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2023 겨울. 18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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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의 노동자운동

1987년 이후 한국 노동자운동의 역사 ④

박준형 | 회원, 공공운수노조 교육국장
 
 
※ ‘1987년 이후 한국 노동자운동의 역사’ 연재 네 번째인 이 글은 사회진보연대가 주최한 <2022 노동운동포럼>의 “2008년 금융위기 이후 한국노동운동 평가” 원고 일부를 대폭 보완한 글이다.
※ 이번 연재의 종합 결론 부분은 연재를 연장하여 다음 호에 싣기로 했다.
 


1.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변화의 기회 상실

 
“지난 10년 동안 우리가 목도한 노동자 계급 상태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노동자 간, 주로 재벌·공공부문과 민간 중소영세 부문 사이의 임금격차 확대와 이로 인한 노동자계급의 심각한 분할, 그리고 제조업 위기로 인한 경기침체와 구조조정, 국민경제의 위기였다. 그런데 왜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하는 노동자운동은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해서 어떤 실효성 있는 대안을 제시하거나 이 모순과 대결하는 자신의 투쟁을 제대로 조직하지 못했는가? 사업장을 넘어선 정치적·사회적 투쟁은 왜 민주당과 구별되지 않는 ‘촛불항쟁’으로 수렴되고 말았는가?”(「세계 금융위기 이후 한국 노동자운동 평가」, 《계간사회진보연대》, 2019년 여름호.)

IMF 구제금융 위기 이후, 2000년대 초 노동자운동의 주류 노선이었던 “산별노조-정치세력화” 양날개론은 2010년대에 이르러, 결과적으로 애초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실패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조직형식적으로는 산별노조들과 진보정당들을 남겼지만, 애초 이러한 조직 건설을 통해 이루고자했던 운동적 목표와는 상당히 다른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IMF 구제금융 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구조개혁의 전면화라는 상황에서 이러한 노선과 실천들이 타당했는지도 평가가 필요하다. 한편, 양날개론 노선과 별도로 신자유주의 노동유연화와 구조조정에 대한 대응은 자연스럽게 비정규직 노동조합 결성과 투쟁, ‘사회공공성 운동’으로 출현하기도 했다. 이들 운동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글은 IMF 위기 이후 제시되었던 대안들이 한계를 보이는 상황에서, 2008년 이명박 정부의 집권과 세계 금융위기라는 정세를 거치면서 노동운동이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다룬다.
 
 

2. 2008년 세계금융위기와 대응 투쟁

 
2008년 미국에서 시작된 세계금융위기는 한국 경제에도 직격탄이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민간과 공공의 많은 사업장에서 고용조정이 진행된다. 대표적이고 상징적인 투쟁으로 쌍용차 정리해고 투쟁(2009년), 철도노조 등 공공부문 선진화 저지 공동투쟁본부 공동파업(2009년),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투쟁(2011년)을 들 수 있다.

2009년 쌍용차 정리해고 파업, 2011년 한중중공업 정리해고 파업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제조업 구조조정에 대한 대응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계기였다.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노동자운동은 기존의 기업별 대응을 반복했고,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가 심화되는 상황에 적합한 새로운 운동 방향을 채택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쌍용자동차는 1997년 IMF 외환위기 시기부터 경영위기가 계속되었다. 1998년에 대우자동차에 일시적으로 매각되었다가, 대우그룹 부도 이후 2004년에 다시 중국 상하이자동차에 매각되었다. 상하이자동차는 적자를 이유로 2009년 1월 법정관리를 신청하고 경영권을 포기했다. 사측은 4월 들어, 2646명의 정리해고와 순환휴직 계획을 발표했다. 

노동조합(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는 사측의 정리해고,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파업투쟁에 돌입한다. 특히 5월 22일부터는 평택공장에서 점거파업(옥쇄파업)에 돌입한다. 이후 사측과 경찰의 진압 시도 과정에서 폭력과 부상자가 발생하면서 투쟁은 더욱 격화한다. 점거 파업 중 진행된 교섭도 진전이 없는 가운데, 경찰은 8월 4~5일에 걸쳐 경찰특공대를 공장에 투입하여 대대적인 진압 작전을 벌여 77일간 계속된 점거파업을 강제 해산시킨다. 이후 진행된 노사 교섭에서 정리해고 158명과 무급휴직, 희망퇴직 등이 합의된다. 

공권력과 격렬한 충돌이 있었던 만큼 사법처리 규모도 컸다. 한상균 지부장 등 64명의 조합원이 구속되었고, 민주노총과 금속노조를 포함한 조합원에 대한 손배 청구가 16억 8천만 원에 달했다. 해고가 장기화되는 가운데, 33명의 해고노동자와 가족이 여러 이유로 목숨을 잃었다. 이러한 가혹한 규모의 손배 청구는 이후 손배 가압류를 제한하는 ‘노란봉투법’을 제정하자는 운동이 벌어지는 계기가 된다. 

해고 노동자들은 해고 무효 소송과 복직 투쟁을 이어간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금속노조 쌍용차지부가 소수노조로 밀려나고, 기업노조가 다수노조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그 이후 노사 교섭은, 사회적 대화와도 병행되면서 복잡한 양상을 띄게 된다.

이후 경영상태가 호전되면서 2013년 무급휴직자가 먼저 복직한다. 그 후 노사 교섭과 노사정 협의를 거쳐 2020년 5월, 해고자 복직이 마무리된다. 당시 문성현 경사노위 위원장이 합의를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쌍용자동차 구조조정의 시작점은 정규직 노동자 이전에 사내하청 노동자에 대한 해고였다. 2005년에 1천 700여 명에 달했던 쌍용차 사내하청 노동자 규모는 정규직에 앞서 해고되면서 2009년 파업 직전에 이미 300여 명으로 줄었다. 이런 가운데 2008년 10월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금속노조 쌍용차 비정규직지회를 결성하고 정규직 노조의 투쟁에 연대했다. 금속노조 쌍용차지부는 2016년 해고자 복직 과정에서 희망퇴직자, 정리해고자 외에도 당시 해고된 사내하청 노동자를 포함하여 복직을 이뤄내는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런 경우를 제외하면 지역의 부품사 등 하청사의 고용조정은 상대적으로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이들은 정리해고 노동자와 같은 복직 투쟁을 벌이더라도, 복직할 사업장이 아예 없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한진중공업에서는 2010년 말부터 고용조정을 위해 정리해고의 전 단계로 희망퇴직을 시작한다. 이에 반발한 노동조합(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의 농성에 이어, 2011년 1월부터 민주노총 부산본부 김진숙 지도위원(한진중공업 해고자)의 85호 크레인 고공농성이 시작된다.

이후 사회적 연대로 투쟁이 확장되고 정치적 쟁점으로도 부각된다. 시민사회단체들이 ‘희망버스’ 운동을 통해 부산 영도에서 진행되는 투쟁에 참여하면서 사회적 관심도 커졌다. 사태가 확산되면서 정치권도 관여했는데, 특히 진보정당뿐만이 아니라 정동영 민주당 최고위원, 손학규 민주당 대표도 투쟁 현장에 방문하면서 민주당이 이전과는 다른 접근을 보이기 시작했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반대투쟁은 노동조합의 투쟁에 사회적 연대가 더욱 확장되었다는 의미가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결국 11월 10일, 노사합의가 이루어진다. 한진중공업 노사는 정리해고자 94명을 1년 내에 재취업시키는 것을 골자로 한 합의를 도출했다. (실제로는 1년 8개월 후 재입사 방식으로 복직되었다.) 노사합의에 따라 김진숙 지도위원도 크레인에서 내려오면서 약 1년간의 투쟁은 마무리된다.
 
 

3. 기업별로 대응한 구조조정 저지 투쟁

 
당시 한계기업의 고용조정 과정에서 광범위한 사내외 하청노동자가 선제적으로 해고된다. 그러나 노동운동은 이에 의미있는 대응을 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쌍용차와 한진중공업에서 원청 대기업노조의 정리해고를 막기 위한 투쟁이 격렬히 진행되었다. 이들 투쟁은 기본적으로 기업별 고용을 보장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노동조합도 지역의 다른 사업장 취업을 포함한 일자리 제공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었다. 쌍용자동차 해고 과정에서 정부는 평택을 고용개발촉진지구로 선정하기도 했지만, 기업별노조인 금속노조 쌍용차지부만이 아니라 민주노총이나 금속노조도 타 사업장으로 전직하는 방식의 고용대책은 적극적으로 요구하지 않았다. 

산별노조는 미조직 노동자까지 대변하는 위상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노조 없이 해고되는 지역의 하청노동자에 대한 대책에도 관심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역 고용위기에 대해서는 선언적 입장 표명만 있었을 뿐, 민주노총이나 금속노조의 활동은 해당 기업의 정리해고에 대응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결과적으로 쌍용차, 한진중공업 투쟁 모두 산별노조 건설에도 불구하고,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도 기존의 기업별 투쟁을 반복한 셈이었다. 당시 노동자운동의 대응은 기업별로 고용보장 투쟁을 진행하며, 규모가 크고 전투적인 사업장에 특히 집중하여 총노동과 총자본·정부의 전국적 투쟁 전선을 형성한다는 것을 기본적인 관념으로 깔고 있었다. 총자본과 총노동의 일종의 ‘대리전’으로 사고했던 것이다. 쌍용자동차, 한진중공업의 기업별 투쟁은 반복적으로 이상화, 영웅시되고 경제위기에 대응하는 투쟁의 ‘모범사례’처럼 제시된다.

