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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불륜? 페미니즘과 법인기업 세계화

헤스터 에이젠슈타인 |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의 불행한 결혼”에서 페미니즘과 자본주의의 위험한 불륜으로

1970년대와 1980년대 초,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의 관계에 관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1960년대 말 “2세대” 여성운동이 부상하자 사회주의 전통에 속한 페미니스트 지식인과 활동가는 “여성 문제”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의 부적합성을 제기했다.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의 “불행한 결혼”을 제기한 이 논쟁에서 좌파는 여성과 젠더 문제가 마르크스주의 분석과 어떻게 연관되는지, 그리고 자본주의는 가부장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관해 답해야 했다.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는 별개의 체계인지, “이중 체계”인지, 아니면 또 다른 배치인지를 논하는 글들이 넘쳐났고,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전통 안에서 여성의 문제와 욕구에 주목하는 주제들을 재발견하고 발전시키려는 시도가 진행되었다(Z. Eisenstein, 1979; Kuhn and Wolpe, 1978; Vogel, 1983; Sargent, 1981).
현재의 역사적 계기 속에서 젠더에 관한 글은 관련되지만 아마도 다소 혼란스러운 문제를 던지고 싶을지도 모른다. 페미니즘은 자본주의와 위험한 불륜 관계에 들어섰는가? 좀 더 구체적으로, 현재의 여성운동은 어떤 방식으로 법인기업 세계화의 성장과 확산을 촉진했는가? 이 질문이 도발처럼 보일 것이다. 대부분의 필자들은 여성운동이 진보적 변화를 추구하는 더 큰 운동, 즉 대개 좌파로 정의되는 운동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현재의 페미니즘 사상과 활동이 작금의 권력에 매우 유용한 측면들을 지적하고 싶다. 나는 자매애에 기초한 자기비판과 분석을 통해 이것을 할 것이다. 또한 나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지금의 세계정세의 위험한 현실에 맞서, 진보적인 세력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할―의 전통이 부활하는 데 기여하기를 바란다.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기획의 현재적 타당성에 관한 주장으로는 Holmstrom, 2002b를 보라).
이런 주장을 위해 나는 1970년대 “구조조정”이 야기한 미국과 세계 경제의 심대한 변화를 개괄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있었던 여성운동의 부상을 논하고, 이 운동이 미국 내외에서 자본주의의 이익을 위해 이데올로기적·실천적으로 활용되었음을 지적한다. 특히 미국 내 가족임금의 쇠퇴와 “우리가 알고 있는” 복지의 폐지, 그리고 소액대출의 활용과 “개발도상”국의 수출가공지대에서의 여성 노동에 초점을 맞춘다. 또한 부시 정부가 “테러와의 전쟁”을 추진하면서 페미니즘 사상을 흡수했다는 점, 그리고 미국 정부가 선전하는 진실의 핵심, 즉 세계화가 가부장적 전통을 침식하는 과정에서 페미니즘이 문화적 용매로 작용한다는 선전의 핵심을 밝힌다.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 평가 절하되고 정당성을 상실해가는 세계를 숙고하는 과정에서 좌파가 페미니즘 사상과 활동의 중대한 기여를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배경: “장기 호황”의 종결 이후 “세계화”와 수익성 회복

전후의 “장기 호황”이 끝나고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세계 경제의 성장이 둔화되기 시작한 이래로 국제 경제의 변형에 대해 많은 글들이 작성되었다. 유럽과 일본의 경제 회복으로 위협받고 있었던 미국 경제는 (1973년과 1979년 석유수출국기구의 가격 “쇼크”로 상징되는) 제3세계 민족주의의 강한 도전에 직면했고 베트남 전쟁의 장기화로 취약해졌으며 경쟁적 우위를 상실해가고 있었다. 이에 대응하여 미국 법인기업과 정부는 이 같은 쇠락에 대항할 다양한 전략을 채택했다(Amott, 1993, 24~48; Pollin, 2003, 17~18; Tabb, 2001).
첫째, 미국 경제는 블루스톤(Barry Bluestone)과 다른 이들이 탈산업화 또는 녹슨 지대1)의 성장으로 명명한 과정을 개시했다. 제조업자들은 노조가 있는 북부에서 노조가 없는 남부로 산업을 이동시키던 국내 전략을 국제 전략, 즉 생산 요소의 일부를 해외로 이전하면서 값 싼 노동력, 반(反)노조정책, 수출가공 또는 자유무역지대의 제도들의 이점을 누릴 수 있는 전략으로 대체했다(Froebel, et al., 1980; Mies, 1998, 112~120; Freeman, 2000, 24~30). 이런 전략은 여성 노동이 선호되는 전자와 섬유 산업의 예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대만과 중국에서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까지, 그리고 멕시코와 카리브 지역에서 남미까지 세계 각지에서 “빠르고 [싼] 손가락” 덕분에 여성은 이러한 노동집약적인 산업의 최상의 노동력이 되었고, 이를 통해 지역 정부는 절실하게 필요한 외화를 얻었으며 다국적 법인은 이윤을 증대시켰다(Wichterich, 2000, 1~33). 또한 여타의 생산 지역은 자동화와 주로 여성이주 노동을 활용하여 비용을 삭감함으로써 미국 대륙에 잔존했다(Fernandez-Kelly, 1989). 현 시점에서는 사무직 서비스 부문의 직종이 해외로 이전하는 제2의 물결이 주목받고 있다(예를 들어 Glater, 2004). 여기서도 여성 노동은 핵심적이며, 기업들은 지역의 여성들이 그 일에 관심을 갖도록 비상한 노력을 한다(예를 들어 바베이도스에서 “핑크 칼라”의 자료입력과정에 대해서는 Freeman, 2000을 보라).
둘째, 운송과 공익사업, 도·소매 거래, 금융·보험·부동산, 정부, 기업·개인 서비스로 정의되는 경제의 서비스 부문이 급속하게 성장했다. 1970년에서 2000년까지 상품생산 산업에서의 고용이 단 15% 증가(2,600만에서 3,000만으로)한 반면에, 서비스 부문의 일자리는 4,900만에서 1억200만으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서비스 부문의 성장과 더불어 여성 고용이 급속히 증가했다. 1970년에서 2000년까지 신규 창출된 5,300만의 일자리 중에서 60%가 여성에게 돌아갔다. 이런 변화는 “여성의 노동력 참여가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여성이 상당수 고용되는 서비스 산업과 직종이 불균형적으로 증가했음을 반영했다”(Kuhn and Bluestone, 1987, 9).
여성이 서비스 부문으로 유입되는 과정은 하트만(Heidi Hartmann)이 지적했듯이 상호적인 것이었다.

값싼 여성 노동의 이용가능성이 공급을 제공하기 때문에, 그리고 가정보다는 노동시장에서의 여성의 활용이 대체서비스(예를 들어 패스트푸드가 가정의 요리를 대체하는 것)의 수요를 제공하기 때문에 서비스 부문이 성장한다. … 그리고 개인서비스가 상업화되려면 여성의 노동력 참여가 증가해야한다. (Hartmann, 1987, 55.)

여성 고용의 성장에 특히 중요했던 점은 서비스 부문에서 금융부문이 급격히 늘어난 것이었다. 필립스(Kevin Phillips)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지난 몇 십 년 동안 미국 경제는 내가 금융화라고 부르는 것을 통해 변형되었다. 자금 관리, 유가증권 관리, 기업 재조직화, 자산의 유가증권화, 파생상품 거래, 그리고 다른 형태의 증권 패키지는 물건을 생산·육성·운송하는 행위를 꾸준히 대체했다. (Editors, 2002, 53에서 인용.)

