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2023 가을. 18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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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과 과학부정론

과학부정론이라는 틀로 본 오염수 배출 논란

임필수 | 정책교육실장

1. 왜 과학부정론이 문제인가

 
“우리 학생들이 (진화론의) 전제와 가설을 이해할 수 있는 배경이 없다면, 그들은 일부 논쟁적인 주제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화론의) 일부를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합니다.”
(초등학생이 법에 따라 의무적으로 접종해야 하는 백신은) “쓸모가 없을 뿐만 아니라 잠재적으로 위험합니다.” 
“지구온난화 개념은 중국인들이 미국 제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리기 위해 만들어 낸 것입니다.” 
“소독제는 1분 만에 바이러스를 없애버립니다. 몸 속에 (소독제를) 주입한다든지 폐를 청소한다든지 하는 방법으로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방금 인용한 말은 진화론, 백신, 기후변화(지구온난화), 코로나19에 관한 과학적 합의를 거부하는 과학부정론(science denial)을 보여주는 약간의 사례다. 그런데 이런 발언이 극소수의 과학부정론자가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외진 곳에서 내뱉은 말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첫 번째는 터키 에드로안 정부의 교육위원장이 2017년 고등학교 생물학 교과서에서 ‘생명과 진화의 시작’이라는 제목의 장을 삭제하기로 결정하면서 한 말이다. 두 번째는 이탈리아 정당 ‘동맹’(구 북부동맹)의 대표 마테오 살비니가 2018년 총선을 앞두고 행한 연설의 일부다. 그는 총선 후 연립정부의 부총리이자 내무부 장관이 되었다. 세 번째는 도널드 트럼프가 2012년에 트위터에 올린 메시지고, 네 번째는 역시 그가 2020년 백악관 정례브리핑에서 한 말이다. (브라질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 영국 독립당(UKIP), ‘독일을 위한 대안’(AfD)과 같은 우파 포퓰리즘 세력도 기후변화를 부정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세계의 유수한 정치지도자들이 이렇게 노골적인 과학부정론 편에 서는 현실을 어떻게 보아야 하나. 나아가, 유권자가 이런 지도자를 뽑는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이런 점에서도 현재를 ‘포퓰리즘의 시대’라고 칭할만 하다.) 

이제 과학부정론은 단지 스쳐 지나가는 에피소드일 수 없다. 우리는 이미 코로나라는 심각한 세계적 유행병을 겪었고, 지금도 기후변화의 방어선에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주요 정치지도자의 입을 통해 전파되는 단계에 이른 과학부정론은 현실에 지극히 유해한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즉 어떤 경우, 과학부정론 때문에 사람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수 있다. 

트럼프, 살비니, 에르도안 모두 포퓰리즘(인민주의) 정치의 대표자로 꼽히는 인물이다. 이 때문에 포퓰리즘과 과학부정론이 매우 강한 친화성을 보이는 이유를 탐색하려는 시도가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정치적 포퓰리즘’과 짝을 이루는 ‘포퓰리즘 스타일의 과학부정론’, 또는 ‘과학 관련 포퓰리즘’(science-related populism)을 개념화한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문제가 또 있다. 좌파/리버럴(자유주의자)/진보주의자는 체질적으로 과학부정론에 대해 면역을 갖추고 있고, 결코 그쪽으로 경도될 수 없는가. 보통 그들은 자신이 이성과 과학을 존중하는 ‘과학적 인간’이라고 자임하기 때문에, 결코 그럴 리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기 쉽다. 또한,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진화론이나 기후변화를 부정하고 백신에 반대하는 사례가 대부분 우파, 보수주의자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자신들과 무관하다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유전자변형농산물(GMO)의 안전성 문제를 두고, 좌파/리버럴 내에 반과학적 태도가 확산되고 있으며, 이러한 흐름이 좌파 포퓰리즘/극단주의를 형성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그들이 GMO의 안전성에 문제를 제기할 때 동원되는 논법이 기후변화나 백신을 부정, 거부할 때 활용하는 논법과 사실상 동일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그들이 초민족 농업기업(대표적으로 몬산토)의 경제적 이익과 GMO 기술의 안전성 문제를 구별하지 못하고, 과학부정론의 논법을 무분별하게 활용한다는 말이다. 

필자가 이 문제에 관심을 두는 것은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논란 때문이다. 즉,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우려하거나 반대하는 다양한 목소리 중에는 과학부정론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밖에 없는 주장이 상당히 포함되어 있다. 필자도 오염수 방류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비과학적 괴담 유포자라고 딱지 붙이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한국의 좌파/리버럴도 ‘광우병 쇠고기’ 촛불집회나 GMO 찬반론을 거치며,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과학부정론의 논리체계에 익숙해진 것이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글은 먼저 포퓰리즘 스타일의 과학부정론이 무엇인지, 어떤 특징을 지니는지 살펴본다. 그 다음 좌파/리버럴 성향의 과학부정론은 존재할 수 없는지, GMO 논란을 사례로 들어 따져본다. 마지막으로 후쿠시마 오염수 논란에 등장한 논법에서 과학부정론의 요소들을 찾을 수 있는지 검토하고, 그 함의를 제시해 보겠다.    
 
 

2. 포퓰리즘에서 과학부정론에 이르는 길: 세 가지 경로  

 
먼저 몇 가지 핵심 개념을 정의해보자. 정치적 포퓰리즘은 ‘선한 인민’ 대 ‘타락한 엘리트’라는 도덕적 이분법을 내장한 담론을 활용한다. 포퓰리스트는 자신이 엘리트에 대항하는 인민의 목소리라고 자임한다. 달리 말하면, 포퓰리즘에서 핵심 행위자는 선한 인민과 타락한 엘리트이며, 이들은 누가 주권을 행사할 것이냐를 두고 대립한다. 포퓰리즘은 타락한 엘리트가 주도권을 행사하는 대의제를 거부하고, ‘인민의 의지’가 어떤 매개도 없이, 직접 정치로 표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포퓰리스트가 말하는 ‘인민’은 그 구성원이 매우 동질적인 집단이며(정치적으로 권력을 빼앗기거나, 경제적으로 재산이 거의 없거나, 문화적으로 특정 민족에 소속된 동질적 집단), 따라서 통일적인 목소리와 의지, 즉 ‘인민의 의지’를 지닌다. 따라서 포퓰리스트는 인민 내부에서 서로 견해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무시하거나, 존재한다면 그것은 타락한 엘리트의 속임수 때문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므로 포퓰리스트가 말하는 인민의 의지는 다수의 의지를 뜻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민의 의지가 무엇인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나. 결국 포퓰리스트는 자신의 주장이 곧 ‘인민의 의지’라고 일방적으로 단언할 따름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의제를 부정하고 인민의 의지가 직접적으로 표출되어야 한다는 포퓰리즘 정치관은 인민의 의지가 무엇인지 자의적으로 규정할 권능을 보유한 포퓰리즘 정치집단의 독재로 실현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포퓰리스트는 법은 곧 ‘인민의 의지’를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고 보기 때문에, 현대적 의미의 법치(법의 지배)도 부정한다. 즉 현대 민주주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법치와 대의제를 부정하는 셈이다. 