민주노총은 당시 구호로서 ‘총고용 보장’도 제시했다. 이는 원래 의미라면 사회적 고용총량을 유지하자는 것으로서, 한계기업에서 고용조정이 발생할 경우 다른 일자리를 마련하는 대책도 주요한 의제가 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노동조합 조직률이 10% 초반대인 상황에서 특히 노조 없는 중소영세 비정규직 사업장의 고용불안이 더 큰 문제였기 때문이다. 당시 제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일자리를 잃은 사내하청이나 부품사 상황까지 고려할 때 기업을 넘어선 산업적·지역적 수준의 고용유지 요구나 고용정책에 대한 대안 제시가 중요한 상황이었다. 또한 당시 고용불안이 세계적 수준으로 전개되던 금융위기의 결과였다는 점에서 개별 기업 수준에서 대책을 마련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당시 ‘총고용 보장’이라는 구호는 기업별로 고용을 모두 보장하라는 의미에 가깝게 사용되었다. 정부에 대한 고용대책 요구도 있었으나, 정리해고 제한과 같이 기업별 해고를 제한하는 요구가 중심이었다. 이러한 입장은 이후 코로나19 위기 상황에서도 ‘해고금지’ 요구로 반복된 바 있다. 민주노총 내에서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 협약’ 반대 주장의 여러 근거 중 하나도 해고금지가 반영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이후에도 쌍용차 위기의 해법을 찾기 위해 기업을 넘어 지역·산업 노동시장 측면에서 접근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정리해고자는 쌍용차로 원직 복직되어야 하고, 이를 위한 경영상의 조건이 갖추어져야 하므로, 기업인수와 공적자금 지원과 같은 기업별 해법에 집중되었다. 한계기업의 고용위기를 전직을 통해 해결하려면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과 함께 표준적인 직무와 숙련의 형성, 이에 조응한 임금체계 등, 초기업적 노동시장에 대한 개입이 고려되어야 한다. 하지만 노조운동은 기업 내 고용을 유지하는 대안 외에는 검토하지 않았고, 외부의 논의를 수용하지 않았다. 심지어 해당 기업의 노동자로 돌아가는 방안 외의 대안은 고용조정과 노동유연화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우려하는 입장도 있었다. 

물론 당시에 기업별 대응을 넘어 대안을 제시해야한다는 주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쌍용차 공장점거 파업과 격렬한 투쟁 과정에서 이러한 논의는 더 진행되지 못했다. 대표적으로 이현대(2009)는 “경제위기라는 조건에서 광범위한 해고와 계약해지가 발생하고 있는 현실에서 개별 기업 차원을 넘어 전사회적인 차원에서 노동자들의 고용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쟁점화”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투쟁 전술 측면에 관한 비판도 있었다. 이종탁(2009)은 “기업의 울타리를 넘어서 이데올로기 투쟁과 정책 제시, 사회적 여론화가 필요한 상황에서 옥쇄보다는 거리와 지역을 더 중시하는 전술을 선택했어야 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 후 금속노조가 초기업적 수준에서 고용안정 방안을 요구하는 시도는 부분적으로 발전한다. 금속노조는 2020년 중앙교섭 요구안 수립 과정에서 ‘고용안정위원회 설치·고용안정협약’ 요구안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 요구안은 코로나19 고용위기가 시작되는 상황에서 노조 중앙위에서 부결되어 더 이상 추진되지 못했다. 이 요구안은 개별자본에 대해서는 고용안정기금을 요구하고, 산별중앙은 산업자본에 대해서 고용안정기금을 포함해 위기대응협약을 요구하며, 금속노조가 총연맹을 뒷받침해 국가에 대해서 고용안전망을 요구한다는 구상에서 추진되었다. (사회진보연대, 「엄중한 코로나 위기, 변수는 위기에 대처하는 노동조합이다: 오기형 금속노조 조사통계부장 인터뷰」, 《사회운동 포커스》 2020년 5월 12일.)

결과적으로 볼 때, 당시 노동자운동이 쌍용차 투쟁을 맞아 이러한 대안을 갑자기 제안하기는 어려웠을 수 있다. 특히 기업별 조직인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에 이러한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 그러나 심지어 쌍용차 투쟁 이후에도 민주노총이나 금속노조가 그러한 대안을 신중하게 검토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정리해고 이후에도 쌍용차지부뿐만이 아니라 금속노조, 민주노총은 계속 해고자의 원직 복직 요구를 중심으로 투쟁을 지속했다. 사회적 연대가 더욱 확장된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저지 투쟁에서도 고용문제에 대한 노조의 해결방안은 기업 수준을 넘지 않았다. 

한편, 노동자운동은 2008년 금융위기 상황에서 고용문제 외에 거시경제정책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제시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이런 상태에서 기업 구조조정에 대해서만 일체의 구조조정 반대 혹은 국유화를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국유화 요구는 현실가능성은 물론 해당 기업 정규직 노동자의 고용보호를 위해 (산업 전반이나, 취약계층이 아니라 위기기업에 집중적으로) 막대한 공적자금을 계속 투입해야 한다는 점에서, 사회적으로 정당한 요구인가라는 문제까지 신중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었다. 

한편 쌍용차, 한진중공업의 전투적인 투쟁을 거치면서, 결과적으로 자본 측도 원청 정규직의 정리해고 방식은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2011년 이후 경기 호전의 영향도 있었다. 하지만 기업들은 경기가 나아지면서 인력이 필요하더라도 정규직 직접 고용은 더욱 제한하고, 최소화했다. 제조업을 대표하는 현대자동차는 모듈화된 생산 방식을 통해 전체 공정의 외주화를 가속화했다. 

일련의 정리해고 저지 투쟁은, 금속노조가 노사관계에서 기업별 대응에 머물렀다는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다. 2006년 이후 산별노조 형태를 갖추고, 산별노조를 강화하고자 하는 조직 초창기의 기세가 살아있었음에도 그렇다.
 
 

4. 공공부문 구조조정 대응 투쟁과 이명박 정부의 노조 탄압

 
이명박 정부는 공공부문 구조조정을 본격적으로 추진한다. 인수위 시기부터 공기업 민영화를 검토하던 이명박 정부는 애초 5~6월경 공기업 민영화 계획을 확정하고 본격적으로 추진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5월부터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수입 문제가 부각되고 대규모 촛불집회가 이어지면서 계획에 차질이 발생한다. 촛불집회 후반에는 공공부문 민영화 반대를 포함해, 이명박 정부의 광범위한 정책 의제에 대한 반대도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공기업 민영화와 관련된 내용을 제외한 채, 통폐합과 정원축소를 중심으로 한 공공부문 구조조정 정책, 이른바 ‘공공기관 선진화 정책’을 발표한다. 특히 2008년 말에 발표된 4차 선진화 방안은 큰 폭의 정원감축을 포함했다. 공공기관별로 10~15%의 정원을 감축하도록 하고, 특히 철도공사는 정원의 무려 15.9%인 5,115명을 감축할 것을 요구했다. 노동조합들이 반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공운수연맹은 철도, 발전, 가스, 건강보험, 국민연금 등 주요 공공기관노조를 중심으로 ‘이명박 정권의 공공부문 선진화 분쇄와 사회공공성 강화를 위한 공동투쟁본부’를 결성하고 공동파업을 조직한다. 공투본은 11월 말부터 공동파업에 돌입한다. 특히 철도노조는 11월 26일부터 12월 3일까지 8일간 전면파업을 벌였는데, 이때까지 철도노조의 파업 중 가장 긴 것이었다.

파업 이후에는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된다. 철도공사는 파업 후 110명을 해고하고 1만 2천여 명 조합원을 징계한다. 철도공사 사측의 탄압이 장기화되면서, 2011년 말에는 해고노동자였던 허광만 조합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도 일어난다. 다른 파업 참여 노조에 대해서도 탄압이 가중되지만, 특히 발전노조에 대한 탄압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2010년 들어, 이명박 정부는 국무총리실이 주재한 ‘노사관계 회의’와 청와대 대책회의 등 권력 핵심부 논의를 통해 발전노조에 개입하기 시작한다. 정권 핵심의 지침이 내려가자 각 발전사 사측은 단체협약을 무리하게 해지하고 공격적인 노무관리에 나서기 시작한다. 노동조합 선거에서 민주노총 탈퇴를 주장한 후보 득표율을 경영평가 점수에 반영하거나 승진에 반영하면서 노골적인 노사관계 개입을 이어간다. 급기야 전 조합원을 성향에 따라 사과, 배, 토마토로 분류한 후 개별적으로 압박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이러한 전방위적인 시도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총 탈퇴가 부결되자, 사측은 본격적으로 제2노조 설립을 지원하고 발전노조에서 조합원이 탈퇴하도록 압력을 가한다(한국발전산업노동조합, 2012). 그 결과 6천여 명에 이르던 발전노조 조합원은 1천여 명으로 축소된다. 정권 차원의 노골적인 부당노동행위가 자행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공공부문 정원축소에 대응하는 공동파업은 비슷한 시기의 민간부문의 고용보장 투쟁과는 별개로 진행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공공부문 노조는 고용조정이 경제위기의 효과라기보다는 이명박 정권의 보수적 성격이 원인이라고 보았다. 물론 이명박 정부의 공공부문 구조조정이 이에 저항하는 노동조합에 대한 가혹한 탄압을 동반하면서, 그렇게 인식할 여지가 충분했던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이명박 정부의 노동조합 탄압은 전교조, 공무원노조 등 여타 공공부문 노조도 대상으로 삼았을 뿐 아니라, 민간기업 사용자들의 노조 탄압도 촉진한다. 대표적으로 금속노조가 조직되어 있던 유성기업에서는, 주야연속 2교대 합의를 사측이 무시하면서 파업이 벌어지자 사측의 직장폐쇄와 용역깡패 투입, 정부의 공권력 투입이 잇따른다. 노조 탄압 방법을 전문적으로 컨설팅하는 노무법인까지 나타난다(창조컨설팅 사건). 유성기업 외에도 금속노조 산하 조직인 발레오만도, 상신브레이크, SJM에서 이러한 사태가 이어졌다. 마침 2010년 7월에 노조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와 근로시간면제제도가 도입되고, 2011년 7월에 사업장 단위 복수노조가 허용된 후, 사용자들은 복수노조 설립을 통해 기존 노조와 갈등을 유도하는 전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권의 정치적 성격이 중요한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공공부문 노동조합들은 당시 정세를 인식하면서 경제 위기라는 조건을 중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총노동 차원에서 민간부문 노조와 함께 대응하거나 투쟁을 주도하는 데에는 관심이 적었다. 그 결과 공공부문 구조조정 저지 투쟁과 제조업 부문의 구조조정, 정리해고 투쟁이 연대하려는 시도는 별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당시 정세를 보면, 이명박 정부가 경제위기 대응책의 일환으로 공공부문 구조조정을 실행하기 위해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을 병행했다고 인식하는 것이 적절했을 것이다. 이런 정세진단이 있었다면 투쟁 조직화도 어느 정도 달랐을 것이다.

