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2026 여름. 19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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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왜 헌정 회복에 실패했는가

『영국헌정사』, 『한국헌정사』 (하)

정성진 | 정책교육국장

민주주의는 사회적 약자가 기댈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단지 다수의 의사 반영이나 선거 절차만을 뜻한다면, 그것은 언제든 권력 독점과 억압의 형식으로 퇴행할 수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진정으로 추구한다면, 민주정이 어떤 제도와 정치문화 속에서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고 권력을 통제할 수 있는지를 함께 물어야 한다. (이 글에서 ‘민주정’은 헌정적 민주정 내지는 자유민주정의 의미로 쓴다.)

 

지난 글에서는 『영국헌정사』를 통해, 영국이 내전과 명예혁명을 거치며 로마 공화정을 ‘추격하고 추월’한 과정에 주목했다. 영국은 로마 공화정의 혼합정체를 계승하려 했지만, 동시에 그것이 내전을 거쳐 인민주의적 참주정으로 퇴보했던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았다. 그 과정에서 영국이 얻은 핵심 교훈 중 하나가 정치적 헌정주의 관점의 헌정론이었다.

 

먼저 헌정이 법률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했다. 로마에서는 인민주의자가 다수의 의사를 내세워 평민회의 입법권을 권력 독점의 수단으로 삼았고, 공화정의 혼합정체적 관행을 무너뜨렸다. 이를 반성하며 영국은 법률만으로 담아낼 수 없는 정치적 관행, 권력의 견제와 균형, 그리고 누구의 신체와 정신의 자유도 침해할 수 없다는 최소한의 도덕적 경계선을 형성하려 했다. 영국은 이를 ‘고래의 헌정·자유’로 이상화했고, 그러한 공통 규범과 관습을 형성함으로써 내전을 종결시키고 혼합정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나갔다.

 

그 핵심은 시민들이 서로 다른 이해와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하면서도 누구도 권력을 독점하지 못하게 하는 데 있다. 정치적 갈등은 억압이나 내전이 아니라, 그런 헌정적 정치과정과 문화 속에서 해결되어야 한다. 이런 관점은 정치를 헌법과 법률로 위로부터 구성하려는 시각에도, 정치를 단순한 세력관계로 환원하는 시각에도 맞선다. 따라서 피지배계급이 국가권력을 장악해 정치를 위로부터 재구성하려는, 두 경향을 결합한 시각에도 맞선다.

 

영국의 경험이 보여주는 또 하나의 교훈은 내전을 종결시키는 정치적 능력의 중요성이다. 영국 내전뿐 아니라 로마에서 현대에 이르는 수많은 내전의 역사는, 새로운 정치체제로 나아가는 길이 ‘정의로운 분노’에 따른 복수로는 열리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물론 이것이 진실 규명이나 책임의 문제를 부정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내전적 복수의 연쇄를 정치적으로 종결시키지 못한다면, 더 자유롭고 평등한 정치공동체의 형성은 불가능하다.

 

이 문제는 마르크스주의의 ‘내전적 정치관’에 대한 비판으로도 이어진다. 러시아혁명의 경험에서 드러났듯, ‘수탈자에 대한 수탈’이라는 방식은 사회주의 건설로 이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내전의 지속은 시민사회를 국가에 종속시키고, 소비에트(평의회)를 형해화하며, 권력 독점과 관료제의 부상을 낳았다. 레닌이 내전을 반성하며 신경제정책, 소비에트의 재활성화, 부르주아 문화의 흡수를 제기했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를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으로 규정하고 경제적 측면에서는 ‘개인적 소유의 재건’이라는 과제를 제기했지만, 정치적 측면에서 어떤 정체와 정치문화가 필요한지는 충분히 탐구하지 못했다. 『프랑스 내전』에서 높이 평가한 파리코뮌식 모델은 삼권이 통합된 정부와 소환제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이미 로마 공화정의 붕괴와 17~18세기 정치사상 속에서 비판된 문제를 반복했다. 그 결과 마르크스의 이행론에는 경제적 측면의 진전된 요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헌정주의의 부재와 내전적 정치관이 그 진전을 저해하는 모순이 남았다. 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자유주의로부터의 진전이 아니라 퇴보로 귀결된 근본 원인 중 하나도 헌정론의 부재에서 찾을 수 있다.

 

결국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민주주의를 사고한다면, 내전적 정치가 민주적 결과가 아니라 권력 독점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의지를 국가권력으로 관철하는 체제가 아니라, 시민 개개인의 권리를 보장하고 국가권력을 통제하는 제도적·정치문화적 질서 속에서만 안정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헌정적 민주정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영국식 의원내각제의 발전 과정과 운영 원리는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를 성찰하는 데 중요한 기준을 제공한다.

 

『영국헌정사: 인민주의 비판을 위하여 (2)』

지은이: 박상현, 유주형 외

출판사: 공감

출간일: 2025.8.1.

『한국헌정사: 인민주의 비판을 위하여 (3)』

지은이: 박상현, 유주형 외

출판사: 공감

출간일: 2025.12.19.

 

1. 한국헌정사 분석을 위한 자원

 

지난 글에서 정리한 『한국헌정사』의 작의를 상기하며, 한국헌정사를 분석하기 위해 『영국헌정사』가 제공하는 이론적·역사적 자원을 먼저 짚어보고자 한다.

 

1) 『한국헌정사』의 작의

『한국헌정사』의 핵심 문제의식은 한국에서 1987년 이후의 문민화가 ‘헌정 회복’을 끝내 달성하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끝내 실패했다는 데 있다. 여기서 문민화란 단순히 군인이 권좌에서 물러나고 민선정부가 들어서는 일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군부독재가 훼손한 헌정적 정치과정, 권력 통제의 원리를 회복하는 과정이어야 했다. 책이 말하는 ‘문민화 실패’가 이런 의미에서 제기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한국헌정사와 문민화 실패를 설명하기 위해, 책은 먼저 국가권력에 의존적인 한국자본주의와 결합된 정치제도로서 대통령제의 구조적 결함에 주목한다. 한국의 대통령제는 미국과 달리 양원제가 아니라 단원제 의회와 결합했고, 대통령은 훨씬 더 광범위하고 강력한 권한을 행사해 왔다. 삼권분립의 통념과 달리 한국 대통령은 역사상 대부분의 시기에서 입법과 사법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재정·산업·금융 같은 경제 영역과 정당 구성, 관료·공무원 임명 등 정치·행정 영역까지 폭넓게 지배했다. 이러한 권력 구조는 이승만 정권부터 형성되어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강화되었고, 유신 체제에서 극단화되었다. 문민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약해지는 듯했지만, 결국 민주화 운동세력에 의해 다시 강화되고 있다고 본다.

 

이처럼 ‘선출된 군주’인 대통령과 단원제 의회가 결합하면서, 의회를 중심으로 한 정치과정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 대통령에 순응하는 ‘식물국회’와, 반대당 대통령에게 무조건 반대하며 차기 대권 획득에 몰두하는 ‘동물국회’가 반복되었다. 정당 역시 독자적 정치세력이라기보다 대통령 권력에 기생하는 구조로 변질되었다. 그 결과 정강과 정책을 입법으로 구현하는 ‘경세가형 정치인’이 재생산될 수 있는 의회정치와 정당정치의 토대가 취약했다.

 

물론 대통령제의 결함을 교정할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책은 1960년, 1979~1980년, 그리고 1987년 이후를 집중적으로 분석하며 왜 그런 기회들이 번번이 좌절되었는지를 추적한다. 특히 민주화 운동세력의 한계를 중요하게 지적한다. 군부독재에 맞섰다는 의의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헌정 회복을 위한 구상에 이르지 못했고, 권력욕과 정치적 무능 속에서 잘못된 노선과 운동 방식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분석 시기는 1987년 이후 1990년대의 문민화 과정이다. 책은 1987년 이전 민주화 운동의 두 지도자였던 김영삼과 김대중이 87년 개헌을 통해 유신 이전, 곧 제3공화국의 정체를 복원했다고 평가한다. 이것이 문민화 실패의 원인 중 하나였다. 더 나아가 책은 왜 민주화 운동세력이 그러한 선택을 하게 되었는가라는 문제까지 추적한다.

 

정치적 헌정주의 관점에서 볼 때,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되었으나 권력에 대한 통제와 정치적 관용·자제의 문화가 미진했다. 이에 로마 공화정 말기와 비슷하게, 금권주의와 인민주의가 확산된 것이 문민화 실패의 배경으로 제시된다. 결국 강력한 대통령의 권한을 둘러싸고 의회 내, 그리고 의회와 대통령 간 대치가 반복 확대됐다. 이런 맥락에서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만들어졌으나, 보수주의 세력(민정계)과 자유주의 세력(민주계) 간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표류했다는 점이 중요 문제로 지적된다. 결국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인민주의와 보수주의의 대립으로 내전의 진화 과정이 전개된다. 그 결과 헌정 회복으로서 문민화 실패를 넘어 헌정 ‘해체’가 진행되고 있으며, 이는 문재인·이재명 정부에서 법치 파괴로 심화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흔히 촛불집회로 대표되는 ‘K-민주주의’를 상찬하지만, 세계사적 경험에 비추어 보면 한국 역시 민주정이 붕괴하는 일반적 경로를 밟고 있다는 것이 책의 진단이다.

 

이 분석에서 주체의 문제도 중요하다. 책은 군부독재에 맞선 투쟁에서 출발한 민주화 운동이 결과적으로 문민화를 완수한 주체가 아니라, 인민주의와 내전적 정치의 진화를 이끈 핵심 주체로 변질되었다고 제기한다. 물론 이 과정이 처음부터 필연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1970년대 재야운동·학생운동의 한계를 비판하며 사회성격논쟁이라는 ‘문투’(文鬪), 즉 이론투쟁으로 전진했던 1980년대 학생운동이, 1987년부터 1991년에 이르는 과정에서 ‘무투’(武鬪), 즉 폭력투쟁 내지는 폭력을 통한 실력행사 노선으로 퇴행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책은 민족해방파(NL)뿐만 아니라 민중민주파(PD)도 문민화 실패에 일정한 책임이 있었다고 자기비판한다.

 

결국 책이 제기하는 한국 문민화 실패의 근본 원인은 정치적 헌정주의 관점, 곧 헌정론의 부재에 있다. 지난 글에서 설명했듯 정치적 헌정주의에서 헌정이란 정치공동체의 육체인 정체와 정신인 정치이념·문화의 유기적 결합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승만부터 박정희의 권위주의적 보수주의 세력, 이에 맞선 민주화 운동세력, 나아가 사회성격논쟁을 거친 학생운동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헌정을 헌법과 동일시하는 관념을 공유했다. 그 결과 헌정을 제대로 사고하지 못했다.

 

실제로 제헌 이후 1987년까지 수차례 개헌이 있었지만, 그것은 헌정적 정치과정 속에서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고, 정체론에 입각해 더 우월한 정체를 산출한 것도 아니었다. 정치문화 측면에서도 역사상 대부분의 시기에서 내전적 정치가 우세했다. 이 때문에 책은 민주화 운동 비판과 PD의 자기반성을 넘어, 마르크스의 ‘내전적 정치관’까지 거슬러 올라가 이를 비판적으로 청산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결국 이 책의 화두는, 한국 사회의 통념과 달리 무엇이 진정한 의미의 문민화이며 민주주의인가를 다시 묻는 일이겠다. 한국헌정사를 논하기에 앞서 영국헌정사와 로마 공화정 붕괴의 역사, 곧 내전의 진화 과정을 먼저 검토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치적 헌정주의의 관점에서 헌정이란 무엇인지, 독재정에서 민주정으로의 이행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민주정의 실제 운영을 가능하게 하는 더 우월한 정체와 정치문화란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한국헌정사 분석을 위한 이론적·역사적 자원인 것이다.

 

2) 영국헌정사로부터 얻을 수 있는 자원

이제 영국헌정사로부터 한국헌정사 분석에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을 살펴보자. 이는 크게 정체의 측면과 정치문화의 측면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전자에서는 대통령제와 영국식 의원내각제가 어떻게 다르며 왜 후자가 더 민주적이고 안정적인 정체로 평가되는가가 핵심이다. 후자에서는 의원내각제와 선거제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정치인과 시민에게 어떤 태도와 규범이 필요한가가 중요하다.

 

의원내각제는 민주적 정당성과 정치적 유연성을 확보하고, 의회주권을 통해 관료주의와 인민주의 양자를 동시에 통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국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선거제, 곧 제한·보통선거, 차등·평등선거, 공개·비밀선거를 둘러싼 영국의 논의는 대통령 직선제로 수렴되었던 한국 민주화 운동의 민주주의관과 개헌론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정치문화의 측면에서는 법률과 제도상 허용된 권한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행사하지 않고 자제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의회의 탄핵권 남용과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이 반복되다 끝내 계엄 사태로까지 이어졌던 한국의 현실을 돌이켜보면, 제도 못지않게 정치문화의 문제가 중요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1) 주권이 단일한가 분할되는가: 의회주권과 입법권·행정권의 융합

 

의원내각제와 대통령제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민주적 정당성이 형성되는 방식에 있다.

 

의원내각제에서는 국민이 의원만을 선출하며, 의회가 유일한 전국적·집단적 대표자로 세워진다. 의회는 입법을 수행하는 동시에 자신의 내부에서 집행위원회로서 내각을 구성한다. 따라서 의원내각제에서는 입법권과 행정권이 융합되어 있으며, 의회가 결정한 정책을 내각을 통해 실제로 집행할 수 있다. 지난 글에서 설명했듯, 명예혁명 이후 18세기 초반까지는 입법과 행정의 분립이 중시되었다. 그러나 수상이 실질적 정부 수반이 되고, 내각이 왕으로부터 분리되어 의회와 긴밀하게 협력하고, 선거제가 확대되면서 19세기에 입법과 행정의 재결합이 이뤄진 것이다.

