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2023 가을. 18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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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의 사법적 해결은 왜, 어떻게 실패하는가

김보화, 『시장으로 간 성폭력: 성범죄 가해자는 어떻게 감형을 구매하는가』 서평

김유미 | 페미니즘 팀장, 조직실장

1. 책 소개

 
대통령 선거 하루 전이자 세계 여성의 날인 2022년 3월 8일,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SNS에 “성범죄 처벌 강화, 무고죄 처벌 강화”라는 열두 글자를 올렸다. 청년 세대 표심을 노린다는 한 줄 공약의 일환이었다. 해당 공약이 표 결집에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 확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실제 효과를 따지기 전에, 성범죄와 무고죄 양자에 대한 처벌을 ‘동등하게’ 강화해야 한다는 슬로건의 등장은 그 자체로 의미심장하다. 성폭력에 관한 현재의 대중 정서를 집약하여 보여주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1990년대 들어 한국 여성운동은 성폭력 사건을 연달아 공론화하며 성폭력 문제에 대한 법제도 개선과 인식 변화를 꾀했다. 이른바 ‘반성폭력 운동’이다. 그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흐른 지금, 성폭력을 둘러싼 담론이나 피해자·가해자가 놓인 현실은 반성폭력 운동 ‘이전’과는 달라졌다. 그러나 그 변화가 어떤 변화인지, 반성폭력 운동이 목표로 했던 바에 얼마나 가까워진 것인지는 찬찬히 따져 볼 필요가 있다.
 
김보화의 『시장으로 간 성폭력』은 이러한 변화의 의미를 묻는 책이다. 저자는 반성폭력 운동 이후 30여 년 동안 한국 사회가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법적 절차’ 중심으로 이동했다고 말한다. 성폭력에 대응할 수 있는 법제도를 마련하는 것은 반성폭력 운동의 주된 목표 중 하나였다. 1994년 시행된 ‘성폭력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성폭력특별법)은 반성폭력 운동의 문제의식을 상당 부분 반영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후에도 성폭력에 관하여 수많은 법과 제도가 제·개정되어 왔다. 이제 한국 사회에서 성폭력은 ‘피해자가 숨겨야 하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명백한 범죄 행위로 규정된다. 점점 더 많은 성폭력 피해자가 법제도를 통한 적극적인 대응을 원하고, 기꺼이 감행한다.

문제는 이러한 성폭력 피해자의 용기가 법적 절차 속에서 좌절을 거듭한다는 점이다. 특히 이 책에서 주목하고 있는 바는, 2010년대를 경유하며 성폭력 사건 가해자의 법적 대응 양상이 매우 공격적이면서도 체계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성폭력 가해자를 주 고객으로 삼는 ‘성범죄 전담법인’의 등장과 깊은 연관이 있다. 성범죄를 전문 분야로 내세우는 변호사들의 안내에 따라 피해자에 대한 역고소가 급증했고, 가해자 사이에 각종 감형 기술과 사례 공유가 이루어졌다.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여성운동 단체의 활동가들은 이러한 현실을 맞닥뜨리며 충격, 무력감, 분노 등의 감정을 느껴야 했다. 책의 서문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지난 30여 년 동안 한국의 여성운동은 사회적 안전망으로서 성폭력 피해자의 권리보장을 위한 법적·제도적 변화를 요구했고, 많은 부분 진일보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돌아보니 법과 정의의 이름으로 성폭력 피해자들이 무고의 가해자가 되어 감옥에 가거나, 심지어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금전적인 보상을 하게 되는 일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무엇이 어떻게, 왜 변해가고 있는 것일까?”

과거 한국 사회에서 성폭력이란 ‘피해자의 인생을 망친 사건’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았다. 순결을 잃은 여성에 대한 낙인 때문이었다. 반성폭력 운동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바꾸고, 성폭력은 피해자에게 흠결이 생기는 문제가 아니라 가해자의 범죄 행위임을 분명히 하려 했다. 그렇지만 성폭력에 관한 엄벌주의적 입법이 이루어지면서 성폭력 고발이 도리어 ‘가해자 인생을 망칠 수 있는 사건’으로 인식되는 역전이 발생하기도 했다. 진짜 피해자와 가짜 피해자를 엄격히 가리고, 성범죄와 무고죄의 처벌을 모두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런 정서를 반영한다. 그리고 가해자는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무죄 또는 감형이라는 결과를 끌어내고자 한다. 

