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2023 가을. 18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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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그리고 중국혁명: 훌륭한 질문, 서투른 대답

리처드 레비 |
 
번역: 김성균 정책교육국장
 

역자 해설

이 글은 아리프 딜릭(Arif Dirlik), 폴 힐리(Paul Healy), 닉 나이트(Nick Knight) 등 중국과 연관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가 저술한 저작을 엮어 출간한 책, Critical Perspectives on Mao Zedong's Thought (Humanities Press, 1997)에 수록된 글이다. 글의 저자인 리처드 레비(Richard Levy)는 마오쩌둥의 정치경제학 사상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저자는 알튀세르, 발리바르, 베틀렘의 연구를 참고하며 마오의 문제틀이 갖는 의의와 한계에 관해 논한다. 그리고 저자는 마오의 문제틀이 이 글의 부제처럼 “훌륭한 질문, 서투른 대답”이었다고 결론짓는다.

다만 글에서 저자는 빠르게 공산주의로 이행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는 점에서 신민주주의 조기종식,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 설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런 평가에 대해서는 숙고할 필요가 있다.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계간 사회진보연대》 2023년 여름호와 이번 호에 각각 수록된 이아림, 「환상을 버리고 마오와 중국혁명을 이해하기 위하여」 전편과 후편을 참고할 수 있다. 이아림의 글은 신민주주의는 왜 조기에 종결되었는지, 그 후과는 어떠했는지, 대약진 운동은 왜 실패했는지와 같은 쟁점을 다루고 있다. 

또, 본 글의 저자도 언급하고 있는 상하이학파 정치경제학 연구의 성과와 한계와 관련해서는 《계간 사회진보연대》 2023년 여름호에 수록된 임지섭 번역, 피어 묄러 크리스텐센, 요르겐 델만 저, 「마오쩌둥과 상하이학파의 과도기 사회론」을 참고할 수 있다. 역자는 상하이학파의 이론이 순전히 독창적인 것은 아니라고 지적하면서, 소련에서 있었던 상품화폐관계/가치법칙과 관련한 논쟁이 전개되었던 사실을 언급한다. 또한, (레비도 본문에서 지적하듯) 상하이학파는 사회주의로의 이행에 관한 실천적 결론을 도출하는 데 있어 정확한 개념 규정과 판단기준을 제시한 적이 없다는 점이 결정적 약점이라고 비판한다. 참고자료로 제시한 글과 함께 본 글을 읽는다면 마오주의에 대한 저자의 평가를 조금 더 폭넓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 () 안은 원문의 설명이며, [] 안은 역자가 추가한 설명이다. 굵게 처리된 부분은 모두 원문에서 기울임체로 강조된 부분이다.
* 독자의 편의를 위해, 원문에 영문으로 표기된 중국어 저작은 필요한 경우 한국어로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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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은 마르크스주의자였다. [그를 마르크스주의자로 보는 게 적절한지] 비록 오랫동안 이어진 논쟁이 있었지만, 나는 마오를 마르크스주의자로 보는 것이 그의 정치경제학 사상을 이해하고 분석하는 데 핵심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정치경제학 이론가이자 혁명가로서 마오의 성공과 실패를 의미 있게 분석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주의를 이해해야만 하고, 또 마오가 해석한 마르크스주의를 이해해야만 한다. 여기서 [마오가 해석한 마르크스주의란] 다른 여러 역사적 해석과 그 구현과는 차이가 있다. 그것은 살아 숨쉬는 과학으로서, 사회적 발전을 분석하고, [마르크스주의자가 현실에] 개입하기 위한 적절한 정책과 국면을 결정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이 글의 첫 번째 절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에 관한 여러 상이한 해석에 주목하면서, 이러한 상이한 해석이 정치경제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대조한다. 두 번째 절은 마오의 마르크스주의 해석에서 비롯한 그의 정치경제학적 사상을 분석한다.

내 논증은 네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먼저, 해방 후 정치경제학에 관한 마오의 초점은 새로운 사회구성체 구조가 창출한 문제에 좌우됐다. 그리고 사회구성체의 발전에 관한 마오의 분석은 어떤 이론적 기초구조 또는 문제틀(problematic)에 의해 한결같이 영향을 받았고, 이는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그의 정교하고 일관성 있는 독해에 기초했다. 둘째로,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마오의 해석은 경제가 최종심급에서 궁극적인 결정요인이며, 따라서 사회구성체는 모순들이 무작위하게 융합된 혼합물(amalgamation)이 아니고, 경제에 의해 구조가 형성된 통합체(whole)라고 보았다. 이처럼 경제는 계급투쟁이 벌어질 지형을 결정함으로써 이런 모순들의 구조를 구성한다. 따라서, 경제에 의해 사회구성체의 발전수준이 상이하게 나타날 수 있고, 그러므로 지배적인 모순도 특정 시대, 특정 사회구성체에 따라 상이하게 나타날 수 있다. 셋째, 개인으로서 마오의 사상적 발전을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회현상으로서 마오의 사상을 평가하는 일도 반드시 해야한다. 이것은 마오의 사상뿐만 아니라, 두 가지 측면에서, 즉 [마오의 사상에 따라] 실행된 정책이 무엇이었나, 그리고 이러한 정책에 따라 강화되거나 제약을 받은 사회세력이 누구였냐는 측면에서 [마오의 사상이] 사회에 미친 영향을 평가하도록 요구한다. 이것은 네 번째 요소로 이어진다. 즉, 정치경제학에 관한 마오의 문제틀에 엄존했던 취약성이 그가 사망할 당시의 정책이나 사회구성체에 반영되었다. 
 
 

1. 마오와 마르크스주의 문제틀

 
마오의 정치경제학 사상은 공산주의 운동사, 그리고 중국혁명에 대한 평가에서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는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여러 기존 해석을 깨뜨렸고, 사회주의적 변혁의 성격에 관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도전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오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의 두 가지 일반적인 해석과 실천을 거부했다. 즉 “인간주의적”(humanist) 해석과 변증법적 유물론에 관한 스탈린적, 경제주의적 해석.
 
마르크스주의 내부의 인간주의적 전통은 대부분 헤겔에서 유래했다. 이는 사회 외부에 존재하는 개인으로서 “인간”이라는 신화에 기초를 둔다. 사회로부터 분리된 “인간”을 관찰하면서, 인간주의적 문제틀은 사회를 초월한 “인간”의 보편적 본질이 존재한다는 것이 마치 당연한 사실인 듯 가정한다. [인간주의적 전통은] 이처럼 영원하고 무계급적이며 이상적인 인간 본성이 자본주의 사회의 개인주의자가 지닌 본성이라고 일반적으로 간주한다. 비록 이런 가정은 확실히 도전받을 수 있지만 말이다. 인간주의의 문제틀은 “인민”의 “자연권”이란 계급과 무관하며, 다른 개인들 혹은 통합체(whole)로서 사회의 간섭을 받지 않는 특정한 행위영역에 적용되는 개인의 고유한 권리라고 “인식한다”. 따라서 인간 본성은 사회를 초월하기 때문에, 각각의 인격은 [사회라는] 통합체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는 “나”의 관점에서 사회를 인식할 타고난 권리를 가진다. 
 
마르크스주의에서 인간주의적 전통의 상징은 “소외” 개념이다. 루이 알튀세르와 여타 유럽 마르크스주의자들에 따르면, 1845년에서 1857년 사이 마르크스는 그의 초기 저작에 있던 인간주의적 문제틀과 결정적으로, 또는 “인식론적으로” 단절하고 유물론적 문제틀, 즉 인간은 현실의 특정한 사회구성체 속에서 현존하는 사회적 존재라는 문제틀로 이동했다.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을 바라봄으로써, 그는 분리된 개인이 아니라 계급투쟁이 역사의 원동력이자 올바른 분석의 대상이라고 인식하게 됐다. 이렇게 마르크스를 이해하면, 이 결정적인 단절 이후, 마르크스는 그의 정치경제학 분석에서 계급, 생산력, 생산관계, 상부구조 등등의 개념을 점점 더 많이 사용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소외와 같은 인간주의적 개념을 거부했다는 사실이, 노동자가 자신의 생산물로부터 분리되는 현실이나, 분업, 그리고 그것이 미치는 여러 영향에 대해 그가 더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이런 문제들이 바뀌거나 제거되려면, 그 문제들이 계급사회의 일부분이라고 분석하고, 또한 경제적·정치적·이데올로기적·철학적·심리학적으로 고유한 기초를 지닌 실천이라고 분석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이런 해석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는 분리된 개인을 [문제해결의] 열쇠로 보는 인간주의적 전통을 거부하는 유물론적 문제틀 내에서 작동하며, 이는 사회적 생산형태가 분석의 핵심대상이며, 계급투쟁이 역사의 원동력이라고 인식한다. 
 
