주의·사회주의라는 현대 정치 이데올로기를 비가역적으로 형성했다.

그런데 그런 프랑스혁명을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보아 상반된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러시아혁명을 전후로 형성되어 1960년대까지 주류의 지위에 있었던 정통주의 해석이다. 정통주의 해석은 프랑스 소르본 대학의 마르크스주의자를 중심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으로 불리기도 하고,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의 이념에 주목했기 때문에 자코뱅적 해석이라고도 불린다. 이는 프랑스혁명을 대표적인 부르주아 혁명이자, 동시에 부르주아 혁명과 그 한계를 넘어서려고 했던 민중 혁명의 이중주로 보는 해석이다. 이러한 해석에서 프랑스혁명은 20세기 사회주의 혁명을 예비하는 혁명이자, 오늘날에도 완성해야 할 끝나지 않은 혁명이다. 

다른 하나는 1960년대 이후 정통주의 해석을 비판하며 등장한 수정주의 해석이다. 수정주의 해석은 프랑스혁명을 자본주의로의 이행에 실패한 혁명이자, 계몽주의와 문명의 전통에서 이탈해 폭력과 억압으로 점철되었던 혁명으로 본다. 이러한 해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프랑스혁명은 전체주의, 특히 공산주의를 예고하는 공포정치를 처음부터 내포하고 있었다.

이렇게 프랑스혁명에 대한 상반된 두 해석은 20세기 사회주의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두 해석 자체가 20세기 사회주의 혁명과 그 실패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프랑스혁명사를 어떻게 해석하고 평가할 것인지의 문제가 결국 20세기 사회주의 혁명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의 문제와 상호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사회진보연대는 ‘사회주의 역사 읽기’ 연재를 통해 러시아혁명과 중국혁명이 어째서 이행에 실패했는지, 나아가 자유주의에 미달하는 억압적 체제로 귀결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했다. 여기서 핵심 키워드는 인민주의와 혁명적 폭력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두 가지 쟁점은 프랑스혁명사에서 그 원형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프랑스혁명사와 이를 둘러싼 논쟁에 대해 알아보는 것은 20세기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반성을 바탕으로 혁명과 이행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찰하는 데 출발점이 될 수도 있고 종착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김응종의 『프랑스혁명사는 논쟁 중』(푸른역사, 2023)은 프랑스혁명사를 둘러싼 논쟁에 다가가는 데 하나의 길잡이가 될 수 있다. 저자는 서문에서 한국의 프랑스혁명사 이해가 혁명의 원인과 결과만 고려하며 혁명을 예찬할 뿐, 그 전개 과정에서 나타난 부당하고 과도한 폭력에는 무관심하다고 말하면서, 폭력이라는 어둠에 초점을 맞추어 혁명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프랑스혁명에 대한 수정주의 해석에 기초를 두고 있는 셈인데, 이를 논쟁적으로 읽음으로써 우리는 프랑스혁명 속에서 나타나고 20세기 사회주의 운동에서 반복된 평등주의와 혁명적 폭력이라는 쟁점을 고찰할 수 있다. 

『프랑스혁명사는 논쟁 중』은 프랑스혁명을 폭력성이라는 측면에서 재조명한 ‘혁명과 반혁명’(1부), 주요 혁명가들의 생애와 사상을 다룬 ‘혁명가’(2부), 마지막으로 프랑스혁명사 연구의 역사를 정리한 ‘혁명사’(3부)로 구성된다. 아래에서는 먼저 3부 ‘혁명사’ 중 정통주의 해석의 대표자인 소불과 수정주의 해석의 대표자인 퓌레의 프랑스혁명사를 살펴본다. 이어 1부 ‘혁명과 반혁명’ 중 방데 전쟁과 리옹 반란을 중심으로 돌아보면서, 이를 통해 프랑스혁명의 ‘민중’이란 누구였고 이들의 ‘벗’을 자처한 자코뱅이 수행한 공포정치는 무엇이었는지 질문을 던져본다. 마지막으로는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수정주의 해석이 제기하는 프랑스혁명에 대한 비판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 정리해본다. (프랑스혁명의 주요 사건과 흐름은 글 마지막에 실은 연표를 참고할 수 있다.)
 
 

2. 프랑스혁명사의 두 해석: 정통주의와 수정주의

 
프랑스혁명 연구사의 흐름은 크게 보아 정통주의 해석과 수정주의 해석으로 나눌 수 있다. 정통주의 해석은 러시아혁명을 전후로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적 프랑스혁명 연구자에 의해 확립되었다. 정통주의 해석은 부르주아 혁명의 모델로서 프랑스혁명이라는 마르크스의 주장을 따라, 프랑스혁명을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의 결정적인 전환점으로 본다. 한편 농민과 상퀼로트를 비롯한 민중에 주목하면서, 이들의 개입이 프랑스혁명을 더욱 급진적이고 진보적으로 이끌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부르주아가 민중을 배반하면서 혁명이 동력을 잃기 시작했고, 이후 테르미도르 반동과 나폴레옹 쿠데타로 혁명이 종식되면서 부르주아 지배체제가 형성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해석은 20세기 중반까지 프랑스혁명사 연구에서 ‘정통’의 지위를 차지했다. 

그런데 1950년대 영국의 코번과 1960년대 프랑스의 퓌레가 이러한 정통주의 해석을 비판하며 수정주의 해석을 제기했다. 이들이 제기한 수정주의적 프랑스혁명론의 핵심은 프랑스혁명이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에 실패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영국과 비교할 때 프랑스에서는 민중의 폭력적 개입과 자코뱅의 공포정치로 인해 혁명이 일탈하면서 부르주아 헌정질서가 안정적으로 구성되지 못했고 산업자본주의 역시 발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수정주의 해석은 마르크스주의와 현실 사회주의의 위기와 맞물려 1989년 프랑스혁명 200주년을 전후로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다.