한편, 공공부문 노조의 대응은 이명박 보수정권에 대항하는 정치적 투쟁이라는 성격도 띄고 있었으므로, 이후 ‘범민주진보’ 야권연대의 매개가 될 가능성도 나타나게 된다. 
 
 
 

5. 기업별 중심의 미조직 비정규직 노동자 조직화와 투쟁

 
2010년대에도 미조직 비정규직 조직화 노력은 계속되고 금속, 공공부문에서 성과가 축적된다. 그러나 이러한 조직화 영역은 대체로 ‘상용형 비정규직’ 즉 공공부문 무기계약직·기간제, 제조업 사내하청 노동자였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가장 열악한 영역인 ‘임시직·일용직형 비정규직’ 부문에서는 거의 조직화가 진행되지 못했다. 

조직된 비정규직 노조는 해당 기업과 부문에서 비교 가능한 정규직 노동자를 따라잡기(정규직화 및 차별해소) 하는 데 투쟁을 집중한다. 그러나 비교할 정규직 노동자도 없는 ‘임시직·일용직형 비정규직’에서는 그러한 방식의 투쟁이 가능할 수 없었다. 새로 조직된 부문들을 처음부터 산별노조로 포괄했다는 점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산별노조라는 조직형태에도 불구하고 건설과 학교비정규직(교육공무직)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기업별교섭을 벗어나지 못했다.

외주, 사내하청을 비롯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사용은 1990년대 이전에도 있었지만, 당시에는 노동력이 부족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큰 문제로 부각되지 않았다. 이미 1990년대부터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으로 전직할 수 있는 가능성이 축소되고 있기는 했지만, 여전히 정규직 채용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IMF 구제금융 위기 이후에는 노동유연화를 촉진하는 제도의 도입과 함께, 정규직 고용 자체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비정규직 문제가 본격적으로 부각된다. IMF 위기 직후에는 비정규직에 대한 선별적 구조조정, 해고가 문제였다면, 경기가 호전되는 2001년 이후에는 비정규직 양산과 차별이 본격적으로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요코타 노부코, 2020).
 

비정규직 노동자의 구성을 상용형 대 임시직·일용직형, 정규직 대 비정규직으로 2×2 행렬로 구성해볼 때, 정규직을 제외하고 가장 구성비가 높고 처우가 열악한 것은 ‘② 임시직·일용직형 비정규직’ 노동자이지만, 2000년대 이후 민주노총이 주로 조직화에 집중한 영역은 조직화가 용이한 ‘③ 상용형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이 영역은 지자체와 학교비정규직, 대기업 사내하청 등으로 중규직·공무직 부문, 혹은 자회사로 전환되고 있는 부문이다. 문재인 정부 시기의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정책의 수혜를 받은 부문이기도 하다.

이들 ③ 부문은 정규직화를 직접적인 목표로 투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부문의 조직화에 적합한 노선이 무엇이냐는 문제도 노동조합 내부에서 쟁점으로 떠올랐다. 즉 2000년대 초반에 벌어진 “비정규직 철폐냐, 비정규직 차별철폐냐”라는 논쟁은 ‘비정규직 철폐, [제대로 된] 정규직화’가 올바른 운동노선이라는 관념이 주도하는 방향으로 정리된다.
2010년대 이후 노동시장에서 나타나는 격차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기업별 임금격차와 고용형태별 임금격차의 결합이었다. 그런데 기간제법 이후 직접고용 비정규직은 감소하는 가운데, 외주화가 촉진되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 격차도 더 커지고, 특수고용 노동자도 확대된다. 

반면 직접고용 비정규직 중에는 공공부문, 금융산업 등에서 정규직(무기계약직, 공무직) 전환이 이루어지면서 비정규직이 감소한다. 이명박 정부는 기간제법 발효 2년이 되는 2009년 7월을 앞두고 기간제 노동자가 실업자로 내몰릴 것이라는 ‘100만 해고대란설’을 유포했다. 그러나 당시 기간제법 개정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정부가 주장한 해고대란은 발생하지 않았다. 기업들이 상시업무 기간제를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거나, 아예 외주화하는 방식으로 대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정규직 정규직화”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은 대기업과 공공부문의 ‘③ 상용형 비정규직 노동자’에만 국한되는 것이었다. 금속노조의 불법파견 투쟁과 공공부문의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투쟁이 대표적이다. 이들 부문은 △전환될 비교대상인 정규직 일자리가 명확히 존재하고, △전환될 일자리가 고용안정과 임금 수준이 상당히 높고, △원청 사용자가 명확하여 투쟁을 집중할 대상이 분명하다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기업별 투쟁으로 전개되기도 한다.) 

2006년부터 시작된 현대자동차 등의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은 결국 사용자가 순차적으로 고용을 전환(신규채용)하는 방식으로 마무리된다. 현대자동차는 2014년 아산과 전주공장에서, 2016년 울산공장에서 사내하청 노동자의 정규직 특별고용에 관한 합의가 나옴에 따라 정규직 전환 채용이 이루어졌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조직이 본격적으로 확대된 공공부문 비정규직은, 박근혜 정부 시절 박원순 서울시장의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에서 시작하여, 문재인 정부 시절에 전면화된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화’ 정책으로 직접고용 혹은 자회사로 전환되는 방식으로 정규직 전환을 실현할 수 있었다.

노동운동 안에서 비정규직 투쟁을 상용형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주도하면서, 동시에 노동운동의 강조점도 2000년대 초 ‘정규직-비정규직 연대’에서 차츰 ‘비정규직 독자 요구, 독자 조직’으로 변화한다. 이는 정규직 노조의 소극적인 태도가 영향을 주기도 한 것이지만, 정규직 전환요구가 기존 정규직의 요구와 일치하기 힘든 현실에서, 독자적 투쟁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조건도 있었다. 

금속노조의 경우, 완성차 사측의 거부로 산별교섭이 한계에 봉착한 이후, 지역지부를 중심으로 적극적인 조직화를 꾀해 상당한 성과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가 산별교섭의 확대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새로 조직된 사업장에서도 기업별 교섭이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공공운수노조도 조합원 규모는 2010년대에 13만 명에서 25만 명으로 두 배 가까이 확대되었으나, 새로 조직된 사업장도 대부분 기업별 교섭을 진행했다. 이를 초기업 교섭으로 묶어내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초기업 교섭을 발전시키기 위한 전략을 세우고 조직적 역량을 투자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기업별로 벌이는 전투적 투쟁을 강조하고 이들 투쟁의 시기집중을 꾀하는 방식이 주류였다고 할 수 있다. 공공부문 비정규직에서 조직을 확대한 지역일반노조(민주일반연맹)도 대부분 기업별 교섭에 주력했다. 즉 전략조직화 사업을 통해 조직은 상당히 확대되었으나, 조직 형식적으로 산별지부라는 형태를 넘어 새로운 노사관계를 형성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비정규직 문제를 부각하면서 차별 해소와 정규직 전환이라는 측면에서 여러 성과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새로 조직된 부문이 기존 노조운동과 달리 기업을 넘어선 산별노조 운동을 전면화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투쟁의 성과도 주로 기업별 투쟁에서 남았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성과를 전체 노동시장에 확산하는 데에는 한계가 분명했다. 이러한 비정규직 운동의 한계는 (비정규직 운동주체들의 책임이라기보다는)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산별노조 건설과 정치세력화 등 노조운동의 주요 전략이 모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상황에 새로 형성되는 노동조합도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업별 비정규직 운동 구조에서는 기업별 이익극대화라는 기존 노조운동의 관행이 반복되었고, ‘기업 내 정규직화’와 ‘정규직 (처우) 따라잡기’가 실현가능한 핵심 요구로 부각될 수밖에 없다. 결국 고용 유형으로 보면 ④ 상용형 정규직은 쌍용자동차, 한진중공업과 같은 기업별 고용 투쟁으로, ③ 상용형 비정규직은 대기업, 공공부문의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투쟁으로 대응했다고 할 수 있으나, 가장 규모가 크고 열악한 ② 임시직·일용직형 비정규직에 의미있는 조직화와 투쟁은 한계적이었던 것이다.

노동조합 조직률은 이후 문재인 정부 시기에 어느 정도 높아진다. 2016년 10.3%에서 2019년 12.5%까지 2.2%p 증가했다. 그러나 비정규직 조직률은 여전히 2%대로 정체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고,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 조직률은 오히려 후퇴했다. 300인 미만 중소규모 사업체의 조직률은 2018년∼2019년 사이에 1%대로 떨어졌고, 특히 전체 임금노동자의 거의 60%를 차지하고 있는 30인 미만 ‘작은 사업장’ 조직률은 0.1%에 불과하다. 즉 이는 조직화의 성과가 2차 노동시장이 아니라 공공부문이나 대기업 부문에 집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이창근, 2021).