저자 김보화는 2006년부터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활동했으며 이화여대 여성학과 석·박사과정을 거쳐 현재 젠더폭력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이 책은 저자의 박사학위논문을 수정·보완한 것으로, 반성폭력 운동 활동가가 실제 성폭력 상담과 지원을 하면서 느끼게 된 변화로부터 출발한 현장 기반 연구다. 저자는 성폭력 피해자 17명·여성운동단체 활동가 6명·변호사 8명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성폭력 판결문(2018~2020)과 법적 자료, 온라인 매체에 드러난 담론을 분석했다. 반성폭력 운동의 최전선에서 겪는 생생한 사례들을 소개하여 현실에서 성폭력 사건에 관한 법적 절차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 이 책의 강점이다. 
 
 

2. 가해자의 전략 변화

 

1) 가해자의 대응은 어떻게 달라졌나

포털 사이트에 ‘성폭력’ ‘성범죄’ 등의 단어를 검색하면 이 분야를 전문으로 한다는 법무법인이나 변호사 광고 링크가 수십 개 등장한다. 웹사이트는 변호사의 이력뿐 아니라 성범죄 무죄·기소유예·감경을 위한 전략과 함께 구체적인 성공 사례를 선전한다. 책에 따르면, 성범죄 전담법인이 감형과 무죄의 기술을 개발하면서 성폭력 가해자의 법적 대응 양상은 변화하고 있다. 책의 두 번째 장, “힘드시죠? 감형 컨설팅 해드립니다”에 등장하는 가해자의 대응 양상은 다음과 같다. 

먼저, 가해자 측이 무죄 입증이 어렵다고 판단될 때 택하는 전략은 변호사를 통한 ‘젠틀한’ 합의 제안이다. 초범일 경우 피해자의 ‘처벌불원’은 주요한 감경요소이자 집행유예 주요참작사유가 된다. 과거에 가해자 측이 피해자를 찾아가 무리한 합의를 시도하여 발생하는 ‘2차 피해’가 문제 되는 경우가 많았고, 현재 ‘2차 피해 야기’는 양형 가중요소로 다루어진다. 따라서 성범죄 전담법인의 변호사는 피해자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노력과 함께 매우 정중하고도 조심스러운 태도로 “법원의 손해배상액보다 조금 많게” 합의금을 제시한다. 수임료나 합의금의 액수를 높게 지불하더라도 합의에 성공하면 감형이 되기 때문에 가해자의 만족도가 높다고 한다. 

감형을 위해 ‘진지한 반성’을 증명하는 방법도 개발되고 있다. 2019년에 선고된 하급심 137건의 성범죄 판결 중 3분의 1에 달하는 판결이 피고인의 반성 및 뉘우침을 양형의 요소로 고려했다. 이에 따라 문제 될 소지가 없는 ‘완벽한 반성문’을 대필해 주는 유료 사이트가 활성화되어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여성운동단체 기부와 후원을 반성의 증거로 제출하는 ‘노하우’가 확산되었다는 사실이다. 재판부가 “피고인이(…) 한국성폭력상담소에 정기후원금을 납부하면서 다시는 이와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는 점”을 판결문에 언급하며 이를 감경요소로 인정하는 일이 많아졌다. 이에 여성운동단체는 “그것은 ‘반성’이 아니다”라며 기자회견을 열고 가해자의 일방적인 후원·기부를 감경요인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단체 후원금이 늘어도 마냥 반가워할 수 없이 후원자에게 연락해 의도를 꼼꼼히 살피는 등 신경 쓸 일이 늘어났다고 한다. 

반성의 증거뿐 아니라 가해자의 삶의 궤적은 재판 과정에서 일종의 스펙처럼 제출된다. 주변인의 선처 요구를 통해 가해자의 사회적 유대관계가 분명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봉사활동이나 헌혈 같은 전력을 강조하기도 한다. 다른 한편, “고도비만 등 외모 콤플렉스로 인하여 주로 인터넷상에서 타인과 교류하던 중 경솔한 판단으로(…)”라며 가해자의 행위를 이해하기 위한 서사를 발명하기도 한다. 해당 사건으로 직장에서 해고되었다는 점을 강조하여 충분히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사건 이후 심리 상담이나 음주 치료를 받고 있다는 증명자료를 통해 문제 해결의 의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상의 대응은 성폭력 행위가 존재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경우, 감형이나 집행유예를 위한 전략이다. 그러나 해당 사건에 대해 무죄를 주장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판단될 때 성범죄 전담법인은 피해자에 대한 비난을 서슴지 않는다. 심지어 일부 변호사는 증인심문 자리에서 일부러 “피해자를 막 몰아세우면서” “피해자를 괴롭혀 주”는 전략으로, 승패를 떠나 피고인을 만족시키기도 한다.  또한 민·형사상의 역고소(무고죄, 모욕죄, 명예훼손죄, 허위사실유포죄, 손해배상청구 등)로 피해자를 위축시키는 경우가 늘고 있다. 가해자는 “점점 공격적 양상으로” “(성범죄 전담법인)상담을 받고 오면, 일종의 패키지처럼” 피해자나 피해자의 가족, 지인을 고소하고 나선다. 

