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선택할 미래가 과연 핵전쟁인가?
『24분: 핵전쟁으로 인류가 종말하기까지』
『24분: 핵전쟁으로 인류가 종말하기까지』
지은이: 애니 제이콥슨
출판사: 문학동네
출간일: 2025.3.17.
1. 고조하는 핵 위기
올해 9월, 원폭 80년과 해방 80년을 맞이하여 민주노총이 주최한 “기억을 계승하여 전쟁과 핵무기 없는 미래로! 한국-일본 피폭자 증언대회”(이하 ‘증언대회)가 열렸다. 그곳에서 알게 된 일본인 대학생 친구가 필자에게 언제부터 핵문제에 관심이 있었냐고 질문했다. 사실 한 번도 생각한 적 없는 질문이라 순간 당황했다.
지금은 너무 자연스럽게 핵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나, 돌이켜보면 핵문제에 관심이 없던 시기가 더 길었다.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의 비극을 몰랐고,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교과서로 배운 필자로선 대화를 통해 언젠가 북한의 핵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집권 세력에 따라 북한과의 긴장 관계가 심화하기도 했지만, 핵전쟁은 책이나 영화에 나올법한 하나의 이야기에 불과했다. 문재인 정부 초기에는 곧 남북한이 통일될 거라며 철도 주식을 사는 지인도 있었다.
그러던 중 하노이에서 열린 2019년 북미정상회담이 ‘노딜’로 끝나면서 처음으로 북한 핵문제에 진지하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북한 지도부가 미국의 비핵화 개념인 ‘CVID’(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폐기)를 받아들일 수 없음을 인정한 상징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하노이 노딜 이후 남북, 북미 간 관계는 심각하게 경색되었다. 북한은 자의적 판단으로 선제 핵 공격을 할 수 있도록 핵무력 정책을 변경했고, 70년 동안 유지하던 통일안을 폐기하고 남한을 적대국가로 규정했다. 아울러 남한과 일본을 타격할 수 있는 전술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 남한이 핵폭탄을 머리 위에 지고 살고 있음을 점차 깨달았다.
한반도 밖으로 시야를 넓히면 핵전쟁 위기가 더 가까워졌음을 알 수 있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는 핵무기 사용 교리를 개정해, ‘핵보유국의 지원을 받는 비핵보유국’(즉 우크라이나)이 러시아를 공격하면 핵무기를 사용하겠다고 선언했다. 중국은 어떤 국가보다도 빠른 속도로 핵탄두를 늘리고 있다. 핵위협의 위험성을 알리는 미국 《핵과학자회보》는 2025년 현재 인류종말까지 89초밖에 남지 않았다고 경고했다.
2. 절멸의 무기로서 핵무기와 핵 억지론
아슬아슬한 국제정세의 현실 속에서 필자는 핵무기의 위험성을 공부하면서 진실로 핵무기를 철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군사 안보 자료에 접근할 권한이 없고, 핵무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정치인들의 선동에 둘러싸여 있는 시민들은 핵무기의 위험성을 제대로 알기 어렵지만,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피폭자 1세와 그 영향 아래에 있는 2세의 증언을 통해 핵무기의 비인도성과 절멸성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나가사키를 인류의 마지막 피폭지로 만들기 위해 피폭 경험을 알리고 반핵 평화 여론을 모으고 있다. 올해 8월 히로시마-나가사키에서 열린 원수폭금지세계대회는 피폭 80년을 맞은 지금이야말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피폭 경험과 실상을 계승하고 확산함으로써 핵무기 철폐를 결단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들은 핵무기의 사용을 막고 핵무기를 철폐하기 위해서는 “핵 억지” 교리를 극복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졌다고 말한다. 핵 억지란 어마어마한 핵무기를 가지고 있으면 타국이 자국을 공격할 수 없다는 개념으로, 핵보유국과 핵우산 동맹을 형성한 국가의 안보 정책을 뒷받침하고 있다. 안보 위기가 심화할수록 핵 억지에 기초한 ‘힘에 의한 평화’를 주장하는 여론이 남한에서도 강해지고 있다. 그러나 원수폭금지세계대회의 주장처럼, 어떤 나라도 핵 억지력을 통해 자국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 현실에서는 오판이나 오인 등으로 인해 핵무기 사용 직전까지 간 사례가 반복해서 발생했다.
오늘 소개할 책 『24분: 핵전쟁으로 인류가 종말하기까지』(이하 『24분』) 역시 핵무기의 절멸성과 핵 억지의 허구성을 주장한다. 반핵평화운동이 과거 사례를 바탕으로 핵무기의 위험성을 경고한다면, 『24분』은 미국 영토로 핵미사일이 발사된 직후의 순간이 어떤 모습일지에 관한 가상의 핵전쟁 시나리오를 그린다. 저자인 애니 제이콥슨은 대통령 자문위원, 각료, 핵무기 공학자, 과학자, 군인, 항공병, 특수요원, 비밀요원, 재난 관리 전문가, 정보 분석가, 공무원 등 수십년에 걸쳐 핵전쟁 시나리오를 연구해온 사람들과의 독점 인터뷰를 진행하여 수집한 기밀 정보를 바탕으로 합법적으로 알 수 있는 정보의 경계선 극단까지 독자를 안내한다. 핵 억지의 실패를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고, 21세기에 핵전쟁이 일어난다면 어떤 참상이 일어날 수 있는지 상상하기 어려운 우리들에게 경각심과 반핵평화운동의 필요성을 일깨워주는 책이다.
