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2026 가을. 19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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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의 상대주의는 왜 정치적 올바름의 절대주의가 되었는가

『냉소적 이론들』

이아림 | 인천지부 회원

1. 들어가며

 

비판적 사회이론 계열의 학술지가 투고 논문을 심사할 때 중시하는 것은 논문의 타당성일까, 정치적 올바름일까? 피터 보고시안, 제임스 린지, 헬렌 플럭로즈가 진행한 ‘불만 연구 사건’은 이 질문을 정면으로 다룬다. 이들은 퀴어 연구, 인종 연구 등 이른바 비판적 사회이론 계열의 학술지에 조작한 가짜 논문을 투고해, 그런 논문이 동료 심사를 통과할 수 있는지를 실험했다.

 

2017년에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2019년 1월까지 진행될 계획이었으나, 필자로 등록된 인물이 실체가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2018년 10월에 조기 종료되었다. 발각 당시까지 4편 게재, 3편 게재 승인 후 미게재, 6편 게재 거부, 7편 심사 중이라는 결과가 집계되었는데, 게재 승인을 받은 논문은 하나같이 세 사람이 비판하고자 한 비판적 사회이론의 주요 주제를 다뤘다. 몇 편을 소개하면, ▲ 도시의 개 전용 공원을 개들 사이의 ‘강간을 용인하는 공간’으로 규정하며, 인간 동반자(개 주인)가 이성의 개는 제외하고 동성의 개 사이에서 발생한 ‘강간’만 제재를 가하는 이중잣대를 보인다며 이를 조직적 억압으로 분석한 논문, ▲ 이성애자 남성이 성인용품으로 항문 삽입을 경험하면 동성애 혐오가 줄어든다고 주장한 논문, ▲ 가장 소외된 여성 간의 ‘연대 페미니즘’을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히틀러가 쓴 『나의 투쟁』의 용어만 바꾸어 서술한 논문이 있다.

 

세 사람은 이 프로젝트를 통해 학계의 지적 풍토를 비판하고자 했다. 이들이 보기에 비판적 사회이론 계열의 학술지는 엄밀한 학문적 검증이 아니라, 논문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결론을 향하고 있는지에 따라 게재 여부를 결정하고 있었다. 나아가 이들은 비판적 사회이론이 특정 문제의 존재를 미리 전제한 뒤 ‘비판적으로’ 그 증거를 찾아내는 접근법을 취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린지와 플럭로즈가 2020년에 출간한 『냉소적 이론들』에서 더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냉소적 이론들: 포스트모더니즘 대문자 이론 비판』

지은이: 헬렌 플럭로즈, 제임스 린지

출판사: 뒤란

출간일: 2023.11.15.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정치적 올바름’이란 무엇인가. 필자는 이를 하나의 정형화된 정치 스타일로 정의한 바 있다. (이아림, 「정치적 올바름, 분석과 비판」, 《계간 사회진보연대》, 2024년 봄호.) 말하자면, 성별이나 인종 등에 따른 차별을 시정하기 위해 단어를 바꿔 부르는 데서 시작해서, 가해자 개인을 지목해 그의 발언을 규제하고 처벌하는 방식으로 나아가며, 끝내 모든 쟁점을 선과 악이라는 도덕의 문제로 치환하는 정치 스타일이다. 필자의 앞선 글이 정치적 올바름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그 기원과 양상을 통해 살폈다면, 『냉소적 이론들』은 그것이 어떤 이론에 기대고 있는지를 다룬다. 정치적 올바름의 행태를 확인하는 데서 나아가 그것을 지탱하는 학문적 배경까지 살펴보고 싶은 독자라면, 이 책이 시야를 넓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아래에서는 책의 제목을 중심으로 저자의 문제의식을 해설한 뒤, 3장에서 1960~1980년대 프랑스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에서 1990~2000년대의 응용 포스트모더니즘을 거쳐 2010년대의 물화된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기까지, 세 시기를 관통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연속성과 단절점을 짚어내고자 한다. 이어서 4, 5장에서 저자가 그 연속성의 핵심으로 제시하는 ‘지식 원칙과 정치 원칙’을 중심으로 내용을 소개한 뒤 필자의 감상을 덧붙이고자 한다.