프랑스혁명사에 대한 정통주의 해석과 수정주의 해석의 쟁점은 크게 보아 두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 구체제의 사회성격과 혁명 이후의 사회성격은 무엇인가. 이는 프랑스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에 대한 쟁점과 연결된다. 둘째, 자코뱅과 공포정치 그리고 민중의 역할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이는 프랑스혁명이 정치혁명 내지는 부르주아 혁명을 넘어선 사회혁명 또는 무산자 혁명의 맹아를 보여준 모범적 혁명인가, 아니면 전쟁과 폭력으로 일탈한 실패한 혁명인가를 둘러싼 논쟁과 연결된다. 『프랑스혁명사는 논쟁 중』 3부는 그러한 논쟁을 담은 프랑스혁명사의 연구사를 정리하고 있다. 여기서는 각각 정통주의 해석과 수정주의 해석의 대표자인 소불과 퓌레의 프랑스혁명사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1) 소불의 마르크스주의 프랑스혁명사

프랑스대혁명은 조레스의 표현을 따르면 1688년에 일어난 영국의 ‘명예혁명’처럼 “좁은 의미에서 부르주아적이고 보수적인” 혁명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부르주아적이고 민주적인” 혁명이었다. 대혁명이 이러한 성격을 띠게 되는 것은, 봉건제의 중압으로부터 벗어나기를 갈망하면서 특권에 대한 증오에 이끌려 기아를 견디지 못하고 일어선 인민대중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알베르 소불, 최갑수 옮김, 『프랑스혁명사』, 교양인, 2018. p.132.

프랑스혁명에 대한 정통 해석의 계보는 프랑스 소르본대학을 중심으로 알베르 마티에(1874~1932)와 조르주 르페브르(1874~1959)를 거쳐 알베르 소불(1914~1982)로 이어진다. 마티에는 로베스피에르에게 주목하며 프랑스혁명사에 대한 민중적이고 사회주의적인 해석을 구축했고, 르페브르는 프랑스혁명이 농촌에 미친 영향과 농민 혁명에 주목하며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개척했다. 소불은 이들을 이어 파리 상퀼로트에 대한 선구적인 연구로 학문적 명성을 얻었다. 그는 1939년 프랑스공산당에 가입한 이후 한 번도 당을 떠나지 않았고, 《프랑스혁명사 개설》(1962)을 낸 이후 1967년 르페브르를 이어 소르본대학 프랑스혁명사 강좌 주임교수가 되었다. 이 점에서 소불의 프랑스혁명사 해석은 마르크스주의적 정통 해석을 완성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소불의 프랑스혁명사 해석에서 주목할 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프랑스혁명을 부르주아 혁명과 민중 혁명의 이중주로 본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포정치를 혁명과정에서 필요했던 것으로 본 것이다. 먼저 소불은 1789년에서 1791년까지 이어진 입헌군주정으로의 평화적 이행은 부르주아 혁명에 불과하므로 한계적이며, 따라서 민중 혁명으로 심화하였어야 했다고 평가한다. 소불은 1792년 8월 10일 파리 민중과 연맹군이 왕궁을 공격하여 왕정을 붕괴시킨 것으로부터 진정한 혁명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파리 민중의 ‘반왕정’ 봉기는 1793년 6월 2일 ‘반의회’ 봉기로 나아간다. 즉 파리 민중이 부르주아 혁명의 산실인 국민의회를 포위하고 압박을 가해 지롱드파를 몰락시키고 자코뱅파(산악파)가 권력을 장악하도록 만든 것이다. 소불은 이 역시 민중의 혁명으로 여긴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를 비롯한 산악파의 본질은 결국 민중이 아니라 부르주아였다. 소불은 로베스피에르가 1794년 3월 파리 상퀼로트의 지지를 받는 에베르파를 제거하면서 프랑스혁명이 부르주아 혁명으로 복귀하기 시작했고, 1795년 열월파 국민공회가 로베스피에르를 제거하면서 혁명이 끝났다고 평가한다.

그렇다면 공포정치에 대한 소불의 평가는 어떠할까? 소불은 “민중은 새로운 질서의 적대세력에게 자유의 전제(專制)를 행사함으로써 특권계급의 반혁명과 유럽의 대불동맹에 대한 승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자유의 전제’라는 말은 ‘민중의 벗’을 자처한 마라가 처음으로 쓴 말인데, 이는 곧 자유의 적을 폭력으로 다스리는 공포정치를 의미한다. 파리 민중이 파리 감옥의 수인 1천여 명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1792년 ‘9월 학살’에 대해, 소불은 “제1차 공포정치는 민중이 떨쳐 일어선 것이며 국내의 적을 지배하는 수단이었을 뿐만 아니라 외부의 위협에 대한 반격으로서 승리를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고 정당화한다.

한편, 파리 민중의 ‘9월 학살’ 이후 혁명가들은 민중이 복수하기 전에 합법적인 기구가 복수를 대행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에 따라 감시위원회와 공안위원회가 설치되었고, 혁명재판소와 단두대로 반혁명 혐의자를 재판하고 처형하는 ‘합법적’ 공포정치가 시작되었다. 소불은 이에 대해 “공포정치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는 신중해야 한다”면서도, “공포정치는 특권적이라는 이유로 사회적으로 동화될 수 없는 구성 요소를 국민으로부터 잘라내는 역할을 했다. 공포정치를 통해 정부의 양 위원회는 국가의 권위를 회복하고 공공안전의 규준을 모든 사람에게 부과할 수 있었다. 공포정치는 계급적 이기주의를 침묵시켜 국민적 유대감을 북돋우는 데 이바지했다. 특히 공포정치는 전쟁 승리의 한 요인이었다”고 평가한다. 
 

2) 퓌레의 수정주의 프랑스혁명사

1792년 8월 10일 이후 혁명은 전쟁과 파리 군중의 압력에 의해서 18세기의 지식과 부가 그어놓은 궤도 밖으로 탈선했다. 평등주의적 열정이 표면으로 솟아올라, 응축된 굴욕감의 힘과 민중적 비전의 색깔을 빈약한 표현들 위로 드러내 주었다. 드러난 것, 그것은 모든 것이 신분이요 특권이었던 구체제 사회가 전도된 모습이었다. 상퀼로트가 요구한 세계는 위계가 없고, 특별함이 없고, 재산이나 재능의 위세가 없는 세계였다. […] 조레스가 그토록 잘 이해했던 혁명의 저편에 있던 것은 미슐레가 직관적으로 간파한 혁명, 즉 빈곤과 분노의 암울한 힘의 혁명이었다. 이들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었던 산악파의 정치가들은 그들의 온갖 요구, 즉 징병, 가격통제, 공포정치에 굴복했다. 그러나 산악파는 본질적인 것을 보존했는데, 그것은 권력이었다. 
프랑수아 퓌레·드니 리셰, 김응종 옮김, 『프랑스혁명사』, 충남대학교출판문화원, 2023. p.404.
 
