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2025 겨울. 193호
첨부파일
07_책소개_최현.pdf

민주노조운동의 혁신을 위하여

『투쟁의 역사, 성찰의 기록』

최현 | 회원

『투쟁의 역사, 성찰의 기록: 한국 노동운동사 1987~2025』

지은이: 박준형

출판사: 벽너머

출간일: 2025.10.25.

 

 

1. 민주노총 30년, 역사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1985년 구로동맹파업 40주년, 1995년 민주노총 출범 30주년. 2025년은 노동운동사에서 여러모로 중요한 해다. 민주노총도 출범 30주년을 맞아 민주노조운동의 역사와 성과를 돌아보고, 앞으로의 30년을 새롭게 열어가기 위한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 11월 15일, 전태일 열사 55주기를 맞아 열린 전국노동자대회 역시 민주노총 30주년 기념의 의미를 내세워 개최됐다. 민주노총은 자체적으로 『민주노총 30년사』를 출판했고, 11월 11일에는 30주년 기념식도 진행했다.

 

특별한 계기를 맞아 그동안의 걸음을 정리하는 과정은 소중하다. 특히 87년 노동자대투쟁을 이끌었던 선배 노동자 세대가 은퇴하고, 남은 세대가 새로운 운동의 흐름을 만들어가야 하는 지금, 과거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이처럼 민주노총 30년의 역사를 기념할 필요성과는 별개로,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과 그 내용의 한계에 대한 아쉬움과 우려의 목소리도 존재한다. 무엇보다 일부 간부들을 제외하면, 현장에서는 민주노총의 역사와 미래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거의 진행되지 않고 있으며, 조합원 상당수가 민주노총이 30주년을 맞았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준형 공공운수노조 교육국장이 민주노총 출범 30주년을 맞아 『투쟁의 역사, 성찰의 기록: 한국 노동운동사 1987-2025』를 발간했다. 저자는 출판 후 인터뷰를 통해 “승리의 역사, 진군의 역사”라는 서술에서 벗어나 “한계를 돌아보고 향후 과제와 전망을 수립하기 위한” 시선으로 남한 노동운동사를 정리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승리와 진군의 역사관은 지나온 30년을 되짚으며 서로를 격려하고 향후 운동을 함께 추동하는 데 의의가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의 민주노총 위상을 고려하면, 30주년을 축하만으로 보내기에는 분명 부족함이 있다.

 

87년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폭발했던 노동자들의 다양한 요구와 분노는 왜 이렇게 축소되었는가? 민주노총 창립선언문에서 밝힌 ‘산별교섭-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전략은 왜 후퇴했는가? ‘모든 노동자를 위한 민주노총’이 30년을 걸어온 사이에 노동자 간 격차와 사회적 불평등은 왜 더 확대되었는가? 이러한 물음에 답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방식에 변화가 필요하다. 바로 이 지점에 『투쟁의 역사, 성찰의 기록』이라는 책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80년대 후반 이후 한국 노동운동이 겪어온 주요 사건들을 소개하면서, 각 사안에 대한 비판적 평가와 쟁점을 제기하고 있다. 성찰적 시선으로 바라본 노동운동의 지난 30여 년 역사 속 쟁점을 더 많은 사람과 함께 이야기하길 바라며 이 책을 소개하려 한다.

 

 

2. 성찰의 시선으로 본 30여 년 노동운동 투쟁의 역사

 

이 책은 6개의 장과 1개의 부록(좌담회)으로 구성되어 있다. 1980년대 이후 노동운동의 주요 사건과 쟁점을 시대순으로 서술하면서도 단순한 역사적 사실의 나열에서 그치지 않는다. 『투쟁의 역사, 성찰의 기록』이라는 책 제목에 나타나듯, 현재 노동운동이 처한 곤란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에 대한 다양한 쟁점을 제기한다. 30여 년간 수많은 사람이 함께 만들어온 투쟁의 역사에 대한 성찰적 시선을 통해, 앞으로의 30년을 만들어가기 위해 탐색해야 할 다양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1장은 1980년대 중반부터 1996~97년 민주노총 총파업까지의 시기를 다룬다. 1985년 구로동맹파업을 통해 형성된 정치적 노동자운동의 성장과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터져 나온 대중적 분노를 그린다. 정치적 노동자운동과 대중적인 노동조합 조직이 결합하는 정점으로서 전노협 건설의 과정과 역사적 의의도 다룬다. 한편, 전노협에서 민주노총으로 조직이 재편되는 과정에서, 노동운동의 사회운동적 성격과 변혁적 이념이 옅어진 한계점과 그 이유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2장은 1997년 IMF 외환위기와 이에 맞선 노동운동의 방어투쟁을 다룬다. 노동운동이 정책적·이념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겪게 된 외환위기의 충격은 노동운동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 특히 노사정 대화기구 참여를 두고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첨예한 입장 차이, 노동시장 이중구조 고착화가 이때를 거치면서 구체적으로 형성됐다는 점에서, 이 시기 노동운동의 전략적 선택에 대한 면밀한 평가가 이뤄져야 함을 강조한다.