 

 

2. ‘비판적’인가, ‘냉소적’인가

 

이 책의 원제는 “냉소적 이론들: 학문-행동주의가 어떻게 인종, 젠더, 정체성에 관한 모든 것을 만들어냈는가, 그리고 이것이 왜 모든 사람에게 해악을 끼치는가”다. 책 표지에서 제목의 ‘비판적’(critical)이라는 단어를 ‘냉소적’(cynical)으로 교정한 부분이 인상적이다. 비판적 사회이론을 표방하는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이론들이 ‘비판적’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지만 실상은 ‘냉소적’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는 저자의 주장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 ‘냉소적’ 태도는 저자가 긍정하는 ‘회의적’(skeptical) 태도와는 분명히 구분된다. 저자의 설명을 종합했을 때 세 개념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먼저 ‘비판적’이라는 말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을 가리킨다. 비판이론은 도덕적 모범을 상정한 뒤, 그 모범과 어긋나는 체제의 문제를 파악하고 이를 활동가들이 실천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권장하는 이론이었다. 비판이론이 자신과 구별했던 전통 이론이란, 관찰과 가설, 검증을 통해 객관적이라고 상정된 대상을 분석하는 현대 학문의 이론 틀 전반을 지칭한다. 저자는 파시즘과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적 현실 앞에서 전통 이론만으로는 그 도덕적 함의를 다루기에 불충분하다고 판단했던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원래 기획 자체는 인정할 만하다고 본다. 저자에 따르면,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원래 의도는 비판이론으로 전통 이론을 대체하는 게 아니라 양자를 결합하는 데 있었다. 이때 결합이란 사실이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그 사실이 어떤 사회를 지탱하는가라는 물음을 함께 던지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저자는 오늘날의 ‘비판’이 이 취지에서 벗어나, 결론을 전제한 채 반증 가능성을 차단하는 병리적 독해 방식으로 변질되었다고 지적한다. 린지는 결정적 계기를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에서 찾았다. 마르쿠제가 인종적 소수자들을 대학의 급진적 지식인 계층과 결합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비판이론이 정체성 정치와 맞물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회의적’이라는 말은 어떤 주장이든 충분한 근거를 요구하고 검증 가능한 방식으로 의심하는 태도를 가리키며, 계몽주의의 연장선에 있는 자유주의적 지식관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이를 “그 누구도 마지막 단언을 하지 않는 것”이라 요약하며, 스티븐 핑커의 표현을 빌려 “신념, 계시, 전통, 도그마, 권위, 그리고 주관적 확실성에 대한 황홀한 감정, 이 모든 것들이 지식의 원천으로서 폐기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반면 ‘냉소적’이라는 말은 신뢰할 만한 지식을 얻는 행위가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보는 태도를 가리킨다. 저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은 냉소주의의 한 형태”이며 “사상과 사회의 구조에 대해 급진적인 의심들을 제기한다”고 규정하고, 더 나아가 “포스트모더니즘은 회의론을 발명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왜곡하여 부패해 가는 냉소주의로 만들었다”고 못 박는다. 요컨대 책 제목이 강조하는 것은 오늘날 ‘비판적’이라 자처하는 이론이 건강한 ‘회의’가 아니라 병리적인 ‘냉소’에 가깝다는 진단인 셈이다.

 

부제는 이 책이 다루고자 하는 대상이 “학문-행동주의”임을 드러낸다. 저자는 1960~1980년대 프랑스에서 태동한 초기 포스트모더니즘이 1990~2000년대 미국에 안착하면서 어떻게 변형되어 갔는지를 추적한다. 초기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적이고 허무주의적인 결론에 만족하지 못한 미국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무언가 실행 가능한 것”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이 사상은 학문에서 시작해 활동가들을 거쳐 일반인들에게로 전파된다. 저자는 바로 이 “학문-행동주의”야말로 오늘날 정치적 올바름이 널리 퍼지게 된 결정적 계기로 파악한다. 따라서 이 책이 수행하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학문적 비판은 동시에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실천적 비판이기도 하다.

 

 

3. 포스트모더니즘의 역사:

포스트모더니즘 철학 — 응용 포스트모더니즘 — 물화된 포스트모더니즘

 

상대주의는 왜 그 정반대인 절대주의로 귀결되었는가. 이 책이 추적하는 반세기에 걸친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의 역사는 결국 이 하나의 질문에 답하기 위한 것이다. 객관적 진리의 가능성을 부정하며 출발한 포스트모더니즘이 “지식이란 권력에 봉사하도록 구성된다”는 확신으로 전환되고, 마침내 대문자 진리로 굳어지는 과정을 저자는 ‘물화’(物化, reification)라 표현한다. 일명 대문자 이론이 된 것이다.

