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질서가 해체되어 가는 세계
2026년 국제정치 전망
올해 전 세계는 공동의 규범이 무너지고, 힘과 권위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증가하는 현실을 마주했다. 특히 국제질서의 리더이자 ‘세계의 경찰’을 자임하던 헤게모니 국가인 미국에서 다시 등장한 트럼프 행정부는 적극적으로 국제질서를 훼손하고 있다. 동시에 세계적으로 정치위기, 군사위기가 고조된 가운데 우크라이나 전쟁과 팔레스타인 전쟁은 여전히 끝나지 않고 있다. 작금의 현실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이 서로 협력해 국가 간 관계를 조직했던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무너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2026년 국제질서는 어떤 도전과 변화를 마주할 것인가? 사회진보연대는 현 정세를 ‘인민주의, 권위주의, 팽창주의의 난입’으로 규정한 바 있다. 이 글은 자유주의 국제주의에 기반한 국제질서가 내적으로는 인민주의 세력에 의해, 외적으로는 권위주의 정권에 의해 도전받고 있다고 지적한다. 2026년에도 이어질 핵심 쟁점을 중심으로 그 구체적인 양상을 살펴본다.
1. 민주정에 대한 위협
현존하는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19세기부터 서구를 중심으로 자유주의적 헌정 민주주의(헌정주의)의 부상과 함께 등장했으며, 이들 국가 주도하에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며 달성, 구축되었다. 그만큼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헌정 민주주의와 불가분의 관계다. 그러나 2025년은 그러한 질서를 주도했던 나라들, 특히 미국과 유럽에서 헌정 민주주의의 위기가 두드러지게 나타난 해였다. 트럼프 2기 행정부는 미국 민주정의 제도와 관행을 파괴했으며, 유럽을 비롯한 여러 선진국에서는 트럼프주의를 모방하는 정치세력이 눈에 띄게 부상했다. 내년에는 미국 중간선거와 헝가리 총선을 비롯해 60여 개 국가의 크고 작은 선거가 예정되어 있다. 헌정주의를 훼손하는 포퓰리즘 세력이 더 약진하는 결과가 나타날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이 장에선 미국과 유럽에서 트럼프주의를 비롯한 포퓰리즘 세력의 도전에 대해 다룬다.
1) 누가 트럼프를 견제할 수 있을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1월 20일 취임한 이후, 미국 정치는 ‘트럼프주의의 제도화’와 그에 따른 기존 정치제도와 관행의 붕괴로 요약할 수 있다. 집권 후 트럼프 행정부는 헤리티지 재단이 작성한 「프로젝트 2025」에서 제안된 단일행정부론에 입각한 정책을 실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프로젝트 2025」 설계자 중 한 명인 러셀 보트를 백악관 예산관리국장으로 임명했다. 뒤이어 2월 18일과 19일 행정명령을 통해 예산관리국장에게 연방기관 정책을 검토하고 자금지출을 통제할 권한을 부여했다. 아울러 행정절차를 집행할 때 연방기관이 예산관리국, 행정규제검토처와 협의하도록 의무화했다.
이런 조치를 바탕으로 트럼프 정부는 독립성을 보장받았던 연방기관장을 대거 해고했다. 전미노동관계위원회(NLRB) 윌콕스 위원을 비롯해 여러 연방기관장은 ‘험프리 대 미국정부 사건’(1935)에 근거해 해고무효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5월 연방대법원은 행정권은 대통령에게 있다며 대법원에서 최종판결을 내리기 전까지 하급법원에서 이들에게 내린 복직 명령을 정지시켰다. 한편, 트럼프 행정부는 연방준비제도 이사에 스티브 미란을, 행정부 공직자 인사검증을 담당하는 백악관 인사국장에 댄 스커비노를 임명했다. 즉, 친트럼프 인사를 행정부 요직에 임명하며 행정부를 장악하는 중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대학과 언론에도 전례 없는 압력을 가했다. 4월 23일 행정명령을 통해 미국 주요 대학이 해외 기부금을 공개하고, 대학이 이를 따르지 않을 때 교육부장관이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정책 변경을 요구하며 저항하는 대학들의 연방정부 보조금을 삭감하겠다고 압박했다. 그 결과 하버드, 시카고, 컬럼비아 대학 등 미국 주요 대학들의 연방정부 보조금이 삭감됐다. 또한, 5월 1일 행정명령으로 공영방송과 공영라디오에 대한 보조금 지원을 중단했다. 그리고 연방통신위원회를 통해 지상파 라이선스 갱신 취소를 위협하며 주요 지상파 방송사인 CBS, NBC, ABC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비판적인 방송 프로그램을 폐지하라고 압박했다. 이와 함께 AP, CNN을 비롯한 정권에 비판적인 언론사 기자들의 백악관 출입을 제한했고,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과 같은 대형 언론사에 거액의 소송을 제기했다.
트럼프 정부의 행정기관 장악, 대학과 언론에 대한 압력에 많은 지식인이 반발했다. 예일대학교의 제이슨 스탠리와 티모시 스나이더 교수를 비롯한 여러 연구자가 해외로 이직했다. 3월 《네이처》의 연구에 따르면, 과학계 연구자 가운데 75%가 대학에 대한 압박 심화로 미국을 떠날 것을 고려 중이라고 밝혔다. 대중의 반대 시위도 거셌다. 4월 ‘손 떼라’ 시위, 그리고 6월과 10월에 ‘노 킹스’ 시위를 비롯해 트럼프 행정부의 권위주의적 행보에 반대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특히 10월 2차 노 킹스 집회에선 2,700개 이상의 도시에서 700만 명이 넘는 시민이 모였다. 이는 미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단일 시위였다.
많은 지식인과 대중의 반발에도 트럼프 정부는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 유고브, IPSOS를 비롯한 각종 여론조사에서 트럼프 대통령 지지율은 임기 시작 이래 40%선을 대체로 유지하고 있으며 특히 공화당 지지층에서 80% 가까이 지지율을 지키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러한 지지를 바탕으로 권위주의적 행보를 펼치고 있다.
게다가 2026년에는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과 진 도다로 연방회계감사원장의 임기가 종료될 예정이다. 이 자리마저 친트럼프주의 인사가 임명되면, 트럼프 대통령을 견제하기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따라서 2026년 미국 정치의 주요 화두는 ‘누가 트럼프 행정부를 견제할 것이냐’다. 이제 트럼프주의 세력과 민주당의 동향을 살펴보겠다.
(1) 트럼프주의는 강화될 것인가, 분열할 것인가?
2025년은 트럼프주의 세력에 중요한 변화가 나타난 해로 평가할 수 있다. 그 계기는 바로 ‘터닝포인트 USA’(이하 TPUSA)를 이끌며 청년 트럼프주의자들을 조직하던 찰리 커크가 피살된 사건이었다.
1993년생인 찰리 커크는 팟캐스트 ‘찰리 커크 쇼’를 운영하며 소셜미디어에서 영향력을 강화했다. TPUSA는 2월부터 미국 전역의 대학을 돌며 강연을 진행했다. 강연은 문화전쟁 이슈와 반(反) ‘정치적 올바름’을 주제로 한 연설, 그리고 청중과 일대일 토론, ‘내가 틀렸음을 증명해봐’(Prove Me Wrong) 형식으로 구성되었다. TPUSA는 이러한 토론 장면을 유튜브 영상으로 제작해 확산하고 반대 의견을 제시하는 이들을 조롱하는 방식으로 온라인에서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커크는 해외에서 트럼프주의 메시지를 확산하는 데에도 적극적이었다. 5월에는 영국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 대학에서 강연을 진행했으며, 9월에는 한국에서 ‘빌드업 코리아 2025’, 일본에서 참정당 심포지엄에 참여해 트럼프주의 국제연대를 강조했다.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던 커크는 9월 10일 유타밸리 대학교에서 청중과의 근거리 토론 중 피살되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커크를 “진실과 자유를 위한 순교자”라고 칭하며, 극좌 세력과 이를 부추기는 언론·사상을 이번 사건의 배경으로 지목하며 조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추모식에는 트럼프 대통령을 위시해 정부 고위 인사와 공화당 주요 정치인은 물론, 스티브 배넌, 터커 칼슨을 비롯한 트럼프주의 인플루언서들도 대거 참석하여 보수진영이 결집하는 장이 되었다. 총 9만 명이 넘는 인원이 모인 추모식에서 참석자들은 커크의 뜻을 이어갈 것을 다짐했다.
이후 공화당과 트럼프 행정부는 70만 회원과 3천 개 이상의 학교 지부를 보유한 TPUSA의 조직망을 활용하여 청년 보수층 조직화에 적극 나서고 있다. 공화당 정치인과 지지자는 TPUSA에 거액의 기부를 잇달아 내놓았고, 공화당 전국위원회 산하 청년위원회는 TPUSA 대학 지부와 협력해 순회강연을 추진하고 있다. 이와 함께 밴스 부통령과 일부 백악관, 공화당 인사가 찰리 커크쇼에 출연하며 TPUSA의 플랫폼을 통해 보수층 결집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그러나 미국 보수진영에는 균열 요인도 존재한다. 현재 공화당은 매우 이질적인 집단들의 연합체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공화당은 ▲ MAGA 포퓰리스트(스티브 배넌, 밴스 부통령), ▲ 전통적 공화당 정치인(존 튠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 ▲ 자유시장주의자(테드 크루즈 상원의원) ▲ 종교 우파(마이크 존슨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 ▲ 테크계 우파(데이비드 색스 백악관 암호화폐관리국장) ▲ 민주당 탈당파(로버트 케네디 주니어 보건복지부 장관)의 6개 파벌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파벌은 트럼프라는 개인의 카리스마적 권위와 민주당에 대한 반감으로 뭉쳐있지만, 트럼프 행정부의 구체 정책을 둘러싼 견해차가 상당하다. 트럼프 대통령이 물러나거나 미국 경제가 급속히 악화하면 이들 사이에서 갈등과 이견이 증폭될 가능성이 있다.