물론 의미 있는 새로운 시도도 나타났다. 2010년대 새로 조직이 확대된 영역 중에서 초기업적인 비정규직 조직은 다소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건설, 화물노동자, 택배·배달노동자 등에서는 초기업적 연대가 의미 있게 나타났다. 즉 ② 임시직·일용직형 비정규직 유형에서 사례가 등장했다. 이들 운동은 IMF 구제금융 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본격화되었을 뿐 아니라, 기존의 기업별노조의 결합이라는 경로와는 다른 산별노조 운동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도 중요한 성과다. 이 부문은 고용이 매우 불안정하여 기업별 노사관계 그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배경도 있다. 네이버노조의 원하청 공동투쟁과 같이 상급조직의 지원이 초기업적 대응에 중요한 사례를 만들어내는 경우도 나타났다. 그러나 이런 사례는 여전히 예외적이다. 화물 안전운임제, 건설 적정임금제는 큰 의미가 있으나 적용 범위가 업종·부문별로 아직 제한적이다. 
 
 

6. 산별노조, 산별교섭의 한계

 
2010년대 들어 산별교섭은 2000년대보다 오히려 더 어려운 조건에 처했다. 금속노조에서는 완성사 공동교섭(2011년), 완성차를 중심으로 하는 업종교섭(2012년, 2017년), 그룹사 공동교섭(2016년) 등이 제안되기도 하였으나 완성차의 포괄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으로 전개된다(오기형, 2021). 산별교섭을 선도하던 보건의료노조도 2009년 산별교섭이 중단되었다가 2011년을 지나면서 부분적으로 복원된다. 2010년대에는 어려운 조건에서 산별교섭을 복원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전개되었지만 한계에 처했다. 

2000년대 초반 진행된 산별노조 건설은 독일식 노사관계를 모델로 삼았고, 각 산업에서 다양한 노력이 있었으나 모두 어려움에 직면한 셈이다. 금속노조는 2002년 금속노조 건설 이후 2006년 현대차노조 등 완성차 노조의 합류로 형식적으로는 산별노조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다양한 시도에 불구하고 완성차 사측이 참여하는 전국적 산별교섭 실현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금속노조는 2012년 대의원대회 보고서(이병훈, 「금속노조 운동에 대한 평가와 발전방향」)에서 조합원이 15만 명으로 확대된 이후의 중앙교섭을 평가하면서, 금속노조의 조직력이 재벌 대기업을 넘어서지 못했다고 언급했다. 특히 이 모든 평가의 핵심에는 산별교섭의 정체가 있었다. 2007년 이후 노조는 수년 간 완성차의 중앙교섭 참가를 요구했으나, 2009년에 이르면 완성차 사측이 참여하는 산별교섭이 순순히 성사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결국 금속노조는 2011년, 재벌사의 중앙교섭 참여를 견인하기 위한 단계적 전략을 제출하면서 방향을 전환한다. 그러나 그러한 다양한 시도도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그 후 2021년에는 모든 교섭단위에서 통일적으로 산업전환협약을 요구하면서, 산별교섭에 사용자 참여를 견인하고, 산별교섭의 의제를 확대하려는 시도를 이어간다.

이러한 과정을 종합적으로 평가해보면, 2010년대 초반에는 더 이상 독일 금속노조와 유사한 형태의 산별노사관계 형성이 어렵다는 점이 드러났다. 이와 함께 완성차지부를 지역지부로 재편하려는 노력도 실패한다. 이것이 비슷한 시기의 진보정당 분열 및 혼란과 겹치면서 ‘양날개론’의 두 전략이 모두 위기에 처했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특히 금속노조의 산별교섭 실패는 타 산업부문도 노사관계를 재편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시사한다는 점에서 큰 문제였다. 산별교섭 실현의 또 한 축이던 보건의료노조는 노무현 정부 시기 우호적 분위기 속에서 산별교섭을 실현했으나 이른바 “10장 2조 사태”(산별 합의가 기업지부 합의에 미달)로 내홍을 겪고 2005년에 조직이 분열한 바 있다. 공공노조와 운수노조도 2006년 말 각각 건설되었으나 전자는 조직적 과소함과 산별(대정부)교섭의 실패로, 후자는 철도-화물 공동투쟁 프로젝트의 실패(2008)로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IMF 구제금융 위기 당시 금융부문 구조조정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산별노조로 재편된 금융노조(한국노총)만 산별교섭을 유지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여러 요인이 있었는데, 금융산업이 지불여력이 있다는 점, 국가의 규제를 강하게 받는 부문이며 사용자단체(은행연합회)가 사실상 구성되어 있었다는 점, 노조가 유연한 전략(낮은 수준의 산별노조 혹은 노사협조적 전략)을 취했다는 점 등이다.

그렇다면 산별교섭 시도는 왜 대체로 실패했는가? 물론 정권의 보수적 노동정책이 산별노사관계의 형성에 상당히 부정적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지만, 이명박 보수 정권의 출현만이 핵심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금속노조 등 산별노조 건설 당시 지향했던 독일식 모델은, 사업장에 노동조합이 결성되어 있지 않더라도 해당 산업 전체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규율하고 임금격차를 축소할 수 있는 산별협약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기업별노조 체제에서 산별교섭의 실현은 매우 어려웠을 뿐 아니라, 실현된 경우(금속 지역지부, 보건의료노조, 과학기술노조, 금융노조)에도 노동조합이 결성된 사업장, 조합원에만 적용되는 협약이었다. 금속노조의 금속산업 최저임금은 조직된 사업장을 넘어 노동시장 기준을 형성하려는 시도였으나 이 역시 2010년대 들어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한다. 결국 한국의 산별노조는 기업별교섭 체제를 유지한 가운데 노동조합 조직형태 변경에 머물렀다. 물론 이는 노동조합 전략의 한계 때문만은 아니다. 한국에서는 대기업, 공공부문을 중심으로, 정규직의 경우 초기업적 노동시장이 취약하고 기업 내부 노동시장이 중심이기 때문이다. 반면 중소기업 이하에서는 매우 불안정한 초기업적 노동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한편, 독일을 비롯한 중·북부 유럽식 산별노조도 이미 그 모델이 소개된 1990년대 초부터 신자유주의 노동개혁을 거치면서 이완되기 시작하고 있었다(루초 바카로 외, 2020). 한국의 금속노조가 만들어지는 2000년대에 들어오면 이미 상당히 약화되었다. 세계화된 경쟁과 신자유주의 개혁, 노동조합 조직률의 하락 과정에서 기업별 교섭이 우위에 서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세계적인 추세를 한국에서 역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국의 노동시장 상황도 계속 변화하고 있었다. 1990년대와는 달리, 정작 산별노조가 건설된 2000년대 들어서는 노동시장 안에서 노동자의 기업 간 이동이 상당히 어려워졌고, 노동시장의 분할이 고착화되었다. 2000년대 초반 활성화된 산별노조 건설은 IMF 구제금융 위기 이후 고용불안에 대응한다는 목표를 담고 있었지만, 역설적으로 산별 노사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조건은 더욱 악화되어 있었다. 이미 기업 간 고용 이동이 어려워지고, 임금격차는 심화된 상황에서 기업별 교섭을 넘어서려는 시도는 훨씬 힘들 수밖에 없었다.

공공부문(주로 공공운수노조의 공공기관노조)에서도 개별 사용자를 모아서 사용자단체를 구성하는 방식의 산별교섭은 어렵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공공노조는 건설 초기(2006~08년), 금속노조나 보건의료노조와 같이 개별 사용자를 압박해 집단교섭을 추진하려 했으나, 정부의 지배력이 강한 공공기관에서 그러한 모델은 작동되기 어려웠다. 공공노조를 계승한 공공운수노조는 그 대안으로 노정교섭을 추진하고자 집중하지만 정부 측은 수용하지 않았다. 이명박·박근혜 보수정부는 물론, 문재인 정부에서도 실현되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 때는 사회적 대화(경사노위)를 경유하는 방안도 제시되었지만, 민주노총의 사회적 대화 참여 논란과 정부의 소극적 태도로 이 역시 실패한다.

산별노조가 산별협약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조직적으로도 권한의 기업별 분권화가 아니라 고도의 중앙집중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한국의 산별노조는 기업별 지부를 압도할 정도로 권한을 집중하지 못했다. 특히 산별노조가 임금을 조절하는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면, 사용자 입장에서도 산별교섭에 호응할 의미를 찾지 못한다. 산별노조 중앙과 대기업 지부들 간 온도 차이가 컸다. 대기업 지부는 임금교섭권을 산별노조 중앙에 넘기는 상황을 원하지 않았다. 노동자운동 안에서는 [기업별] ‘현장 파업권’을 유지해야한다는 식으로, 사실상 기업별 분권화를 옹호하는 논리가 득세했다. 산별 협약이 기업별 지부의 경제적 성과를 제한하는 것을 강경하게 반대하는 입장도 강했다. 서울대병원지부의 보건의료노조 탈퇴(2005)는 많은 쟁점이 있지만 산별교섭과 기업별교섭의 관계에 대한 쟁점이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조건에서는 산별협약 실현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산별노조는 “모여서 공동으로 투쟁”하는 데 용이한 조직 정도로 사고될 수밖에 없는데, 이럴 경우 산별연맹과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물론 2000년대 초반 시작된 산별노조 운동의 여러 시도가 의미 없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 기업 간, 고용형태 간 임금격차, 경제적 이해에 갇힌 노조운동 등 기업별 노사관계 체제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후적으로 볼 때, 한국의 산별노조 건설은 국제적인 노사관계의 변화추세, 한국자본주의의 발전과 노사관계의 발전경로(아직 ‘성장판’이 열려 다양한 가능성이 있었을 시기)상, ‘하나의 별을 형성할 수 있는 임계질량’을 채우지 못한 채, 성운으로 남아 실패했다고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7. 민주노총의 사회적 협의 시도와 실패

 
김대중·노무현 정권 하에서 노사정위 탈퇴와 가입 부결이 이어진 이후, 민주노총은 이명박·박근혜 보수정부 시기에는 반정부 투쟁을 중심으로 삼고 노사정위에 참여하지 않았다. 한국노총만 참여한 노사정위는 사실상 강압적인 방법을 통해 정부의 노동개혁에 정당성을 싣는 도구로 활용되면서 ‘사회적 합의’의 의미도 실종되었다.