성폭력 가해자 측의 법적 스킬과 솔루션은 전담법인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몇몇 온라인 커뮤니티(카페)를 통해 적극적으로 공유되고 있다. 카페에서 법적 노하우, 성공 사례를 공유하고, 각종 서류를 포함한 유료 서비스(반성문, 고소장)를 연결해 준다. 그뿐만 아니라 엄격한 회원자격 관리로 가해자가 안정감을 느끼고 유대를 형성할 수 있도록 한다. 저자는 이러한 커뮤니티 활동을 통해 공감, 위로, 조언이 공존하는 가해자 연대가 만들어지고, 범죄자로서 성폭력 가해자가 아니라 남성의 경험과 억울함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남성성이 집단으로 형성되고 있다고 분석한다.
 

2) 성범죄 전담법인의 확산 요인

성범죄 전담법인이 빠르게 확산한 배경으로 저자는 두 가지 요인을 짚는다. 하나는 세계화 시대 법률시장의 개방과 경쟁 심화 속에서 성범죄 관련 법률서비스라는 ‘틈새시장’이 개척된 것이다. 한국의 법률서비스 시장은 GATT, WTO, 한미FTA의 협상 과정에서 개방을 요구받았고, 이러한 흐름과 맞물려 2008년도에 미국식 로스쿨 제도가 도입되었다. 수적으로 증가한 변호사가 생존 경쟁에 뛰어들면서 공익보다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으로서 로펌 문화가 형성되었다. 

왜 하필 성범죄 가해자 변호가 새로운 틈새시장이 되었을까? 일선 변호사들에 따르면, “형사사건은 사람이 구속되고 감옥에 가는 일이니까 돈을 많이 쓰는 사건이어서  많이들 하고 싶어 하지만, 검찰과 법원 출신이 아니면 경쟁력이 없는 상황에서” 연차가 낮거나 지방대 로스쿨 출신의 변호사가 “소위 3D 업종인 성범죄자 변호”를 공략했다고 한다. 또한 “성범죄나 이혼”은 사안의 특성상 “내가 아는 사람한테 가기 창피”하고, “인생에서 사건이 하나인 분이 대부분이니까” 광고가 유일한 접근 경로가 되어 관련 법무법인이 홍보에 거액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성범죄 전담법인이 확산된 다른 하나의 요인은, 성폭력을 둘러싼 법제도 변화에 대응하는 가해자와 로펌의 전략이다. 2000년대 중반 아동성폭력 사건이 연달아 언론에 오르내리면서 대중적 공포와 분노에 힘입어 가해자에 대한 엄벌주의적 조치가 도입되었다. 형량의 상향뿐 아니라 전자발찌, 성충동 약물치료(화학적 거세), 신상공개와 같은 일련의 제도가 그것이다. 변호사 인터뷰에 따르면 그중에서도 취업제한 명령과 연계된 신상공개제도가 가해자가 변호사를 찾는 주요한 이유가 되고 있다. 현재 법원에서 형 확정과 함께 취업제한 명령을 선고받은 자는 최대 10년간 교육, 사회복지, 의료기관, 경비업, 장애인 기관에 취업이 제한된다. 저자는 이러한 엄벌주의적 법제도의 도입 이후 가해자가 “자신의 가해행위를 더욱 필사적으로 부정하거나 축소하게 되고, 이를 조력하기 위한 가해자 변호의 중요성이 점차 강화”되는 것으로 이어졌다고 말한다. 
 

3)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가

전담법인을 통해 무죄나 감형을 “구매”하는 성폭력 가해자의 사례를 보며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성폭력 엄벌주의의 역설”이다. 일반적으로 극단적인 성폭력 사건이 이슈가 되면 처벌을 강화하여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진다. 그러나 성범죄자에 대한 엄벌주의적 제도가 본격적으로 도입·적용된 2010년대 이후의 흐름을 평가해 보면, 이것이 실제로 피해자에게 도움이 된다고 확언하기는 어렵다. 앞서 살펴본 대로 가해자가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더욱 필사적으로 자기를 방어하고, 법망을 피해가려고 거액을 지불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또한 형량이 높아지면서 재판부가 법 적용을 한층 더 보수적으로 따지며 피해자로서 자격을 심사하는 경향이 발생하기도 한다.
 