MAGA 진영 내에도 분열요인이 존재한다. 막대한 조직력과 자금력, 정계와의 인적 네트워크를 가진 청년 MAGA의 아이콘인 찰리 커크가 사망한 이후 젊은 인플루언서들이 난립하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1998년생 닉 푸엔테스다. 그는 2017년부터 라이브 방송을 진행하며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발언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를 지지하는 청년 남성 네트워크 그룹 그로이퍼스는 찰리 커크를 비롯한 주류 보수주의 집단이 이스라엘을 지지하고 합법 이민자가 미국 사회에 끼치는 악영향을 간과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미국 우선주의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푸엔테스가 10월 27일 트럼프주의 방송인 터커 칼슨의 팟캐스트에 출연한 것을 두고 MAGA 진영 내에서 논란이 생겼다. 너무 극단적인 인물을 출연시켰다는 이유였다. 트럼프 대통령과 밴스 부통령은 보수가 분열하는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며 수습에 나섰다. 《워싱턴포스트》는 이렇게 젊은 트럼프주의자 사이에서 극단적인 인물의 존재감이 커지는 상황은 미국 보수세력이 앞으로 어떤 가치를 중심에 둘지 결정해야 하는 문제를 드러내는 방아쇠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당장 푸엔테스 같은 극단적인 백인 우월주의자가 MAGA 내에서 헤게모니를 차지할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찰리 커크 이후 확고한 젊은 MAGA의 아이콘이 없는 상황에서 극단적 인사들이 난립하는 상황은 MAGA 진영 내에서 변수가 될 수 있다.
요컨대 공화당과 MAGA 진영은 찰리 커크 사망 이후 결집을 강화하며 안정적인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해 겨울호 글 「트럼프 인민주의 정권은 미국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서 확인했듯, 광범위한 트럼프주의 연합은 장기 불황이라는 조건과 트럼프주의 정책의 모순 탓에 무너질 수도 있다. 또한, 젊은 트럼프주의자 사이에서 더욱 극단적인 인물들이 난립하는 상황은 향후 트럼프주의의 미래에 여러 변수를 낳고 있다.
(2) 민주당은 트럼프주의를 막을 수 있을까?
2024년 대선 패배 이후, 민주당의 최대 화두는 트럼프주의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였다. 민주당 지지자 사이에서는 트럼프 행정부에 강하게 맞서 싸워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했다. 퓨 리서치센터의 4월 분석에 따르면, 민주당 성향 유권자 가운데 83%가 ‘민주당이 트럼프 정부의 정책에 강하게 반격해야 한다’라는 입장을 드러냈다. 이러한 여론은 민주당 내 전략과 활동에 다양하게 반영되었다. 2월 민주당 전국위원회 의장에 당선된 켄 마틴은 4월 당 전략 ‘어디서나 조직하고 어디서나 승리한다’를 발표하며, 지역(주) 당 위원회에 매달 총합 100만 달러라는 역대 최대규모의 금액을 투입하고 지역 당직자들을 훈련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동시에 트럼프주의자들의 허위정보 유포에 대응하기 위해 전담 인플루언서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폭스뉴스와 조 로건 팟캐스트에 민주당 대변인을 투입하는 공세적인 행보를 취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가장 주목받은 정치인은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다. 그는 소셜미디어를 공격적으로 활용해 트럼프 행정부 인사들을 겨냥하는 한편, 공화당 지지층을 포섭하고자 했다. 3월에는 팟캐스트를 개설하고 초대 게스트로 찰리 커크를 초청한 데 이어 스티브 배넌을 비롯한 MAGA 진영 인사들도 초청했다. 6월에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연방 이민단속국의 대대적인 단속에 저항하는 시위가 격화되고 트럼프 행정부가 주방위군 배치를 지시하자, 뉴섬 주지사는 주 정부와 협의 없는 방위군 배치는 불법이라고 주장하며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그리고 소셜미디어를 통해 트럼프 행정부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민주당의 전국적인 정치인으로 부상했다.
또한 뉴섬 주지사는 텍사스주가 내년 중간선거를 앞두고 공화당에 유리하게 선거구를 조정하자, 캘리포니아주의 선거구를 민주당에 유리하게 조정하는 ‘주민발의안 50’을 발의했다. 이에 따르면 민주당에 유리한 선거구가 다섯 곳 늘어난다. 오바마 전 대통령을 비롯한 민주당 주요 인사가 지지하는 가운데, ‘주민발의안 50’은 11월 4일 주민투표에서 64.4%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그러나 선거구 조정에 대한 우려도 존재한다. 캘리포니아 지역 언론인 조 매튜스는, 일반적으로 10년마다 인구조사 후 독립 위원회를 거쳐 선거구를 확정하는 절차가 아니라 정치인이 주도하여 주민투표를 통해 선거구를 조정하는 방식은 민주주의 규범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프린스턴대학 개리멘더링 프로젝트는 이번 캘리포니아 선거구 개편으로 캘리포니아의 공정성 점수가 기존 ‘B’에서 ‘F’로 하락했다고 발표했다.
결과적으로 올해 민주당은 일부 성과를 거두었다. 펜실베니아주와 아이오와주 보궐선거에서 승리했으며, 11월에는 버지니아와 조지아 주지사 선거, 뉴욕시장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이러한 선거 승리가 내년 중간선거에서의 승리를 보장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연방정부 셧다운을 둘러싸고 민주당 지지층 사이에서 민주당 지도부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다. 또한, 개빈 뉴섬 주지사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 대응은 지지자에게 일시적으로 통쾌감을 줄 수 있으나, 정치적 양극화를 심화시킬 위험이 있다. 특히 캘리포니아 선거구 조정은 향후 연쇄적인 개리멘더링으로 이어질 수 있고, 나아가 민주주의적 제도와 규범의 안정성을 약화시킬 가능성이 있다.
[사진] 척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와 미국 연방정부 셧다운
2025년 미국 의회는 회계기간 종료일인 9월 30일까지 내년도 예산안 합의에 실패했다. 그 결과 43일간 최소한의 업무를 제외하고 연방기관이 폐쇄되는 ‘셧다운’ 상태를 겪었다. 역대 최장기간이었던 올해 셧다운에서 핵심 쟁점은 12월 말에 종료되는 오바마케어(공공 건강보험) 보조금 연장 여부였다. 셧다운 기간이 길어지면서 연방 공무원들이 대거 해고되자, 일부 민주당 의원들이 이탈해 임시예산안에 협력해 셧다운이 종료되었다. 임시예산안은 셧다운 기간 해고된 공무원을 복직시키는 대신 오바마케어 보조금 연장 표결을 12월에 하기로 했다. 성과 없이 셧다운이 마무리되면서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척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를 비롯한 민주당 지도부를 향한 불만이 나타났다. (출처: 《뉴욕타임스》)
한편, 트럼프 행정부에 맞선 강경한 대응과는 별개로, 민주당 지식인들은 대안적인 정책 아젠다를 연구하고 있다. 올해 3월에 언론인 데렉 톰슨과 에즈라 클라인이 출간한 책 『풍요』(Abundance)는 민주당 성향 지식인 사이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 이 책은 뉴욕타임스 선정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친민주당 성향 싱크탱크 ‘서드웨이’가 책의 주장을 반영한 정책 제안서를 제출하면서 널리 읽혔다.
저자들은 그간 진보 지식인들이 ‘분배’ 문제에 치중한 나머지 ‘성장’과 ‘풍요’ 문제를 충분히 다루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미국의 풍요를 위해서는 주거, 교통, 에너지, 의료서비스 분야의 공급을 충분히 확보해 희소성을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규제 장벽을 제거해 인프라를 효율적으로 공급하고, 코로나19 백신 개발 프로젝트 사례처럼 기술 규제 제도와 절차를 간소화해 시장에 신기술이 신속히 적용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보호와 규제 중심의 정부가 아니라 건설하고 발명하며 구현하는 정부가 되어야 하며, 결과 중심으로 거버넌스와 관료제를 재구성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캘리포니아주는 8월에 이러한 제안을 일부 반영해 개발 관련 절차를 간소화하는 방향으로 환경영향평가법을 개정하기도 했다.
『풍요』의 제안은 ‘성장’이란 문제에 대한 논의를 촉발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그러나 현재 미국 경제의 문제를 단순히 과도한 규제로 인한 기술혁신 지체와 인프라 공급 제약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 경제는 장기적인 이윤율 하락 추세로 인해 장기침체가 이어지고 부채가 누적되는 구조적 위기에 처해있다. 이 문제를 완화하려면 세계적 수준의 공조가 필요하다. 또한, 규제 완화와 기술투자로 성장과 풍요를 달성할 수 있다는 주장은 기술낙관론일 뿐이다. 이런 주장은 1970년대 이후 현저히 낮아진 생산성을 고려하지 않으며, 수익성 있는 기술진보의 어려움에서 장기침체로 이어지는 메커니즘을 무시하는 결함이 있다.
민주당은 트럼프주의에 맞서 다양한 방식의 대응을 모색하고 있지만,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정책과 대규모 감세법안으로 더욱 심화할 미국 경제의 구조적 위기에 대해 진지하게 대안을 모색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구조적 위기에 대응할 정책적 대안보다는 개빈 뉴섬 주지사처럼 강경한 대응으로 정치적 갈등을 키우는 행보에 치우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조지타운대 역사학 교수 마이클 케이진은 과거 민주당이 승리할 때 ‘보통 사람의 정당’을 내세웠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는 민주당이 21세기 들어 노동자 계층을 소외시키고 문화정책과 친기업적 행보를 강화한 점을 비판하며, 다양한 계급과 계층을 조직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트럼프주의에 맞서 민주당이 내부의 문제점을 성찰하고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어떻게 이어지느냐가 2026년 중간선거는 물론 향후 미국 정치지형에서 중요한 변수가 될 전망이다.
(3) 민주사회주의자는 계속 성장할 것인가?