저자는 1부 <빌드업: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에서 핵무기 보유의 역사를 설명하며 오늘날의 국제 정세에서는 언제든 핵 총력전이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2부 <첫 24분>은 북한의 화성-17 ICBM(대륙간탄도미사일)이 미국 안보의 핵심인 워싱턴D.C 펜타곤(미국 국방부 청사)을 향해 발사되고 나서 첫 24분간의 상황을, 3부 <이후의 24분>은 워싱턴D.C 상공에 핵폭탄이 투하되고 24분 동안 벌어지는 일을, 4부 <마지막 24분>은 미국이 북한의 핵폭탄 투하에 공세적으로 보복하는 상황을 포함한 24분을 서술한다. 핵전쟁의 전개 속도가 매우 빠르므로, 시나리오는 초 단위로 전개된다. 불행하게도 책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마지막 5부 <그 이후>에서는 핵전쟁이 종료된 후 벌어지는 암울한 미래, 즉 수십억 명이 사망하고 ‘핵 겨울’이 찾아온 지구의 모습을 설명한다. 저자의 구체적인 시나리오를 살펴보면서 우리가 맞이할 수도 있는 미래를 상상해보자.
3. 책 소개
1부. 빌드업: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1945년 8월과 달리 전체 핵무기 양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고, 핵무기의 위력은 더욱 강해졌으며, 핵무기 보유국도 늘었다. 핵무기의 위력을 인지한 미국이 핵무기를 늘려가던 중 1949년 8월 29일 소련이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자, 미국과 소련의 핵무기 보유·개발 경쟁이 가속화되었다. 1952년 미국은 수소폭탄으로 불리는 열핵폭탄을 발명했다. 열핵폭탄은 2단계 초대형 무기로, 핵폭탄 안에 핵폭탄이 들어있는 형태다. 실험을 통해 10.4메가톤의 열핵폭탄(히로시마에 투하한 원자폭탄의 700배 위력)이 섬 하나를 통째로 없앨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열핵폭탄은 수백 기씩, 수천 기씩 쌓여갔다. 1967년 미국의 핵 보유량은 3만 1,255기에 이르렀다.
단 한 기의 핵폭탄만으로 1천만 명이 넘는 사람을 죽일 수 있다 보니, 오늘날 미국의 핵무기 보유량은 1960년보다 감소했다. 그러나 여전히 1,770기의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고 그중 대다수는 당장이라도 발사할 수 있는 상태다. 전체 탄두의 개수는 5천 기가 넘는다. 러시아는 1,674기의 핵무기를 배치해두었는데, 그중 대다수가 당장이라도 발사할 수 있는 상태다. 게다가 수천 기를 비축하고 있어서 전체 보유량은 미국보다 많다. 현재 핵무기 보유국은 미국, 러시아, 프랑스, 영국, 중국, 파키스탄, 인도, 이스라엘, 북한까지 총 9개국이다. (국제사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핵무기 보유국은 미국, 러시아, 프랑스, 영국, 중국 등 5개국이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종결 후, 그다음 전쟁에 대비하여 최소 6억 명을 죽일 수 있는 핵 총력전을 준비했다. 바로 미 육군, 해군, 공군의 핵무기 작전 계획을 통합한 1960년 단일통합작전계획이다. 이는 소련을 상대로 한 선제 핵 공격·총력전 계획으로, 예상 사망자 수치에는 러시아의 동일 수준 반격으로 거의 확실하게 살해당할 약 1억 명의 미국인은 포함되지 않았다. 단일통합작전계획은 작전 계획 ‘아플랜(the Operational Plan, OPLAN)8010-12’로 이어졌는데, 이 계획은 러시아, 중국, 북한, 이란 등 네 개의 식별된 적을 겨냥하는 일단의 계획이다. 워싱턴에서 “소규모 핵전쟁 같은 건 없다”라는 말이 자주 반복되는 이유다. 『24분』은 이런 대량 학살 계획에 토대를 두고 있다.
2부. 첫 24분
이제 본격적으로 저자의 핵전쟁 시나리오와 마주해보자. 북한 시각으로 오전 4시 3분, 북한 평성에서 화성-17 ICBM이 발사된다. 대륙간탄도미사일인 ICBM은 대륙을 가로질러 표적지까지 핵무기를 운반하는 장거리 미사일이다. 화성-17 ICBM은 미국 본토 전역을 타격할 수 있다. 발사 후 10분도 채 되지 않아 미국 국방부 위성 체계의 경보가 울린다. 탄도미사일 발사, 경고!