마오의 마르크스 “해석”과 위에서 언급한 내용이 유사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마오는 정치경제학과 철학의 출발점으로서 “인간”과 개인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와 그 계급적 구성을 초월하는 인간 본성이라는 어떠한 인간주의적 개념도 거부했다. 따라서 마오의 정치경제학 저작에는 소외에 관한 언급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서구의 여러 분석가는 이를 마르크스주의로부터 마오가 이탈했다는 증거로 해석하지만, 나는 마오가 이런 개념을 거부하되, 보통 소외라는 항목에 포함되는 그러한 현상들을 더욱 구체적으로 분석하길 선호했다고 말하고자 한다. 마오가 직업전문화, 분업화, 관료주의에 접할 때 느끼는 무력감 등등의 문제를 다루는 정책과 실천을 개발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 그 예시다.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은 헤겔이 그의 다양한 저작 속에서 발전시킨 변증법이나, 스탈린이 수용하고 조악한 형태로 대중화한 변증법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마르크스가 “거꾸로 선 헤겔을 똑바로 세운다”고 했을 때,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을 관념론적 기초에서 유물론적 기초로 단지 옮겨 심는 일 이상의 무엇을 했다. 즉 그는 “미신적인 껍데기 안에서 합리적 핵심”을 추출함으로써 변증법 자체를 변형했다. 이러한 변증법 자체의 변형을 이해하는 최선의 방법은 헤겔의 “단순한” 변증법을 “복잡성과 과잉결정”의 변증법으로 변형한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헤겔 변증법은 정신과 시민사회 간 모순이라는 하나의 기본모순이 역사, 정치, 경제 그리고 사회발전의 본질이라고 “인식한다”는 의미에서 단순하다. 이처럼 헤겔 변증법은 모든 변화가 하나의 근본 원인에서 비롯된다고 본다는 점에서  단순하다. 일단 우리가 직접적이고 일방향적인 인과성이라는 단순한 관념을 이해하게 되면, 그 필연적인 결과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즉 본질적인 조건이나 모순이 아닌 여타 조건이나 모순은 이러한 내적 본질에 의존하며, 그것의 단순한 발현일 뿐이다. 부차적인 조건이나 모순은 오직 기본모순이 변화할 때만 변화하며, 기본모순이 일단 변화하면 부차적인 조건이나 모순도 변화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기본모순의 상태가 일단 결정되고 나면, 사회구성체의 나머지 모순들의 상태도 “간단하게” 연역될 수 있다. 본질의 특정한 발현으로서 여타 사회적 모순들은 본질적 모순 자체의 그저 부가물에 불과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기본모순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기본모순이] 특정하게 발현되는 것이 된다.
마르크스에 관한 스탈린주의적 해석은 (그리고 스탈린주의는 아니지만 경제주의적 해석에 불과한 다른 많은 해석은) 단순한 헤겔 변증법을 채택했다. 그러나 이들은 모든 시대에, 사회구성체의 모든 발전수준에서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물질적 모순이 사회발전의 본질이자 핵심모순이라고 단정한다. 이런 문제틀에서는, 이데올로기, 문화, 법, 남성지배, 민족적·인종적 억압과 같은 다른 모든 사회현상이 기본모순의 발현이나 반영이라고 기계적으로 환원된다. 따라서 일단 기본모순이 변형되면, 즉 생산력이 일정 수준까지 발전하고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사회적 소유로 변하면, 부르주아적 권리, 임금 격차, 개인주의, 남성지배와 같은 부차적 모순들은 그들의 본질을 빼앗기고, 그에 따라 [자본주의적 모순의 소멸과] 유사한 방식으로 반드시 변형될 것이다.  하지만 사회들은 이런 방식으로 발전하지 않았고, 이는 1930년대 이후로 마르크스주의 위기를 촉발한 핵심요인 중 하나다. 
 
하지만 마르크스 변증법에 관한 마오의 해석은 위에서 간단히 설명한 유형의 변증법과는 완전히 다르다. 마오의 해석은 단순한 변증법, 즉 그 본질의 연쇄적 부정을 통해 움직이는 변증법을 상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에 선행하거나 사회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이상적인 본질도 거부한다. 그 출발점은 특정한 현존 사회구성체란 서로 영향을 미치는 다수의 모순으로 구성된 복잡하고 구조화된 통합체(whole)라고 분석하는 것이다. 그러한 문제틀 속에서는 광범위한 여러 이론적 범주들, 예를 들어 “불균등 발전”, “약한 고리”와 같은 레닌의 개념이나 “자본주의의 부활”(資本主義复辟, 자본주의복벽)이라는 마오의 개념이 존재할 수 있지만, 반면 헤겔 변증법의 단순성에 기초를 둔 여타 개념들, 예를 들어 부정의 부정은 더이상 살아남을 수 없다. 그리고 그러한 문제틀 내에서만 생산, 상품, 노동력과 같은 범주들이 의미 있는 분석을 위해 활용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이런 [생산, 상품, 노동력이라는] 범주가 객관적 실재라기보다는 (그리고 사회 외부에 존재하는 이러한 객관적 실재가 사회에 구조를 부여한다기보다는) 사회를 분석하기 위한 추상이자 이론적 도구일 뿐이라고 인식했다. 예를 들어 객관 세계에서 “생산관계” 그 자체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실제 사회구성체들 내에 특정한 생산관계들만이 존재한다. 마르크스는 함께 한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모순과 관계의 미로를 이해하기 위해 어떤 분석적 개념들을 추상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의 범주들은 헤겔의 범주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헤겔의 단순한 통일성(unity)은 사회에 선행하며, 헤겔이 보기에 사회는 기본적 통일성의 구체적 발현일 뿐이었다. [반면] 마르크스의 범주들은 이미 존재하는 복잡한 현실에 관한 분석적 개념화다. 그 범주들은 이러한 현실을 결정하지 않으며, 단지 이 현실을 이해하고 바꾸는 데 도움을 줄 뿐이다.
 
그런데 마르크스의 문제틀을 이렇게 해석할 때, 이는 곧 어떤 한 사회구성체가 서로서로 똑같이 영향을 미치는 모순들로 이뤄졌고, 따라서 [다른 사회구성체와] 구별할 수 없는 미로라는 의미는 아니다. 어떤 특정한 사회구성체에서 복수의 모순이 존재하더라도, 특정한 모순들은 다른 모순들보다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특정한 사회구성체 내에 자산소유자와 비소유자 간에, 인종집단 간에, 남성과 여성 간에, 서로 다른 성적 지향을 가진 개인 간에, 상이한 정당 간에 또는 정당 내부에 모순들이 존재할 수 있다. 이처럼 다양한 모순은 수많은 형태를 취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상투쟁, 비폭력적 대립, 범죄라는 형태를 취할 수도 있고, 국가나 법률체계, 아니면 폭력적 대치를 통해 해소되는 분쟁이라는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모든 모순의 중요성이 동등한 것은 아니며, 모든 모순이 서로 동등하게 영향을 미치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어떤 모순이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사회구성체에서 지배적일지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이 모순들이 드러나는 순서를 결정하는가? 서론에서 간단히 설명했듯, 이런 해석에 따르면, 경제는 하나의 통합체로서 사회구성체의 구조를 형성하고, 계급투쟁의 지형을 결정하기 때문에, 최종심급에서 궁극적인 결정요인이다. 따라서, 한편으로 경제는 계급투쟁 참여자들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즉, 봉건제에서는 계급투쟁이 대부분 지주와 소농 사이에서 발생하는 반면, 자본주의에서 계급투쟁은 대부분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에서 발생한다. 다른 한편으로 경제는 그러한 계급투쟁의 형태와 장소를 결정한다. 다시 말하자면, 경제는 생산과정을 분리하거나 아니면 집중시키고, 학교, 종교, 대중매체[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를 활용하거나 아니면 폭력적 분쟁 때 쓸 수 있는 유형의 무기[억압적 국가장치]를 활용한다. 그리고 계급투쟁은 [경제가 결정하는 계급투쟁의] 형태와 강도(强度)에 따라, 언제나 늘 발생하는 사회적 상호작용을 구조화한다. 
 