다음으로, ‘과학 부정론’은 그와 관련된 과학공동체 내에 확립된 합의를 체계적으로 부정하는 것을 말한다. 그 동기나 논변은 다양할 수 있다. 담배산업의 사례처럼, 경제적 이익을 위해 과학적 합의를 부정할 수 있다. 선거에서 이익을 노릴 수도 있는데, 트럼프 대통령이 기후변화를 부정할 때, 공해배출 산업의 일자리가 없어질 경우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하는 선거구를 의식했을 것이다. 개인의 자유를 배타적으로 강조하는 자유지상주의/초자유주의(libertarian) 집단은 국가에 의한 백신 강제접종이 개인이 선택할 자유를 침해한다는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 

그렇다면 포퓰리즘 스타일의 과학거부론, 또는 과학과 관련된 포퓰리즘은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있나. 크리스토발 벨롤리오는 「과학을 거부하는 인민」(2020)이라는 글에서 이를 ① 타락한 과학자 엘리트에 대한 ‘도덕적’ 거부, ② 기술관료 지배(technocracy)에 대한 ‘정치적’ 거부, ③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인식론적’ 거부로 나누어 살펴본다.  
 
 

1) 타락한 과학자 엘리트에 대한 ‘도덕적’ 거부 

포퓰리즘은 완결적인 정치강령을 제시하기는 매우 파편적이고 빈약한 이데올로기다. 자유주의-보수주의-사회주의라는 현대 정치이데올로기를 거부한다는 것 외에는, 그 내용이 텅 비어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포퓰리즘은 현대 정치이데올로기의 일부 요소를 자의적으로 취사선택하는데, 어떤 경향을 좀 더 취사선택하느냐에 따라 우파 포퓰리즘이나 좌파 포퓰리즘이 나타날 수 있다.  

라틴 아메리카 포퓰리즘의 예를 들면, 아르헨티나의 페론과 브라질의 바르가스가 대표하는 첫 번째 물결은 수입대체 산업화를 장려하고 반(反)제국주의 담론을 적극 활용했다는 점에서 좌파 포퓰리즘으로 분류할 수 있다. 아르헨티나의 메넴, 브라질의 멜루, 페루의 후지모리는 신자유주의라는 브랜드를 들고 나왔는데, 사유화와 시장개방을 장려했다는 점에서 우파 포퓰리즘으로 규정할 수 있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에콰도르의 코레아, 볼리비아의 모랄레스, 아르헨티나의 키르치네르는 다시 좌파적 색채를 띤다. 하지만 이들도 역시 엄밀한 의미에서 마르크스주의 블록은 아니므로, 언론은 이를 ‘레드’가 아니라, ‘핑크’ 타이드(분홍 물결)라고 불렀다. 

벨롤리오는 포퓰리즘 좌파와 우파를 판독하기 위한 기준의 하나로, 그들이 비난하는 ‘타락한 엘리트’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봐야 한다고 제시한다. 즉, 대체로 우파 포퓰리즘은 언론, 정치계, 국제조직에서 암약하는 리버럴 엘리트를 비난하는데, 그들이 민족적 이익을 팔아먹고 다닌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미국 트럼프, 브라질 보우소나루, 잉글랜드 패라지, 칠레 카스트 등등. 반면 좌파 포퓰리즘에서는 대기업과 국제금융기구가 타락한 엘리트의 전형이다. 예를 들어 부채위기에 몰린 그리스의 시리자는 유럽연합, 유럽중앙은행, 국제통화기금(IMF)이라는 ‘트로이카’를 핵심적인 비난 대상으로 삼았다. 

이러한 차이도 있으나, 그들이 함께 비난하는 엘리트가 지식인과 전문가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사실에도 주목해야 한다. 즉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안다고 믿는 자를 향해 가고 있다. 과학자는 당연히 이런 범주에 포함된다. 그들이 보기에 과학자는 보통 시민의 경험과 동떨어진 대학과 실험실에 있으면서 과잉교육을 받은 오만한 특권층이다. 

따라서 도덕적 비판은 특정한 과학 이론이 아니라, 타락한 엘리트 집단에 속한 구성원으로서 과학자를 목표로 삼는다. 이런 경우, 포퓰리스트는 전통적인 과학을 거부한다기보다는, 투명하지 않은 이익, 즉 사익을 추구하면서 나쁜 과학을 수행하는 과학자 집단을 고발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2012년 트럼프의 트위터를 보면, 기후 과학자는 미국 경제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려는 외국(중국)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려는 음모에 참여하는 집단이다. 사실 기후변화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매일매일 체감하기 어렵다. 또한,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국제적인 정책조정과정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 따라서 기후변화는 거짓말이고, 미국 경제를 갉아먹으려는 외국의 음모일 뿐이라는 주장이 등장할 아주 작은 틈이 열릴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기후 과학자 집단 거의 모두가 그런 음모에 가담하고 있다고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음모론의 세계관에서는 음모의 증거를 찾을 수 없다는 게, 음모를 꾸민 자들이 그만큼 강력하고 치밀하다는 증거일 따름이다. 즉 음모의 객관적 증거가 없다는 게 결코 음모론 신봉자들을 약화할 수 없다. 따라서 타락한 과학자 집단을 비난하는 포퓰리즘적 과학부정론은 음모론과 짝을 이룰 수밖에 없다. 