이 시나리오의 심각성을 이해하려면, ICBM의 이동 속도와 추진 단계를 알아야 한다. ICBM이 막 발명된 1960년, 펜타곤의 수석 과학자 허브 요크의 연구에 따르면, 소련에서 ICBM을 발사하고 미국의 도시에 이르기까지 26분 40초가 소요된다. 이는 비행-추진 단계(5분)-중간궤도 단계(20분)-종말 단계(100초)로 나뉜다. 첫 단계인 추진 단계는 5분간 지속된다. 미사일이 발사대에서 로켓 모터에 시동을 걸고 우주로 향하는 동력 비행을 마칠 때까지의 시간이다. 동력 비행이 끝나면 보통 800~1,100km 고도에서 탄두가 방출된다. 두 번째 단계인 중간궤도 단계는 20분간 지속된다. 방출된 탄두가 지구 주위로 호를 그리며 우주를 가로지른다. 마지막 단계인 종말 단계는 단 1.6분(100초)이다. 탄두가 지구 대기권에서 다시 들어올 때부터 핵무기가 표적지에서 폭발할 때까지다. 이 시나리오에서 화성-17 ICBM은 발사 후 33분 뒤, 미국의 펜타곤에 떨어진다.
여기서 알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은 핵전쟁 시 공격에 대응할 시간이 매우 촉박하다는 점이다. 발사 후 3분 15초, 북한이 미국을 향해 공격용 미사일을 발사했음을 보고받은 미국 대통령은 겨우 6분 안에 어떤 핵무기를 발사해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 미국의 핵전쟁 전략은 경보 시스템이 핵 공격이 임박했음을 알리기만 해도 미국이 물리적으로 핵 타격을 받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상대국에 핵무기를 발사하는 ‘경보 즉시 발사’ 정책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핵무기 대부분을 발사 태세로 배치해둔 이유다.
하지만 경보 즉시 발사 정책이 정말로 인류에게 지혜로운 정책인지 물어야 한다. 미사일에 핵탄두가 탑재되어 있는지는 탄두가 터지기 전까지 알 수 없다. 상대의 패를 유추하고 자신의 패를 거는 도박과도 같은 불확실성이 핵전쟁을 지배한다. 이성적인 판단 역시 어렵다. 2025년에 개봉한 영화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는 핵 공격이 임박했을 무렵 인간이 얼마나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는지 보여준다. 원인 불명의 미사일 한 기가 미국 본토로 향하는 상황에서 미국 대통령은 보복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항복하거나, 더 강도 높은 대응으로 전면적인 핵전쟁에서 우위를 점해야 한다. 만약 여러분이 대통령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선택은 단 6분 안에 해야 한다. 결국 불확실성과 비이성은 핵전쟁의 또 다른 얼굴이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도박과 달리 핵전쟁은 수십억 명의 목숨을 앗아간다는 점이다.
일단 당장 미사일을 방어해야만 한다. 많은 사람이 군사력 1위인 미국의 미사일 방어 프로그램이 우수하다고 생각하지만, 2017년 미국의 미사일 방어 실험 성공률은 고작 40퍼센트다. 미사일 요격은 “총알로 총알을 맞추는 것과 비슷하다”라고 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다. 미국의 요격체는 겨우 44기밖에 없어서 그마저도 아껴 써야 한다.
발사 후 9분 10초, 미국의 요격 미사일이 화성-17 ICBM을 막는 데 실패했다. 영화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에서도 미국은 미사일 방어에 실패한다. 이제 화성-17 ICBM은 중간궤도 단계에 진입했다. 탄두는 위성 센서에 전혀 잡히지 않는 채로 지구 위 어느 지점의 고점으로 향하는 고속 궤도에 올라 날아간다. 이제 대통령이 행동해야 한다.
미국 대통령은 미국의 핵무기를 발사할 권한을 유일하게 가지고 있으며, 군사 자문위원이나 미국 의회의 동의 없이 핵무기를 발사할 수 있다. 종종 미국 대통령의 핵가방을 다룬 기사를 확인할 수 있듯이, 대통령 옆에 서 있는 군사보좌관은 대통령의 비상 가방인 ‘풋볼’을 들고 있다. 풋볼 안에는 핵 공격 같은 비상 시나리오가 발생하는 즉시 발효될 수 있는 행정명령과 메시지로 이뤄진 극비 서류가 있다. 그중에 하나는 ‘흑서’로, 사용해야 하는 핵무기, 타격해야 하는 표적지, 그 결과로 추산되는 사상자의 수가 적혀있다.
수십억 명의 목숨이 대통령 개인에게 달려 있고, 그가 언제든 핵무기를 발사하도록 명령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핵무기는 굉장히 위험하다. 우리는 핵전쟁 시 수십억 명의 운명과 인류의 미래가 극소수의 지도자에게 달렸음을 알아야 한다. 지금 당장 핵무기를 발사해야 한다는 전략사령본부 지휘관의 압박 속에서 갈등하는 사이 대통령은 비밀경호국의 특수 전술 부대원들에 이끌려 대통령 전용 헬리콥터인 마린 원을 타고 워싱턴DC 외부의 안전한 장소로 대피한다.
