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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4.10.4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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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 '민족'개념의 관계망

은정태 |
이제는 부담스러운 민족

한국 근대사에서 민족은 국가와 동일시되어 사용하고 역사의 대주체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다. 전통 왕조국가를 극복하고 수평적 국가 구성원리로 작동하도록 하였고, 잃어버린 국가를 대신하여 민족해방운동의 주체가 되었고, 소아를 넘어선 대아로서 개인을 포섭했다. 민족이 국가를 대신하였기에 그 통일과 단결을 위한 국가주의적 경향의 원천으로 이용되었고, 개인을 포섭했기에 개인은 민족에 의해 타자화되었다. 이제 민족이 짊어진 짐을 조금 덜어내어 나누어 가질 필요가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글은 근대 민족의 개념이 지배 담론으로 작동한 것은 여타 담론과의 경쟁에서 승리하여 대체한 결과였음을 밝히고 민족 개념의 주변어라 할 수 있는 왕조, 국가 등과의 관계를 살펴 한국 민족주의의 구성물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동양’의 시대를 뚫고 나타난 ‘민족’

한말 ‘민족’ 개념은 ‘동양’과 ‘인종’이라는 개념과 경쟁하면서 형성되었다. ‘동양’은 근대 일본이 서양과 접촉하면서 서양과 다른 어떤 것으로서의, 그렇다고 중국과는 다른 존재로서 동양의 대표자를 자임하는 일본이 창안한 용어였다. 그리고 ‘동양’은 ‘동양학’, ‘동양문화’라는 말로 구현되었다. ‘동양’ 개념이 조선사회에서 뚜렷한 영향력을 보인 것은 1897년 말부터 서양제국주의 국가에 의한 중국의 분할 가능성이 대두되면서이다. 독일의 교주만 점령, 러시아의 여순과 대련 조차가 이어졌고, 1900년 의화단 사건을 계기로 북경의 함락과 이에 뒤이은 러시아의 만주 점령은 인접한 조선에 심각한 위기감을 던졌다. 어떻게 이 상황을 돌파할 것인가? 동양국가의 단결만이 살 길이었다. 한중일 삼국은 인종과 문화에서 동일한 존재로서(同文同種論)이자 동일한 운명공동체(東洋三國鼎足論)로서 백인종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에 동양의 황인종 국가들은 서로 연대하고 단결함으로서 동양 평화 즉 동양 각국의 독립국가 유지가 가능하다는 논리였다. 때문에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했을 때 황인종 국가 일본의 승리에 대한 염원으로, 군자금을 기부하고 전쟁 물자 운송 부역에 참여하는 일군의 사람들이 있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장지연(1864~1920)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은 동양 평화를 깨뜨리는 일본에 대한 비판이었고, 1909년 안중근(1879~1910)이 옥중에서 작성한 ??동양평화론??에는 과거 러일전쟁 발발시 일본의 승리를 염원했음을 상기하기도 했다. 당시 언론에서는 보종(保種)을 통해서만 보국(保國)이 가능하다는 논리가 적극 제기되었다. 동양삼국연대론의 뿌리가 일본의 아시아주의에 드리우고 있었지만, 조선의 입장에서는 조선 하나만이 아니라 동양삼국의 공동대응만이 독립 유지의 방도라는 기대가 작용했다. 즉 민족국가를 넘어선 ‘동양’을 단위로 한 지역질서 안에서 조선의 독립을 사고한 것이다. ‘민족’ 개념의 공간적 위상(개인-가족-민족이라는 동심원 구조의 정점에 위치)은 오늘날과 달리 제한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보종보다는 보국이 우선으로 보종은 후일의 문제이며, 보종을 주장하는 자는 매국노와 다름 아니다는 신채호의 주장은 ‘동양’담론에 대한 비판으로 국가가 절대적 지위에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왕조를 대신한 ‘민족’

