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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5.4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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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철학에세이-최원.hwp

왜 더 많은 민주주의 인가

사회주의노동자신문(준)의 비판에 답하여

최원 | 회원, 미국 뉴스쿨대학 철학박사과정
사회주의노동자신문(준)(이하 사노신)은 탄핵정국에서 '민주주의'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던 일체의 입장을 비판하면서, 민주주의 운동은 이미 남한사회에서 실효성을 다했다고 선언한다. 즉, 친노무현적인 '탄핵반대, 민주수호'를 외쳤던 일부 민중진영은 말할 것도 없고, '국민발의권, 국민소환권 쟁취 투쟁'(이하 국민발의권 투쟁)을 주도했던 세력들도 소시민적 운동의 한계에 갇혀 있기는 매한가지라는 것이다. 사노신은 "노동자의 계급독재" 수립만이 부르주아적 한계를 넘어 "민주주의를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이들이 말하는 '노동자의 계급독재'라는 것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또 다른 표현임은 논란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 나는 근본적으로 또 이론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왜 더 이상 우리 투쟁의 목표가 될 수 없는지를 해명하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개념의 해체를 위해서는 '더 많은 민주주의'가 핵심적인 쟁점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한다.

1.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개념의 역사
우리가 알고 있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단 번에 그 의미가 확정된 개념이 아니다. 마르크스가 최초로 이 말을 사용했던 것은 1848년 정세를 분석하면서 쓴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이라는 텍스트에서였다. 하지만 이 때 마르크스가 사용한 이 용어는 이행의 일반적 경로를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48년 당시 중간계급 및 농민계급을 노동자 계급의 편에 가담시키기 위해 수립했던 전략에 붙여진 이름이었을 따름이다.
이후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라는 말은 마르크스의 저작에서 한동안 실종되었다가, 1871년 파리 코뮌을 분석한 "프랑스 내전"에서 다시 등장하기 시작한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라는 말은 이제 이행의 일반적 경로를 표시하는 명실상부한 '개념'이 되며, 공산주의를 실천적으로 예상하기 시작한다. 이는 더 이상 정세에 따라 활용할 수 있는 여러 전략들 중 하나가 아니라, 계급적 세력관계나 정치적 조건과 상관없이, 이행을 위해서라면 반드시 취해야 할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창적인 정치적 형태(노동자들의 지배계급으로의 조직화 혹은 생산자들의 통치)라는 의미를 부여받는다. 이렇게 마르크스가 규정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노동계급의 대중조직들의 실존을 전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가 여기서 당에 대한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는 점(혹은 더 정확히 말한다면, 하지 못했다는 점)을 기억해 두자(나는 이 지점으로 돌아올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개념에 대한 또 다른 혁신은 레닌과 마오에 의해 행해졌다. 혁신의 요점은 그들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공산주의를 향한 장기적인 이행으로서 계급투쟁이라고 사고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이행의 첫 번째 국면이 아니라 (공산주의 이전 단계로 이해되는) 사회주의 시기 전체와 경향적으로 일치시켰다는 점에 있다. 이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수립은 계급투쟁의 상대적인 종식이 아니라 그것의 새로운 시작으로 이해된다. 마오는 특히 이러한 관점에서 '계속혁명' 개념을 가공하고, 관료화된 당에 대한 계급투쟁으로서의 문화대혁명을 주도했다. 하지만 레닌과 마오는 모두 당과 국가 사이의 관계를 규명하는 데에 실패한다. 그들은 당이 국가외부에 있어야 하는지, 아니면 당이 국가내부에 있어야 하는지를 명확히 하지 못했다. 혁명을 지도하고 국가를 점차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당이 국가외부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당이 국가외부에 있다는 관념은 현실적으로 당이 권력의 중심이며, 또 더욱이 그럴 필요성이 있다는 사실을 은폐할 수 없다. 그들은 각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계급투쟁'이라는 또 다른 항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마찬가지의 곤란을 겪어야 했다. 특히 마오는 사회전체를 분할하는 계급투쟁이 당을 관통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당의 일괴암적 통일성'(스탈린)의 신화와 거리를 취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계급투쟁이 당의 내부에 "집적"되고 그곳에서 최종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는 관념(계급투쟁에 대한 당의 독점 관념)을 보존할 수밖에 없었다.

