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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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4.4.4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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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4특집-최원.hwp

[회원기고] 국민발의, 국민소환으로 민중민주주의 건설하자!

최 원 | 회원
이번 탄핵정국에 대응하기 위해 채택된 사회진보연대의 세 가지 구호(‘신자유주의 반대/노동권 쟁취’, ‘전쟁반대/파병반대’, ‘국민발의, 국민소환, 민중민주주의 건설’)는 현 시기 우리 운동의 일반적 투쟁 방향의 핵심을 훌륭하게 요약한다. 나는 이 글에서 ‘국민(시민)발의, 국민(시민)소환, 민중민주주의 건설’이라는 구호가 갖는 의미를 간략하게 논하고자 한다.

정치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낮아지고 있다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또 일시적인 반전이 있다 할지라도 점점 하락하는 투표율, 대중 운동의 왜소화 등은 비단 한국에서만 일어나는 일도 아니다. 하여 어떤 학자들은 우리가 결정적으로 ‘포스트-정치적’인 시대로 들어선 것이 아니냐는 주장을 펴기도 하지만, 발리바르의 진단은 사뭇 다르다. 그는 이를 ‘포스트-정치’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하에서 체계적으로 조직되는‘반-정치’(antipolitics)의 일반화 문제로 사고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반정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현 자본주의가 맞닥뜨린 위기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지금 자본에게 가장 골치 아픈 문제는 ‘착취 불가능한 인구’ 혹은 ‘잉여인구’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라는 문제다(한국에서도 실업자 급증은 더 이상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 경제논리로만 따지자면, 이렇게 잉여인구를 방치하는 것이 자본에게도 비합리적일 것이다. 하지만, 이들 잉여인구를 ‘노동력’으로 포섭하는 일은 자본에게 쉽지 않은 일이 되었는데, 왜냐하면 이들은 ‘죽은 노동’이 아닌 ‘산 노동’, 즉 자신의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는 노동이기 때문이다.

지금 자본주의는 이 정치적 권리들을 수용할 능력이 없다. 포섭할 수 없다면, 철저히 배제해야 한다. 따라서 이들 잉여인구의 목소리를 정치적 발언권에서 배제하고, 극단적 폭력과 빈곤이 지배하는 게토 안에서 이들을 서서히 죽어가도록 방치하는 ‘반정치’가 자행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단지 구조조정, 노동의 불안정화 및 극단적 폭력/전쟁의 조직화 뿐 아니라, 민주주의의 파괴, 정치의 위기를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실로 자본의 계급투쟁이 노동권 축소, 무장한 세계화, 민주주의의 파괴로 나타나고, 이에 대한 다중(multitudes)의 투쟁이 노동권 쟁취, 전쟁반대, 새로운 민중민주주의의 건설로 나타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부르주아 정치의 총체적 위기는 인민주권의 파괴와 민중 배제적 정치의 극단화로 나타난다. 의회는 외양상으로조차 인민주권의 관철장소이길 멈추고 신자유주의 정책입안을 위한 행정부의 일개 부속기구로 전락한다. 원래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핵심은 삼권분립을 통한 권력남용 방지와 의회를 통한 인민주권의 제한된 허용에 있었고, 이 때문에 억압적 국가장치에 대한 의회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서의 차별성이 부각되어 왔다. 하지만 이제 의회가 과연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가가 의문시되는 것이다. 예상되는 우리당의 개헌저지선을 넘는 거대 여당화는 아마도 이런 문제를 가속시킬 것이다.

국민발의, 소환권 쟁취와 이를 통한 민중민주주의 건설은 탄핵정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현재 투쟁방향의 핵심적인 축을 이루어야 한다. 일각에서는 이를 한시적 이슈로 축소하거나, 대의제 민주주의를 단순하게 형식적으로 ‘보완’하는 직접 민주주의의 제도 도입 문제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국민발의, 소환권을 제도화한 일부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예를 통해 그것의 실효성을 의심하는 주장이 나오기도 하지만, 이는 기본적으로 남한 자본주의의 ‘반주변성’을 간과하는 것이다. 국민발의와 국민소환권 쟁취투쟁은 ‘인민주권’과 새로운 민주주의의 상으로서 ‘갈등적 민주주의’라는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신자유주의적 반정치 하에 형해화된 ‘시민권’을 재창출하기 위한, 장기적 전망을 갖는 운동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04. 03. 26-
주제어
정치 민중생존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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