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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5.4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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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읽기 연재를 다시 시작하며

김진호 | 근현대사 세미나팀
사회진보연대에서 근현대사 논의를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이는 모임을 재출발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화두 중 하나다.
좌파들이 근현대사에 관한 논의에 약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만일 그것만이 문제라면 어차피 잘 모르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세미나를 하는 것보다, 차라리 적당한 강좌를 택해 함께 듣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실제로 지금 근현대사와 관련해서는 어느 정도 규범적인 틀이 확립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우리가 문제를 느끼고 있는 대상이 다름 아닌 저 규범적인 틀이라는 게 우리 논의의 출발점이다. 처음 얼마간은 막연한 느낌에 불과했지만, 몇 차례 논의를 거치면서 그것이 단순한 느낌만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근본적인 문제는 저 규범적인 틀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전통적 표상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 근현대사를 논하는 데 갑자기 마르크스주의냐를 묻는 이도 있을 것이다. 이게 문제가 되는 것은, 근현대사 특히 일제 시대의 대중운동을 논함에 있어 마르크스주의를 우회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피 흘리지 않고 떼어낼 수 없는 '1파운드의 살'과 같은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특히 일제 시대를 대상으로 하는 거의 대부분의 작업에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나름의 견해가 (암묵적으로 때로는 명시적으로) 전제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이 견해들이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 살펴보자. 흔히 일제 시대를 바라볼 때 '민족혁명'과 '사회혁명'이라는 대당 ― 물론 이것만 있는 건 아니지만 이것이 가장 대표적이고 또 문제적인 대당이다 ― 을 채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서 공산주의자들이 후자만을 중시한 나머지 전자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물론 이때 전제되어 있는 것은 양자가 일종의 선후관계 또는 '단계'를 이룬다는 관점이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이런 관점에 동의하기 어렵고, 따라서 이런 관점에 입각하여 수행되는 작업을 '안심하고' 읽을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작업도 있지만 거기에도 군데군데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있긴 마찬가지다.
다음으로 조선공산주의 운동을 얘기하면 항상 나오는 '분파주의'라는 문제가 있다. 확실히 공산주의 운동이 처음 태동했던 당시 이른바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갈등을 시작으로, 조선공산주의 운동의 역사는 분파들 간의 갈등의 역사였다. 그런데 이를 평가하는 대부분의 논의에는 '단결'이 좋은 것이라는 가치판단이 깔려 있다. 하지만 분파 문제가 조선운동의 전역사 안에서 거의 일종의 '불변수'처럼 등장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비단 조선운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은, 우리로 하여금 단결이 무조건 옳다는 관념을 한번쯤 재고해 보게 한다. 물론 갈등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지금까지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단결보다는 오히려 갈등이 더 '정상상태'에 가깝지 않은가? 만일 그렇다면 갈등을 비난하고 그것을 금지하는 것보다는, 왜 그런 갈등이 끊임없이 발생하는지를 분석하고 그것들을 '정세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조건을 구축하는 것이 더 옳은 방법이 아닐까? 또한 이런 갈등들이 제거되면서 오히려 정치적인 활력을 상실했던 것이 현실사회주의, 또한 20세기 후반의 자유주의의 역사이고 보면, 단순히 단결을 앞세우는 것이라고 대안인 것 같진 않다. 게다가 90년대를 거치면서 '차이' 개념을 둘러싼 깊이 있는 철학적 논의들이 검토되어 왔기 때문에, 이런 논의들에 의지해 기존의 규범적 평가를 한번 반성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일단 두 가지 예를 들었지만, 이 정도로도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전달될 수 있을 것이다. 즉 기존의 근현대사 연구를 90년대 동안 진행한 다소 추상수준이 높은 이념적·전략적 혁신 작업들과 대질시킴으로써, 전자에 전제되어 있던 문제설정들을 정정하는 한편 후자를 역사적 구체성에 의해 마찬가지로 정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이 쉬운 작업은 아니다. 특히 대부분의 성원들이 근현대사 논의 전반을 파악하고 있지도 못하며, 그렇다고 이념적·전략적 혁신에 관한 추상적 논의에 통하고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러니까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조건이다. 이를 넘어서는 한 가지 방법은 각각의 작업을 별도로 진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가뜩이나 바쁜 우리에게 너무 많은 시간을 요구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 논의를 진행하다 보면 전자를 위해서라도 후자가 필요하고, 그 역도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길을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양자를 '단락'시킴으로써 이론을 역사에 의해 반성하고 역사를 이론에 의해 반성하는 편이 낫다. 우리가 하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올해 초부터 재개한 논의에서는, 우선 추상수준이 높은 논의를 예비적으로 다뤘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이행'이란 문제설정 및 그를 둘러싼 논의들에 대한 검토, 이른바 '당-형태'에 대한 역사적 반성 및 이를 위한 코민테른 역사의 간략한 우회, 분파 문제를 대안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데 많은 시사점을 주는 '대중들'(masses, multitude)의 문제설정에 대한 토론, 그리고 이것들과 따로 떨어질 수 없는 계급동맹과 통일전선에 관한 논의 등이었다.