피해자의 권리 보장을 위한 조치가 가해자 측 법률시장의 확장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한 인터뷰에서는 2013년부터 피해자 국선변호사제도가 시행되자 가해자의 위기감이 커지며 사선 변호인의 조력을 찾거나 홍보하는 경우가 늘었다고 지적한다. 또한 같은 해에 친고죄가 폐지되었는데, 친고죄 폐지에 따라 피해자와 합의하더라도 고소 자체는 취하되지 않는 상황이 된 것도 가해자가 적극적인 법률 대응을 하도록 만드는 데에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현실은 성폭력에 대한 엄벌주의적 접근법의 역설뿐 아니라 ‘성폭력의 법적 해결’ 자체의 역설에 관해 성찰하도록 한다. 
 
성범죄 전담법인의 확산 배경을 논하며 저자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강력 범죄인 강도, 살인, 방화와 달리 유독 성폭력 범죄에서 가해자를 위한 변호업계가 빠르고 광범위하게 시장화될 수 있었던 조건은 무엇일까?” 저자는 한국 사회에서 성폭력 범죄의 ‘법적 위치’를 지적한다. 아직 한국 형법은 강간 성립 여부를 판단할 때 심한 폭행·협박이 있었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최협의설’(법조문을 가장 좁게 해석하는 것)을 채택하고 있기에, 이에 근거한 개입 여지가 상당히 있다는 것이다. 
 
또한 “성폭력 사건의 해결은 피해자, 가해자 개인 간의 법적 다툼이라기보다 해당 사회의 인식과 흐름에 영향을 받으면서 구성”된다는 책의 분석대로, 성폭력 사건 해결의 법적 과정은 성폭력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 수준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미투 운동에 대한 거부감,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불신, 가해자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억울함을 들어주는 담론이 사회적으로 팽배하고, 이것이 수사·재판 절차에도 작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폭력 관련 재판은 “복불복”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재판부에 따라 결과에 큰 차이가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성폭력에 대한 남성중심적 해석이 법적 절차 속에 반영되고, 이에 기대어 성범죄 전담법인이 시장을 빠르게 확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강력 범죄와 달리 ‘유독 성폭력 범죄’에 변호사의 개입이나 의미 해석, 분쟁의 여지가 많은 배경에는 성폭력이라는 문제 자체의 특수성이 존재한다. 이는 책에서 지적하지 않는 부분이다. 성폭력이라는 문제 자체의 특수성이란, 성폭력이 다른 물리적인 폭력과 달리 끌림, 애정, 성적인 욕망, 상호 의사소통과 관련된 문제라는 점이다. 강도, 살인, 폭행, 방화 등은 행위 자체를 증명하면 범죄 사실이 분명한 반면, 성적 행위는 존재만으로 그것의 범죄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 신뢰와 동의를 기반으로 하는 성적 행위는 범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운동이 오래도록 강조해 왔듯이 특정한 말과 행동은 ‘맥락에 따라’ 성폭력으로 해석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이를 고려한다면, 형법상 강간죄의 구성 요건을 ‘폭행·협박’에서 ‘동의 여부’로 바꾸는 것은 성폭력을 둘러싼 다툼의 조건을 일부 변형할 수는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한다. ‘성적 동의란 무엇인가’라는 난제는 그대로 남기 때문이다. 성폭력 전담법인의 빠른 확대는 이처럼 모호하고 어려운 ‘성적 동의’의 맥락 때문에 발생하는 법정 다툼에 변호사 업계가 파고들어 틈새시장이 형성된 것이라 볼 수 있다. 
 
 

3. 피해자 담론의 변화

 

1) 피해자 담론은 어떻게 변했나

책의 세 번째 장, “성폭력 피해자, 법정에 서다”는 법적 절차 속에서 성폭력 피해자를 둘러싼 담론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를 추적한다. 성폭력 피해를 참지 않고 고소나 공론화로 문제제기하는 피해자의 수는 점점 더 늘고 있다. 2018년 한국에서 미투 운동이 벌어지며 해당 시기 성폭력 피해 상담이나 신고가 이례적으로 급증하기도 했다. 그러나 성폭력 고소율의 증가 추세와 달리 기소율과 구속률은 높아지지 않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피해자들은 스스로 더 강하게 ‘피해자화’해야만 법적 절차 속에서 성폭력 피해자로 인정받을 수 있다. 
 