투자의 흐름이 상품 생산에서 금융·보험·부동산으로 확실히 전환되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로 산업 부문에 비해 사부문 (비주택) 고정자산의 투자가 얼마나 증대했는가를 검토해볼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70년대를 거치면서 상품 생산(광업, 건설업, 제조업)부문이 투자의 총 증가 중 약 32%를 차지했다면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그 비중은 단지 18%였다. 반면에 금융·보험·부동산에서 투자유입 비중은 첫 번째 시기에 16%였지만, 두 번째 시기에 30%였다. (서비스 부문 전반에서 금융·보험·부동산이 담당한 결정적 역할은 비(非) 금융·보험·부동산 서비스 비중이 첫 번째 시기 45%에서 두 번째 시기 50%로 미미하게 증가한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GDP에서 금융·보험·부동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13%~14%로 사실상 일정하게 유지되었다. 그러나 금융·보험·부동산 부문의 여성 노동자 비율은 1960년에 46%에서 1980년에 58%로 가파르게 증가했다. 그 후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금융·보험·부동산 부문의 여성 노동자 비율은 안정된 반면, 전체 금융·보험·부동산 부문은 급속히 성장하여 현재는 GDP의 20%에 달한다.
이처럼 수익성을 높이려는 자본의 전략은 탈산업화, 서비스 부문의 팽창, 상품 생산에서 금융으로의 투자의 상대적 전환을 포함했다. 이런 발전은 모두 여성 노동 활용의 팽창을 수반했다. 그 결과 가정 밖에서 고용된 미국 성인 여성 인구의 비율이 1960년 34%에서 현재 60% 이상으로 상승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여성을 가정생활로 복귀시키려던 시도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많은 기혼 여성들이 유급 고용에 남게 되었다. 이것은 고용주들에게 중요했는데, 특히 서비스 부문의 성장과 더불어 기혼 여성들이 중요한 미개발의 노동자층을 구성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1970년에서 2000년 사이에 2,700만 명의 여성들이 신규 노동력으로 유입되었을 때, 이 중 63%(1,600만)가 기혼 여성이었다.2) 뒤에서 다루겠지만, 기혼 여성의 노동에 대한 강력한 금기는 맞벌이 가구의 경제적 필요성과 1970년대 페미니즘 이데올로기가 결합되면서 극복되었다. 백인 여성의 고용 형태는 흑인 여성―이들은 전통적으로 결혼 후에도 일을 지속하는 경향이 있었다―의 고용 형태에 더 근접했다.
더 높은 수익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창출된 구조적 변화는 대개 케인즈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의 전환으로 묘사되는 정치적·경제적 이데올로기의 심대한 변화를 동반했다. 이것은 뉴딜로 상징되는 자유주의적 합의에 대한 전방위적 공격을 의미했다. 작은 정부의 철학이자 경제 성장을 위한 일련의 처방으로서 신자유주의는 시카고에서 탄생했다.

신자유주의자들과 그 후원자들은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인 하이에크와 경제학자 프리드먼과 같은 그의 추종자들을 핵심으로 한 시카고 대학의 작은 모임에서 출발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교리를 발전시키고 포장하고 추진할 재단, 기관, 연구센터, 출판사, 학자, 작가, 홍보 전문가들의 거대한 국제 네트워크를 만들어냈다. (George, 2002, 4.)

내서(Paul Nasser)가 지적했듯이, 편리하게 신자유주의로 명명된 것은 사실상 정부의 개입에 제한받지 않고 경기순환이 진행되도록 하는 뉴딜이전의 합의로의 회귀다. 이 일련의 사상들의 부상은 영국의 대처, 미국의 레이건 정권과 연결되었다(또한 그것은 현 부시 행정부 하에서 새로운 활력을 얻고 있는 중이다.). 1978년 캘리포니아에서 재산세 증액에 제한을 설정하는 <제안 13호>가 성공적으로 통과되고 1981년 레이건 대통령이 파업 중인 전문항공관제사조합(PATCO)을 해고했을 때 신자유주의의 정치적 유효성이 입증되었다(Nasser, 2003; Amott, 1993, 34).
우익과 우익 편향적인 정치인들의 효과적인 연합이 추동하는 신자유주의 공세에는 노동과 단결권에 대한 공격, 복지 국가와 누진 과세 개념의 정당성 박탈, 경제 성장과 완전 고용을 자극하는 정부 역할의 평가 절하, 공공업무와 기관의 사유화 선호, 탈규제―특히 이것은 환경 규제, 적극적 조치, 은행업, 공익사업체, 미디어와 같은 영역에서 정부 정책을 통해 법인기업에 부과된 제약을 격퇴하기 위한 것이다―에 대한 강조가 포함되었다.
국제적으로 신자유주의 교리는 칠레의 피노체트 독재 하에서 최초로 시도되었다. 그 후에 국제금융기구들, 특히 브레턴우즈 기구들(국제화폐기금과 세계은행)이 이를 강요했는데 1980년대 외채 위기는 이들이 채무국의 경제를 재구조화하는 데 이용되었다. 국제금융기구들은 “구조조정정책” 프로그램 하에서 “정책권고안”을 강제로 부과함으로써 사실상 채무국 정부로 하여금 일련의 급격한 변화에 응하도록 만들었다. 거시경제의 안정화와 구조 개혁이라는 명목으로 정부는 자국 통화를 평가 절하하고, 공공 부문을 감축하며, 국내 가격을 세계 시장에 “조정”하기 위해 식량과 연료 보조금을 폐지하고, 무역을 자유화하며, 국유 기업을 사유화하고, 토지 소유권을 조정―이것은 종종 토지에 대한 관습적 권리를 몰수하여 거대지주에게 주는 결과를 낳았다―하도록 권고 받았다(Chossudovsky, 2003, 35~64).
1989~1991년, 소련과 그 위성국가인 동유럽 정권의 몰락은 이 일련의 정책에 새 활력을 불어넣었다. 과거 국유 기업은 사유화되고 민족 경제는 국가 주도의 발전을 포기해야만 했던 것이다. 일부 국가들-아시아의 호랑이로 불리는 대만, 싱가포르, 홍콩, 남한뿐만 아니라 중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같은 신흥 산업국들-이 국가 주도의 발전정책을 유지하면서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남아시아, 라틴 아메리카, 사하라이남 아프리카의 다른 국가들은 1980년대 이래로 지속된 구조조정정책의 영향으로 저발전과 빈곤, 영양실조, 질병의 파괴적인 증대로 고통을 겪었다.
1990년대에 구조조정정책의 영향에 대한 비판이 광범위하게 제기되자 세계은행은 “부채가 많은” 나라들의 부담을 인정하고 “빈곤 감축”의 필요성을 새롭게 강조하면서 그 정책들을 수정했다(Petchesky, 2003, 142~151). 이런 변화는 구조조정정책이 낳은 빈곤의 심화―특히 아프리카 지역의 빈곤―에 대한 대응이었지만, 각국의 정부들은 애초에 빈곤을 심화시킨 기본적인 거시경제 정책을 여전히 이행해야만 했다.

물과 전기 같은 핵심 서비스의 사유화, 보건의료·교육 같은 공공 서비스의 악화 또는 사유화는 결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보건의료나 교육에 사용료를 부과하자 빈곤층 또는 저소득 가구의 병원 이용과 학교 등록은 현저히 감소했다. 게다가 소녀와 여성은 그런 정책의 주 희생자이기 때문에, 성별 격차도 커졌다. (Dembele, 2003.)

극단적인 경우에 구조조정정책은 “실패한 국가”, 즉 통치성의 근본요소들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으며 “종족적” 폭력과 내전이 규범이 된 국가들의 양산에 일조했다(Federici, 2000).
미국 엘리트들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일련의 변화는 세계 경제대국이자 압도적으로 우월한 군사력을 보유한 미국의 지배력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그러므로 법인기업 세계화는 경제적 요소뿐만 아니라 군사적 요소를 가진다. 미 국방성의 병력변환국에서 나온 공개정책문서에서 바넷(Thomas Barnett)과 가프니(Henry Gaffney, Jr.)는 세계가 세계화하는 나라들과 “틈새”에 놓인 나라들로 양분되었다고 말한다.

세계화가 심화·확산되면서 두 집단의 국가들이 서로 경쟁한다. 스스로를 내적으로 조정하여 부상하는 세계 규칙에 맞추려고 노력하는 나라들(예를 들어 서방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 푸틴의 러시아, 아시아의 신흥 경제들)과 정치적·문화적 경직성이나 지속적이고 처참한 빈곤으로 인해 그런 국내적 재배치를 거부하거나 달성할 수 없는 나라들(중앙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중앙아메리카의 대부분 국가들). 우리는 전자를 세계화의 역동적 중심부(Functioning Core)로, 후자를 통합되지 않은 틈새(Non-Integrating Gap)로 명명한다. (Barnett and Gaffney, 2002, 1~2.)

이 분석에 따르면, 틈새는 테러리즘이 발발하는 곳이며, 이 새로운 야만인들을 저지하는 것이 미군의 의무다. 저자들은 미국이 세계의 나머지 국가들에게 “안전”을 제공함으로써 엄청난 국제수지 적자를 현물로 보상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테러와의 전쟁은 법인기업 세계화의 전략과 딱 맞아떨어진다. 현 시점에서 이런 정책들은 이라크 점령 및 이라크 경제 대부분의 예정된 사유화와 결합된다(Klein, 2004).