2.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근대적 '주권' 개념의 아포리
이러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개념의 역사 속에서 우리가 전진적으로 발견하는 문제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독재'로 전도되는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예컨대 스탈린으로 환유되곤 하는) 어떤 특정한 지도자의 오류라는 문제를 훨씬 초과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 역사 전체는 바로 이러한 난제를 둘러싸고 구성되었으며 또 최종적으로 위기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곤란이 마르크스주의를 최종적인 위기로 몰아넣었다는 사실만큼, 그것이 종별적으로 마르크스주의에만 고유했던 곤란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나에게 사태는 오히려 반대로 보인다. 이러한 곤란은 (프랑스 혁명 등에서 유래하는) 근대적 주권 개념의 근본적인 아포리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역으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개념이 겪어야 했던 고통으로 보인다.
여기서 이러한 고통을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 고통의 본질을 드러냄으로써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이론가는 놀랍게도 마르크스주의 사상가가 아닌, 칼 슈미트(Carl Schmitt)라는 20세기 초의 우익 정치철학자다. 유사점은 상당히 분명하다. 슈미트는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삼권분립'이라는 자유주의적 정치 형태를 거부했던 이론가였다. 파리 코뮌을 분석하면서 마르크스 또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자적인 정치 형태의 성격을 정의하기 위해 입법부와 행정부의 분립을 거부했다는 점을 상기하자. "코뮌은 의회적 기관이 아니라 집행부적이며 동시에 입법부적인 활동적 기관이어야 한다." 여기서 마르크스가 시도했던 정식화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대의 민주주의'에서 '직접 민주주의'로 가는 정치형태 상의 이행으로 정의하는 것이었는데, 그는 여기서 직접민주제를 형식주의적으로 '헌법적 원리'에 따라 사고하지 않고, 대신 그것을 노동계급의 대중적 조직들의 '실존'에 기초시켰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 그가 겪는 곤란이 또한 분명해진다. 만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노동계급의 대중조직들에 기반한 '직접민주주의'로 규정한다면, '혁명의 전위'로서 당은 정확히 그것의 '예외'로 남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코뮌'을 분석하고 있을 때, '혁명당'에 대해 완전한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정확히 여기에 연유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주의적인 '주권의 분할'을 거부할 때, 중심적인 문제로 부상하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근대정치의 삼권분립은 단적으로 '대중의/대중에 대한 공포'(이는 스피노자 철학의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로, 대중이 지도자에 대해 갖는 공포와 대중이 지도자에게 불러일으키는 공포를 양가적인 방식으로 동시에 지칭한다)를 중화시키기 위한 근대 부르주아 정치체제의 핵심적인 장치다. 그것의 기능은 대중을 국가권력에서 체계적으로 배제하면서, 대중과 지도자간의 갈등을 분할된 주권적 권력들 사이의 상호견제로 대체하는 것이다. 따라서 삼권분립을 거부할 때 전면화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대중의/대중에 대한 공포' 자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슈미트는 '주권'에 관한 상당히 독특한 사고를 전개했던 이론가다. 그가 착목했던 지점은 다름 아닌 '예외'였는데, 그에 따르면, 자신의 존립이 위협받는 '예외적 상태'에서 국가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인격적 단일성(혹은 '의지'의 단일성)을 갖는 '주권자'가 국가적 결정(decision)을 독점할 수 있는 초법적(超法的) 지위를 부여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에게 '주체 없는 주권' 혹은 '인격화된(personified) 주권자 없는 주권'이란 형용모순이며, 결과적으로 주권을 '분할'한다는 관념도 매우 부조리한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개인individual은 분할불가능indivisible하다). 근대의 (자유주의적인) '민주적 주권' 개념은 나눌 수 없는 주권을 나눔으로써 주권 개념 그 자체를 부패시켰다고 비판하면서, 그는 두 가지 대안을 제시한다. 