경제는 계급투쟁의 지형을 결정하기 때문에, 경제적, 정치적, 또는 이데올로기적 수준의 모순들 [중 어느 특정한 모순이] 어떤 특정한 때에 지배적인 역할을 하고, 계급투쟁의 일차적 중심지가 될 수 있도록 사회구성체를 구조화한다. 경제가 항상 결정적이거나 일차적인 모순은 아니며, 이러한 다양한 영역에서 계급투쟁의 결과를 자동적으로 결정하지도 않는다. 어떤 계급이 국가 권력을 장악하느냐를 둘러싼 정치투쟁에서 하나의 예시를 볼 수 있다. 이러한 정치투쟁은 경제 전반에, 특히나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에 분명히도 영향을 미친다. 왜냐하면 국가권력은 어떤 형태의 소유, 관리, 기술발전이 용인되고 장려될 것인지 분명히도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1917년 러시아와 1945~1949년 중국이라는 사례처럼, 어떤 때는 경제영역의 모순이 아니라 정치적 모순이 지배적이다. 이와 비슷하게도, 이데올로기적 투쟁은 국가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정치투쟁에 영향을 미친다. 왜냐하면 이데올로기적 투쟁은 다양한 계급·계층이 객관적 상황을 인식하는 방식이나, 이런 상황에서 행동하는 방식을 구조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적 투쟁은 1957년 여름, 중국에서 마오가 주장했듯이, 심지어 근본[모순에 관한 투쟁]이 될 수도 있다. 달리 말해, 경제는 어떤 계급들이 투쟁을 벌일지를 결정하고, 그 투쟁이 취할 수 있는 형태들을 제한한다. 예를 들어, 경제적 조건에 따라, 궁정 엘리트 내부에서 봉건적 이데올로기 투쟁이 벌어질 수 있고, 문화혁명 노선을 따르는 대중운동이 나타날 수 있다(문화혁명에서는 대중매체가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다).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에 관한 이러한 해석에서, 복잡성에 입각한 인과성은 사회구성체가 구조화된 통합체(whole)라고, 다시 말해, 핵심요인 즉 경제에 의해 구조화된 통일체(unity)라고 인식할 수 있게 한다. 이때 경제는 계급투쟁이 벌어질 지형을 기본적으로 결정한다. 이러한 지형에서, 특정 시기의 지배적 모순은 경제적 모순일 수도 있고, 정치적 모순이거나 이데올로기적 모순일 수도 있는데, 그러한 지배적 모순의 고유성은 모든 다양한 모순의 상호작용을 반영할 것이다. 하지만, 지배적 모순 그 자체가 운동하는 범위나 한계는 결국 경제발전 수준이 끼치는 영향을 받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해석은 인과성을 여러 수준으로 나누어 볼 수 있고 [즉 ‘지배적 모순’이라는 개념과 ‘최종심급에서의 경제에 의한 결정’이라는 개념이 공존할 수 있다], 인과성이 여러 방향성을 지닐 수 있다고 [예컨대 최종심급에서 경제가 이데올로기의 원인이 되지만, 일시적으로는 이데올로기가 경제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고] 인식한다. 또한 이러한 해석은, 일시적으로 지배적인 역할을 하는 정치적 또는 이데올로기적 모순을 둘러싼 계급투쟁이 경제의 성격이나 생산력과 생산관계 간 모순의 성격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관념을 인식한다.  
 
마르크스에 관한 이런 해석은 스탈린 치하에서 보급된 단순하고 경제주의적인 해석과는 완전히 대조적이다. 이런 해석은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복잡성에 입각한 인과성이라는 이론적 공간을 발전시킴으로써, 경제적 수준에서의 거대한 변화가, 예를 들어 대불황이 계급투쟁의 조건을 크게 바꾸면서도, 계급투쟁의 결과를 미리 결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해석은 왜 대불황이 자본주의의 붕괴를 초래하지 않고, 오히려 유럽에서 파시즘 의 부상과 미국에서 경제와 국가의 재건으로 이어졌는지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2. 마오의 정치경제학적 문제틀, 사회주의 과도기에 관한 마오의 분석, 그 분석의 강점과 약점

 
중국의 사회구성체와 중국혁명의 발전을 분석하기 위한 마오의 틀은 협소한 의미의 경제적 틀이 아니라, 분명히도 정치-경제적 틀이었다. (마오는 협소한 의미의 경제적 분석에 관해서는 본인이 훈련받은 적이 없다고 스스로 인정했다.) 그는 “소련 정치경제학 교과서에 관한 주석”(이하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명확히 선언했다.
 
정치경제학 연구의 가장 중요한 대상은 생산관계다. 그런데 생산관계를 명료하게 연구하기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생산력에 관한 연구를 (생산관계에 관한 연구와) 결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상부구조가 생산관계에 미치는 긍정적, 부정적 영향에 관한 연구를 결합해야만 한다.

이런 맥락에서 사회주의 과도기에 관한 마오의 분석은 이 문제에 관한 세 가지 측면에 주목하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즉 (1) 사회발전의 단계적 성격에 관한 그의 개념. (2) 서로 연결된 두 가지 문제. 즉 첫째, 사회주의 과도기 동안 계급투쟁의 지속이라는 문제, 둘째, 과도기 그 자체의 본질이라는 문제, 다시 말해 사회주의가 “생산양식”을 구성하느냐 아니냐는 문제. (3) 이러한 이론적 입장이 사회적으로 미치는 영향. 


1) 사회발전의 단계적 성격

일찍이 1930년대부터 시작한 마오의 정치경제학 작업은 사회가 선형적으로, 즉 점진적으로 조금씩 발전하는 게 아니라, 일련의 단계를 통과하며 발전한다는 견해를 분명히 보여준다. 마오에게 있어서 모순의 기본법칙 중 한 형태로서 양적 변화와 질적 변화의 관계[양질전화], 대립물의 통일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필수 요소였다. 어떤 사회든, 대립물의 통일이 존재하는데, 이는 곧 불균등하게 발전한 다수의 모순이 있고, 이러한 모순들이 구조화된 통합체[즉 사회구성체]를 형성한다는 뜻이다. 이런 불균등성 때문에, 어떤 특정한 시간에 하나의 모순이 지배적인 모순이 된다. 따라서 [지배적인] 주요모순이 해소되고 새로운 주요모순이 출현할 때(질적 변화), 사회구성체의 본질이 질적으로 변화한다. 즉, 새로운 단계가 도래한다.

그러한 질적 변화는 그에 앞서 나타나는 양적 변화를 전제로 한다. 즉 [질적 변화에 앞서] 다양하게 존재하는 특정 모순들이, 그리고 그 특정 모순들의 구체적 양상이 양적으로 변화한다. (이러한 모순들은 끊임없이 발전하고, 차지하는 위치를 서로 계속 바꾼다.) 다양한 모순들의 변형이 지배적 모순의 변화를 증진할 때, 즉 다양한 모순들이 “융합” 또는 “응축”될 때, 새로운 단계로 이어지는 질적 변화가 촉진될 수 있다. 

나는 다른 곳에서 마오 사상의 단계 개념을 그의 “시기선택(timing) 이론”이라고 말한 바 있다. 마오에게 사회구성체는 일련의 단계를 통과하고, 각 단계는 특정한 주요모순을 특징으로 삼는다. 주요모순을 인식하는 것은 해당 시기에 올바른 정책을 입안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다. 1953년, 마오는 류사오치 등등이 1949년 이후 중국혁명의 성격이 질적으로 변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면서 그들의 정책이 우경적이라 비판했다. 이러한 비판은 정확히도 [사회발전의 단계라는] 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와 비슷하게, 대약진 초기 극좌적 오류에 관한 마오의 비판도 바로 이런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다시 말해, 오류를 범한 극좌파 동지들은 해당 시기 주요모순을 부정확하게 규정했고, 결과적으로 부정확한 정책을 개발했다.