기후변화는 포퓰리즘의 음모론이 활개 치는 전형적인 사례다. 그러나 다른 사례에서도 음모론적 심성을 찾을 수 있다. 백신거부 운동은 제약회사가 백신을 팔아먹기 위해 온갖 더러운 행동을 벌인다고 의심한다. (최근에 출현했던 극단적 사례를 보면, 코로나 바이러스를 초민족 제약회사가 창조했다는 주장도 있었다.) 또한 반GMO 운동도 농화학 다국적기업의 경제적 이익과 생명기술의 안전성 문제를 혼동한다. (GMO 문제는 뒤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일부 무슬림 세력의 시각에서 볼 때, 다윈 이론은 서방의 음모다. 

이러한 ‘도덕적’ 과학거부는 선택적이고 비일관적이다. 즉 포퓰리즘 운동이나 그 지도자가 싫어하는 이론을 지지하는 과학자들만 목표로 삼는다. 그와 같은 이유로, 자기 입맛에 맞는 목소리를 내는 과학자의 미덕을 과장하기도 한다. 즉 도덕적 거부는 ‘기회주의적’ 과학부정론인 셈이다. 
 

2) 기술관료 지배에 대한 ‘정치적’ 거부

포퓰리즘이 ‘운명의 적수’라고 생각하는 상대방은 기술관료 지배(테크노크라시)다. 포퓰리스트 지도자 본인은 인민의 의지를 따라 통치하고자 하나, 기술관료(테크노크라트)는 인민의 의지와 무관하게, 기술적이고 객관적 기준에 따라 통치하려고 한다.  

그러나 포퓰리즘과 테크노크라시는 서로 상극이라고 생각할 테지만, 실제로는 매우 닮았다. 즉 민주주의, 대의제도가 제공하는 중재와 숙의(deliberation) 과정을 벗어나고자 한다는 사실 말이다. 

최근 포퓰리즘 운동은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전문가(specialist, expert)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민에 의해 선출되지 않은 전문가들(테크노크라트)이 공공 정책을 결정하고, 대중은 정치과정에 배제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전문가는 종종 과학적 지식에 호소한다. 

따라서 기술관료 지배에 대한 정치적 거부로서 포퓰리즘적 과학부정론에도 그 뜻이 ‘갸륵하다’고 여겨질 부분이 있어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이 정치과정에서 전문가를 배제하자고 할 때, 그 공백을 채우는 것은 ‘인민의 의지’를 가장한 포퓰리스트의 독재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게다가 민주주의는 기술관료 지배와 동의어가 아니다. 실제로 민주주의에서는 특정 문제에 관해 전문가나 과학자가 내린 기술적 평가가 자동적으로 정치적 결정으로 전환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과학은 기후변화의 영향을 완화하기 위해 화력발전소를 빨리 폐쇄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할 수 있으나, 이것이 기계적으로 정치적 판단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결정은 다른 측면들, 예컨대 발전소 노동자의 고용이나 지역사회에 미치는 영향과 같이 다면적인 요소도 고려해야만 한다. 

오히려 문제는 민주주의의 정치적 결정 과정에서 과학적 지식을 투입하는 게 양질의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을 주는가, 아니면 과학적 지식을 배제하는 게 더 바람직한가 따져보는 것이다. 과학은 정치과정에서 가능한 한 가장 정확한 방식으로 실제적 현실을 설명함으로써, 민주주의의 행위자가 정치적 결정을 내릴 때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다. 

현존 민주주의가 기술관료 지배로 타락할 가능성을 우리가 언제나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하여 과학적 지식을 투입하는 민주적 정치과정이 곧 기술관료 지배, 또는 과학주의(scientism)라고 동일시할 수는 없다. 오히려 과학적 지식의 거부는 포퓰리즘을 향한 타락이라는 위험을 동반한다. 


3)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인식론적’ 거부

타락한 과학자에 대한 도덕적 거부와 달리, ‘인식론적’ 거부는 과학적 방법 그 자체를 거부한다는 특징을 보인다. 즉 인식론적 거부는 공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할 때, 과학적 추론보다는 인민의 상식이 더 신뢰할 수 있는 인지 메커니즘이라고 본다. 과학은 불필요하게 복잡하며, 이러한 복잡성은 실제적 현실을 올바르게 설명하는 일을 오히려 왜곡한다. 평민(plebeian)의 지식은 귀족(patrician)의 지식에 비해 더 폭넓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결정을 정당화하는 인식론적 능력이라는 기준에서도 더 우월하다.  

따라서 포퓰리스트 지도자는 과학에 대한 이해도가 빈약하다고 하여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미덕이라고 내세운다. 학문적 연구나 전문적 논문은 어떤 이슈에 대해 현실의 인민이 생각하는 바에 비하면 어떤 가치도 없다. 즉 ‘전문가의 오만’에 직면하여, 포퓰리스트는 ‘무지의 오만’으로 대응하는 셈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트럼프 전 대통령의 트위터를 보자.

“동부지역에서, 새해 전야는 가장 낮은 기온을 기록할 가능성이 있다. 아마도 우리는 훌륭한 지구온난화를 약간 이용할 필요가 있다. 다른 나라가 아니라, 바로 우리나라는 바로 그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해 수 조 달러를 써야만 하는데.” (2017.12.)
“아름다운 중서부에서 체감온도가 영하 60도라는 최저 기록에 도달한다. 지구온난화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지구온난화여) 제발 빨리 돌아오라. 우리는 네가 필요하다!” (2019.1.)

트럼프 대통령의 트위터 메시지에서 우리는 과학적 지식에 대한 ‘인식론적’ 거부를 발견할 수 있다. 그는 기후변화 대신 지구온난화라는 표현을 쓰는데, 우리가 가장 추운 겨울을 마주하는 한 지구는 온난화될 수 없고, 과학자는 틀렸다고 말한다. 달리 말하면, 추운 날씨 때문에 고통을 겪는 평범한 사람들의 상식은 실험실에 있는 과학자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현실을 인식할 수 있다는 생각을 전제로 삼는다. 이때 트럼프 대통령은 현대과학의 어떤 ‘취약점’을 활용하는데, 그 취약점이란 현대과학의 발견이 종종 인민의 상식, 직관에 반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예를 들어 보면, 다윈 이전에는 윌리엄 페일리(1743~1805)의 ‘시계공 논증’이 지배적이었다. 페일리에 따르면, 우리가 황량한 바닷가에서 버려진 시계를 찾으면,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시계가 마술에 의해 조립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보면, 그 시계는 지적 존재가 신중하게 설계하고, 계획에 따라 부품을 조립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페일리에 따르면, 우주는 시계와 같고 따라서 지적 설계자를 필요로 한다. (페일리가 말하는 우주의 지적설계자는 사실 신을 뜻하고, 따라서 지적설계론은 ‘창조론’의 다른 표현이 된다.)