 

여기서 대문자 표기는 저자가 고안한 구별 장치다. 저자는 원서에서 Theory, Social Justice, Truth처럼 첫 글자를 대문자로 적어, 하나의 고유한 사조로 굳어진 용법을 같은 단어의 일반적 용법과 구분한다. 소문자 사회정의, 즉 인종과 성별에 따른 차별을 없애고 모두의 권리를 확대하려는 통상적 의미의 목표는 저자 자신이 지지하는 바다. 반면 대문자 사회정의는 그 목표를 특정 이론의 독점물로 삼고 이견을 허용하지 않는 운동을 가리킨다. 마찬가지로, 소문자 진리가 증거를 통해 잠정적으로 확립되는 것이라면, 대문자 진리는 의심을 허용하지 않는 교의다. 저자가 무엇을 비판하고 무엇을 옹호하는지가 이 표기법에 드러난다. 이처럼 대문자 이론으로서 물화된 포스트모더니즘의 형성 과정은, 상대주의, 해체주의에 이론적 기반을 둔 정치적 올바름이 선악 구도를 강요하는 교조적 태도를 보이는 역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1960년대 프랑스에서 유행한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이 처음부터 현실에서 힘을 발휘한 것은 아니었다. 푸코는 지식과 권력이 분리 불가능하게 얽혀 있다는 의미에서 ‘권력-지식’이라는 개념을 제시했고, 데리다는 언어에 내장된 위계적 이항 대립을 해체하는 데 몰두했다. 이 시기의 이론은 세계가 어떠한지를 기술하고 기존 모델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는 데 그쳤을 뿐,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해체한 뒤에 남는 것이 없었기에, 이 사상은 허무주의로 귀결되었다.

 

1990년대에 미국으로 확산한 포스트모더니즘은 응용 과정을 거치는데, 저자는 이 두 번째 시기를 결정적 전환기로 설명한다. 통칭 비판적 사회이론으로 불리는 응용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적인 갈래는 다음과 같다. 탈식민 이론은 식민주의의 모든 발현과 영향을 체계적으로 해체한다는 목적 아래 서구 자체를 해체하고자 한다. 퀴어 이론은 성별과 젠더, 섹슈얼리티라는 범주를 억압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정상성으로부터 해방을 추구한다. 비판적 인종이론은 인종을 백인의 특권과 우월성을 유지하기 위해 창조된 사회적 구성물로 보며, 교차성 이론은 여러 정체성이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억압의 축을 분석한다. 페미니즘과 젠더 연구에서도, 2000년대를 전후해 교차성 이론이 그 이전 한 세기 동안 페미니즘에 강한 영향을 미친 자유주의적·유물론적·급진적 접근을 대체했다. 마지막으로 장애와 비만 연구는 장애와 비만을 사회적 구성물로 파악하는 데 집중한 나머지 그 실재성을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저자는 이 이론들을 설명하는 데 책의 절반이 넘는 분량을 할애한다. 이 가운데 몇몇은 아래 3장과 4장에서 다룬다.)

 

프랑스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이 세계를 ‘서술’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미국에서 유행한 응용 포스트모더니즘은 세계에 대한 ‘처방’을 내렸다. 지식이 담론을 통해 작동하는 권력의 구성물이라는 전제에 따라 권력 구조를 폭로하는 것을 넘어, 말하는 방식을 바꿈으로써 그 구조를 전복할 수 있다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담론 분석이 모든 분야의 중심 방법론으로 자리 잡으면서 언어적 폭력(말도 물리적 폭력과 동등한 해악을 끼치므로 폭력의 일종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안전 공간(주변화된 정체성을 지닌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문제 삼는 발언에 노출되지 않도록 보호받는 공간), 미세 공격(발화자가 의도치 않았더라도 소수자에게 편견을 전달하는 사소한 언행), 트리거 워닝(트라우마를 촉발할 수 있는 내용에 대한 사전 경고) 같은 개념이 등장했고, 정체성 관련 용어를 둘러싼 규칙이 정교해지면서 정치적 올바름이 정점에 이른다.

 

이러한 논리는 ‘연구 정의’라는 주장까지 나아간다. 과학과 이성, 객관적 증거는 그동안 과대평가된 반면 감정과 전통적 서사, 영적 믿음은 과소평가되었으므로, 정의로운 지식 생산 체계라면 후자를 최소한 전자만큼, 실은 그 이상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비서구 여성이나 소수자 정체성을 가진 연구자를 우선 인용하고 백인 서구 남성의 인용은 최소화해야 한다. 이러한 입장은 교육과정에도 영향을 미쳐, 식민지나 인종차별을 정당화했던 과거의 많은 문학인이 퇴출되었다.