 

3장에서는 외환위기 이후 강화된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해결하기 위한 민주노총의 다양한 시도와 전략을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고용구조, 기업규모에 따라 심화하는 노동자 간 격차와 불평등에 맞서 민주노총은 기업별 노조를 넘어 산별노조 전환을 통해 변화된 조건에 대응하려 한다. 그러나 민주노총을 구성하는 다수가 이미 외환위기에서 살아남은 대기업과 공공부문 노동조합이었던 상황에서 산별노조 추진은 현실적 난관에 부딪힌다. 다른 한 축으로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전략조직화’로 새로운 운동 주체를 형성하려는 시도가 노동운동 내에 너르게 합의된다. 그러나 이 시기 민주노총이 집중했던 비정규직 조직화와 투쟁을 긍정적으로만 평가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4장은 2008~09년 금융위기와 그 이후 노동운동의 정체기를 다룬다. 산별노조-정치세력화라는 ‘양날개 전략’이 2010년대 들어 사실상 실패한 것으로 판명된 후, 노동운동이 기존 전략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고 평가하는 시간을 가지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성찰의 시기를 놓친 민주노조운동은 금융위기를 빌미로 벌어진 탄압에 대응할 때 과거의 기업별·방어적 투쟁방식을 고수한다. 한편, 금속노조, 공공운수노조 등 주요 산별노조에서의 산별교섭이 한계에 부딪히던 와중에 화물연대의 안전운임제나 건설·플랜트노조의 지역협약과 같은 새로운 영역에서 초기업교섭의 유의미한 시도들이 나타났다고 짚는다. 다른 한편 양날개전략의 한 축이던 진보정당 운동이 이 시기 들어 상당히 약화되면서 그 자리를 야권연대와 반(反)보수전선이 대체했다고 비판한다.

 

5장에선 문재인 정부 이후의 노동운동을 다룬다. 반보수전선 운동을 기반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는 ‘소득주도성장’과 공정경제’를 주요 정책으로 내세우며 ‘최저임금 1만 원 인상’과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 정책도 적극 추진한다. 그러나 이 정책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실패한 것으로 판명된다. 민주노총은 문재인 정권 초기부터 정부 정책을 비판적으로 지지하는데, 이는 민주노총 요구안 대부분이 문재인 정권의 노동공약으로 채택됐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서, 현실에서 드러난 문재인 정부의 정책 실패는 민주노총의 정책 실패로도 볼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또한, 조국 사태나 민주당 위성정당 파동을 겪으며 노동운동에서 10년 넘게 이어진 범민주·진보·야권연대라는 길을 반성적으로 평가해야 했으나, 그 시기를 놓쳤다고 지적한다.

 

6장은 ‘앞으로의 노동운동이 변화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노동운동의 변화와 진보를 위해 노동조합·민중운동 활동가들이 고민해야 할 다양한 쟁점을 던진다. 또한 과거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2020년대 노동조합이 주목하고 해결해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 밝힌다. 대표적으로 ▲ 연대임금 실현을 통한 노동자 간 격차 해소 ▲ 기업별 투쟁 지양 및 산별노조-총연맹 중심 강화 ▲ 범민주·진보 이데올로기를 벗어난 노동자운동의 정치적 독립성 확보 ▲ 새로운 운동 주체 형성이라는 새로운 목표와 과제를 제시한다.

