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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12.10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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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사 논란을 통해 살펴본 여야대립의 기만성

박상은 | 정책위원
‘독재자의 딸 박근혜만은 안된다.’ 이것이 18대 대선에서 정권교체를 염원하는 시민들이 너르게 공유하는 정서일 것이다. 대선을 앞두고 박근혜 후보가 516 쿠데타에 대해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언급하고, 인혁당 사건에 대해서 두 개의 판결 운운한 일은 ‘독재자의 딸 박근혜’라는 규정이 근거없는 낙인이 아니라는 확신을 주었다. 이는 문재인-안철수 후보의 단일화, 이를 통한 야권의 승리에 대한 절박함으로 연결된다.
역사 평가가 곧 오늘에 대한 분석이고, 이는 미래의 구상에 연결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역사 논쟁을 박근혜의 말처럼 “국민의 삶을 챙길 일도 많은데 계속 역사 논쟁을 하느냐”는 식으로 취급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박근혜의 대통령 당선이 역사 평가에서 박정희 시대의 복권이라는 의미를 부여받을 수 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근혜를 박정희와 동일시하려는 시도는 역사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정당한 것일까?
불과 5년 전 이명박 대통령은 박정희 시대의 고도성장에 대한 희구와 경제대통령이라는 자신의 이미지를 합치시키며 당선되었다. 1997년 위기 이후 장기 불황 속에서 노무현 정부 3년차인 2005년 국회운영위원회가 실시한 국민의식조사에서 응답자의 84.6%는 민주주의보다 경제발전이 중요하다고 답했다. 이러한 여론을 반영하여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는 경제대통령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압도적 지지를 얻어 당선되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민주화’ 담론을 ‘선진화’ 담론으로 대체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박정희의 정치적 복권은 17대 대선에서 이미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5년이 지난 지금, 이명박은 독재자로 비판당하고 있고 박근혜는 여론에 떠밀려 과거사에 대해 사과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 과거사를 둘러싼 역사 평가, 그리고 이를 둘러싼 여야의 대립구도가 180도 달라진 것이다.
최근 과거사 논란을 보면 한국의 정치지형이 민주-반민주 세력 간 대립으로 회귀한 것처럼 보인다. 야권은 이러한 대립구도를 강화하여 박근혜의 낙선과 야권 승리를 민주주의의 승리인 것처럼 호도하고, 박정희 시대에 대한 비판적 평가와 야권승리에 대한 염원을 등치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민주-반민주 대립 구도는 야권이 과거사 논란을 통해 얻고자 하는 효과이지 오늘날 남한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반영한 것은 아니다.
이 글에서는 우선 박정희 시대 평가를 둘러싼 학계의 논의를 검토하면서, 정치이념이자 경제정책으로서 박정희 정권의 반공·발전주의가 남한의 현대화와 동전의 양면이었음을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또한 최근 진보 학계의 주류적인 논의와 거리를 두면서 과거사 공방을 통해 야권이 얻고자 하는 효과가 무엇인지를 분석한다. 끝으로 야권이 과거사와 같은 쟁점을 통해 자신의 역사적 정통성과 정치적 정당성을 획득하려는 반복적인 시도를 이들에게 고유한 인민주의적 행태라는 관점에서 비판하며, 독재심판이라는 이유로 정당화되어온 후보단일화 논리를 비판한다.