2세대 여성운동: 부르주아 여성 혁명

1960년대 중반 이래 급격한 경제 재구조화의 시기에는 또한 이제는 국제적 여성운동이라고 할 만한 것이 두드러지게 성장했다. 이 운동의 활력과 범위를 이해하려면 이것과 경제적 변화의 관련성을 파악해야 한다. 나는 그 중에서도 서비스 부문의 팽창과 여성의 유급노동력으로의 유입, 특히 기혼 여성의 유입에 주목한다. 수익성을 극대화하려는 법인기업과 정부의 전략은 여성의 선택, 특히 경제적 기회를 극대화하려는 사회운동과 복잡하게 상호작용했다. 베네리아(Lourdes Bener a)가 지적했듯이, 여성들의 변화된 인식은 “공급” 요인이었고, 많은 경제 부문에서의 여성 노동의 선호는 “수요” 요인이었다(Bener a, 2003, 77; 이것은 세계적 현상이다).
주지하듯이, 격동의 1960년대에 부상한 “신사회운동들” 중에서 여성운동은 가장 끈질기고 영향력 있는 운동의 하나다. 미국에서 통상적인 역사서들은 이 운동의 두 가지 조류, 즉 스스로를 사회 혁명가로 간주한 급진적인 여성해방 활동가들과 오직 한 조각의 파이만을 추구했던 자유주의 활동가들을 소개한다. 이 두 범주는 프리먼(Jo Freeman)이 최초로 규정했고(Freeman, 1975), 대부분의 역사가들이 여전히 이를 활용한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는 미국 페미니즘의 “자유주의” 분파가 1940~50년대의 노조 및 공산당 활동에서 유래했음을 보여주었다(Weigand, 2001; Maclean, 2002a).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에 있었던 여타의 활발한 운동들―베트남전 반대운동, 학생권 옹호운동, 블랙팬더3)와 같은 흑인 민족주의 운동―은 퇴조하거나 궤멸되었지만 미국 여성운동은 계속 성장했고 미국 사회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최근의 역사서들은 이러한 광범한 영향력을 칭송하면서 “격동”(Evans, 2003), “세계가 열리다”(Rosen, 2000), “회귀 불가능”(Freeman, 2002)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여 페미니즘 운동이 1970년대 이후 30년여 년에 걸쳐 만들어낸 변화의 폭, 깊이, 영속성을 지적했다.
여성운동이 많은 문제―재생산의 권리, 아내 구타, 양육, 성적 선택의 자유, 건강 문제, 포르노그래피―를 제기했지만 조직된 운동의 절대 다수의 역량은 여성의 유급 고용에 집중되었다. 에반스(Sara Evans)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지금까지 여성운동은 미국의 총 노동력에 가장 강력하고도 단결된 영향을 미쳤다. 주택도, 양육도, 남편과 아내 사이의 가사노동 문제도 아니었다. 여성들이 국가를 재창조하도록 만든 것은 바로 직업과 노동 기회의 문제였다. 공장에서 일하건, 사무실에서 일하건, 아니면 전문직이건 간에 노동의 정치학은 페미니스트들의 영구적인 관심사였다. … (Evans, 2003, 81~2.)

동일 임금, 성희롱, 훈련과 승진에 대한 접근권, 적극적 조치를 통한 전통적인 남성 직종에 대한 접근권, 동등가치 캠페인―간호와 같은 전통적인 여성 직종의 여성노동자들의 임금을 트럭 운전 같은 전통적인 남성 직종의 남성노동자들의 임금에 조정하는 것― 등 여성 활동가들은 흑인 민권운동의 선례를 따라 작업장 내 평등을 위해 정부의 지원을 얻고자 노력했다.
이데올로기적인 수준에서 미국 여성운동은 1950년대를 지배했던 성별 규범의 해체를 목표로 삼았다. 급진주의 페미니스트와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는 단결하여 전후에 가정의 소비 팽창을 뒷받침했던 생계부양자 아버지와 전업주부 어머니라는 백인 교외가족의 경직된 성역할에 거세게 저항했다. 1940년대에 생산직 여성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활동했던 프리단(Betty Friedan)은 1963년의 유명한 주장에서 중산층 주부들의 비애를 빗대어 말했다. 그녀들의 이름 없는 문제는 가정생활의 지루함이었다(Friedan, 1963. 아마도 프리단이 공산주의자 탄압을 두려워해서 자신의 초창기 활동을 은폐했을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Horowitz, 1998; Schrecker, 1998, 388~389를 참고하라).
성역할에 대한 공격은 전통적인 통념, 즉 기혼 여성은 유급 노동력이 될 수 없다는 통념을 극복하려는 페미니스트들의 열망과 연결되었다. 이러한 낙인이 일부 기혼 여성들, 특히 노동자 계급과 이주 여성들이 계속해서 일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지만 그로 인해 이 여성들의 직종은 여성에게 적합한 것에만 제한되었다. (물론 아프리카계 여성들은 노예 시절부터 줄곧 이런 사치스런 보호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남성 동료들과 더불어 가장 혹독하고 가혹한 노동 조건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Davis, 1981을 보라.) 이제 여성들은 가장 정형화된 남성 직종―소방, 경찰, 광부, 건설업, 항공조종―에 진입할 권리를 위해 싸웠고 또 그것을 획득했다(MacLean, 2002b).
[성별이 드러나지 않도록] 변화된 언어―‘Fireman’ 대신 ‘Firefighter’―를 고집하는 것은 여성을 배제했던 최고소득 직종의 장벽을 제거하려는 열망을 반영했다. 19세기에 여성을 위한 보호입법을 쟁취하려고 싸웠던 노조는 여성 활동가들의 압력을 받아 이제는 견해를 바꿨으며 여성이 들 수 있는 무게나 여성의 야간 근무를 제한하는 법과 규제가 성차별적이라는 입장에 동의했다. 케슬러-해리스(Alice Kessler-Harris)는 보호입법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5년[1964~1969]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여성을 주로 가족성원으로 취급하면서 그들의 재생산 역할을 중시하던 법의 수용력은 변형되었다. 최소한 형식적으로는 모든 인종의 여성들이 고용법의 적용을 받는 개인들이 되었다. (Kessler-Harris, 2001, 267.)