프랑수아 퓌레(1927~1997)는 1949년 프랑스공산당에 가입해 활동하다가, 1956년 소련의 헝가리 침공과 흐루쇼프의 스탈린 개인숭배 비판에 충격을 받고 전향했다. 공산당을 탈당한 이후 퓌레는 브로델의 권유로 아날학파의 중추기관인 고등학문연구원 제6국(이후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연구하며 《프랑스혁명사》(1965), 《프랑스혁명 해석》(1978), 《환상의 과거》(1995)를 저술했다. 퓌레는 혁명의 ‘궤도 이탈’ 개념을 중심으로 프랑스혁명에 대한 정통 해석에 반기를 드는 수정주의 해석을 제기하는 것에서 시작해, 말년에는 프랑스혁명의 이데올로기적 유산인 공산주의라는 ‘환상’이 끝났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퓌레와 리셰가 1965년 공동 집필한 《프랑스혁명사》는 수정주의 해석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제시되는 정통 해석에 대한 수정주의의 비판은 ‘혁명의 궤도 이탈론’으로 요약할 수 있다. 먼저 퓌레는 1789년 5월 삼신분회 소집 이후의 프랑스혁명을 국민의회의 혁명, 파리를 포함한 도시들의 혁명, 농촌의 혁명이라는 세 가지 혁명으로 구분했다. 그는 이 중에서 국민의회의 혁명만이 명확한 정치의식과 미래 사회에 대한 비전을 가진 혁명이라고 보았다. 또한 국민의회의 혁명은 절대군주정을 거부하며 계몽주의 사상을 공유했던 ‘새로운 엘리트’인 자유주의적 귀족과 제3신분 지식인이 이를 주도했다는 점에서, 정통 해석이 제시하는 ‘부르주아 혁명’보다는 ‘변호사 또는 새로운 엘리트의 혁명’이 적합한 해석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러한 국민의회의 혁명은 도시 민중과 농민의 개입으로 인해 계몽주의가 설정한 궤도를 ‘이탈’했다. 퓌레는 특히 파리 상퀼로트의 평등주의적 열정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맹아라는 관점을 거부하면서, 이들의 이념과 운동을 반자유주의적이고 반동적인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상퀼로트에 초점을 맞춰 프랑스혁명을 본다면 그것은 반부르주아 혁명일 따름이었다. 퓌레는 이들이 정치적 폭력으로 왕권과 의회를 무력화하여 입헌군주정을 핵심으로 하는 1791년 헌법을 1년 만에 무너뜨림으로써, 프랑스혁명이 공포정치로 타락하는 길을 놓았다고 보았다.

이러한 퓌레의 수정주의 해석은 많은 논쟁과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쟁점이 된 것은 자코뱅과 상퀼로트 운동의 의미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제기된 비판에 대한 반비판으로 1978년 《프랑스혁명 해석》을 내놓았다. 여기서 퓌레는 소불이 주도하는 마르크스주의 해석 또는 자코뱅 해석이 목적론적 환상에 따라 프랑스혁명사를 보았다고 비판했다. 즉 이들은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목적을 향해 진보하는 과정으로서, 특히 1917년 러시아혁명을 예고하는 혁명으로서 프랑스혁명사를 교조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밝히지 못했다는 것이다. 퓌레는 정통 해석이 강조했던 구체제의 사회경제적 모순보다는, 심리적이고 정치적인 측면의 불만을 혁명의 주된 원인으로 간주했다. 또한 혁명 초기 국민의회는 자본주의로의 이행에 기여했으나, 이후 이어진 농민과 도시 민중의 저항으로 인해 오히려 프랑스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은 저해되었다고 보았다. 이는 《프랑스혁명사》에서 제시했던, 프랑스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으로 보기 어렵다는 비판을 재론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 퓌레는 한발 더 나아가, 정치적 관점에서 혁명기에 발생한 폭력에 주목하면서 혁명이 그 자체로 전쟁과 폭력을 내재하고 있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는 《프랑스혁명사》에서 자신이 제기했던 ‘이탈론’을 사실상 수정하는 것이었다. 민중의 개입으로 인해 혁명이 폭력으로 비화한 게 아니라, 혁명 자체가 본래 폭력이라고 본 것이기 때문이다. 즉, 폭력은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비롯되었는데 전쟁은 혁명에서 비롯되었으니 결국 혁명 그 자체에 책임이 있다는 논리였고, 이는 혁명 자체를 거부하는 관점이었다. 《프랑스혁명 해석》 1부의 제목은 ‘프랑스혁명은 끝났다’인데, 프랑스혁명은 끝나지 않았고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퓌레는 이미 프랑스혁명과 그 이데올로기적 유산은 끝났다고 선언한 셈이다. 

이러한 퓌레의 주장은 1995년 《환상의 과거》에서 절정에 이른다. 여기서 환상이란 공산주의를 가리키는데, ‘환상의 과거’라는 것은 공산주의가 끝났다는 의미와 함께 공산주의의 과거로서 프랑스혁명이라는 의미다. 퓌레는 혁명기에 합법성보다 정당성을, 법보다 정의를 앞세웠다는 점에서 프랑스혁명과 러시아혁명의 유사성을 강조한다. 나아가 한나 아렌트와 마찬가지로 전체주의 개념을 따라 자코뱅주의에서 전체주의의 뿌리를 찾는다. 아렌트에 따르면, 전체주의는 특정 종족이나 계급을 적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제거하기 위해 일체의 실정법을 무시하고 자연법칙과 역사법칙을 직접 실현하는 테러를 수단으로 활용한다. 로베스피에르가 “신속 준엄하고 확고부동한 정의”를 주장한 것이나, 자코뱅주의자가 공포정치를 ‘덕(德, virtue)의 지배’로 미화한 것을 전체주의의 기원으로 볼 수 있다는 설명이다. 
 