2018년 이후, 민주노총은 ‘노동존중’을 내세운 문재인 정부의 집권이라는 변화된 조건에서 다시금 사회적 협의를 시도한다. 이는 직선 2기 집행부를 책임지는 김명환 위원장의 공약이기도 했다. 민주노총 집행부는 문재인 정부 출범 초기부터 노사정 대표자회의를 가동했고, 노사정위를 경사노위로 개편하는 과정에서도 노정 간 협의를 진행했다. 정부는 민주노총 출신의 문성현 씨를 경사노위 위원장으로 임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작 2018년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는 경사노위 참여 여부를 둘러싼 논란이 있었고, 결국 참여를 결정하지 못했다. 당시, 정부가 최저임금 산입범위 개악을 강행하면서, 노정 간 분위기가 악화된 점도 이에 영향을 주었다. 

민주노총이 참여하지 않은 가운데 “개문발차”한 경사노위도 곧 위기에 빠진다. 2019년 주 52시간 노동시간 제한과 함께 추진된 탄력근로제 확대 결정 과정에서, 경사노위는 계층별 위원들을 배제하고 의결하려 시도했다. 이에 반발한 위원들이 모두 사퇴하면서 애초 구상한 사회적 대화기구로서의 위상이 크게 훼손된다. 결국 정부와 여당이 최저임금법 개정과 탄력근로제 확대 등 개별 법안 추진 과정에서 경사노위를 활용하여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으나, 무리한 시도로 인해 경사노위 그 자체의 정당성을 훼손한 셈이었다. 노동연구원의 박명준(2019)은 이에 대해 “경사노위도 양극화 완화와 공정 노동시장의 구축과 같은 큰 이슈의 공론화는 제켜둔 채 출범과 동시에 단기적이고 가시적인 성과에 목을 매며 몇몇 노동법 개정을 위한 대화와 타협의 함정에 빠져들었다”고 비판했다.

이후 김명환 집행부는 다시 한번 사회적 대화를 시도한다. 2020년, 코로나19 팬더믹이라는 사회적 위기가 그 조건이 되었다. 민주노총은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노사정 대표자 회의’를 제안하고 노사정 협의를 진행했다. 그러나 최종 합의안에 대한 민주노총 중집의 거부와 대의원대회에서의 부결로 결국 집행부가 사퇴하는 사태에 이른다. 다만 민주노총도 함께 논의하던 합의안은 노동계 대표로 한국노총이 참여한 가운데 체결되고, 정부가 이를 계속 추진했다.
 

결과적으로 민주노총은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노동시장 제도를 다루는 노사정 대화에 참여하기 어려운 내부적 조건을 다시 확인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현실에서 민주노총과 산별노조들이 경사노위 외의 노사정 협의를 진행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플랫폼 사회적 대화포럼’ 같은 의제별·업종별 협의 사례가 있고,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 공무직위원회 등 각종 정부위원회에도 민주노총과 산하조직이 참여한다. 그럼에도 총노동 의제를 다루는 경사노위 참여 문제는 조직적 합의가 어려웠다. 이런 논란의 연장선에서 경사노위 산하 부문·업종 위원회 참여나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노사정 대표자 회의’ 합의도 정치적 쟁점으로 부각된 것이다.

민주노총이 사회적 대화에 실패하거나, 혹은 거부하는 입장에 이른 원인으로는, 우선 정부가 신뢰를 주지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정부가 논란이 예견되는 많은 쟁점들을 경사노위 의제로 넘겼다는 점에서, 초기부터 사회적 대화가 과잉정치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었고(이정희, 2009), 실제로도 그러한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노동시장, 노사관계 제도의 변화에 개입하기 위해서 이해관계자들이 참여하는 사회적 대화라면, 그 과정에서 모든 요구를 관철하기는 힘들며, 어느 정도 주고 받는 합의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민주노총 지도부는 2020년 노사정 대표자회의 합의안 부결 논란에서 볼 수 있듯이, (직선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감당할 지도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또 합의안 도출 이전에, 어떤 합의를 추진할 것인가에 대한 조직 내 분명한 합의도 없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1998년 정리해고제를 수용한 노사정위 합의의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민주노총이 사회적 대화를 수용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노동조합이 참여하는 사회적 대화에서는 거시경제 정책이나 노동시장, 노사관계 제도에 대해 구체적이고 (시장경제 하에서) 작동 가능한 정책이 다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이러한 정책을 갖추고 있다고 보기 어려웠다. 사회적 대화 참여 여부에 대한 조직적 합의는 물론 어떤 내용을 다룰 것인가에 대한 정책적 준비나 조직 내 공감대도 없었다. 

사회적 대화라는 역할을 아예 배제한다면, 변화하는 조건에서 총연맹은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가 문제로 남을 것이다. 기업별노조는 여전히 교섭권을 통해 자신의 기능을 수행하고, 산별노조는 사업장 공동투쟁뿐만 아니라, 산업 정책에 대한 노사 협의나 노사정 협의를 (경사노위만 아니라면)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총연맹으로서 정부와 사용자를 대상으로 하는 협의 테이블이 없다. 이런 상황 때문에 총연맹은 전체 노동시장, 노사관계에 개입하는 데 한계가 있다. 또 이런 조건이다보니 정책도 구체적, 현실적으로 발전시키기보다는, 투쟁 구호처럼 생각하거나 무조건 최대치 요구를 제시하는 편향이 더욱 심해진다. 그러면서 민주노총은 총파업을 동원하는 투쟁기구라는 역할에 머문다.
 
 

8. 사회공공성 운동의 변화

 
2010년대 들어 사회공공성 운동은 ‘무상급식’ 논란을 계기로 부각된 ‘무상’시리즈의 복지 정책 요구나 보수정부의 공기업 민영화 시도에 대한 반대 투쟁 중심으로 진행된다. 2008년 광우병 쇠고기 반대 투쟁에서 민영화 반대 의제가 결합된 이후, 2011년 서울특별시 무상급식 주민투표에서 절정에 이른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반보수 전선’의 주요 의제로도 부각된다. 이후 박근혜 정부의 철도 구조조정(KTX 분할 민영화)에 반대하는 철도노조 파업(2013), 의료민영화 반대투쟁(2014)이 이어진다. 특히 2013년 12월 진행된 철도노조 파업에서는 한편으로는 공권력이 사상 처음으로 민주노총 사무실을 침탈하는 사건이 보여주듯 정부가 강경하게 대응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고려대에서 시작해 대학가에 나붙은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열풍이 보여주듯 사회적 지지가 이어졌다. 이러한 두 흐름이 극적으로 대비되면서 철도노조 파업은 박근혜 정권에 대한 투쟁의 상징적 사건이 되었다. 
 

그러나 저변이 크게 확산된 사회공공성 운동도 산별노조 운동, 산별교섭 발전과 연계되거나, 경제구조를 개혁하자는 논의로는 발전하지는 못했다. 주로 개별 공기업의 민영화에 대한 반대나 보건의료와 같은 특정 사회정책별 이슈가 부각되었다. 이런 의제들을 묶어내면서 전체 사회개혁을 조망하는 정책적 근거라든가, 산업정책과 같이 현장에 기반을 둔 정책은 취약했다. 예를 들어 재벌개혁 요구로 ‘사내유보금 환수’와 같은 허구적인 쟁점이 부각될 정도로, 이론적 기반이 있는 정책보다는 구호성 정책이 제기되는 경우가 많았다.

1990년대에는 주로 ‘사회개혁’이라는 구호로 제시되었던 요구들은, 1998년 IMF 구제금융 위기를 거치며 공공부문 민영화, 구조조정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사회공공성론’으로 정리되었다. 2002년 공기업 민영화 반대 투쟁을 통해 부각된 ‘사회공공성’이라는 담론은, 이후 사회보장·복지 확대와 같은 쟁점을 포괄하면서 확장된다. 당시 국회에 진출한 민주노동당은 실현가능한 개혁 프로그램으로서 사회공공성론을 제시했고, 공공부문 노조들은 민영화, 구조조정 반대 투쟁의 사회적 명분으로 수용했다. 이후 노조운동은 민영화 이슈만이 아니라 국민연금, 건강보험 등 다양한 공공부문 쟁점에서 사회공공성을 주장했고, 사회공공성은 2016년 공공기관 성과연봉제 반대 투쟁과 같이 공공부문 노동조합의 투쟁에 빠지지 않고 언급된다.