경제강국을 이룬 대통령이라는 강고한 신화

박정희는 경제발전을 이룬 대통령으로 평가된다. 독재라는 점에서는 문제가 있었지만, 경제발전을 이룬 박정희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2000년대 들어 대중적으로 확산된다. 역설적이게도,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이 독재에 대항하여 민주화를 요구했던 세력의 집권기에 시행되면서, 이로 인한 불만이 ‘민주화 피로증’으로, 그리고 박정희에 대한 향수로 이어졌다. 진보세력은 이에 대해 ‘그래도 민주주의는 중요한 가치’라는 것을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 외에 제대로 된 반격을 하지 못했다.
보수 학자들은 이러한 대중의 여론에 힘입어 민주화 세력에 대한 공격을 퍼부었다. 아예 박정희 정권의 반민중성을 부정하면서 1970년대의 경제성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표적으로 낙성대경제연구소의 이영훈은 박정희 시대 한국 경제가 노동자들의 저임금에 의한 희생, 농민들의 저곡가에 의한 희생, 대기업에 의한 중소기업의 희생 위에서 성장했다는 전제는 허구라고 주장한다. 실제로는 노동자가 생산에 기여한 만큼 임금이 착실히 상승했고, 농업은 공업과 달리 국제시장으로부터 보호되었으며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계열 관계는 1980년대 이후 높은 수준으로 발달했다는 것이다. 또한 한국의 소득분배는 1997년 이전 30년간 양호했으며, 소득분배가 악화되는 것은 1997년 경제 위기 이후의 일이라는 것이 그 논거다.
이러한 보수의 공격에 맞서 진보적 지식인들은 1970년대의 고도성장이 박정희의 공(功)이 아니었고, 또 그것이 지속가능한 경제발전 모델이 아니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2005년 백낙청이 박정희를 ‘지속 불가능한 발전의 유공자’라고 평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박정희의 발전주의는 당시에는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에 와서 다시 도입할 수는 없다는 이러한 주장은 발전주의가 봉착한 내적 모순과 한계를 역사적경제적으로 논증하지 못한다. 가령 그는 ‘우리가 애써 쟁취한 민주적 가치의 보존과 근대극복의 노력들이 슬기롭게 일치하여야 한다’며 발전주의가 군사주의 문화와 대대적인 환경파괴에 근거했기 때문에 문제였다고 지적한다. 독재시대에나 가능했던 발전주의적인 경제정책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이러한 결론의 근저에는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통해 ‘정치적 민주화’가 달성되었다는 부당전제가 깔려 있다.
박정희의 발전주의는 1960년대 수입대체적 산업화에서 1970년대 수출지향적 산업화로 전화한다. 급속한 현대화, 산업화를 위해 필요한 자본이 국내에는 없었기 때문에 박정희 정권의 경제성장 정책은 외국자본에 크게 의존하는데, 이는 대부분의 발전도상국이 취한 내자동원적-내수지향적인 산업화 유형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특수한 발전주의가 가능했던 이유는 반공주의에 입각한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서 일본의 후배지로서 남한의 경제발전을 지원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1970년대에 기존의 경공업 중심에서 재벌 중심의 중화학공업 육성으로 전환하였는데, 1979-80년 불황은 이러한 발전주의의 내적 모순과 위기를 의미한다. 중화학공업화로 인해 고정자본은 급격히 늘어나고, 60년대 경공업처럼 즉각 수출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무역수지에서 적자가 발생하였다. 이미 외채가 많았던 상황에서 무역수지 적자를 보충하기 위해 외자를 도입하면서 외채는 급증한다. 그런데 세계적인 이자율 상승으로 외채 이자 상환의 부담이 늘어나고, 오일쇼크로 인해 외채누적이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윤율 역시 하락추세로 76년 36.5에서 79년 32.9로 하락한다. 발전주의의 유지로 경제를 감당할 수 없음이 드러나자 박정희는 경제정책 개혁을 시도하는데, 이것이 1979년 4월 실시된 경제안정화종합시책이다. 이는 한국에 신자유주의를 처음으로 도입하려는 시도로 평가된다.
이처럼 박정희의 발전주의는 이미 1979년에 그 한계에 봉착했고, 이에 따라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을 위한 교두보가 마련되고 있었다. 다만, 전두환 정부 초기 시도된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이 대마불사의 신화와 1986-88년의 ‘3저 호황’, 그리고 199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 재벌 중심의 고도성장으로 다소간 유예, 지체되었던 것이다. 또 김영삼 정부 시기 OECD 가입을 위시한 금융세계화의 충격과 노동자 민중의 저항으로 인해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이 본격화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마침내 1997년 가시화되기 시작한 재벌 체제의 위기로 인한 경제위기와 외환위기의 격랑 속에서 그동안 유예된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은 ‘민주화 세력’에 의해 적극 실행된다. 김대중 정부는 비상 위급 상황을 빌미로 김영삼 정부의 임기가 끝나기도 전에 비상대권을 발휘하여 국제통화기금(IMF)과의 협상을 주도하고 금융자유화와 노동신축화를 위한 법제를 대거 도입한다. 이 과정에서 ‘국난 극복을 위한 금 모으기 운동’, ‘환란 청문회’와 같은 인민주의적 행태를 통해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는 동시에 대중적 저항을 미연에 봉쇄한다.