반성폭력 운동은 성폭력을 정조나 순결의 문제가 아닌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의 문제로 개념화하기 위해 애써 왔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성적 자기결정권 개념은 법조문에 직접 명시되지는 않았으나 오늘날 판결문을 통해 성폭력의 보호법익으로 널리 인정되는 추세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최근 성폭력 재판 과정에서 성적 자기결정권은 피해자가 언제 어떻게든 “선택하여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의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성적 주체성을 갖추고 성적 자기결정권을 인지”한 성인 여성이라면 애초에 그런 상황을 피하거나 저항할 것이고, 따라서 성폭력 피해를 보았을 리 없다는 논리가 등장하는 것이다. 재판부는 피해자에게 왜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않았는지” 물으며 성폭력 상황에 복잡하게 얽혀 있는 권력관계와 여성의 사회적 위치를 무시한다. 
 
성적 자기결정권을 개인의 책임이자 능력으로 보는 논리구조는 재판부의 언어에서뿐만 아니라 피해자의 자기 서사 속에서도 확인된다.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활동가의 인터뷰에 따르면, 과거에 피해자는 ‘피해 사실’ 그 자체에 괴로워했다면, 최근에는 피해를 피하지 못한 책임과 피해 이후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책임을 스스로 물으며 괴로워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저자는 이를 “신피해자론”이라 명명한다. 
 
다른 한편, 성폭력 피해자는 수사·재판 과정에서 피해자로 승인받기 위해 고통을 만들어 내거나 감정을 관리하며 ‘재피해자화’의 과정을 겪는다. 피해자의 고통을 강조해야 가해자가 “처벌을 잘 받고” “위자료가 올라가는” 상황에서 피해자는 자신의 고통을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고, 재판 전략으로서 정신과 상담을 고려하기도 한다. 변호사는 “SNS 너무 많이 하지 마라” “너무 신나 하지 마라”라고 조언하는데, 젊은 피해자는 “내가 왜 참아야 해요?”라고 항의하는 경우도 있다. 또 다른 사례에서, 한 피해자는 재판 과정에서 신뢰받으려면 강단 있게 증언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본래의 성격과 달리 씩씩하고 당당하게 발언하려 노력했으나, 이러한 태도로 인해 재판부로부터 성폭력 피해 사실을 의심받기도 했다. 
 
가해자의 무고, 명예훼손과 같은 역고소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를 역전시키며 피해자의 대응을 무력화하는 도구가 되고 있다. 역고소에 대응하며 성폭력 사건 해결의 과정과 의미는 끊임없이 법적 영역 안으로 소환된다. 이전에 ‘성폭력 사건에 관한 공동체적 해결’의 중요한 정치적 실천으로 여겨졌던 사건의 공론화와 피해자에 대한 지지 입장 표명은 이제 ‘불법적’인 행위로 처벌되고 있다. 이처럼 성폭력 피해자는 사건의 법적 해결 속에서 수많은 딜레마를 마주한다. 인터뷰에 참여한 한 피해자는 사건 자체보다 이후의 과정을 겪으며 정신적으로 더 고통스러웠다고 증언하기도 한다. 
 

2) 피해자와 활동가가 겪는 딜레마

반성폭력 운동은 성폭력의 법적 해결 과정을 ‘성별 권력과 남성중심적 사회에 대한 투쟁의 과정’으로 의미 부여했다. 많은 성폭력 피해자는 가해자가 응당한 벌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 또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비슷한 일을 겪지 않도록 하려고, 재판 과정 자체가 사회적인 메시지가 될 수 있다는 판단으로 법적 대응을 결정한다. 하지만 법을 통한 성폭력 사건 해결은 피해자에게 양날의 검과 같다. 성폭력 해결 과정이 법적 절차로 이동하면서,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가 ‘이것이 진짜 성폭력인가’ ‘얼마만큼의 처벌이나 보상이 필요한 사건인가’를 엄격히 따지는 규칙으로 들어가게 된다. 해당 사건의 정치적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유죄인지 무죄인지, 어떤 수치(양형이나 보상 금액의 정도)로 표현될 수 있는 일인지를 다투어 ‘흥정’하는 절차에 가깝다. 
 