11월 4일 뉴욕시장 선거에서 조란 맘다니가 민주당 소속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후보 시절부터 언론의 지대한 관심을 받았다. 그가 민주사회주의자(DSA) 소속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그의 등장과 당선은 사람들이 민주사회주의자라는 조직에 관심을 가지게끔 했다. 영국 녹색당, 독일 좌파당을 비롯해 유럽의 좌파계열 정치인들이 뉴욕으로 가 선거운동에 동참하며 맘다니와 민주사회주의자를 배우고자 했다.
민주사회주의자는 1982년 마이클 해링턴 주도 하에 민주사회주의 조직위원회와 신미국운동이라는 사회운동단체가 통합하여 탄생한 사회주의 조직이다. 민주사회주의자는 2014년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의 대통령 출마를 지원하면서 전국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조직 규모가 급속히 커졌다. 특히 청년 활동가를 중심으로 소셜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회원과 지부 수를 크게 늘렸다. 2018년엔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즈(AOC)와 라시다 틀레이브, 2020년엔 자말 보우먼을 연방의원으로 당선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민주사회주의자의 여러 가지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다. 전미교사연맹(AFT) 활동가이자 민주사회주의자 전국정치위원회 전(前) 위원인 리오 케이시는 《디센트 매거진》에서 민주사회주의자 내에서 원칙의 절대화 경향을 비판했다. 케이시는 민주사회주의자가 지향하는 도덕적 원칙이 현실에서 실현되기 위해선 전술, 전략, 정치적 목표로 층위를 나누어 사고하며 예외를 인정하고 단계적으로 달성 가능한 목표를 성취하는 방향으로 활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민주사회주의자 활동가 다수는 원칙 그 자체를 영속적이며 예외 없는 절대적 교리로 이해하는 경향이 크다고 지적했다. 이런 경향이 전략과 전술의 효용성, 실현 가능성에 관한 토론을 원칙에 대한 교조적 충성심 경쟁으로 대체해 시대의 변화에 맞게 운동을 발전시키는 것을 저해하며 대중으로부터의 고립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다.
케이시는 대표적인 사례로 2020년 조지 플로이드 사망 이후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M) 집회 당시 민주사회주의자가 마주한 난점을 언급했다. 당시 민주사회주의자는 ‘경찰제도 폐지’, 이후엔 ‘경찰예산 삭감’ 구호를 강조했다. 그러나 케이시는 민주사회주의자 다수가 구호에 집중한 나머지 경찰제도를 개혁하기 위한 법률 검토, 경찰 내에서 리더십과 관행 개선, 경찰교육을 위한 구체적인 대안에 관한 시민사회 차원에서의 토론으로 나아가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 결과 일부 도시의 경찰예산을 삭감하는 데 그쳤고 그마저도 팬데믹 이후 원상복구되었다. 케이시는 이를 ‘원칙의 절대화 경향’이 드러낸 난점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민주사회주의자 내에서 국제정세 인식을 둘러싼 갈등이 두드러진다. 댄 라 보츠 활동가는 민주사회주의자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지 않았고 관련한 토론도 조직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일부 지부에서 우크라이나의 사회운동(SR) 연사를 초청하여 세미나를 진행한 것에 대해, 내부에서 SR과 라보츠의 이력을 언급하며 이를 비난하는 일도 있었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은 갈등을 더욱 키웠다. 전쟁 직후 이스라엘 아이언 돔 지원 승인 법안에 자말 보우먼 의원이 찬성하고 이스라엘이 국가로 존재할 권리를 인정하는 결의안에 AOC 의원이 찬성하자, 민주사회주의자 내에서 두 의원에 대한 제명 캠페인이 일어났다. 민주사회주의자 지도부는 두 의원을 제명하지는 않았지만, 2024년 7월 두 의원에 대한 지지 철회를 발표했다. 이 결정에 뉴욕지부가 반대하며 독자적으로 AOC 의원을 지지하겠다고 밝히면서, 국제정세 인식을 둘러싼 내부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맘다니 뉴욕시장 당선은 민주사회주의자에 큰 도전이 될 것이다. 언론은 선거에서 맘다니가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생활비 부담 완화를 위한 정책 제안을 재치있는 짧은 영상으로 잘 풀어서 소셜미디어에 널리 퍼뜨린 홍보전략에 주목한다. 그러나 토지개발업자, 재산 소유자, 세입자 사이의 이해관계를 어떻게 조정할 것인지, 공공 서비스 확대를 위한 주 정부와의 협의와 재원 조달을 어떻게 할 것인지, 경찰 문제와 국제정세 인식을 비롯한 여러 쟁점적 입장과 논란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맘다니 시장과 민주사회주의자가 정치무대에서 일시적인 유행에 그치지 않으려면, 케이시가 말한 것처럼 구체적인 목표, 전략, 전술을 체계화해야 할 뿐만 아니라 민주사회주의자 내부의 쟁점을 잘 풀 수 있어야 할 것이다.
2) 더욱 매서워질 유럽 포퓰리즘의 도전
2025년은 유럽 포퓰리즘 세력의 기세가 더욱 등등해진 한해였다. 특히 영국과 독일을 비롯한 유럽 주요국에서 포퓰리즘 정당이 기존 주류 정당을 제치고 가장 높은 지지를 받는 정당으로 올라섰다. 지난 여름호에 실린 필자의 글 「주류가 된 유럽 포퓰리즘」은 포퓰리즘 세력이 정당정치와 언론을 비롯한 매개조직을 공격하며, 개별국가의 ‘민족주권’을 우선시하면서 진영과 관계없이 정책과 수사를 차용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이들이 집권한 이후 사법부의 독립성을 적극적으로 훼손하는 행보가 헌정주의를 크게 위협한다고 강조했다. 올해 그 양상이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살펴보겠다.
(1) 주류 정치권은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까?
2025년 영국, 프랑스, 독일에서는 포퓰리즘 정당이 기존 주류 정치권을 제치고 가장 높은 지지율을 기록했다. 이들 국가는 이민자의 증가와 함께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는 가운데 기존 정치권이 유권자들에게 신뢰를 잃고 대안세력으로 포퓰리즘 세력이 부상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 국가에서 부상한 포퓰리즘 세력은 기존 정치권을 공격하면서 현행 정치체제를 변경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무엇보다 세 나라 모두 국가 재정 문제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영국의 경우, 2024년 총선에서 승리한 노동당은 공약과 달리 2024년 국민보험료를 인상하며 사실상 증세를 감행했다. 이는 브렉시트, 팬데믹,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거치면서 재정지출이 급격히 늘어나 GDP 대비 국가부채 비중이 2024년 95%에 육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증세는 노동당 정부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키웠다. 또한, 안젤라 레이너 부총리의 부패 스캔들과 레이첼 리브스 재무장관이 11월 소득세 인상안을 발표했다가 금세 철회하는 해프닝이 노동당에 대한 신뢰를 크게 떨어뜨렸다. 보수당 역시 2022년 ‘미니 버짓 사태’ 이후 재정위기를 완화할 방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국방비 지출을 줄일 수 없다는 모순된 입장은 정책 전문가들은 물론 당원들의 신뢰를 크게 떨어뜨려 당원과 후원자가 대거 이탈했다.
프랑스 바이루 내각은 2025년에 들어 GDP 대비 국가부채 비중이 115%를 돌파하면서 위기감이 커지자 공무원 수 감축, 공휴일 축소, 사회복지지출 감소를 포함한 긴축예산을 9월에 발표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야당은 물론, 시민들의 분노를 샀다. 그 결과 바이루 내각은 출범 9개월 만에 무너졌다. 가뜩이나 정국이 불안정한데 긴축예산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피치, S&P 등 신용등급평가사는 프랑스 국가신용등급을 추가로 낮췄다. 그로 인해 로레알, 에어버스 등 프랑스 주요 대기업의 회사채금리보다 국채금리가 높아졌다. 마크롱 대통령이 임명한 르코르뉘 총리 내각은 더 이상의 내각 붕괴를 막고 사회당을 포섭하고자 대통령의 핵심 공약인 연금개혁을 일시 중단했다.
독일은 마이너스 경제성장의 덫에 갇혔다. 2023년부터 연속으로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이를 해결하고자 독일 연방헌법에 규정된 ‘부채한도 브레이크’ 조항(연방정부의 연간 구조적 재정 적자는 명목 국내총생산(GDP)의 0.35%를 초과할 수 없다)의 개정을 둘러싸고 사민당-자민당-녹색당 연정이 붕괴했다. 이후 들어선 기민당/기사당-사민당 대연정은 예외조항을 두는 방식으로 부채한도를 개정하며 확장 재정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늘어난 재정을 어떻게 사용할지를 두고 연정 내 갈등이 커졌다. 군 모집제도를 자원입대에서 의무요건을 강화해 신속히 병력을 충원하는 것과 시민수당(장기실업자 기초생활지원금) 및 사회복지 지출 축소를 지향하는 기민당/기사당 연합과 여기에 반대하는 사민당 사이에 이견 조율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군 모집제도 변경을 둘러싸고 청년층 반발이 극심하다. 그에 따라 10월 INSA 여론조사에서 현 메르츠 정권에 대한 지지율은 25%로 하락세를 보이고 있으며, 응답자의 49%는 정권이 조기 붕괴할 것으로 전망했다.