마오의 사상에서 양질전화를 보여주는 한 예시는 농촌의 하급 단위(생산대와 생산대대)에 의한 집단적 소유에서 상급 단위(인민공사)에 의한 [집단적 소유로] 이행하는 문제를 다룬 그의 논의에서 찾을 수 있다. 마오는 인민공사를 지지했는데, 인민공사가 농업생산과 국가를 위한 축적을 증대하는 수단이자, 그와 동시에, [인민] 생활의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요소들을 하나의 통일적 조직체로 통합하는 수단이라고 보았다. 마이스너의 주장에 따르면, 이러한 통합은 비록 궁극적으로 실패하기는 했지만, 분업과 직업전문화라든가, 그외에도 자본주의에서 소외를 발생시키는 여러 요소(공산주의가 더 우월한 실천을 통해서 대체하게 될 요소)를 극복하는 것을 대체로 목표로 삼았다. 이런 맥락에서 마오는 인민공사 수준의 소유가 전 인민의 소유라기보다는 여전히 집단적 소유의 한 형태이기는 했지만, [농촌에서 이행을 향한]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만약 소유권이 지나치게 빠르게 인민공사로 이전되면, 이는 더 선진적인 생산대와 생산대대에 불이익을 줄 것이다. 왜냐하면 선진적인 생산대와 생산대대의 자산이 인민공사 전체에 동등하게 분배되면, 그들은 자산의 상당 부분을 잃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만약 소유권이 너무 느리게 이전된다면, ‘규모의 경제’가 주는 잠재적 이익을 잃게 될 것이다. 따라서 마오는 양적인 성장이 특정한 목표치에 도달할 때에만, 다시 말해 (새로운 생산력이 도입되고, 인민공사가 소유하는 기업의 생산성이 증가함으로써) 인민공사들 내에서 창출된 자산의 절반 이상이 인민공사들이 소유하는 단위에 의해 창출될 때에만, 인민공사 소유를 향한 이행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조건이 실현되도록 새로운 생산단위가 발전할 때에만, 전반적인 생산수준과 생활수준이 상당히 상승하고, 인민의 의식수준도 상당히 높아질 것이며, 인민공사 구성원의 소득 중에서 인민공사 소유 단위에서 나오는 소득의 비중이 점차 증가한 결과로 부유한 생산대·생산대대와 빈곤한 생산대·생산대대 간 소득격차도 상대적으로 감소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부차모순들의 변화들은 인민공사 소유 단위가 창출하는 자산이 차지하는 양적 비중의 변화와 융합함으로써, 인민공사 소유를 향한 질적 전환을 가능케 하고 농촌이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게 할 것이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볼 때, 인민공사와 대약진은 전혀 마오가 제시한 것처럼 발전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의해야만 한다. 한편으로는, 셀든이 주목하듯, 마오의 이론적 입장은 그의 지도를 받으며 시행된 정책들과 종종 매우 달랐다. 다른 한편으로, 마오의 이론과 정책에 대한 유력한 반대를 고려하면, 마오의 처방과 실제 정책이 괴리된 책임을 전적으로 마오에게 물을 수는 없다. 결과적으로 보면, 비록 마오가 [정책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했지만, 한 개인으로서 마오는 다른 어떤 개인에 비하더라도 더 강한 통제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므로, 대약진과 관련된 여러 재앙이 벌어지게 한 정책에 대해 마오는 분명히도 매우 중대한 책임이 있다. 
 

2) 계급투쟁과 “사회주의 생산양식”

마오의 사상에서, 특히나 1949년 이후 마오의 사상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단계 개념은 중요한 요소지만, 마오가 사회주의 시기의 계급투쟁을 분석하고, 이 주제를 두고 스탈린적 마르크스주의와 단절한다는 것이 이론적으로 더 중요하고 논쟁적이다. 

스탈린은 사회주의 시기의 계급투쟁을 분석할 때, (1936년 헌법이 보여주듯) 계급투쟁이 끝났다는 입장과 [오히려] 계급투쟁이 증가할 것이라는 입장 사이에서 진동했다. 그에 따라, 계급투쟁을 다루는 그의 정책도 진동했는데, [예를 들어] 기술자와 전문가에 더 높은 임금을 주며 환심을 사려하기도 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억압하기도 했다. 

이런 진동의 이론적 근원은 본질적으로 경제주의적-인간주의적 문제틀에 있었는데, 이러한 문제틀은 사회주의가 중대한 내부 모순이 없는 안정적인 생산양식이라고 보았다. 즉 사회주의란 생산력과 생산관계를 조합하는 하나의 특정한 방식이라고 인식했다.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조합 방식이 잉여노동을 영유하는 특정한 양식과, 그 양식에 적합하도록 생산수단을 분배하는 특정한 형태를 정의한다.) 스탈린은 일단 토대가 사회화되었다면, 즉 일단 사적 소유가 국가 소유로 대체되었다면, 사회구성체의 다른 영역에서 사회주의의 지속적인 발전을 보장하는 충분조건이 확립됐다고 주장했다. 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상부구조는 변혁이 달성된 토대와 일치할 것이다. 따라서 “사회주의 생산양식”의 발전 정도는 국가나 집단[농업협동조합]이 소유한 생산력의 발전 수준으로 측정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이론적] 틀 내에서는 계급투쟁이 부차화되며, 오로지 두 가지 원천에서, 즉 외부의 제국주의적 공세과 낡은 착취계급의 잔존이라는 원천에서 발생할 뿐이다. 국가는 이처럼 근본적으로 외부로부터 발생하는 [두 가지] 위협을 억제할 수 있는 강제적인 기구로 인식되었으나, 이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사실상 동일한 것이 되었다. 따라서 사회주의 시기에 벌어지는 계급투쟁의 강도는 제국주의적 공세의 강도(이는 근본적으로 “사회주의 생산양식” 외부에 있는 요인이다)와, 사회에 남아 있는 자본주의의 잔재를 제거하는 국가의 효율성에 따라 변할 것이다. 이런 문제설정에 따르면, 사회주의 사회는 기본적으로 안정적이며 모순이 없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회주의에 관한 마오의 분석은 사회주의 생산양식이라는 스탈린적 개념과 단절했다. 이러한 단절을 통해서 대체로 마오는 중국혁명의 발전에 조응하여 그의 초기 이론적 입장을 재조합하고 발전시켰다. 그리고 [스탈린적 개념과의] 이러한 단절은 그가 1950년대 후반에 제시했던 부단(不斷)혁명 이론과, 그보다 후에 제시했던 계속(繼續)혁명 이론 사이의 단절을 통해 뚜렷하게 나타난다. [즉 부단혁명론에 비해, 계속혁명론은 사회주의 생산양식론을 뚜렷하게 거부했다.]  

이 단절을 통해서 마오는 문화혁명 때 “생산력 이론”이라고 명명한 경제주의적 관념, 즉 소유제의 변형과 생산력의 발전이 상부구조의 변형과 사회주의의 안정성을 충분히 보장한다는 관념을 거부했다. 마오는 사회주의 사회가 모든 수준에서 [즉 토대와 상부구조, 모두에서] 모순으로 분할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요소들은 경제적, 정치적, 이념적 수준에서 계속 존재할 것이다. 이런 요소들이 억제되지 않는다면, 그 요소들은 자신이 존재하기 위한 조건들을 자연발생적으로 계속 생성할 것이다. 결국, 이러한 “자연발생적인 자본주의 경향”은 사회주의가 거두었던 처음의 승리, 그 자체를 위협할 수도 있고, 심지어 자본주의의 부활을 이끌 수도 있다.

사회주의가 거둔 처음의 승리가 불안전하다는 마오의 인식은 1964년, 프랑스 문화부장관 앙드레 말로에게 했던 그의 말에서 특히 분명히 드러난다.

(흐루쇼프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모순이 (소련에서) 사라졌다고 상상했습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사회주의의] 승리 때문에 발생하는 모순들이 예전 [자본주의의] 모순들보다 덜 고통스럽다고 하더라도... 틀림없이 그 모순들은 [자본주의의 모순들과] 거의 흡사할 정도로 깊은 곳에 뿌리내리고 있을 겁니다. 자율에 맡겨둔다면, 인류(humanity)는 필연코 자본주의를 재확립하지는 않더라도 (그렇기 때문에,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로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당신의 말은 아마도 옳을 것입니다), 불평등은 재확립합니다. 새로운 [지배]계급을 창조하려는 경향이 지닌 힘은 강력합니다... 흐루쇼프는 공산당이 권력을 잡는 순간에 혁명을 완수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혁명이 그저 민족해방의 문제인 것처럼 말입니다... 
레닌은 [공산당이 권력을 장악하는] 시점에야 혁명이 시작될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자연발생적인 자본주의적 경향이 강력한 사회에서, [게다가] 이 경향에 맞서는 어떤 투쟁도 없다면, 공산주의는 사회주의 혁명의 최초 승리에도 불구하고 확립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마오가 보기에, 공산주의가 성취될 때까지 이런 경향에 맞서는 투쟁은 필연적이며, 그 투쟁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형태를 취한다. 