발사 후 16분, 저자는 북한의 두 번째 공격을 가정한다. 이는 잠수함에서 발사되는 탄도미사일인 SLBM 공격이다. 실제로 북한의 SLBM 개발 성공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저자는 2021년 북한이 일본 연안의 공해상으로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일 가능성이 높은 무언가를 발사한 사실을 바탕으로 북한의 SLBM 공격을 가정한다. ICBM의 별명이 ‘괴물’이라면, SLBM의 별명은 ‘종말의 시녀’다. 탐지하기 어려운 핵추진잠수함이 연안에 매우 가깝게 몰래 접근해 선제공격을 가할 수 있으므로 핵무기 발사부터 타격까지의 시간을 약 30분 혹은 그 이하로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대통령에게 핵 반격을 숙고할 시간이 단 6분간만 주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발사 후 21분, 우리는 핵전쟁에 ‘법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광기 어린 통치자들은 전쟁법을 따르지 않는다. “승리하면 해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전쟁법에는 국가 간에 절대 원자로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협정이 있지만, 북한 SLBM에서 방출된 핵탄두가 캘리포니아주의 디아블로 캐니언 핵 발전소를 타격한다. 이는 캘리포니아주 에너지 관료들에게 ‘악마의 시나리오’라고 알려진 것이다. 핵미사일이 원자로를 공격하면 원자로 노심이 녹아 결과적으로 수천 년 동안 이어질 핵 재앙이 초래된다. 전직 맨해튼 프로젝트 소속 물리학자 랠프 E.랩은 원자로의 노심이 붕괴될 경우 “이렇게 녹은 잔해는 원자로 용기 밑바닥에 축적될 수 있으며 (중략) 거대한 크기의 녹아버린 방사능 덩어리는 (중략) 땅속으로 가라앉아 약 2년 동안 계속해서 크기를 늘려간다. 액화된 방사성 용암과 끓어오르는 불로 이루어진 지름 약 30미터의 뜨거운 구체가 형성되어 10년간 지속될 수 있다”라고 했다.
발사 후 23분, 대통령은 급하게 대피하느라 핵 공격이 현실이 되어서야 북한의 SLBM 공격을 보고받는다. 대통령은 압도적인 핵전력으로 북한을 압박하여 항복을 이끌어내기 위한 ‘핵 억지 복구’ 원칙에 기반하여 50기의 ICBM과 각기 4기의 핵탄두를 장착한 8기의 SLBM 발사를 지시한다. 미사일은 북한의 핵·대량살상무기 시설과 지도부, 그 외의 전쟁 유지 시설을 포함한 82개의 표적지를 향해 날아간다. 북한 사람 수백만 명을 핵탄두 폭격으로 살해하는 것이 북한 지도자가 수백만 명의 미국인을 더 죽이지 못하도록 막는 최선의 선택이라는 가정이 뒤따른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핵 억지가 정말 복구될 수 있을까? 미국의 보복 공격을 우려할 수 있는 이성적인 지도자라면 미국을 공격할 수 있었을까? 이미 광기 어린 통치자의 선택으로 실패한 핵 억지는 쉽사리 복구되지 않을 것이다.
3부. 이후의 24분: 그라운드제로
이후의 24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날까? 『24분』은 평균적인 인간의 지성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핵무기의 위험성을 구체적인 상황과 과학적 사실에 기반해 설명한다. 이 시나리오를 통해 핵전쟁이 인류에게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고통을 줄 수 있는지, 어떻게 한순간에 인류가 공들여 쌓아온 문명을 파괴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디아블로 캐니언 발전소가 그라운드 제로가 되면서 캘리포니아주 전력망이 붕괴한다. 약 390만 명에게 더는 전력을 공급할 수 없다. 이제 라디오나 TV로 현재 상황에 대한 정보를 전달받을 수 없다. 핵폭탄은 지표면에서 폭발하여 지상 폭발보다 더 많은 양의 방사성 낙진을 만든다. 지름 1.6킬로미터의 거대한 불덩어리가 발전소 시설 전체를 집어삼킨다. 방사성 산불이 인근 산을 태우고 방사성 재가 공기를 가득 채운다. 차를 타고 대피하던 사람들은 교통이 마비되자 차에서 내려 달리기 시작한다. 반핵평화운동이 예고하고 경고했던 핵전쟁 비극의 시작이다.