기존 주류 정치권이 보이는 혼란과 무능의 수혜자는 그들과 차별화하며 제도 변경을 지향하는 포퓰리즘 정당이다. 영국 개혁당은 올해 당원 수가 20만 명을 넘기며 보수당(13만 명)을 제쳤고, 5월 지방선거 결과 절반이 넘는 지역 의회에서 과반을 장악했다. 보수당 대니 크루거 하원의원을 비롯해 보수당 지방의원 수십 명이 개혁당으로 당적을 바꿨다. 프랑스는 계속된 정치혼란에 마크롱 대통령 지지율이 20% 아래로 추락한 가운데 국민연합의 정당 지지율이 마린 르펜 전 대표의 비리 판결에도 불구하고 선두를 지키고 있다. 독일을 위한 대안(이하 대안당) 역시 여름부터 기민당/기사당을 제치고 여론조사에서 가장 높은 정당 지지율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유럽의 기성 정치권은 장기침체, 재정적자와 부채위기 속에서 헤매고 있다. 이민자 문제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국방비 증액 압박은 주류 정치권과 제도에 대한 대중의 신뢰 상실을 유발했다. 그 결과 포퓰리즘 세력이 기성 정치세력을 능가하는 지지율을 보이며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2) 점점 심해지는 매개조직 훼손
트럼프주의자들은 유럽에도 트럼프주의 노선을 적극적으로 전파하고 있다. 미국의 헤리티지 재단은 최근 헝가리 싱크탱크 MCC와 폴란드의 오르도 유리스와 세미나를 진행했다. 두 기관은 이를 토대로 올해 3월 「위대한 재설정: 유럽연합 회원국들의 주권 회복」이라는 유럽연합 개혁 보고서를 공동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선출되지 않은 유럽연합의 관료들이 회원국 정책에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해 주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한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와 유럽사법재판소의 권한을 축소한 채 현행 유럽연합을 유지하는 방안과, 기존 유럽연합 조약과 제도를 전면 폐기하고 새로운 형태의 유럽 공동체를 구축하는 방안, 두 가지 개혁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프랑스 국민연합과 스페인의 복스(VOX)가 이 개혁안에 관심을 보인 가운데, 니콜라 콘투리스 전 유럽노조연구소(ETUI) 연구소장은 이 보고서가 극우 포퓰리즘 정당의 지향을 반영한 정치적 선언문으로 보인다며 경각심을 촉구했다.
영국 개혁당 역시 트럼프주의에 영향을 받은 싱크탱크 ‘더 나은 영국을 위한 센터’를 출범했으며, 지아 유수프 당 의장을 중심으로 영국 정부효율부팀을 6월에 꾸렸다. 지아 유수프는 9월 《텔레그래프》와의 인터뷰에서 영국 헌정 개혁을 위한 자신과 당의 구상을 밝혔다. 그는 내각이 전문성이 떨어지는 의원들로 운영되어 비효율적이라면서, 전문성이 있는 인재들을 총리가 상원 귀족으로 제청하여 그들을 내각에 입각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내각이 되기 위해 먼저 유권자에 의해 하원의원으로 선출되는 과정을 밟을 필요가 없게 말이다.) 그의 인터뷰을 두고 《이코노미스트》는 개혁당이 의원내각제가 아니라, 미국 대통령제와 같은 방식으로 내각을 구성하려 한다고 분석했다. 이렇듯, 유럽에서 트럼프주의를 지향하는 인사들은 의회와 유럽연합을 비롯한 각종 제도와 기관들을 재구성하고자 한다.
이러한 매개조직 공격은 유럽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특히 사법부의 독립성에 대한 공격이 극심하다. 이탈리아 멜로니 정부는 사법부에 대한 정부의 통제를 강화하는 헌법 개정안을 밀어붙였다. 헌법 개정안은 올해 1월 16일 하원에서 첫 번째로 통과된 이래 10월 30일 상원까지 네 차례의 의회투표를 모두 빠르게 통과했다. 다만 2차 의회투표에서 의석의 3분의 2를 넘기지 못해 내년에 국민투표로 넘어가기로 결정되었다. 야당과 판사협회는 이 헌법 개정안이 사법부 통제 법안이라고 비판하지만, 멜로니 정부는 국민투표로 통과시키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중이다.
[사진] 이탈리아 사법부 개혁안에 반대하는 이탈리아 의원들
7월 22일 이탈리아 사법부 개혁을 위한 헌법 개정안 통과 표결을 앞두고 상원에서 민주당(PD) 의원들이 이탈리아 헌법전 표지 사진을 거꾸로 들며, 개정안 통과 반대의 뜻을 표현하고 있는 장면. 사법부 개혁안의 구체 내용은 “김영진, 「주류가 된 유럽 포퓰리즘: 포퓰리즘은 어떻게 민주주의를 위협하는가?」, 《계간 사회진보연대》 2025년 여름호”를 참고할 수 있다. (출처: 《Il Sole 24 Ore》)
스페인에서도 사법부가 격렬한 정쟁의 장이 되고 있다. 특히 사법부 총평의회(CGJP) 인선을 둘러싼 여야 간 장기 대립이 사법부 전반에 인적 공백을 초래했다. 스페인 사법부 총평의회는 사법부 최고 의결기구이자 행정기관으로 법관 임명, 승진, 징계를 비롯한 사법부 인사, 사법 행정업무 전반을 담당한다. 20명의 위원 전원을 상하 양원이 각각 10명씩 선출하고 의원 5분의 3의 동의를 받아 인준한다. 이러한 임명방식은 1985년 프랑코 독재 시기에 보수적인 법관을 견제할 목적으로 사회노동당이 주도해 입법했다. 이러한 방식이 작동하려면 양당인 국민당과 사회노동당의 합의가 원활하게 이루어져야 했다. 그러나 2010년대 들어 양당 간의 갈등이 커졌다. 결국 2018년 야당인 국민당이 총평의회 위원 임명 방식의 변경을 요구하며 합의를 거부한 이래로 5년간 총평의회 신임 위원 임명이 지체되다가, 2024년에야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의 중재로 신임 위원 구성에 양당이 합의했다.
최근에는 사회노동당 산체스 총리 주변 인사들이 잇따라 부패 의혹에 휘말리면서 사법부 내부 갈등도 격화되었다. 11월에는 오르티스 검찰총장이 야당 정치인의 부패 스캔들을 언론에 유출한 혐의로 검사협회에 의해 고소되어 유죄판결을 받았다. 여권은 판결이 정치적 성향이 강한 법관들에 의해 내려진 것이라며 반발했고, 사법부의 정치화 문제를 다시 제기했다. 유럽평의회를 비롯한 국제기구도 스페인 사법부의 정치화를 우려하며 사법부 총평의회 위원 선출방식의 변경을 요구했다. 이사벨 페렐로 스페인 대법원장은 정치권의 판사 비방이 사법제도에 대한 신뢰를 훼손하고 삼권분립과 법치를 위협한다고 지적하는 한편, 정치에 관여하는 일부 법관에게도 자중을 요청하면서 정치권이 사법부 총평의회의 인적 공백 사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해달라고 당부했다.
매개조직과 같은 민주적 제도가 훼손될수록 사회가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은 약화되고, 그 빈자리를 폭력이 채울 위험이 커진다. 실제로 유럽에서는 정치인을 겨냥한 폭력이 우려할 수준에 이르렀다. 10월 벨기에에서는 바르트 더 베버르 총리를 드론으로 암살하려는 시도가 적발되었으며, 같은 달 스웨덴 중앙당 대표인 안나 카린 핫은 지속적인 폭력 협박과 온라인 괴롭힘 끝에 사임했다. 이러한 사건들이 이어지자, 유럽의회 조사처는 「유럽연합 내 정치인을 대상으로 한 폭력과 협박」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간해, 정치인을 향한 폭력이 개인에 대한 공격을 넘어 민주주의의 질을 직접적으로 훼손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보고서는 유럽연합 차원에서 정치인 보호 조치를 강화하기 위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 각국의 법 집행기관과 보안기관 간 협력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이처럼 유럽에서는 기존 정치 엘리트뿐 아니라 다양한 매개조직에 대한 불신이 커지면서 이를 재편하려는 시도가 늘어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등장 이후 유럽의 포퓰리즘은 더욱 강화되었다. 특히 사법부를 비롯해 법치를 유지하는 핵심 기관에 대한 공격이 두드러지고, 정치인과 엘리트를 향한 폭력으로 이어질 위험도 커지고 있다.
3) 소결: 포퓰리즘의 위협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2025년 민주정 국가들에서 포퓰리스트 세력의 위협은 거셌다. 미국과 유럽만이 아니라 일본에서도 자유민주당의 영향력이 2024년 중의원 선거와 2025년 참의원 선거를 거치면서 약해졌고, 레이와 신센구미나 참정당처럼 ‘제3지대’나 ‘일본우선주의’를 내세우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존재감이 커졌다. 중심부의 민주정 국가들이 마주한 최근의 도전은 개별 국가의 일시적인 정치위기를 넘어서는 심각한 문제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떠한 대응이 필요한가를 두고 정치권뿐 아니라 학계에서도 토론이 이어지고 있다. 정치학계는 포퓰리즘이 기성 정당정치와 언론으로 대표되는 매개조직(민주적 제도)을 위협하며 헌정주의를 위기로 몰고간다는 점에 대체로 합의한다. 그러나 어떤 대응이 필요한 것인지를 놓고는 쟁점이 있다. ‘방어적 민주주의’ 혹은 ‘전투적 민주주의’를 둘러싸고 나디아 우르비나티 칼럼비아대학 교수와 얀 베르너 뮐러 프린스턴대학 교수가 벌인 논쟁이 대표적이다.