여성에게 직종을 개방하라는 압력은 의료, 법률, 건축, 학술과 같은 전문직 분야에서 가장 성공적이었지만 대부분의 직업 범주들도 최소한 공식적으로는 여성에게 개방되었다. 비록 이런 법적 개방을 현실화하려는 투쟁에는 많은 소송과 엄청난 감정적 지구력이 수반되었지만 말이다(MacLean, 2002b).
또한 여성운동은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 완전한 시민이라는 관념을 확립하는 데 성공했다. 1970년대 페미니즘의 영향력이 절정에 달했을 때 순식간에 다양한 승전보가 울려 퍼졌다. 여기에는 재생산에 대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인정한 1973년 <로우 대 웨이드> 판결, 여성도 체육활동에 동등하게 재정을 지원받을 수 있도록 한 1972년 수정교육법 9조, 신용에 대한 동등한 권리 등이 포함되었다(Brenner, 2000, 242). 지방, 주, 연방 공직에 여성 후보자들이 성공적으로 배출되면서 여성의 정치 참여도 급속히 증가했다(위의 책, 243).
물론 여성운동의 많은 투쟁들이 완결되지 못했다. 새로이 힘을 얻은 복음주의 우익단체들이 획책한 페미니즘과 흑인 민권에 대한 반격은 1980년대에 가속화되었다(Faludi, 1991). 그러나 대부분의 분석가들은 여성운동이 여성의 역할에 대한 미국인들의 태도를 바꾸는 데 성공했다는 점에 동의한다. 1950년대에 대중적으로 아내와 어머니로 인식되던 이들(주로 백인)이 1990년대에는 노동자, 아내, 어머니가 되었다.
요컨대, 여성운동은 미국에서 여성을 위한 “부르주아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뤄냈다. 17·18세기의 영국, 프랑스, 미국 혁명이 봉건적 관계를 백인 부르주아의 지배로 대체했지만 이 혁명이 여성, 유색인, 무산자의 권리로 확대되지 않았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부르주아 남성은 스스로를 왕의 지배에서 해방시켰지만, 여성은 여전히 가족 안에서 남성의 지배에 종속되어 있었다. 여성운동은 19세기와 20세기 내내 완전한 시민으로서 여성의 권리를 주창해왔다(Pateman, 1988; Brenner, 2000, 222ff).
이 미완의 혁명이 이제는 완성된 것처럼 보였다. 여성, 특히 중산층 여성들은 “오로지” 아내이자 어머니라는 범주를 벗어나 경쟁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시장의 세계에 진입할 수 있었다. 미국 여성운동은 강력한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전통과 다양한 종류의 3세계·유색여성 페미니즘(Mohanty, et al., 1991; Holmstrom, 2002a)을 비롯하여 무수한 사상과 행동의 조류들을 산출했지만, 지배적인 주류는 여성을 자족적 개인이라고 역설했다. 이러한 페미니즘이 가부장적 압제로부터의 해방과 동일시되었다. 남편에게 재정적으로 의존하지 않기 위해 소득을 벌 권리, 자신의 기량과 능력을 완전히 발전시킬 권리, 끝없는 임신이 족쇄가 되지 않도록 출산을 통제할 권리 등, 한 마디로 미국식 페미니즘은 여성이 아내와/또는 어머니의 역할을 벗어나 자신의 이름으로 노동자나 기업인이 되어 시장경제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와 개인주의를 의미하게 되었다.
기업들은 이런 관념을 수용한 여성들에게 호소하기 위해 자신의 마케팅 전략을 조정했다. 운동경기에 참가한 강인한 여성의 이미지를 활용한 나이키에서부터 여성에게 기업 활동에 적합한 의상을 소개해주는 『비즈니스 위크』까지 이런 예는 많다. 변화된 사회적 기대 속에서 전통적인 주부는 쇠락한 부류의 여성, 즉 자신을 “전업주부”라고 변명하듯이 소개하는 여성이 되고 말았다. (가정 밖에서 임금노동을 하지 않는, 6세 이하의 아이를 둔 기혼 여성은 1970년에는 성인 여성 전체의 12%였으나 2000년에는 4%로 급감했다.) 기혼 여성의 유급노동 참여에 대한 강력한 금기 대신에, 기혼이든 미혼이든 여성이 자신의 대부분의 인생동안 가정 밖에서 노동한다는 관념은 규범이 되었다.
변화를 생생하게 보여주기 위해 밀크먼(Ruth Milkman)은 1930년대 대공황 시기의 일하는 여성에 대한 반응과 1980년대 불황기의 레이건 대통령 시절에 일하는 여성에 대한 반응을 비교했다. 대공황의 시기에는 여성과 남성이 호환 가능한 노동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실업률은 일반적으로 일하는 여성의 탓으로 돌려졌다. 그러나 1980년대에 여성을 희생양으로 삼으려고 했던 레이건의 생각은 통하지 않았고, 그는 오히려 AFL-CIO로부터 공개적인 비난을 받았다. “여성 고용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인 공세는 그것이 과거에 누렸던 대중적인 정당성을 [결여했다]”(Milkman, 1987, 112).

자본주의에 유용하다? 가족임금의 쇠퇴와 연방 복지 수급권의 해체

주지하듯이 여성노동의 광범위한 활용은 거대한 구조조정을 동반했고, 이에 따라 남성을 위한 전통적인 “굴뚝산업” 직종의 비율이 감소했다. 1930년에서 1980년까지 오래된 굴뚝산업들(자동차, 철강, 타이어, 가전제품, 석유화학)은 양극단에 소규모의 고임금 부문과 저임금 부문이, 그리고 그 ‘중간’에 대다수의 “반숙련·숙련의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가 존재하는 특징을 보였다(Kuhn and Bluestone, 1987, 11). 그러나 새롭게 확장하는 산업들―하이테크, 기업과 개인 서비스, 소매업―은 최상층에 고임금의 관료들이, 그리고 최하층에 거대한 저임금 노동자층이 존재하는 “이중적” 시장 구조를 갖는다. 따라서 여기에는 과거 ‘중간 임금’의 블루칼라 직종에 상응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변화의 생생한 증거로 백화점 산업의 변형을 들 수 있다. 전통적인 백화점들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정점에 달한 소비자 붐의 혜택을 입었지만, 서비스의 수준을 낮추고 자동화된 계산대를 갖춘 할인매장이 백화점보다 싸게 팔기 시작했다. 할인매장은 (주로 남성) 관리자 계층의 규모를 배가했을 뿐만 아니라 주로 여성들에게 적용되는 “저임금의 이동률이 높은 시간제 직종”의 수를 늘렸다(Kuhn and Bluestone, 1987, 17).
1987년의 이 연구는 월마트의 부상을 예견했다. 월마트는 현재 수익과 고용 면에서 가장 거대한 미국 기업으로 2002년 현재 연매출액 2,440억 달러에 140만 명의 직원―이 중 72%가 여성이다―을 보유하고 있으며, 지금 사상 최대의 성차별 집단소송의 대상이다(“월마트의 여성과의 투쟁”, 2004). 『비즈니스 위크』의 한 기사는 미국의 사회적 이동성의 감소에 관해 쓰면서 “미국의 월마트화”를 지적했다.

최근 몇 년간, 심지어 1990년대의 호황기에도 다수의 미국 대기업들은 노동비용을 통제하기 위해 이미 월마트의 전략, 즉 임시직과 시간제 노동자의 고용, 노조 파괴, 내부의 승진경로 해체, 국내외의 저임금 도급자의 아웃소싱과 같은 것들을 수용했다. 이러한 술책들이 소비자 가격을 억제하는 놀라운 결과를 산출하는 반면, 다른 여러 면에서는 비용이 상승한다. 노동력의 1/4 이상에 해당하는 대략 3,400만 명의 노동자가 저임금의, 대개 장래성이 없는 직종에서 시달리고 있다...또한 회사가 하도급자나 임시 대리인에게로 업무를 전환하고, 화이트칼라 직종을 중국과 인도로 옮기자 대다수 중간 소득의 고숙련 노동자들의 기회도 더욱 줄고 있다. (Bernstein, 2003, 54.)

세대간 이동성의 부족을 지적하면서 이 기사는 도미노피자와 피자헛에서 배달 운전수로 일하는 마이클 맥리먼스(Michael A. McLimans)의 사례를 인용한다. 그의 아내는 호텔의 접대원이다. 부부는 “일 년에 약 4,000 달러를 버는데 이 액수는 마이클의 아버지 데이비드가 베테랑 철강노동자로서 벌었던 6,000 달러에는 못 미친다”(위의 책, 58).
1973년과 1998년을 비교하면서, 긴딘(Sam Gindin)과 패니치(Leo Panitch)는 노동자 가족은 “더 많은 가족성원들”(그들의 설명에서는 성별이 언급되지 않았다)이 노동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변화된 노동력의 구조에 대응한다고 주장했다. “부채의 증가와 더불어 … 노동자 계급 가족은 소비의 유지와 증대를 위해 생활을 재구조화했는데 이는 더 많은 가족성원들(배우자, 학생)이 노동하고 일인당 평균 노동시간을 늘림으로써 이루어졌다”(Gindin and Panitch, 2002, 38). 다시 말해 임금의 정체는 맞벌이 소득 가족의 증대로 보상되었다.
어떤 면에서는 여성들의 유급노동의 정당화가 주요한 진전을 표상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트만(Heidi Hartmann)은 서비스 경제의 부상이 저임금 직종의 쇄도를 동반했다하더라도 여성들이 이로부터 혜택을 입었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여성들이 경제적 자립을 위해 불만을 표출해왔다는 증거로 이혼율과 편부모의 증가의 예를 들었다(Hartmann, 1987). 이것은 흑인여성들의 경우에 특히 그러했는데, 이들에게 1970년대의 변화는 신노예제라고 할 수 있는 가내 서비스의 종식을 의미했던 것이다.