발사 후 33분, 펜타곤이 그라운드 제로가 된다. 펜타곤을 타격한 1메가톤급 핵무기의 불덩어리는 정오의 태양보다 1천 배 더 밝다. 그 빛을 똑바로 본 사람은 누구나 눈이 먼다. 불덩어리는 1.7킬로미터로 늘어나 이 공간에 존재했던 사람과 사물은 모두 불타버린다. 1차 방사범위인 링1 내 건축물은 대체로 무너진다. 링1의 바깥쪽 테두리에서는 몇 안 되는 생존자들이 액화된 도로에 갇혀 불에 타들어간다. 수십 초가 흐르면서 불덩어리는 5킬로미터쯤 솟아오른다.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폐허와 불길에 갇힌다. 포토맥강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시신으로 꽉 막혔다. 링1의 사망률은 거의 100퍼센트다.
2차 방사 범위인 링2는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의 대다수가 3도 화상으로 죽어가는 구역이다. 대형 화재로 방출된 에너지는 최초의 핵폭발보다 15~50배 강력하다. 이는 지름 1미터 크기의 나무를 뿌리째 뽑아버리고 화재 바깥에 있던 사람들을 빨아들일 만큼 강력한 바람을 동반한다. 폭탄의 전자기 펄스(EMP)가 전기를 끊어놓아 물 펌프도 작동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라운드 제로 주변의 260제곱킬로미터(혹은 그 이상) 범위 내 모든 것이 불에 탈 것이다. 공기 중의 치명적인 방사성 물질이 생존자들을 위협한다.
현대인의 상식상, 재난이 일어나면 구조대원이 구하러 온다. 그러나 핵전쟁은 일반적인 재난이나 전쟁이 아니다. 『24분』은 시민들 스스로 알아서 생존해야 함을 일깨워준다. 핵전쟁을 대비하는 임무를 맡은 미국의 연방재난관리청은 핵 공격이 발생했을 때 작전 계획의 지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특정 정부 관료를 구하는 데 집중한다. 시민들을 구하고 싶어도 방사성 물질이나 화재 때문에 대원들이 핵폭발 지역 인근으로 갈 수 없다. 이미 구조대원들이 죽었을 수도 있다.
『24분』은 국가 간 긴장 관계와 안보 동맹관계 역시 놓치지 않는다. 핵전쟁이 미국과 북한만의 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핵전쟁은 러시아, 유럽, 한국 등으로 너무나 쉽게 확전될 수 있다. 아울러, 핵전쟁의 빠른 전개 속도와 정보의 불확실성, 국가 간 불신과 적개심, 지도자의 편집증은 확전을 부추긴다. 이미 러시아의 조기 경보 시스템은 미국이 북한을 향해 쏜 ICBM 50기와 SLBM 8기를 인지했다. 미국 대통령이 러시아 대통령과 통화하여 그 미사일은 북한을 향해 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확전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러시아 대통령이 그 말을 믿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러시아 본토 위로 미사일이 지나가는 상황에서 러시아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미국 대통령의 말을 신뢰할 수 있을까?
『24분』은 핵전쟁 시 미국 대통령마저 안전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 시나리오에서 미국 대통령은 핵폭탄의 전자기 펄스 영향으로 헬리콥터가 추락하기 전에 낙하산을 타고 하강하다 실종된다. 미국 대통령에게 연락받지 못한 러시아 대통령은 이미 불쾌함을 표시했다. 햇빛을 로켓 배기가스로 잘못 보고하는 등 심각한 오류를 반복한다고 알려진 러시아 경보 시스템은 미국의 ICBM과 SLBM을 수백 개의 미사일과 탄두로 오해한다. 러시아는 나토 회원국의 각 기지에서 병사들이 전투 준비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나토가 핵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고 받아들인다. 러시아는 미국과 동등한 수준의 핵무력을 갖추고 있으며 ‘경보 즉시 발사’와 같은 핵정책을 가지고 있다.
발사 후 45분, 국제사회가 러시아를 따돌린다는 편집증에 시달리던 러시아 대통령은 미국이 러시아를 공격했다고 생각하고, 1천 기의 ICBM을 미국으로 발사한다. 다소 극단적인 가정이지만, 정보의 오류, 이성적 판단의 어려움, 지도자 개인의 특징, 국제 관계, 러시아의 핵정책 등을 고려하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로 보인다. 북한은 미국을 향해 또 하나의 미사일을 추가로 발사한다. 주한미군 기지의 군인들은 남한이 북한의 다음 표적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4부. 이후의 (마지막) 24분
마지막 24분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핵전쟁은 최종적이다.” 러시아를 향한 미국의 공격, 북한의 82개 표적지를 향한 미국 미사일의 타격, 남한과 미국에 대한 북한의 공격, 미국과 유럽에 대한 러시아의 공격이 24분 안에 빠르고 복잡하게 진행된다. 특정 시간대로 상황을 서술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일이 발생하고, 또 많은 이들이 죽는다.