첫 번째 대안은 (영구혁명 기관, 공적 안보 위원회, 소비에트 등의 매개에 의한) '인민 독재'(popular dictatorship)를 수립하는 것이고, 두 번째 대안은 모든 결정권을 '헌정의 보호자'인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에게 완전히 이양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선 우리는, 이 두 가지 현상이 실존했던 역사적 사회주의 안에서 모두 나타났었다는 점을 아프게 확인해 둘 필요가 있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독재' (당독재 및 개인숭배)의 모순은 근대적 주권 개념의 두 극단으로서 '인민주권'과 '국가주권'의 모순의 전위된 출현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당이 국가외부에 존재해야 한다는 관념을 레닌과 마오가 끝내 포기하지 못하고, 그것을 포기하려고 했을 때조차 사회전체를 분할하는 계급투쟁을 해결하는 최종 장소로 당을 상정할 수밖에 없도록 그들이 강제되었다는 점... 또 스탈린을 그토록 비판해 마지않았던 그람시조차 공산당을 '현대의 군주'(인격적 단일성!)로 비유하면서, 끝내 '당을 조직적 중심으로 하는 국가의 사회화'라는 스탈린적 테제의 단순한 거울상에 불과한, '당을 조직적 중심으로 하는 사회의 국가화' 테제를 제출할 수밖에 없었다 점('윤리적 국가'로서의 공산주의)을 상기한다면 사태는 더욱 분명해진다. 결국 당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개념의 제거할 수 없는 모순으로 나타났던 것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근대 주권개념의 아포리 ―'인민주권'(인민독재)과 '국가주권'(지도자 독재) 간의 아포리―를 진정으로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슈미트는 이후 자신이 제안했던 저 두 가지 대안이 모두 곤란한 것이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것들은 공히 '전체'의 복종을 필요로 하지만 이는 기본적으로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칸트를 패러디해서 말한다면, 인민 전체를 인민 전체에 복종시킨다는 생각은 '공허'하고, 인민전체를 하나의 지도자에 복종시킨다는 생각은 '맹목적'이다. 그리하여 그는 문제를 전위시킨다. 그는 국가와 인민이 아니라 국가와 국가 사이로 자신의 이론적 지반을 옮긴다.
논의를 최대한 빨리 진행시키기 위해, 많은 설명을 생략하고 직접 우리의 논의에 관련된 부분으로 들어가자. 슈미트의 문제설정의 핵심은 인민이 국가를 기초한다는 관념 (이른바 '사회계약'의 그 모든 담론들이 끊임없이 반복하는 허구)을 결정적으로 포기하는 것이다. 그는 대신 국가를 기초하는 '기원적 법률적 행위'(original juridical acts)를 '영토장악(Landnahmen)'의 행위라고 규정한다. 그러므로 그가 여기서 특화하는 것은 '인민독재'(혹은 '민주적 독재')가 아니라 '국경의 독재'(dictatorship of borders)다. 이러한 이론적 개조가 '인민독재'와 그것의 필수적인 '보충'(supplement)으로서 '지도자 독재'의 초월적이고 신학적인 성격을 마침내 근절시킬 수는 없겠지만, 그 초월성을 국가의 경계선 위로 전위시킴으로써 경계선 안쪽에서 권력의 '세속화'의 조건을 마련할 수는 있을 것이다 (초월성의 내재화). 따라서 종교적이거나 그렇지 않은 분쟁들을 국가권력 아래로 종속시키는 일은 그 국가의 민족적 성격을 전제하는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것을 가능케 하는 민족국가간 국경체계의 전지구적 일반화를 전제하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개념이 민족국가간 체계를 극복했던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을 전제했으며, 그 모든 국제주의의 강조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일국 사회주의'를 실천했었다는 점을 아프게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요컨대 '민주적 독재' 개념('민주주의를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사노신)을 가능케 하는 것은 '국경의 독재'이며, 이것이 '민주주의를 위한 반민주적 조건'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여기서 슈미트의 보수적인 결론까지 공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제 우리의 투쟁목표가 단순히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주장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분명하게 깨닫는 것이다. 나는 두 가지 방향에서 고민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첫째, 국경의 민주화는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변혁운동의 핵심 과제다. 더욱이 신자유주의 하에서 국경이 반민주적 배제와 폭력 (국가의 예방적 대항폭력)을 조직하는 중심적인 장소/비장소로 드러나고 있는 오늘, 국경의 민주화라는 이슈를 생략한 채 변혁운동을 전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거의 망상에 가깝다. 결과적으로 그리고 원칙적으로, 민족국가 단위에서의 혁명은 이제 더 이상 좌파의 정치적 목표가 될 수 없다. 변혁운동은 필연적으로 대항-세계화를 지향한다.
