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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4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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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외할아버지 이야기

박문칠 |
우리 외할아버지 이야기

『문익환 평전』, 김형수 지음, 실천문학사 2004

‘책과 나’ 코너에 한 평전을 소개하고자 한다. 평전의 주인공은 문익환 목사이고, 그 분은 나의 외할아버지이다. 지금부터 우리 외할아버지 이야기를 꺼내보고자 한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그러니까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1994년 몹시도 추운 1월, 한신대 대학원 캠퍼스. 할아버지 빈소에 앉아 있는 것은 정말로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림솜씨 좋은 이모가 할아버지 영정 사진으로 만든 걸개그림, 문상 온 한석규, 박중훈 같은 작은 삼촌의 영화배우 후배들을 구경할 수 있었던 것, 수백수천개의 만장을 앞세운 장례행렬이 치룬 노제 등. 어느 것 하나 신기하지 않은 것이 없는 자리였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광경은 뭐니뭐니해도 끝없이 이어지는 조문객의 행렬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정말이지 끝도 없이 몰려들었다.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5일장 내내 연인원 3만 명의 사람들이 왔다 갔다고 한다. 어린나이에 나는 할아버지 삶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길래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애도를 한단 말인가 ?”
사실 나는 우리 할아버지에 대해서 잘 모른다. 캐나다에서 89년에 귀국한 후에, 돌아가신 94년까지 5년 정도의 시간 밖에 함께 하지 못했고, 그나마 함께 했던 시간 중의 대부분을 할아버지는 거리에서 그리고 감옥에서 보내셨다. 민주화 운동과 통일운동을 하셨고, 감옥을 제집 드나들 듯 하셨으며(6차례, 총12년간의 옥살이), 북한에도 갔다 오셨다는 것. 조금 더 나이 들어서는 그분을 PD가 아닌 NL로, 그러니까 내가 배운 잣대대로 그분을 ‘분류’하기에 이르렀다.
아마도 일반인들이 갖고 있는 지식도 이 범위를 크게 벗어나진 않을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분의 성향, 그분의 종교 때문에 우리 회원들에게도 어쩌면 생소한 존재일 수도 있다. 하지만 5년에 걸친 자료수집과 오랜 취재 끝에 나온 이번 평전 덕분에 나는 이런 피상적이고 단편적인 인식에서 벗어나, 좀더 할아버지의 삶에 가까이 다가가고, 그분과의 뒤늦은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다. 나의 가족사와 대면할 수 있었고, 우리 가족이 받아들인 기독교와 대면할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우리의 질곡 많은 현대사와 대면할 수 있었다. 이런 마주침의 기회를 다른 회원들에게도 제안해보고 싶다.

외할아버지는 1918년에 태어났지만, 가족 이야기를 하자면 18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구한말 기울어가는 나라의 운명을 걱정한 네 가문의 선비들은 141명의 식구들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로 집단 이주를 감행한다. 그들은 땅을 일궈 밭을 만들고, 신식 학교를 세워 민족의 등불을 밝힐 인재를 양성하였다. 일제강점이 시작되면서 북간도 명동촌은 독립운동가들이 오고가는 중요한 저항의 거점으로 떠오르게 되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윤동주, 문익환과 같은 인재가 배출된다.
이런 기원을 가진 문씨 집안이다 보니, 어려서부터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고, 민족의식을 배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하겠다. 평전에 의하면, 가족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결사체처럼 움직였다고 한다. 실제로 지금도 명절 때 식구들이 모이면 자연스레 정세토론이 오고가고, 식사기도의 주제로는 어지로운 세상에 대한 근심, 민족의 통일에 대한 간구가 항상 빠지지 않는다. 100년 전의 가풍이 오늘날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도 가족 안에서 이러한 삶의 방식과 가치관을 배우게 되었다. 우리 할아버지의 삶 역시도, 이런 가족사 안에서 읽었을 때 흥미로운 발견을 많이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새로이 가족을 꾸려가거나, 대안적인 공동체를 꾸려가려는 동지들에게 좋은 영감을 많이 주는 텍스트가 아닐까 싶다.