 

근본적으로는 ‘의회의 지배’가 헌정을 보장한다. 영국의 역사적 경험은 왕권을 법률로 제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 법을 실제로 관철할 수 있는 정치적 수단이 없다면 갈등은 결국 내전으로 비화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선거를 통해 구성이 계속 바뀌는 대표자 집단인 의회가 조세와 군대를 장악하고, 의회의 입법이 삼권 중 우위에 서는 것이 중요했다. 행정부와 사법부는 의회가 제정한 법률을 집행하고 적용하는 기관으로 이해되었다. 이는 교과서적으로는 당연해 보이지만, 한국의 현실을 돌아보면 의원내각제와 대통령제, 정치적 헌정주의와 법률적 헌정주의의 차이가 드러난다.

 

반면 대통령제에서는 의회 선거와 별도로 정부 수반이자 국가 원수인 대통령을 국민이 전국 단위에서 직접 선출한다. 그 결과 의회와 대통령이라는 두 개의 민주적 정당성이 병존한다. 여기서 의회가 지역과 계층의 분산된 이해를 대표한다면, 대통령은 전국적 민의를 대표하는 단일한 인물로 간주된다. 이 때문에 대통령은 대개 의회보다 우월한 권위를 갖게 된다.

 

이 구조는 입법과 행정의 관계에도 긴장을 낳는다. 형식적으로는 의회 내 정당이 대통령을 배출하지만, 전국적 정책 의제를 내세워 당선되는 대통령은 행정뿐 아니라 입법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 그러나 제도상 입법과 행정은 분리되어 있으므로, 양자의 충돌과 교착이 구조적으로 반복된다.

 

선거에 기초한 민주적 정당성과 권위가 단일하게 구성되는가, 아니면 의회와 대통령으로 분할되는가의 차이는 입법부와 행정부의 책임성, 그리고 양자의 관계를 결정하는 핵심 요인이 된다.

 

(2) 의회와 정부의 책임성과 임기의 가변성

 

의원내각제에서는 의회가 나라의 법률과 정책을 결정하고, 다수당이 정부를 구성해 그 결과에 책임진다. 따라서 의원과 정당의 정치적 역량이 매우 중요해진다. 핵심은 정부와 의회의 임기가 모두 정치적으로 가변적이라는 점이다. 이 때문에 일상적인 의회정치와 정당정치에 상당한 긴장감이 걸리고, 정부 역시 민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의회 다수파가 구성한 정부, 곧 내각은 의회의 신임을 잃으면 언제든 교체될 수 있다. 이것이 의원내각제에서 정부에 대한 의회의 견제가 실질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이다. 물론 의회 다수파가 내각을 지지하고, 특히 양당제인 영국식 의원내각제에서는 여소야대 상황의 발생과 지속이 어려우므로, 내각 교체가 마음대로 일어날 수 있진 않다. 그럼에도 정부 정책을 둘러싸고 의회정치와 정당정치를 통한 내각 교체 가능성이 항시 존재해, 내각과 여당은 의회 안에서 끊임없이 설명 책임을 져야 한다.

 

물론 의회가 불신임투표를 통해 정부를 교체하려 할 때, 내각도 사퇴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의회 해산, 곧 재선거를 통해 국민에게 다시 판단을 물을 수 있다. 이는 대통령제의 국민투표·국민소환과 다르다. 의원내각제의 의회 해산은 의회를 다시 선출함으로써 내각을 재구성하는 절차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원내각제 구조에서는 대통령제에서 흔히 나타나는 의회와 행정부 사이의 장기 교착이 발생하기 어렵다. 의회 선거가 정기적으로만 치러지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불신임당하면 언제든 불시에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실패하면 의회가 정부를 교체할 수 있고, 반대로 의회 다수파가 민심과 괴리되었다고 판단되면 재선거를 통해 의회가 다시 구성될 수 있다. 결국 정치적 조정은 정부를 지지하는 다수파를 새롭게 확인하거나 교체하는 방향으로 항시 이루어진다. 민의에 더 빠르게 반응하는 것이다. 한국에서처럼 여소야대가 장기화되며 탄핵과 거부권이 반복되고, 그것이 극단적 충돌로 비화하는 상황은 제도적으로 발생하기 어렵다.

 

반면 대통령제에서는 대통령과 의회가 각각 선출되어 양자 모두 고정된 임기를 보장받는다. 이 때문에 정치적 책임성이 상대적으로 약해진다. 정부가 잘못된 정책을 펼치더라도 정치적 책임을 물어 정부를 곧바로 교체할 수 없다. 정부 교체는 원칙적으로 다음 대통령 선거까지 유예된다.

 

물론 대통령제에도 임기 중 정부를 평가할 수 있는 수단으로 의회 선거, 곧 중간선거가 있다. 그러나 중간선거는 정부를 교체하는 절차가 아니다. 오히려 대통령을 그대로 둔 채 여소야대 상황을 만들어 의회와 정부 사이의 교착을 발생시킬 수 있다. 대통령은 여전히 행정부를 장악하고, 의회는 입법을 통해 대통령을 견제하려 하기에 양자의 대립은 제도적으로 종결되기 어렵다.

 

대통령이나 장관에 대한 의회의 탄핵도 있지만, 탄핵은 본래 정치적 책임이 아니라 법률 위반에 대한 책임을 묻는 수단이다. 미국은 하원의 탄핵을 상원이 최종 표결하므로, 의원내각제의 불신임과 유사한 정치적 성격을 갖게 되는 면이 있다. 그러나 한국처럼 사법부가 탄핵 여부를 판단하는 구조에서는 국민이 선출하지 않은 법관이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이나 그가 임명한 장관의 거취를 결정하는 셈이 되어 민주적 정당성의 훼손과 정치적 갈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한편 대통령은 의원내각제의 내각과 달리 의회해산권을 갖지 않는다. 교착 상태에서 대통령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대체로 거부권을 행사하거나 행정명령을 통해 의회의 견제를 우회하는 것이다. 이는 의회와 정부 사이의 갈등을 더욱 키운다. 더 극단적으로는 여권이 국민소환을 통해 의회를 우회하고 야당 의원을 교체하려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행정 수반의 직위는 유지한 채 의회 구성을 바꾸려는 시도이므로, 의원내각제의 의회 해산과 달리 정치적 대립을 완화하기보다 격화시키기 쉽다. (최근 대만의 국민소환운동 사례처럼 말이다. 임지섭,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는 어떻게 실패하는가」, 《계간 사회진보연대》, 2025년 봄호.)

 

결국 대통령제에서 중간선거 이후 여소야대가 형성되면, 어느 쪽도 갈등을 제도적으로 종결시키지 못한 채 대립만 격화될 수 있다. 문제는 갈등의 존재가 아니라, 갈등을 정치적으로 끝낼 제도적 출구가 취약하다는 점이다.

 

(3) 관료제 통제와 사법부의 독립성

 

관료제 통제 방식에서도 의원내각제와 대통령제는 크게 다르다. 이 문제의 핵심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관료제가 누구에게 책임지는가에 있다.

 

의원내각제에서 관료와 공무원은 일차적으로 내각에, 궁극적으로는 의회에 책임진다. 내각은 정책 집행에서 관료제의 전문성과 효율성에 의존하지만, 행정의 목적은 의회가 부여한 정치적 방향에 따라 정해진다. 정부가 그 목적에서 벗어나거나 행정권을 남용할 경우, 의회정치의 과정을 통해 내각은 불신임당할 수 있다. 따라서 의원내각제에서 행정은 전문성을 지니되, 정치적으로는 의회정치에 종속된다.

 

반면 대통령제에서 관료제가 책임지는 직접적 대상은 행정 수반인 대통령이다. 대통령은 의회와 독립된 민주적 정당성을 가지며, 행정명령과 관료조직을 활용해 의회를 우회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20세기 미국에서 행정국가의 발전이 의회와 정당에 대한 대통령의 우위, 그리고 대통령 권한 강화와 결부되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의회가 행정부를 충분히 통제하기 어려운 구조에서는, 관료제를 민주적으로 통제한다는 명분이 전국선거로 선출된 대통령에게 관료제가 복종해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질 수 있다. 그 결과 대통령 1인 권력이 더욱 강해지는 모순이 발생한다. (트럼프주의 단일행정부론처럼 말이다. 박동열, 「공화국을 포위한 『두 유령』과 트럼프 2기 행정부 1년 평가」, 《계간 사회진보연대》, 2026년 봄호.)

 

사법부 독립성 문제도 기본적으로는 선출되지 않은 법관과 선출된 정치권력 간의 관계 문제다. 다만 이는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 사이의 차이뿐만 아니라, 정치적 헌정주의와 법률적 헌정주의 사이의 쟁점이기도 하다.

 

의회주권이라는 의미에서 헌법을 두지 않는 영국식 의원내각제에서는, 선출되지 않은 사법부는 의회가 제정한 법률을 행정부가 집행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위법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의회가 제정한 법률 자체를 심사하거나, 입법을 통한 정책 결정과 정치적 실패를 법원이 심판할 수는 없다. 의회의 입법권이 우위에 있으며, 바로 이 점에서 ‘의회주권’이 성립한다. 개개인의 법률 위반은 사법적으로 처벌되나, 정책 실패의 책임을 물어 내각을 교체하는 일은 법원이 아니라 의회정치의 몫이다.

 

반면 성문헌법이 존재하는 체제에서는 의회의 입법이 상위법인 헌법에 의해 통제되며, 사법부가 정치과정에 개입할 여지가 구조적으로 존재한다. 물론 이는 헌법에 어긋나는 입법이나 행정명령에 제동을 걸고 바로잡는 기능을 할 수 있다. 법률적 헌정주의자들이 강조하는 장점이다. 그러나 정치문화가 취약할 경우, 의회 내부에서 또는 의회와 정부 사이에서 타협해야 할 사안이 사법심사로 넘어가고, 선출되지 않은 법관의 정치 개입이 강화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 탓에 정당이나 정부가 법관을 통제하려는 유혹이 항시 존재한다.

 

결국 관료제나 사법부 문제는 민주정에서 선출되지 않은 전문 인력과 선출된 자들의 정치과정 사이 관계에서 후자가 전자를 어떻게 통제해야 하는가의 문제다. 영국식 의원내각제와 정치적 헌정주의는 그 답을 의회정치의 우위에서 찾는다. 반대로 대통령제와 법률적 헌정주의가 결합하면, 관료제는 강화되거나 대통령 권력에 종속되며 무책임해지고, 의회와 정부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는 사법부로 넘어가기 쉽다. 그럴수록 의회정치는 더 무책임해지고, 사법부는 더 정치화된다.

 

(4) 의회주권의 조건으로서 정치문화와 ‘반체제’ 문제

 

영국 헌정이 이렇듯 강력한 의회주권의 의원내각제를 발전시킬 수 있었던 데에는, 평민원 중심의 의회정치·정당정치 활성화, 선거권 확대와 더불어 의회주권을 남용하지 않도록 붙드는 정치문화가 결정적이었다.

 

19세기 후반 영국에서는 평민원을 중심으로 한 의회주권 강화에 여러 우려가 제기되었다. 선거제에 관해서는 제한선거제를 유지하자는 주장이나, 보통선거제를 택하더라도 차등투표제나 소수 의견 보호 장치를 두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의회제에 관해서도 귀족원을 신분이 아니라 능력에 기반하도록 개혁해, 신분제가 사라진 조건에서도 평민원을 견제하는 권위와 역량을 유지해야 한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특히 1911년 의회법으로 평민원의 입법에 대한 귀족원의 거부권이 사실상 폐지되자, 의회주권이 오남용될 위험에 대한 우려가 더욱 커졌다. 게다가 19세기 이어진 선거제 개혁의 흐름으로 마침내 1928년 완전한 보통선거제가 확립됐다.

 

그럼에도 20세기에도 영국 헌정이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평민원의 양당이 여전히 관용과 자제의 정치문화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치문화의 기반에는 시민적 품성과 정치적 규범의 사회적 확산이 있었다. 여기서 영국인이 본래 탁월한 국민성을 가졌다고 치부할 것이 아니라, 그런 국민성이 형성되기까지의 역사적 과정에서 배우는 일이 중요하다. 특히 내전 종결의 경험과 교훈에 주목해야 한다. 영국인의 관용과 자제는 타고난 것이 아니라, 내전의 참혹한 경험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역사적으로 학습된 정치적 기술이었다.

 

그 출발점에는 자신의 목숨과 자유만큼 타인의 목숨과 자유도 존중받아야 한다는 감각, 즉 공감이 있었다. 정치 지도자였던 귀족층 내부에서 먼저 상대에게 무기를 겨누지 않는 예법이 형성되었고, 점차 각자의 사익보다 공익을 추구하는 전국적 엘리트 문화가 발전했다. 19세기에 이르러 퍼블릭스쿨과 집단 스포츠 문화가 확산되며 양보·타협·승복을 중시하는 정치문화가 중간계급과 노동자계급까지 확대되었다. 20세기까지 이어진 이러한 문화가 헌정 파괴와 내전의 재발을 억제하는 기반이 되었다.

 

이런 정치문화 위에서 꽃피운 의원내각제가 국민을 정치적으로 교육하는 선순환이 이뤄질 수 있었다. 이 기능에 관해 J. S. 밀은 이렇게 말했다. “의회는 누구나 ‘내 생각을 나만큼, 혹은 나보다 더 잘 대변해줄 사람이 있다’고 믿을 수 있는 공간이다. 또한 자신의 주장이 친구나 같은 편 내부에서만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자들 앞에서도 개진되어 공개적으로 논쟁과 검증을 거치는 장소다. 설령 자신의 의견이 패배하더라도, 최소한 자신의 목소리가 충분히 논의되었고, 단순히 세력이나 선호 탓이 아니라 더 설득력 있는 이성적 판단에 의해 패배했다는 점에서 승복할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자신의 의견이 국민 다수의 대표들 중 얼마의 공감을 얻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의회는 정치가들에게 사회 안에서 어떤 의견과 세력이 성장하고 쇠퇴하는지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정치가들은 단지 눈앞의 필요에 대응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회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는지를 고려하며 정책을 형성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책이 제시하는 ‘반체제’(dissent) 행위 또는 인사라는 개념에 주목할 수 있다. 여기서 반체제는 단순히 주류나 다수와 다른 의견을 뜻하지 않는다. 케임브리지 영어사전에 따르면, ‘반체제’는 집단 스포츠에서 심판의 결정에 불복하는 것이라는 뜻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책은 야당과 반체제 야당을 구분하는 것이다. 요컨대 반체제란, 정치적 경쟁에서 패배했을 때 공론의 규칙 속에서 다시 경쟁하기보다는, 자신이 권력을 잡지 못하는 한 체제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책은 한국헌정사 설명에서 ‘문투’(文鬪), 곧 이론투쟁과 ‘무투’(武鬪), 곧 폭력투쟁의 구분을 중요하게 제기하는데, 반체제를 이 구분과 연결하여 볼 수 있겠다.