2차 세계전쟁 직후에 흑인 여성의 소득은 백인여성의 소득의 절반 정도였다. 1981년경 흑인여성의 임금은 백인여성의 임금의 92~95%까지 증가했다. … 이것은 대체로 오늘날 흑인여성의 노동이 더 이상 가내 서비스 직종으로만 한정되지 않고 더욱 폭넓은 범위의 직종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 (Kuhn and Bluestone, 1987,23.)4)
이러한 부정할 수 없는 이득에도 불구하고, 기혼 여성의 노동력 유입―어린 아이가 있는 경우를 포함하여―은 자본이 임금을 계속해서 정체시키는 데 일조했으며, 동시에 19세기 동안에 가부장적 노동조합이 달성하고자 투쟁했던 임금, 즉 부인과 아이의 지출을 포괄하는 임금 개념의 포기에도 일조했다. 1970년대의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집요하게 요구했고, 실제로 많은 페미니스트 연구자들과 활동가들이 19세기의 가족임금을 여성의 덫이라고 공격했다. 그러나 브렌너(Johanna Brenner)는 이것이 역사적 증거를 잘못 해석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가족임금을 성취한 노동자에게 그것은 노동자 계급의 승리를 상징했다(Brenner, 2000, 11-58).
물론 내가 여성의 유일한 선택지인 남성과 결혼에 대한 의존으로 회귀할 것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1970년대와 1980년대에 획득한 자립의 대가가 컸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 대가는 바로 가족임금의 폐지, 모든 노동자의 임금의 장기간의 정체다. (이러한 점에서 페미니즘의 부상보다는 가족임금의 폐지가 전후의 여성사를 보는 중심적인 관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MacLean 2002a를 참조하라.)
그 동안에 정책결정자들은 여성이 임금노동자로서 널리 인정되는 것에 주목했다. 1990년대에 여성이 유급노동력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관념은 큰 위세를 떨쳤고, 1996년의 복지“개혁” 입법인 ‘개인책임과 노동기회법’은 이러한 관념을 중심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복지개혁은 뉴딜 사회정책을 해체하는 신자유주의 의제의 핵심요소를 실행하면서 책임을 주정부로 이양했다. 이로써 아이의 양육에 보조가 필요한 가난한 편모의 수급권으로서 복지라는 관념이 제거되었고, 가장 중요하게는 노동연계복지(workfare)가 하나의 필수조건으로 제도화되었다. 편모는 아무리 수입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아이의 양육을 위한 안전망인 정부 보조금을 더 이상 받을 수 없을 것이다.
1935년 사회보장법의 일부로 아동부양가족보조제도(AFDC)―이 때 최초로 복지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가 도입되었던 시기에도 편모가 아이를 양육하면서 노동시장에 진입하기를 바라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Gordon, 1994). 그러나 1970년대 복지권리 운동의 행동주의의 결과로 복지 대상자가 크게 늘어난 이후에, 복지는 주로 흑인 여성과 동일시되었고 우익의 이데올로기적 비판의 주요 표적이 되었다. 복지라는 쟁점은 정부의 시장개입의 이데올로기적 정당성을 해체하는 데 쐐기를 박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클린턴 대통령이 공화당의 쟁점을 선취하기 위해 비공식적으로 승인한 복지“개혁”에 맞서 투쟁했지만 대다수의 여성 활동가들은 이것을 승리할 수 없는 싸움으로 간주했다(Eleanor Smeal, 퀸즈 컬리지에서의 비공식 논평, 1996). 1996년의 복지 입법에 대한 표결이 진행될 때,

159명의 민주당 하원의원들이 가난한 어머니들의 권리를 사악하게 맹공격하는 이 법안에 찬성했다. 여기에는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자처하는 민주당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의회의 한 페미니스트가 그녀의 동료들에 관해 인정했듯이, 복지에 관한 한 “누구도 여성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Mink, 1983, 3.)

좀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여성들이 일해야만 한다는 관념이 대다수 미국인들로 하여금 노동연계복지를 수용할 만한 것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밍크(Gwendolyn Mink)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정책결정자들이 가난한 편모도 시민이자 어머니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이유가 인종주의 때문이라고 한다면 백인 중간계급 페미니즘은 이러한 정책결정자들에게 변명거리를 제공해 왔다. 백인 중간계급 페미니스트들은―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증대와 더불어―여성들이 가정 밖에서의 일할 권리를 강조함으로써 전통적인 가족을 옹호할 때조차 편모가 임금노동에 종사해야 한다고 열렬히 주장하는 보수주의자들을 엄호했다. (Mink, 1998, 23-34. 이 부분에 대한 더욱 정교한 논의는 다음 절을 참고하시오.)

가난한 여성들을 위한 안전망인 뉴딜 수급권이 포기되고 복지―지금은 ‘빈곤한 가정을 위한 한시적 보조제도’(TANF)로 개명되었다―가 5년 한도의 조항이 추가되어 주정부들로 이양되자 이득을 본 것은 고용주들이었다. 복지를 강탈당한 여성들은 시민이 아닌 불안정한 지위로 인해 더 나은 노동조건을 주장할 수도 없는 불법이민자들과 경쟁했다. 이로써 그러한 직종에서의 더욱 심한 경쟁, 그리고 이에 따른 더욱 낮은 임금이 확보되었다(Chang, 2000).

수출생산과 소액대출: 제3세계 여성들을 시장경제로 통합하기

나는 유급노동이 여성의 자유화를 상징한다는 미국 페미니즘의 핵심적인 관념이 자본주의에 매우 유용하다는 사실을 주장했다. 미국에서 이것을 뒷받침하는 두 가지 사례들로서 가족임금의 제거와 복지안전망의 파괴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여성의 노동은 국제적으로도 자본에 매우 필수적이었다. 파일(Jean I. Pyle)과 와드(Kathryn B. Ward)는 세계화과 여성에게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면서 대다수의 노동자가 여성인 네 가지 부문을 식별했다.

지난 30년 간 점점 더 많은 수의 여성들이 구조조정된 세계 경제 안에서 소득을 벌기 위해 성노동자, 가정부, 수출생산 노동자, 소액금융지원의 수령자가 되었다. 대다수는 이러한 일자리를 얻기 위해 국내에서 또는 국외로 이주해야 했다. … 산업국뿐만 아니라 발전도상국의 전 지역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산업들”은 이제 세계를 포괄한다.

여기서는 이러한 부문들 중 두 가지, 즉 수출생산 부문의 여성과 소액대출을 사용하는 여성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경제 기적 시기에 남한은 값싼 여성 노동의 활용을 선도했다. 농촌 여성들이 공장 노동으로 흡수됨으로써 “무제한적인 노동 예비군”을 보유한 남한은 산업화에 성공했다. 실제로 암스덴(Alice Amsden)은 남·여의 성별 임금격차가 남한 산업화의 성공에서 핵심적인 요인이었다고 주장한다.

남한의 실질 임금의 현저한 증가와 무적의 성별 임금 불균형은 상호 연관된다. 여성노동력의 무제한 공급에 기초한 남한의 이중적 임금구조는 두 가지 목적에 복무했다. 첫째, 주로 여성을 고용하는 노동집약적 산업의 국제경쟁력이 유지되었다. 둘째, 상대적 고임금·높은 동기부여·남성 노동귀족에 근거한 기술집약적인 부문으로 진입했다. (Amsden, 1989, 204.)

제3세계 채무국들은 국가 주도적 발전을 포기하고 경제를 수출지향으로 선회하라는 국제금융기관들의 압력에 의해 다국적기업들을 “자유무역 지대”―관세와 세금이 삭감 또는 면제되고, 법과 정부 정책이 결합하여 노동조합의 형성을 예방한다―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전술은 전자산업 부문에서 1960년대 시작되었다. 1958-59년 실리콘 칩이 발명된 직후에 페어차일드(Fairchild)는 홍콩에 최초의 국외 반도체공장을 세웠고, 1966년에 남한으로 이전했다. 제너럴 인스트루먼트(General Instrument)는 1964년에 극소전자제품의 생산을 대만으로 이전했다. 1965년에는 많은 하이테크 기업들이 미국과 멕시코의 접경으로 생산을 이전하면서 최초의 마낄라도라가 만들어졌다. 이후 10년 동안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그리고 필리핀이 선례를 따랐고 1970년대 후반에 카리브지역과 남아메리카의 국가들이 여기에 합류했다(Fernandez-Kelly, 1989). 여성 노동자들의 “빠른 손”을 홍보하는 정부의 유인책을 따라 다국적 기업들은 신발과 의류에서부터 장난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상품들의 생산을 전환했다. 물론 아일랜드와 같은 사례도 있었는데, 여기서 가부장적 정부는 초기에 남성 노동자들 장려하는 정책을 통해 이러한 추세에 저항했다(Froebel, et al., 1980, 322ff.; Pyle, 1990).
여성들이 이 같은 공장 안에서 경험하는 비인간적인 조건에 관한 정보가 널리 알려지면서 세계적인 착취공장(sweatshop)의 조건이 복귀했다고 대대적으로 공표되었다. 실제로 클라인(Naomi Klein)은 나이키와 같은 유명한 상표의 다국적 법인들이 노동자에게 부과한 조건들에 대한 분노에서부터 세계정의운동(global justice movement)이 출발했다고 주장했다(Klein, 1999, 326ff; Pollin, 2003, 153-163). 일부 페미니스트 연구자들은 마낄라도라와 여타 수출생산지역 안에서의 여성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비난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 양가적인 감정을 드러냈다. 1970년대 말레이시아의 일본 전자제품회사를 연구하면서 옹(Aihwa Ong)은 여기에 고용된 마을의 소녀들이 착취당하는 노동자였으며, 그들의 예리한 시력이 저하되자마자 해고되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마을 농민들이 입는 사롱5) 대신에 청바지를 입고 남편을 직접 선택할 권리를 얻는 등 현대화되고 있는 중이었다(Ong, 1987; Beneria, 2003, 77-8).
여성과 세계화에 대한 토론에서 페르난데즈-켈리(Patricia Fernandez-Kelly)와 울프(Diane Wolf)는 이러한 양가성을 연구했다. 울프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여성에 관한 한 세계화는 양날의 칼과 같은 과정이다. 한편으로 세계 경제가 변형됨으로써 창출된 고용기회는 여성에 대한 새로운 종류의 가부장적이고 자본주의적인 통제를 산출한다.