 

 

3. 노동운동이 처한 난점, 활동가가 마주해야 할 쟁점

 

민주노총 설립 직후 곧바로 다가온 1997년 IMF 외환위기와 이를 빌미로 한 강도 높은 탄압과 방어 투쟁, 위기가 지나간 이후 심화한 노동자 사이의 격차와 저임금·장시간·불안정 노동의 확산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고 노동자 단결의 새로운 실마리를 찾아내는 것이 지난 20여 년간 민주노조 운동이 추구한 주요 목표였다. 그렇다면, 현재 시점에서 민주노총이 그 목표를 달성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사회 양극화의 주요 원인이 노동자 사이의 임금과 고용 불평등에서 기인한다는 점, 민주노총 구성원 다수가 그 격차의 가장 상층에 있다는 점은 민주노총이 ‘노동자 단결’이라는 목표를 실현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격차 심화의 구조를 함께 만들어온 것은 아닌가 하는 성찰로 나아가게 한다. 물론 이러한 평가를 자본과 보수세력이 주도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오늘날 노동운동이 심각한 곤경에 처해 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투쟁의 역사, 성찰의 기록』은 한국 노동운동이 부딪힌 난점이 어디서 비롯되었는가를 끊임없이 성찰하게 한다. 책을 읽고 난 후, 현재 노동운동을 하는 나(우리)에게 던져지는 다양한 질문들을 다시 곱씹어본다. ‘사회적 불평등 확대에 노동운동의 책임은 없는가?’, ‘사회적 대화를 둘러싼 격렬한 견해 차이는 과도하게 정치화되어 있지 않은가?’, ‘정리해고·비정규직 철폐 투쟁은 모든 노동자를 위한 투쟁으로써 적합한 전술이었는가?’ 등등. 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이지만, 대답하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다.

 

필자는 이 책에서 다룬 수많은 쟁점 중 핵심적인 몇 가지를 소개하려 한다. 책에서 제기하는 질문이 지난 30년을 함께 운동한 활동가들과 앞으로의 운동을 만들어갈 활동가들 사이에 서로의 생각과 경험을 이어주는 다리이자, 문제의식의 차이를 확인하고 합의를 이끌어가는 시작점이 되길 바란다.

 

쟁점 ① 민주노총 출범, 전노협 정신의 후퇴인가 확장인가?

 

1985년 구로동맹파업과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한국 노동운동의 질적 도약과 양적 팽창을 만든 결정적 두 사건이다. 구로동맹파업을 계기로 정치적 노동자운동이 활성화됐고,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민주노조가 폭발적으로 확대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두 흐름은 1990년 전노협 건설로 이어졌다. 흔히 전노협을 ‘민주노총의 전신’이나 ‘사회운동노조의 모범’으로 평가한다. 정치적 노동자운동의 발전과 함께 (지노협 등) 지역협의체와 지역 공동투쟁이 확산하는 흐름 속에서 건설된 전노협이 태생적으로 ‘기업 울타리를 넘어선 노동운동’, ‘임금격차의 해소’, ‘사회운동과의 긴밀한 결합’이라는 특징을 지녔기(혹은 지향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노협이 해산하며 조직적으로 확대·재편된 민주노총 건설은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1995년 민주노총 출범은 민주노조 진영이 하나의 조직으로 결집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그 힘을 바탕으로 출범 1년 만에 전국적인 총파업을 성사시키며 강한 투쟁력과 대중적 영향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민주노총 건설과 위력적인 총파업 투쟁은 당시 세계 노동운동 진영의 주목을 받기도 할 만큼 한국 노동운동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성과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사회운동노조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조금 다르게 평가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 전노협이 가졌던 사회운동적 성격은 1990년대 초중반이 되며 점차 약화한다. 경제 상황 변화와 산업 재편으로 인해 전노협의 주축이던 중소기업이 구조조정을 시행하고,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정부의 탄압이 노골화되면서 전노협이 조직적으로 축소된다. 또한, 정치적 노동자운동을 이끌던 활동가들이 노동조합운동에서 철수하고 정당운동으로 대거 이동하면서 사회운동과의 결합도 약화된다. 반면 재벌 대기업의 성장으로 대기업 노동조합이 급속히 확대되면서 노동운동의 중심축이 변화한다. 이처럼 경제 정세의 변화, 산업의 변화, 주체의 변화와 같은 다양한 요인으로 인해 ‘지역 연대, 정치·사회운동과 경제투쟁의 결합’을 중심으로 하던 민주노조운동의 방향도 변화한다. 대기업·공공기관 정규직 노동자들이 민주노총 건설과 투쟁을 주도하고, 노동조합 구성원의 다수를 차지하면서 경제주의적 경향과 기업별 노동조합의 특성이 강화된다. 노동조합 조직의 양적 확대라는 긍정적 평가와 이념적 축소라는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는 상황을 마주한 것이다.