 

반체제 야당에 대한 비판이 정치체제의 변경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영국 헌정은 명예혁명뿐 아니라 그 이후에도 100년에 한 번꼴로 중대한 헌정의 변경을 이뤄냈다. 다만 그 변경이 상당한 이론적·정치적 논쟁에 따른 합의를 통해 이뤄졌던 것이다. 『자유주의의 역사』 소개 글에서 지적했듯, 실제로 시민의 권리와 민주주의의 향상을 선도한 것은 영국이었지 혁명이 잦았던 프랑스가 아니었다.

 

결국 정치적 헌정주의의 헌정론은 더 나은 정체가 무엇인가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개개인이 정치적 갈등과 경쟁, 그리고 패배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의회주권이 헌정적으로 작동하려면 정치세력들이 상대를 적이 아니라 경쟁자로 인정하고, 패배 뒤에도 승복하고 다시 경쟁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정치체제의 변경이라는 중대 사안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런 정치문화가 무너질 때, 내전적 정치로의 퇴행이 일어난다.

 

3) 로마의 ‘내전의 진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자원

영국 의원내각제와 로마 공화정 붕괴의 대조는, 헌정을 헌법·법률과 구분하는 정치적 헌정주의의 의의를 드러내며, ‘반체제’ 문제를 더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핵심은 합법적이지만 헌정주의에 부합하지 않는 정치 행위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있다. 의회 다수가 반대편 장관을 반복적으로 탄핵하거나, 자기 당파 지도자에 대한 재판을 중지시키거나, 반대 정파 지도자를 국외로 추방하는 법률을 통과시키거나, 반대 정파를 지지하는 시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박탈하는 입법을 추진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는 한국이 아니라 모두 로마의 사례다.)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이나 의회 다수가 행한 것이라도, 견제와 균형의 정체를 파괴하고 관용과 자제의 정치문화를 위반하는 행위를 민주주의적인 것으로 볼 수 있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1) 평민회·호민관의 입법권을 통한 정치과정의 파괴

 

로마 공화정은 오늘날의 제도에 견주어 말하면 대통령·내각에 해당하는 집정관·행정관, 상원에 해당하는 원로원, 그리고 선출된 대표와 국민투표제를 결합한 형태라 할 수 있는 민회가 함께 권력을 행사하는 혼합정체였다. 이 정체는 성문법만이 아니라, 각 기관이 서로 협의하고 견제하는 정치적 관행 위에서 작동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이 균형과 불문율이 어떻게 무너지기 시작했는가다.

 

그 배경에는 선거제 변화와 금권주의·인민주의의 확산이 있었지만, 직접적 계기는 호민관인 형 그라쿠스가 사실상 사문화되어 있던 평민회의 절대적 입법권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데 있었다. 집정관, 곧 오늘날의 대통령에 상응하는 직위를 둘러싼 정치적 경쟁에서 밀린 그는, 원로원과 기존 행정관과의 협의 관행을 무시하고 원로원의 거부권을 무시할 수 있는 호민관의 입법권과 국민투표를 활용해 정치과정을 변경하려 했다. 다시 말해 특정 인물을 위해 기존 정치규칙을 예외적으로 바꾸는 입법을 추진했다. 그의 행위는 법률상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정치적 헌정주의의 관점에서는 견제와 균형의 정체, 그리고 협의와 자제의 정치문화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이 사례는 정치적 헌정주의의 관점에서 법치와 헌정을 구분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사람들은 흔히 ‘헌법과 법률에 따라 권한을 행사하는 것은 정당하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치적 헌정주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단지 권한 행사가 법률에 부합했는가가 아니다. 영국에서 혼합정체가 발전한 과정에서도 보듯, 정체의 변경은 헌정적 정치과정 안에서 이루어질 때 비로소 민주적 정당성을 얻는다. 의회 다수나 대통령이 합법적 권한을 활용해 기존의 견제와 균형, 양보와 자제의 규범을 무너뜨리고 권력을 독점하려 한다면, 그것은 법률상 가능할지라도 정치적 헌정주의의 관점에서는 헌정 파괴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형 그라쿠스의 행위는 반체제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2) 사법의 정치화와 재판 무력화의 결과로서 독재

 

로마에서 입법을 통해 특정 정치가에게 권력을 집중시키고 그의 뜻대로 정치제도를 변경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사법 역시 점차 정치화되었다. 권력자나 부자도 법률에 따르도록 강제하는 제도가 무너지며, 법치는 집정관·행정관 직위를 차지한 이들이 반대파를 제거하고 재판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집정관 술라는 자신의 지지 세력을 바탕으로 반대파의 생명과 재산을 박탈하는 법률을 유지하고, 법관 인선을 장악해 재판을 통제하며 독재를 강화했다. 카이사르와 결탁한 호민관 클로디우스 역시 평민회를 이용해 자신의 범죄에 대한 재판을 무력화하고, 지지자를 동원해 공권력이 법률을 집행할 수 없게 만들었다. 두 사례는 정치적 헌정주의의 관점에서, 헌정이 결여된 법치가 결국 ‘법을 통한’ 무단통치로 귀결될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로마에서 그랬듯 그런 무단통치의 과정에서 법관의 권력도 비대해지고, 이를 독점하려는 정치세력 간 사투도 격해진다.

 

(3) 선거제는 민주주의적인가

 

로마의 평민회는 평민들의 투표로 호민관을 선출하고, 호민관이 제안한 입법을 평민투표로 통과시키는 구조였다. 따라서 로마 공화정 붕괴를 이해하는 데서 선거제에 대한 논의도 중요하다. 핵심은 헌정 없는 법치가 무단통치로 귀결될 수 있듯, 헌정 없는 선거제도 민주정을 파괴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스 직접민주주의의 추첨제를 대체한 로마의 선거제는 기본적으로 시민 사이의 위계를 전제하며 권력자와 부자에게 유리한 제도였다. 그러나 그 성격은 단순하지 않았다. 능력이 뛰어난 평민이 민회에서 당선되어 귀족으로 상승할 수 있었고, 민회를 둘러싸고 연설과 토론, 모임이 활성화되며 공론이 형성되기도 했다. 결국 문제는 선거제가 공론을 활성화해 역량이 뛰어난 인물을 선출하는 제도로 발전할 것인가, 아니면 대중 선전에 유리한 권력자와 부자를 위한 제도에 머물 것인가였다.

 

이에 관해 영국의 선거제 논의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19세기 영국에서는 제한선거와 보통선거, 차등선거와 평등선거, 공개선거와 비밀선거를 둘러싼 논쟁이 이어졌다. 결국 보통·평등·비밀선거가 정착된 데에는 국민개병제의 대가라는 사정도 있었지만, 선거권 확대가 관용과 자제의 정치문화에 기초한 의회정치·정당정치 활성화와 결합했다는 점도 중요했다. 귀족원의 거부권이 무력화됐음에도 평민원 다수파가 헌정을 일방적으로 변경하려는 시도가 잘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말해, 오늘날 한국에서 당연히 민주주의적이라 여겨지는 보통·평등·비밀선거도 원래는 특정한 조건 속에서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다.

 

로마 공화정 말기 평민회의 보통·평등·비밀선거는 그렇지 못했다. 다른 민회가 제한선거나 차등선거, 공개선거를 유지한 데 비해 평민회는 보통·평등선거를 채택했고, 형 그라쿠스가 등장하기 직전에는 비밀선거까지 도입했다. 일반적으로 비밀선거는 공개선거보다 유력자의 압력을 약화시킨다고 이해된다. 그러나 로마 평민회의 비밀선거는 기존의 개인을 대상으로 한 소규모 금권주의를 무작위 대중을 상대로 한 대규모 금권주의로 바꾸는 결과를 낳았다. 정치가들이 특정 개인을 매수하기보다 국가재정과 대중적 혜택을 통해 불특정 다수를 동원하는 방식으로 나아갔다.

 

그 결과 인민주의자들이 국민투표로 정치제도를 일방적으로 변경해 국가재정을 장악하고, 이를 다시 선거와 투표를 지배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악순환이 이뤄졌다. 선거제의 민주적 확대라고 여겨지는 것이 오히려 선거제가 내포한 위계를 공고히 하고, 독재의 통로가 된 것이다. 결국 선거제의 강화는 헌정 발전의 중요한 요소이지만, 그것은 정체와 정치문화의 다른 요소들과 함께 발전할 때에만 민주주의를 강화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선거제는 오히려 민주정을 붕괴시키고 독재정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4) 분노사업과 개인적 소유의 박탈은 평등을 가져왔는가

 

그럼에도 로마 인민주의자들의 사회경제적 요구, 곧 토지 재분배, 곡물 배급, 부채 탕감 등은 정당하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실제로 로마가 정복 전쟁을 통해 획득한 전리품과 토지는 귀족과 부유한 평민층에게 집중되었고, 가난한 평민층은 토지에서 밀려났다. 따라서 평민들이 토지 상실과 불평등에 분노한 것은 타당했다. 문제는 그 분노가 어떤 방식으로 조직되었는가였다. 다시 말해 인민주의자들이 주장한 ‘수탈자에 대한 수탈’이 실제로 불평등을 없애거나 완화했는가가 핵심이다.

 

그런 방향성은 사회적 합의를 통한 제도 개혁과 맞지 않으므로, 지지자의 동원과 폭력, 나아가 국가권력의 독점과 반대파 제거에 의존했다. 인민주의자 세력이 기존의 정치과정 대신 폭력과 수탈을 사용하자, 반대파 역시 정치과정이 아니라 금권을 이용한 대중 동원으로 맞섰다. 그 결과 로마 정치는 빠르게 분노와 복수의 악순환으로 빨려 들어갔고, 반대파에 대한 약탈과 숙청의 규모도 급속히 커졌다.

 

내전이 반복되고 확대되는 가운데 실제로 이익을 얻은 것은 빈민을 동원할 수 있는 재력과 권력을 가진 자들이었다. 동원된 빈민은 단기적으로 약탈물이나 생계 지원을 얻을 수 있었지만, 장기적으로는 이를 제공하는 인민주의적 후원자에게 종속되었다. 후원자가 내전에서 패배하면 자신도 생명과 재산을 잃게 되므로, 빈민들은 더욱 그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고 계속 병사와 추종자로 동원되었다. 약탈과 살인이 일상화되면서 내전이 개개인의 경제생활을 지배했고, 평민들은 귀족에 맞서 자립적 생활 기반을 회복하기는커녕 더 큰 불안정 속에 놓였다.

 

물론 특정 분파가 아니라 전 국민의 생계를 보장할 수 있는, 그 어떤 반대파도 도전할 수 없는 절대권력이 등장하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실제로 아우구스투스 이래 90여 년의 평화기가 그랬다. 그러나 이 평화는 로마가 이집트와 같은 새로운 식민지를 정복해 대규모 약탈을 수행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제국 내부에서 로마 시민과 비시민의 불평등은 여전히 심각했고, 황제와 로마 시민의 안녕도 항시 불안정했다. 결국 외부 정복이 한계에 다다르자 내전이 다시 350여 년 동안 반복·확대되며 제국은 멸망했다.

 

이러한 경험을 반성하며 영국 계몽주의자들이 제기한 것이 개인적 소유의 보장이었다. 이는 단순히 사유재산을 보장하라는 뜻이 아니었다. 개개인이 스스로 노동해 생계를 책임질 수 있어야 하며, 그래야 타인이나 국가에 예속되지 않고 독립된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물론 영국에서도 산업혁명 이후 노동자들은 빈곤에 시달렸다. 그러나 노동자운동이 가장 빠르게 사회적으로 포용되고 성장하여 경제적 분배와 정치적 권리를 쟁취한 곳은, 혁명과 반혁명의 악순환에 빠진 프랑스가 아니라 헌정이 안착된 영국이었다는 『자유주의의 역사』의 제기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내전적 정치가 인민의 불만을 해결하기는커녕 더욱 악화시키는 문제는 프랑스혁명에서도 반복된다. 임지섭, 「실패한 부르주아 혁명으로서 프랑스혁명」, 《계간 사회진보연대》, 2024년 여름호.)

 

결국 로마에서 ‘수탈자에 대한 수탈’의 귀결은 평등이나 인민의 해방이 아니라, 불평등과 권력자에 대한 종속의 확대였다. 인민주의자들은 인민의 불만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보다, 그것을 지속적으로 증폭시켜 반대파를 공격하게 만들고 그 과정에서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생계와 목숨이 끊임없이 위협받는 약자들은 더욱 그들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분노사업’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이다. 코언이 지적하듯, 인민의 ‘정의로운 분노’를 외치며 기존 정치과정을 파괴할 때, 유력자들은 정치적 설득과 경쟁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수고로움 없이 권력과 부를 얻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수탈자에 대한 수탈’을 외치는 인민주의자와 그를 따라 동원되는 지지자들을 더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는 정치적 주체로 보기는 어렵다.

 

이 점에서 케이헌이 21세기 인민주의의 발흥을 설명하며 경제적 요인보다 정치·도덕적 요인을 더 중요하게 보았던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경제적 불만만으로는 내전적 정치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내전사 연구가 보여주듯, 내전을 유발하는 핵심 요인은 빈곤 자체가 아니라, 불만을 분노와 복수의 감정으로 조직하고 증폭시키는 분노사업의 존재다. 결국 경제적 불만 자체보다는, 그 불만을 어떤 제도와 정치문화 속에서 조직하고 해결할 것인가가 쟁점이겠다.