여기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마오의 개념도 스탈린적 마르크스주의의 개념과 달랐다. 스탈린적 문제설정에서는 자기 스스로 유지되는 “사회주의 생산양식”을 확립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필요하다고 인식했다. 그러나 일단 사회주의 생샨양식이 확립되면,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내부에 남아 있는 자본주의 잔재를 억누르고 제국주의적 공세를 물리치는 국가장치로근본적으로 축소(sic)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마오는 공산주의가 확립되기 전까지 사회주의 전 시기에 걸쳐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자본주의의 대리인들이 내부에서 나오든 외부에서 나오든 간에,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역할은 그 대리인들을 물리적으로 억압하는 데 그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프롤레타리아와 그 동맹자들을 위해 생활을 개선하고 민주주의를 증진하는 “사회주의의 새로운 사물(新生事物)”을 발전시킴으로써, 사회의 모든 수준에서 자본주의적인 실천과 싸울 것이다. 심지어 국가, 국가소유[기업], 공산당 내부에서도 싸울 것인데, 그것들도 자본주의 사회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주의의 발전 정도는 모든 사회적 수준에서 [즉 토대와 상부구조에서] 새로운 프롤레타리아적 실천이 얼마나 발전하고 강화되고 있느냐는 관점에서, 다른 말로 하자면, 중국 사회구성체 전반에 걸친 계급투쟁을 분석함으로써 평가될 것이다. 하지만 마오는 그런 평가를 내리기 위한 명확하고 일관성 있는 기준을 세운 적이 없다.

분명히도, 위에서 언급한 [마오의] 문제틀은 문화혁명이 전개될 수 있는 이론적 맹아들을 품고 있었고, 문화혁명은 사회의 각계각층에 속한 다른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물론 문화혁명은 이상을 품고 있었고, 동시에 부절제한 행동들(excesses)도 나타났다. 혁명의 급진성을 버리려는 경향에 맞선 마오의 투쟁, 평등을 향한 마오의 투쟁, 직업전문화와 분업을 극복하려는 마오의 열망이라고 마이스너가 지칭한 것들은 모두 전자[문화혁명의 이상]에 기여한다. 프라임과 여타 논자들은 문화혁명기의 경제적 진보를 지적했다. 물론 그것이 치른 비용도 함께 논했지만 말이다. 블레처는 [문화혁명이] 중국 사회라는 틀 속에 계급에 기초를 둔 문제의식을 불어넣고자 시도함으로써 그람시적 유형의 “헤게모니적 도전”이 나타났다는 사실에 주목했고, 또한 이런 실천들을 통해서 지역적 수준에서 민주적 참여가 확대될 잠재성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반면에 무엇이 중국혁명을 크게 뒤흔들었던 사건들이 벌어지도록 하는 근거를 제공했냐는 측면에서 보면, 마오의 문제틀에 존재하는 심각한 이론적 취약점이 (이는 내가 아래에서 설명할 것이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부절제한 행동을 옹호했던 마오의 그 유명한 편향보다도 더 중요하다. 

위에서 검토한 마오의 문제설정이 형성되는 과정은 1950년대 후반, 1960년대 초반에 나온 그의 연설과 저작에서, 특히 그의 스탈린 비판과 “주석”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주석”은 마오의 마르크스주의적 문제설정과, 마오와 관련된 실천과 사회세력, 즉 “마오주의” 사이에 흥미로운 연결고리를 제공한다. 원래 이 저작은 마오 본인의 주석이라고 여겨졌는데, 지금은 소련 정치경제학 교과서를 함께 검토했던 마오의 연구집단이 작성한 주석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연구집단의] 저작이 마오 [개인]의 저작 속에 포함되므로 [즉 집단 저작이 마오 개인의 저작인 것처럼 공개되었으므로], 당연하게도 마오와 마오주의 [집단] 사이의 경계선은 점점 더 흐릿해진다. 마오를 평가할 때, 우리는 그의 개인적 사상과 행동뿐만 아니라 그것이 중국 사회에 영향에 대해서도 평가해야 하기 때문에 [마오주의] 세력의 이론적 기여(와 취약성)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오주의 세력의 존재는 마오와 그 동료들의 지지에 의존했다.) 따라서 내가 마오의 문제틀에 존재하는 취약점을 비판할 때, 그리고 논자들의 비판을 분석할 때, 마오의 저작뿐만 아니라, 마오의 생각을 마오 본인보다 더 명확하게 발전시킨 다른 이들의 저작도 활용한다.
 
 

3. 마오의 문제틀에 담긴 내용과 그 결과에 대한 비판

 
마오주의적 문제틀과 이와 연결된 [마오주의] 세력의 붕괴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즉 이러한 [마오주의] 세력은 현존 사회제도 안의 결함을 정확하게 겨눌 수 있었고, 따라서 엘리트 내에 존재하는 다른 집단들[즉 주자파]과 벌이는 투쟁에서 그들을 지지하는 대중기반을 성장시킬 수 있었던 반면, 그들이 그렇게 철저하게 비판했던 자본주의적, “수정주의적” 제도를 대체하는, 완전히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대안적 체계를 결코 발전시킬 수 없었다. 그 결과, 그들은 대중기반을 잃기 시작했고,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점점 더 행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방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이런 경향은 결국 그들이 본래의 기반에서 더 멀어지게 했고, [악순환의] 소용돌이가 바닥을 칠 때까지 권위주의적 정책 등등에 더욱더 의존하게 했다. 그에 따라 마오 없는 마오주의자들은 어떤 중대한 반대도 없이 전복되었다. 

마오주의적 정치경제학의 문제설정과 그 결과에 관한 가장 중요한 비판 중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에 집중하는 비판이 포함된다. (1) 자본주의의 부활과 계급투쟁이라는 중심개념의 기초를 이루는 계급과 자본주의를 정의할 때 드러나는 결함, (2) 환원주의, (3) 생산관계에 대한 과대한 집중.
 

1) 계급, 자본주의, 수정주의에 대한 정의

사회주의 시기의 계급 문제에 대한 마오주의적 접근에서 특징적인 요소는 무엇인가. 마오와 그의 지지자들은 적대적 계급투쟁이 과거에 존재하던 계급의 잔재 때문에 발생할 뿐만 아니라 (이는 스탈린적 문제틀이자, 덩사오핑도 지지했던 것이다), 새롭게 형성된 적대적이고 비(非)프롤레타리아적인 계급집단 때문에 발생한다고 인식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마오주의자의 문제틀이 계급을 다루는 방식에서는 핵심 쟁점을 간결하고 정확하게 지적하긴 하지만, 그 쟁점을 정의하거나 해결할 수 없는 경향이 나타난다. 그레이엄 영은 마오의 문제설정이 사회주의 시기에 계급투쟁이 발생하는 원천을 세 가지로 인식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마오의 문제설정에 존재하는 결함에 대한 최선의 비판 중 하나를 제시했다. 세 원천 중 첫째는 과거에 존재하던 계급들의 계급적 잔재로, 이는 소유관계를 통해 정의된다. 영은 이것이 “사회주의 생산양식”이라는 문제틀과 연결된다고 보았다. 둘째는 부르주아의 재형성인데, 여기서 부르주아는 더 광범위한 요소들로 정의된다. 영은 이것이 “사회주의 생산양식”이라는 문제틀과의 단절과 연결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셋째는 권력과 특권에 기반한 새로운 착취적 집단의 형성이다. 이는 마오가 [프랑스 장관] 말로와의 인터뷰에서 내비쳤던 바다. 착취집단이라는 최종 형태는 공산당 내 직위를 포함해 사회의 지도적 직위에 기초를 두고 있으므로, “대민주”(大民主)를 통해 그들에 맞서 싸워야 할 것이다. 즉 대민주를 통해서, 대중은 마오쩌둥 사상을 교육받고, (심지어 마오 사상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을 따름으로써, 공산주의를 향한 진보의 보증자로서 공산당을 대신할 것이다. 