하지만 다윈은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했다. 생명 진화의 결과는 결코 사전에 결정된 계획을 따른 게 아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다윈의 진화론을 두고 ‘목적론에 가한 최후의, 자비의 일격(coup de grace)’이라고 불렀다. (최후의, 자비의 일격이란 심각한 부상으로 고통을 겪는 인간이나 동물의 목숨을 끊는 행동을 말한다.)  

사람들이 처음에는 진화론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는데, 단지 종교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고, 직관에 반했기 때문이다. 진화론을 거부했던 사람들은 ‘이제 가장 완벽하고 아름다운 시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를 전혀 알 필요가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고 비꼬았다. 상식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지적설계 이론이 다윈의 진화 이론보다 더욱 설득력이 있을 수도 있다. (양자역학은 말할 필요도 없는데, 양자역학은 우리 인식의 단순성과 명료성에 도전한다. 사실 인간의 직관에 반하는 과학의 대표적 사례는 ‘지동설’이다.)  

포퓰리즘은 이처럼 과학적 발견이 대중의 상식, 직관에 반하는 경우가 존재할 수 있다는 틈을 활용하여, 인민의 지식이 전문가의 지식보다 더 가치 있다고 주장하면서 분출할 수 있다. 만약 양자 사이에 긴장이나 충돌이 있다면 공공정책은 상식을 따라야 한다. 

영국의 브렉시트를 이끌었던 지도자들이 바로 이런 주장을 펼쳤다. 예를 들어 보수당의 법무무장관이었던 마이클 고브는, 유럽연합 탈퇴 국민투표를 앞두고 어느 인터뷰에서, 브렉시트를 지지하는 경제학자의 이름을 댈 수 있냐는 질문에 대해 “나는 우리 영국 사람들이 전문가들에 대해 진절머리를 낸다고 생각합니다”고 말했다. 거의 모든 싱크탱크가 브렉시트의 위험을 경고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 말이었다. 영국독립당의 지도자 패러지도 브렉시트가 평범한 보통사람들의 승리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와 유사하게, 헝가리 총리 빅토르 오르반는 최근 두 번의 선거에서 정책토론에 참여하길 거부했다. 오르반이 말하길 올바른 정책이란 인민의 상식이 내리는 명령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경험적 증거를 평가하는 토론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 

포퓰리스트의 정치적 행동에 담긴 급진주의는 신속하고, 단순하며, 감정적이다. 반면 과학적 성찰은 시간이 걸리고, 복잡하며, 이성에 호소한다. 선거라는 측면에서 보면, 포퓰리스트가 과학적 성찰보다 종종 유리할 수 있다.

한 가지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포퓰리즘의 인식론적 과학거부에 깔려 있는 직관은 루소의 『예술과 과학에 대한 논설』(1750)에서 예상되던 바다. 루소에 따르면, 문명이 자연적으로 선한 인간성을 망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이 선천적으로 보유한 분별력은 복잡한 교육과정을 통해 타락한다. 루소가 보기에, 과학의 방법과 범주에 의존하지 않는 인식, 즉 현실에 대한 솔직하고 직접적인 인식보다 우월한 학습은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적 추론은 현상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흐리게 하며, 진정한 이해를 위해서라면 자기 성찰과 상식이면 충분하다. 우리는 루소의 이론과 트럼프의 말 사이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영국의 자유주의 정치철학자 이샤야 벌린은 루소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투적 평민(plebeian)”이라고 불렀다. 트럼프는 자신이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선언했다. 루소와 트럼프에 따르면, 진정한 지혜는 평범한 인민에 속하며, 따라서 과학을 통해서 인민의 지적 능력을 정교화하려는 어떤 시도도 그것을 왜곡할 뿐이다.  

그러나 루소는 마르크스의 선구자가 될 수 없다. 마르크스주의 운동은 ‘지적 차이의 감축’을 사회운동의 가장 중요한 목표 중 하나로 설정하기 때문이다. 현실에 대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인식의 확대는 노동자 자기해방의 필수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자는 무지가 해방을 낳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3. 좌파/자유주의의 과학부정론도 존재하는가 

 
지금까지 포퓰리즘에서 과학부정론에 이르는 세 가지 길, 즉 ① 타락한 과학자 엘리트에 대한 ‘도덕적’ 거부, ② 기술관료 지배(technocracy)에 대한 ‘정치적’ 거부, ③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인식론적’ 거부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대표적인 사례로 든 진화, 백신, 기후변화 부정론은 주로 정치적 우파 쪽에서 제기한 것이다. 그렇다면, 좌파/자유주의의 과학부정론은 존재하지 않는가. 보통 좌파/자유주의자는 자신이 이성과 과학을 존중하는 ‘과학적 인간’이라고 자임하기 때문에, 결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마이클 셔머의 짧은 글, 「과학에 대한 자유주의자들의 전쟁: 어떻게 좌우 양극단의 정치는 과학을 왜곡하는가」(2013)와 리 맥킨타이어가 쓴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과 즐겁고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는 법』(위즈덤하우스, 2022, 원제는 『과학부정론자와 어떻게 대화할까』)의 6장, ‘유전자변형생물체: 진보성향의 과학부정론자도 존재할까?’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먼저 셔머의 글을 보면, 저자 역시 자유주의자가 과학과 벌이는 전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독자 대부분이 믿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글을 시작한다. 그의 설명을 따라가 보자. 

2012년 갤럽 여론조사에 따르면, 공화당원의 58%는 지금으로부터 1만 년 전 내에 신이 그 자신의 모습대로 인간을 창조했다고 믿는데, 민주당원은 41%였다. 공공종교연구소의 2011년 조사에 따르면, 지구가 점점 더 더워진다는 사실을 민주당원은 81%가 믿는 데 반해, 공화당원은 49%가 믿는다. 과학을 대하는 공화당원의 태도가 점점 더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민주당원은 아무 문제도 없는가. 민주당원의 41%는 창조론자이며, 19%는 지구온난화를 의심한다는 수치를 가볍게 넘길 수는 없다. 이러한 수치는 좌파/자유주의자가 과학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통념을 굳힐 정도로 믿음직한 수준은 아니다. 

