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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3.4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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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발렌타이데이의 로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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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번의 유래

누구나 알다시피 벌은 집단생활을 한다.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꽃의 꿀과 화분(花粉)을 옮기는 벌은 태양이 떠있는 동안에는 그 활동을 멈추지 않는다. 사람들은 흔히 부지런한 생명체에 벌과 개미를 비유하곤 하지만, 정작 벌들의 슬픈 사연은 모르고 있다.
벌은 태생적으로 체내에서 ‘젤라토닉마그네슘화인’이라는 물질을 분비한다. 인은 공기 중에서 발화하고, 마그네슘 역시 열이 가해진 상태에서는 공기와 산화반응, 발화 현상을 일으킨다. 두 가지 성분이 특이하게 조합된 이 물질은 벌의 체내를 흐르는 체액의 온도가 일정한 점을 유지 또는 하회하는 상태에서는 아무런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다.
벌의 생체 순환기는 상당히 단순하여, 계속해서 날개를 움직이고 몸을 움직이는 상태에서는 마치 엔진의 냉각장치처럼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벌이 움직이지 않을 때는 그 냉각장치도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여 대기의 온도와 비슷한 수준으로 벌의 체온은 오르거나 떨어지게 된다.
다행히 벌이 활동하지 않는 밤 시간에는 대기의 온도가 낮기에 아무런 반응이 없지만, 대기의 온도가 높은 여름의 낮에는 벌이 계속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체내의 온도가 급상승하여 젤라토닉마그네슘화인이 체온에 반응하고 만다. 이리하여 벌은 그 자리에서 자기 몸 속의 발화로 인해 타 죽어버린다. 실제로 벌이 저 화학반응으로 인해 죽을 때를 적외선 카메라로 촬영해보면 희미한 불꽃이 일어난다고 하며, 죽은 벌 중에는 종종 속이 텅텅 빈 놈도 보게 된다고 한다. 벌도 생명체. 힘이 떨어지면 자연히 움직일 수 없고, 계속해서 바쁘게 일하는 동료와는 달리 쉬어야만 하겠지만, 그 휴식은 잠시가 아닌 영원한 것이 되고 만다.
산업혁명 기는 노동자들이 휴식을 거의 꿈도 꿀 수 없을 만큼 바쁜 시기였고, 그때 쉬는 날이 있다는 것은 그의 실직을 의미했다고 한다. 자신의 옆에서 항상 일하던 동료가 어느 날 보이지 않을 때, 고용주에게 그의 행방을 물으면 고용주는 밉살스럽게도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Bee burn."

Bee Burn

얼마 전 한 블로그에 올라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비번의 유래’에 관한 이 이야기는, 물론 픽션이다. 그러나 이 픽션에 우리는 감히 웃을 수가 없다. 노동하고 싶어서, 인간답게 살고 싶어서 자신의 몸에 불을 그어야만 하는 이들과 함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이야기는 우스개라기보다는 차라리 선동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류재을이라는, 얼굴 한번 본적 없는 사람의 죽음에 처음으로 거리에 섰던 시절에는, 더 이상 누군가의 이름 뒤에 열사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만취 상태에서 TV 카메라를 향해 ‘왜 노동자만 죽어서 투쟁해야 하는데? 기자들도, 노무현이도 분신 한 번 해봐라’고 외치던 두산중공업 노동자의 모습을 보면서도, 앞으로 이런 일은 없을 줄 알았다. 집회에서 전태일 열사에게 동지들을 그만 데려가라고 울부짖던 한 학생 동지의 발언을 들으면서, 이제는 제발 그러했으면 하고 빌어야 했다.

발렌타인데이의 풍경

지난 2월 14일 아침. 평소 알고 지내던 모 단체의 행사에 참가 중이던 나는 사무실 사람들로부터 김진균 선생님의 부음을 들었다.
점심을 먹으며. 박일수 동지의 분신 사망 소식과, 현대 중공업 노동자 유석상 씨의 자살 소식, 사회보험노조 박동진 동지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늦은 저녁을 먹으며. 9시 뉴스에서 실종 4개월 만에 사체로 발견된 여대생의 소식과,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퇴근길에 실종된 30대 여성이 얼굴이 난자당한 채 사체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수많은 죽음. 같지도 다르지도 않은...

저녁을 먹고 친구를 만나러 거리에 나섰을 때. 초콜릿 바구니, 장미, 향수, 그리고 순백의 곰 인형. 발렌타인데이의 토요일 저녁, 누군가의 죽음을 떠올리는 내가 로마니인지, 아님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선물 바구니를 들고 빠른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이 로마니인지 잠깐 어지러웠다. PS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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