그러나 “종종 표준 생계를 밑도는” 저임금 직종이라 할지라도

이를 통해 여성들은 가부장제에 저항할 수 있는 도구를 갖게 된다...자바와 인도네시아에서 인터뷰한 여성들은 마을의 쌀 경작지보다는 “세계적인 착취공장"에서 일하는 것을 선호했다. (Fernandez-kelly and Wolf, 2001, 1246.)

아마도 펠드만(Shelley Feldman)의 견해는 이러한 의견분포 내에서 극단에 위치할 것이다. 펠드만은 방글라데시의 수출가공 공장을 연구하면서 다른 연구자들이 여성들이 스스로 선택해가는 힘을 인정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일부의 분석가들은 여성들이 고향을 떠나 공장으로 가는 것이 농촌에 만연한 빈곤과 수출가공지역의 정부제도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경제결정론”이었다. 여성은 구조조정프로그램, 사유화, 그리고 경제의 자유화와 같은 외부적 요인이 아니라 여성들 스스로의 선택, 즉 “여성의 생활의 복잡하고도 모순적인 역사를 통해 구성되고 또 이로부터 가능해지는 선택의 영향을 받았다”(Feldman, 2001, 1122).
노동을 자유화의 통로로 간주하는 21세기 페미니즘의 견해에서 보면, 국제적인 페미니스트 연구자들은 아마도 새롭게 프롤레타리아화된 제3세계의 여성 노동자들이 19세기 농촌에서 미국 최초의 방직공장으로 유입된 메사추세츠의 “로웰의 소녀들”6)과 똑같다고 여길 것이다. 이들은 매우 관대한 노동조건(맨체스터와 잉글랜드의 공장과 비교했을 때)에서도 자신의 노동 경험으로부터 노동자이자 페미니스트로서의 의식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로젠(Ellen Rosen)이 지적했듯이, 19세기 미국의 산업화 양상은 구조조정에 종속된 나라들과 같은 과정을 겪고 있지 않았다. 여성은 “여성의 임금”을 받았지만 남성은 “남성의 임금”을 받지 않았다.

현대의 수출가공 경제는 발전도상국에 과거의 산업화 형태를 이식하지 않는다. 자본 집약적인 제조업이 경제성장의 중심이었던 서구의 국가들과 달리, 다수의 발전도상국에서는 저임금 산업이 미래의 경제성장에 핵심이 되었다. 또한 고임금의 남성산업의 직종이 가족의 경제적 복지에 중심이었던 서구와 달리, 수출가공 경제에서는 저임금 여성 노동자가 노동력의 약 80퍼센트―거대한 다수―를 차지한다. (Rosen, 2002, 245.)

수출 산업에 핵심적이었던 여성들은 또한 국제적인 기부단체가 농촌여성의 빈곤 탈출방안으로 널리 장려하는 소액대출의 대상이다. 소액대출의 지지자들은 여성에게 소액을 대출해줌으로써 이들을 주류경제 안으로 유입하고, 상호 감시할 수 있는 소규모 집단으로 이들을 조직한 다음, 월 3%의 이자를 부과하는 방안의 장래성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소액대출의 “기본원칙”을 따른다. 즉, 차용인은 담보가 없을 수도 있지만 “자선 사례가 아니므로” 중요한 실업가들로 간주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세계의 소액금융기관들을 위한 네트워크와 자금의 중심지이며 뉴욕에 본부를 두고 있는 여성세계은행(Women's World Bank)의 총재 베리(Nancy Barry)는 “60달러는 우리에게 그리 큰 액수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필리핀과 같은 곳에서는 소 또는 시장에 내다 팔 상품들을 살 수 있으므로 한 가족이 생계를 꾸리기에 충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60달러가 100달러, 그리고 500달러가 되는 것이 희망이며, 당신이 그것을 자각하기 전에 이러한 고객들은 주류경제로 통합된다”(Martinez, 2003).
이러한 관념은 부분적으로는 워싱턴에서 수립된 정책에서 기원했다. 1973년 초,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이 발전정책이 여성이 아니라 오직 남성만을 위한 것이라고 비판하자, 미국국제개발처(USAID)는 여성과 발전부서를 창설하고 “외국원조정책의 일부로 여성을 국내경제에 통합하도록” 외국인지원법을 개정함으로써 대응했다(Poster and Salime, 2002, 184). 곧 소액대출이 미국국제개발처의 주요 전략이 되었고 여성들은 이 신용형태의 명확한 대상이 되었다.
해외에서 소액대출의 관념은 경제학자 유너스(Mohammed Yunus)가 1977년 방글라데시의 그라민(Grameen) 마을에서 경험한 것에 크게 빚지고 있다. 그는 이후에 그라민 은행을 창설했다(이하의 설명은 대부분 Isserles, 2002에 나와 있다). 마을 여성들이 대나무 발판과 깔개를 만들기 위해 중개인에게 돈을 빌리고 다시 일과 후에 그 상품을 중개인에게 파는 과정을 관찰한 후에, 유너스는 방글라데시 은행에서 초기 자금으로 200달러를 빌려 처음에 한 마을의 42명의 주민에게 소액대출로 분배했다. 여기서 그는 그라민 모델을 발전시켰다. 이는 유사한 사회경제적 배경을 지닌 아무 관련이 없는 여섯 명을 한 집단으로 구성하고 이들에게 개별적으로 대출한 이후에 바람직한 성과를 산출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 성과란 매주 회의에 참석하고 정기적으로 상환하는 것을 의미했다. 대출기간이 만료되었을 때 모든 사람들이 일괄적으로 대출금을 상환했다면 그 집단은 더 큰 액수의 자금을 대출받을 수 있었다. 그가 1983년에 설립한 그라민 은행은 주로 여성들에게 대출해주는, 방글라데시의 가장 큰 소액대출기관이 되었다. 1999년 경, 그라민 은행은 45,000개의 마을을 포괄하는 1,000개의 지점을 두었고, 10억 달러 이상을 200만 명에게 대출했으며 그 중 94%가 여성이었다(Isserles, 2002, 210).
1997년 무렵, 최초의 국제적인 소액대출 정상회의가 뉴욕에서 열렸다. 여기에서는 2005년까지 1억의 세계 극빈 가족들과 접촉하는 것이 목표로 설정되었다. 2002년 현재, 소액대출을 제공하는 2,500개 이상의 기관들이 세계 각처의 4,260만의 빈곤 가족들과 접촉했다. 1997년의 회의에서 만들어진 네트워크로서 소액대출 정상회의 캠페인은 “기부단체, 은행, 비정부기구, 교육기관”을 포함하며 “여성에게 권한을 부여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Semple, 2003).
이 같은 발전의 배경에는 경제학자들의 비공식 부문이라고 이름 붙인 것의 급속한 성장이 있다. 1970년대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이 예상했던 것과 반대로, 비공식 부문―경제가 성장할수록 국제적으로 축소될 것으로 기대되었다―은 꾸준히 성장했다(Beneria, 2003, 109-110). 구조조정정책으로 인해 변형을 겪고 있는 국가들에서 국제금융기관들이 강요하는 가혹한 정책들은 특히 여성에게 부담을 지웠다. 공공부문이 축소됨에 따라 수백만의 공무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보건의료와 교육에 요금을 부과하고 식품보조를 중단하자 가족들은 자신의 자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여성이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고 가정되었다(Tickner, 1999, 54). 게다가 토지 취득에 대한 탈규제로 인해 많은 농촌 가족이 자신들의 땅에서 쫓겨났고 그 결과 그들은 더 이상 자급자족할 수 없게 되었다(Chang, 2000, 127).
여성이 채택한 전략에는 비공식 부문에서 일자리를 찾는 것, 예를 들어 지방 시장에서 수공품 팔기, 또는 더 극적으로는 자기 자신 그리고/또는 자신의 아이의 성매매, 또는 노동력을 판매하기 위해 부유한 나라로 이주하는 것 등이 포함되었다. 교육수준이 높은 여성은 간호사와 같은 일자리를 찾거나 다른 이들의 아이를 돌봤고 그러는 동안 자신의 아이는 친척에게 맡겨졌다. (제3세계 여성들의 보육능력이 제1세계 여성들의 직업적 성공과 맞교환 되는 것에 관해서는 Ehrenreich and Hochschild, 2002를 보라.)
엘리어차(Julia Elyachar)에 따르면, 세계은행이 후원하는 소액대출 계획은 구조조정정책이 신자유주의 이론가들이 주창한 결과를 산출하지 못하자 시작되었다. 세계은행 내의 개혁주의자들은 1995년에 올펜손(James Wolfensohn)이 총재로 임명된 것에 고무되어 신자유주의 정책의 전반적인 영향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공공부문과 국가부문 노동자의 대규모의 실업은 -국가보조의 중단으로 인한 빈곤층의 빈곤 수준의 상승과 더불어- 사부문이 쇄신을 위해 박차고 나설 때까지의 “일시적 고통”의 문제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일시적 고통이 영구적인 것으로 보이기 시작했고, 구조조정의 부정적인 영향을 받는 집단의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해 새로운 발전프로그램들이 고안되었다. 구조조정정책이 강행된 많은 국가들에서 세계은행은 최고의 “사회안전망”으로써 사회기금(Social Funds)을 설립했다. (Elyachar, 2005, 501.)