그런데 셔머에 따르면, 극좌 진보파의 경우, 이런 사례를 뛰어넘는 최신의 반과학이 존재한다. 과학 저널리스트 비어조우와 캠벨이 2012년 쓴 『뒤에 두고 온 과학: 기분을 좋게 하는 오류들과 반과학적 좌파의 부상』은 이를 기록했다. 저자들에 따르면, “보수주의자들이 과학에 대한 전쟁을 선언한 게 진실이라면, 진보주의자들은 아마게돈(세계 종말에 펼쳐지는 선과 악의 대결)을 선포했다.” 예를 들어 에너지 이슈를 보면, 진보주의적 자유주의자는 폐기물 처리 문제 때문에 원자력을 반대하고, 지구온난화 때문에 화석연료에 반대하며, 댐이 강의 생태체계를 교란하기 때문에 수력을 반대하고, 새가 죽기 때문에 풍력을 반대한다. 그 기저에는 “자연적인 모든 것은 선이며, 비자연적인 모든 것은 악”이라는 관념이 작동한다.  

저자들이 보기에, 보수주의는 생명, 성(性)의 순수성, 신성함에 강박적인 태도를 보이는 반면, 좌파는 환경에 신성한 가치를 둔다. 공기, 물, 특히 식품의 순수성과 신성함에 대해서는 매우 강렬한 열정을 드러낸다. 유전자변형농산물(GMOs)에 관해 자유주의적 진보주의자와 대화를 나눠보면, (초민족 농업기업) 몬산토나 이윤과 같은 용어가 삼단논법으로 쏟아진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지난 1만 년간 육종과 선택을 통해서 농산물의 유전자를 계속 변형했다. 이는 지금도 수십억 명을 먹여 살리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

셔머는 정치적 극단주의(우리의 표현을 쓰자면 정치적 포퓰리즘)를 억제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자유주의/보수주의 각각의 중도, 온건파는, 영역에 따라 다소 차이가 나타나긴 하지만, 대체로 거의 비슷하게 과학을 포용하는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4. 좌우 포퓰리즘이 공유하는 과학부정론의 논변: 기후변화 부정론과 GMO 거부론의 공통점 

 

1) 과학부정론의 다섯 가지 논법 

이제 좌파/자유주의의 과학부정론에 대해 좀 더 깊이 들어가 보자. 매킨타이어는 과학부정론이 공유하는 특징을 다섯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체리피킹, 즉 자신에게 유리한 자료나 사례만 선택하고 불리한 것은 무시하는 방식으로, 증거를 수집한다. 둘째, 음모론을 믿는다. 셋째, 가짜 전문가나 신뢰할 수 없는 연구에 의존한다. 넷째, 논증이 비논리적이다. 다섯째, 과학이 완벽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과학이 달성할 수 있는 범위를 뛰어넘는 불가능한 목표를 설정한다. 기후변화 사례를 들어 설명해보면 이런 표로 정리할 수 있다.
 

우리가 이런 특징을 뽑아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만약 좌파/자유주의자가 어떤 과학 이슈에 관해 이러한 다섯 가지 전형적인 논법을 활용한다면, 그들 역시 과학부정론이라는 함정에 빠진 것이 아닌가 자문해야하기 때문이다.
 

2) ‘과학의 완벽성’이라는 기준

하나 더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필자가 보기에 과학부정론의 전형적인 논법 중에서 가장 까다로운 게 ‘과학의 완벽성’을 요구하면서 조금이라도 불확실성이 있어 보이면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식의 태도다. 실제로 우리는 이런 식의 주장을 흔히 본다. “백신이 100% 안전한가요?” “지구온난화에 대한 다른 증거들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지 않나요?” “흡연과 폐암 사이의 인과관계는 결정적으로 밝혀진 적이 없지 않나요?” 

이에 대해 매킨타이어는 이렇게 설명한다. “과학적 가설의 기초에는 언제나 약간의 잔여 불확실성(residual uncertainty)이 존재한다. 과학이론을 수정하거나 심지어 뒤집는 새로운 증거가 항상 나올 수 있다는 기초적인 생각을 포기하지 않는 한, 과학이 수학이나 연역논리에서 발견되는 증명, 확실성과 동일한 기준에 부합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하지만 과학부정론자들의 손안에서는 극소량의 의심조차 과장될 수 있다.” 

이어서, “과학에는 인증(warrant)이라는 것이 있는데, 어떤 이론이 성립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고, 혹시라도 반증될 수 있을지 엄격한 검증과정을 거쳤다는 뜻이다. 그러면 나중에 몇몇 미래의 증거들이 그것을 뒤집어버릴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경우에라도, 그것은 사실이라고 믿을 만한 합리적 근거가 있는 것으로 인정받는다.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사실상 경험적 세계에서 모든 완벽한 증거가 도출될 때까지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이는 절대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말이다. 자, 우리는 갑자기 다윈의 진화론을 믿을 근거를 잃어버렸다. 그러나 (과학이 완벽해야 한다는 것은) 신뢰에 대한 불합리한 기준일 뿐이다.”

다시 정리해보면, 과학부정론은 과학공동체가 합의 또는 인증한 어떤 과학 이론이라도 약간의 ‘잔여 불확실성’이라도 존재한다면 그 과학 이론을 다른 비과학적 주장과 동급으로 취급하려 한다. 이는 우리가 이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따라서 우리의 행동이 적합한지, 아닌지도 알 수 없다는 지적 회의주의로 우리를 이끈다.   
 

3) GMO 거부론과 과학부정론 

GMO의 안전성은 과학적 합의와 대중적 인식 사이에 매우 큰 간극이 있는 쟁점 중 하나다. 2015년 퓨 리서치 센터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과학진흥협회(AAAS) 회원 중에 88%가 GMO를 안전한 식품으로 생각했다. 2012년 미국과학진흥협회가 발표한 성명서 「유전자변형식품 라벨 부착에 관하여」(2012.10.20.)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밝혔다. 