그래서 현실에서는 개별 성폭력 사건의 법적 대응 과정이 피해자의 회복이나 정의의 회복과 충돌하는 상황이 수없이 많은 것이다. 성폭력에 대한 법적 절차는 해당 성적 관계가 동의하에 있었던 것인지, 상호 용인될 수 있는 수준이었는지를 사건 전후 가해자·피해자의 관계나 행동을 바탕으로 ‘심사’하는 방식이 된다. 물증이 없거나 아는 사이에서 발생한 사건의 경우, 성폭력에 관한 재판 과정은 사실상 피해자의 의사 표현이 분명했는지를 하나하나 따져 묻고 심판하는 과정이 된다. 가해자의 모든 행적은 그의 무죄를 증명하는 요인으로 사용되고, 피해자의 모든 행적은 그의 무고를 증명하는 요인으로 사용되기 일쑤다. 법적 절차 속에서 피해자는 ‘피해자로 인정받기 위해’ 스스로 취약성과 지속적인 고통의 경험을 호소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피해자는 사법절차 속에서 정의에 대한 실망과 좌절을 경험하고, 법적 해결의 의미를 회의적으로 인식하게 되기도 한다. 피해자를 지원하는 여성단체의 활동가 역시 법적·의료적 지원에 집중된 지원 체계 속에서 자신의 역할에 대한 혼란과 좌절을 호소한다. 성폭력 상담을 하는 활동가는 인터뷰를 통해 “피해자가 원하는 것도 그렇고 법률지원 업무를 하다 보니까 약간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끝나는 거 아닌가 고민이 들 때가 많아요.” “엄청난 업무량을 적은 인원으로 하고 있으니까요. (…) 상담소 역시 인력이 부족해서 서비스화되는 것은 아닌가?”라며 고민을 털어놓는다.
 

3) 성폭력 사건 해결의 의미를 ‘재정치화’하자는 제안

저자는 성폭력 법적 해결 과정은 ‘성별 권력과 남성중심적 사회에 대한 투쟁의 과정’인데, 성폭력이 ‘법시장화’되면서 정치 투쟁의 장이 아니라 자본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는 문제가 되어버렸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이 “기존의 정치적인 것을 경제적인 것으로 대체하면서 제도와 인간을 재구성하는 신자유주의의 통치 전략”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책의 결론은 성폭력 사건 해결의 의미를 ‘개인적으로 경제화된 법적 분쟁’으로서가 아니라, 다시금 ‘정치적인 것’으로 이동시키자는 것이다. 저자는 성폭력 사건 해결의 의미를 결과가 아닌 투쟁의 경로로서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치유와 회복은 상처를 숨기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고, 연대를 확장하며 가능해진다. 피해자는 사건 대응 과정에서 위기를 경험하지만 동시에 상황과 조건에 맞는 투쟁의 시공간을 재창조하기도 한다. 사법적인 승패의 문제를 넘어, 법을 넘나드는 실천을 통해 다양한 선택지를 확장하고, 피해자의 경험을 정치화하는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또한 다음과 같은 실천적 제안을 하고 있다. ▲ 변호사 시장의 무분별한 홍보와 고소 남용에 대한 변호사 업계 차원의 규제와 노력(예를 들어, 대한변협의 윤리지침 적시) ▲ 성폭력 사건 해결의 법시장화에 저항하기 위한 제도 도입(예를 들어, 형사공공변호인제도) ▲ 법조인의 성인지감수성 훈련 ▲ 성폭력 역고소 수사와 판단 과정에서 ‘적극적 조치’ 고려 ▲ 성폭력 피해자가 수사와 재판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시스템 ▲ 성폭력 건 해결 과정에서 조직문화 변화를 위한 과정으로 확장 등이다.
 
 

4. 결론

 

1) 성폭력의 법적 해결과 페미니즘 정치의 불화

성범죄 전담법인의 등장으로 가해자의 새로운 대응 스킬이 개발되고 패턴화된 것은 맞지만, 책에서 소개하는 여러 상황은 성폭력 사건의 법적 해결을 꾀할 때 반성폭력 운동이 부딪혀 온 오래된 곤란과 다르지 않다. 한국여성의전화가 기획하여 2003년에 출간된 『성폭력을 다시 쓴다』라는 책 역시 성폭력 법적 해결의 딜레마와 가해자의 백래시를 비중 있게 언급하고 있다. 반성폭력 운동의 사건 공론화와 법제화 초기를 경험한 이 책의 저자는 “우리에게 법 제정은, 여성 억압을 가시화하되 남성의 언어와 이해 그리고 이에 기반한 남성중심적인 법 운용 구조 속에서 가능한 만큼만 하라는 딜레마를 안겨주었”으며, 법적 해결 과정에서 피해자는 “어떤 의미에서, 더욱 두려운 것은 성폭력 피해(first rape)라기보다 성폭력 신고의 피해(social rape)”라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고 언급한다. 또한 성폭력 사건의 공론화가 가해자의 ‘인권’을 침해한다는 주장이 활발히 제기되고 있으며, 명예훼손 역고소는 그러한 주장이 표출된 것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한국뿐 아니라 미국과 유럽을 포함한 세계 각국의 페미니스트는, 수많은 법률 개혁이 진행되었음에도 성폭력 법적 해결의 딜레마를 매번 새롭게 경험하고 있다. 미국에서 미투 운동 직후 2019년에 출간된 밀레나 포포바의 『성적 동의』는 “복잡다단한 섹슈얼리티 경험을 녹여 내거나 사회적, 개인적으로 섹슈얼리티에 대해 가치 있게 여기는 바를 담아내기에” 법적 절차는 너무 “부족”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저자는 이 때문에 페미니즘 운동의 일각에는 “성폭력 문제에 접근할 때 법에서 탈각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고 소개하며, 이는 법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법적 과정 안팎에서 피해자, 가해자, 사회 구성원에게 치료·교육·대화·타협의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시도와 연결된다고 말한다. 
 