둘째,―이 점이 현재 우리의 논의에서는 보다 핵심적이다―슈미트는 '인민주권'과 '국가주권'의 대립 속에서 자신의 사고를 전개했지만, 또한 그는 끊임없이 다음과 같은 곤란한 문제와 대면해야 했다. 즉, 국가는 그에게 단일한 '주체'로 쉽게 사고될 수 있었던 반면, 인민(people)은 최종심에서 그렇게 사고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슈미트는 마키아벨리보다는 보댕(Bodin)과 홉스 같은 이론가를 선호했는데, 여기에는 상당히 그럴듯한 객관적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사실 마키아벨리는 인민 혹은 다중(multitude)이 '주체'가 아니라는 사실, 더욱이 그것이 '인격적 단일성'을 지닌 주체는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역설한 이론가였던 것이다. 그런데 인민을 단일한 주체로 사고할 수 없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바로 인민이 다수의 분파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고, 그에 따른 존재론적 다면성을 지닐 수밖에 없는 (비)존재로 남게 되기 때문이다. 고로, '인민독재'라는 개념은 오로지 이러한 다면적 '인민'(데모스)을, 국경과 경계선들에 의해 표시되고 한정되는 또 다른 개념의 '인민'(에스노스)으로 환원하는 한에서만 가능한 개념이다. 이러한 환원이 최종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가? 근대의 역사 전체는 그렇지 않다고 우리에게 일러준다. 우선 계급적대와 성적 차이가 그러한 인민적-주체적 '통합'의 불가능성을 표시하고, 지적 차이를 둘러싼 다면성 (대중적 '의견들'의 "압축 불가능"하게 복수적인 측면―스피노자)이 또 다른 쪽에서 그것의 불가능성을 표시한다.
하지만 동시에 다음과 같은 점을 놓치지는 말자. 이상과 같은 '국가주권'과 '인민주권'의 아포리는 정치의 대상 그 자체를 이루는 하나의 영속적인 '문제'로 제기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통합도 없는 인민이란 '자연상태'라는 사회계약론적 허구를 이번에는 과거가 아닌 미래를 향해 투사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사회계약론을 비판하면서 시민사회 내에 자연상태가 여전히 지속된다는 주장을 한 바 있다. 우리는 이제 이것을 전도시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만일 자연상태가 시민사회 내에 필연적으로 지속된다고 한다면, 역으로 시민사회란 항상 시작되어 있어야만 할 것이고 항상 지속되고 있어야만 할 것이다. 즉 '시민사회 없는 자연상태'란 또 다른 허구에 불과하다. 요컨대, 국가란 변혁되고 전화될 수 있으며 심지어 파괴될 수도 있다 (즉 이러저러한 역사적 국가들은 태어나고 성장하고 또한 몰락한다). 하지만 '국가일반'은 영원하다. 따라서, 문제는 국가의 소멸이 아니라, 그것의 영속적인 민주화인 것이다.
다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관한 레닌과 마오의 사고로 돌아가 보자. 그들은 정당하게도 국가와 당의 두 항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계급투쟁'을 참조했다. 하지만 그들은 동시에 혁명당의 초월적인 위치를 포기하는 데에 이르지는 못했다. 이제 우리가 이러한 위치를 포기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나는 여기서 머뭇거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이제 우리가 문제의 윤곽을 조금씩이나마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독재'로 전도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여전히 핵심적인 것은 민주정을 포함한(!) '그 모든 정체의 진리'로서 민주주의의 문제설정을 발본화하는 일이다. 진정한 공산주의적 이행은 이러한 민주화를 위한 대중적 실천들을 가장 극단적으로 확장시킬 수 있는 종별적인 정치적 형태를 발명하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해 질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 형태는 '합의'나 공동체적 '동일성'(identity)의 제도화가 아니라 (마키아벨리적인 의미에서) '갈등'의 제도화를 추구하는 것, 또 차이들의 삭제나 융합(fusion)이 아니라 차이들의 '묶음'(binding)으로서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것 속에서 찾아질 가능성이 많다. 아마도 이를 통해 우리는 분할된 주권적 권력들 사이의 상호견제나 국가 간 상호견제가 아니라, 다중을 구성하는 분파들 사이의 상호견제를 통한 새로운 갈등적 민주주의의 상을 가공할 수 있을 것이다(이는 분명 대중들 자신의 '지적 능동화'와 무엇보다도 '욕망의 전화'를 동반할 때에만 가능해질 전망이다).