미국 대통령이 실종되고 펜타곤이 그라운드 제로가 되면서 워싱턴 DC에 있던 대통령 계승자 명단 상위에 있는 5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미리 워싱턴 DC에서 대피한 서열 6위 국방부 장관이 대통령 권한 대행으로 취임한다. 그가 취임하자마자 할 일은 대통령과 똑같이, 6분 내에 어떤 핵무기를 사용할지 정하는 일이다. 1천 기의 ICBM을 발사한 러시아를 공격하기 위해 미국의 육해공 핵 삼위일체의 전력이 투입된다. 각 1기의 핵탄두를 장착한 400기의 ICBM을 발사하고(육상), 다수의 핵탄두를 장착한 SLBM을 여러 기 실은 핵무장 잠수함 14척(해상)과 다수의 핵탄두를 장착한 66기의 핵 탑재 폭격기(공중)를 출격시킨다. 핵탄두는 러시아의 대량살상무기 시설, 전쟁 유지 산업체, 지도부를 타격하기 위해 975개의 표적지로 향한다. 이 세 범주에 속하는 수많은 표적지는 인구밀도가 높은 러시아의 도시 지역에 있다.
종전에 발사한 미국의 미사일이 북한의 82개 표적지를 타격한다. 몇 분 전 워싱턴 DC에서 일어난 일이 북한에서 82번 일어난다. 그라운드 제로의 지름 5킬로미터 고리 안에 있던 모든 것이 타버린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이 과정에서 소각되고 거리 위에 녹아내리고 화재의 허리케인에 휩쓸려 들어간다. 미국 역시 법을 지키지 않고 핵 시설을 타격한다. 중국 단둥과 겨우 48킬로미터 떨어진 북한 서해에도 핵폭탄이 떨어지면서, 중국 시민 수십만 명이 갑자기 죽거나 다친다. 중국도 핵전쟁에 끼어들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수백만 명이 죽어가는 동안 백두산 지하 벙커에 있는 북한 최고지도자는 남한을 향한 공격을 명령한다. 2021년 국방정보국 분석가들은 “북한에 신경마비와 물집, 출혈, 질식을 일으키는 물질을 생산할 수 있는 화학전 프로그램이 있다”라고 경고했다. 화학무기를 실은 1만 기 이상의 발사체가 남한 곳곳을 타격한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남한 방어 프로그램의 능력도 뛰어나지 않다. 한 번에 몇 기의 미사일만 처리할 수 있는 THAAD(종말 단계 고고도 미사일 지역 방어 체계)는 1만 기에 이르는 공격 앞에서 무력하다.
이 시나리오에서 정점은 북한이 전자기 펄스(EMP) 공격을 위해 위성에 소형 핵탄두를 실어 궤도에 올린 뒤 미국 상공에서 핵탄두를 터뜨리는 일이다. (이를 ‘슈퍼-EMP’라고 한다.) 전직 미국 미사일 방어국 국장인 헨리 쿠퍼 대사는 미국 상공에서 고고도 전자기 펄스가 폭발할 경우 “미국의 전력망이 무기한 차단되어, 1년 안에 미국인의 최대 90퍼센트가 사망에 이를 수 있다”라고 두려움을 표명했다. 북한의 전자기 펄스 공격에 대한 미국의 두려움은 2012년부터 주류적 인식이 되었다. 핵무기 공학자 오버그는 북한에 다녀온 뒤 슈퍼-EMP 공격이 실현 가능하다고 주장하며 이를 ‘둠즈데이 시나리오’라고 불렀다. 실제로 2016년 2월, 북한은 소형 핵탄두를 실을 수 있는 유상하중을 가진 위성을 성공리에 발사했고, 위성은 미국 바로 위를 지나갈 수 있다. 합리적인 이성을 가진 지도자라면 슈퍼-EMP 공격을 하지 않을 수 있지만, 모든 지도자가 합리적이리라는 법은 없다. 이 시나리오는 이미 광기 어린 통치자 1인의 선택으로 핵 억지가 무너진 상황을 바탕으로 한다.
발사 후 55분, 북한이 미국 상공 480킬로미터 지점에서 슈퍼-EMP를 터뜨리며 둠즈데이 시나리오가 실현된다. 21세기 미국은 전기로 동력을 공급받고 마이크로프로세서 칩으로 설계된 복잡계다. 미국의 전력 공급망, 발전소, 발전기, 변전소, 고압 송전선, 배전선이 고장나고 망가진다. 가장 문제는 미국의 감시 제어 및 통제 시스템 ‘SCADA’(Supervisory Control And Data Acquisition)의 붕괴다. SCADA가 무너지며 수천 대의 지하철과 여객열차, 화물열차가 서로 충돌하거나 벽과 장벽을 들이박거나 탈선한다. 엘리베이터가 층 사이에 멈추거나 빠르게 지상으로 떨어져 박살난다. 위성이 제자리에서 벗어나 지구로 추락하기 시작한다. 미국에 남아있는 53기의 원자력 발전소는 이제 모두 예비 시스템으로 작동하여 시한을 두고 가동하기 시작한다. 조종 계통을 컴퓨터 전기 신호 장치로 바꾼 비행기들은 격렬하게 지상으로 향하고, 지상의 중요한 기간 설비 체계가 망가져 대규모 홍수가 발생한다. 인간의 배설물과 쓰레기, 시체 더미를 먹고 사는 벌레들이 들끓기까지 15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한편, 러시아의 SLBM이 미국과 유럽 전역의 나토 기지를 타격한다. 벨기에,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튀르키예 공군기지들이 사라진다. 그 외에도 저자는 파리, 베를린, 브뤼셀, 암스테르담, 로마, 앙카라, 아테네, 자그레브, 탈린, 티라나, 헬싱키, 스톡홀름, 오슬로, 키이우를 러시아가 표적지로 삼을 것이라 상정한다. 곧이어 1천 기의 러시아 핵탄두가 미국을 20분 동안 폭격한다.