 

세 번째 시기인 2010년대에 이르러 대문자 이론은 이제 의심할 수 없는 진리로 굳어진다. 저자에 따르면 이 시기 물화된 포스트모더니즘의 성격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로빈 디안젤로의 『백인 취약성』(2018)이다. 이 책에 따르면 백인이 인종 문제로 지적받았을 때 반박하거나, 침묵하거나, 자리를 뜨거나, 심지어 눈물을 흘리는 것까지, 순종적인 동의를 제외한 모든 반응이 백인의 취약성을 입증하는 증거가 된다. 따라서 이 이론은 원리적으로 반증될 수 없게 된다. 이 시기의 또 다른 특징은 대문자 이론이 대학 바깥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는 점이다. 구글과 BBC가 사회정의 언어로 제기된 항의로 인해 직원을 해고하고, 메이시스에서 청바지 사이즈로 적정 식사량을 표시한 접시가 비만 혐오라는 항의를 받고 회수되며, 특정 개인이 오래전 발언을 이유로 경력과 평판이 파괴되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세 시기를 거쳐 포스트모더니즘은 “해체를 위한 해체”에서 종교적 열정에 가까운 행동주의로 급격히 변모했다. 그러나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이 변모가 단절이 아니라 점진적인 진화라는 사실이다. 밑바탕에 놓인 두 가지 원칙이 변하지 않은 채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첫째는 지식 원칙, 즉 “객관적 지식이나 진리가 습득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급진적인 회의주의 그리고 문화적 구성주의에 전념하는 것”이다. 둘째는 정치 원칙, 즉 “사회는 권력과 위계들의 체제들로 형성되며, 그 체제가 무엇을 알 수 있고 어떻게 알 수 있는지를 결정한다는 믿음”이다. 그리고 이 두 원칙 위에서 경계 흐리기, 언어의 권력, 문화적 상대주의, 개별성과 보편성의 상실이라는 네 가지 주제가 자라난다.

 

 

4. 대문자 이론의 지식 원칙:

불가지론과 영지주의의 모순적 결합

 

대문자 이론의 지식 원칙은 인간의 제한된 인지 능력을 과장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에 따르면 우리가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현재 우리가 속한 문화 안에서 진리를 확립하는 방식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른 문화적 패러다임 안에서는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는 것이 옳을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문화적 구성주의이자 상대주의이며,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대문자 이론의 입장은 인간이 증거와 이성을 동원해 신뢰할 만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한 회의, 즉 일종의 불가지론처럼 보인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대문자 이론은 불가지론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모순적이게도, 신뢰할 수 있는 지식은 오로지 주변화된 소수자의 실제 경험을 경청함으로써만 얻어질 수 있다는 주장을 전개한다. 이는 영지주의적 인식론과 닮아있다.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는 2세기경 융성한 종교 사조로, 구원이 교리의 학습이나 실천이 아니라 소수에게만 허락된 은밀한 앎에서 온다고 보았다. 이 앎은 논증이나 검증의 대상이 아니라 내적 각성으로 주어지며, 따라서 그것을 얻은 자와 얻지 못한 자를 갈라놓는다. 대문자 이론 역시 증거와 이성이라는 보편적 통로는 막아 두고, 특정 정체성에 귀속된 경험이라는 별도의 통로만을 열어 둔다. 대문자 이론의 지지자를 가리키는 ‘깨어 있음’(woke)이라는 표현이 각성을 의미하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 별도의 통로는 정작 개인이 아니라 특수한 집단에 초점을 맞추기에, 이를 ‘개별성과 보편성의 상실’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지적하듯 이러한 인식론의 문제는 분명하다. 사람들의 주관적 경험이 서로 충돌할 때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판단할 것인가. 대문자 이론은 주변화된 집단의 다양하고 때로 상충하는 증언 가운데 이론과 부합하는 해석만을 진정한 것으로 인정하고 나머지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내면화로 처리함으로써 이 난점을 봉합한다. 그 대가로 이론 자체는 반증 불가능한 것이 되어 버린다.

 

객관적 지식에 의문을 제기하면서도 동시에 억압적 체제의 실재를 확신하고 행동을 촉구하는 이 양면성은 푸코의 ‘권력-지식’ 개념을 수용한 결과로 보인다. 푸코는 지식을 무엇을 알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권력 장치의 산물로 파악했다. 따라서 지식이 참이냐 거짓이냐를 따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조건 아래에서 특정 담론이 참 또는 거짓으로 기능하게 되었는지를 분석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유의미하다고 보았다.5 특히 어떤 시대에 무엇이 진실로 여겨질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조건이자 그 시대를 지배하는 사상과 가치의 집합을 ‘에피스테메’라고 명명하였다.

 

대표적으로 과학은 권력자들이 지배를 유지하는 데 사용하는 지식을 정당화했다. 과학자들이 성을 연구하고 범주화하는 과정에서 성적 정체성과 범주 자체를 창조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논리가 객관적 지식의 불가능성을 주장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특정 지식이 누구의 이익에 봉사하는지 판별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지식의 타당성은 의심하면서도 그 정치적 기능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는 이 비대칭이야말로 대문자 이론의 지식 원칙의 특징이다.

 

이러한 지식 원칙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응용 포스트모더니즘의 첫 결과물인 탈식민 이론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인종 이론이나 젠더 이론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유행 이전에도 학문적 계보를 갖추고 있었던 데 비해, 탈식민 이론은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직접 파생되었으며 무엇보다 탈식민화라는 명확한 목적을 위해 생겨났기 때문이다.