 

(5) 인민주의적 참주정과 잡종정체

 

로마 공화정 말기부터의 정체를 ‘인민주의적 참주정’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이는 현대 내전 연구자들이 내전의 핵심 원인으로 지목하는 ‘잡종정체’와도 연결된다.

 

로마의 인민주의적 참주정은 단순한 독재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집정관·독재관이나 황제의 강력한 1인 권력이 선거와 민중 동원을 통해 정당화되는 체제였다. 현대적으로 말하면, 강력한 1인 권력과 잦은 선거가 결합된 체제라 할 수 있다. 의회의 견제가 약한 ‘제왕적 대통령’에 대한 직선제가 그 전형적 사례일 것이다.

 

이러한 잡종정체가 분노사업의 결과물인 동시에 분노사업을 일으킨다는 점이 중요하겠다. 인민주의자들이 인민의 분노를 활용해 권위독재정을 추수하고, 그렇게 형성된 강력한 권력을 둘러싸고 경쟁세력도 분노와 동원의 방식으로 대응하는 악순환에 빠져, 내전을 자극하는 것이다.

 

따라서 잡종정체는 보통 독재정과 민주정(헌정) 사이의 중간자, 이행기로 설명되지만, 독자적 특징을 가진다고 봐야 할 것이다. 즉 여러 층위의 잦은 선거, 권력의 분할(이는 영국식 단일주권과 반대되는 의미로, 권력의 견제·균형과는 구분됨), 권력 독점을 시도하는 세력들의 존재, 경쟁세력 간 교착, 대중 동원, 분노사업, 내전적 정치가 상호 강화하는 구조가 있는 것이다. 이런 잡종정체는 한국헌정사 이해에 시사점을 준다.

 

4) 소결

『자유주의의 역사』 책 소개 글에서 제기했듯, 실제로 개인의 권리와 민주정의 확대를 이룬 길이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정치혁명은 일어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하나의 결과일 뿐이고, 더 근본적인 것은 개인과 시민사회가 강화되는 과정이며, 이를 위해서는 소유, 헌정, 향상의 세 지주가 함께 발전해야 한다. 이것이 영국 온건 계몽주의와 자유주의가 제시한 길이었다. 반면 프랑스 급진 계몽주의와 공화주의는 피지배계급이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혁명의 과제를 위로부터 부과하는 정치혁명을 중시했다.

 

『영국헌정사』가 보여주는 영국헌정사와 로마 공화정 쇠망사의 대조는 이 쟁점을 더욱 구체화한다. 핵심 질문은 실제 역사에서 더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다. 민주주의와 시민의 정치 참여라는 명분 아래 유력자들이 시민을 동원하는 것이 과연 그 목적에 부합하는 결과를 낳았는지도 역사적으로 따져볼 필요가 있다. 경제적·정치적 권리의 확대가 소유·헌정·향상 세 지주의 결합을 통한 개인과 시민사회의 발전과 결합하지 못할 때, 그 결과는 불평등의 심화와 독재정의 출현이 될 수 있었다. 이런 위험은 역사에서 반복해서 나타났다. 17~18세기 영국 계몽주의자들이 간파했듯, 그리고 훗날 러시아혁명 과정을 평가하며 레닌이 깨달았듯, 권리와 민주주의는 관념적으로 선언하고 힘으로 밀어붙여 쟁취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현실의 대다수에게 안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게 하는 조건, 시민 개개인이 그것을 행사하고 지킬 수 있는 경제적·정치적·도덕적 역량이 형성되어야 한다. 영국헌정사를 보면 볼수록 ‘내전적 정치관’과 대비되는 진보의 원리로서 ‘눈부신 자유주의’(케이헌) 속 세 지주의 의미가 와닿는다.

 

경제적 측면에서 시민 개개인은 권력자나 부자, 특히 국가권력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노동으로 생계를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이는 각자가 독립적인 정치적 주체로 역할을 할 수 있는 기반이다. 정치적 측면에서 시민 개개인은 특정한 주장의 독점적 관철보다 견제와 균형, 정치적 경쟁의 과정을 더 우선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내가 옳다고 믿는 주장을 곧바로 국가권력으로 관철하는 체제가 아니다. 서로 다른 주장들이 제도화된 경쟁과 토론 속에서 우열을 가리고, 그 결과에 따라 다시 책임지는 과정이다. 도덕적·문화적 측면에서 시민 개개인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누구의 생명과 자유도 침해될 수 없다는 감각을 익혀야 한다. 경쟁자에 대한 분노와 복수의 감정에 머무르는 대신, 토론을 통해 우열을 가리고, 승자는 패자를 억압하지 않으며, 패자는 결과에 승복하고 절치부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세 측면은 결합되어야 하며, 이것이 시민사회의 강화이자 동시에 사회변혁이다. 이런 교훈에 비추어 한국헌정사를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자유민주정의 제도적 표준인 영국식 의원내각제의 운영 원리도 한국헌정사를 돌아보는 데서 중요한 자원이다. 주권이 단일해야 하나 분할되어야 하나. 의회주권이란 무엇인가. 입법·행정·사법 삼권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선출된 권력과 선출되지 않은 이들 간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사법부의 독립성이란 무엇일까. 의회가 입법과 내각 임명만이 아니라 공론을 통해 국민교육의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의회가 집단적이면서도 전국적인 대표자라는 게 무슨 의미인가. 이러한 질문에 영국식 의원내각제를 기준으로 삼아 답해보면, 민주정의 실제 운영 원리를 구체적으로 해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그 답변을 가지고 독재정이나 잡종정체와 비교해 보며 생각을 확장할 수 있겠다. 이런 자원을 바탕으로 한국헌정사에 관한 책의 설명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2. 한국헌정사

 

『한국헌정사』는 역사를 독재에서 민주화로 나아간 직선적 진보로 보지 않는다. 책은 정치적 헌정주의의 관점에서 한국헌정사를 헌정 침해, 헌정 파괴, 헌정 회복, 헌정 해체의 네 시기로 파악한다. 헌정이 기준이 된다는 것이 중요한데, 익히 설명했듯 여기서 헌정은 헌법이 아니라 정체와 정치문화의 유기적 결합이다. 책은 헌정이 어떻게 훼손되고 파괴되며, 다시 회복될 기회를 놓친 끝에 해체되어 갔는지를 추적한다.

 

『한국헌정사』는 박상현·송인주·이태훈의 「한국헌정사」와 유주형·김태훈의 「한국사회주의운동사」로 구성된다. 작의는 앞서 설명했고, 여기서는 각 글의 큰 줄거리를 그리겠다. 정체 측면에서 앞의 글 내용을 요약하면 이러하겠다. 한국은 건국부터 이승만 개인에 의해 헌정이 침해됐고, 그는 결국 독재적 대통령과 대통령 직선제를 결합한 정체를 확립했다. (독재정-잡종정체-민주정의 틀을 적용해 보자면, 이는 잡종정체와 유사했다.) 이는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을 거쳐 독재정으로 퇴보했다. 1987년 이후 민주정으로의 이행이 시도됐으나, 여러 요인으로 실패한다. 노무현 정부부터 인민주의자들에 의해 내전이 유발되기 시작하며, 지금에 이르러서는 잡종정체의 특징들이 나타나며 과거 문민독재가 복원되는 모습이다.

 

헌정 회복의 실패라는 문제제기에 상응하여, 「한국사회주의운동사」는 한국 민주화 운동의 한계를 분석한다. 1970년대 김대중과 연결된 재야·학생운동 경향은 반유신 투쟁의 중요한 축이었지만, 동시에 인민주의적 한계를 지녔다. 그런데 1980년 ‘서울의 봄’과 광주항쟁에 대한 평가를 계기로, 1980년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은 그러한 경향과 단절하며 사회주의 지향으로 나아갔다. 책은 바로 이 단절과 전진의 의의에 주목한다. 그러나 1987년 전후 상황은 다시 바뀌었다. 학생운동은 차츰 김대중 경향의 인민주의와 ‘해후’하며, 사회주의적 문제의식에서 이탈해 갔다. 노동운동 역시 민주노총 건설 과정에서 사회주의 지향과 단절했다. 그 결과 주류화된 운동권은 헌정 회복을 이끄는 세력이 아니라, 오히려 헌정 해체를 주도하는 세력으로 거듭났다.

 

1) 헌정 침해기

이 시기는 한국에서 처음부터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는 점을 보여준다. 동시에 이후 문민화 실패를 평가할 때 참고점이 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여기서 헌정 침해란 헌법이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헌법을 만들고 운용하는 정치과정이 권력자 개인의 뜻에 의해 훼손되었다는 뜻이다.

 

단독정부 수립 후 제헌국회에서 원내 최대 세력이던 한민당은 의원내각제 헌법을 채택하려 했다. 그러나 국민적 권위를 지녔던 이승만은 대통령제를 강요하며 제헌 과정을 교란했고, 결국 대통령제를 기본으로 하되 의원내각제 요소를 일부 가미한 헌법이 만들어졌다. 헌법이 제정되기도 전에 최고 정치과정이 권력자 개인의 의지에 종속된 것이다. 이는 한국 헌정이 출발부터 유린된 사례였다.

 

이승만 정부 시기의 특징은 크게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대통령은 의회정치와 정당정치를 무력화했고, 그 결과 남아 있던 의원내각제적 요소마저 폐지되며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되었다. 이승만은 지역적으로 분산된 권위의 합인 국회와 정당은 국민을 분열시킬 뿐이며, 국민은 유일한 전국적 권위인 대통령을 중심으로 단결해야 한다는 일민주의를 내세웠다. 국민을 다양한 이해를 지닌 시민들의 결합이 아니라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단일한 집합으로 본 것이다. 한민당이 내각제 개헌으로 맞서자, 이승만은 자신의 지지자를 기반으로 자유당을 창당해 국회를 종속시키려 했다. 한국에서 첫 기생정당이었다. 나아가 국회의 대통령 선출, 국무총리제, 국무위원 연대책임제 등 남아 있던 의원내각제적 요소를 폐지하고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하며 문민독재를 확립했다.

 

둘째, 이승만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라는 중대한 헌정 변경 과정에서 자신의 개인적 권위와 지지자 동원을 바탕으로 국회를 폭력적으로 무력화했다. 대통령은 담화를 통해 국민에게 직접 호소했고, 청년·노동자·농민단체는 국회의원 소환운동과 민중대회를 벌였다. 사유화된 국가가 취약한 사회를 인민주의 정치에 동원한 것이다. 이승만은 이러한 동원에 기초해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의원들을 체포·구금한 뒤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통과시켰다.

 

셋째, 대통령은 경찰과 내무부를 중심으로 관료조직을 장악했고, 사법부 역시 대통령에게 종속되어 유명무실해졌다. 그 결과 불법과 무법이 만연했고, 지배계급의 부패와 정치깡패의 테러가 횡행했다. 법치가 부재한 상황에서 경찰, 어용단체, 내무부와 지방행정 조직의 간부들은 국가권력을 사익 추구에 활용했다. 선거에서는 금권주의가 판쳤다. 정부와 정치인이 사회로부터 자원을 추출해 자신에게 종속된 지지자에게 배분하는 약탈국가가 형성된 것이다.

 

넷째, 법치와 헌정이 부재한 상황에서 경제에서는 약탈적 자유방임이 지배했다. 여기서 자유방임은 국가가 경제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공정한 시장규칙 없이 국가권력에 가까운 자가 자원을 차지했다는 뜻이다. 이승만의 토지개혁은 한민당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켰고, 정부는 미군정에서 넘겨받은 국유 적산과 미국의 경제원조를 충성도에 따라 지지자들에게 자의적으로 배분했다. 삼성과 럭키금성 등 재벌도 이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한국경제는 1950년대 내내 정체 상태에 머물렀고, 1인당 국민소득도 세계 최저 수준이었다. 대통령이 경제적 자원 배분의 결정권을 독점하고, 정권의 특혜를 받은 권력자·자본가·어용단체·정치깡패가 위세를 부리는 상황에서, 개인이 스스로 노력으로 소유를 확보한다는 관념은 성립하기 어려웠다.

 

요컨대 이승만 정부 시기의 특징은 의회·정당정치의 약화, 대통령 직선제, 인민주의, 금권주의, 행정부의 권력 독점, 경찰사법, 후견주의의 결합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는 로마 공화정 말기에서 제정으로 이어진 ‘인민주의적 참주정’ 내지는 잡종정체와 유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책은 대안세력의 결함도 함께 지적한다. 1960년 부정선거와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부가 몰락하고 민주당이 의원내각제를 도입했지만, 의원내각제의 운영 원리에 대한 이해는 부족했다. 이승만 정부의 몰락으로 민주당이 권력을 얻게 되자, 내부의 구파와 신파는 대통령과 총리를 나누어 가졌으나 이내 정쟁에 몰두한다. 장외투쟁과 결합한 혁신파 역시 이승만 정부 관련 세력에 대한 광범위하고 강경한 소급처벌을 주장했을 뿐, 한국 헌정이나 경제에 대한 긍정적 방향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에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고, 정부 수반인 장면 총리는 맞서지 않고 도주해 사실상 쿠데타를 승인했다.

 

이런 점에서 책은 이승만에서 장면까지의 시기를 ‘건국의 실패’로 규정한다. 쿠데타가 일어났을 당시 대중은 이승만 세력은 물론 민주당도 신뢰하지 않았고, 아예 새로운 세력을 요구하며 기존 정치과정에 대한 불신을 표출했던 것이다. (이승만 정부와 장면 정부의 결함에 대한 구체적 설명은 다음을 보라. 김성균, 「한국헌정사 ② 헌정주의를 결여한 한국의 제왕적 대통령제」, 《계간 사회진보연대》, 2024년 겨울호.)