카리브지역,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에 위치한 사회기금은 개인 소액창업자들에게 기금을 제공함으로써 소액창업에 기여했다. 이 기금은 국제기구와 발전기관이 맡긴 소액대출을 분배하고 은행의 이자상환 정도를 감독하는 지역의 비정부기구들을 통해 제공되었다(Elyachar, 2002, 498). 엘리어차는 소액대출[전략]의 채택이 사실상 비공식 부문의 영구성을 인정하고 진정한 경제발전이라는 통념을 완전히 포기한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가정경제 밖으로 내몰린 여성들은 고향의 가족에게 송금하는 주요 원천이었다. 필리핀에서 송금(남성과 여성 모두로부터의)은 연간 약 70억 달러에 달하고 “외환의 최대 원천―설탕 또는 광물에서 오는 수입을 능가하는―이다.” 이러한 세계적인 송금의 흐름은 “소액금융 프로모터들이 꿈꾸는 ‘황금의 땅’으로 급변하고” 있는 중이다. 2002년에 고향으로 보낸 돈은 800억 달러에 달했는데 이는 “최초에 빈국들에게 제공된 (공·사 부문 모두에서의) 원조와 대출의 총액”을 초과하는 것이다(Martinez, 2003).
고소득 직종의 부족으로 인해 모국에서 내몰린 여성들은 아이와 남편으로부터 떨어져 장기간 노동하면서 자신의 부재를 메우기 위해 고향에 송금한다. 이 송금에서 나오는 자금은 지방 은행으로 유입된다. 그리고 소액대출자들은 이를 통해 지방의 가난한 여성들이 창업하도록 유인하고 이들이 소액창업자이자 성실하게 이자를 지불하는 채무자가 되도록 감독한다. 자본의 이 같은 순환은 정부와 엘리트로 하여금 최초에 빈곤을 창출했던 정책들을 지속할 수 있도록 보조한다. 그리고 그 비용은 거의 전적으로 여성들이 떠안는다.

미국은 신제국주의의 일부로 페미니즘을 옹호한다

페미니즘의 이데올로기가 미국의 제국주의적 기획에 복무하는 데 활용되는 것은 더욱 더 불행한 일이다. 냉전 시기 미국 정부가 제3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분투하면서 미국 시민권운동의 성공을 떠벌리고 다닌 것과 매우 유사하게 미국 여성권운동의 성공은 제3세계에 자본주의를 판매하는 데 요긴하게 활용된다.
극단적인 이슬람교도들―예를 들어 사우디아라비아 정권이 장려하는 이슬람주의―이 여성권에 대해 보이는 적대심보다 [활용하기에] 더 편리한 것이 있을까? 현대의 국제적인 정치적 이슬람운동이 대체로 세속적·좌파적 민족주의 정권과 운동에 맞서기 위한 무기로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서구의 자금과 격려의 산물이라는 점은 그렇다고 치자. (이 점에 대해서는 Amin, 2001을 참고.) 이슬람 극단주의는 현재 테러와의 전쟁에서 국제적인 가상의 적이 되었기 때문에 현대 산업자본주의와 긴밀히 연관된 여성의 권리는 부시 행정부의 선전기제로 안성맞춤이다.
부시 행정부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풍경을 처참하게 바꿔놓으면서 천명한 목표인 현대화와 민주주의 기획에서 여성해방은 그것의 자명한 요소가 되었다. 상투적인 통념에 따르면 민주주의, 자유 시장, 여성해방이 연결된다. 이것은 사실상 “현대적”인 것과 여성의 권리, 유대기독교의 유산, 민주주의를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는 등식이자, “전통적”인 것과 여성의 권리에 대한 가부장적 억압, 이슬람교의 유산, 테러리즘을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는 등식이다. 예를 들어 부시 행정부의 테러와의 전쟁에서 여성의 권리는 중앙 무대에 등장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은 아프간 여성들을 탈레반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한 노력의 일부로 정당화되었다. 부시 행정부의 네오콘들이 중동을 재구축―이것은 이미 2002년 이라크 침공과 점령으로 시작되었다―하려고 시도할 때에도 이러한 방향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실제로 체니의 딸 리즈는 중동협력발의(MEPI)로 명명되는 국무부의 프로젝트를 맡았는데, 그녀는 다른 무엇보다도 여성들이 공적 영역에 완전히 참여할 수 있도록 장려함으로써 중동을 “현대화”하는 임무를 맡았다(Bumiller, 2003).
유사하게, 2003년 12월 아프가니스탄의 헌법제정회의 지도부에서 여성의 대표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은 구래의 것과 현대적인 것 사이의 투쟁으로 해석되었다. 이에 대한 보도에 따르면, 의장 모자데디(Sebaghatullah Mojadeddi)는 여성이 남성과 같은 수준에 오르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신조차도 당신에게 동등한 권리를 주지 않았다. … 왜냐하면 그의 결정에 따라 두 명의 여성이 한 명의 남성과 동등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이를 전하면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의장은 “여성의 역할과 이슬람의 역할, 전통에 대한 충성과 현대성의 추구를 둘러싸고 이 회의장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에 존재하는 긴장을 드러냈다”(Waldman, 2003).
부시 행정부의 페미니즘적인 감성을 냉소적인 활용이라고 치부하고 잊는 것은 쉽다. 하지만 이런 선전에는 중요한 핵심적 진실이 있다. 세계화의 중심적인 목표가 전통 사회를 결속시킨 유대를 해체하는 것이라면, 페미니즘 사상은 강력한 용매가 될 수 있다. 유럽이 신대륙을 탐사하던 시기에 기독교가 수행했던 기능과 유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서양의 무역상들과 동행한 기독교 선교사들과 이들의 복음주의는 아프리카, 아시아, 미주 대륙 어디서든 그들이 대면한 전통 문화를 변형하는 데 일조했다. 포교를 위한 설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런 문화를 결속시켰던 가정들―구래의 행동 및 존재 양식을 떠받치고 있었던―을 약화시키고 그것의 정당성을 박탈하는 효과를 낳았다(Wolf, 1997, 145ff).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에는 좋건 싫건 간에 페미니즘이 유사한 방식으로 기능한다. 기메네스(Martha Gimenez)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경제적·정치적·시민적·인간적 권리의 담지자로서 추상적 개인의 부상은 자본주의 발달의 전제 조건이자 자본주의의 끊임없는 재생산에 기여하는 자본주의의 지속적·구조적 효과다. 페미니즘은 서구 개인주의의 중요한 발현 형태들 중 하나다. (Gimenez, 2004.)