 

3. 혁명과 반혁명, ‘민중의 벗’은 누구인가

 
『프랑스혁명사는 논쟁 중』 1부는 위에서 살펴본 수정주의 해석을 따라, 프랑스혁명의 이면이라고 할 수 있는 혁명의 폭력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혁명의 폭력성은 혁명이 반혁명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단적으로 드러났다. 여기서 주로 살펴볼 것은 2장 ‘방데 전쟁의 폭력성’과 3장 ‘리옹 반란’이다. 방데 전쟁과 리옹 반란은 프랑스혁명 시기 각각 농촌과 도시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반란이었고, 파리의 혁명정부는 이들의 봉기권을 인정하지 않고 반란을 ‘반혁명’으로 규정하며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그런데 방데 전쟁과 리옹 반란은 단순히 혁명의 폭력성을 넘어, 인민주권과 공포정치라는 쟁점을 드러낸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모든 인간과 시민에게 주권이 있다는 선언은 현실의 어떤 공동체에서 어떤 제도로 실현할 것인가를 둘러싼 투쟁으로 드러났다. 이 과정에서 파리 민중은 직접정치와 함께 ‘혁명의 적’에 대한 공포정치를 요구했고, 산악파는 이들의 벗을 자처하며 공포정치를 위로부터 제도화했다. 그러나 이내 공포정치는 민중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되돌아왔다. 아래에서 살펴볼 쟁점은 프랑스혁명의 ‘민중’이란 누구인지,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대한 선언으로 시작한 프랑스혁명을 공포정치로 이끈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1) 방데 전쟁

방데 전쟁은 1793년 프랑스 서부 방데 지역에서 발생한 9개월 간의 내전을 말한다. 1789년 혁명을 환영했던 방데 지역의 농민들은, 혁명정부가 성직자 선서를 강요하면서 선서를 거부한 신부는 지위를 박탈하고 오직 선서한 신부에게만 성사(聖事)를 받도록 하면서, 점차 혁명정부와 충돌하기 시작했다. 이어 1793년 초 국민공회가 루이 16세를 처형하고 혁명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30만 명을 징집하기로 한 것을 계기로, 혁명정부에 맞서 봉기하기에 이르렀다. 방데인의 불만은 다음과 같은 농민의 외침에 압축되어 있었다. “그들은 우리의 왕을 죽였다. 그들은 우리의 신부들을 몰아냈고, 우리 교회의 재산을 팔았다. 돈은 어디 갔나? 그들이 모두 먹어치웠다. 그들은 이제 우리의 몸을 요구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농민들은 국민공회의 징집령을 구체제에서 시행된 민병대 제도의 연장으로 보고 불만을 가졌으며, 추첨으로 결정되는 징집에서 행정관은 제외되는 것과 같은 불평등에 대해서도 분노했다. 

봉기 초에 농민군은 시청을 점령하고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6월 말 낭트 점령에 실패하고 연이은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12월 사브내 전투를 끝으로 사실상 진압된다. 국민공회는 방데 봉기를 귀족의 반혁명 음모로 규정하면서, 4월 6일 공안위원회를 설치하고 매일 방데 전쟁에 대한 보고를 받기로 했다. 이어 공안위원회는 ‘비적들의 절멸’을 요구했다. 공안위원 바래르는 8월 1일 방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국내가 평화롭게 되고, 반도들이 진압되고, 비적들이 전멸된 다음에야 평화를 얻을 수 있다. 외국 열강의 정복과 배신은 방데 도(道)가 그 파렴치한 이름과 반역적인 죄인들을 잃어버리는 날 끝날 것이다. 방데가 없으면 국왕주의도 없다. 방데가 없으면 특권계급도 없다. 방데가 없으면, 공화국의 적들은 사라질 것이다.” 이어 10월 1일에는 국민공회에 ‘방데 파괴’ 입법을 제안했다. 

한편, 방데 반란 진압에 나서 “방데의 도살자”라는 별명이 붙은 베스테르만은 사브내 전투 이후 공안위원회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공화국 시민들이여, 이제 더 이상 방데는 없습니다. 방데는 여자들과 어린아이들과 함께 우리의 자유의 칼 아래 죽었습니다. 나는 방데를 사브내의 늪과 숲속에 묻었습니다. 당신들이 나에게 내린 명령에 따라 나는 아이들을 말발굽으로 짓밟았고 여자들을 학살했습니다. 이제 이들은 더 이상 비적들을 낳지 못할 것입니다. 단 한 명의 포로도 나를 비난하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모조리 죽여버렸습니다.” 

이후 방데 지역의 징벌 임무를 맡은 서부군 사령관 튀로는 ‘지옥종대’를 편성해 2~4만 명에 이르는 주민을 학살하고 재산을 파괴하는 초토화 작전을 벌였다. 1794년 1월 국민공회는 비적들은 단호히 제거하되 무장하지 않은 여자, 어린이, 노인은 보호하라고 요구하며 파견의원을 급파하기도 했지만, 공안위원회는 2월에 튀로의 작전을 사실상 사후 승인했다. 이외에도 앙제와 낭트 등지에서 현지 지휘관들은 경쟁적으로 잔인한 방법을 동원하여 학살을 자행했다.

방데 전쟁에 대한 평가는 정통주의 해석과 수정주의 해석에서 극명하게 갈린다. 정통주의 해석에서 방데 전쟁은 농민의 무지와 가톨릭교회의 사주로 인해 발생한 반혁명으로 규정된다. 반면 레날 셰셰는 1986년에 방데 전쟁은 반란이 아니라 인권선언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와 저항권을 천명한 것이며, 방데 전쟁의 전후처리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과 같은 ‘제노사이드’라고 주장해 논쟁에 불을 지폈다. 퓌레는 ‘제노사이드’라는 규정은 과하다고 지적하면서도, 방데 전쟁은 “공안이라는 이유로 사면될 수 없는 공포정치의 최대 집단학살”이라고 평가했다.
 