그런데 영은 계급투쟁의 세 가지 원천에 대한 인식 각각이 중국사회의 성격에 관한 상호 배타적인 개념을 기반으로 구성되며, 그 개념 각각은 자기와 짝을 이루는 [계급투쟁의] 사회적 기초를 상정한다고 주장한다. 즉 첫 번째 개념의 짝은 낡은 소유권이다. 두 번째 개념의 짝은 두 가지 소유제도[국가소유와 집단소유]와 세 가지의 차이[도시와 농촌 간, 산업과 농업 간,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간 차이], 그리고 부르주아적 권리[예컨대 임금차등을 낳는 ‘노동에 따른 분배’]다. 세 번째 개념의 짝은 정치권력에서의 불평등이다. 이어서 그는, 이러한 개념들은 본질적으로 양립 불가능하지만, 앞뒤가 맞지 않는 채로 뒤범벅되어, 문화혁명의 정치적 미사여구가 되었다고 말한다. 계급을 정의하는 근거가 계급 기원인지 [즉 혁명 전에 어떤 계급에 속했는지], 아니면 계급 지위인지 [즉 혁명 이후 특권층에 속하는지 아닌지] 문제를 두고 마오주의자들은 크게 진동하는 모습을 보였데, 영은 자신의 분석이 무엇보다도 이러한 진동을 설명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고 주장했다.

마오주의자의 문제설정이 이처럼 상이한 계급지형 분석(topology of class)을 전혀 체계적으로 연결하지 않았다는 영의 생각은 설득력이 있지만, 그러한 분석들이 양립할 수 없다는 그의 결론은, 만약 그 결론이 계급에 관한 본질적으로 경제주의적인 정의로 후퇴한다면,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중국 지도부의 어느 부문도 1949년 이후 중국에 관한 진지한 계급분석에 착수하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문제를 악화시켰다. 이것은 계급 분류체계가 여전히 해방 전의 범주로써 정의되는 상황을 야기했다. 해방 후 중국에서 실행된 생산과정이라든지, 당이 생산과 사회전반에 대해 행한 역할이라든지, 이런 문제들을 체계적으로 분석할 지도부의 의지도, 능력도 없었기 때문에, 새롭게 출현하는 모순들을 조망할 수 없었고, 응집력 있게 계급을 분석할 가망성도 별로 없었다. 

그렇더라도, 자본주의 세계질서 내부에 존재하는 그러한 과도기 사회의 복잡성을 고려하면, 그리고 마오주의적 문제설정이 다차원적인 인과성을 인식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러한 계급분석 요소들을 일관성 있게 통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사전에 차단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서구 마르크스주의자들도 사회구성체를 구성하는 다양한 층들, 즉, 종종 상호 모순을 일으키는 층들을 통합하면서 [즉 경제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측면을 함께 고려하면서] 계급에 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는 데 어려움을 느꼈다는 사실은, 중국의 계급분석이 쉬운  과제가 아니라고 시사한다. 
자본주의와 수정주의(revisionism)라는 서로 연관된 개념들을 정의하기 위한 마오주의적 문제틀의 접근방식도 핵심 쟁점을 뚜렷하게 강조하지만, 이를 해결하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계급분석과] 비슷한 패턴을 보여준다. “자연발생적인 자본주의적 경향”과 “수정주의적 실천”은 사회주의 중국 도처에 계속 존재했다. 마오주의적 문제틀은 그러한 위협요소의 지속적인 존재와 심각성을 강조함으로써, 그 당시 중국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간 차이가 얼마나 미미한지를 강조했고, 때로는 좀 더 정교한 분석을 제시했는데, 예를 들어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성취된 그 모든 것이 “자본가 없는 자본주의”의 발전이었다는 생각을 역설했다. 비록 “자본주의적”, “수정주의적”이라고 명명한 실천들은 사회주의 과도기에서 대개 핵심적인 이론적 쟁점을 담고 있었으나, [마오주의적 문제틀은] 그것들을 결코 체계적으로 연결하거나 통합함으로써 일관성이 있는 전체적 틀을 구성하지 못했다. 즉, 소련공산당의 수정주의적 실천이 양적으로 어느 정도 지점에 이르면 다른 요인들도 결합하여 자본주의의 부활이라는 질적인 변형을 야기할 것인가 밝히지 못했고, 수정주의적 실천을 정의할 때 일관성조차 없었다. 
 

2) 환원주의

마오주의적 문제설정은 인과성의 다차원성을 계속 강조했지만, 그러한 기본 전제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환원주의와 밀접한 형태들을 용인했다. 이러한 형태들은 다음을 포함한다. (1) 마르크스주의 “과학성”의 절대시. 이러한 절대시는 (2) 전위에 관한 절대론적 개념이 형성되도록 기여했다. (3) [절대적 과학인] 마르크스주의로 무장한 (또는 문화혁명기의 표현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무장한) [절대적] 전위는 일괴암 같은 프롤레타리아의 단순하고 불변하는 이해관계를 과학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이 주제에 관한 마오의 입장을 1950년대 중반과 문화혁명기 사이에 비교해보면 매우 놀랍다. 위에서 논한 것처럼, 1950년대 중반 마오의 저작에서는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성이 사회발전의 법칙이나 경향을 발견하는 능력이라는 측면에서 인식됐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주의는 사회 발전과 계급투쟁을 엄밀하게 분석하고, 그 투쟁에 개입하는 방법을 결정하기 위한 도구로서 기능했다. 하지만 이런 분석이 항상 완결적이거나 옳다는 보장도 없었고, 자동적으로 올바른 정책이나 실천을 생산한다는 보장도 없었다. 따라서 1950년대 중반, 마오의 문제설정에 따르면, 공산당은 더 과학적인 접근방법을 보유하고 더 바람직하고 과학적인 정책을 개발할 것이므로, 따라서 공산당은 그런 정책 덕분에 도전자와 성공적으로 경쟁하면서 대중을 설득하고 대중의 지지를 얻게 될 것이다. 달리 말하면,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모든 경쟁자에 대항할 과학적인 출발점을 공산당에 제공하기는 했지만, 공산당의 전위적 역할은 여전히 획득되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문화혁명기 마오의 입장을 보면, 마르크스주의(또는, 당시 표현으로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우월성은 더는 증명되거나 획득되는 것이 아니었고, 그저 일방적으로 선언된 것이었다. 공산당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이 드러났을 때, 전위의 역할은 최고의 마르크스-레닌주의자인 마오 그 자신에게 돌아갔다.

이와 비슷하게도, 1950년대 중반, 마오가 제시한 계급적 이해 개념은 프롤레타리아와 그 동맹자들 안에 존재하는 내부적 모순을 인식했다. 그러나 문화혁명기에 이르면, 이처럼 복잡성에 입각한 개념은 단일하고, 일괴암과 같은 [계급적] 이해 개념으로 (이른바 ‘프롤레타리아적 노선’으로) 축소되었다. 이는 프롤레타리아 내에서 단기적인 이해관계와 장기적인 이해관계 사이의 모순이나,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이해관계 내의 모순, 지역적 차이, 성적 차이, 젠더 차이, 종족적 차이 등등에 따른 모순을 인정하지 않았다. 

나는 마오의 패러다임 전환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이자, 1958년 이전까지의 “좋은” 마오와 그 이후의 “나쁜” 마오라는 중국공산당의 공식 입장을 거부하기 위한 핵심이 무엇보다도 마오가 당과 전위 개념을 다루는 방식에 있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마오가 그의 정치활동 내내, 전위주의에 대해 모순적 관점을 유지했고, 전위의 지도력을 대중의 행동주의와 대비했다는 사실은 별로 놀랍지 않다. 마오는 비록 전위의 편에 서는 경향이 있었지만, 종종 당이 인민주의적(populist) 압력을 받게 했고, 이는 1950년대 중반, (비당원이 당원을 비판할 수 있는) 개방적인 정풍운동에서 시작하여, “백화”(百花)운동까지, 궁극적으로 그가 공산당에 대항해 촉발한 문화혁명의 “대중민주주의”까지 이르렀다. 이런 모순적인 입장은 한 개인[마오]의 궁극적인 권위에 의존하여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을 전개한다는 문화혁명의 관념에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런 환원주의의 대부분이 상황적 요인과 타협이 낳은 결과였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마오와 마오주의적 문제설정이 이런 실천을 용인했다는 것은 명백하다. 게다가, 큰 재앙을 낳았던 마오주의 내의 환원주의적 요소와 실천은 마오주의적 문제틀 내에 부단혁명 개념이 등장하면서 사회주의 생산양식론을 거부한 것과 관련된다. (이러한 진단은 마오에 대한 공식적인 비판과 얼마간 일치한다.) 문화혁명의 재앙적인 결과로, 중국 지도부의 대부분은 스탈린적 문제틀로 되돌아갔다. 지도부와 지식인 중 일부는 사회주의의 가능성을 사실상 부정했다. 마오의 불완전한 문제틀, 즉 사회주의 과도기에 관해 비판적인 질문을 실제로 제기했으나, 그에 답할 수는 없었던 문제틀을 완성할 수 있는 요인들을 체계적으로 탐색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3) 생산관계의 역할

위에서 언급했듯, 마오주의적 문제틀에서 정치경제학의 연구대상은 생산관계다. 이런 접근은 생산력을 대가로 생산관계를 지나치게 강조한다는 비판을 종종 받았다. 그러나 이런 비판을 다루기 전에, 제기되는 경우는 더 적지만, 아마도 더 날카로운 비판을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 즉 마오주의적 문제틀은 정치경제학을 연구할 때 상품의 역할 대신에 생산 관계, 특히 소유제도에 초점을 맞춘 결과,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는 것이다.