페미니즘 운동의 역사 속에서 반복해서 지적되어 온 것처럼, 성폭력 사건의 법적 해결 과정은 페미니즘 정치와 근본적으로 불화하는 측면이 있다. 이 불화를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페미니즘 정치의 관점에서, 현존하는 성애적 관계란 아직도 상당 부분 남성중심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통상적 이성애 각본에 따르면 여성이 성적인 욕망을 적극적으로 표출하거나 성적 관계에 대한 동의의 표현을 분명히 하는 것은 장려되지 않는다. 이는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곤란한 문제를 야기한다. 남성은 성적 관계를 주도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는 동시에 여성의 성적 욕망이나 동의를 ‘알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영화·드라마부터 포르노 영상까지 성적 관계를 다루는 각종 매체는 이러한 문제를 푸는 데 도움이 되기보다 잘못된 인식을 강화하는 경우가 많다. 
 
여성의 경우에는 더욱 복잡한데, 여성 스스로 자신의 욕망에 관해 잘 모르거나, 표현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거나, ‘타인을 만족시키는 것’ 또는 ‘타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것’ 자체를 자신의 욕망으로 삼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성의 행동은 자유주의 법학이 전제로 삼는 “한 개인의 선택은 스스로 욕망을 만족시키는 데 최상의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그 개인의 판단을 반영한다”는 명제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래서 법은 여성의 욕망, 선택, 동의의 복잡성을 포착하는 데 실패한다. 
 
우리의 성적 욕망과 실천은 많은 면에서 10년 전이나 20년 전과는 달라졌다. 성별이 성적 욕망과 실천에 가하는 제약은 완화된 것처럼 느껴진다. 여성이 자신의 성적 욕망을 탐구하거나 실천할 수 있는 가능성이 늘어났으며, 많은 사회 구성원은 학교나 직장에서 ‘타인의 의사에 반한 성적 언행은 폭력이자 범죄 행위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하는 ‘성폭력 예방 교육’을 받은 경험이 있다. 이성애에 국한되지 않는 성애적 관계에 대한 사회적 수용도나 대중미디어에서의 노출도 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폭력이 줄어들기는커녕 늘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은, 페미니즘이 지향했던 ‘성적 욕망과 실천의 재구성’이 여전히 요원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성적 동의에 대한 협상을 ‘물 한잔’(또는 차 한잔)을 건네고 수락 또는 거절하는 것과 비교하는 이야기는 종종 성교육 커리큘럼의 일환으로 사용된다. 이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처럼 모두가 자신의 동의와 비동의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표현하며, 상대방의 의사 표현을 문자 그대로 투명하게 수긍하는 성적 관계가 가능해진다면 이상적일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이상적인 관계에 도달하기까지 필요한 교육과 훈련은 아주 많아 보인다. 
 
요약하면,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현실의 성폭력이란 많은 경우 ‘(남성중심적인)관계의 실패’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페미니즘 정치는 성적 욕망과 실천을 재구성하는 것을 지향하는 반면 법은 이것을 개인의 선택과 동의, 처벌에 관한 문제로 축소한다. 
 