 

이 분야의 연구 대상은 주로 담론에 관한 것이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에서 서구의 담론이 어떻게 동양이라는 타자를 구성하고 영속화하며 강제하는지를 밝히고자 했다. 그는 텍스트에 대한 밀착 독해를 통해 서구의 학문이 동양을 비합리적이고 관능적이며 전제적인 것으로, 그에 대비되는 서구를 합리적이고 진보적인 것으로 구성해 온 이항 대립을 드러내고자 했으며, 이 대비가 서구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사이드가 “역사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며 따라서 해체되고 다시 쓰일 수 있”다고 주장한 대목이다. 지식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지식 원칙이 그대로 드러난다.

 

가야트리 스피박의 작업은 이 경향을 한층 더 밀고 나간다. 스피박이 제시한 ‘에피스테메적 폭력’이라는 개념은, 피식민자의 지식과 앎의 주체로서의 지위가 지배 담론에 의해 주변화될 때 발생하는 손상을 가리킨다. 즉 지배 집단의 에피스테메가 피지배 집단의 지식을 배제하는 것이 폭력이라는 주장이다. 나아가 스피박은 ‘전략적 본질주의’를 제안한다. 스피박에 따르면 본질주의는 본래 지배의 언어적 도구다. 식민자는 피지배 집단을 단일한 타자로 규정하고 정형화함으로써 자신의 억압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피박은 저항의 행위로서 바로 그 동일한 단일 집단 정체성을 다시 채택할 것을 주장한다. 지배 집단이 사용할 때는 폭력이 되는 도구가 피지배 집단이 사용할 때는 해방의 도구가 된다는 것인데, 플럭로즈와 린지는 이를 이중잣대 위에 세워진 정체성 정치라고 비판한다.

 

한편 호미 바바는 언어가 의미를 온전히 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강하게 의심하면서도 동시에 언어에 권력 구조를 바꿀 힘을 부여했다. 바바는 동양과 서양, 문명과 야만처럼 안정된 것으로 여겨지는 언어의 범주들을 거부하기만 하면 식민 지배를 전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인식은 2000년대 이후 ‘모든 것을 탈식민화하라’는 운동에서 구체화되는데, 세실 로즈 동상 철거 운동이 대표적이다. 저자는 아파르트헤이트의 법적 기틀을 마련한 인물을 미화하는 조형물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 자체는 합당하다고 본다. 그러나 저자가 보기에 중요한 것은 이 운동이 동상과 건물, 교정이라는 물리적 공간을 해체되어야 할 하나의 텍스트처럼 읽어냈다는 사실이다. 텍스트와 실재 사이의 경계를 흐리고 언어를 바꾸면 세계가 바뀐다고 믿는 태도야말로 대문자 이론의 특징이다.

 

탈식민 이론가들은 유럽 철학 전체가 거부되어야 한다는 주장, 심지어 시간과 공간이라는 범주조차 서구적 구성물로서 해체되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아간다. 가치중립적으로 지식이 생산될 수 있다는 관념을 영원히 버려야 하며, 중립성을 가장하는 태도가 오히려 정당성을 훼손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성과 과학은 진리에 이르는 보편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통로가 아니라 여러 앎의 방식 가운데 하나로, 그것도 억압적인 하나로 격하된다. 과학과 신화 사이의, 논증과 증언 사이의 경계가 지워지는 것이다. 이는 앞서 살펴본 영지주의적 인식론이 학문의 영역에서 관철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러한 지식 원칙에 대해 필자의 몇 가지 감상을 덧붙이고자 한다. 첫째, 지식이 언어적·사회적 구성물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과 객관적 지식을 포기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로이 바스카의 비판적 실재론이 좋은 참조점이다. 그는 모든 지식이 사회적·언어적으로 구성되며 오류일 수 있고 시대에 따라 변한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합리적 기준을 통해 어떤 이론이 실재를 더 잘 포착하는지 판단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인간의 이론과 언어가 특정 시대의 산물이며 계속 수정된다 하더라도, 그 대상이 되는 구조는 인간의 인식과 무관하게 실재하기 때문이다.

 

저자 역시 이와 유사한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저자에 따르면 과학자는 우리가 현상을 설명하는 모델을 언어적 구성물을 통해 만들고 있음을 인정한다. 더 나은 모델이 현실의 증거를 설명하고 새로운 결과를 예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면, 이를 ‘잠정적으로 진실’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처럼 지식이 문화적 구성물이라는 명제는 참이지만, 그로부터 모든 지식이 동등하다는 결론이 따라 나오지는 않는다. 더 나은 방법으로 얻은 지식과 그렇지 못한 지식이 있음에도, 대문자 이론은 이 구분을 지워 버린다.