 

저자는 현재의 민주노총이 보여주는 경제주의적 경향과 기업별 노동조합이라는 특징이 전노협의 ‘전투적 경제주의’에서 기인하고 있다는 점도 지적한다. 전노협이 건설될 당시 한국 노동시장은 노동집약적 산업에서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노동에 대한 군사적 통제와 고강도·장시간·저임금 노동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전노협은 노동탄압과 저임금에 맞서 전투적인 투쟁방식과 경제적 요구를 결합하는 ‘전투적 경제주의’를 실천한다. 저자는 전노협의 이러한 ‘전투적 경제주의’가 현재에 이르러서 비판적으로 계승·발전되지 못하고 기업별 ‘임금 극대화 전략’과 ‘기업별 노동조합 경향의 강화’로 이어졌다고 지적한다.

 

전노협이 점점 약화되고 대기업 노동조합이 민주노총의 중심이 됐다는 것만으로 민주노조운동이 ‘이념적으로 축소했다’라고 평가하는 것은 과도할 수 있다. 다만, 1995년 이후 지금까지 민주노총의 경제주의·실리주의 경향이 점차 강화되고, 노동자 내부의 임금 격차 확대에 대해 노동조합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 책임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현실은 ‘민주노총 건설 과정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한계와 문제점은 무엇인가?’를 질문하고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현재 노동운동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쟁점 ② 민주노총은 IMF 외환위기 대응에 성공했는가?

 

1997년 외환위기는 한국 사회의 경제구조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었고, 노동시장과 노동운동의 구조 역시 크게 변화시켰다. 저자는 책에서 외환위기에 맞선 민주노총 대응 투쟁이 ‘결과적으로 실패’했다고 평가한다. 이 시기의 정리해고 저지 투쟁을 거치며 민주노총 내에 기업별 투쟁의 관행이 굳어지면서 사회운동적 성격과 가능성이 더 퇴보했기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외환위기 극복 과정에서 대기업 자본은 정규직 고용을 보장하는 대신에 대규모 외주화에 나서 비정규직을 확대한다. 대기업 노동조합 역시 정리해고라는 극한의 투쟁을 경험하면서, 정규직의 고용 안전망으로서 비정규직 확대를 묵인한다. ‘대기업 사측의 비용절감’과 ‘정규직 노동조합의 보호주의’라는 암묵적 합의 속에서 한국사회 노동시장 분절화가 빠르게 고착한다.

 

이처럼 외환위기 이후 노동시장과 노동운동의 모습이 크게 변화했기에, 당시 민주노조운동의 전략과 투쟁에 관해 다양한 평가와 쟁점이 존재한다. 이 책에서도 기업별 대응 투쟁의 한계가 무엇인지, 노동시장 이중구조에 대한 노동조합의 책임은 어디까지인지, 이 시기 직후 벌어진 비정규직 주체들의 운동은 어떤 성과와 한계를 가지는지를 비롯해 노동운동의 외환위기 대응 과정에서 드러난 쟁점을 제기한다. 여러 쟁점 중 여기서는 현재도 첨예한 쟁점인 ‘사회적 대화’(노사정위원회)를 둘러싼 평가를 중심으로 책의 문제의식을 소개한다.

 

1997년 대선에서 당선된 김대중 후보는 IMF 체제 극복을 위한 ‘노사정위원회’를 제안한다. 비슷한 시기 민주노총도 ‘재벌개혁과 고용안정을 위한 노사정 사회협약 쟁취투쟁을 벌여나갈 것’을 결의한다. 노·정 각자의 필요가 맞물리면서 1998년 1월 15일, 최초의 노사정위원회가 출범한다. 당시 노사정위원회에서는 ‘노동조합의 정리해고 불가론’ 대 ‘정부의 정리해고 불가피론’이 극심하게 대립했는데, 합의는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 노사정위원회 출범 5일 만에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 간의 공정한 고통분담에 관한 공동선언문’이 채택되고, 곧바로 구체적 내용이 담긴 ‘사회협약’이 잠정합의된 것이다.