핵무기는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을 무위로 돌린다. “모두가 패배한다.”
5부. 이후의 24개월과 그 너머
핵전쟁이 세상의 종말이 될까? 필자는 영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2015)와 그 후속작인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2024)을 통해 핵전쟁 이후의 세상을 상상할 수 있었다. 두 영화는 핵전쟁으로 현대 문명이 멸망한 22세기를 배경으로 한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속 시민들은 굶주림에 고통받으며 깨끗한 물을 독점한 독재자 임모탄의 지배하에 살아간다. 임모탄을 비롯한 지배 세력은 방사능에 오염되어,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방사능에 오염되지 않은 여성들을 가둬놓는다.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는 한정된 자원을 두고 벌어지는 폭력 집단 간 전쟁을 전편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한편, 핵전쟁 이후에도 살아남은 ‘녹색의 땅’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24분』의 5부는 두 영화와 마찬가지로 핵전쟁 이후 사람들이 방사능에 오염되고, 환경오염으로 자원이 부족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시나리오를 읽어보면, 두 영화의 세계관은 희망적인 편에 가깝다. 방사능에 오염되지 않은 사람이 있을지, 핵전쟁 이후에도 ‘녹색의 땅’이 존재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그만큼 대규모 핵 교환의 영향은 인간의 상상력을 뛰어넘는다.
저자는 과학자들의 주장을 근거로 최악의 시나리오인 ‘핵겨울’을 가정한다. 칼 세이건은 “핵 교환을 통해 10억 명이 넘는 사람이 즉시 죽을 것이다. 그리고 장기적인 결과는 훨씬 나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미국의 모든 도시와 숲의 오랜 화재에 따른 부산물로 약 1,500억 킬로그램의 재가 대류권 상부와 성층권으로 솟아오른다. 유럽, 러시아, 아시아 일부 지역도 마찬가지다. 이 검은 가루 같은 재가 햇빛을 막아, 지구에 가혹하고 긴 저온 현상이 이어진다. 지구는 ‘핵겨울’이라 불리는 새로운 공포로 접어든다. 여전히 살아있는 사람들은 염색체 손상, 실명, 불임, 난임을 겪으며 추위와 싸워야 한다.
강수량이 50퍼센트 줄어들면서 농업이 종말한다. 기를 것이 거의 남지 않아 농장 공동체를 시작할 수 없고, 영하의 기온이 작물을 망친다. 화재폭풍은 토양과 씨앗을 훼손시켰다. 사람들이 이제는 굶어죽기 시작한다. 화학 폐기물, 수백만 구의 녹아가는 시신, 석유와 가스에 오염되지 않은 물을 찾으려는 노력도 식량을 찾으려는 노력에 필적할 정도로 절박하다.
여러 달이 지난 후, 태양의 따뜻한 광선이 이제는 살인적인 자외선을 내리쬔다. 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핵폭발과 이어지는 화재폭풍이 오존층의 절반 이상을 파괴한다. 따라서 핵전쟁 이후 15년이 지나면 오존층이 전 세계에서 최대 75퍼센트 사라질 수 있다. 빙하와 함께 시신이 녹으면서 뇌염과 광견병, 발진티푸스 등 곤충 매개 질병이 발병해 전 세계적으로 유행한다. 과연 그 속에서 인류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미래의 인류가 현재 인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까? 핵 억지에 기반한 안보 정책을 유지하는 이상, 비이성적인 지도자의 우발적 선택으로 인해 핵폭탄이 언제 터질지 예측할 수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인류의 지속가능성을 질문할 수밖에 없다.
4. 우리가 만들 미래는 핵전쟁인가, 핵무기 없는 세상인가
『24분』은 현실이 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제시하면서, 우리가 만들고 싶은 미래가 무엇인지 물어보는 듯하다. 우리가 살아가고 싶은 세상은 핵전쟁으로 인류의 존속을 담보할 수 없는 미래인가? 핵무기를 완전히 철폐한 세상인가? 핵 억지가 허구적 믿음에 불과한 상황에서 핵무기는 그 자체로 인류에게 위협이며 적이다. 단호히 핵무기 없는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핵무기 완전 철폐는 분명 어려운 일이다. 핵 강대국들이 핵무기를 현대화하고 전쟁에서 핵무기를 사용하겠다고 위협하면서, 남한에서도 자체 핵무장을 해야 한다는 여론과 미국과의 핵우산 동맹을 강화해야 한다는 여론이 강해지고 있다. 안보 정책과 핵무기 사용권이 소수의 지도자에게 달렸다는 점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막막해 무력해지기도 쉽다.