 

둘째, 탈식민 이론은 현대 문명이 식민주의와 함께 시작했다는 이유로 그 진보적 측면을 인정하지 않는다. 지배 집단의 에피스테메는 억압적이라는 전제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스피박이 사티를 다루는 방식이 이를 잘 보여준다.8 사티는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남편의 화장 장작더미 위에서 산 채로 타 죽는 인도의 관습인데, 스피박은 사티를 금지한 영국 식민주의자와, 사티를 옹호한 인도 남성 민족주의자를 동일한 잣대로 비판한다. 식민 지배 담론과 토착 가부장제 담론이라는 이중의 억압 속에서, 설사 사티라는 관습이 금지되더라도 그 과정에서 하위주체 즉 여성의 말은 근본적으로 배제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이 틀 안에서는 문제의 어떤 개선도 지배 담론의 산물로 간주되는 한 억압의 다른 형태로 여겨질 뿐이다.

 

셋째, 객관적 지식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특정한 담론을 바탕으로 권력화된 사회적 구성물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관념은 결국 스탈린 시대 맹위를 떨쳤던 (그리고 훗날 알튀세르가 강력하게 비판했던) 이른바 ‘프롤레타리아 과학론’과 대동소이하다. 소련의 농학자 리센코는 생물이 살아가며 얻은 형질이 자손에게 대물림된다고 주장하면서, 유전자의 존재를 전제하는 멘델 유전학을 부르주아의 관념론이라 공격했다. 스탈린 체제는 노동자의 과학과 부르주아의 과학이라는 구도를 받아들여 리센코의 손을 들어주었다. 계급적 관점이 과학적 진리를 결정한다는 주장과, 정체성에 뿌리박은 관점이 지식의 타당성을 결정한다는 주장 사이에서 원리적인 차이를 찾기는 어렵다. 어느 쪽이든 지식의 참과 거짓을 그 출처가 누구인가로 판별하기 때문이다.

 

 

5. 대문자 이론의 정치 원칙: 21세기의 문화대혁명?

 

대문자 이론의 정치 원칙은 사회가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유리하고 그들의 권력을 영속화하는 방향으로 조직되어 왔다는 주장에서 출발한다. 특정한 말하기 방식이 참된 것으로 정당화되고, 그렇게 정당화된 담론이 사회 전체로 퍼지면서 상식으로 여겨지는 규칙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권력이 스며들어 있다고 지목되는 영역의 범위다. 저자에 따르면 대문자 이론은 정중함과 조리 정연한 담론에 대한 기대, 객관적 증거를 요구하는 태도, 심지어 문법과 통사의 규칙에까지 권력이 관철되고 있다고 본다. 이 관점에서는 누군가에게 주장의 근거를 요구하는 평범한 행위조차, 권력자들이 선호하는 방식으로 설계된 지식 생산 체계에 참여하라는 요구로 읽힌다.

 

이러한 주장을 보면 대문자 이론은 일종의 음모자 없는 음모론이다. 즉 한편으로는 지식생산 체계의 모든 것이 권력의 요구에 짜맞추어 있다고 본다는 점에서 기존의 음모론과 동일한 논리구조를 내장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체계를 조직하는 자들은 배후, 상층에 숨어 있는 소수의 행위자들이 아니라, 의도적으로든 무심결에든 그 담론을 일상적으로 재생산하는 우리 모두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특정한 ‘음모자 없는’ (또는 모두가 음모자인) 음모론이라 명명할 수 있다. (물론 존재론적으로 이런 음모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집단이 존재한다는 영지주의도 동반하지만 말이다.)

 

즉, 권력은 위로부터 가시적으로 행사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모든 층위에 스며들어 모두에 의해 강제된다. 여기서 결정적인 함의가 도출된다. 억압의 원인은 개별 행위자가 아니라 사회 체계와 그 안에 내재한 권력 역학이므로, 어떤 사회는 구성원 대다수가 억압적 견해를 갖지 않더라도 억압적일 수 있다. 이 명제야말로 정치 원칙의 핵심이며, 억압적 구조를 해체하기 위해 저항해야 한다는 윤리적 명령이 곧바로 도출된다.

 

권력이 담론을 통해 작동하며 개인이 아니라 체계가 억압의 원인이라는 정치 원칙은 두 갈래의 실천으로 나뉘는데, 퀴어 이론과 비판적 인종이론이 이를 대표한다. 퀴어 이론은 억압이 범주화 체계에서 발생한다고 보아 성별과 젠더, 섹슈얼리티라는 범주를 해체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반면 비판적 인종이론은 체계 안에서 각자가 점한 위치가 그가 무엇을 볼 수 있는지를 결정한다고 보아, 범주를 해체하는 대신 오히려 식별하고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같은 원칙에서 출발해 정반대의 실천에 이르는 셈이다.

