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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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10.5-6.9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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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불꽃, 김경숙, 박영진, 성완희

이재영 | 노동위원
1970~80년 정세와 노동운동

노동자들에게 저임금과 빈곤을 강요하는 정부의 경제성장 정책, 자본가들의 조직적이고 폭력적인 탄압 속에서 숨죽이고 있던 한국의 노동운동은 1970년대에 접어들어 전환점을 맞이했다.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나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라고 외치며 분신했다. 전태일 열사의 죽음은 노동자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었던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고 1970년대 노동운동의 도화선에 불을 지폈다.
1970년대 박정희 정부는 외국자본을 도입해 수출중심의 공업화를 추진했다. 한국경제는 베트남 전쟁, 중동 건설 붐에 편승해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외채에 의존한 성장으로 경제는 외국에 종속되어 갔고, 한국이 세계경제의 일부분으로 편입됨에 따라 세계경제의 변화에 따라 한국도 큰 영향을 받게 됐다.
정부는 수출 기업체에게 금융지원, 면세혜택을 주어 독점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이에 드는 비용이 모두 국민의 세금으로 메워졌기 때문에, 결국 노동자와 농민의 희생으로 재벌을 키운 셈이었다. 한국 기업들이 외국과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방법은 값싼 임금비용을 더 줄여서 가격 경쟁력을 가지는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노동자의 임금은 매우 낮은 수준에서 유지되었고, 어디에서나 장시간의 고된 노동이 강요되었다. 노동법은 법전 속에 있을 뿐이었다.
저임금과 가혹한 노동환경에 시달렸던 노동자들은 침묵하지만은 않았다. 1970년 165건이던 노동쟁의가 1971년에는 1656건으로 10배나 늘어났다. 1970년 11월의 전태일 열사 분신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1971년 8월에는 도시 빈민들의 분노가 광주대단지사건으로 폭발하였다. 노동자와 민중들의 저항을 억누르기 위해서 박정희 정부는 1971년 12월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1972년 10월 유신체제를 선포해 광폭한 군사독재를 한층 강화했다. 모든 민주화운동과 노동자운동은 사실상 금지되었다. 특히 외국자본의 한국 투자를 촉진하기 위해서 1970년 제정된 <외국인 투자기업의 노동조합 및 쟁의조정에 관한 임시특례법>으로 외자기업에서 노동자의 기본권이 제한되었다. 1971년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으로 노동3권 중 단체행동권과 단체 교섭권이 전면적으로 제한됐다.
1979년 박정희의 암살로 유신체제가 막을 내렸지만 노동운동의 조건은 개선되지 않았다. 1980년 봄 전두환을 필두로 한 신군부 세력이 권력 장악을 시도했다. 이에 대항하여 학생들을 중심으로 학원 민주화, 병영집체훈련제도 폐지, 계엄령 해제, 언론자유 보장을 내건 대규모 시위가 전개되었다. 이 사이 노동자의 쟁의도 급속하게 확대되고 격화되어갔다. 그러나 신군부는 5.17 계엄확대 이후 노동운동을 또다시 처참하게 짓밟았다. 신군부는 한국노총의 민주파를 제압하기 위해서 8월 21일 산별위원장 12명 사퇴, 지역지부 폐지를 골자로 한 ‘노동조합 정화지침’을 시행했다. 급기야 1980년 마지막 날 신군부는 기업별노조로의 전환, 제3자 개입 금지를 골자로 노동법을 개악했다.