우리 할아버지의 삶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기독교다. 우리 가족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은, 1908년 명동 촌에 신식학교를 세울 때였다. 학교의 선생으로 초빙한 한 젊은 청년이(민족교육을 위해서 신민회에서 비밀리에 파견된) 신문명, 신교육과 더불어 기독교를 들여왔던 것이다. 명동에 교회가 세워졌고, 그 교회는 마을 구성원들이 모이고, 배우고, 민족의식을 깨우치는 공간이 되었다. 북간도에 뿌리내린 기독교는 오늘날과 같은 기복신앙의 모습이 아니라, 인민을 깨우치고, 조직하는 주요한 거점이었던 것이다. 우리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그리고 작은 할아버지가 모두 목사가 되신 것도 그것이 나라를 되찾는 유력한 수단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기독교의 모습과 오늘날 기독교의 모습 사이에는 심한 간극이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교회의 모습은, 서울역의 “예수천국 불신지옥” 혹은 시청 앞 광장에서의 “국보법 사수! 반핵반김”에 더 가깝다. 평전에는 이런 간극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있다. 한국 기독교는 구한말부터 일제시대까지 학교와 의료시설을 세우기도 하고, 또 사회를 향한 중요한 발언들을 항상 잊지 않았다. 혼탁한 세상에서 교회가, 기독교인이 희망과 비전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책임의식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 할아버지와 같은 많은 지식인들이 교회를 통해서 더 많은 인민들과 융합하려 노력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이후 공산당의 박해를 받게 되었다. 해방 무렵 북간도에서는 중국공산당에게, 해방 후 북한에서는 소련군에 의해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온갖 고초를 겪게 되고, 또 남하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남한의 교회는 공산당에 대한 피해의식으로 극심한 반공/반북주의를 띄게 되고, 진보적인 전통도 거세되기에 이른다.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기독교의 모습은 여기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토양 위에서, 419혁명과 전태일 분신과 같은 우리 현대사의 사건들은 기독교인들에게 큰 충격이자 자극이 되었다. 우리 할아버지를 비롯한 많은 기독교인들은 교회의 역할에 대한 자성을 촉구하기 시작하였고, 그 후, 한국교회는 온전한 대중운동이 모두 거세된 척박한 남한 땅에서 민주화 운동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내 나름대로 풀이를 해보면, 우리 할아버지의 삶에는 어떤 ‘예외성’이 있다. 그는 보통의 사람들이 갖지 못한 가족사를 든든한 배경으로 갖고 있었고, 그가 속한 교회는 보통의 교회가 지니지 못한 사회적 책임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질곡 많았던 20세기를 온몸으로 부딪히며 살아내었던 분이었다. 할아버지는 59세 때 본격적으로 민주화운동의 최전선에 나서게 되신다. 뒷짐 지고 앉아 있을 수도 있는 원로의 나이지만, 젊은이들보다 더 강렬한 에너지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활동을 하셨다. 우리 운동 속에서 이런 경우는 정말이지 흔하지 않다. 우리 역사가 이러한 나이 지긋한 운동의 지도자를 쉽게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번 따져보자.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일제시대 의롭게 살아갔던 대부분의 좌익들은, 해방과 더불어 월북을 하거나, 전쟁 중에 사망하거나, 빨치산 토벌과정에서 사라져 갔다. 존경받을만한 그 연배의 지도자들은 모두 죽거나 북에 있는 셈이다. 그리고는 가장 반동적이며 동시에 가장 천박한 자들이 이 땅의 지도자로 둔갑하였다. 남한의 운동은 이렇듯 큰 단절을 겪은 후, 419세대, 386세대 등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자생적 운동을 재개하기는 하였지만, 20세기를 의롭게 살아낸 큰 어른을 지도자로 가질 수는 없었다. 이렇게 본다면 그의 존재는 정말 ‘예외적’인 것이다. 그는 일제시대, 분단과 한국전쟁, 그리고 엄혹한 독재에 대한 기억과 경험을 간직하고 있다. 우리 민족이 20세기 동안 겪은 수많은 좌절과 아픔을 한 평생에 다 겪은 셈이다. 할아버지는 그 시간을 통과하면서 언제나 역사의 아픈 순간들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셨다. 절친한 벗 윤동주의 죽음을, 또 장준하의 죽음을, 그리고 수많은 열사들의 이름을 항상 가슴 깊숙이 새겨 넣으셨다. 언제나 역사의 어두운 순간들을 똑똑히 기억함으로써, 그는 새로운 거듭남, 민중의 부활을 예비하셨던 것이다. 그것이 할아버지가 역사를 사는 방식이었다. 척박한 우리의 역사 속에서 그가 보여준 남다른 삶. 그 진귀함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흠모하고 존경한 게 아니었을까 ? 10년 전 보았던 그분의 조문 행렬은 아마 이런 이유 때문에 길게 늘어졌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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