얀 베르너 뮐러 교수는 『민주주의 공부』(2022)에서 민주주의를 다양한 매개조직과 제도를 통해 언제든 다수가 교체될 수 있는 불확실성을 전제로 한 체제라고 규정한다. 그는 포퓰리즘이 이러한 민주주의의 불확실성을 제거하면서 제도를 훼손하는 반(反)다원주의적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적이라고 본다. 따라서 뮐러 교수는 포퓰리즘의 제도적 위협을 차단하기 위해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제도적 장치와 정당정치 개혁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즉, 민주주의적 정치제도를 침해하는 개인의 권리를 법적으로 제한하거나 정당을 금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우르비나티 교수는 최근 논문에서 뮐러 교수의 방어적 민주주의에 이의를 제기했다. 우르비나티 교수는 특정 정당이나 개인의 권리를 제도적으로 제한하자는 접근은 정당과 시민사회가 스스로 조정하고 개선하려는 자율적 노력을 약화시킬 수 있으며, 정치에 냉소적인 시민들에게는 정치 엘리트가 법을 통해 기득권을 지키려는 것처럼 보일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우르비나티 교수는 시민사회의 자율성과 역할을 강조한다. 그녀는 정당정치와 ‘의지’의 영역에 해당하는 정치적 매개와 구별되는, 시민사회이자 ‘의견’의 영역인 사회적 매개 내에서의 불균형이 포퓰리즘이 부상한 핵심 원인이라고 본다. 일부 사회적 매개조직은 정치권과 제도에 효과적으로 연결되어 영향력을 행사하는 반면, 그렇지 못한 영역에서는 배제와 소외가 발생한다. 이러한 소외가 확대될수록 해당 계층은 극단화의 위험에 더욱 노출된다. 따라서 우르비나티 교수는 정당정치나 제도 개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사회적 결사를 활성화하고 시민사회의 의견이 정치적 의지 형성 과정에 반영될 수 있도록 공론장을 강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민주정에 대한 포퓰리즘의 위협이 거센 상황에서 어떤 대응이 필요한가를 놓고 학자들 사이에서도 고심이 깊다. 앞선 미국과 유럽의 사례에서 보았듯, 기존 정당들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매개조직 침해가 심해지는 상황에서 제도적 개입을 통한 민주주의 방어만으론 포퓰리즘 세력들에 의해 악용될 소지가 있을뿐더러 관련한 법과 제도를 둘러싼 정치적 갈등을 키울 수 있다. 『공포로부터의 자유』에서 케이헌이 주장했듯,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가 잘 작동하기 위해선 성숙한 시민성을 갖춘 시민들의 도덕적, 능력적 향상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는 시민사회 차원에서 건강한 공론장을 형성하기 위한 교육과 토론이 전제되어야 함을 뜻한다. 그런 점에서 사회운동은 이러한 교육과 토론의 기반을 마련하는 핵심 주체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회운동이 이러한 기능을 실질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 때, 민주정은 단순히 유지되는 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 혁신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3. 권위주의 국가의 자유주의 국제질서 위협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대외정책은 ‘미국 우선주의’에 입각해 자유주의적 국제질서로부터 이탈하면서도 무슬림에 적대적인 잭슨주의 접근법을 취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후 파리기후협정과 세계보건기구에서 탈퇴하고, 개발도상국 지원과 인도주의적 지원을 맡아온 미국 국제개발처를 폐지했다. 동맹국들의 안보 무임승차를 비난하며 국방비 증액을 압박하는 한편 권위주의 국가를 상대로 거래적으로 접근했다.
자유주의 국제질서에서 미국의 후퇴는 기존의 국제질서에 도전하는 권위주의 정권 사이의 연계를 키웠다. 올해 외교관 사이에선 중국-러시아-이란-북한으로 대표되는 ‘CRINK’(중국, 러시아, 이란, 북한의 영문 머리글자를 딴 용어) 혹은 ‘격변의 축’(Axis of upheaval)이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주목받았다. 이들 국가 사이의 협력이 동시다발적으로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외교안보 싱크탱크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10월 중국, 러시아, 이란, 북한 네 국가 사이의 연계를 외교, 경제, 안보 측면으로 나누어 집중적으로 분석했다. 먼저 외교적 측면에선 2022년 이후 UN 안보리 결의안 투표에서 중국과 러시아가 기권 혹은 거부권을 통해 북한과 이란에 대한 제재를 무력화하는 경우가 늘었다. 또한, 브릭스와 상하이협력기구를 매개로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과의 거버넌스 구축에 적극적이다. 경제적으론 양자 협정을 통해 기술 교류와 에너지 연계를 강화하는 한편, 서방의 금융 제재 회피를 상호 지원하기 위해 러시아의 미르나 중국의 크로스보더 은행간 결제시스템(CIPS)을 통해 금융 결제 플랫폼을 통합하고 있다. 안보 차원에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군사적 협력이 강화되었다. 러시아는 이란의 미사일과 드론 지원, 북한의 탄약과 병력 지원, 중국의 다양한 물자 지원을 받는 대가로 첨단 군사기술을 제공했다. 그리고 양자 혹은 삼자 합동 군사훈련을 2022년부터 연평균 9.5회 진행했다.
[그림] 중국, 러시아, 이란, 북한(CRINK)의 합동 군사훈련 횟수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에 따르면, 중국과 러시아, 이란 그리고 북한 간에 두 국가 이상의 합동 군사훈련이 늘어나는 추세다. 2003년 중국과 러시아가 첫 합동 군사훈련을 진행한 이래 2025년까지 두 국가 이상이 참여한 합동 군사훈련이 총 96회였고, 2022년 이후에만 연평균 9.5회였다. 이란은 2019년 이후 중국, 러시아와 삼자 합동군사훈련을 매년 진행하고 있으며, 북한은 2024년에 중국, 러시아와 해군 훈련에 처음으로 참여했다. (자료출처: CSIS)
보고서는 네 국가 사이의 관계에 불균등함이 존재하며 상호불신이 있다는 점도 언급한다. 각국의 이해관계가 항상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CRINK가 견고한 블록을 형성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국가 간의 협력 강화는 국제규범에 큰 도전인 만큼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는 점도 강조했다.
아래는 CRINK를 구성하는 핵심 4개 권위주의 국가 중 러시아와 이란 그리고 이들 국가가 연루된 전쟁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을 중심으로 관련국들의 주요 동향과 전망을 살펴보겠다. (중국의 대만침공설을 중심으로 하는 동북아 정세전망은 이번호에 실린 글 「중국의 2027년 대만 침공설과 핵무력 증강, 분석과 평가」을 보라.)
1) 유럽 차원의 문제로 불거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2월 28일 미국-우크라이나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젤렌스키 대통령 사이에 벌어진 공개적 설전은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후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휴전을 압박하며 무기 지원과 정보 공유를 일시 중단했다. 3월 11일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에서 열린 고위급 회담에서 우크라이나가 30일 휴전안을 수용하는 조건으로 지원을 재개했다. 그러나 휴전이 성사되지 않자, 미국은 7월부터 토마호크 미사일과 155mm 포탄을 비롯한 일부 무기 지원을 중단했다. 그리고 군사 지원 방식도 직접 지원이 아닌 유럽이나 나토 동맹국들이 미국에서 무기를 구매해 지원하는 방식으로 바꿨다. 킬 세계경제연구소에 따르면, 2025년 하반기 월평균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 규모는 상반기와 비교해 43% 감소했다.
11월 19일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압박을 다시금 강화했다. 미국이 제안한 평화안 초안은 ▲ 우크라이나의 동부 돈바스 영토 포기 ▲ 우크라이나군 병력 60만 명 제한 ▲ 우크라이나 헌법에 ‘나토 영구 불가입’ 명시 ▲ 러시아의 G8 복귀 초청 ▲ 러시아·우크라이나·유럽 간 ‘상호 불가침 협정’ 체결 ▲ 우크라이나 100일 내 조기 선거실시 ▲ 우크라이나 공용어에 러시아어 재포함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이 안은 우크라이나군 병력을 현재의 절반 수준으로 줄이고 러시아의 돈바스 점령을 사실상 인정하는 내용으로 러시아에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이에 우크라이나는 물론 유럽연합과 영국을 비롯한 대다수 나라가 강하게 반발했다. 이후 미국은 민감한 내용을 뺐지만, 협상은 결국 결렬되었다.
이처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미국이 러시아에 우호적인 종전안을 우크라이나에 강압하는 가운데 살얼음판 위를 걷고 있다. 하지만 설령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측이 미국이 제안한 안을 수용하더라도 이번 전쟁이 낳은 여파가 쉽게 가라앉지는 않을 것이다. 러시아가 UN 안보리 상임이사국 지위를 악용해 국제사회의 개입을 무력화하고 다른 나라의 영토주권을 침해해 소기의 성과를 거둔 이상, 이후에도 주변국을 같은 방식으로 공격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러시아 인접국의 불안감이 커진 만큼 유럽과의 갈등도 더욱 커질 것이다. 이를 중심으로 러시아, 우크라이나와 유럽의 상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 러시아의 전략적 행보가 가진 리스크는 무엇인가?
러시아는 2025년 우크라이나에 대한 외교적 공작을 병행하면서 장기 소모전을 구사했다. 원래 목표였던 우크라이나 완전 점령이 당분간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여러 차례 진격을 시도했지만, 2022년 이후 추가로 획득한 영토는 매우 적고 누적 사상자 수는 100만 명에 육박할 정도로 손실이 컸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으로 미국의 태도에 변화가 생겼다. 유럽의 군사력이 미국을 당장 대체할 수준이 아닌 상황에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영토의 약 20%를 차지했고 북한군의 지원으로 병력 부담을 한층 덜었으며 열세인 드론 기술력 격차도 많이 좁혔다. 따라서 러시아는 협상 레버리지를 높이는 한편, 서방의 분열을 유도해 우크라이나를 고립시키고자 했다.
러시아는 미국에 휴전의사를 밝히면서도, 이미 점령한 우크라이나 영토에 대한 권리 인정과 러시아에 대한 제재 해제를 비롯한 강경한 요구안을 고수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빠른 종전을 원했기에 우크라이나가 30일 휴전안을 수용하게끔 강압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와 유럽을 배제한 채 알래스카 회담으로 종전을 꾀하고자 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최소한의 타협도 거부하며 군사력 회복을 꾀했다.
러시아는 지지부진한 휴전 협상을 지속하면서 서방의 지원이 줄어든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공세를 강화했다. 드론 공격과 미사일 폭격을 지속해 우크라이나의 방공망을 소모시켰고, 북부 도시이자 물류거점인 포크로브스크를 포위 공격했으며, 남부의 흑해 연안도시 오데사와 미콜라이우 지역에 미사일 공격을 시도했다. 특히 페스코프 러시아 정부 대변인은 흑해 연안 주민들이 러시아 편입을 원한다고 주장하고 그들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는 출처 불명의 주장을 반복하며 ‘회색지대’ 전략을 펼쳤다. 또한 우크라이나의 에너지, 정유시설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우크라이나 전력망에 큰 손실을 입혔다.