“과학은 매우 명료하다. 생명공학의 현대 분자기술에 의한 작물개량은 안전하다. 세계보건기구, 미국의학협회, 미국 국립과학원, 영국 왕립학회, 기타 모든 권위 있는 기관이 사실관계를 따져본 결과, 모두 동일한 결론에 도달했다. 유전자변형 작물 추출 성분을 함유한 식품을 섭취하는 것은 종래의 식물개량 기술로 변형된 작물의 성분을 함유한 같은 식품을 섭취하는 것보다 위험하지 않다.” 
“미국에서 규제승인을 받기 위해서, 새로운 유전자변형 작물 각각은 엄격한 분석과 테스트를 거처야만 한다. 새로운 작물은 부모 작물과 동일하다는 게 증명되어야 하며, 만약 새로운 단백질 특성이 추가된다면, 단백질이 독성이 없고 알러지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사실이 증명되어야 한다. 대중의 오해와 달리, 유전자변형 식품은 식품공급에 추가된 작물 중에서 가장 광범위한 테스트를 거친다.”     

반면 이 여론조사에서 대중은 37%만 유전자변형 식품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88% 대 37%, 즉 51% 포인트에 이르는 과학자와 대중의 인식 격차는 기후변화 이슈보다도 더 크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GMO는 과학 이슈에 관해 과학자와 대중 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실패한 가장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과정에서 GMO 반대 운동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매킨타이어는 자신이 정리한 과학부정론의 전형적인 논법이 GMO 반대론에서 정확히 동원된다고 설명한다. 
 
 

4) GMO 반대론과 사전 예방원칙

매킨타이어에 따르면, GMO 반대론자와 대화할 때 넘어야 할 벽이 더 있다. “유전자변형 농산물을 먹지 않을 수도 있는 선택지가 있는데, (심지어 아무리 위험이 극소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굳이 유전자변형 농산물을 먹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사전 예방원칙’에 따라, 불필요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결론을 성급히 내리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상당히 합리적인 주장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백신 거부론자의 논리, 즉 “백신의 위험이 아무리 낮더라도, 내가 안 맞고도 건강하게 살 수 있다면 굳이 백신을 맞아야 하는가”라는 식의 논리와 유사하다고 반박할 수도 있다. 

이에 대해 백신 접종을 지지하지만 GMO는 반대하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답할 것이다. “백신접종은 내가 하지 않으면 집단면역이 형성되지 않으므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GMO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여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게 있는가?”

매킨타이어는 사전 예방원칙을 내세우는 이러한 논리가 식품이 비교적 저렴하고 구하기도 쉬운 국가에 사는 사람에게만 가능할 것이라고 말한다. 비타민A 성분을 강화한 황금쌀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비타민A 결핍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수억 명의 어린이와 임산부의 건강에 도움을 줄 것이다.

피터 싱어는 “다양한 유전자변형 식품 중 일부는 공공의 건강에 도움을 줄 수 있고, 또 다른 일부는 기후변화 시대에 식량을 생산해내야 하는 쉽지 않은 목표 달성에 기여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양한 유전자변형 작물의 장점을 따로따로 고려해야 할 것이다.” 싱어는 모든 GMO를 일반적으로 거부하는 게 아니라, 특정 GMO가 현재 세계에서 유익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각각 평가하여 도입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한 셈이다. 실제로 GMO 기술이 살충제 사용을 줄이고, 연료사용을 감소시켜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였다는 연구결과도 있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한다면, “GMO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여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게 있는가”라는 의문에 대해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야 할 바도 많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5. 한국에서 벌어진 오염수 배출 논란 

 
우리가 과학부정론을 과학공동체의 합의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때, 후쿠시마의 ‘처리된 오염수’의 안전성 문제에 관해 과학공동체의 합의가 존재하냐가 가장 핵심적인 질문이 될 것이다. 그다음에 과학자의 인식과 대중의 인식 격차가 얼마나 큰가, 그리고 무엇이 이런 격차를 낳았는가 검토해야 한다.  
 

1) 오염수 안전성 문제, 과학적 합의는 존재하지 않는가  

위에서 인용한 사례에서 “미국과학진흥협회(AAAS) 회원 중에 88%가 GMO를 안전한 식품으로 생각했다”는 조사결과처럼, 한국의 과학자 집단의 판단을 묻는 직접적인 조사결과를 필자가 본 적은 없다. 그렇지만, 우리가 “과학계의 찬반양론이 팽팽하다”거나, “과학계의 합의가 없다”고 생각해야 할까. 필자는 그렇지 않다, 즉 과학계의 일반적 합의는 있다고 생각한다.

아래의 표는 《동아사이언스》에 2023년 7월 9일부터 7월 15일까지 일곱 차례 연재된 기사를 필자가 정리한 것이다. 이 중에서도 “도쿄전력에서 삼중수소를 규정에 맞게 희석한다면, 방류 시 배출되는 삼중수소의 양 자체는 자연계나 다른 국가 방출량에 비해 적다는 것이 핵물리학, 방사선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해류의 흐름 시뮬레이션에서도 우리나라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을 것으로 확인됐다. 오염수가 제주도까지 오는 데 4~5년 정도가 걸릴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측했다”는 팩트체크가 가장 핵심일 것이다.  
 
 

2) 일부 정치인과 언론의 체리피킹

그러나 정치인이나 언론이 ‘체리피킹’을 통해 과학적 합의에 반하는 주장을 반복적으로 제기할 경우, 이에 관해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면 과학적 합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기 쉬울 것이다. 

그렇다면 과학자 집단과 대중의 인식 차이는 얼마나 클까. 여론조사기관 리서치뷰가 환경운동연합 의뢰로 5월 19일부터 22일까지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후쿠시마 오염수 해양 방류 찬반을 물은 결과 85.4%가 ‘반대한다’고 답했고 ‘찬성한다’는 10.8%에 그쳤다(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1%p). 또한, 후쿠시마 오염수 안전성에 대한 일본 정부 주장을 ‘신뢰하지 않는다’가 79%, ‘신뢰한다’가 17%로 나왔다. 그런데,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반대한다거나 일본 정부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게, “우리나라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을 것이라는 우리나라 과학자들의 주장을 믿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므로, 사람들이 과학적 합의에 대해 얼마나 인지하고 있느냐 여부는, 이 질문을 통해서 정확히 알기 어렵다.   
그러나 어쨌든 일부 정치인과 언론의 체리피킹은 문제가 있는 수준에 달한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7월 19일 보수성향단체 공정언론국민연대 이홍렬 단장은 KBS, MBC, YTN 등 공영방송에 오염수 관련 전문가가 출연한 빈도를 분석해 발표했다. 5월에는 안전하지 않다는 의견을 낸 전문가가 22회 출연한 반면, 안전하다는 의견을 밝힌 전문가는 2회 출연에 그쳤다. 6~7월에는 각각 출연횟수가 8회와 2회인 것으로 파악됐다. 오염수 방류 반대 패널 중 가장 대표적인 전문가는 서균렬 서울대 명예교수와 이정윤 원자력 안전과 미래 대표인 것으로 조사됐다. 두 사람은 각각 18회, 12회 방송에 출연했다. 