 

그러나 이 잠정합의는 노동계에 큰 논란을 일으키며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부결된다. 불과 1년 전 전국적 총파업을 통해 막아냈던 ‘노동유연화 3제’(정리해고제, 근로자파견제, 탄력근로제)가 잠정합의안에 포함됐기 때문이다. 정부는 민주노총 대의원대회 결정을 무시하고 관련 법안을 일방적으로 통과시킨다. 이 사태에 대한 책임으로 민주노총 1기 집행부가 총사퇴하고 2기 집행부가 새로 구성되지만 이후 상황도 비슷하게 반복된다. 노사정위원회 참여와 탈퇴, 갑작스러운 합의와 현장에서의 부결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사회적 대화를 둘러싼 다양한 논쟁이 벌어진다. 실용주의를 강조하는 입장은 ‘사회적 교섭을 통해 사회안전망을 조금이라도 확보해야 한다’라고 주장했고, 현장파는 ‘자본과 정책적으로 타협해서는 안 된다’라는 원칙을 내세우며 강하게 충돌한다.

 

이러한 논쟁과 충돌 과정에서 민주노조운동이 놓친 것은 무엇일까? 사실 당시의 노사정 합의를 살펴보면, 노동계에 불리한 요구로만 채워져 있지는 않았다. 노조의 정치활동 허용, 실업자의 초기업노조 가입 허용과 같이 노동기본권을 보장하는 조치를 비롯해 정부의 고용·실업대책 추진과 고용보험 확대 등 사회보장제도를 확충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민주노총이 노사정위원회 참여와 탈퇴를 반복하며 우왕좌왕하는 사이 이러한 정책의 실행을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운동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저자는 “결과적으로 보면, 민주노총은 정리해고제 도입을 위한 노사정 협약에는 잠정 합의를 해놓고, 경제위기가 심화한 상황에서 사회적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노사정 대화는 거부한 셈이 되었다”라고 평가한다. 필자는 이러한 뼈아픈 평가에 매우 공감했다.

 

또한, 위기에 맞선 민주노총·산별노조의 투쟁이 ‘산별과 총노동 차원’의 시야를 가지고 진행됐는가에 대해서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민주노총은 대기업 노동자 해고 저지 투쟁을 구조조정 투쟁의 최전선으로 인식하고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는 전술을 택한다. 기업별 노동조합이 정리해고에 맞선 생존권 투쟁을 벌이는 것은 당연하지만, 민주노총은 ‘총연맹’으로서 전체 노동자와 실업자를 대변하는 운동을 함께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기업별 대응에 거의 모든 역량을 쏟으면서 민주노총 내 기업별 투쟁의 관행이 더욱 굳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물론 당시 정리해고 칼바람이 워낙 매섭고 광범위했기에 현재 시점에서 당시의 민주노총 전략을 오류라고 비판하는 것이 과도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노동운동 내에서 ‘전투적인 투쟁’은 무조건 옳다는 관점이 우세하다. ‘고용안정기금은 해고를 정당화하는 수단이기에 받아들일 수 없다’라는 식의 주장이 주류를 이루며, 전투적 투쟁이 아닌 여타 전술과 실천에 대해서는 과도한 거부반응이 일어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총연맹과 산별노조가 마땅히 해야 할 ‘총노동·산별 차원의 정책적 모색과 실천’을 노동운동이 스스로 제약하고 있지는 않은가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즉, 노동운동이 경직된 원칙과 관성에 갇혀있는 동안, 민주노총의 기업별 투쟁 관행이 강화되고 사회운동적 성격은 계속 사라지고 있지 않은지를 되돌아봐야 한다. 1997년을 기점으로 형성된 불평등한 노동시장 구조와 노동운동의 한계를 질적으로 뛰어넘기 위해서, 이 시기 민주노총의 대응에 대한 평가가 활동가 사이에서 더 폭넓게 이뤄지길 바라본다.

 

쟁점 ③ 2008~09년 금융위기 대응 투쟁의 쟁점

 

2008년 세계 금융위기는 다시 한번 한국 제조업과 공공부문 전반에 구조조정 압력을 강하게 가한다. 그 속에서 2009년 쌍용자동차, 2011년 한진중공업에서 대규모 정리해고 반대 투쟁이 벌어진다. 두 투쟁은 정리해고 제도의 문제점, 공권력의 폭력적 진압, 자본의 징벌적 손해배상 청구 문제를 사회적으로 여론화하며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한다. 이를 바탕으로 ‘희망버스’와 ‘희망텐트’와 같은 기획이 시도되는데, 이는 노동조합 투쟁과 시민사회단체 운동이 결합하는 새로운 사회운동의 양상을 보였다.