 

박정희 정부 초기는 이승만식 잡종정체의 정치구조를 계승하면서도 관료조직과의 관계나 경제정책 부분에서 일정한 차이를 보였다. 정당과 국회의 대통령에 대한 종속, 경찰사법의 강화, 사법부의 종속 등에서는 이승만 정부의 문민독재적 성격을 이어갔다. 다만 행정부 내부에서는 경제관료의 전문성을 얼마간 존중했고, 수출기업에 특혜를 주는 산업정책을 채택했다. 물론 이는 기업들이 이윤보다 수출량과 생산량 확대에 치중하게 만드는 부작용을 낳았다. 그럼에도 이승만 시기와 달리, 기업들이 권력에 붙는 것만이 아니라 수출량이라는 기준을 두고 스스로 일하게끔 만들었다는 점에서 ‘약탈국가’를 어느 정도 완화한 측면이 있었다.

 

2) 헌정 파괴기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을 통해 독재로 나아가면서, 앞서의 제한적 변화마저 되돌려졌다. 유신체제는 ‘법에 의한 통치’ 형식을 취한 무단통치의 전형이었다. 사법부 독립성을 완전히 박탈하며, 경찰사법을 극단화한 체제였던 것이다.

 

경제에서도 박정희는 경제관료의 조언을 무시하고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했다. 여기서 문제는 관료의 견제와 시장 규율을 무시한 채 특정 재벌에 특혜를 집중하는 방식이었다. 수출기업 전반에 특혜를 주던 이전의 산업정책과 달리, 유신기에는 특정 재벌 중심의 자원 배분이 강화되었다. 그 결과 경제는 다시 정치에 종속되었고, 특혜에 기초한 재벌의 과잉·중복투자는 1979년 마이너스 성장의 경제위기로 이어졌다. 책은 박정희 정권 붕괴의 계기였던 부마항쟁 역시 이러한 산업 파산의 맥락에서 나타났다고 짚는다.

 

그런데 책은 1979~1980년 서울의 봄 국면에서, 반유신투쟁에서 출발한 민주화 운동도 1960년과 유사한 한계를 드러냈다고 지적한다. 즉 헌정과 경제의 회복을 위한 전망을 제시하지 못했다. 오히려 더 퇴보한 측면도 있었다. 당시 김영삼과 김대중의 노선은 유신 이전으로의 복귀, 곧 박정희 초반 제3공화국 체제의 복권이었고, 핵심은 강력한 대통령 권한을 그대로 둔 채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하는 것이었다. 책은 양김이 헌정론에 입각해 독재정에서 민주정으로의 이행을 사고했다기보다, 선거를 통해 자신이 대권을 잡는 것을 민주화로 여겼다고 평가한다. 다시 말해 ‘군부독재’에서 독재정에서 민주정으로의 이행을 구상하기보다, ‘군부’를 ‘문민’으로 대체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1980년 ‘서울의 봄’ 국면에서 양김은 직선제 도입과 자신의 당선을 낙관했고, 이에 대권을 둘러싸고 분열했다. 유신 시기 국내에 남아 ‘선명야당’을 내세우며 당 대표까지 맡아 조직적 기반이 있던 김영삼과 달리, 국외로 나가 있을 수밖에 없던 김대중은 특히 더 강경한 입장을 내세우며 장외 재야운동·학생운동을 동원함으로써, 단일화를 거부하고 대권 의지를 앞세웠다고 지적된다. 또한 책은 양김이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제3공화국 복고 외에 당시의 심각한 경제위기에 대한 대책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도 비판한다. 이런 점에서 책은 ‘서울의 봄’이 전두환 집권으로 귀결된 데에는 양김, 특히 김대중의 책임도 있었다고 본다. 이에 대해서는 5절에서 다루겠다.

 

전두환 정부도 헌정 파괴기에 속한다. 5·17 쿠데타 이후 전두환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해 입법·행정·사법의 삼권을 장악했고, 비밀경찰 체제를 강화해 반대자들을 억압했다. 이 점에서 전두환 체제는 군부독재의 연장이었다. 다만 책은 전두환 정부가 박정희 유신체제와 어느 정도 차이도 있었다고 평가한다. 1980년 개헌을 통해 대통령 단임제, 국회 권한 일부 회복, 대통령 비상조치권 제한, 사법부 인사권 독립, 선거공영제를 도입됐다. 이는 외형상 야당의 존재를 허용하는 것이었다. 물론 실제로는 정치정화조치 등 억압 속에서 여당의 일당독주가 이뤄졌지만 말이다. 그러나 안정적 통치기반이 확보됐다고 판단한 전두환 정부는 해금조치를 단행했고, 이는 1985년 총선에서 신민당이 약진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경제 측면에서도 전두환 정부는 유신체제와 달랐다. 전두환 정부는 정치 이외의 영역에서는 국정 현안을 전문관료에게 일임했던 것이다. 김재익 등이 주도한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으로 재정긴축, 환율·통화 안정, 시장자유화,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법 도입, 정책금융 특혜 축소, 금융자유화와 재벌 여신관리 강화가 추진되었고, 물가 안정과 거시경제 회복도 이루어졌다. 물론 한계도 있었다. 산업합리화가 3저 호황 속에서 결국 재벌 강화로 귀결됐고, 이는 정경유착 심화로 이어졌다.

 

3) 헌정 회복기

이 시기는 책이 제기하는 ‘헌정 회복의 실패’와 관련된 핵심 대목이다. 책은 이를 크게 세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1987년 개헌은 대통령 직선제와 강력한 대통령 권한의 결합을 골자로 한 제3공화국 헌법을 사실상 복원했다. 더욱이 이 개헌은 공개적이고 헌정적인 정치과정이 아니라 여권과 양김의 두 야당 간 밀실협상을 통해 이루어졌다. 둘째, 한국경제가 3저 호황을 거치면서 금권주의와 인민주의가 확산되었다. 셋째, 노태우 정부 시기 여소야대를 역전한 3당 합당에도 불구하고 문민화를 뒷받침할 안정적 지배연합은 형성되지 못했다. 민자당 내부의 권위주의적 보수주의 세력과 자유주의 세력 사이의 타협은 지지부진했다.

 

(1) 1987년 개헌의 한계

 

1985년 신한민주당의 창당과 총선 약진은 군부독재 종식과 직선제 개헌에 대한 국민적 요구를 드러냈다. 그러나 신민당은 전두환 정부와의 타협 여부를 둘러싸고 분열했고, 강경파였던 양김은 신민당을 탈당해 장외 재야·학생운동과 함께 직선제 개헌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6·10항쟁을 계기로 중산층까지 가세하면서 정권은 더 이상 호헌을 고수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6·29선언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그러나 개헌 과정은 공개적이고 헌정적인 정치과정이 아니라, 기록조차 남기지 않은 밀실협상으로 진행되었다. 정치제도에 대한 충분한 숙의와 합의 없이 여권과 양김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제3공화국식 구조가 복원되었다. 즉 1987년 헌법은 대통령 직선제를 채택했지만, 제왕적 대통령제를 온존시켰다. (1987년 개헌 과정과 그 비민주성에 관해서는 다음을 보라. 김성균, 「한국헌정사 ② 헌정주의를 결여한 한국의 제왕적 대통령제」, 《계간 사회진보연대》, 2024년 겨울호.)

 

여기서 제왕적 대통령제란 독재정을 의미하진 않는다. 다만 의회선거에 대통령 직선제가 추가되며, 강력한 대통령의 권한을 둘러싸고 이에 종속된 ‘식물국회’와 대통령에 맞서 사생결단식 투쟁을 벌이는 ‘동물국회’가 반복될 가능성이 열렸다. 잡종정체의 특징이 온존한 상황에서 그 발전 가능성이 현실화되느냐, 아니면 억제되며 민주정으로 이행하는가가 향후 핵심 쟁점이 된다.

 

직선제 쟁취 이후에도 야권은 민주화와 선거 경쟁을 동일시했고, 김영삼·김대중도 자신의 대선 승리를 민주화의 완성으로 간주했다. 그 결과 1987년 대선에서 또다시 양김이 분열한 가운데 노태우가 당선되었고, 패배한 양김은 선거 무효화 투쟁을 선언하며 결과에 불복했다. 문민화의 출발은 정치적 신뢰와 헌정적 타협이 아니라 갈등과 불신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2) 노태우 정부의 문민화와 포괄정당 실험

 

노태우 정부는 군의 정치개입 종식을 선언하며 제한적이나마 법치와 헌정 정상화를 추진했다. 비밀경찰의 권한을 축소하고 검찰·선관위의 독립성을 강화했으며, 이회창 대법관의 중앙선거관리위원장 재임을 계기로 정부가 공명선거 캠페인을 주도하는 등 절차적 법치가 정착되기 시작했다. 이는 노태우 정부의 지지 기반이 취약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측면도 있었다. 1988년 총선으로 여소야대 국회가 형성되며, 정부와 여당이 야당과 협상하려 했고, 입법부 중심의 정치과정도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5공 청산’과 5.18 진상규명을 내세운 국회 특위가 설치되고 청문회가 열린 것이 대표적 사례다.

 

그런데 이 문제들은 다른 정책 이슈를 압도하며 정국을 지배하게 된다. 대통령과 여당이 일정 양보했지만, 여소야대 상황에서 야권, 특히 제1야당 총재 김대중의 비타협적 태도 고수와 전대협의 광주학살·5공비리원흉처단투쟁 등이 이어지며 국정이 교착상태에 빠졌다.

 

노태우 정부가 이를 타개하고자 추진한, 여당 민정당과 제2야당 민주당, 제3야당 공화당의 3당 합당이 이뤄지며, 보수주의 세력과 자유주의 세력을 포괄하는 민주자유당이 출범했다. 이는 교착상태를 해결해 정국 안정화에 기여했으나, 김대중과 호남 지역이 이에 강력히 반발했다. 또한, 민자당 출범을 계기로 학생시위가 격렬하게 분출했다. 이 시기 학생운동에 관해서는 7절에서 논하겠다.

 

동력을 얻은 노태우 정부는 사회경제적으로 부동산 규제, 의료보험 확대, 최저임금 도입, 언론 자유화, 북방정책, 노조투쟁에 대한 탄압 완화 등을 통해 문민화의 기반을 넓혔다. 그러나 3저 호황 속에서 노태우 정부는 산업 구조조정에 소홀했고, 시장 중심의 개혁에 치중한 결과 재벌의 부채경영이 확대되고, 다단계 출자의 지배구조가 만성화되었다. 1987년 이후 선거가 중요해지면서 정당은 재벌의 정치자금에 의존했고, 박정희 시기 대통령이 재벌을 본격 육성한 이래 한국식 정치권-재벌의 정경유착이 해소되지 않았다. 요컨대 재벌개혁이 좌초된 상태에서 선거제의 확대가 금권주의 확산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3) 김영삼 정부와 헌정 공고화의 실패

 

이후 김영삼 정부는 집권 초기 높은 정치적 정통성을 바탕으로 금융실명제, 고위공직자 재산공개, 하나회 해체 등 개혁을 단행했다. 이는 문민화의 중요한 성과였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는 문민화를 안정적으로 뒷받침할 자유주의적 지배연합을 구축하지 못했다.

 

민자당은 보수주의 분파와 자유주의 분파 간의 갈등에 내내 시달리며 분열, 축소됐다. 외부에서는 전두환과 노태우 전 대통령의 구속, 수감을 요구하는 운동권·시민단체의 압력이 거셌다. 1995년 1월 당내 계파 갈등으로 민자당 대표 김종필이 자민련을 창당하고, 이어서 6월에 민자당이 지방선거에서 참패했다. 이에 김영삼 대통령은 위기를 돌파하고자 12·12 쿠데타와 5·17 쿠데타 조사를 위한 특별법 제정을 당에 지시했고, 당의 인적 쇄신을 시도하며 당명도 신한국당으로 변경했다.

 

경제적으로 김영삼 정부는 침체된 경기를 살리기 위해 경기부양책을 쓰며 재벌 중심의 투자 확대를 용인했다. 그러나 재벌개혁이나 구조조정을 밀어붙일 정치적 기반은 갖추지 못했다. 정치권과 재벌의 금권주의가 심화되는 가운데, 관치금융과 재벌에 대한 규제완화에 따른 재벌의 과잉투자에 의존해 성장한 재벌노조는 초과이윤의 공유를 요구했다. 재벌과 재벌노조의 적대적 공생관계 속에서 김영삼 정부는 국가경제의 경로를 수정할 사회경제적 조정에 착수하지 못했고, 결국 재벌의 과잉투자는 1997년 경제위기로 이어졌다.

 

4) 헌정 해체기

헌정 해체란 단지 정치적 갈등이 심해졌다는 뜻은 아니다. 선거 결과에 대한 승복, 의회정치에서 여당·정부와 야당의 타협, 사법부 독립, 의회와 대통령의 권한 행사 절제 같은 헌정적 정치과정과 규범이 차례로 무너지는 과정을 뜻한다. 책은 노무현 정부 이후 한국 정치가 헌정 회복의 방향으로 나아가기보다, 인민주의와 내전적 정치의 심화 속에서 헌정 해체기로 접어들었다고 본다.

 

(1) 1997년 경제위기와 김대중 정부

 

책은 헌정 회복기를 1990년대로, 헌정 해체기를 2003년 이후로 규정하지만, 장절 구성상으로는 김대중 정부를 헌정 해체기에 넣는다. 김대중 정부는 문민화의 실패와 인민주의의 부상 사이를 연결하는 이행기적 성격이 있다.