 

먼저 퀴어 이론은 성별과 젠더, 섹슈얼리티라는 범주의 존재 자체를 억압으로 간주한다. 언어가 남성과 여성, 이성애와 동성애 같은 범주를 생산하고 사람들을 그 안에 배역처럼 배정할 때마다 정상이라는 관념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언어가 범주를 창조하고 강제한다는 인식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주제인 ‘언어의 권력’을 잘 보여준다. 또한 범주를 해체하는 과정인 ‘퀴어 하기(Queering)’는 ‘경계 흐리기’와 의미가 같다. 무언가를 ‘퀴어 한다’는 것은 고정되어 보이는 범주를 교란하고 그 안의 이항 대립을 문제 삼는다는 뜻으로, 그 경계가 자의적이므로 명백한 부조리로 보일 때까지 흐려버림으로써 지울 수 있다는 전략으로 나타난다. ‘퀴어 하기’의 대상은 시간과 공간, 심지어 퀴어 이론 자신에게까지 확장되었다. 데이비드 핼퍼린이 퀴어를 두고 “정상적인 것, 정당한 것, 지배적인 것과 불화하는 모든 것”이자 “본질 없는 정체성”이라고 규정한 것은 이 이론의 성격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명료해진다는 것은 언어에 대한 급진적 불신과 모순되므로, 퀴어 이론은 이해 가능해지는 것 자체를 경계한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퀴어 이론의 비일관성은 의도적인 특징이지 실수”가 아니다.

 

저자에 따르면 퀴어 이론은 간성(間性)인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해서만 생물학을 언급한다. 이를 통해 인류의 압도적 다수가 남성 또는 여성으로 태어나며 젠더 표현이 자연스럽게 섹스와 강한 연관이 있다는 객관적 사실을 모호하게 만들고자 한다. 이처럼 퀴어 이론은 생물학적 본질주의를 정당화할 소지가 있는 내용이라면 과학적 사실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나 과학적 사실이 정치적 이유로 기각될 수 있다면, 남는 것은 담론들 사이의 힘겨루기뿐일 것이다.

 

다음으로 비판적 인종이론의 경우, 창시자로 알려진 데릭 벨의 “이해관계의 수렴”이라는 테제가 그 내용을 대변한다. 벨에 따르면 백인은 자기 이익에 부합할 때에만 흑인에게 권리를 허용해 왔다. “미국 인종 관계의 진보란 대체로 신기루에 불과”한데, 이는 백인이 자신의 지배를 유지하려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는 기능을 할 뿐이라는 것이다. 인종 문제에 관한 한 어떠한 개선도 진보로 인정하지 않고 새로운 형태의 지배로 설명하는 이런 서술은 앞서 탈식민 이론의 문제와 동일하다. 여기서 도출되는 실천적 명제는 다음과 같다. 백인만이 인종주의자일 수 있고, 인종주의에 관해서는 유색인만이 말할 수 있고 백인은 들어야 한다.

 

이 이론이 응용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심에 서게 된 결정적 계기는 킴벌리 크렌쇼의 “교차성” 개념이 등장한 데서 찾을 수 있다. 크렌쇼는 교차로의 비유를 통해 흑인 여성이 백인 여성도 흑인 남성도 겪지 않는 고유한 차별을 경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 통찰 자체는 설득력이 있으며 그다지 논쟁적이지도 않다. 문제는 교차성을 현대 정치와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을 연결하는 개념으로 정의하면서 나타난다. 크렌쇼에 따르면 “나는 흑인이다”라는 진술과 “나는 우연히 흑인이 된 사람이다”라는 진술은 전혀 다르다. 전자는 “저항의 진술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부과된 정체성을 긍정하는 담론”이다. 반면 후자는 “나는 우선 사람이다”라는 보편성을 지향하면서 흑인이라는 범주를 우연적이고 부수적인 것으로 치부한다. 당연하게도 크렌쇼는 전자의 편에 선다. 정체성과 무관하게 사람들을 동등하게 대우하려 했던 자유주의적 기획을 거부하고, 오히려 정체성을 공동체의 원천으로 격상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개인은 자신이 속한 여러 정체성 집단의 총계와 같은 어떤 것이 된다. 이로써 개별성과 보편성이 모두 상실된다.

 

필자는 이러한 정치 원칙에 대해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첫째, 정치 원칙이 전제하는 언어관의 문제다. 이들에게 담론이란 무엇을 어떤 말로 말할 수 있는지를 규정하는 규칙의 체계이고, 그 규칙은 개인이 쓰는 단어와 표현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권력이 담론을 통해 작동한다고 보는 순간, 사람들의 말을 감시하고 교정하는 일이 곧 정치적 실천이 된다. 그러나 언어를 바꾸면 현실이 바뀐다는 믿음은, 스튜어트 홀의 지적처럼 사물을 다르게 부르면 그것이 더는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극단적 명목론에 가깝다.9 더 큰 문제는 언어적 폭력이나 미세 공격 같은 개념이 규제와 처벌의 근거가 된다는 사실이다. 의도하지 않은 언행까지 공격으로 규정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발화자의 침묵뿐이다. 이러한 정치 원칙은 계몽주의의 핵심 성취인 표현의 자유를 훼손하는 우를 범한다.