한국에서 ‘민족’개념의 본격 출현은 1905년 을사조약과 1907년 군대해산과 고종의 양위를 전후한 시기이다. 대한제국 외교권의 박탈은 국권의 상실을 의미했고, 고종의 양위는 사실상 조선왕조의 사망을 선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왕조국가의 소멸이라는 위기에 직면한 언론과 지식인들은 왕조와 국가를 분리하여 대응하였다. 왕조의 붕괴를 곧 국가의 붕괴로 받아들인 지식인들은 친일파로 나타났다. 반면 소멸 위기에 직면한 왕조를 대신하여 민족을 발견하고 민족국가에 주목한 지식인들은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왕조질서의 봉건주의와 사대주의를 강하게 비판하고 민족을 단위로 한 국가 공동체의 유지 가능성을 모색하였다. 왕조를 대신한 민족 개념은 지리?관습?풍속?정치?경제 등의 공통성과 연관되어 문화적 기반이 강조되었다. 1908년 신채호(1880~1936)는 ??독사신론??(讀史新論)에서 “국가의 역사는 민족의 소장성쇠의 상태를 주장한 것”이라며 역사서술의 대주체로서 ‘민족’을 설정하고, 부여족 중심의 한국사 체계를 구축하였다.
민족공동체의 위기 속에 민족적 단결이 강조됨으로써 언제부터 우리는 하나였는지, 그리고 위기와 혼란을 어떻게 극복함으로써 민족적 동일성을 유지해왔는지를 찾았다. 그 과정은 민족영웅 찾기의 다름 아니었고, 을지문덕, 연개소문, 이순신이 부활하였다. 이들은 위기에 처한 공동체를 구원한 존재로 강한 국가의식의 소유자로 부각되었다. 개인과 가문의 이해에 머물던 봉건적 ‘소아(小我)’가 아니라 국가의식으로 무장된 근대적 ‘대아(大我)’로 구성되는 민족이 이상화되었다.
확대된 민족 담론에는 사회진화론의 영향 아래에서 제국주의적 열망을 담고있었다. 당시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와 구분되어 약소민족의 자결권을 주장하는 이데올로기로 이해되기도 했지만, 그 구분은 개념상으로만 존재할 뿐이었다. 민족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실력양성을 통한 부강한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고, 그 결과에 동반되는 제국주의화 가능성은 회피할 수 없었다. 우리도 제국주의 국가가 되어 아프리카나 중국을 식민지로 한번 개척하자는 주장은 희망에 불과하였지만, 현실의 민족적 요구 지향은 희망과 연결된 회로구조 안에 있었다. 만주분할론, 만주독립군기지 건설운동은 단군조선, 고구려 및 발해라는 역사적 경험을 부각하여 만주를 민족적 열망의 발현처로 배치하였다. 서양의 침략적 행위를 ‘민족제국주의’라고 규정한 인사들은 민족주의와 제국주의의 긴장과 동일한 지평을 이해하고 있었던 셈이다.

소멸한 국가를 대신한 민족

1910년 대한제국의 소멸과 식민지화를 계기로 민족은 이제 국가를 대신하거나 국가와 동일시되었다. 식민지 통치질서의 구축과 식민지 근대가 내면화되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지식인들에게 국가는 미래의 실현태로 유보되었고, 독립운동의 주체이자 미래 국가건설의 주체인 민족을 유지하는 것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사학자 박은식(1859~1925)은 식민지 상황에서 물질적 영역인 국가는 소멸되었지만, 정신적 영역인 국혼(國魂)을 잃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국가는 되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국혼은 민족문화의 기반인 언어·풍속·문학·역사 등에 담겨 있으며, 그 가운데 역사는 핵심이었다. 1915년 ?한국통사??(韓國痛史)는 한국사의 뼈아픈 경험을 각인시킴으로써 독립운동에의 참여와 지지 및 민족정신의 보존을 기대한 것이었다. 이것이 그가 역사를 연구한 이유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식민지 근대가 내면화되고 독립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을 때 지식인들과 기업가는 새로운 민족 관념을 드러냈다. 즉 대일본제국 안에서 한국인들의 지위향상과 경제적 성장 기회 포착 등 당면 이익에의 관심이었다. 1920년 중반의 자치론과 1930년대 농촌진흥정책 당면이익 획득론과 일제의 만주 진출에 따른 농업이민과 기업가들의 진출 열망은 민족 개념에 국가가 완전히 배제되었음을 보여준다. 1930년대 후반 내선일체가 강조되는 가운데 민족차별 없는 일본 ‘국민’화를 전망하며 일본인과 동일한 권리를 주장하며 절정에 이른다.
일제시대 만주의 독립운동가들과 식민지 지배 아래에 있던 지식인들의 민족 개념에는 국가의 소멸이라는 환경이 반영되어 있다. 민족이 국가를 대신한 점에서는 동일하였지만, 민족을 더더욱 절대화하거나 혹은 민족의 절멸을 선언하는 양극단의 모습으로 외화된 것이다. 해방 후 한국 민족주의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된다. 식민지 공간에서 민족의 절멸 가능성을 경험함으로써 개인들의 민족에 대한 무한한 충성의 공간이 열리게 된 것이다. 이후 민족주의는 동양, 국가, 가족, 개인의 짐을 짊어지고 고되지만 찬란한(?) 여정을 거친다.PS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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