 

2) 리옹의 ‘연방주의’ 반란

18세기 프랑스에서 리옹은 파리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제2의 도시이자, 견직물 산업에 기반한 부유한 상인들이 지배하는 도시였다. 견직물 산업은 주변 정세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영불통상조약 이후 1789년을 전후로 견직물 산업이 침체하면서 상인과 노동자 사이의 사회적 갈등이 심화했다. 파리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1790년 리옹의 민중도 봉기를 일으켰고 민중클럽을 중심으로 민중운동이 빠르게 확산하였다. 롤랑과 샬리에 같은 리옹의 애국파는 리옹이 견직물이라는 고가의 사치품을 생산해 귀족과 부자에게 판매하는 보수적이고 반혁명적인 도시라고 비난했다. 

특히 샬리에는 로베스피에르에게 감명받은 과격 자코뱅이었는데, 그를 따르는 샬리에파는 1792년 혁명전쟁으로 경제가 어려워지자 최고가격제를 비롯한 통제경제를 시행하고 반혁명적인 경제범죄자를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국민공회의 10월 28일 법령에 의해 실시된 보통선거로 리옹의 분열은 심화했는데, 빈곤한 구는 샬리에파를 지지했고 다른 구는 부르주아를 비롯한 반샬리에파를 지지했다. 1793년 2월에 리옹의 민중클럽은 파리를 따라 리옹에도 혁명재판소를 설치할 것을 시에 요구했는데, 이를 시장이 거부하자 봉기를 일으켰다. 국민공회에서 보낸 파견의원은 시의 임금통제 정책과 혁명군 창설을 승인하는 한편 공안위원회를 설치하고 반자코뱅파를 체포하면서 샬리에파를 지원했다. 그러나 샬리에파는 민중의 사회경제적 요구를 해결해 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민중클럽의 자율성을 위협하면서 민중의 불만을 샀다.

그런 와중에 1793년 5월 리옹 지역의 군을 담당하는 새로운 파견의원 뒤부아크랑세가 샬리에파를 지원하기 위해 리옹의 군대를 이동시키자, 반샬리에파는 시 집행부가 시민의 신뢰를 상실했다고 선언하고 국민방위대와 함께 시청을 점령하면서 반자코뱅 반란을 일으켰다. 반면 파리에서는 리옹과 반대의 상황이 펼쳐졌다. 6월 파리 민중이 국민공회를 포위한 가운데 국민공회가 지롱드파 의원을 체포하도록 한 것이었다. 국민공회를 장악한 산악파는 리옹의 반란을 1792년 9월 국민공회가 선언했던 “공화국의 단일성과 불가분성”을 파괴하는 반혁명적인 “연방주의” 반란이라고 규정했으며, 그 배후에는 지롱드파와 왕당파가 있다고 공격했다. 리옹은 7월 민중위원회를 구성하고 “공화국의 단일성과 불가분성”을 재천명하면서 자신들의 봉기가 연방주의 반란이라는 국민공회의 주장에 반대하는 가운데, 파리 민중의 무정부주의를 비판했다. 이 점에서 리옹의 반란은 과격한 산악파에 대한 중간계급의 반란이자 파리에 대한 지방의 반란이라는 성격이 강했다.

국민공회와 리옹의 대립은 내전의 위기로 치달았다. 7월 13일 마라가 암살당한 다음 날 국민공회는 뒤부아크랑세에게 리옹으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자유를 침해하고 애국파의 피를 흘리게 한 연방주의자를 가혹하게 응징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로베스피에르가 27일 공안위원회에 들어갔다. 리옹은 최고가격제를 폐지하고 루이 16세의 입헌근위대 중령이었던 프레시 백작을 군사령관으로 임명한 데 이어 샬리에를 비롯한 산악파를 처형함으로써 국민공회와의 타협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어 8월 9일 리옹의 민중위원회가 무조건 항복 요구를 거부하자 국민공회가 리옹을 포위 공격하며 약 2개월에 걸친 내전이 시작되었다. 리옹은 약 4천 명 정도가 적극적으로 항전에 가담했는데, 항전이 계속될수록 강제 동원자의 비중이 늘어났다. 리옹은 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파리의 공포정치처럼 내부 반대파를 처형하면서 버텼지만 결국 10월 9일 항복했다.

리옹 반란에 대한 전후처리 역시 방데 전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잔혹했다. 방데 전쟁을 비롯해 툴롱과 보르도 지방의 반란이 해결되지 않은 가운데 대외전쟁 역시 위협적인 상황에서, 공안위원회가 부유한 상인의 도시로 여겨지는 리옹에 대한 처벌을 반혁명에 대한 응징의 본보기로 삼으려 했기 때문이다. 국민공회는 리옹의 반혁명 범죄자들을 지체없이 처벌하기 위해 특별위원회를 만들었고, 바래르가 발의한 리옹 파괴 법령을 통과시켰다. 파견의원 쿠통이 리옹에 대한 처벌을 최소화하려 하자, 공안위원회는 10월에 콜로 데르부아와 푸셰를 후임으로 파견했다. 이들은 ‘공화국 감시 임시위원회’를 만들었고, 이 임시위원회는 지역 행정 감독, 탈기독교화, 교회재산과 부자들의 재산 관리 및 빈자에게 재분배, 최고가격제 시행을 추진했다. 리옹의 혁명재판소는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약 1천6백 명을 처형했는데, 이는 공포정치 기간에 프랑스 전체에서 정식 재판을 받고 처형된 사람의 11%에 달했다. 리옹 반란에 대한 전후처리는 무차별 학살은 아니었지만, 공안위원회가 원했던 대로 공포정치에 따른 ‘민중의 복수’를 수행한 것이었다.
 
 

3) 인민주권과 공포정치라는 쟁점

프랑스혁명에서 대표적인 반혁명으로 여겨졌던 방데 전쟁과 리옹 반란을 재조명하는 것이 단순히 프랑스혁명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데 그치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혁명의 인권선언에 잠복해 있던 인민주권과 공포정치라는 쟁점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전쟁과 내전을 거치면서 프랑스혁명은 인권선언에서 ‘이탈’했고, 이는 점차 일반적 상황으로 자리 잡았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를 지키는 것보다는 국가와 혁명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 우선시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혁명의 제1 과제를 ‘내부의 적’을 색출하고 파괴하는 것으로 만들었다. 