2) 사회운동이 고민해야 할 문제들

저자는 서문에서 이렇게 묻는다. “성폭력 피해자가 국가의 도움을 받아 성폭력 사건을 법적으로 ‘해결’한다는 것은 가능한가? (…) 법적으로 승소하면 사건은 해결된 것일까? ‘해결’이란 무엇인가? 성폭력 피해에 대한 치유와 회복은 가능한 것인가? 무엇보다 현재와 같은 신자유주의의 질서하에서 성폭력 사건 해결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시장으로 간 성폭력』의 답변은, 법적 해결의 불가능성을 부분적으로 인정하면서도, 피해자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법제도 개선을 모색하고, 법적 승패를 넘어서 피해자의 주체화와 성폭력의 의미를 둘러싼 공동체의 정치적 변화를 모색하자는 것이다. (공동체란 성폭력 가해자·피해자가 속한 조직일 수도 있고 한국 사회 전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반성폭력 운동의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의미다. 
 
성폭력 사건에 사법적 대응을 꾀하는 것을 그 자체로 ‘정의’와 등치하는 경향은 위험하다. 이는 엄벌주의를 통해 성폭력이라는 사회 문제를 감축하겠다는 의도만큼이나 좌절되기 쉬운 것이다. 따라서 성폭력 사건을 해결하고자 할 때 법적 절차에만 의존할 필요는 없으며, 법적 승패를 일정 부분 상대화하며 ‘피해자의 주체화’ ‘공동체의 변화’가 중심이 될 필요가 있다는 책의 주장은 의미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반성폭력 운동의 과정에서 마주한 여러 딜레마를 다시금 반성폭력 운동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으로 돌아가 해결하자는 제안은 한편으로 무력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현실에서는 가해자의 처벌·교화, 피해자의 주체화, 공동체의 변화가 상호 충돌하거나 어떤 하나도 제대로 달성하기 만만치 않은 과제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최근의 상황을 ‘성폭력 사건 해결의 사법화’ ‘성차별적 문화를 둘러싼 정치적 논쟁의 축소’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개별 성폭력 사건 대응을 중심에 놓는 페미니즘 운동은 이러한 곤란을 필연적으로 노정한다. ‘실천적 제안’으로 제시되는 법제도 개선 방안들 역시, 자칫하면 성범죄 전담법인의 새로운 적응 전략과 함께 사법적 과정이 한없이 복잡하고 길어지는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결론적으로 ‘반성폭력 운동’에 대한 근본적인 평가와 고민이 필요하다. 사회진보연대는 2007년 한국여성운동사를 평가하며, 페미니즘 운동이 ‘성폭력’이라는 문제를 중심에 놓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입장을 제출한 바 있다. 또한 2021년도에 반성폭력 운동의 원칙·절차와는 다른 방식으로 페미니즘 공동체 윤리를 합의하기 위해 ‘페미니즘 활동가 윤리 결의안’을 합의하고 그 내용을 글로 발표하기도 했다. 이러한 시도가 담고 있는 주요한 문제의식은, 개별 성폭력 사건에 사후적으로 대응하는 과정과, 여성의 목소리를 드러내어 남성중심적 관계맺음을 재구성하기 위한 페미니즘 운동의 과정을 일정하게 분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경우 해당 사건에 충실히 대응하는 일은 필요하겠지만, 그것을 페미니즘 운동의 주요한 실천으로 삼는 순간 사건 해결과 페미니즘 운동 모두가 너무나 많은 딜레마에 처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서평에서는 성폭력의 법적 해결을 둘러싼 쟁점을 주로 다루었지만, ‘사회 문제의 법적 해결’, 즉 법을 통해 문제를 바로잡고자 하는 시도를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는 쟁점도 고민이 필요한 주제다. 예를 들면, ‘직장내괴롭힘법’의 제정이 직장 내 괴롭힘이라는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정말로 도움이 되는지, 새로운 법률 시장을 창출하는 데에만 기여하는 것은 아닌지와 같은 쟁점이 있을 수 있다. 『시장으로 간 성폭력』에서도 성폭력 사건 해결의 사법화를 ‘정치의 사법화’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고 언급하며, “‘정치의 사법화’는 문제해결의 최종적인 결정권이 법원에 주어짐으로써, 법원이 공동체 다수의 입장과 다른 판결을 할 경우 근본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고, “정치 영역과 민주적 공론 과정에서 다루어져야 할 사안이 결과에 책임을 지지 않는 소수 엘리트 법관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에서 사회 변화의 근본적인 대안이 되기 어려운” 것이라 지적하고 있다. 억울한 피해를 해결하기 위해 법률의 제·개정을 모색하는 것은 불가피한 과정일 수 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사회운동이 문제를 개인 간 법적 분쟁으로 가져가는 데에 거리낌이 없어지고 있는 건 아닌지, 이것이 사회 변화를 만들고자 하는 사회운동 진영에게 유의미한 경로가 될 수 있는지, ‘사회운동의 사법화’에 대한 성찰과 경계가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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