또한 언론에서 전문가 토론이 심도 있게 진행되는 경우도 드물었다. 2023년 5월 18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핵고수 맞토론: 후쿠시마 오염수’를 진행했는데, 이 자리에는 서로 대립하는 입장에 선 서균렬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명예교수와 강건욱 서울대 핵의학과 교수가 참여했다. 이때 사회자 김현정 씨가 말하길, “두 분 다 단독 인터뷰로는 방송을 많이 했는데, 한 자리에서 마주 보고 의견교환을 하는 자리는 처음입니다. 아주 귀합니다.” 
 

3) IAEA 최종보고서와 음모론  

체리피킹과 함께 일종의 음모론도 맹위를 떨친다. 특히 2023년 7월 4일 국제원자력기구(IAEA) 최종보고서가 발표된 후, 국제원자력기구를 공격하는 발언이 이어졌다. 7월 5일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국제원자력기구가 설비 점검도 하지 않고 일본이 제출한 자료에 따라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며 “검증조차 안 된 결과에 우리 영해, 우리 생명을 통째로 맡길 셈인가”라고 말했다.

얼마 전까지 집권당이었고 지금은 제일 야당인 민주당의 대표가 국제기구의 공식 보고서를 제대로 검토하지도 않은 채 이렇게 공신력을 깎아내려도 괜찮은지 걱정이 들지만, 다른 의원들의 발언은 더 노골적이었다. 박광온 민주당 원내대표는 “IAEA 최종보고서는 검증 보고서가 아니라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의 용역 발주 보고서와 거의 같은 수준”이라고 했고, 국회 산업위원회에서 정청래 의원은 “깡통 보고서이자 백지 보고서”라고, 김회재 의원은 “누가 보더라도 IAEA는 사실상 일본과 함께 해양투기를 위한 공동작업을 한 것이란 추론이 된다”고 말했다. 또한, 7월 10일 이재정 의원은 “IAEA는 핵무기 사용을 막고 핵발전을 장려하기 위한 기관으로, 이런 문제(후쿠시마 오염수 문제)에 관여할 권한이 없다.” “그런데 마땅한 기구가 없다 보니 일본이 용역 계약을 발주한 것” “그렇다 보니 국제기구를 또다시 만드는 게 필요한 지점”이라며 “핵발전 부분을 일괄해서 통제할 수 있는, 그리고 검증할 수 있는 기관이 이 세상에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 의원들의 발언을 들어보면, IAEA는 일본 정부에 매수되었거나,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에 관여할 자격이 없는 집단처럼 들린다. 이는 전형적인 음모론적 접근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21년 9월 한국이 IAEA 이사회 의장국으로 선출되었을 때, 외교부 당국자는 “우리나라가 비확산 모범국으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IAEA 활동에 적극적으로 기여해 온 점을 평가받은 것”이라며 이를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4) 비논리적 논증, ‘과학의 완벽성’ 요구 

앞에서 GMO 반대론에서 나타나는 비논리적 논증의 사례를 소개했다. 예를 들어 몬산토 기업의 과거 행적에 문제가 있었다는 이유로, 유전자변형 기술을 활용하는 활동에 문제가 있다는 결론을 도출한다면 이는 논리적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매킨타이어는 이를 ‘구성의 오류’라고 하는데, 즉 일부분이 참이라고 하여 전체가 참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유전자변형 농산물인 황금쌀을 허용하면, 결국 (우생학을 포함해) 모든 유전자변형 기술을 허용하게 될 것이다”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미끄러운 경사길 논증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즉 A를 받아들이면 B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고, 또 B를 받아들이면 C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식의 주장은 사실 필연적인 인과관계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는 매킨타이어의 지적을 보면서, ‘구성의 오류’나 ‘미끄러운 경사길 논증의 오류’는 필자 본인을 포함해, 활동가가 범하기 가장 쉬운 오류가 아닌가 되돌아보기도 했다. 이런 지적을 수용하고 보니,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논란에서도 이런 식의 주장을 찾아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하종강 교수가 《한겨레》에 쓴 글, “건강진단, 환경측정과 ‘후쿠시마 괴담’’’(2023년 7월 11일)을 보자.

그로부터 30여년 세월이 지난 지금, 건강진단 제도나 유해위험수당 제도는 상당 부분 그(백도명 교수)의 주장대로 바뀌었다. 그뿐 아니라 석면 사업장의 위험성도, 반도체 공장의 백혈병도, ‘라돈침대’의 영향도, 가습기살균제 문제도 적지 않은 세월이 지난 뒤에는 언제나 그의 주장이 옳았음이 밝혀졌다... “후쿠시마 앞바다에서 기준치의 100배를 넘는 물고기가 잡혀 소위 ‘세슘우럭’이라 불리고 있습니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백도명 선생의 ‘후쿠시마 괴담’을 내가 신뢰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자본주의 기업은 이윤추구를 우선시하면서 노동자나 시민이 위험물질에 노출되어 건강이 위협을 받더라도 이를 부정하거나 은폐하기 일쑤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우리가 경험한 객관적 현실이다. 따라서 노동자와 시민의 건강에 가해지는 위험성을 밝히려는 다양한 노력은 매우 소중하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하종강 교수의 주장이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가 위험하다고 밝히는 논리적 논증이 될 수는 없다. 부분이 참이라고 하더라도 전체가 참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신뢰하는 과학자가 지구는 평평하다고 하니, 지구는 평평하다”는 주장이 논리적 논증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기도 하다. 