그런데 이러한 운동은 정세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으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의 보건의료 구조조정을 거울로 삼을 수 있다. 이탈리아는 신자유주의 개혁과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공공 보건의료 체제가 크게 약화된다. 그 결과 코로나19가 확산될 때 가장 큰 타격을 입고 사망자가 속출했다.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팬더믹 상황이 가장 심각한 국가 중 하나였다. 이러한 사태의 직접적인 원인인 공공 보건의료의 약화를 비판하는 입장은 정당하다. 하지만 문제는 그러한 정책이 시행된 배경이다. 2000년대 이탈리아의 만성적인 경제위기가 보건의료 투자가 줄어든 원인이었다. 그렇다면 재정지출의 근거가 되는 거시경제의 운영이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한국도 마찬가지로 공공서비스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전체 거시경제 조건과 이 속에서 공공부문의 역할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민주노총이나 공공부문 노조는 국민경제의 거시경제 조건과 같은 정세와 무관하게 공공부문의 조직·인력 확대, 혹은 공공부문 지출 확대가 정당하다고 전제하면서 요구안을 제시한다. 각각 공공 지출 확대를 필요로 하는 보건의료, 사회서비스, 연금, 에너지, 대중교통 등 의제, 영역별 요구들을 최대치로 나열하는 구조가 된다.
 
 

9. 보수 정권의 노동개혁 실패와 총파업-총궐기 투쟁

 
박근혜 정부는 노사정위 합의를 통한 노동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한다. 물론 민주노총은 노사정위에 참여할 의사가 전혀 없었고 대중투쟁으로 대응한다는 방침이었기 때문에 한국노총이 정부의 대화상대였다. 한국노총은 노사정위 탈퇴와 참여를 반복하면서 교섭력을 극대화하려 했으나 한계가 있었다. 

한국노총은 2014년 12월 노사정위 합의를 통해 박근혜 정부가 제시한 노동개혁 의제를 논의하기로 합의한다. 정부는 노동시장 이중구조 해소를 과제로 제시했으나, 세부적으로 들어가보면 기간제 사용 제한의 완화, 정리해고 외에 저성과자 퇴출제, 취업규칙 불이익변경 요건 완화 등 노동계가 반대하던 내용이 주요 의제였다. 정부가 2014년 공공부문 개혁을 명분으로 추진한 ‘공공기관의 정상화 추진’ 정책의 일환인 ‘방만경영 정상화’라는 공공부문 단체협약 개악도 계속 추진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던 노사정위에서는 한국노총이 불참, 참여를 오가는 우여곡절을 거쳐 2015년 9월 15일, ‘노동시장 구조개선을 위한 노사정 합의’를 체결한다. 청년고용 활성화,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 사회안전망 확충, 통상임금 등 현안해결이 주요 내용이었다. 민주노총은 이러한 논의를 전면 거부하는 가운데 2014년 한상균 위원장 당선 이후 총파업, 민중총궐기 투쟁을 통해 박근혜 정부에 대한 투쟁에 나섰다. 민주노총은 2015년 11월 14일 격렬한 민중총궐기 집회 투쟁을 서울 도심에서 전개한다. 이 과정에서 전농 회원이던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에 맞아 뇌사 상태에 빠지는 비극이 벌어진다. 이후 수배된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은 조계사에서 농성을 이어가다가 12월 10일 자진 출두하면서 구속된다.

2015년 ‘9·15 노사정 대타협’이 나왔으나, 정부는 노사정 합의를 존중할 생각이 없었다. 박근혜 정부는 그 해 12월 30일 고용노동부를 통해 ‘저성과자 해고(이른바 쉬운해고)’와 ‘취업규칙 변경요건 완화’ 지침(양대지침) 정부안을 발표한다. 노사정 합의문에서 “정부는 일방적으로 시행하지 않으며 노사와 충분한 협의를 거친다”는 약속을 정면으로 거스른 것이다.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은 노사정 합의 바로 다음날 ‘기간제 사용기간 연장’, ‘파견 허용 범위 확대’가 포함된 노동 5법을 일방적으로 이미 발의한 상황이었다. 박근혜 대통령도 이들 법안을 연내에 처리해야 한다고 국회를 압박하고 있었다. 결국 한국노총은 2016년 1월 19일, 9·15 노사정합의 파기를 공식 선언했다. 이런 상황에서 기획재정부는 1월 28일, 공공기관에서 성과연봉제를 전 직원을 대상으로 확대 도입한다는 지침을 발표했다. 이전까지 간부층만 적용하던 임금체계 개편을 전 직원을 대상으로 확대한 것인데, 노사관계를 무시하고 상당한 강제력을 동원했다. 박근혜 정부는 노사정위 합의라는 외양을 취하고자 했으나, 실제로 사회적 합의를 존중할 생각은 없었다.

박근혜 정부의 무리한 정책은 결국 노동운동의 광범위한 반발과 투쟁을 부른다. 특히 정부가 전 직원 성과연봉제를 강요하는 데 반발하는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투쟁이 대규모로 이루어진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소속의 공공기관 노조를 아우르는 ‘양대노총 공공부문 노동조합 공동대책위원회’는 상반기 농성투쟁과 경고파업을 거쳐, 9월말 공동파업에 돌입한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와 보건의료노조, 한국노총의 금융노조, 공공연맹, 공공노련 소속 노동조합들이 연쇄 파업에 돌입한다. 특히 공공운수노조 소속 공공기관 노동조합은 12개 단위노조 7만여 명이 파업에 동참한다. 철도노조도 74일간 파업투쟁을 이어간다. 철도노조 파업이 종료될 즈음, 본격적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농단 사건이 터져나오면서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촛불시위로 이어진다.

2016년 말에서 2017년 초까지 진행된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촛불시위는 일반 시민들의 광범위한 참여가 있었지만, 집회를 주관한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약칭 퇴진행동)은 민주노총이 집행력의 상당한 부분을 담당했다. 민주노총은 정권 퇴진 투쟁을 통해 박근혜 정부의 노동정책을 중단시키고자 했다. 결과적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이 이루어지고, 양대지침과 공공기관 성과연봉제는 문재인 정부 집권 후 즉각 폐지된다.

이러한 성과는 노동운동에 깊은 인상을 주었다. 당장 문재인 정부와 여러 쟁점에서 갈등이 존재했지만, 노동운동은 정권교체로 이어진 촛불시위를 주도한 입장에서 새 정부 정책에 ‘지분’을 주장할 근거가 있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또한 노동조합의 선도투쟁을 통해 시민들의 반정부 시위를 촉발함으로써 보수정부에 실질적인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경험을 얻었다. 이러한 집단적 경험은 윤석열 정부 집권 이후 민주노총 집행부가, 구체적인 정책에 대한 투쟁보다는 정권 자체를 반대하고 퇴진을 요구하는 투쟁에 몰두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10. 야권연대와 진보정당 운동의 퇴조

 
정치세력화 운동이 퇴조하는 가운데, 진보정당에 대한 현장의 관심은 지속적으로 하락해갔다. 오히려 2008년 ‘광우병 쇠고기’ 촛불시위를 거치면서 ‘야권연대’가 중심적인 정치 전략으로 부상하고 진보정당들도 여기에 동참했으며, 이러한 흐름은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운동으로 이어진다. 그 결과 노동운동은 2016년 ‘촛불항쟁’으로 집권한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에 대한 비판적 거리를 두기 어렵게 되었다.

야권연대를 거치면서 스스로 변화한 현재의 진보정당 운동은 1980년대 후반 형성된 정치적 노동자운동과는 큰 단절을 겪었다고 할 수 있다. 일차적인 단절은 국민승리21-민주노동당 건설 과정에서 (정치조직 활동가들이 주도한) 1990년대의 정치적 노동자운동에서, (민주노총 활동가들이 주도하는) 사회경제적 노동자운동과 이에 조응하는 (영국 노동당식) 정당으로, 주도세력과 성격의 변화다. 이어, 두 번째이자 결정적인 단절의 계기는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이다. 이러한 분당은 민족해방파(NL)가 민주노동당에 진입하기로 결정하고(이른바 ‘군자산의 결의’) 당권을 장악하려고 시도하면서 시작된 갈등이 폭발한 결과였다.

분당 이후, 2012년 대선에서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는 박근혜 후보의 집권을 막기 위해서라며 사퇴한다. 사실상 문재인 후보를 지지한 것이다. 그런데 NL노선에 비판적이었던 진보정의당 후보였던 심상정 후보 역시 문재인 후보 지지를 선언하고 대선후보 등록을 포기한다. 이후 정의당은 민주통합당, 재야 단체들과 함께 ‘국민연대’를 결성하여 문재인 후보를 ‘국민후보’로 추대하는 데 동참한다. 정의당은 2012년 이후,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기에도 야권연대를 통해 민주당과 긴밀히 공조하려는 입장을 이어간다. 급기야 2019년에는 연동형 비례대표제 선거법 개정을 위해 조국 장관 임명이나 공수처법을 찬성했고, 2022년에는 검수완박에도 찬성하면서 민주당에 협조적인 노선으로 경도된다. 정치 현안뿐 아니라 ‘소득주도성장론’을 사실상 수용하면서 민주당의 정책노선과 근본적 구별도 흐려진다. 

나아가 ‘정치적 노동자운동’의 계승이라는 측면은 거의 해체되었다. 조직노동과의 연계는 지속적으로 약화되었는데, 정의당 스스로 조직노동과 연계하기 위한 뚜렷한 전략이 없었다. 예를 들어 21대 총선에서 비례대표 후보 상위순번에 노동운동이 아니라 청년을 할당한 것도, 노동운동과 결합을 우선순위에 두지 않는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진보정당의 야권연대 편향은 실상 민주노총에서부터 나타난 것이기도 했다. 2008년 ‘광우병 쇠고기’ 수입반대 시위부터, 2014년 세월호 참사 투쟁, 2015년 민중총궐기를 거쳐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촛불까지, 민주노총은 민주당이 주도하는 반보수전선의 중요한 축을 담당했다. 집회 실무를 맡고 조합원을 동원하는 민주노총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특히 민주노총은 2008년 광우병 쇠고기 수입반대 시위가 이명박 정권 초반, 국정 동력을 약화시키고, 민영화 반대 쟁점도 제기하면서 성과가 있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이후에도 이와 같은 방식의 투쟁을 조직하려는 구상을 이어간다. 그 후 2010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노총은 야권연대 후보 지지를 명분으로 최초로 민주당 후보에 투표할 수 있도록 결정하면서 야권연대는 확고한 방침이 된다. 2012년 총선에서는 한 발 더 나아가는데, 민주노총은 민주통합당과 최초로 협약을 맺고 민주노총이 민주통합당의 당선을 위해 노력한다는 점도 명시했다. 그에 따라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이 민주당 유세에 참여하는 장면도 연출된다. 당시 정치방침과 민주당과 정책협약에는 아래의 내용들이 포함되었다.