이데올로기적으로 페미니즘은 여성이 가족과 공동체의 일원이기보다는 개인이 될 것을 장려한다. 동시에 여성농민의 프롤레타리아화는 그들의 의식과 동일성을 현대화한다. 그리더(William Greider)가 지적했듯이, 콸라룸푸르의 모토로라 경영자는 실리콘칩을 만들기 위해 고용한 이슬람 여성의 “문화를 바꿔야”만 한다. 회사는 그들에게 스스로를 변호하도록 가르치고, 임금을 가족에게 건네주는 대신 현금인출기를 사용하도록 가르친다(Greider, 1997, 82~84).
여성을 시장 경제로 통합하는 것이 효과적인 경제 발전의 전제조건이라는 점은 이제 세계화의 상투적인 통념이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여성노동이 경제 발전에 중요하다는 사실을 세계에 알린 것은 보즈럽(Ester Boserup)의 작업과 더불어 시작된 1970년대부터의 페미니스트 경제학자들의 협력이었다(Bener?a, 2003, 47~48). 그러나 이제 젠더는 무대 전면에 등장했고 세계은행과 여타의 국제금융기구의 관료들은 여성에 대한 교육과 여성의 임금노동이 경제 발전의 필수 요소라고 주장한다. 세계은행의 한 관료는 “여성은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거대하고 미개발된’ 자원이며, 사부문의 수출에 점점 더 의존해야만 하는 경제를 세계와 경쟁하도록 개조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여성들이 노동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7)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또 다른 정통, 즉 여성에게 가장 필요한 서비스를 위한 재정 지원과 제도적 지원을 철회하도록 정부에 요구하는 정통이 이와 더불어 추진된다.
국제적 자본의 활동은 비록 부족하긴 해도 여성과 그 아이를 보호하는 구조―보건의료, 교육, 주택에서부터 적정한 가격의 식량과 연료에 이르기까지―를 체계적으로 해체하고, 따라서 심화된 빈곤, 질병, 유례없는 수준의 부의 양극화를 낳는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여성을 시장 경제로 초대하고, 이것이 자유화와 평등을 향한 길이라고 주장한다(Chossudovsky, 2003, 67~8). 페미니즘이 획득한 정당성은 세계 경제의 급격한 재구조화를 은폐하고, 경제적 해방의 광채는 대다수 여성이 겪는 빈곤의 심화를 감춘다.

결론

나는 21세기에 현신한 페미니즘이 자본주의의 유용한 시녀였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을 하면서 나는 세계화에 대한 잠재적 도전을 대표하는 페미니스트 조직화의 여러 측면들과 실제로 이런 활동을 하고 있는 전 세계의 많은 조직들을 고려하지 않았다(세계적 맥락에서 페미니스트들의 다양한 조직화에 관한 훌륭한 논의로는 Barton, 2004를 보라). 여기서 나는 대안적인 전망의 경제학·정치학을 제시하는 페미니즘보다는 법인 자본주의의 세계적 확장 기획에 포섭된 페미니즘의 요소들에 주목했다. 그러나 지금 절박하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런 대안적인 전망이다.
현재의 위기 속에서 미국과 세계의 좌파는 전략과 목표를 둘러싸고 분할되어 있으며 앞으로의 경로를 확실히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좌파들은 쿠바 혁명의 용감한 위업을 인정하면서도 소비에트 모델의 경제 발전계획을 불명예로 간주하고, 미래에 유일하게 가능한 사회주의는 격식에 맞는 훨씬 민주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새로운 사회주의는 어떻게 건설하는가? 페트라스(James Petras)와 벨트마이어(Henry Veltmeyer)는 국가주도적 발전으로의 회귀, 즉 국가가 충분한 식량과 활력 넘치는 지역 경제를 위해 자원을 분배하는 모델을 주장한다(Petras and Veltmeyer, 2001). 그러나 페체스키(Rosalind Petchesky)는 민족국가와 국제제도를 매개하는 새로운 국제시민사회를 신봉한다(Petchesky, 2003). 에스코바(Arturo Escobar)는 원주민의 자율성과 건강함을 복원할 일종의 혼합 문화와 경제의 창출 가능성을 본다(Escobar, 1995). 미스(Maria Mies)는 더 나아가, 산업화의 역전과 생활경제로의 회귀를 주장한다(Bennholdt-Thomsen and Mies, 1999). 그러나 헨우드(Doug Henwood)는 추측으로만 존재하는 자본주의 이전의 황금시대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것은 현대적 생산과 분배의 복잡성과 산업화의 성과물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혹평한다.

수명 연장, 영아와 산모 사망률 감소, 미완의 여성 해방―이것은 부분적으로는 농촌 가부장제로부터 탈출할 길을 제공한 공장 일자리의 이용가능성에 의해 달성되었다―, 교육의 확산 등 이 모든 것은 1세계와 3세계에서 긴 시간에 걸쳐 일어난 진보다. (Henwood, 2003, 165~66.)

이처럼 현재 체계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이들 가운데서도 방법이나 목표에 관한 합의가 없다.
좌파의 임무는 사회적·경제적 대안을 창조하기 위해 새롭고 급진적인 사상과 방법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에서 좌파는 과거보다 훨씬 더 진지하게 여성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랜달(Margaret Randall)을 인용하면서 포란(John Foran)은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 그리고 계급투쟁과 여성운동의 관계는 모든 면에서 분쟁과 좌절로 점철된 특히 곤란한 문제였다”고 지적했다(Foran, 2003, 1; Randall, 1993).
명시적으로는 여성 문제를 고려하는 혁명가들 내에도 문제는 많다.

벨로스테귀고티아(Marisa Belausteguigoitia)는 심지어 싸빠티스타 내에서도 여성“문제”는 민족의 문제에 밀리고 공동체의 더 많은 평등에 대한 요구는 국가에 대한 요구에 밀리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한다. 다시 말해, 가부장제는 또 다시 자본주의와 인종주의 이후에야 다뤄질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해결책”은 충분하지 않다. 보육기관, 병원, 요리 시설―모두 핵심적인 요구다―은 원주민 여성이 “쉴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각하고 행동할 권리, 느끼고 사랑할 권리를 의미한다. (Foran, 2003, 5; 이 점에 관해서는 Disney, 2004도 보라.)

포란이 좌파에게 요구하는 것은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의 사상과 비판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반인종주의 혁명과 더불어 페미니즘 혁명은 당연히도 가장 장구한 혁명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핵심에서부터 페미니즘 및 반인종주의와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마르크스주의는 여성운동뿐만 아니라 감축할 수 없는 세계적, 계급적인 힘을 갖는 다른 운동들과 연계를 맺으면서 마침내 우리가 그 곳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위의 책.)

지금까지 많은 헌신적인 페미니스트들의 에너지, 명민함, 고된 정치적 작업이 법인 자본주의의 확장을 강화하고 정당화하는 데 꾸준히 흡수되고 교묘하게 활용되었다. 이제는 좌파들이 여성의 통찰력과 충실함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때다. 그렇지 않으면 현재의 세계 체계에 대한 어떤 진지한 대안도 성공적으로 구축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좌파 남성들의 과제로 끝을 맺으려 한다. 페미니즘을 배워라. “여성이 하늘의 절반을 지탱한다”는 관념을 받아들여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성의 욕구, 경험, 지혜를 고려하지 않은 어떠한 사회 변혁의 시도도 모두 실패하고 말 것이라는 점을 이해해라.

1) [역주] 미국 제조업의 위기로 그 기반이 무너진 지대, 특히 중서부 지역과 북동 지역의 철강 산업 중심지를 가리킨다. 본문으로
2) 1970년에 모든 성인 여성의 약 4/5(78%)가 기혼이었고, 기혼 여성의 노동력 참여율(41%)은 미혼 여성의 참여율(57%)보다 매우 낮았다. 본문으로
3) [역주] 6, 70년대 흑인운동 조직 본문으로
4) 그 이후로 흑인 여성과 백인 여성의 임금 불평등은 다시 증가하여 이 비율은 1998년에 85%까지 떨어졌다. (1998년에 히스패닉 여성의 소득은 백인 여성의 소득의 72%에 그쳤다. 본문으로
5) [역주] 말레이시아 사람들이 허리에 두루는 천 본문으로
6) [역주] 19세기 전반기에 보스톤의 자본가들은 메사추세츠의 로웰지방에 주요 방직공장단지를 건립하고 농촌 출신의 소녀들을 고용했다. 본문으로
7) 여성들은 이 지역의 3억2,500만 인구 중 절반에 이르고 어떤 국가에서는 대학생 중 63%에 달하지만, 노동인구의 32%에 불과하다. “세계은행의 중동·북미 지역 부대표 포트먼(Christiaan Portman)은 ‘인구 절반의 참여가 없다면 어떤 나라도 국민의 생활수준과 후생을 개선할 수 없다. 다른 나라들의 경험은 여성이 발전의 중요한 행위자임을 거듭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Olson, 2002.) 본문으로
주제어
여성
태그
노동자운동 경제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