가장 먼저 제거된 적은 거부권을 행사해 전쟁 수행을 방해하는 국왕 루이 16세였다. 1792년 8월 10일 파리 민중과 지방에서 올라온 연맹군은 왕궁을 공격해 왕정을 무너뜨렸다. 나아가 9월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의 군대가 프랑스 국경을 넘자, 공포에 사로잡힌 파리 민중은 내부의 적을 처리한다는 명분으로 파리의 여러 감옥을 습격해 1천여 명이 넘는 수인을 무차별 학살했다. 이후 9월 21일 개원한 국민공회는 왕정 폐지를 공식 선언했고, 루이 16세를 재판에 회부해 처형했으며, “공화국의 단일성과 불가분성”을 의결했다.

그러나 “공화국의 단일성과 불가분성”을 강조할수록 혁명과 공화국의 분열은 심화했다. 먼저 앞서 살펴봤듯, 1793년 3월 방데 지방의 농민들은 혁명정부의 강제징집에 반대하며 국왕과 가톨릭교회 수호를 내걸고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다. 파리에서는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수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파리 민중과의 관계 설정을 놓고 의회 내에서 지롱드파와 산악파의 갈등이 격화했다. 지롱드파는 의회와 법의 지배에 호소한 반면, 산악파는 파리 민중의 순수함을 옹호하면서 인민주권의 이상에 호소했다. 
 

산악파인 로베스피에르는 이제 지롱드파가 민중의 의지에 반하는 반혁명 세력이라고 주장하며 민중봉기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에 따라 5월 말 파리 민중이 국민공회를 포위한 가운데, 국민공회는 지롱드파 의원 29명에 대한 체포를 결의했다. 인민주권과 공안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파리 민중과 산악파가 합법성의 보루인 의회를 제압하고 권력을 장악한 것이다. 그러자 지방이 정치적 기반이었던 지롱드파는 파리 민중과 산악파에 맞서 지방의 지원을 호소했다. 이에 반자코뱅 반란을 일으켰던 리옹을 비롯해 캉, 보르도, 마르세유, 툴롱 등에서는 국민공회에 합법적으로 존재하는 국민주권을 침해하는 파리 민중을 비판하는 청원서를 보내거나, 파리 민중으로부터 국민공회를 보호하기 위해 자원병을 파견하기도 했다. 

이러한 지방의 저항은 1792년 9월 이후 파리 민중이 국민공회를 무시하고 주권의 담지자임을 주장한 후 시작되었기에, 주권의 소재를 놓고 의회와 민중, 그리고 지방과 파리가 벌인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방데 지방을 중심으로 발생한 농민의 봉기까지 고려하면, 프랑스혁명사의 ‘지배엘리트와 민중’이라는 구도에서 ‘민중’이 결코 단일한 실체는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해, 파리 민중이 인민주권이라는 이름으로 프랑스 전체 인민을 과도하게 대표했던 것은 아닌지 재고해볼 수 있다.

인민주권의 이상을 현실의 공동체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현할 것인가를 둘러싼 투쟁은 결국 지방에 대한 파리의 우위와 산악파의 공포정치로 귀결되었다. 파리 민중은 코뮌과 민중클럽을 중심으로 의회를 끊임없이 압박하면서, 최고가격제와 같은 민중의 생존권을 위한 조치와 함께 모든 반혁명 용의자 체포를 비롯한 공포정치라는 비상수단을 수행하라고 요구했다. 로베스피에르를 비롯한 산악파는 이러한 파리 민중의 힘을 바탕으로 정치권력을 장악하면서, 민중의 정치적 폭력과 산악파의 공포정치를 정당화하는 이념과 논리를 선명하게 제시했다. 

로베스피에르는 일찍이 1791년에 루소의 일반의지론을 변용해 “부자들은 자신들의 개별적 이해를 일반적 이해라 일컬으며, 이 제멋대로인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사회적인 힘 일체를 가로챘다. […] 그러나 인민의 이해야말로 일반적 이해이고, 부자들의 이해는 개별적 이해다”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의견이 민중의 ‘일반적 이해’를 대표하고 있으며 ‘개별적 이해’를 대표할 뿐인 상대의 의견은 배제해야 한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마라는 ‘민중의 벗’을 자처하며, 주권자 민중이 ‘민중의 적’에게 저항하여 상대를 ‘절멸’하는 정의를 행사할 권리를 가진다고 역설했다. 

산악파는 1793년 파리 민중을 선동해 지롱드파를 의회에서 축출하는 데 이러한 논리를 최대한 활용했다. 지롱드파를 숙청하고 정치권력을 장악한 산악파는 1793년 7월 공안위원회에 광범한 행정권을 부여하고, 10월에는 ‘프랑스 정부는 평화가 도래할 때까지 혁명적이다’라고 규정하며 6월에 자신들이 제정했던 헌법을 평화 시까지 연기하는 비상 정체를 선포했다. 생쥐스트는 10월 10일 국민공회에서 헌법 시행을 유보하자고 제안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법은 혁명적이나 그것을 집행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 현재 공화국의 상황에서는 헌법이 정착될 수 없습니다. […] 헌법은 자유에 대한 모든 위해행위를 보장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응징하는 데 필요한 폭력수단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 정부가 혁명적으로 구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혁명적인 법이 집행되기는 불가능합니다.” 

또한, 산악파는 반혁명용의자법을 제정해 반혁명파로 간주되는 반대파에 대한 대량 처형을 시작했다. 이는 9월 파리 민중이 국민공회에 몰려가 요구했던 공포정치를 본격적으로 제도화한 것이었다. 당통은 이보다 앞선 3월 “민중이 무서운 일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가 무서운 일을 하자”면서 1792년 9월 학살과 같은 아래로부터의 공포정치를 위로부터의 공포정치로 수행하기 위해 혁명재판소를 설치하자고 주장했다. 