 

김대중 정부 시기 경제위기 대응을 명분으로 의회를 우회하려는 시도가 강화되며 퇴행이 시작된다. 김대중 정부는 일종의 ‘비상대권’을 행사하며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을 밀어붙였다. 책은 전두환 정부 이래 추진된 신자유주의적 재벌개혁이 3저 호황을 거치며 중도반단되었고, 노태우·김영삼 정부 시기 선거제와 결합된 금권주의가 확산되며 오히려 재벌 친화적인 정책이 펼쳐진 결과 경제위기가 발생했지만, 그렇다고 김대중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과의 구제금융협약에 따라 추진한 구조조정이 한국경제를 부활시킨 것은 아니었다고 평가한다. 주도적이고 사전적인 대응이 중도반단된 상황에서, 김대중 정부는 수동적이고 뒤늦은 대응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고, 결국 은행과 재벌의 소유권을 외국인에게 일부 넘기는 것으로 개혁이 귀결됐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대통령이 위기 상황을 활용해 의회를 우회해 개혁을 추진했다는 점이다. 김대중은 노태우 정부 시기 여소야대를 역전하려는 3당 합당에 강력히 반발했었고, 이후 대선에서 김영삼에게 패배한 뒤 정계 은퇴를 선언했었다. 그러나 1995년 민자당이 위기에 처하자 정계에 복귀해, 박정희 시대 지배세력의 후예인 김종필의 자민련과 DJP연합을 결성하는 ‘내로남불’의 행태를 보였다. 그런데 연합 당시 김대중이 김종필에게 약속했던 의원내각제 개헌을 정부 집권 후 어기면서, 2000년 DJP연합이 붕괴하고 여소야대 상황이 된 것이다. 이에 김대중은 새천년민주당이라는 기생정당을 창당하고 386세대 운동권을 정계에 끌어들여 독자적 세력 기반을 형성하려 했다.

 

그러나 이들 운동권은 노무현을 추대하게 된다. 2002년 국민참여경선과 ‘노사모’ 같은 팬클럽형 정치가 부상했고, 민주당 내 주류인 동교동계와 비주류인 386·소장파의 경쟁 속에서 노무현이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되어 당선되었다. 김대중은 안정적 후계구도를 만들지 못했고, 결국 386 중심의 새로운 정치세대가 주류화되고 집권하는 데 기여했다.

 

(2) 노무현 정부의 인민주의

 

노무현 정부는 3김 퇴장 이후 등장한 ‘비주류’ 대통령의 집권이었다. 동시에 기득권 공격과 대중동원을 핵심으로 하는 인민주의 정치를 본격화했다. 노무현은 지역주의 극복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수도권 대 지방이라는 새로운 분열선을 강조하며 전라·충청 연합에 기대 집권했다. 386세대와 인터넷·시민운동이 결합한 선악의 도덕화된 정치가 주요 동력이 되었고, 기존 언론·재벌·사법·엘리트 집단은 ‘기득권’으로 규정되었다. 그 결과 타협보다 강경투쟁을 선호하는 통치연합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통치 방식에서도 노무현 정부는 기존 제도와 관료기구를 우회하려 했다. 특히 수도 이전이라는 중대한 변경이 헌법재판소의 위헌판결로 좌절되자 ‘행정중심도시’ 특별법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관철했다. 관료조직을 우회하기 위해 행정조직 개편을 통해 청와대 정무직과 대통령 직속위원회를 대폭 확대했고, 이는 신진 엘리트를 정책결정 과정에 등용하는 핵심 통로가 되었다. 사법시험을 로스쿨로 대체한 것도 중요했는데, 이는 엘리트 선발 과정을 하향평준화했고, 전향한 운동권이 주류화되는 주요 통로가 됐다.

 

정당정치에서도 변화가 나타났다. 노무현 대통령은 민주당 구주류의 인적 청산을 주장하며 갈등한 끝에, 기생정당인 열린우리당을 창당했다. 정당의 정책과 이념보다 지도자 개인과의 관계가 정치의 핵심 요소로 다시 부각되기 시작하며 ‘친노’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이는 이후 친이·친박·친문·친명 정치의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여소야대 상황에 직면한 노무현 정부는 의회와의 타협보다 시민단체 동원과 ‘가두의 정치’를 활용해 국회를 압박하는 방식을 택했다. 총선에서 대통령이 열우당 지지를 공개 호소하자 국회의 대통령 탄핵이 이어졌다. 탄핵은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정치의 사법화와 사법의 정치화가 동시에 심화되었다. ‘노사모’가 주도한 대규모 탄핵무효 촛불시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대통령 탄핵 심리 중 치러진 2004년 총선에서 386 출신 초선 의원들이 대거 국회에 진입했다. 탄핵무효 열풍 속에서 당선된 이들은 자신들만의 원칙을 절대시하고 타협을 거부하며, 이를 어길 경우 ‘배신’으로 규정하는 ‘반정치·원한의 정치’를 제도권 내부로 확산시켰다.

 

결국 노무현 정부의 인민주의 정치는 문민화 개시 이후 불완전하게나마 발전한 헌정적 정치제도와 관습을 무너뜨렸다. ‘도덕적인 우리 대 부당한 그들’이라는 대결 구도를 선명하게 내세웠고, 정치 양극화와 내전적 정치가 본격화되었다. 이는 이후 반복될 극단적 정치 대립의 출발점이 되었다.

 

(3) 대선 불복과 내전의 격화

 

이명박·박근혜 대통령으로 이어진 보수정부 시기는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가 이루어졌음에도 패배 세력이 결과를 수용하지 않는 정치가 반복·구조화됐다.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이 승리했지만, 광우병 촛불시위로 대표되는 대규모 반정부 대중동원은 정책 반대를 넘어 선거 결과의 정당성을 흔드는 성격을 띠었다. 한미FTA는 본래 노무현 정부가 추진했던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정부와 여당도 안정적 통치연합을 형성하지 못했다. 이명박 정부 시기 여당 내부에서는 친이·친박 갈등이 심화되었고, 바깥으로는 야당의 비토 정치와 시민단체의 거리 동원이 결합되며 정치적 대치가 일상화되었다. 특히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은 친노 세력의 재결집과 검찰·정부을 향한 적대적 동원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고, 시민단체는 범야권연대의 토대로 자리 잡게 된다. 친노세력에 대한 시민사회의 종속이 본격화된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보수대통합을 통해 직선제 개헌 이후 최초의 과반 득표로 출범했지만, 마찬가지로 친박·비박 갈등과 공천 파동으로 안정적 통치연합을 형성하지 못했다. 세월호 침몰사건을 계기로 대통령 개인에 대한 도덕적 비난과 괴담이 확산되었고, 이는 정권 퇴진 요구로 전환되었다. 이 과정에서 새정치민주연합 내 친노의 영향력이 커졌고, 기존 지도부는 세월호특별법 합의 과정에서 여당에 지나치게 양보했다는 공격을 받고 사퇴했다. 2015년 전당대회를 앞두고 친노와 비노의 당권경쟁이 격화되자, 친노 세력은 시민사회단체 인사를 수혈해 혁신위를 출범시켰고, 결국 안철수와 비노 호남 의원들이 탈당하면서 당권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2016년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대통령의 과도한 공천 개입으로 내분이 극에 달하며 패배했다. 정부·여당은 여소야대를 타개할 동력을 확보하지 못했고, 10월 국정농단 사건이 터지자 더불어민주당은 촛불집회를 중심으로 가두정치를 강화했다. 결국 국회의 탄핵소추와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파면으로 박근혜 정부는 붕괴했다.

 

이 사건의 핵심은 정치적 갈등을 의회정치가 해결하지 못했고, 선거로 선출된 대통령의 퇴진이 사법부의 판결로 결정되었다는 점이다. 한국헌정사상 초유의 이 사태는 정치의 사법화가 대통령 직위에까지 미침을 보여줬고, 문민화 이후 헌정이 정착하지 못하고 결국 실패했음을 보여주었다. 한국 정치는 선거와 의회를 통해 갈등을 정치적으로 종결하는 대신, 내전적 정치와 극단적 양극화 속에서 사법부의 판단에 의존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4) 문재인 정부 이후

 

문재인 정부 시기에는 패자가 승복하지 않는 단계를 넘어, 승자가 패자를 관용하지 않는 ‘적폐청산’의 형태로 내전이 한 단계 더 격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헌정 해체를 넘어 검찰개혁의 형태로 법치 파괴까지 전개되는데, 책은 문재인 정부가 조국 일가의 부정·비리를 비호하기 위해 사법부의 독립성을 침해하고 검찰을 압박하다가, 이에 반발하는 여론을 대표한 윤석열 검찰총장에게 정권을 잃었다고 설명한다.

 

민주당을 장악한 이재명 대표는 편법적 방식으로 자신을 향한 재판을 지연시켰고, 대선 불복은 대중 동원을 넘어, 여소야대 상황에서 의회의 탄핵권 남발로 행정부를 마비시키는 형태로 진화했다. 극한의 대치 속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계엄령 선포로 대응하는 최악의 수를 택했고, 내전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 한 단계 더 나아가게 됐다. 박근혜 탄핵 때와 마찬가지로, 선출된 대통령의 탄핵 여부를 선출되지 않은 법관이 판단한다는 점에서, 심지어 그것도 두 번째라는 점에서, 사법부 판결을 둘러싸고 거대한 정치적 갈등이 발생했다. (의회의 탄핵 이후 파면 결정까지 헌법재판소를 둘러싼 시위에 관해서는 다음 글을 보라. 정성진, 「격화하는 광장의 충돌, 극단주의의 부상」, 《계간 사회진보연대》, 2025년 봄호.)

 

이재명 정부 들어 국민의힘은 계엄을 반성하지 못한 채 자멸하고 있고, 이재명 정부는 어떤 정치적 견제도 받지 않는 상황에서 정책적 비전보다 ‘내란청산’을 내세우며 권력을 독점해 나가는 중이다. 또한 자신의 사법 리스크를 제거하기 위해 사법제도를 변경하고, 정부 개편을 통해 검찰을 무력화하며 경찰사법을 강화하고, 재정 관련 권한을 대통령실로 집중시키고 있다. 승자의 불관용, 의회정치의 무력화, 사법부 무력화, 경찰권력의 강화, 대통령 권력의 강화라는 특징은 여러모로 이승만·박정희 정부 시기를 떠올리게 한다. (관련하여 이번 호의 다음 글을 보라. 임필수, 「이재명 정부 1년, 한국 정치 어디로 가나」)

 

결국 1970년대 군부독재에 맞선 민주화 운동에서 출발했던 정치세력이, 1987년에 직선제에 기초한 강력한 대통령제라는 유신 이전의 이승만·박정희 시기의 정체를 채택한 데 이어, 지금에 이르러서는 내전의 격화 속에서 문민독재의 특징까지 모방하는 것으로 귀결된 것이다. 특히 최근 2~3년 동안의 사태는 로마 공화정의 붕괴를 상기시키는, 정치공동체의 해체 과정으로 보인다. 이것이 인민주의적 참주정의 출현과 내전의 상시화 속에서 시민사회가 권력자에게 완전히 종속되는 시대를 여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5) 1970년대 반유신투쟁과 1980년 서울의 봄·광주항쟁

이제 「한국사회주의운동사」의 쟁점으로 넘어가보자. 첫 번째 쟁점은 헌정 파괴기에서 헌정 회복기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서울의 봄’이 좌절된 것에 대한 평가다. 책은 여기서 양김, 특히 김대중의 문제를 지적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책은 1970년대 반유신투쟁을 더 깊이 분석한다.

 

1970년대 반유신투쟁 속에서 민주화 운동이 출발했지만, 당시 재야운동은 문학·예술계와 종교계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고, 어떤 정치경제적 대안이나 헌정론을 갖추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재야운동은 민주정으로의 이행을 구상하지 못했고, 정부 타도와 집권과 같은 반체제운동에 머문 한계를 지녔다. 책은 재야운동이 김영삼 경향과 김대중 경향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재야운동에서 다수인 후자가 한국 인민주의의 중요한 이론적 원천이었다고 지적한다.

 

물론 1970년대 반유신투쟁의 선봉은 재야운동보다 학생운동이었다.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이 선도적 투쟁을 벌였으나, 대규모 구속 사건 이후 학생운동은 준비론과 현장이전론 중심으로 전환되었다. 서울대 지식인 서클을 중심으로 이론학습·투쟁의 기풍과 민중지향성이 형성된 것도 이 시기였다. 책은 이 흐름에서 이후 1980년대 학생운동이 1970년대 재야운동의 한계를 넘어설 가능성을 봤다.

 

그러나 1980년 서울의 봄 국면에서 학생운동은 양김의 영향을 받으며 분열했다. 책은 특히 김대중과 결합한 강경파 재야·학생운동의 문제를 지적한다. 김대중은 김영삼과 단일화를 거부했고, 이를 지지한 재야운동(‘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과 함께 강경파 학생운동을 동원했다. 그러나 시위가 자생적으로 발전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신군부의 쿠데타 위협을 느끼자, 민주통일국민연합이 학생운동 지도부에게 회군을 종용했다. 마찬가지로 당혹스러워했던 학생운동 지도부도 회군파와 항쟁파가 다투다가 결국 회군을 결정했다. (‘서울의 봄’의 이런 상황을 그린 소설을 참고할 수 있다. 조유리, 「서울의 봄, 거리에서 학생들은 무엇을 보았나〔2〕」, 《계간 사회진보연대》, 2021년 봄호.)

 

그런데 광주에서는 운동권을 중심으로 계엄 확대 반대 시위를 이어가며 광주항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운동권은 곧 서울과 마찬가지로 퇴각했다. 그런데 군의 폭력적 진압에 맞선 대항투쟁이 조직되지 않은 시민을 중심으로 자생적으로 시작되었다. 이에 산개를 결정했던 운동권 가운데 윤상원 등 일부 그룹이 현장에 복귀했다. 당시 전국민주노동자연맹 광주지역 중앙위원이었던 윤상원 열사는 5.18 이전에도 역량 보존 중심의 현장론에 경도되지 않고, 노학연대와 정치투쟁을 강조하며 서울의 봄을 승리로 이끌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었다.

 

복귀한 운동권의 개입은 광주항쟁의 성격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은 항쟁이 무분별한 대항폭력으로 흐르지 않도록 시민들을 조직했고, 지도부로서 대항폭력을 넘어서는 항쟁의 정치적 메시지를 알렸다. 책은 바로 이 점에서 윤상원 열사 등의 개입 덕분에 광주항쟁이 단순한 대항폭력으로 끝나지 않았고, 후대에 역사적 의미를 남기게 되었다고 평가한다.