레글러는 이를 논증하면서, 마오 등등이 마르크스가 상품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사실을 무시했고, [상품 문제와] 분리된 채로 소유와 분배 문제를 강조하는 것을 더 선호했다고 주장한다. 마오주의적 문제틀은 상품의 이중성이나, 노동력이 상품 성격을 지닌다는 사실을 부정함으로써, 일관성을 잃고, 이는 가치법칙을 이해할 수 없는 무능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무능은 심각하게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그 결과물이란, 사회주의 “생산양식”이라는 스탈린적 개념을 거부한 부단혁명 이론과 결합한, “궁극적으로는 반동적인” 뒤죽박죽이었다. 

이러한 논증의 연장에서, 레글러는 마오가 상품생산을 확대할 필요성을 오해했다는 점도 검토한다. 마오는 상품생산의 확대가 [생산력을 발전시킴으로써] 생산과정의 진정한 변형, 즉 분업의 제거와 공산주의의 발전을 위한 전제조건이라고 주장한다. 상품교환에 관한 마오의 입장은 사실 양가적이었다. 한편으로, 마오는 상품생산 확대를 지지했지만, 대체로는 도농 간 교환을 촉진하고, 그럼으로써 노농동맹을 강화하고, 축적을 증대하기 위해서였다. 다른 한편, 문화혁명기와 그 이후에, 경제정책은 상품생산의 발전을 상당히 늦췄고, 그 결과 점점 더 자급자족적이고 가부장적인 체계가 나타났다. 또한 레글러는 두 가지 소유제도[국가소유와 집단소유]의 존재가 사회주의 하에서 상품생산이 이뤄지는 기초라는 개념을 비판하며, 그와 동시에, 임금소득 부문[국유부문]을 확대하고 그것에 이론적 우선순위를 부여하려는 노력도 비판하는데, 임금과 상품교환이 공산주의와 양립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두 가지를 지적해야 한다. 먼저 개인 마오와, 마오 아래서 번창했던 세력이 발전시킨 마오주의적 문제틀의 관계를 다시 강조할 필요가 있다. 마오는 두 가지 소유 제도의 존재가 상품생산의 기초라는 개념을 고수했지만, 이 문제틀을 활용하고 발전시킨 다른 마오주의자들은 바로 그곳에서 [다른 식으로] 주장했다. 즉 상품생산의 기초이자 자본주의의 부활 가능성의 기초는 일정 수준의 자율성을 보유하며, 서로 충돌하는 이해관계를 지닌 상이한 기업들의 존재다. 이 기업들은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상품생산자” 또는 “서로 분리된 자본”이 존재하는 곳으로 기능한다. (바로 이런 인식이 정확히도 레글러의 틀이다.)

임금소득부문의 확장과 특권에 대한 비판과 관련하여, 마오주의적 문제틀에 관한 최선의 해석은 다음과 같이 주장할 것이다. (a) 화폐 기반 경제부문의 확대에 따른, 임금소득부문의 점진적 확대는 공산주의를 향한 이행에 필요한 바로 그 상품생산의 발전을 촉진할 것이다. (b) 생산단위 내에서 노동관계와 분업을 바꾸려는 다양한 실험은 공산주의의 전제조건이 되는 방식으로 생산과정의 변형을 시도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정책들을 해석하고 마오주의적 문제틀을 이행한 결과를 검토하면, 생산과정의 의미 있는 변혁이 전혀 없었다고 시사한다. 즉 노동력은 상품으로 남아있었고, (단순한 국유화 또는 국가통제와 대비되는 의미에서) 생산수단의 사회적 통제는 결코 도입된 적이 없었으며, 따라서 공산주의를 향한 진보는 우연이 아니라면, 최소에 머물렀다. 

레글러에게 최후의 일격은 마오가 1960년대 초반, 즉 사회주의 생산양식 개념과 단절하기 전에, 생산수단을 농민에게 판매하는 것을 지지했다는 사실이다. 위에서 언급했듯, 마오는 토지와 소규모 농기구는 인민공사가 소유했기 때문에, 트랙터와 같은 농업 생산수단도 역시 인민공사가 소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생산을 늘리고, 과도한 중앙집중화를 줄이며, 노농동맹을 건설하기 위한 조건을 확립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시기 [1960년대 초반] 마오주의적 문제틀은 [상품생산에 관해] 대체로 스탈린적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이어진 입장을 유지했다. 즉 상품생산을 생계수단[소비재]으로 제한함으로써 자본주의적 상품생산 과정 전반이 (완전히 축출되지는 않았지만) 장애에 부딪혔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오가 “사회주의적 상품”이 자본주의적 상품과 다르다고 보고, 상품생산이 자본주의로 회귀를 이끈다는 개념을 비웃었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다. 

그러나 사회주의적 생산양식 개념과 단절한 이후, 마오와 그의 동맹자들은 자본주의적 상품생산과 사회주의적 상품생산 사이의 차이를 최소로 보고, 상품생산을 포함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공산주의의 발전에 극도로 위험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사실 마오는 생산수단을 포함한 상품교환에 관한 논의를 합법화함으로써 새로운 기반을 열었지만, 그가 자신의 행동에 담겨 있는 모든 이론적 의미를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는 불명확하다.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문서에서 그는 결코 이 주제로 돌아오지 않지만, 마오주의적 문제틀 내에서 작업한 다른 논자들은 이 주제를 계속해서 탐구했다. 따라서, 이 핵심 주제에 관해, 마오의 개인적 입장과 마오주의적 문제틀의 입장은 달랐고, 이는 개인이라기보다는 사회의 현상으로서 마오 사상을 평가할 필요성을 다시금 강조한다.

요컨대, 레글러와 다른 논자들은 마오주의적 문제틀의 이론적 비일관성과 관련해 여러 유효한 비판을 수행했는데, 그러한 비일관성은 마오주의적 문제틀이 자신이 비판했던 정책과 실천을 대체하는 일관성 있는 일련의 정책과 실천을 개발하는 데 무능을 보이는 결과를 낳았다. 그런데 이런 비판들의 상당 부분이 정당할 수는 있겠지만, 여전히 마오주의적 문제틀이 다뤘던 주제의 중요성을 무효화하지는 않을 뿐더러, 이론적, 실천적으로 더 만족스러운 대안적인 문제틀이 있다고 (그것이 마르크스주의적이든 아니면 다른 무엇이든 간에) 함의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결론을 내리기에 앞서, 마오주의적 문제틀에 존재하는 (비일관성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불완전성에 기여한 또 다른 핵심적 요인을 검토하는 것도 중요하다.

바로 이런 맥락 안에서야 마오주의적 문제틀이 생산관계를 지나치게 강조했다는 비판을 가장 풍부하게 검토할 수 있다. 그런 비판을 받게 되는 입장은 “주석”에 가장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세계사를 보면, 우리는 부르주아가 산업혁명 이후가 아니라 이전에 혁명을 일으켜 그들의 국가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부르주아는 상부구조에서 변화를 일으켰고, 국가장치를 장악했는데, 그 후 그들은 선전 활동을 수행하고 힘을 얻었다. 그런 후에야 그들은 생산관계의 변화를 대대적으로 밀고 나갔다. 생산관계가 그들이 만족할 만큼 정리되고, 매끄럽게 운영되자, 이는 생산력의 발전을 위한 길을 닦았다. 물론 생산관계의 혁명은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에 의해 유발되지만, 생산력의 급속한 발전은 언제나 생산관계의 변화 이후에 일어난다.