로베스피에르는 1794년 2월 ‘국민공회가 마땅히 따라야 할 정치도덕의 원칙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연설에서 “평화시 민중적 정부의 동력이 덕이라면 혁명시 민중적 정부의 동력은 덕인 동시에 공포입니다. 덕이 결여된 공포는 흉악하지만 공포가 결여된 덕은 무력합니다. 공포는 신속하고 준엄하며 단호한 정의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닙니다”라며 덕과 공포가 민주주의의 일반원리의 귀결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덕은 “조국과 법에 대한 사랑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아니”었기에, 개인적·시민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국가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덕과 공포의 지배는 국가와 혁명의 안전을 위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다는 이념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념은 방데 전쟁이나 리옹 반란과 같은 ‘반혁명’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정치적 반대파를 폭력으로 제거하는 자코뱅의 독재를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파리 민중이 요구했던 공포정치는 이내 민중 자신을 향해 되돌아왔다. 1793년 12월 4일 제정된 ‘혁명정부 조직법’에 따라 공안위원회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 체제가 확립되었다. 국민공회는 1792년 7월부터 시행된 구(區)의 상설화를 폐지하고 구의 회합을 일주일에 2회로 제한하거나, 과격한 민중 클럽과 여성 클럽을 폐쇄하면서 상퀼로트 운동을 순치해갔다. 그해 겨울 식량위기가 다시 발생하자, 상퀼로트의 이익과 열망을 대변하는 코르들리에파의 롱생과 에베르는 새로운 봉기가 필요하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1794년 3월 초 공안위원회는 이들을 체포하고 신속하게 처형했다. 나아가 3월 말에는 공포정치를 완화하고 1793년 헌법을 시행하라고 요구한 당통파 역시 체포한 뒤 처형했다. 로베스피에르는 “죄 없는 사람은 결코 공적인 감시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며 코르들리에파와 당통파에 대한 숙청을 정당화했다. 

그러나 공안위원회의 독재와 공포정치는 1794년 초 전세가 호전됨에 따라 점점 정당성을 잃어갔다. 로베스피에르파는 공포정치를 지속하기 위해 ‘풍월 13일의 법’(3월 3일)과 ‘목월 22일 법’(6월 10일)으로 공포정치를 심화했다. 먼저 풍월의 법은 가난한 애국파의 명단과 약 30만 명의 혁명의 적(정치적 수감자)의 명단을 작성하여, 혁명의 적의 재산을 몰수해 가난한 애국자에게 분배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실제로 시행되지는 않았지만, 로베스피에르가 1793년 헌법의 인권선언을 제안하면서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소유권에 제한을 가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 것을 구체화한 것이었다. 

한편, 목월의 법은 ‘혁명의 적’의 범위를 사실상 무제한적으로 확대했다. 목월 22일 법의 6조는 ‘혁명의 적’을 “애국심을 박해하고 중상하여 프랑스의 적의 계획을 도운 자, 사기를 떨어뜨리고 풍속을 타락케 하고 혁명 원리의 순수성과 에너지를 부패시키려고 한 자, 어떠한 수단에 의해서건 또 어떠한 외관의 그늘 밑에 숨어서건 공화국의 자유와 통일과 안전을 손상시키고 공화국의 굳건한 건설을 방해하려고 한 자”로 규정했다. 또한 공안위원회가 국민공회를 거치지 않고 직접 혁명재판소에 기소할 수 있도록 하며, 재판 절차를 간소화했다. 이에 따라 피고에 대한 변호와 예비심문제도가 폐지되었으며, 배심원은 심증만으로 심리할 수 있게 되었고, 재판소는 석방과 사형 둘 중 하나만을 선고하게 되었다. 이 법이 제정되기 이전 45일 사이에 처형자는 575명이었는데, 이 법이 제정된 후 로베스피에르가 몰락하기까지 45일 사이에 처형자는 1285명에 달했다. 그러나 이러한 ‘대공포정치’는 오히려 누구나 반혁명으로 몰릴 수 있다는 불안감을 증폭시켜 국민공회 의원과 공안위원회를 분열시켰고, 결국 7월 27일 로베스피에르파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4. 프랑스혁명사 논쟁의 현재성

 
버크는 일찍이 프랑스혁명이 한창이던 1790년에 저술한 《프랑스혁명 성찰》에서, 프랑스혁명이 제기하는 절대적 평등주의가 이내 공포에 기반한 법에 의한 지배와 교수대로 이어질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추상적인 인권선언에 기반한 프랑스혁명은 왕정을 무너뜨리고 민중의 자의적인 전제정으로 전락한 다음 최종적으로는 민중적 장군의 지배로 끝맺을 것임을 내다보았다.

프랑스혁명 당대에 제기됐던 버크의 비판은 1960년대 퓌레가 대표하는 수정주의 해석으로 부활했다. 수정주의 해석은 프랑스혁명이 정치적으로는 안정적인 헌정질서를 구성하지 못했고, 경제적으로는 구체제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소농사회에 머물렀기 때문에 부르주아 혁명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평가한다. 나아가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적 또는 자코뱅적 해석이 주목했던 자코뱅과 상퀼로트의 평등주의와 혁명적 폭력을 비판하면서, 이들의 이념과 운동은 진보적이라기보다는 반동적이라고 평가한다.

프랑스혁명의 ‘자코뱅적 전통’은 19세기 프랑스 사회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20세기 공산주의 역사와도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평등주의와 혁명적 폭력의 문제가 러시아혁명과 중국혁명에서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러시아혁명은 초기에는 체제 내 정치투쟁을 허용했지만, 내전을 거치며 ‘인민의 적에 대한’ 혁명적 폭력이 혁명의 완수를 위해 불가피한 것으로 정당화되었다. 레닌은 혁명적 테러가 ‘임시적’ 폭력임을 분명히 밝혔지만, 레닌 사후 사실상 영구화되었다.