 

저자는 이러한 투쟁의 성과와 의의를 밝히면서도, 다양한 측면에서 비판을 제기한다. 비판의 핵심은 1997년 외환위기 당시에도 나타났던 ‘기업별 대응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똑같은 투쟁방식과 한계를 반복했다는 점이다. 쌍용자동차와 한진중공업에서 대규모 해고가 발생하기 이전에, 이미 상당수 사내하청 노동자가 감축되었다. 대기업의 경영위기와 구조조정으로 인해 지역 내 여러 협력업체가 도산하며 지역 차원에서 실업자가 대규모로 확대된 것이다. 금융위기와 구조조정의 여파는 지역과 전체 노동자에게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지만, 이때 벌어진 노동조합 투쟁의 주요 요구는 ‘해고자 원직 복직’에 그쳤다.

 

개별 노동자와 기업 노동조합 차원에서 봤을 때, 해고를 자행한 기업에 대한 원직 복직 요구는 정당하고 필요하다. 그러나 민주노총과 산별노조가 모든 투쟁 역량을 개별 기업의 해고 저지 투쟁에만 집중시켰다는 것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한계다. 게다가 당시에는 이미 외환위기 시기에 기업별 투쟁의 결과로 노동시장 양극화가 심해졌다는 분명한 역사적 경험이 있었음에도, 다른 방식의 투쟁과 실천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점이 더욱 아쉽다. 민주노총과 산별노조는 개별 기업 조합원만의 노동조합이 아니라 전체 노동자를 대표하는 노동조합이어야 한다. 그렇기에 기업별 노동조합의 해고 저지 투쟁을 지원하는 것 외에도, 전체 산업과 지역 차원의 대책을 마련하는 데 더 역량을 쏟아야 했다.

 

그렇다면 외환위기와 금융위기, 두 차례의 위기 때마다 노동운동이 비슷한 한계를 반복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원인을 다양하게 분석할 수 있겠지만, 필자는 ‘위기에 대한 몰인식’이 주요 원인 중 하나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노동운동 내에서는 ‘경제위기는 구조조정을 위한 자본의 핑계’라는 입장이 주류를 차지한다. 또는 위기를 인정하더라도 그것을 ‘자본의 것’으로만 치부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렇기에 기업의 구조조정에 대항해서 노동운동은 ‘국유화 혹은 공적자금을 통해 해결하면 된다’라는 입장을 반복적으로 내세운다.

 

이러한 주장은 다소 단순한 측면이 있으며, 조금 더 강하게 말하자면 무책임한 측면이 있다. 공적자금을 투입해 위기를 지연시키거나 극복한 대다수 기업에서 해고자가 일부 복직하는 성과가 있기는 했으나, 그 외에 광범위하게 구조조정이 된 비정규직 노동자와 지역의 미조직 노동자에 대한 대책은 전혀 마련되지 않았다. 즉, 경제위기를 부정하며 기업별로 전투적 투쟁을 벌인 성과는 민주노총에 소속된 대기업 조합원들에게 돌아갔지만, 노동조합조차 조직할 수 없는 다수의 불안정·미조직 노동자들은 위기에서 보호받지 못했던 것이다. 사회적으로도 특정 기업 정규직 노동자의 고용 보호를 위해 개별 기업에 집중적으로 막대한 공적자금을 투입하는 것이 옳냐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경제위기가 발생했을 때, 고용 문제는 산업·지역·국가 차원으로 광범위하게 터져 나온다. 특히 애초에 고용이 불안정했던 노동자일수록, 노동조합이 없는 노동자일수록 위기는 현실로 다가온다. 민주노조운동이 조합원만을 위한 운동이 아닌, 전체 노동자를 위한 운동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위기에 대한 몰인식과 회피를 넘어서, 경제 정세에 대한 분석과 정책적 역량을 강화하고 기업별 투쟁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새로운 운동전략을 만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4. 결론: 성찰의 기록을 바탕으로 다시 그려갈 투쟁의 역사

 

위에서 짚은 민주노조운동의 여러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시도들은 꾸준히 이어졌다. 수많은 노동조합 활동가와 연구자가 기업별 투쟁의 한계에 대한 대안으로 산별노조 건설을 실현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과 실천을 벌여왔다. 그 결과 2006년에 금속노조가 (조직 체계상) 산별노조 건설을 완성하며 큰 진전을 보이기도 했다. 아울러 비정규직 전략조직화로 기존에 민주노총이 포괄하지 못했던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노동운동의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으려는 시도도 적극적으로 추진됐다.