<6.2지방선거 민주노총 방침(2010.3.)> 
“(2) 지역본부 및 지역사회 및 진보정당 등의 동의(합의)로 선출된 ‘반MB연대단일후보’ 중에서 민주노총후보(지지후보)와 배치되지 않고 민주노총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자에 대하여 지지, 연대한다.”
 
<2012년 총선 민주통합당-민주노총 협약: ‘민주진보 진영의 총선 승리와 노동기본권 보장 및 사회민주화 실현’을 위한 정책협약> 
“제19대 국회에서 민주진보 진영의 원내 제1당 의석 확보 및 교섭단체 구성 등 안정적인 의회 내 절대다수 의석 확보를 담보하는 총선 승리를 위해 적극 협력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민주노총의 실천은 점점 민주당과 구별되기 어려워진다. 이런 상황에서 당연히 민주노총은 진보정당들이 민주당과 공조하고, 야권연대를 추구하는 것을 비판할 수 없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기만 해도, 당시 민주노총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는 민주당 정부에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야권연대 10년이 지나고 나서, 문재인 정부 시기에 이르러서는 사실상의 ‘비판적 지지’나 ‘활용론’에 가까운 방향으로, 실용적으로 입장을 바꿨다. 노동자 정치세력화 노선의 실패에는 민주노총이 반보수전선에 핵심적인 역할을 맡으면서 민주당과 공조한 역사가 배경으로 깔려있다.

한편 2022년 대선에서 민주노총은 진보정당(정의당, 진보당, 노동당)의 대선 후보를 지지하는 것으로 방침을 결정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민주당 이재명 후보를 지지하는 흐름이 조직되었고, 신승철, 김영훈 등 전직 민주노총 위원장들까지 대거 민주당 이재명 후보 캠프에 참여하고 말았다. 

민주노동당 분당 이후로도 통합진보당 분당과 해산을 거쳐, 노동당·녹색당·정의당·진보당 등 복수의 진보정당이 존재하는 상황이 10여 년간 지속되면서 민주노총은 특정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민족해방파(NL) 노선의 민주노총 집행부를 비롯하여 현장파 일부도 이러한 분열이야말로 노동자운동이 진보정당운동과 결합하는 데 결정적인 장애이며, 진보정당이 위기에 빠진 원인이라고 지적하곤 한다. 그러나 복수의 진보정당이 존재하는 상황이 위기의 원인일까? 정작 민주노총이 민주당과 구별되는 진보정당을 통해서 실현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모호했을 뿐 아니라, 진보정당이 스스로 하고자 하는 바도 모호했다.
 
 

11. 문재인 정부의 집권, 개혁시도와 실패

 
노동존중을 표방한 문재인 정부는, 노동운동의 정책 요구를 대선 공약과 국정과제를 통해 상당 부분 반영했다. 취임 후 첫 현장방문 일정으로 인천국제공항을 선택해,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화 정책을 발표했다. ‘노동정책 로드맵’은 양질의 일자리 확대, 노동존중, 차별적인 노동시장의 시정을 제시했다. 이어 2017년 7월에는 이듬해 최저임금을 16.4% 인상된 7,530원으로 결정했는데, 이는 외환위기 극복 시기인 2000년 이후로 특별한 거시경제적 변동이 없는 상태에서 가장 높은 인상률이었다. 박근혜 정부의 양대지침(쉬운해고, 취업규칙 개악)과 공공부문 전직원 성과연봉제 지침도 폐지했다. 이러한 집권 초반 정책은 노동계의 기대를 높였다.

2017년 말 민주노총 선거에서 당선한 김명환 위원장 집행부는 사회적 대화의 복원을 핵심 정책으로 제시했다. 김명환 위원장 당선은, 갓 집권한 문재인 정부에 대한 조합원의 기대를 반영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새로 취임한 민주노총 집행부는 2018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사회적 대화 복원을 위한 노정 대화를 시작한다. 민주노총은 ‘노사정대표자회의’를 통해 기존 노사정위를 ‘경제사회노동위원회’로 명칭과 운영 방식을 변경하기로 합의한다. 그러나 곧 이루어질 것처럼 보였던 민주노총의 사회적 대화 복귀는 역시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2017년 최저임금을 급격하게 인상했던 정부는, 인상률로 인한 충격을 줄이기 위해 최저임금 산입범위를 넓히는 최저임금법 개정을 추진한다. 애초 면밀한 준비가 없었던 최저임금 인상 결정의 뒤늦은 후속 대책이었지만, 노동계는 당연히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민주노총은 정부여당이 주도한 최저임금법 개악에 항의하면서 2018년 5월 노사정대표자회의를 일시적으로 탈퇴한다. 

그해 7월 노사정대표자회의에 민주노총이 복귀한 후, 집행부는 10월 정책대의원대회를 거쳐 이듬해, 2019년 정기대의원대회를 통해 경사노위 참여 결정을 추진한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의 노동정책에 대한 기대가 점차 사그라드는 상황에서, 정부가 추진하는 최저임금 결정구조 개편과 탄력적 근로시간제 확대 문제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최된 민주노총 정기대의원대회에서 경사노위 참여 안건은 부결되고 만다. (찬성 44.1%로 부결되었다.) 2018년 3월 정부와 여당은 1주 최대 52시간 상한제를 도입하면서 근로기준법을 개정했는데, 탄력적 근로시간제와 선택적 근로시간제 확대 등 노동시간 유연화가 동반되면서 민주노총의 반발을 부른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정책도 추진 과정에서 파열음이 터져나온다. 정부는 추상적인 기준만 제시한 후 각 기관별로 노, 사, 전문가로 위원회(노사전위원회)를 구성하여 구체적인 전환 방식을 결정하도록 했다. 많은 기관에서 위원회에 노동자 측 대표로 비정규직 노동자 대표가 아니라 정규직 노조 혹은 하청사 관리자가 참여하면서 논란이 커졌다. 가장 큰 문제는 정규직 노동자나, 정규직 취업을 준비하는 취업준비생들의 반발이었다. 이미 2016년 교육공무직법 추진 과정에서도 나타난 반발이 더욱 확산되었다. 인천국제공항, 서울교통공사, 도로공사 등에서 청년층 직원을 중심으로 정규직 전환에 반대하는 행동이 나타났다. 이들은 정규직 전환이 시험을 거치지 않은 특혜이고 공정하지 않다고 비난했다.

정규직 전환 정책이 이러한 조건에서 지지부진해지거나 왜곡되면서 고용전환 대상자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이어진다. 잡월드(2018년), 도로공사(2019년), 가스공사(2020년) 국민건강보험공단 고객센터(2021년)의 파업이 대표적이다. 특히 도로공사 투쟁에서는 톨게이트 수납원 노동자들이 불법파견이라고 대법원 판결을 받은 후, 직접고용을 요구했다. 장기간 격렬하게 파업이 진행된 후, 사측은 결국 직접고용을 수용한다. 그러나 사측은 톨게이트 업무를 자회사가 수행하도록 하고, 직접고용된 노동자를 기존 업무가 아닌 시설관리 업무 등에 배치했는데 그들의 임금과 처우는 자회사 노동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러한 일련의 투쟁들은 ‘자회사’ 방식의 전환을 거부하고 모회사의 직접고용을 요구했다. 민주노총과 산하 조직들은 자회사 전환 방식이 ‘제대로 된 정규직 전환’이 아니라고 비판했다. 이와 더불어 공공기관 임금체계 논란에서 직무급제를 강하게 반대했다. 결국 이러한 투쟁의 요구는 대체로 정규직과는 구별되는 직무를 수행하던 노동자들을 모회사 직접고용으로 전환하고, 기존 정규직의 기업별 연공 임금체계에 포함시키라는 것으로 집약할 수 있다.

물론 민주노총 산하 산별노조 간에 온도차이는 있었다. 정부는 정규직 전환 과정에서 유사직무에 대해서는 기관을 넘어선 ‘표준임금체계’를 적용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보건의료노조가 이를 공공병원의 정규직 전환자에 적용하는 방안을 수용하면서, 2018~19년 즈음 논란이 불거진다. 공공운수노조와 민주일반연맹은 보건의료노조의 표준임금체계 수용이 비정규직을 차별하는 직무급제를 수용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결국 정부가 제시했던 표준임금체계는 현장에 안착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노동조합이 정규직 전환 노동자들의 초기업적, 또는 산업별 임금기준을 마련하기보다는, 해당 기업 안에서 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수준을 최대한 따라잡는 데 집중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정부가 정규직 전환 노동자의 처우 기준을 마련하게 위해 만든 노정 협의기구인 ‘공무직위원회’도 부분적인 처우개선 방안을 논의했을 뿐, 공공부문에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임금, 처우의 표준을 마련하지 못하고 공전된다. 기업별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비정규직 투쟁이라는 경로가 더욱 강화된 것이다.