하종강 교수의 칼럼 이후 대략 두 주 후, 2023년 7월 24일, 《한겨레》에 실린 또 하나의 칼럼으로, 강병철 소아청소년과 전문의가 쓴 글 ‘안전하면 바다에 버려도 되나’를 보자. 이 글은 앞의 하종강 교수의 입장과 달리, 이번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관한 과학계의 합의를 인정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일본이 후쿠시마 제1원전에 보관 중인 오염수를 해양 방출하기로 했다. 위험성이 매우 낮다는 데 동의한다. 지금까지 밝혀진 방사성 핵종의 위험 수준과 희석 효과, 해류 등을 고려하면 해양 생태계와 인체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할 것이다. 찜찜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과학적’ 결론이라면 이성의 힘으로 일차적 정서반응을 다스리는 것이 옳다.... 
물론 후쿠시마는 일회적 사건이다. 그러나 원전 사고는 끊임없이 일어났고, 앞으로도 일어날 것이다. 나는 이번 일이 나쁜 선례가 되어 방사성 물질을 해양에 투기하는 것이 일상이 될까 봐 두렵다.

논지를 정리해보면,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의 위험성이 매우 낮다는 과학계의 합의는 인정하지만, 그렇더라도 이번 방류를 인정하면 결국 방사성 물질을 해양에 투기하는 일이 일상이 될 것이므로, 방류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즉 ‘미끄러운 경사길 논증’이 방류를 반대하는 최종적 무기로 등장한다. 

다른 한편, 강병철 전문의는 과학이 겸손해야 한다는 주장도 빼놓지 않는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과학도 그렇다.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이 늘어나며, 우리가 아는 것은 진실의 근삿값에 불과함을 깨닫기 때문이다... 과학의 이름으로 남의 무지를 꾸짖고 싶은 유혹이 들 때는 먼저 자신이 충분히 아는지 돌아봐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진실의 근삿값’이란 과학적 가설에는 언제나 ‘잔여 불확실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달리 표현한 것일 터이다. 그렇지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아주 약간이라도 잔여 불확실성이 존재한다는 게 과학적 이론으로 인증될 수 없다, 또는 다른 비과학적 주장과 동급으로 취급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수백 수천 년에 걸쳐 경험적으로 안전하다고 체득한 것을 빼고, 새로운 무언가가 100%의 안전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안전하지 않다, 위험하다고 간주해야 하냐는 문제가 있다. 사실 이와 같은 논리라면 ‘후쿠시마 오염수’ 자리에 그 다른 무엇을 집어넣어도 상관없다. 예를 들어 유전자변형 농산물을 넣어도 똑같이 들어맞는다. “장기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는 주장이 이와 유사한 모든 사례에 적용될 것이다. 
 

5) 선제 예방원칙의 난점 

필자가 보기에 마지막 논점은 ‘과학의 완벽성’ 요구와 결합한 선제 예방원칙과 관련된다. 즉 “GMO의 안전성을 100%라고 말할 수 없다면, 굳이 이를 받아들여서 얻게 되는 이익이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유사하게 “아무리 위험성이 미미하더라도, 일본의 오염수 방류로 우리가 얻게 되는 이익(또는 국익)이 무엇인가” “아무리 위험성이 미미하더라도, 다른 방법이 있다면 굳이 방류라는 방법을 택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질문은 그렇다면 지금 한국을 포함해 핵 발전국이 삼중수소가 포함된 물을 방류해서 얻게 되는 다른 나라의 이익이 무엇이냐는 질문으로 돌아온다. 도쿄전력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오염수에 들어있는 삼중수소의 총량은 약 780 테라베크렐(TBq)인데, 이를 30년에 걸쳐 나눠서 희석하여 방출한다는 것이라, 1년에 총 22TBq씩 배출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 고리, 새울, 한빛, 한울, 월성 등 총 5개의 핵 발전소에서 2021년 7월부터 2022년 6월까지 1년간 배출된 삼중수소의 총량은 157.02TBq로, 일본이 연간 배출하겠다는 양의 7.14배다. 

즉 그렇다면, 왜 한국 핵발전은 ▵ 수증기 배출 ▵ 지하 2500km 지층 주입 ▵ 전기분해하여 수소 배출 ▵ 시멘트와 섞어 매설과 같은 방식을 고려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예 핵발전 자체를 중단해야 한다거나, 아니면 한국도 다른 대안을 실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논리의 일관성이 있으나, 일본은 안 괜찮고 한국은 괜찮다고 말한다면 논리에 모순이 발생한다.  
 
 

6. 핵 발전 비판과 후쿠시마 오염수 안전성 문제를 분리해서 보아야 한다

 
한국원자력학회는 6월에 발표한 입장에서 “국제정치적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서, 처리된 오염수의 해양 방류를 반대할 수 있는 것과는 별개로 방류수의 방사능 농도, 배출기준, 해양을 통한 확산, 생물학적 영향 등은 과학적 차원에서 검토돼야 할 사안”이라고 말했다. 필자가 보기에 이러한 입장은 여러 다른 맥락에서 오염수 방류를 반대할 수는 있지만, 안전성에 관한 과학적 합의를 마치 ‘지적 사기’인 것처럼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말로 들린다.  

필자는 이러한 주장에 공감하면서, 이에 덧붙여, 핵발전 비판과 후쿠시마 오염수 안전성 문제를 분리해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핵발전을 비판할 수 있는 논거는 다양하게 존재할 수 있고, 핵발전에 잠재한 여러 위험요소를 고려할 때 핵발전을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매우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이후, 한국의 수산물이 사람이 섭취하면 위험할 정도에 이른다고 주장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나아가 필자는 사회운동이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의 위험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자신도 모르게 ‘과학부정론’으로 기울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자고 제안했다. 게다가 필자가 보기에 포퓰리즘 정치는 과학부정론과 친화성이 매우 높다. 즉 너무나 쉽게 손을 잡는다. 달리 말하면, 사회운동은 포퓰리즘 정치에 경도되면서 과학부정론으로 빨려 가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과학부정론과 손을 잡다보니 포퓰리즘 정치를 지지해야 하는 상황으로 휩쓸려 가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마르크스주의는 대중의 과학적 인식을 확대하고, 과학과 정치를 결합해야만 노동자의 자기 해방이 가능하다고 인식한다. 그런 점에서 마르크스주의는 포퓰리즘 정치-과학부정론과 정반대 편에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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