그러나 러시아에는 몇 가지 중대한 위험 요인이 있다. 무엇보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세계적인 유가 하락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2025년 9월 러시아의 배럴당 평균 원유 수출가는 57.6달러로 전년도 동기(70.5달러)에 비해 크게 하락했다. 서방의 제재로 인해 원유를 주로 인도, 중국 등 비(非)제재국에 할인된 가격으로 수출했던 만큼 타격이 더욱 컸다. 이런 와중에 우크라이나군의 정유시설 습격과 인도의 점진적인 러시아 원유 수입 축소로 재정적자가 급격히 증가했다. 폴란드 싱크탱크 동유럽연구센터에 따르면, 러시아의 재정은 전년도 3분기 0.6조 루블 흑자에서 올해 동 분기 3.8조 루블 적자로 돌아섰다. 러시아 정부는 국채발행을 계획하고 있으나, 이는 이미 낮아진 루블화 가치를 더 떨어뜨릴 수 있다. 재정문제가 악화될수록 전쟁수행 능력에 큰 차질이 생길 것이다.
군사적인 측면에서도 문제가 크다. 진전없는 전선이라는 문제도 있지만, 무엇보다 징집에서 어려움이 커지고 있다. 러시아는 강제징집 대신 입대할 때 막대한 보조금을 주는 계약병 방식으로 병력을 충원하고 있다. 전쟁연구소(ISW)에 따르면, 러시아는 월 3~4만 명의 병력을 보충하고 있다. 병사 1인당 입대 보너스로는 40만 루블(한화 740여만 원)을 지급하는데, 이는 러시아 월평균 임금소득의 약 5배다. 여기에 병사 1명당 모집비용도 전년도 평균 150만 루블에서 올해 200만 루블로 크게 올랐다. 바로스 전쟁연구소 연구원은 병사 급여, 사망, 부상 보너스까지 합한 러시아의 군인 급여 시스템은 유지가 불가능한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결국 높은 징집 비용과 병력 유지비용은 러시아의 어려운 경제 상황과 맞물려 재정압박을 더욱 키울 수 있다. 물론 강제 징병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지만, 이는 러시아 청년의 반발을 사 푸틴 정권의 안정성에 타격을 줄 수 있다.
향후 러시아가 선택할 수 있는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다. ▲ 고강도 분쟁을 통해 우크라이나의 자원을 빠르게 소진시켜, 유럽의 지원이 더 커지기 전에 전쟁을 빨리 마무리하는 시나리오 ▲ 저강도 분쟁으로 수위를 낮추되, 우크라이나의 정권교체를 기대하면서 계속해서 유럽과 우크라이나를 압박하는 시나리오 ▲ 휴전을 통해 역량을 회복하고 내부 리스크를 관리하는 시나리오 ▲ 평화협정 체결. 다수의 안보 전문가는 러시아가 공격 강도를 조절하면서 우크라이나와 서방의 연계를 막고, 장기적으로 고립을 유도하리라 예상한다. 향후 러시아의 행보는 러시아의 경제 상황, 서방의 우크라이나 지원, 우크라이나의 항전의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2) 중대한 기로에 서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 4년차를 맞이한 우크라이나는 어느 때보다 어려운 시기를 맞이했다. 미국의 군사 지원이 트럼프 집권 이후 급격히 감소하면서 전쟁수행 물자수급에 어려움을 겪었다. 탄약은 유럽이 미국을 대신해 지원하고 있으나, 패트리엇 미사일, 유도다연장로켓시스템, 특수 군사물자 수입은 제한되고 있다. 여기에 10월 러시아의 정유시설 집중공습으로 대규모 정전과 급수 중단 사태가 발생했다. 특히 전력 공급망 손상은 드론과 미사일 방어의 핵심인 전파방해에 차질을 주었다. 여기에 더해 겨울 난방공급에 발생하는 어려움은 우크라이나 시민의 피해를 크게 키울 수 있다.
또한, 우크라이나는 병력보충에 애를 먹고 있다. 영국 왕립합동군사연구소 연구원 잭 와틀링이 《포린 어페어스》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보병 수가 빠르게 줄고 있으며, 무엇보다 징집된 병사들이 충분한 훈련을 받지 못해 병력 손실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병력부족을 만회하기 위해 징집 연령을 27세에서 25세로 낮추었지만, 병사 평균 연령은 43세로 러시아(38세 추정)에 비해 여전히 높다. 게다가 우크라이나 청년들 사이에서 병역 기피가 늘어나고 있다.
젤렌스키 정부는 국내정치에서 큰 위기를 맞이했다. 대규모 실향민으로 인한 주택 위기가 발생했고, 정부 재정 대부분이 국방비로 쓰여 사회지출을 해외원조기관에 의존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올해 7월 젤렌스키 대통령은 2015년에 도입된 국가반부패국과 반부패검찰청의 권한을 제한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해당 법안은 강한 반발을 낳았다. 7월 키이우에서는 전쟁 이후 최대 규모의 시민이 모여 정권을 규탄하는 시위를 열었다. 결국 젤렌스키 정부는 법안통과 9일 만에 앞선 조치를 철회했다. 11월에는 국영 원자력기업에서 1억 달러 규모의 횡령 사건이 폭로되었는데, 여기에 젤렌스키 대통령의 측근인 티무르 민디치를 비롯한 정권 주요 인사들이 연루되면서 논란이 커졌다. 이에 정부는 주요 국영기관을 대상으로 대규모 감사를 진행했으며, 연루된 내각 인사들을 해임했다. 폴란드 투스크 총리를 비롯한 유럽 정상들은 우크라이나 정부가 부패를 막지 못하면 앞으로 지원이 어려워질 수 있다고 압박했다.
[사진] 2025년 7월 23일 우크라이나 정부 규탄 시위
2025년 7월 22일 우크라이나 부패 감찰기관의 권한을 축소하는 법령 통과에 반대하는 시위가 수도 키이우에서 일어났다. 다음날인 23일엔 키이우뿐만 아니라 주요 도시에서 광범위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남편이 전장에 있다고 밝힌 한 시민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부패를 위해 군인들이 전장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우크라이나 시민사회가 10년간 쌓아올린 노력이 파괴될 수 있다”라고 우려했다. 대규모 시위는 7월 31일 부패 감찰기관 권한강화법이 통과되면서 일단락되었다. (사진출처: 《AP》)
이처럼 우크라이나는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마주하고 있다. 이에 우크라이나인의 항전의지가 약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제기된다. 갤럽에서 7월에 진행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인 중 전쟁을 빨리 끝내야 한다는 여론은 69%로 전년도의 52%에 비해 증가했고, 계속 싸워야 한다는 여론은 24%로 작년 38%와 비교해 감소했다. 젤렌스키 정권이 부패스캔들로 흔들리면서 트럼프 행정부가 러시아에 유리한 휴전안을 우크라이나에 강요할 수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그러나 현재 우크라이나가 직면한 위기로 인해 우크라이나인의 항전 의지가 약화됐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키이우 국제사회학연구소가 8월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인의 76%가 푸틴 대통령의 평화안(나토 가입 포기, 점령지 양도 등)을 단호히 거절해야 한다고 답했다. 우크라이나 언론인 나탈리아 구메뉴크는 우크라이나 내부의 결속과 민주적 제도에 대한 신뢰의 유지가 전쟁의 성패를 좌우하는 핵심 요소라고 강조하며, 역으로 우크라이나의 민주주의야말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유 중 하나라고 지적한다. 그녀는 7월 반부패 시위에 우크라이나 시민들이 대규모로 참여한 것은 전쟁의 본질을 시민들이 정확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며, 우크라이나 지도자들이 민주적 제도와 내부 결속을 유지하는 게 왜 중요한지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 사회운동(SR) 역시 우크라이나인이 계속 러시아에 맞서 싸우려면 보수주의자의 긴축정책이나 트럼프 행정부의 ‘가짜 평화협상’을 거부하며, 우크라이나 시민이 쟁취해 온 민주주의와 사회적 성취를 동시에 방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3) 유럽의 재무장은 어떤 양상을 띨 것인가?
올해 유럽 주요국은 미국의 방위비 증액 압박과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에 위기감을 느끼고 공동대응을 적극적으로 모색했다. 영국과 프랑스 주도로 유럽은 2월 우크라이나 전후 안전보장을 위한 비공식 협의체인 ‘의지의 연합’을 출범시켰다. 유럽연합은 3월 발간한 ‘유럽방위백서 2030’에서 방위투자를 촉진하기 위한 재정기구를 설치하고 1,500억 유로의 자금을 조달하여 유럽 차원에서 방위투자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6월 나토 정상회의에서 유럽 주요국은 방위비를 GDP의 5%(3.5%는 국방비, 1.5%는 국방 관련 지출)로 올리는 목표를 설정했다. 7월에는 유럽연합과 우크라이나가 각각 1억 유로씩 출연해 첨단 방위기술 개발을 위한 투자에 돌입했다.
2025년 9월 말부터 시작된 러시아의 드론 위협은 유럽 국가들의 긴장감을 높였다. 최소 10개 국가의 공항과 군사시설 상공에 러시아 드론이 나타나는 사태가 발생했다. 폴란드는 긴급 나토회의를 소집해 공동대응을 주문했다. 유럽 각국 정부와 유럽연합은 러시아의 드론 위협을 유럽의 방위태세를 시험하고 심리적, 물리적 부담을 가하려는 하이브리드 위협으로 규정했다. 10월 16일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2030 유럽 방위준비 로드맵’을 발표했는데, ‘드론 월’로 불리는 드론 방어 이니셔티브를 포함해 동부전선을 중심으로 한 방위태세 강화가 주요 내용이다.