 

둘째, 개별성의 상실은 현대 정치의 전제를 후퇴시킨다. 억압이 개인의 악의가 아니라 체계에서 비롯된다면, 개인이 무엇을 의도했는가는 더는 중요하지 않다. 이때 악의가 없다는 항변은 오히려 자신이 체계에 공모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는 증거가 된다. 이렇게 의도라는 기준이 사라진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그가 속한 집단이다. 개인은 자신의 정체성으로 환원되고, 발언은 타당성이 아니라 누가 말했는가로 평가된다. 결국 남는 것은 특정한 개인이 아니라 집단의 표본일 뿐이다. 대문자 이론의 정치 원칙은 인간을 특정 정체성의 대표자가 아니라 고유한 개인으로 대해야 한다는, 현대사상이 어렵게 도달한 토대를 침식한다.

 

셋째, 사상이 담론의 층위에서 검증되고, 개인의 의도보다 그가 속한 범주가 판단의 기준이 되며, 침묵조차 유죄의 증거가 되는 구조는 문화대혁명을 연상시킨다. 문혁의 홍위병은 “부모가 혁명을 하면 자식은 멋진 놈, 부모가 반동이면 자식은 개자식”이라는 혈통론을 내걸었다. 정체성을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표식으로 다루면서 그것을 토대로 개인의 사상과 정치적 입장을 판가름한다는 점에서, 대문자 이론의 실천 양태와 홍위병의 행위는 묘하게 닮아 있다. 실제로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말은 1960년대 미국 신좌파가 『마오 주석 어록』의 ‘올바른 생각’을 빌려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습니다, 동지!”라며 홍위병의 말투를 흉내 낸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한데, 시사적인 대목이다.

 

 

6. 나가며: 자유주의는 왜 그 자리를 내주었는가

 

저자는 책 전체에 걸쳐 대문자 이론과 자유주의의 차이를 반복해서 강조한다. 자유주의는 진보를 믿고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마저 수용하기에 자기 교정적인 반면, 대문자 이론은 진보의 가능성 자체를 냉소하며 원리적으로 비판을 차단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성과 소수자의 지위를 실제로 개선해 온 것은 대문자 이론이 아니라 보편적 인권과 법 앞의 평등을 요구해 온 자유주의였다고 지적한다. 소문자 사회정의라는 목표에 이르는 길은 대문자 이론이 아니라 자유주의라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며, 필자 역시 이에 동의한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물음이 남는다. 그렇다면 왜 하필 자유주의를 표방해 온 미국 민주당의 인사와 지지자들이 대문자 이론을 받아들이게 되었는가. 저자는 사상의 계보와 전파 경로를 정교하게 추적하지만 이 질문에는 답하지 않는다. 이 문제를 다루려면 미국 자유주의의 후퇴 과정을 함께 보아야 할 것이다.

 

후퇴는 두 층위에서 진행된 것 같다. 하나는 경제적 후퇴다. 민주당은 자신이 주도해 온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의 결함을 보완할 경제개혁에 착수하지 못했다. 그 대신, 경제적 분배를 문제 삼지 않고도 진보를 표방할 수 있는 다른 언어, 즉 정체성 정치가 그 자리를 대체하게 되었다. 다른 하나는 도덕적 후퇴다. 케이헌의 지적처럼 자유주의는 본래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 그리고 도덕적 향상이라는 세 지주 위에 서 있었다. 그런데 20세기 자유주의는 전체주의와 싸우는 과정에서 자신의 도덕적 지주까지 함께 버렸다. 옳은 삶의 방식이 하나뿐이라는 확신이 전체주의를 낳았다고 보았기에, 어떤 도덕적 이상도 유일하게 옳은 것으로 내세워서는 안 된다고 물러선 것이다. 그러나 그 대가로 자유주의 자신도 무엇이 좋은 삶인지에 대해 말할 수 없게 되었다. 도덕을 말하지 않는 자유주의가 남긴 공백에 들어앉은 것이 바로 정치를 도덕으로 대체하는 대문자 이론이었다.

 

따라서 대문자 이론의 대안이 자유주의라는 저자의 처방이 옳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자유주의인가라는 물음은 여전히 남는다. 후퇴의 두 측면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 대문자 이론이 물러난 자리를 채우는 것은 자유주의가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냉소일 것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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