공공기관 정규직 전환 관련 갈등이 계속되던 2018년 12월 11일에는 한국서부발전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비정규직 청년노동자 김용균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2인 1조로 근무해야 할 위험업무에 하청업체가 한 명을 배치하여 근무하게 한 결과였다. 이 사건은 위험의 외주화 문제를 선명하게 드러냈을 뿐 아니라, 공공기관도 민간기업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김용균은 사건 직전, 노동조합이 주도한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을 문재인 대통령에게 요구하는 손피켓 인증 사진을 찍었는데, 사실상의 ‘유서’와도 같이 인식된 이 사진 역시 정부의 책임을 묻는 강한 이미지로 남았다.

공공운수노조를 비롯한 민주노총의 투쟁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 사건은 결국 산업안전보건법을 개정하고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제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정작 김용균이 요구했던 발전소에서의 정규직 전환은 문재인 정부 임기가 끝나고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전환 방식을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기후위기에 따른 석탄화력발전소 폐쇄 문제까지 부각되면서 논의가 더 진행되지 못했다. 석탄화력발전소는 탄소감축과 에너지전환 과정에서 노동자의 고용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문제가 가장 직접적으로 부각되는 현장이 되었다.

기후위기 대응과 산업전환 문제는, 발전 공기업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제조업에서도 탄소배출 감축만이 아니라 생산 자동화가 빨라지면서 산업전환에 대비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금속노조는 사용자들에게 산별교섭에서 ‘산업전환 협약’을 체결하자고 요구한다. 결국 금속산업 노사는 2021년 8월, “디지털화·자동화·전동화 및 기후위기에 따른 산업전환 시기 회사의 지속 가능한 미래 발전과 고용안정, 양질의 일자리 확보를 위한 투명한 경영전략을 기반으로 책임성 있는 산업전환 대응계획을 함께 수립하고 실행한다”는 내용을 합의했다. 그러나 금속노조가 산업전환 대응의 실효성을 확보하기 위해 함께 추진한 ‘공동결정법’ 입법은 민주노총에서 논란이 커지면서 금속노조만의 사업으로 진행된다. 현장파 일부를 포함해 여러 단체가 제2의 ‘사회적 합의’와 같이 대자본 투쟁을 회피하는 계급협조 노선이라고 비판을 제기했기 때문이다(노동전선 외, 2021). 여러 이해관계가 얽힌 쟁점에 대한 사회적 대화는, 산업별 의제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민주노총 내에서 합의를 도출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2020년에 들어서는 코로나19 팬더믹이 시작되면서 사회경제적으로 큰 충격이 발생한다. 경제적 충격으로 인해 고용위기가 떠오르고, 취약층의 건강권, 생존권이 위협받는다. 팬더믹에 따른 고용 피해는 청년, 여성, 비정규직, 특수고용 등 취약노동자에 집중되었다고 평가된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노동운동은 취약노동자의 고용-소득 보호 대책과 사회안전망 확충, (일시적) 해고금지를 요구했다. 민주노총은 팬더믹 초기인 3월 10일 기자회견을 열고 ‘재난생계소득제’ 조기 시행, 취약 노동자 보호, 사회공공성 강화를 요구하며 대정부 교섭, 긴급 비상협의를 요구한다. 4월 초에는 팬더믹으로 직격탄을 맞은 항공, 특수고용, 영세사업장, 보건의료 노동자를 중심으로 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해고금지를 추가로 요구한다. 

민주노총은 팬더믹 위기를 사회적 대화 복원의 계기로 삼고자 했다. 민주노총의 제안 이후 정부가 화답하면서 ‘코로나 위기 극복 노사정 교섭’(원포인트 사회적 대화)가 진행된다. 5월과 7월 사이 집중적으로 진행된 협의 결과, (잠정)합의안이 도출된다. 그러나 이 합의안을 둘러싸고 민주노총 내에서 격렬한 논쟁이 시작된다. 사회안전망 확충 정책이 추상적이고, 해고금지가 명시되지 않았으며, 후속 이행 논의를 경사노위에서 하도록 한 게 문제라는 비판이 주된 요지였다. (물론 여러 정파가 각자의 입장에서 비판을 제시했기 때문에, 모든 논점이 일관된 것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애초부터 사회적 대화를 불신한 입장들의 불만이 폭발하고, 이러한 불만이 김명환 집행부 비판으로 집약되었다고 할 수 있다. 6월 말 7월 초에 열린 중앙집행위에서 반대가 많은 상황에서 위원장 직권으로 상정한 7월 23일 임시 대의원대회에서 노사정 합의건은 부결된다. (찬성 38.3%, 반대 61.7%.) 이는 2019년 1월 정기대대에서의 경사노위 참여 찬성율(44.1%)에도 미치지 못했다(박용석, 2020).

한편, 문재인 정부 집권 후반부에는 대선 공약이기도 했던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추가 비준이 쟁점으로 떠오른다. 결국 2021년 2월, ILO 결사의 자유 협약(87호, 98호)과 강제노동협약(29호)이 국회에서 비준된다. 그러나 ILO 핵심협약 비준을 이유로 사업장 점거 파업 규제, 단체협약 유효기간 연장 등 노조법 개정이 함께 추진되면서 협약 비준이 현실의 노사관계를 바꾸는 데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오랫동안 진행된 ILO 핵심협약 비준 운동의 결말로서는 빈약한 성과였다. 

2021년, 문재인 정부 시기 마지막 최저임금 결정은 9,160원으로, 대선에서 공약한 1만원에 결국 미치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2017~2022년)의 최저임금 연평균 인상률은 7.20%로, 박근혜 정부 임기(2013~2017년)의 7.42%보다도 낮았다. 문재인 정부가 소득주도성장론의 핵심적 정책수단으로 추진했던 것이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초라한 결과였다. 결국 임기 마지막 해 ILO 핵심협약 비준과 최저임금 인상은 초라하게 마무리되고 말았다.
 
 

12. 문재인 정부의 실패에 대한 민주노총의 평가

 
문재인 정권 초기부터 민주노총을 포함한 노조운동은 최저임금 인상과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주 52시간제와 같은 정부 정책을 비판적으로 지지했다. 이후 최저임금 인상폭 축소와 산입범위 개악, 정규직 전환 지체와 왜곡, 탄력근로제 확대 등을 거치면서 정부의 노동정책과 갈등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정책에 대한 본질적인 비판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시기의 노동운동의 대응은 주로 문재인 정부가 제시한 노동정책을 애초 취지에 맞게 ‘제대로’ 하라는 요구에 가까웠다.

문재인 정부 시기 노조운동 전반을 살펴보면, 그 외의 노동시장의 변화에는 방어적으로 대응했다. 임금체계 개편 문제를 보면, 반대 입장이 주류였으며, 그렇다고 다른 초기업적 대안을 제시한 것도 아니었다. 문재인 정부도 기존 정규직 보호를 건드리지 않는 상황에서 노동계의 요구를 선택적으로 수용했는데,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 외에 민간부문에서 비정규직을 줄이기 위한 실효성 있는 정책을 추진한 것은 없다(이창근, 2021). 재벌 대기업이 사내하청 일부의 정규직화(신규채용)를 진행하기도 했으나, 결국 2차 노동시장에 대한 대안이 부재한 가운데 1차 노동시장을 부분적으로 확대하는 방식으로 타협이 이뤄진 셈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권현지, 2021). 

특히 문재인 정부의 공공부문 비정규직 전환과 이어진 갈등은 많은 쟁점을 드러냈다.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공공부문의 상용형 비정규직에 대한 정책으로 그친 것은 물론, △전환 과정에서 기존 정규직(특히 MZ 세대 직원)의 극심한 반발이 나타나며 공정성 논란이 부각되었으며, △전환 방식(직접고용, 자회사 등)과 전환 후 (초기업적 표준 형성보다는) 기업별로 차별 철폐를 요구하는 투쟁의 분출이 큰 쟁점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공공부문에 국한된 이 정책은 전체 노동시장의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큰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노동정책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노동자운동이 요구한 바를 수용한 정책도 상당히 많았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 때문에 문재인 정부의 노동정책 실패는 다른 한 편으로는 결국 민주노총의 실패이기도 했던 것이다. 민주노총은 문재인 정부를 거치고 나서는 더 이상 그 전과 동일한 요구를 반복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는지,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지를 찾아가는 노력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선과 정권교체 이후에도 민주노총은 문재인 정부 시기에 대한 진지한 복기보다는 “불평등 체제 교체”와 같은 추상적인 구호를 내세우거나 윤석열 정권 퇴진을 요구할 뿐이다.

한편 문재인 정부 시기, 양대노총의 조직규모는 크게 확대되었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모두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 과정에서 조직이 확대된다. 그 외에도 한국노총은 공노총 등 외곽에 있던 노조가 가입하면서 조직규모가 커진다. 민주노총은 공공부문 외에도 건설, 서비스 등에서 중소영세 비정규직 노동자의 조직화 확대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조합원 규모를 떠나 건설, 화물, 라이더 등 특수고용-플랫폼 영역에서의 조직화, 안전운임제 도입과 확장 시도 등의 초기업적 노동기준 형성을 위한 노력은 기존 기업별 노조와는 다른 운동방식과 가능성도 보여주었다.

역설적으로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의 실패를 계기로, 노동운동에는 지난 10여 년 간 이어진 ‘범민주진보 진영’, ‘야권연대’라는 길을 반성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여전히 노동운동을 주도하는 “범민주진보” 진영이라는 이데올로기와 586세대의 인적 관계망으로 민주당과 연결되어있는 활동가들에게도 이러한 반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정권교체 이후 민주노총 집행부의 투쟁방식이나 민주당과의 관계 설정을 볼 때, 노동운동의 주류는 그러한 기회를 살리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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