리쩌허우는 중국혁명이 실패한 이유로 ‘부족한 것을 탓하지 않고 균등하지 못한 것을 탓하는’ 중국식 ‘큰솥 밥’ 평균주의나 집단주의와 같은 봉건성이 공산주의로 오해되며 극복되지 못한 데다가, 부르주아적 개인주의를 비판한다는 명목으로 혁명을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도덕주의가 만연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 점에서 프랑스혁명사의 수정주의 해석은 기존의 정통주의 해석에 대한 비판일뿐만 아니라, 20세기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이러한 수정주의의 비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말년의 퓌레처럼 혁명은 그 자체로 폭력을 내재하고 있기에 거부해야 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지만, 혁명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평등주의와 혁명적 폭력의 문제를 발본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정통주의와 수정주의의 논쟁이 정점에 이르렀던 프랑스혁명 200주년을 전후로, 발리바르 역시 이 문제에 천착했다. 그는 「마르크스라는 이름의 자코뱅?」(1989)에서 마르크스주의와 그 역사 속에서 자코뱅주의, 코뮌, 테르미도르의 반동 같은 프랑스혁명의 도식이 반복되었다고 지적하면서, 마르크스가 제기한 공산주의는 평등주의가 아니라 ‘각 개체성 간의 차이화’라고 말한다. 이에 따르면, 경제학 비판을 통해 도출된 부르주아 소유권에 대한 마르크스의 대안은 ‘개인적 소유권으로서 자기소유권’(노동권)이며, 노동권은 개인의 능력 차이를 부정하는 평등주의적 분배가 아니라 ‘능력에 따른 노동과 노동에 따른 분배’와 결합된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마르크스의 노동권을 핵심으로 하는 발리바르의 인권의 정치는 폭력 비판으로 발전했다. 그 요지는 인민의 적에 대한 형벌을 사회를 방어하고 변혁하는 수단으로 여기는 공포정치에 대한 대안이 바로 대중의 이데올로기적 갈등성이 극단적 폭력으로 발호하는 것을 제약하는 ‘시빌리테의 정치’라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폭력과 억압의 문제는 결국 계급투쟁에 대한 과학적 분석과 함께 봉기에서 변혁으로의 이행으로 해소되어야 하는 문제일 것이다. 이 점에서 프랑스혁명 기간 도시 민중이 요구한 평등주의와 혁명적 폭력의 이면에 분명히 사회경제적 배경이 존재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민중은 끊임없이 식량을 비롯한 생필품의 공정한 가격과 이를 위한 가격통제 조치를 요구했고, 매점매석을 일삼는 투기꾼을 반혁명 세력으로 단죄할 것을 요구했다. 도시 민중이 이러한 요구를 내건 배경에는 물가의 급격한 상승이 있었다. 프랑스혁명 기간 생필품 가격의 상승은 근본적으로는 혁명정부가 발행한 아씨냐 지폐의 가치가 하락했기 때문이었다. 

아씨냐는 본래 정부부채를 해결하기 위해 1789년 11월 몰수한 교회 토지재산을 담보로 하여 5%의 이자율로 발행한 공채였으나, 이내 이자율이 폐지되고 강제통용력을 가진 불환지폐가 되었다. 국민의회는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아씨냐를 남발하는 가운데, 정화(正貨)와 아씨냐의 교환을 허용하여 상품의 이중가격을 합법화하고 화폐의 평가절하를 가속했다. 1791년 봄에 정화에 대한 아씨냐의 교환시세 감소는 이미 15%에 달했다. 그리고 이는 전쟁과 맞물려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일으켰다. 민중이 요구하고 자코뱅이 수용한 최고가격제는 유통에서 생필품을 퇴장시키고 매점매석을 추동해 인플레이션과 폭동을 강화하는 악순환을 낳았다.

교회 재산 몰수와 아씨냐 발행은 구체제의 재정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일차적 방편이었다. 그러나 조세제도나 화폐신용제도와 같은 경제 제도를 재구성하지 않고 몰수만으로 재정위기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혁명 이후 구체제의 편법적 국고수입원이었던 관직매매는 폐지된 가운데, 기존의 세금은 1789년 예상액의 14%만 걷혔다. 1791년 새로 생긴 세 가지 직접세(부동산, 동산, 영업세) 역시 제대로 걷히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몰수의 범위는 ‘혁명의 적’의 재산으로 확대되었고, ‘혁명의 적’의 범위는 망명자에서 시작해 비애국적인 자까지 확대되었다. 프랑스혁명은 이 점에서 명백히 실패했고, 공포정치로 이탈했다.

수정주의 해석은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 프랑스혁명을 프랑스 사회 스스로 구체제의 자본주의적 가능성을 의식적으로 거부한 결과이자, 19세기 프랑스 산업의 장기적인 저발전의 첫째 장으로 묘사한다. 퓌레는 구체제와 혁명의 관계에 대해,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과 봉건제의 잔존 사이의 부조화로 보는 정통주의 해석을 비판한다. 그가 보기에 구체제의 부르주아는 대부분 보수적이고 후진적이며 지대추구적인 전(前)자본가에 불과했고, 프랑스 농업은 소농 중심의 낙후된 기술과 낮은 생산성에 머물러 있었다. 또한 퓌레는 프랑스혁명이 현대화를 오히려 지연시켰다고 본다. 프랑스혁명의 결과 새롭게 등장한 지배계급은 전쟁과 투기로 부자가 된 (구체제의 부르주아와 비슷한) 금융자본가와 청부업자였다. 그리고 영주제는 폐지되었지만, 소농경제에 기반한 프랑스의 농업적 특성은 혁명 이전과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이는 프랑스혁명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수정주의의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글에서는 프랑스혁명의 ‘과정’에서 나타난 혁명적 폭력에 초점을 두었다면, 다음 글에서는 프랑스혁명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수정주의의 비판에 주목해 보고자 한다. 혁명의 폭력과 억압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18세기 프랑스의 사회경제적 상황에서 프랑스혁명이 해결해야 했던 모순은 무엇이었고 해결하지 못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따져보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프랑스 계몽주의 지식인과 민중이 왜 봉기 이후 새로운 체계를 구성하는 데 실패했는지 고찰해볼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18세기 프랑스의 조세제도·신용제도와 농업경제의 상황을 영국과 비교해 보고, 각각이 프랑스혁명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프랑스혁명의 경제적, 사회적 결과가 어떠했는지도 살펴보고자 한다. 『프랑스혁명사는 논쟁 중』을 통해 프랑스혁명사를 논쟁적으로 읽는 것을 그러한 고찰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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