김경숙과 YH 여성노동자들의 투쟁

1970년대 장시간의 노동과 생명을 위협하는 작업조건 속에서 최저생계비에 턱없이 못 미치는 임금을 받고 일했던 노동자들은 곳곳에서 저항했다. 1970년 11월 청계피복 노조가 결성되었고 1973년 신진자동차(나중에 대우가 인수), 원풍모방, 아세아자동차에서 노조 결성되었다. 한국모방 노조 민주화와 임단협 체결 투쟁, 동일방직 노조의 민주노조 사수 투쟁 등이 벌어졌다.
YH노조의 김경숙(1958~1979)은 어린 나이부터 공장에서 일했다. 김경숙이 8세가 되던 해, 아버지가 갑작스러운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날품팔이를 하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나갔다. 김경숙은 겨우 초등학교를 다녔지만 졸업 전부터 공장에서 일을 해야 했다. 그녀는 ‘내가 못한 공부를 동생에게 가르쳐서 동생만은 성공할 수 있도록 하자’고 다짐하며 고향을 등지고 타향살이를 시작했다.
그녀는 처음에 하청공장에 취직해 코피가 그치는 날이 없을 정도로 고되게 일했지만 임금체불에 시달렸다. 김경숙은 여러 공장을 옮겨 다나며 당시 여성 노동자들의 현실을 체험했다. 젊은 나이에 학업을 이어가지 못하고 공장에서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살아야 하는 자신과 같은 어린 노동자들이 안타깝기만 했다. 그녀는 몸은 병들더라도 마음은 상하지 않는 인간으로서 올바른 삶을 살자고 다짐하며 8년간 공장생활을 이어갔다.
김경숙은 1978년에 가발공장 YH무역에 입사했다. 임금이 조금 높았기 때문이다. 가발을 수출하는 YH무역은 노동자들에게 하루 16시간의 장시간 노동을 강요했다. YH무역은 휴일도 없이 철야 노동을 강요하고 화장실 가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물 마시는 것도 통제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경숙은 노동자의 지위와 노동조합의 역할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다. 이후 김경숙은 노조 대의원으로, 조직부 차장으로 선출되고 노조 소그룹의 장으로 활약했다. YH 노조는 민주노조를 건설한 후 잔업거부 운동과 일요일 연장 거부 투쟁으로 해고자 원직복직과 추석보너스를 타냈다. 또 노조는 부모 사망 시 5일간 주어지는 휴가를 여성노동자들에게 보장하지 않던 차별적인 관행을 개선했다. 김경숙은 노동조합 활동을 통해 노동자가 단결하면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다.
YH무역 경영진들은 노동조합의 힘이 커지자 회사 자금 빼돌린 후에 폐업 공고를 냈다. 이에 맞서 전 조합원이 폐업 반대 농성에 참여하며 5일 만에 정부와 사측으로부터 폐업철회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이 약속은 백일 만에 휴지조각이 됐다. 김경숙을 비롯한 조합원들은 1979년 8월 당시 야당이던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그녀들은 “공장폐쇄는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비인도적인 처사이고 몇 사람만을 위한 사기극”이라고 강조했다. 이들의 요구가 정치권을 비롯한 세간의 이목을 끌자, 투쟁이 확산될 것을 두려워한 경찰이 농성 이틀 만에 농성장에 난입했다.
김경숙은 경찰의 난입에 항의 하던 과정에서 완고하게 저항했다. 경찰의 진압 작전이 끝난 후 그녀는 건물 아래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경찰은 “김경숙은 작전개시 30분 전 스스로 투신했다”고 서둘러 사건을 수습했다. 그러나 30년 후, 김경숙의 사인은 경찰에 의한 타살로 밝혀졌다. 김경숙 열사의 짧은 삶은 ‘공순이’라고 무시당하며 ‘가족’과 ‘국가’의 이름 아래 고된 노동을 감내했던 여성노동자와 그녀들의 저항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박영진과 구로공단 노동운동

신군부가 들어선 이후 1980년대에도 노동조합의 투쟁은 끊이지 않았다. 1983년 정권의 유화조치 발표 이후 노동자들의 투쟁은 더욱 고조됐다. 1980년대는 1970년대와는 달리 대공장 남성노동자가 운동의 전면에 등장하고, 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민주노조 건설의 움직임이 특히 활발해졌다. 투쟁방식도 공장점거, 경찰과의 직접적인 대결로 발전했다. 1985년 구로동맹파업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대우어패럴 간부 구속에 맞서 구로공단의 9개 노동조합이 7일간 폭발적인 투쟁을 전개했다.
박영진(1960~1986)은 구로동맹파업의 영향을 받고 구로지역 노동운동의 한복판에 서 있던 인물이었다. 가난한 소작농의 자식으로 태어난 박영진은 중학교 3년을 끝으로 학업을 중단해야만 했다. 막노동을 하는 아버지와 행상을 하는 어머니 밑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박영진은 가난한 생계를 돕기 위해 신문팔이, 껌팔이, 구두닦이를 하며 밑바닥 생활을 경험했다.
그는 1983년 시흥 소재의 마찌코바(영세작업장)에 취직해 노동자로서 삶을 시작했다. 평소 성실했던 박영진은 회사의 전화기 관리를 맡았다. 그러나 전화기를 담당한지 얼마 안 되어 전화요금이 10만 원이나 나왔고 사장은 책임을 물어 박영진의 월급에서 9만 원을 제해버렸다. 그가 전화국에 찾아가 시외전화 사용의 내막을 알아보니 대부분이 사장이 사용한 것이었다. 박용진은 결국 뺏긴 월급을 돌려받고 밀린 체불임금까지 받고 퇴사했다. 이 과정에서 박영진은 자본가의 교활하고 탐욕스런 속성과 노동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1983년 초 배움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야학을 찾아간 박영진은 노동법과 노동운동, 노동자의 삶을 학습하면서 노동자의 현실을 체계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특히 전태일 열사의 삶을 듣고 1983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1984년 구로에 있는 동일제강에 입사한 박영진은 노동자들에게 노동법을 알리며 그들을 조직했다. 친목회를 통해 노동법 교육팀을 꾸렸고 동료들의 믿음과 신뢰를 얻어 노동조합을 건설했다. 그러나 구청과 공권력은 합법적인 노조결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사측의 어용노조를 인정하고 민주노조의 서류는 반려시킨 것이다.
이후 박영진은 2개월 동안 구로지역 노동자들과 정치상황과 사상에 대해 학습한 후 1985년 악덕기업으로 소문난 신흥정밀(현 마이크로)에 취직했다. 이곳에서 박영진은 구로동맹파업을 목격하고 공동투쟁을 계획했으나 경찰과 사측의 공작으로 투쟁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1986년 3월 17일 박영진은 임금인상 파업을 주도하며 식당을 점거했다. 구사대와 경찰이 식당에 난입하고 박영진과 동료들을 옥상으로 올라가 투신과 분신을 경고하며 저항했다. 그는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살인적인 부당노동행위 철회하라, 노동3권 보장하라”고 외치며 분신했다. 경찰과 사측은 부모와 친척을 회유해 시신을 탈취하고 재빠르게 화장시켜 문제가 커지는 것을 막았다. 가난한 날품팔이의 영세업체 취직, 야학을 통한 의식화, 민주노조 건설, 격렬한 투쟁으로 이어진 박영진 열사의 삶은 1980년대 중반 구로공단 지역 노동자와 노동운동을 대변한다.