혹자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이러한 정치형태에 여전히 우리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라는 이름을 붙여줄 수는 없는가? 우선 우리는 더 이상 '계급모순'만을 말하고 있을 수도 없거니와, 더 나아가서 계급을 하나의 동일성으로 사고하지 않기 위해서, 즉 계급을 하나의 주체로 사고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 이름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곤란하다는 점을 시인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것이 곧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라는 개념을 통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제껏 발전시켰던 그 모든 문제의식들의 단순한 소멸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더욱이 그들이 행했던 그 모든 역사적 실험들과 모험들의 결과를 분석치 않고 우리가 그 어느 곳으로도 갈 수 없다면, 비록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개념이 자신의 생명을 다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의 유령은 우리가 새로운 민주주의를 사고하려고 하는 그 모든 곳에서 여전히 출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3. 결론: 더 많은 민주주의를 향하여
우리는 혁명을 원한다. 사노신 동지들만이 혁명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노신 동지들도 인정하듯, 우리의 혁명이 부르주아 민주주의보다 더 적은 민주주의가 아닌 더 많은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이어야 한다면, 이제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만이 그것을 보장할 수 있다고 간단히 선언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위한 사유와 실험의 지난한 노력을 대체하려고 들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는 지난 세기 우리가 겪었던 혁명의 '실패'를 그 어떤 식으로도 반성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국민발의권 투쟁을 조직했던 그 어떤 사람들도 이 제도의 도입이 곧 진보를 의미할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제도는, 그렇다, 제도일 뿐이다. 제도가 그 자체로 민주주의를 보장한다는 것은 부르주아지의 신화다. 마르크스가 파리 코뮌을 분석하면서 말한 것도 바로 이것이 아니겠는가? 대중들의 능동화없이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 여기까지 나는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반대로 제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주장하는 역 편향으로 흘러서야 되겠는가? 계급투쟁을 비롯한 그 모든 대중들의 투쟁은 제도 밖에서 일어나지 않고, 항상 제도들을 쟁점으로 해서만 일어난다. 제도들은 따라서 그 모든 민주적 이행의 축이며, 혁명은 이러한 이행의 가장 급진적인 형태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국민발의권 투쟁은 내가 보기에 두 가지 점에서 비판받을 수 있는 것 같다. 첫째, 그것은 자신의 이름이 웅변적으로 보여주듯이 '국민'이라는 말과 일정한 타협을 행함으로써 '국경의 민주화'라는 과제를 일정하게 보류했다. 이 때문에 나는 그간 '국민발의권' 대신 '시민발의권'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이 투쟁이 현 정세에서 중심적인 하나의 경계선을 민주화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둘째, 국민발의권 투쟁은 노동대중의 실천으로까지 크게 확산되지는 못했다. 이는 그 만큼 이 투쟁을 조직했던 사람들의 역량이 부족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그렇게 비판하면서, 막상 우리는 이 투쟁이 이제 1개월을 갓 넘은 신생아에 불과하다는 점을 쉽게 간과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이 아직까지 강력한 대중투쟁으로 나타나지 못했다는 점을 들어 그 투쟁 자체의 유효성을 의심하는 것은 하나의 엉뚱한 비약에 불과하지 않은가?
이제 문제는 국가에 대한 통제권이라는 것을 노동계급을 비롯한 다양한 대중들의 '권리'로 인식하고, 대중들 스스로가 자신의 '시민권'을 주장하며 나설 수 있는 방향으로 이 투쟁을 조직하는 것이다. 최저임금 현실화 투쟁, 이라크 파병철회 및 철군 투쟁 등을 국민발의로 조직해 내는 일이야말로, '제도'를 대중적 실천의 쟁점으로 만들어내는 가장 빠른 길일 것이다. 이 속에서, 우리는 '더 많은 민주주의'를 국가에 요구해야 할 뿐 아니라, '더 많은 민주주의'란 도대체 어떻게 우리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되고 실현될 수 있는지를 대중적인 방식으로 배워나가야 할 것이다. 따라서, 나는 사노신 동지들을 비롯한 많은 좌파 동지들에게 '국민발의권 투쟁'을 제안한다. 투쟁 속에서 동지들과 함께 만날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PS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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