 

6) 1980년대 노동운동·학생운동의 전진과 개헌론의 분화

광주항쟁의 비극을 반성하며, 1980년대 학생운동은 1970년대 재야·학생운동의 한계를 넘어서려 했다. 여기서 핵심은 1987년까지 대통령 직선제 개헌론과 민중헌법 쟁취·사회주의 변혁론이 갈라졌다는 점이다. 이 분화는 1987년 전후 운동권이 어떻게 김대중 경향의 인민주의와 다시 결합했는지, 또 민중민주파(PD)가 어떤 의미에서 자기비판을 하게 되는지를 이해하는 기준이 된다.

 

분화의 출발점에는 윤상원과 함께 전국민주노동자연맹(전민노련)을 결성한 이태복, 그리고 그와 연결된 전국민주학생연맹(전민학련)의 이선근이 있었다. 이들은 1970년대 학생운동의 역량보존론에 기초한 현장 이전을 비판했다. 이태복은 “야학 일이나 현장 준비를 핑계로 학내투쟁을 기피하는 흐름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노동운동 쪽에서 보면 학생운동의 적극적 반유신투쟁은 잠자고 있는 노동자 대중의 투쟁의식을 일깨우고 각성시키는 계기이기 때문에 절박하게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이태복과 이선근은 학생운동의 선도적 정치투쟁과 결부된 노학연대와 이를 위한 조직적 현장투신 노선을 제기했다.

 

한편 1970년대 학생운동 출신은 졸업 이후 청년운동으로 결집했다. 이들은 1983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결성했고, 이는 1985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으로 확대되었다. 이 과정에서 CNP 논쟁, 곧 시민민주주의론·민족민주주의론·민중민주주의론을 둘러싼 논쟁을 제기했다는 기여가 있었다. 그러나 민청련 주류는 CD와 PD를 모두 비판하며 ND론을 채택했고, 1985년 총선 이후에는 야당의 직선제 개헌론을 추수하게 된다.

 

반면 이태복·이선근에서 시작한 흐름은 전민노련·전민학련이 탄압으로 붕괴한 이후에도 이어졌다. 이들의 문제의식을 이어 받은 학생운동이 개별적 소그룹을 통해서라도 노동현장에 진입하려는 노력을 이어가, 학생운동 활동가의 현장투신 규모가 계속 늘어갔다. 그 결실이 1985년 구로동맹파업이었다. 구로동맹파업은 노동자운동의 정치투쟁이자 민주화 운동이었고, 다른 민중운동과 결합하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구로동맹파업을 계기로 결성된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과 인천지역노동자연맹(인노련)은 삼민헌법쟁취투쟁으로 나아갔다.

 

1980년대 학생운동은 민청련의 CNP 논쟁을 계기로 사회성격논쟁이라는 이론투쟁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김영환이 주체사상과 반제국주의 직접투쟁론을 제기하며 민족해방파(NL)가 등장했다. 물론 이들도 사회주의 혁명과 북한의 지도를 수용했다는 점에서 윗세대와 단절했다. 그러나 사상적 특징상 이론투쟁보다는 폭력투쟁에 기울기 쉬웠다. 1986년 건국대에서 개최된 전국반외세 반독제 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련) 결성식(이른바 ‘건대 사태’)이 이를 보여줬다. 이후 민족해방파는 1987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을 결성하며 대중노선을 강조하는데, 이는 폭력투쟁의 지양이 아니라 오히려 ‘폭력투쟁의 대중화’ 즉 더 많은 세력을 동원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대중노선의 맥락에서 민족해방파는 1987년 대선에서 직선제 개헌과 김대중 후보를 지지했다.

 

학생운동의 다른 한편에서는 1987년까지 학림으로부터 반제반파쇼민족민주투쟁위원회(민민투), 전국반제반파쇼민족민주학생연맹(민민학련), 헌법제정민중회의(CPC), 제헌의회파(CA)로 이어지는 흐름이 형성되었다. 이 계열은 삼민헌법쟁취투쟁의 문제의식과 상응해, 직선제 개헌론을 넘어 민중헌법 쟁취와 사회주의 변혁을 제기했다. 그러나 1987년 대선 과정에서 CA 다수파가 NL에 흡수된다. 이런 상황에서 1987년 7월, 박현채와 윤소영이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을 제기하며 사회성격논쟁이 한층 심화되었고, 이를 계기로 이후 민중민주파(PD)가 형성된다.

 

7) 이론투쟁에서 폭력투쟁으로의 타락과 PD의 자기반성

책은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과 이에 기초한 PD가 일정한 ‘정세적 진리 효과’가 있었지만, 동시에 한계도 있었다고 평가한다.

 

한국헌정사와 관련한 핵심 의의는 PD가 직선제 개헌과 민주화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는 문제를 제기한 데 있다. 1987~1988년 대통령 직선제를 계기로, 자립화·개량화론에 입각한 일반민주주의론과 선변혁후통일론에 입각한 민주자주정부론이 급부상했다. 이들은 사회민주화의 과제를 선거정치와 직선제 개헌으로 환원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에 맞서는 ‘이중전선’ 속에서 PD는 민주주의 문제를 민중민주주의 또는 인민민주정의 문제로 심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요컨대 1987년을 전후로 등장한 이러저러한 개헌론을 비판하며, 민주주의혁명론으로 논의의 주제를 바꿨다는 점이다.

 

NL의 ‘선통일후변혁론’에 맞서 ‘선변혁후통일론’을 제기한 것도 의의가 있었다. 이는 이론투쟁에서 폭력투쟁으로 귀결될 소지가 컸던 NL 노선에 맞서, 한국에서 변혁이론의 문제를 계속 제기하려는 시도였다. PD는 북한 사회주의의 독재정을 추수하는 NL의 경향도 비판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그럼에도 책은 당시 PD가 제기한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과 신식민지파시즘론에 한계가 있었다고 반성한다. 특히 1980년대 전두환 정부 이래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가 반동적으로 재편되며 그에 따라 상부구조에서 3당 합당이 일어났다고 본 게 문제였다. 요컨대 PD는 3당 합당을 독재적 탄압 강화를 위한 조치로만 보았고, 민자당 내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적 경향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했다. 즉 3당 합당은 단순히 반동적 야합만은 아니었고, 기존 보수주의 세력과 신진 자유주의 세력이 불안정하게나마 타협하며 문민화 과정을 전진시키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PD는 그렇게 인식하지 못했고, PD가 1987년 대선의 김대중 지지론을 비판하며 등장했음에도, 3당 합당 이후 1991년 상반기까지 국면에서 합당 반대 투쟁을 격렬히 펼치며 사실상 김대중과 유사한 투쟁을 벌인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3당 합당 반대투쟁은 이념과 노선의 차이와 무관하게 운동권이 일제히 나선 투쟁이었다.

 

1989~1991년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과정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에 대한 자기비판과 이론투쟁 대신 학생운동은 1991년 5월 투쟁으로 상징되는 폭력투쟁으로 위기를 돌파하려 했다. 이런 흐름에서 1993년 전대협이 해산되고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이 출범한다. 이후 북한사회주의의 위기가 가시화되며 통일운동진영이 분화하고, 한총련 내부에서도 강경 폭력투쟁을 주장하는 광주·전남의 남총련이 부상한다. 북한은 현실사회주의 붕괴 이후 ‘고난의 행군’을 겪고 핵무장을 선택하며 ‘불량국가’로 전락했지만, 민족해방파는 이를 비판하기보다 옹호했다. 이들은 통일운동에서 북한의 지도력을 관철하려 했고, 반미자주화 전민항쟁으로 북한사회주의를 보위하고자 했다. 이러한 흐름은 1996~1997년 범민족대회와 한총련 출범식의 극단적 폭력투쟁으로 귀결됐다.

 

책은 근본적으로는 NL은 물론이거니와 PD도 헌정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자유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전진’을 시도했다는 한계를 지적한다. 직선제 개헌론을 넘어선 것은 의의였지만, 그 전진은 자유주의적 헌정과 법치의 역사적 성과를 충분히 포함하지 못했다. ‘민중헌법 쟁취’의 내용도 사실 모호했다. 그나마 구체적이었던 ‘노동계급’의 안도 레닌이 『국가와 혁명』에서 정리한 파리코뮌의 조치들을 거의 그대로 반복한 것이었다.

 

8) 폭력투쟁으로 타락한 운동권의 주류화

1987년 전후 학생운동에 대해 책이 가하는 비판의 핵심은, 학습과 정치적 설득, 자기비판을 포기하고 동원과 충돌을 정치의 중심으로 삼았다는 데 있다. 더 큰 문제는 그렇게 폭력투쟁 노선으로 퇴보한 전대협·한총련 세대가 김대중 정부부터 이재명 정부까지 꾸준히 정치권으로 진입하면서, 1970년대 재야·학생운동의 인민주의적 경향과 다시 결합했다는 점이다. 책은 이들이 노무현 정부 이래 헌정 해체, 곧 내전의 진화 과정의 핵심 주체였다고 평가한다. 이 절의 핵심은 폭력투쟁 노선으로 타락한 운동권이 어떻게 제도권 주류가 되었고, 사회주의적 변혁을 포기하고 인민주의와 출세주의로 전향했는가를 보는 데 있다.

 

김대중 정부에서 386세대를 전향시키고 정계로 입문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는 김근태와 이범영이 지적된다. 1983년 민청련을 창립하며 ‘운동권의 대부’로 불렸던 김근태는 1987년 대선에서 김대중 비판적 지지 방침이 실패한 뒤 위상이 크게 약화했다. 이범영도 1970년대 학생운동 출신 청년운동가였는데, 1987년 이후 NL 학생운동이 청년운동으로도 진입하며 민청련 집행부에서도 주사 민족해방파가 주류를 이룬다. 이런 상황에서 1988년 민청련 의장이 된 이범영은 2기 민청련을 ‘청년운동의 폭넓은 대중단체’로 만들고자 민족해방론을 적극 수용했다. 김근태와 이범영은 세대적·노선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1980~1990년대 386세대 민족해방파 학생운동권을 비호함으로써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보하려 했다. 이런 의미에서 민청련이 1980년대 학생운동의 민족해방파를 적극 수용하며 노선을 전환한 것은, 이후 문재인·이재명 정부까지 이어지는 흐름의 역사적 기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김대중 경향의 인민주의와 386세대의 제도권 진입이 연결되는 핵심 고리였다는 분석이다.

 

책은 지금의 민주당 계열로 넘어간 386 운동권이 대부분 명시적으로 전향을 선언하지는 않았지만 실제로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아래에서 출세하면서 사회주의적 변혁 대신 인민주의를 수용했다고 본다. 김대중에 의해 정계로 진출한 386 전대협 정치인들뿐 아니라, 정계에 진출하지 못한 권력 친화적 지식인들이 참여연대·민변 등 비정부기구로 결집했다. 1990년대 학생운동권도 여기에 속속 합류했다. 또한 노무현 정부가 도입한 로스쿨은 전향한 운동권이 이후 문재인·이재명 정부를 추종하는 정치화된 법률가 집단으로 성장하는 길을 열었다.

 

운동권 주류화의 중심은 민주당이지만,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도 결국 그 경향에 수렴했다고 평가된다. 사회주의 이념을 지향하던 활동가들과 연결되었던 전노협이 대기업노조 중심의 민주노총으로 대체되는 과정에서, 노동자운동은 코퍼러티즘을 추구하며 노동자의 도덕적·지적 향상보다 물질적 대가에 몰두하게 되었다. 책은 헌정 회복기에 노조와 재벌이 폭력과 지대를 교환하며 인민주의와 금권주의가 공존하게 되었고, 이는 문민화 실패에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운동권의 주력이 민주당이나 비정부기구로 대거 이동한 뒤, 운동권 잔류 활동가들의 마지막 방벽으로 기대되었던 민주노동당도 한계를 드러냈다. 정파 갈등 이후 민족해방파는 통합진보당 해산과 우여곡절을 거쳐 ‘민주당 2중대’로 수렴되었다. 민중민주파 중심의 정의당도 사민주의와 인민주의 사이에서 동요하다가 결국 ‘이데올로기의 소멸’로 귀결되었다고 진단한다. 특히 2016~2017년의 ‘촛불혁명’을 통해 잔존 운동권은 문재인 정부와 운명공동체를 이루게 되었다.

 

2012~2013년을 전후로 중국·러시아·북한 등 권위독재정에서 동시적으로 ‘반동’이 일어났지만, 한국 운동권은 권위독재정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 대신 친북·친중·친러 노선을 택했다. 또한 조국 사태에서 드러났듯, ‘적폐청산’은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같은 편을 돕고 반대편을 치는 당동벌이의 원리로 귀결되었다. 운동권은 권위독재정으로 나아가는 경향을 비판하길 포기했고, 같은 편 유력자의 부패와 비리를 옹호했으며, 심지어 스스로 출세주의자가 되어 권력과 부를 추구하게 되었다. 저자들이 현재 한국의 운동권을 ‘사이비 운동권’이라 강하게 비판하는 이유다.

 

마지막으로, 책은 NL에서 처음 주체사상을 제기했다가 이후 북한민주화운동으로 ‘전향’한 김영환의 사례와, 그를 변절자라 규탄하며 ‘비전향’을 고수한 이석기의 사례를 대조하며, ‘비전향과 전향의 이분법’이 과연 타당한가라는 쟁점을 던진다. 이석기를 비롯해 운동권에 잔류한 NL은 비전향을 고수하며 자기비판을 하지 못했고, 심지어 운동이 출세를 위한 변명으로 타락하는 과정을 보여주지 않느냐는 것이다.