그러나 유럽은 여러 제약에 직면해 있다. 영국 국제전략연구소(IISS)가 9월 발표한 「유럽 방위 역량의 진전과 한계」에 따르면, 유럽 전역에 배치된 미국의 재래식 군사력을 유럽이 대체하려면 최소 1조 달러가 필요한 것으로 추산된다. 보고서는 유럽 방위력이 하드웨어 측면에서는 정찰·감시 항공기, 장거리 정밀타격 미사일, 미사일 방어체계가 부족하며, 소프트웨어 측면에서는 핵심 정보수집 체계를 미국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또한 방위산업 인력 부족으로 인해 미국을 완전히 대체하는 것이 사실상 어렵기 때문에, 유럽 차원의 산업협력 확대와 비(非)미국 동맹국들로의 구매처 다변화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그러나 가장 큰 장애요인은 재정이다. 방위비 증액과 미국 의존도 완화를 위해서는 막대한 재정투입이 필요한데, 이는 각국의 정치적 합의와 결단을 요구한다. 문제는 국가별로 국방비 증액에 대한 공감대가 크게 다르다는 점이다. 유럽외교협의회가 6월에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덴마크와 폴란드처럼 러시아와 인접한 북유럽과 동유럽 국가들은 국방비 증액 지지가 과반을 넘겼다. 반면 이탈리아나 스페인처럼 러시아로부터 거리가 먼 남유럽 국가들에서는 국방비 증액 지지가 낮게 나타났다. 독일, 덴마크, 라트비아, 크로아티아 등 징병제 도입 또는 재도입을 추진하는 국가들에서는 청년층을 중심으로 반대 여론이 높다. 이처럼 유럽의 무장 강화는 다양한 구조적·정치적 쟁점에 가로막혀 있으며, 앞서 언급한 포퓰리즘 세력의 부상까지 고려하면 그 진척은 더욱 더딜 수 있다.
그렇기에 일부 전문가는 유럽연합 차원의 군비 강화에 앞서 방위비 증액에 공감대가 높은 나라부터 빠르게 무장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북유럽, 폴란드, 발트 3국(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은 독자적인 국방력 강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2024년 11월 스웨덴 하르프순드에 모인 8개국 정상은 북대서양 지역의 연대를 기반으로 한 방위협력을 우선 추진하겠다고 밝혔고, 이후 양자·다자간 군사 협력을 확대했다. 스웨덴과 폴란드는 9월 군사기술협력약정을 체결한 데 이어 같은 달에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했다. 또한 폴란드와 발트 3국은 유럽연합의 유럽방위로드맵과 별개로 벨라루스, 러시아와의 국경지대에 자체적인 방어선을 구축하는 중이다.
유럽의 무장강화 흐름은 국제법과 국제규범에 대한 논란도 촉발하고 있다. 특히 기존 규범이 러시아의 회색지대 전략에 취약하다는 문제의식이 커지고 있다. 대표적 사례가 코펜하겐협약과 대인지뢰금지협약(오타와협약)이다. 코펜하겐협약은 1857년 덴마크해협을 모든 상업선박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국제수역으로 지정하고 통행료를 폐지한 조약이다. 그러나 최근 러시아가 이 협약을 악용해 ‘그림자선단’를 활용한 활동을 벌이는 것에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가 핵심 쟁점으로 떠올랐다. 그림자선단이란 제재대상 물자를 운송하기 위해 등록을 피하거나 선적정보를 조작하는 선박을 뜻하는데, 러시아는 미등록 유조선을 민간상선으로 위장해 발트해를 자유롭게 통과하면서 제재를 회피하거나 해저케이블을 훼손했다. 이 때문에 덴마크를 비롯한 주변국과 국제법학계에서는 기존의 국제법 체계만으로는 이러한 러시아의 활동에 대응하는 데 한계가 명확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에 따라 현행 국제법을 보완하는 지역 협약을 채택하거나, 제재 관련 절차을 정비해서 유연하고 효과적인 집행체계를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2025년에는 발트 3국, 폴란드, 핀란드가 의회 결의로 대인지뢰금지협약을 탈퇴했다. (대인지뢰금지협약은 1997년 채택되어 1999년 발효된 다자조약으로 현재 160여개 국이 가입했다. 정식 명칭은 ‘대인지뢰 사용, 비축, 생산, 이전 금지와 대인지뢰 페기에 관한 협약’이다.) 러시아 또는 벨라루스와 인접한 이들 국가는 러시아가 협약에 가입하지 않은 상황에서 최근의 안보 환경을 고려할 때 유연한 대응과 사고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집속탄 사용을 금지하는 더블린협약(2010)도 같은 이유로 탈퇴 혹은 재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유럽에서 안보 위기감의 증가는 다양한 쟁점을 낳고 있다. 과연 유럽이 러시아에 대항해 단결력을 보여줄 수 있을지, 그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국제규범 차원의 여러 쟁점은 어떻게 될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2) 중동, 끝이 보이지 않는 극단적 폭력
트럼프 행정부는 취임 초기부터 중동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1월 스티브 위트코프 특사를 보내 이스라엘-하마스 사이에 1월 19일 휴전협정이 이뤄졌다. 지난 6월 발생한 이스라엘-이란의 12일 전쟁엔 미국이 직접 이란의 핵시설을 공습하면서 휴전이 체결되었다. 10월 10일에는 이스라엘과 하마스 사이에 다시금 휴전협정이 발효되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이 중동의 분쟁에 관여한 덕분에 전면전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자화자찬하며 스스로를 ‘평화의 중재자’로 칭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과 달리 중동의 정세는 평화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1월 휴전은 인질 교환 이후 단계에서 진전을 거두지 못한 채 종료되었다. 이란은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인 핵시설과 농축우라늄을 포기하지 않았다.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10월 휴전은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다. 이스라엘이 레바논 헤즈볼라 고위 간부를 암살하면서 긴장이 고조됐다. 중동에 정말 평화의 가능성이 있긴 한 것일까? 올 한해 중동에서 주요 행위자였던 이란과 하마스,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내년 중동 지역 정세에서 주목할 부분이 무엇인지 살펴보겠다.
(1) 재기를 노리는 이란과 시리아의 혼란
이란은 올해 중동지역에서의 영향력에 큰 손상을 입었다. 지난해 시리아 아사드 정권이 무너졌고 레바논 헤즈볼라 역시 지도부 대부분이 사망한 가운데 이스라엘과 체결한 휴전협정으로 세가 약해졌다. 하마스 역시 지도부 다수가 사망한 가운데, 저항의 축의 세가 위축되었다. 특히 6월 12일부터의 ‘12일 전쟁’은 이란에 큰 타격을 주었다. 14명의 이란의 주요 핵 과학자들이 사망했으며, 핵시설이 있는 나탄즈, 포르도, 이스파한 지역이 공습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이란의 핵시설은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다. 국제원자력기구(IAEA) 그로시 총장에 따르면 약 400kg으로 추정되는 60% 이상의 고농축 우라늄(단시간 내로 90% 이상 농축하여 폭탄으로 제조가 가능한 수준) 일부가 공습 전에 옮겨졌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란이 몇 달 내로 원심분리기를 통해 다시금 고농축 우라늄을 제조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란은 의회에서 국제원자력기구와의 협력 중단 결의안을 통과시켜 국제원자력기구의 이란 핵시설 접근을 막았다.
이란의 이러한 행보에 대해 이란핵합의(JCPOA) 체결 당사국인 영국·프랑스·독일은 강하게 반발하며 스냅백 제재(2015년 핵합의 이전의 유엔 제재를 자동 복원하는 조치) 발동을 경고했고, 8월 말 관련 절차를 개시했다. 9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는 러시아·중국·파키스탄·알제리가 제재 종료 결의안에 찬성했지만, 다수 이사국의 반대로 인해 유엔 차원의 제재가 복원되었다.
이후 이란은 러시아와 중국과 같은 권위주의 국가들과의 연계를 강화하면서 핵 개발 의지를 더욱 분명히 했다. 이란은 3월 중국·러시아와의 합동 군사훈련을 진행한 데 이어 7월에는 러시아 해군과의 합동훈련을 진행했다. 또한, 9월 26일에는 러시아와 4기의 원자력발전소 건설 계약을 체결했다. 이란 최고지도자실 고문 카말 하라지는 중국과 러시아가 제안하는 국제원자력기구(IAEA) 협력 재개 방안에는 열려있다고 밝혀, IAEA와의 선택적 협력을 제재 완화를 위한 지렛대로 활용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국내 여론에서는 핵 개발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있다. 《테헤란 타임즈》는 IAEA와의 협력이 이란 핵시설 관련 정보가 미국과 이스라엘로 넘어가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주장하며, 이란은 핵 개발 의지를 절대 굽히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 대목에서 시리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24년 12월 아사드 정권을 전복한 ‘하야트 타흐리르 알샴’(HTS)의 시리아 신정부는 3월 언론과 표현의 자유, 여성의 정치·경제 권리 보장을 명시한 신헌법을 제정해 7월 미국 정부의 테러조직 목록에서 빠졌다. 그러나 시리아 신정부를 둘러싸고 튀르키예, 이스라엘, 쿠르드족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시리아 신정부는 같은 수니파 이슬람주의 정권인 튀르키예의 후원을 받고 있다. 튀르키예는 시리아 내전 당시 시리아 북부지역을 거점으로 삼은 알카에다 계열의 수니파 무장조직을 지원했다. (현 집권세력도 여기에 포함된다.) 튀르키예 군은 이미 시리아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네 군데에 군사기지를 설치했으며, 추가로 군사기지를 설치하기로 한 합의를 포함해 현 정권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쿠르드족은 시리아 신정부와 튀르키예의 협력에 불만을 표한다. 이스라엘은 시리아와 튀르키예의 협력을 경계하면서, 국경지대인 골란고원의 비무장지대와 전략적 요충지인 헤브론 산을 점령했다. 튀르키예와 이스라엘은 서로를 지역 패권을 노리는 제국주의 행위자라고 비난하고 있다. 쿠르드족은 더욱 갈등적인 상황이다. 미국은 이슬람국가(ISIS)와의 투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쿠르드족 중심의 시리아민주군과 협력하라고 시리아 신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튀르키예는 시리아민주군을 쿠르드노동자당의 연장선으로 간주하며 적대적인 입장을 보인다. 시리아 정규군 통합을 위한 무장해제를 두고 시리아 신정부와 시리아민주군은 무력충돌을 지속하고 있다. 브루킹스 연구원의 수잔 말로니는 이스라엘, 튀르키예와 시리아 신정부, 쿠르드족 삼각구도 사이에서 갈등이 격화될 경우, 이란이 시리아 북동부와 이란-이라크 접경지대를 근거지로 하는 쿠르드족 세력에게 접근해 그들을 중심으로 대리 네트워크를 재건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2) 이완되는 통치력을 전쟁으로 돌파할 하마스
10월 체결된 이스라엘–하마스 휴전의 향방에 대해 대다수 전문가는 비관적이다. 인질 석방 이후 논의되어야 할 ‘평화 단계’인 하마스의 무장해제, 이스라엘군의 단계적 철수, 과도정부 수립, 국제 안정화군 배치를 둘러싼 견해차가 좁혀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스라엘과 하마스는 휴전 이후에도 저강도 공격을 이어가고 있다. 양측 모두 통치력과 내부 결속을 유지하기 위해 갈등을 지속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하마스는 가자지구 내에서 통치력과 영향력이 조금씩 약해지는 조짐을 보인다. 팔레스타인 정책조사연구센터가 10월 28일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주민 사이에서 전쟁 장기화에 대한 피로감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물론 여전히 하마스는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지지받는 정치세력이다(2025년 10월 기준 전체 35%). 10월 휴전 이후 지지율도 소폭 상승했다. 그러나 2023년 이후 전체적으로 지지율은 하락했다. 특히 가자지구에서 그 감소폭이 두드러진다. 2023년 10월 공세를 지지한 비율은 개전 초기인 2024년 3월 70%대에서 2015년 10월 40%대로 떨어졌으며, ‘하마스가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응답 역시 27%로 개전 초기 대비 약 30% 포인트 감소했다. 이 수치는 서안지구보다도 낮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가자지구에서는 반(反)하마스 움직임이 등장하고 있다. 2025년 3월 가자지구 북부 셰자이야와 베이트 라히야에서 개전 이후 처음으로 주민 수백 명이 “하마스는 물러나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또한, 하마스 통치에 불만을 가진 무장조직도 증가해, 2025년 9월 기준 최대 12개의 조직이 활동 중인 것으로 보고되었다. 하마스는 이들과 충돌하며 수십 명을 처형했다. 하마스 관리 모하메드 나잘은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이들이 ‘범죄자’라고 주장하며 처형을 정당화했지만, 적법한 절차 없이 반대자를 사형하고 이를 소셜미디어에 영상으로 게시한 행위는 심각한 문제다.