그에 이어 강재언, {일제하 40년사}(풀빛), 임경석, {한국 사회주의의 기원}(역사비평사), 이균영, {신간회 연구}(역사비평사) 등의 단행본을 검토하였다. 다음 번 논의에서는 신주백,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1920~45)}(아세아연구사)를 검토할 예정이고 20~40년대 대중운동 및 당운동(재건운동을 포함하여)을 살펴보는 것으로 근대사를 일단락 지을 생각이다.
본격적인 기고는 다음 번부터 하는 것으로 하고, 여기서는 앞으로 계속 문제가 될 '당' 문제와 관련하여 지금까지 논의된 바를 일차적으로 정리하는 것으로 하겠다. 관련하여 아래의 논의는 아직 정리 중이며, 따라서 필자 개인의 주관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는 점을 우선 밝혀 둔다.
마르크스주의의 역사 안에서 당 관념에는 크게 두 가지 핵심 요소가 있다. 첫 번째는 마르크스에게서 연원하는 보편-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이라는 관념과 연관된다. 여기서 보편-계급이란, 기존의 부르주아적 보편성에 의해 특수성('계급')으로 간주되는 집단이, 특수성이 아닌 보편성의 견지 그러니까 '보편성의 실패'의 희생자이자 기존의 협소한 보편성에 맞서 진정한 보편성을 위해 투쟁하는 세력으로서 스스로를 구성해 내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과정을 매개하는 조직이 바로 '당'이다. 따라서 이때의 '당'에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정치정당 뿐만 아니라, 노조랄지 평의회 등의 각종 '대중조직'이 다 포함된다.
두 번째는 레닌에게서 기원하는, 이른바 '지적 차이'와 관련된 관념이다. 이것의 핵심은 다른 편으로 정치에서 지적 역량이 갖는 (결정적인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불가결한 역할 때문에, 지배 이데올로기로부터 이탈한 지적으로 훈련된 분파 ― 여기에는 피지배계급으로부터 충원되는 이른바 '유기적 지식인'도 포함된다 ― 의 종별적 역할과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마 이쪽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당 관념과 더 가까울 것이지만,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당 관념은 기본적으로 이 두 요소가 '결합'된 결과다.
후자와 관련하여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이 관점에서 볼 때 '당'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지적 역량'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식 일반'이 아니라 계급대중들의 능동화와 관련된 '실천적 지식'인 한에서, 이는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는다. 우선 문제는 우리가 원하는 지식의 '성격'이 아주 독특하다는 데 있다. 그것은 '역사'라는 매우 복잡하고 불균등한 대상을 가질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하게는 역사에의 직접적 개입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실로 '전례 없는' 지식이고 처음부터 주어질 수 없으며 그것이 생산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바로 이렇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지식이 어떤 '조건' 위에서 '생산'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사실 어떠한 이론적 진리도 그 '실험'의 조건들 밖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데, 마르크스주의의 경우 이 조건들은 오직 계급대중운동과의 '교통'일 뿐이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모든 지배질서가 각자의 방식으로 제도화해 온 지적 불평등은, 한편으로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해 포섭된(이로부터 이탈한다 해도 그것이 하루아침에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지식인과 다른 편으로 지식으로부터 체계적으로 배제된 대중들을 차별적으로 재생산함으로써 (실험의 조건으로서) '교통'을 근본적으로 제약한다(물론 이 제약이 부분적으로 극복되었다 하더라도 곧장 실천적 지식이 생산될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따라서 이 제약이 극복되고 적합한 조건을 확보하지 못하는 한에서 양자는 오히려 서로를 질곡 할 수 있다. 예컨대 지식인들은 그/녀들의 '선의'에도 불구하고 대중들 안에서 지배이데올로기를 전파하거나 엘리트주의를 재생산할 수 있다. 반대로 계급대중들은 지배이데올로기와 엘리트주의를 거부하는 과정에서 아예 '지식 일반'에 대한 거부 및 지식인들의 고유한 지적 작업에 대한 억압으로 나아갈 수 있다(물론 현실은 이보다는 훨씬 복잡할 것이고 우리는 이 복잡성을 구체적으로 분석해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 입각하여 조선공산주의 운동에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이른바 '분파주의' 및 엘리트주의라는 평가를 반성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설을 세워볼 수 있다. 즉 분파주의나 엘리트주의는 나쁜 것이라는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만일 그런 것이 있었다면 어떤 이유 때문에 그랬던 것인지를 위의 관점에 입각하여 따져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조사 과정에서 필요에 따라 이 가설적 관점을 정정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 가설의 핵심은 (분파주의를 단순히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분파주의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식으로 발생했는지를 원인에 의해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사고함으로써 계급대중들과 혁명적 지식인들이 교통할 수 있는 호조건, 혹은 최소한 이러한 교통을 제약한 요인이 무엇인지를 해명하고 싶고, 이는 오늘날 운동과 관련해서도 큰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렇듯 우리의 관심은 근현대사를 매개로 이념적·전략적 혁신 작업을 더욱 구체화하고(물론 이런 관점에 입각하여 정리된 근현대사 내용을 습득하고), 이를 통해 현재 우리가 처한 문제들을 사고하는 데 도움을 얻는 것이다. 앞으로 이어질 논의에 회원들의 많은 참여와 관심을 당부한다. PS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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