 

그러나 금속노조가 산별노조로 전환한 동력이 살아있던 2000년대 후반의 구조조정 대응 투쟁에서도 기업별 투쟁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가운데 산별교섭 진행이 정체되면서, 2010년대에 들어서는 산별노조 운동이 현실적으로 실패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대규모 조직화와 투쟁 역시 ‘정규직 따라잡기’라는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가운데, 현재는 비정규직 운동도 새로운 활로를 찾지 못하고 주춤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가 잘해온 것은 무엇이고, 놓치고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원칙적 입장들이 부딪히며 정체하는 동안 건강하게 논쟁하고 충분히 실험하지 못한 전략들은 무엇이 있을까? 반복되는 한계와 난점 속에서 정체된 노동운동이 새로운 30년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다시금 지난 30여 년 역사에 대한 새로운 관점의 평가와 논의가 필요하다.

 

얼마 전, 저자가 출연한 라디오 인터뷰를 들었다. 저자는 최근 사회적 쟁점으로 불거진 ‘쿠팡 새벽배송 금지’를 둘러싼 사회적 대화의 중요성, 연이어 터지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산재 사망 사고에서 나타나는 노동시장 이중구조의 문제점, 기득권 노조로 낙인찍히고 있는 민주노총에 대한 비판적 인식의 기원에 관한 견해를 책의 내용과 엮어 설명했다. 오늘날 노동운동을 둘러싼 가장 첨예한 이슈들에 대한 저자의 생각과 분석을 들으면서, 이 책의 의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됐다. 과거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책이지만 현재 우리가 마주한 구체적인 쟁점들에 대해서도 수준 높은 통찰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성찰의 시선으로 역사를 바라봐야 하는 필요성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은 다양한 지역과 현장에서 활동하는 노동조합·단체 활동가들의 좌담회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를 포함한 7명의 활동가가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에 대한 각자의 평가와 현장에서 바라본 현재 노동운동의 주요 쟁점을 주제로 토론한 내용을 담은 것이다. 저자가 미처 서술하지 못했거나 강조하지 못한 부분들에 대해 다양하고 풍부한 논의를 담고 있다. 또 현장에서 직접 본 구체적인 한계와 조건들, ‘한계인 걸 알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구체적인 상황들’에 대해서도 생생하게 지적하고 있다.

 

필자는 책을 읽으면서 ‘내가 그 당시에 있었다면 이런 한계점들을 인식하고 더 나은 운동을 만들 수 있었을까’, ‘사후적인 평가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런 의문이 계속 떠올랐다. 그러나 좌담회 장을 읽으면서 『투쟁의 역사, 성찰의 기록』이 비록 인쇄된 출판물이지만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현재진행형’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많은 사람이 이 책을 읽고, 책에서 제기한 쟁점들을 주제로 더 폭넓게 논의할수록 책의 결론도 더 세련되고 가치 있게 다듬어질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내가 만나는 활동가들에게도 적극적으로 이 책을 추천(선물)하고 이야기해보는 시간을 가지겠다고 다짐한다.

 

저자는 어느 영화에 나온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라는 대사를 책의 서론과 결론에서 반복한다. 역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일이 과도하게 반성적이거나 주눅 드는 태도로 이어질 필요는 없다. 우리가 만들어온 과거는 치열한 모색과 실천, 그리고 그 실천을 가로막는 현실적인 조건이 만난 결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온 투쟁의 역사를 성찰함으로써 노동운동의 한계를 만들었던 구체적인 조건들이 무엇이었는지, 앞으로의 실천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내용은 무엇인지를 모색하자는 것이 이 책의 핵심 작의라고 생각한다. 책에서 제기한 역사에 대한 비판이 ‘반성’이 아니라 ‘성찰’임을 기억하면서 책 소개를 마무리한다. ●

주제어
노동 노조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