무엇보다 하마스는 무장해제 의사를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이는 하마스가 단순한 무장조직이 아니라 종교·사회·정치 네트워크를 결합한 이슬람주의 조직이기 때문이다. 매튜 레빗 워싱턴 근동정책연구소 선임연구원에 따르면, 하마스는 ‘다와’로 불리는 광범위한 사회복지·교육 네트워크를 통해 폭력 활동을 생산·재생산한다. 자선단체를 통해 자금을 조달하고, 모스크와 연계한 이슬람주의 교육을 통해 이념을 확산하며, 청년층을 조직화해 무장단원으로 흡수한다. 이 과정에서 하마스는 취약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기능을 대체함으로써 주민 지지를 확보해 왔다. 레빗은 이러한 다와 네트워크를 대체할 수 있는 정치·사회적 기제를 개발하지 않는 한, 하마스의 무장해제와 폭력 중단은 어려울 것이라고 평가한다.
실제로 팔레스타인 내부에서 하마스 지지가 여전히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하는 이유도, 하마스를 대체할 정치세력과 제도적·사회적 네트워크가 부재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하마스는 지도부 다수가 사망하고 자금난에 직면한 상황에서 내부 불만을 강경하게 통제하고 외부에서 자금·무기·인력을 확보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이런 조건이 유지되는 한, 하마스는 전력을 회복하는 대로 다시금 이스라엘을 공격함으로써 내부 결속을 강화하려 할 가능성이 크다.
(3) 이스라엘 네타냐후 정권과 이스라엘 시민사회의 평화운동
이스라엘 네타냐후 정권도 전쟁을 지속할 것으로 전망된다. 2026년 10월 총선을 앞둔 이스라엘에서 네타냐후 정권에 대한 여론은 매우 부정적이다. 최근 조사에서 유권자의 약 70%가 연립정부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네타냐후 총리 역시 여러 부패와 비리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어 정치적 타격이 크다. 하지만, 네타냐후를 실질적으로 대체할 정치세력은 뚜렷하게 부상하지 못하고 있다. 야당은 여러 갈래로 분열되어 있으며, 아랍계 정당에 대한 관점이나 안보·경제 정책 노선을 비롯한 핵심 쟁점에서 입장이 크게 갈린다. 이들이 설령 반(反) 네타냐후 전선을 구축하더라도, 명확한 공동의 정책이나 대안을 제시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한편, 전쟁 후 많은 나라와 시민사회가 네타냐후 정권의 행보를 비판했다. 일부 유럽 국가는 이스라엘의 군수품 수출입 금지를 선언했고, 유럽연합도 이스라엘과의 자유무역협정을 재검토하며 관세부과를 고려하겠다고 밝혔다. 시민사회 차원에선 광범위한 이스라엘 보이콧 운동이 나타났다. 음악계에선 주요 음반사와 뮤지션이 이스라엘에서 음악 스트리밍을 중단하는 ‘집단학살을 위한 음악은 없다’ 캠페인을 진행했다. 영화계에서는 할리우드를 포함한 1천여 명의 영화인이 이스라엘 영화계와의 교류 보이콧을 선언했으며, 유럽의 수십 개 학술기관이 이스라엘 대학과의 교류를 중단했다.
문제는 시민사회 일각에서 네타냐후 정권 비판과 군수품 금지를 넘어, 이스라엘 시민 전체를 일반화해 비난하는 방향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행태는 이스라엘 사회 내에서 정권에 비판적인 사람들까지도 불안과 고립감을 키우며, 네타냐후의 안보위기 프레임에 더욱 힘을 실어줄 수 있다. 영국 왕립학회장이자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벤키 라마크리슈난은 9월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네타냐후 정권에 비판적인 연구자들까지 무차별적으로 보이콧하는 것은 학문의 자유를 침해할 뿐 아니라, 팔레스타인에 공감하는 이스라엘 내 시민들까지 고립시킬 수 있다”라고 우려를 표했다.
따라서 이스라엘 내에서 팔레스타인과의 공존을 지향하는 시민단체들의 활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에는 유엔의 두 국가 해법에 대한 대안으로 연합국가 방안을 주장하는 단체들이 존재한다. ‘성지연합’과 ‘모두를 위한 땅’과 같은 시민단체들은 연방제 국가 안에서 여러 민족이 공존하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그 내용을 알리는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외에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 민족의 자결권을 보장하고 평화 구축을 지향하는 60여 개 유대인·팔레스타인 시민사회단체들의 연대체인 ‘잇츠타임’(It’s Time)이 올해 5월 8~9일 민중평회정상회의(People’s Peace Summit) 포럼을 예루살렘에서 개최했다. 포럼은 토론과 워크숍, 문화행사를 비롯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으며, 온라인을 포함해 약 7천 명이 참여했다.
이스라엘 시민사회 단체들의 이러한 목소리가 세계적으로 힘을 얻을수록, 오히려 네타냐후를 비롯한 강경 시온주의 세력이 억제될 수 있다. 또한, 인질협상 이후 답보 상태에서 벗어나, 평화적 해결방안이 진척될 수 있을 것이다.
[사진] 이스라엘 시민단체들의 평화 포럼
사진은 5월 9일 민중평회정상회의(People’s Peace Summit) 포럼 둘째 날 진행한 “파트너가 있고 길이 있다: 심연에서 벗어날 정치적 해결책” 세션 중 패널토론 장면이다. 해당 세션은 올메르트 이스라엘 전 총리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전 외무장관인 나세르 알키드의 두 국가 해결안에 관한 발제가 있었다. 이후 진행된 패널토론에는 시민단체 활동가인 메이 푼닥, 룰라 하르달(모두를 위한 땅)과 에란 니산, 라완 오데(피닉스 프로그램) 그리고 니달 포카하(제네바 이니셔티브)가 참여해, 연합국가 방안, 안보와 국경, 난민 문제를 비롯한 구체적인 쟁점에 관한 토론을 진행했다. (출처: New Israel Fund)
3) 소결: 핵 군비 경쟁을 자극하는 권위주의 정권을 규탄해야 한다
러시아와 이란을 비롯한 권위주의 국가들은 국제사회의 제재를 회피하며 군사력을 강화하고 있다. 이들 국가는 현재 진행 중인 분쟁과 전쟁을 종식할 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전혀 숨기지 않고 있다. 게다가 이들 국가는 핵전력을 증강하거나 핵개발을 추진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제질서를 위협한다. 이들의 핵 의지가 강화될수록, 다른 국가도 자국의 핵무장을 고려하게 되어 세계적인 핵 경쟁을 촉발할 위험이 커진다.
이미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 과정에서 여러 차례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거론하며 위협을 가한 바 있다. 2023년에는 벨라루스에 전술핵무기를 배치했으며,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도 미국이 비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탈퇴했다. 이어 2025년에는 핵추진 대륙간 순항미사일 ‘부레베스트니크’와 핵추진 수중 드론 ‘포세이돈’ 실험에 성공했다고 밝혔다. 중국은 핵무기 고도화를 신속히 추진하고 있으며, 북한과 이란도 핵무기와 핵 권리를 포기할 의사가 없음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세계적인 핵 경쟁의 확대는 이미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1992년 이후 중단된 미국의 핵실험 재개를 선언했고, 마크롱 대통령은 유럽 국가들에 핵 공유를 제안했다. 2010년 체결된 신전략무기감축협정(New START)은 내년 2월 기한 만료와 함께 신규 협상 없이 종료될 예정이다.
핵무기가 극도로 비인도적이며 인류절멸 가능성을 내포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오늘날 국제질서는 매우 위험한 상태로 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NPT체제를 비롯한 세계 평화운동이 수십 년간 쌓아 올린 성과를 위협한다. 따라서 권위주의 국가들의 행위가 초래할 위험을 비판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내년에 예정된 NPT 평가회의와 핵무기금지조약(TPNW) 당사국회의는 국제적 규범과 평화 질서를 둘러싼 공론을 재구성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 이를 위한 사회운동의 적극적 활동이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