하지만 핵무기를 통제하고 철폐하기 위한 세계 반핵평화운동과 국제사회의 노력 덕분에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이후 80년 동안 핵무기가 한 번도 실전에 사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냉전 시기 유럽의 핵군축운동은 비핵화지대 건설을 목표로 국가의 경계를 뛰어넘어 운동했고, 1987년 미국과 소련이 중거리핵전력조약(INF)을 체결하여 아시아와 유럽 전역에서 모든 중거리 및 단거리 미사일을 철수하고 폐기하게 했다. 일본의 반핵평화운동은 대대적으로 반핵여론을 조직하여 일본이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고, 생산하지 않으며, 반입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비핵 3원칙’을 약속하도록 만들었다. 일본의 원수폭피해자단체협의회는 핵 금기 확립에 크게 기여한 점을 인정받아 202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2021년 유엔에서는 핵무기금지조약(TPNW)이 발효되었다. 이 조약은 핵무기의 개발, 실험, 생산, 보유 및 사용을 전면적으로 금지하는 최초의 국제법적 구속력이 있는 조약으로 의미가 상당히 크다. (구체적인 내용을 알고 싶다면 사회진보연대 소책자 『핵무기 없는 평화로운 세계로』 3부를 읽길 추천한다.) 2025년 현재 98개국이 핵무기금지조약에 서명하고 73개국이 비준했다. 그러나 핵무기를 보유한 9개국과 한국, 일본은 이 조약에 서명도, 비준도 하지 않고 있다. 1980년대 유럽 반핵평화운동이 “핵무기 없는 세상, 우리부터 시작하자”고 외친 것처럼, 미서명·미비준 국가들이 조약에 서명하고 비준하도록 각 나라의 시민들이 “우리부터 조약에 함께하자”고 정부를 압박해야 한다.
나아가, 핵무기는 한 국가만 해결해서 될 일이 아니기 때문에 국경을 뛰어넘는 국제 연대가 필요하다. 필자는 올해 9월 10일 민주노총 주최로 열린 ‘기억을 계승하여 전쟁과 핵무기 없는 미래로! 한국-일본 피폭자 증언대회’와 다음날 원수폭금지일본협의회 주최로 열린 ‘한·일 반핵평화 운동 교류회’에 참여했다. 국내 반핵평화여론 형성을 위해 한일 간 연대를 강화하고, 한국 반핵평화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일본 반핵평화운동의 사례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국 사회는 핵무기를 일본의 식민지배를 끝낸 정의의 무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고, 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범죄를 근거로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문제를 일본이 자초한 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분명 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범죄는 비판받아 마땅하나, 이를 이유로 핵무기의 위험성에 관한 문제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해서는 안 된다. 식민지배와 전쟁범죄를 반성하는 동시에 핵무기의 위험성을 알리는 일본 반핵평화운동과의 교류는 분명 한국에서 반핵평화 여론을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한국의 사회운동이 ‘비핵 일본 캠페인’ 사례를 참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비핵 일본 캠페인은 일본 정부의 핵무기금지조약 참가를 요구하는 캠페인으로, 피폭 증언과 함께 핵무기가 얼마나 비인도적인 무기인지 사람들에게 알리고, 자국 정부의 핵무기금지조약 참가를 요구하는 여론을 조성해오고 있다. 비핵 일본 캠페인은 현재 178만 명의 서명을 모으고, 전국의 지자체 41%가 일본 정부에 핵무기금지조약 참가를 요구하는 결의서를 채택하게 했다. 필자는 이로부터 우리도 노력하면 변화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느꼈다.
우선, 핵무기의 위험성을 알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면 좋겠다. 한국은 핵전쟁 위협에 극명하게 노출되어 있지만, 핵 문제에 관심도 적고 위기감도 약하다. 필자 역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러했다. 핵무기의 위험성을 잘 모르기 때문에 핵무기 개발과 보유에 찬성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올해 필자가 속한 노동조합에서 조합원 교육을 한 결과, ‘핵무기를 잘 몰라서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핵무기의 위험성을 알고 난 후 핵무기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라고 답변한 후기가 상당히 많았다. 비인도적 무기이자 인류 절멸의 무기로서 핵무기에 대한 정보를 널리 알린다면 핵무장 여론을 제어하고 반핵평화 여론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24분』의 시나리오 역시 활용할 수 있겠다.
1백만여 명의 시민이 속한 민주노총의 사회적 역할과 영향력이 상당하므로, 민주노총과 소속 노동조합에서부터 조합원 대상 핵무기 교육을 하고 피폭자 증언대회와 같은 교류 행사를 지속한다면 한국의 여론도 점차 변화할 수 있지 않을까? 핵전쟁으로 인류가 멸망한 세상이 아닌, 핵무기 없는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바를 하나씩 모색하고 실천해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