이런 의견에서 도구주의적 요소를 제쳐둔다면, 이 패러다임은 위에서 간단히 설명했던 것처럼, 마르크스에 관한 비(非)경제주의적 해석에 분명한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한 비경제주의는 『임금, 노동과 자본』에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자본은 사회적 생산관계이기도 하다. 자본은 부르주아적 생산관계다... 자본을 구성하는 생계수단, 노동도구, 원료는 특정한 사회적 조건에서, 특정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생산되고 축적되지 않는가? 새로운 생산에 기여하도록 생산물을 자본으로 전환하는 것이야말로 이러한 특정한 사회의 특징이 아닌가?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관계에 관해서 마오주의적 문제틀이 지닌 입장을 가장 명료하게 이론적으로 분석하고 요약한 것 중 하나는 마오나 그의 동료가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자 샤를 베틀렘이 제시한 것이다.

새로운 생산관계가 등장하자마자, 그것은 역사적으로 주어진 생산력에 영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생산력을 변형하고, 생산력에 특정한 구조를 부과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영향이다. 이런 식으로 변형된 생산력이 새로운 생산양식의 특유한 생산력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기계제 공업 이전에 형태를 갖췄다. 기계적 공업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지배 하에서 발전하고, 독특하게 “자본주의적인” 생산양식을 형성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는 역사적으로 주어진 생산력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바로 이렇게 생산력이 특정하게 변형됨으로써만, 독특하게 사회주의적인 생산양식(sic)이 구성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생산관계는 기술과 생산력이 발전하는 방식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의 통제를 받으면서 새롭게 발전했고 또 발전하는 중에 있던 강력한 생산력이 사회적 생산과정을 변형시키는 방식을 분석했다. 반면 마오는 이미 존재하는 생산력을 영유하고 활용하기 위한 방법을 찾는 데 관심이 있었다. 민족 부르주아는 매우 제한적으로만 기능하고, 세계의 지배적인 경제적, 군사적 강대국들의 공개적이고 조직적인 적대에 직면한 사회에서 말이다. 

생산력은 추상적이거나 “중립적인” 상황에서 발전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특정한 사회구성체에서 발전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어떤 생산력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지, 선택을 내려야만 했다. 따라서 더욱 현대적인 상황에, 특정한 조건에 맞도록 마르크스주의를 개조하는 학습과정이 필요했다. 마오의 최종 결론은 이렇다. 정치적 차원이나 (정치의 영향을 매우 직접적으로 받는) 생산관계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면 사회주의 프로젝트에 (치명적이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어리석은 결과를 낳을 것이다.

따라서 이 주제는 사회주의의 본질 혹은 목표를 결정하는 것으로 압축된다. 나는 마오가 다음과 같은 딜릭(Dirlik)의 의견에 동의할 것이라 믿는다. 

마르크스주의에서 사회적 관계의 경제적 기초를 이해하고자 할 때 그 목표는 사회적 관계를 경제조직의 하위에 두는 게 아니라, 민주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사회적 관계를 보장하는 방식으로 경제를 재조직하는 것이다.
기술(정보 등등)은 사회적으로 무해하고, 그 관리자들도 사회적으로 무해하다는 (당대 중국 지도부의) 강변은 새로운 권력관계를 뒷문으로 들어오게 하겠다는 약속일 따름이라는 설명이 오히려 더 그럴듯하다. 이 새로운 권력관계는 사회주의를 침식하고 “전문가-관리자 계급”의 출현을 장려할 것이다. 

이런 평가와 예측이 정확한 것일지 여부는 아직 최종적으로 정해지지 않았다.
 
 

4. 결론

 
마오와 마오주의적 정치경제학의 문제틀과 그들의 사회주의 프로젝트를 평가할 때, 이 모든 것이 함의하는 바는 무엇인가? 한편으로, 소련이나 다른 공산당과 비교해 볼 때, 마오주의적 지도부는 중국의 산업화를 시도하면서, 공산주의와 연결되는 평등주의적 목표를 (적어도 경제영역에서는) 달성하려고 더 오랫동안 그리고 더 엄격하게 노력했다. 그렇게 하면서, 그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회주의”의 취약점과 대면하고자 시도했는데 (레닌이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전위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발생한 취약점도 포함된다), 이러한 취약점을 정확히 꼬집어 내고 분석하고자 했다. 이런 노력을 평가할 때, 우리는 그 예리함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즉 그들은 당시까지 사회주의 정책이 왜 그 목표에 미치지 못했는지를 예리하게 짚어냈고, 이러한 결점을 제기하며 대중을 동원했으며, 이와 동시에, 공산주의 운동 내부에서 그들의 반대자들이 제시할 정책이나 그 정책의 결과도 예상했다. 

그러나 이론적 틀을 완성하지 못한 무능은 적절한 지침도 제공하지 못한 채로 광범위한 전략적 선택의 길을 개방했다. 마오주의 세력은 강력한 경쟁세력의 압박을 받으면서, 그들의 문제틀이 가지는 강점, 즉 사회적 인과성의 복잡성을 인식한다는 강점을 사실상 포기했고, 그에 따라 다른 모든 요인을 희생시키면서 계급투쟁을 절대화했고, 이는 그들의 정치적, 사회적 기반을 잠식하는 재앙적 정책으로 이어졌다. 

사회주의의 발전에 관해 통찰력 있는 질문을 개발할 수는 있었지만, 일관성 있는 대안이론을 발전시키지 못했다는 점에서 보면, 마오주의적 문제틀은 소용없는 게 아닐까? 이를 소생시키기 위해서는 [첫째로] 계급투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계급투쟁이 사회의 모든 층에 존재하는 다른 요인들과 어떻게 교차하는지 설명하는 일관성 있는 정의가 필요하다. 마오주의적 문제틀이 적어도 문화혁명 기간에는 사회의 모든 층에 존재하는 적대적 계급집단들의 위험성을 절대화하긴 했으나, 이런 집단들이 실존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달리 말해, [마오 사후] 개혁 지도부가 개발한 특정한 정책들 중 상당수는 이처럼 모순적인 집단들을 인식하고, 긍정적인 집단을 강화하는 정책을 발전시키는 [마오주의와는] 또 다른 문제틀 내에서 잘 활용될지도 모른다. (문화혁명기에는 이러한 모순적 집단을 포함하는 모든 실천을 그저 금지했다.) 둘째, 마오주의적 문제틀이 발전시킨 것보다 더욱 철두철미하게 레닌주의적 전위 개념을 재평가해야 한다. 전위 개념을 재평가해야만, 특히나 해방 후 시기의 전위 개념을 재평가해야만 (에리트레아 인민해방전선이 그랬듯이), 사회주의의 민주적 형태를 확립할 수 있고 (이때에는 어떤 전위 개념도 단지 일방적으로 선언되는 것이 아니라 획득되는 것이 될 것이다), 그저 생산수단의 국유화가 아니라 생산수단에 대한 진정한 공동 영유와 통제를 개발할 수 있다. [셋째] 마지막으로 딜릭의 “포스트 사회주의” 개념이 간결하게 강조하듯, 자본주의 세계질서가 (도구적인 방식과 대비되는 의미에서) 구조적인 방식으로 사회주의 건설 시도에 강제하는 한계를 더 진지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최종적으로, 지도자이자 혁명가로서 마오를 평가할 때, 그의 정책이 [낳은] 결과뿐만 아니라 그 정책의 기초가 되는 이론도 평가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론을 분석할 때, 그의 관점에 대한 단순화된 통념을 거부해야만 하며, 마오와, 그가 도움을 주고, 지원하고, 조직한 사회세력이 의미 있는 사회적 개입을 위한 결정적인 계기를 얼마나 성공적으로 포착할 수 있었는지, 그들의 개입이 지닌 한계를 얼마나 정확히 인식했는지, 이러한 개입을 실행하기 위한 최선의 정책을 얼마나 뚜렷하게 정식화할 수 있었는지 평가해야 한다. 위에서 제시한 복합적 평가의 여러 측면에 [독자들이] 동의하지 않는 것은 확실히 가능하지만, 나는 내가 제시한 분석이 마오의 성공과 실패를 모두 이해하기 위해서 마오의 마르크스주의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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