 

9) 소결

책의 한국헌정사 분석을 관통하는 핵심은 한국에서 정치적 헌정주의 관점, 곧 헌정론이 부재했다는 점이다. 어떤 헌법 조항을 채택하는가가 아니라, 개인의 권리와 민주주의를 증진하는 정체가 무엇이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정치문화가 무엇인가를 사고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문민화 실패에 관해 여러 요인이 지적되었는데, 결국에는 저자들이 지적한 악순환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즉, 억압적이고 부패한 엘리트와 이에 불복하며 내전을 유발하는 방식으로 대중을 동원하는 반체제운동이 악순환하며, 결국 반체제운동 스스로 억압적이고 부패한 엘리트로 변모하고, 대중 동원으로 이것이 정당화되는 결과에 이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유주의적인 것 일체는 지배계급을 위한 것’이라는 관념이 사회운동에 뿌리 깊게 자리 잡았다. 그런데 소유·헌정·향상에 기초한 시민사회의 발전이라는 자유주의의 이념적 표준(1장 소결), 영국 의원내각제의 운영 원리(1장 1절)가 정말 지배계급만을 위해 민중을 억압하는 것인지, 아니면 국가권력을 통제하며 시민사회의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한 것인지 물어야 한다.

 

영국과 로마의 비교를 한국까지 확대하여, 자유주의의 이념적·제도적 표준을 한국헌정사에 적용해 보면 오히려 한국에서 민주정이 발전하기 위한 지침들을 얻을 수 있다. 한국에서 주권, 삼권의 관계, 선거제, 의회와 정당, 개인과 시민사회 등에 관해 사회운동이 제기하고 움직일 수 있는 폭이 더 넓어질 수 있다.

 

사회운동이 진정 더 자유롭고 평등한 세계를 바란다면, 현실을 관념적으로 규정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역사적 경험에서 배우고, 자기 자신의 결함을 비판하며, 어떤 정체와 정치문화가 자유와 평등을 실제로 증진하는지 역사에 기초해 사고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현재 한국의 운동권이 민주정에 반(反)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며 진단하며 ‘전향과 비전향의 이분법’이 당동벌이로 귀결되었다는 비판을 숙고해야 한다. 사회운동부터 스스로 변화해야, 위에서 지적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낼 실낱같은 가능성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남는 과제는 영국, 로마, 한국의 헌정사를 비교하며 사회운동에게 정치적 헌정주의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밝히는 것이다. 나아가 사회진보연대가 그간 했던 러시아혁명, 중국혁명, 프랑스혁명에 관한 논의까지 종합해, 오늘날 마르크스주의자와 사회운동이 무엇을 지향하고 어떤 운동을 해야 할지 생각을 진척시키면 좋겠다.

 

 

3. 나가며: 추격하며 추월한다는 것의 의미

 

『영국헌정사』와 『한국헌정사』, 그리고 『자유주의의 역사』가 다루는 역사의 범위가 넓고 제기하는 논점도 많기에, 현재 필자가 이를 총체적으로 정리한 결론을 내기 어렵다. 여기서는 이 책들과 함께 읽으면 도움이 될 책의 참고문헌을 꼽고, 책을 읽으며 들었던 핵심 질문인 ‘마르크스주의에서 헌정론의 부재’의 함의가 무엇일지에 대한 필자의 자답을 남기겠다. 공부가 부족해 단상 수준이고 미진한 점이 많은데, 독자들께서 이런저런 논점을 제기해 주시길 바란다.

 

1) 추천 참고문헌

저자들이 제시하는 역사와 문제의식에 입문하는 데에는 스콧 고든의 『국가에 대한 통제: 고대 아테네부터 오늘날까지의 헌정주의』를 추천한다. 영국헌정사와 이에 기반한 정치적 헌정주의 관점에 관해서는 『케임브리지 영국헌정사』가 도움이 되겠다.

 

한국헌정사에 관해서는 큰 틀은 모종린·와인개스트의 『한국발전론』(서울셀렉션, 2015), 헌정사는 서희경의 『한국헌정사 1948-1987』(포럼, 2020)과 『87년체제의 한국헌정사, 1987-2017』(포럼, 2023), 김영명의 『대한민국정치사: 민주주의의 도입, 좌절, 부활』(일조각, 2013), 심지연의 『한국정치정당사』(백산서당, 2017)을 종합해서 읽기를 추천한다.

 

마지막으로 후술할 마르크스주의 관련 이론적 쟁점에 관해서는, 폴 허스트의 『법과 이데올로기에 대해』, 더글러스 노스 등의 『폭력과 사회질서』, 해드필드와 와인개스트의 논문 「법의 지배의 미시적 기초」를 참고할 수 있다. 자유주의의 이념적 표준에 관해서는 『자유주의의 역사』 소개 글에서 다룬 케이헌의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읽어야 한다.

 

2) 추격 속의 추월

마르크스주의와 헌정주의의 관계는 무엇인가. 역사를 봤을 때 내전적 정치가 더 자유롭고 평등한 세계를 열어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필자는 저자들이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에서 ‘개인적 소유의 재건’이라는 문제의식과 동시에 헌정론의 부재를 지적하는 이유를 이렇게 이해한다. 자본주의적 소유가 개인적 소유를 침해한다는 마르크스주의의 비판은 중요한 통찰이었는데, 그것이 ‘수탈자에 대한 수탈’이라는 정치적 결론으로 이어지며 오히려 그 강점을 무너뜨리는 모순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 문제는 이론적으로 깊이 들어가면 결국 정치와 이데올로기의 고유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로 이어진다. 즉 마르크스주의에서 인과론의 문제다. 여기서 필자는 정치·이데올로기가 경제에서 독립된 고유한 심급이라는 게 저자들의 입장이라 본다. 이런 입장의 결론은 무엇일까.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구조적 위기로 인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지양하는 이행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그러나 이행의 ‘필연성’을 말할 수는 없다. 이 필연성은 이행의 ‘주체’와 관련되어서 제기되어 왔다. 이행의 주체는 자본주의의 경제적 모순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것으로 상정됐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기에 반대로 경제 외부에서 ‘계급의식’과 같은 관념을 부과하려는 시도가 나왔다. 물론 후자도 현실에서 실패한 것은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다시 말해, 경제적 위기는 더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으로의 이행이나 그 주체의 보장이라는 정치적·도덕적 결과를 자동으로 낳지는 않는다. 이것이 알튀세르가 말한 마르크스의 국가론·이데올로기론의 공백이다. 지난 글의 서론에서 썼듯 필자는 이번 책을 읽으며 이 공백을 헌정론과 향상론의 부재로 이해할 수 있었다.

 

정치와 이데올로기의 차원은 경제로 환원될 수 없는 고유성이 있다. 알튀세르나 발리바르는 이 고유성을 정신분석학 개념을 동원해 상당히 복잡하게 얘기했는데, 사실 영국 계몽주의자들이 훨씬 쉽게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사회관계 속의 인간 개개인은 ‘생산’(분업)할 뿐만 아니라 ‘질서’를 형성하고 타인과 ‘공감’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케이헌이 설명했듯 ‘공포로부터의 자유’, 즉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려는 욕구는 사회관계 속에서만 실현될 수 있고, 또한 그런 욕구는 모든 개인이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보편적이므로, 세 가지의 서로 구분되면서도 연결된 지주를 통해 개개인이 사회를 이루는 것이다. 무인도에서 홀로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분업 속에서 생산하는 것, 타인이 자신의 신체와 정신을 해하는 것을 막고자 타인과 질서를 만드는 것, 자신의 감정을 이해받기 위해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려는 것, 자유주의의 세 지주인 소유·헌정·향상은 바로 이러한 인간 사회의 보편적 차원을 표현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누군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을 때 정의로운 처벌을 요구하거나,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을 단지 ‘부르주아적 허위의식’이라 말할 수는 없다. 나아가,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이행이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고 타인과 함께 살아가려는, 개인적이면서도 동시에 인류 보편적인 욕구에서 비롯하는 질서와 도덕을 폐지하는 것일 수도 없다.

 

인간은 바로 이러한 보편적 욕구를 사회적으로 조직하고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동물과 구분된다. 이는 진보로 나아갈 수도 있지만, 동시에 동물보다 못하게 퇴보할 가능성도 함의한다. (『한국헌정사』에서 나치 사례를 들어 인비인(人非人)의 문제를 제기했듯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적 소유가 자유주의적인 개인적 소유를 침해한다고 비판한 것은 중요하다. 개인적 소유론이 사회관계 속 개개인은 (노동이 불가능한 경우가 아니라면) 스스로 노동해야 한다는 원리라면, 누군가는 노동하지 않고도 부를 축적하는 반면, 누군가는 노동하고도 자신의 삶을 통제하지 못하는 현실은 분명 개인적 소유의 원리를 왜곡한다. 이러한 지적은 인류 보편의 가치에 기반한 것으로, 마찬가지로 인류 보편의 가치를 토대로 정의·질서라는 차원과 공감·도덕이라는 차원과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그 해결책이 질서와 도덕 자체를 ‘부르주아적’이라 규정하며 파괴하는 방식, 곧 ‘수탈자에 대한 수탈’로 나아가는 것은 자기모순이라 평가할 수밖에 없다. 실제 역사에서도 그런 시도들은 권력 독점과 내전, 시민사회의 국가 종속, 그리고 개인적 소유의 붕괴로 이어졌다. 개인은 더 이상 자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권력자에게 종속된 존재가 되었고, 사회는 자유와 평등이 아니라 공포와 동원의 공간으로 변질되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의 진보가 아니라, 퇴보였던 것이다.

 

자본주의적 소유와 그 효과가 개인적 소유를 촉진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파괴할 수도 있듯, 헌정과 향상 역시 촉진할 수도 있고 저해할 수도 있다. 따라서 과제는 자유주의의 이념적·제도적 성취에 관념적으로 ‘부르주아적’이라는 딱지를 붙이며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더 넓고 꼼꼼하게 공부함으로써 그것을 계승하면서 동시에 그것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이를 통해 마르크스주의는 오히려 소유·헌정·향상의 세 지주가 함의하는 인류 보편적 가치의 관점에서 자본주의를 더 깊이 비판할 수도 있다.

 

『자유주의의 역사』에서 저자들이 말했듯, 새로운 마르크스주의의 전망은 자유주의의 자기비판(‘4세대 자유주의’)과 성취 위에서만 비로소 현실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케이헌이 지적했듯, 현실에서 자유주의 역시 언제나 자신의 이념을 충실히 실현했던 것은 아니다. 20세기 이래 자유주의는 한편으로는 약육강식의 자유방임주의와 관료주의로, 다른 한편으로는 약소자의 배타적·독점적 권리를 강조하며 경쟁과 승복을 거부하는 경향으로 분열되었다. 그 결과 자유주의는 21세기 초 자본주의의 위기와 인민주의의 부상 속에서 점차 무력해졌다. 영국 헌정도 그렇다. 20세기 초 영국 자본주의의 위기 속에서 상원 거부권의 실질적 폐지와 무조건적 보통선거제 도입은 문제를 낳았다. 영국 헌정은 오랫동안 축적된 정치문화 덕분에 유지될 수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영국 개혁당의 인민주의적 도전에 직면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자유주의의 이념적·제도적 표준 자체가 폐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케이헌이 지적했듯, 오늘날 인민주의의 부상은 경제적 위기만이 아니라 정치적·도덕적 위기의 산물이기도 하다. 또한 내전 연구가 보여주듯, 경제적 빈곤 자체보다 잡종정체와 분노사업의 존재가 내전을 촉발하는 더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해야 할 일은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가 낳는 효과를 헌정과 향상의 측면까지 포함하여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비판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자유주의의 표준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복원하고 발전시킴으로써 자본주의를 더욱 총체적으로 비판하고 넘어설 가능성을 여는 일이다.

 

실제 생산양식 이행의 역사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노예제에서 봉건제로 이행에서 핵심은 ‘기축시대(Axial Age)’ 내 지역 간 차이였다. 세계적으로 노예제가 위기에 처하면서 내전이 동시다발적으로 발발했는데, 여기서 특정 부족·국가를 대표하는 게 아니라 인류 보편적 가치에 기반하는 보편종교가 생겨났다. 더 나아가 왜 노예제 하에서 그런 보편적 가치가 지켜질 수 없었는지 현실을 분석하며 과거의 찬란했던 이상을 재구성하고 복원하려던 중국의 유학이 등장했다. 이로부터 제자백가 논쟁을 거쳐 중국에서 최초로 봉건제로 변혁이 이뤄졌던 것이다.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이행도 마찬가지였다. 서유럽 봉건제는 로마 봉건제에서 퇴행한 체제였고, 이에 폴리비우스와 키케로 같이 로마 공화정의 혼합정체가 견지했던 이상을 옹호했던 논자들이 르네상스 시기에 다시 주목받았던 것이다. 영국 헌정의 발전도 ‘고래(古來)의 자유·헌정’이라는 논의로 그런 혼합정체의 이상을 제기하고 현실 속에서 복원하려 했던 과정이었다. 나아가 ‘그럼에도 왜 로마는 그 가치를 지키지 못하고 멸망했는가’를 논하고 반면교사로 삼으며, 영국 헌정이 추격에서 추월로 나아간 것이다. 다시 말해 실제 이행의 역사에서 새로운 사회는 과거의 이상을 파괴함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추격’하는 과정 속에서 ‘추월’함으로써 등장했다.

 

결국 핵심은 지난 글의 서두에서 말했던 ‘추격 속의 추월’이라는 문제다. 추격하지 않는 추월은 존재할 수 없다. 마르크스주의가 소유·헌정·향상이라는 원리에 입각하여 자유주의가 제도적으로 성취한 최고점을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그것을 넘어선다는 주장 역시 공허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는 이상론이며, 막막한 현실 정치 상황에서 쉽지 않다는 제기도 십분 공감한다. 다만 책이 지적하듯 사회운동이 문민화를 주장하던 과거보다 더욱 배타적 권리와 내전적 정치를 옹호하며 인류 보편적 가치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영영 불가능해질 것이다. 오늘날 마르크스주의자는 자유주의의 역사적 성취를 진지하게 추격함으로써 자본주의의 한계를 소유·헌정·향상의 측면에서 총체적으로 넘어서야 한다. 그것만이 현재 세계와 한국에서 격화하고 있는 내전적 정치와 분노사업의 악순환을 끊고, 더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실낱같은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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