성완희와 탄광 노동자들의 투쟁

성완희(1959~1988)는 1961년 아버지를 결핵으로, 어머니를 사고로 여의고 14살에 평화시장 봉제공장에 취직했다. 당시 평화시장에는 전태일 열사의 분신의 여파가 남아있었다. 성완희는 전태일 열사의 이야기를 들으면 노동자 의식을 조금씩 깨닫게 됐다.
1986년 10월 태백에 있는 강원탄광에 입사한 성완희는 막장광부로 일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물결은 강원도 탄광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해 7월 7일 어룡광업소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투쟁을 시작으로 16일 동해광업소, 18일 한보탄광 통보광업소, 26일 한성광업소 등 거의 모든 광업소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이 일어났다. 성완희는 1987년 10월 강원탄광 파업에 앞장서 투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강원탄광 노동자들은 헌신적으로 자신의 몸을 던져 투쟁에 나선 성완희를 절대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그를 눈에 가시로 여겼던 강원탄광은 작업 중 다리를 다친 성완희를 무단결근으로 해고했다. 이에 맞서 동료 노동자들과 성완희는 복직을 요구하며 작업거부에 나섰다. 회사는 사태 무마를 위해 성완희를 조합원 자격이 없는 청원경찰로 복직시키고 동료들을 해고시키는 기만적인 작태를 보였다. 이러한 사측의 분열과 탄압에 대해 성완희와 해고노동자들은 강원탄광 우정회를 결성하고 강력한 복직투쟁을 전개했다. 노동부와 지노위에서 복직판정, 복직명령을 받았지만 사측은 이를 거부했다. 성완희는 노조사무실에서 동료들과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사측이 각목을 들고 들어오려고 하자 성완희는 온 몸에 휘발유를 뿌리며 “인권탄압 중단하라” “광산쟁이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아보자”라며 외치고 분신했다. 그는 화염에 휩싸여 아스팔트에 쓰러져서도 “강원탄광에 민주노조를 건설해 달라”고 부탁했다.
성완희의 분신 이후 태백, 도계, 고한, 사북 등 강원남부 탄광노동자들과 시민들은 열사의 유해를 모시고 장례투쟁을 전개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지역마다 민주노조 쟁취와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조직적인 투쟁이 벌어졌다. 1989-90년 탄광 노동운동의 마지막 불꽃이 타올랐다.

열사들의 삶에 새겨진 1970-80년대 한국 노동운동

김경숙, 박영진, 성완희 열사의 삶은 1970-80년대 한국 노동자의 평범한 자화상일 수도 있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가족을 위해서 또는 자신의 생계를 위해서 일을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가혹한 현실을 체험했다. 그러나 그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사측과 정권의 갖은 탄압을 겪으면서 노동자의 조직으로서 노동조합의 중요성을 깨닫고 노동조합의 결성과 투쟁에 자신의 온몸을 바쳤기 때문이다. YH노조 투쟁, 구로공단 노동운동, 강원도 탄광노동자들의 투쟁까지 열사들의 발자국은 민주노조운동 역사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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