박정희에 대한 오래된 지지

경제발전에 대한 논쟁 이전에도 박정희에 대한 대중적 지지가 지속되었다는 점은 박정희 비판자들에게 큰 곤란으로 작용했다. 박정희를 옹호하는 보수논객들이 책을 발표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이고, ‘민주주의보다 경제’라며 박정희에 대한 향수가 확산된 것은 2000년대 들어서이지만, 실은 박정희에 대한 지지가 그 전에도 광범위하게 존재했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 노무현에게 근소한 차로 1위를 내주긴 했지만, 지금까지 박정희는 역대 대통령 중 지지도 1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이는 박정희의 개발독재에 대해 대중의 자발적 지지가 있었는가, 아니면 강제로 동원되었는가라는 학계 내부의 논란을 촉발시켰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박정희 시대가 박정희 개인의 ‘위로부터의 독재’였을 뿐만 아니라, 대중의 광범한 동의지반을 갖는 ‘아래로부터의 독재’였다는 분석이 제출되었다. 이에 따르면 독재는 강압과 그에 의한 민중의 희생 혹은 영웅적 저항으로만 환원될 수 없다. 실제로는 위로부터의 강제적 동원이 아닌 아래로부터의 자발적 동원 체제가 구축되었고, 나아가 대중의 광범한 동의지반을 향유했다는 것이다. 이는 곧 대중이 독재에 연루되고 심지어 그것과 공모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러한 도발적인 문제제기는 민중이 독재의 피해자였다는 도식이 곧 민중을 옹호하는 것이라 생각했던 대부분의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시대가 폭압과 폭력으로만 일관된 것이 아니라 대중의 동의를 얻는 과정 역시 있었다는 것이 학계에서도 점차 인정되었고, 이후 이와 같은 파시즘 분석은 박정희 시대를 복합적으로 분석하는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진보학계를 대표하는 지식인 중 한 명인 조희연 교수는 박정희 시대를 ‘근대화를 향한 동원’을 주된 특성으로 하는 체제, 즉 ‘개발동원체제’라고 평가한다. 그에 따르면 개발동원체제는 ‘근대화라는 국민적, 민족적 목표를 향해 국가가 위로부터 사회를 강력하게 추동하고 동원하는 체제’로, 이 때 권력은 민중에 대해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요소를 내포하는 선도성을 갖는다. 즉 국가가 국민을 가르치고 이끄는 역할을 하며, 국민도 이 과정에서 스스로 이를 적극적으로 따른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한편 일제 식민지배와 한국전쟁의 참상을 겪고 ‘지긋지긋한 가난의 굴레로부터 반드시 해방되겠다’며 국가건설과 경제성장에 집착해왔던 모든 한국인들에게 공통적으로 새겨진 의식이자 삶의 태도가 1997년 IMF 구제금융 이후 공포로 변해 박정희의 개발모델을 가능한 대안으로 떠올렸다는 분석도 제출되었다. 이는 박정희에 대한 뿌리 깊은 지지의 밑바탕에 흐르는 정서를 설명하려는 시도이다.
이처럼 대중의 자발적인 동의가 지금까지도 박정희에 대한 지지로 연결되고 있다는 학계의 지적은 박정희의 발전주의가 경제정책이었을 뿐 아니라 정치이념이기도 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나 발전주의는 박정희 시대의 대중동원기제에 대한 분석이나 박정희 향수에 대한 대중정서를 설명하는 것만으로 비판할 수는 없다. 현대화를 위한 정치이념이자 경제정책으로서 반공·발전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발전주의의 내적 모순과 한계, 그리고 이에 대한 지배계급의 대안으로서 (발전주의의) 신자유주의로의 전환을 동시에, 그리고 역사적으로 비판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 ‘민주화 세력’으로 자신을 호명하는 정치세력은 박정희 시대를 박정희 독재에 대한 대중의 원한에 호소하는 기제로 활용함으로써 현재의 정치위기를 한층 가중시키고 있다.

과거사 논란의 정치적 효과

정치적 공격의 도구로 과거사가 활용되면서, 박정희 시대를 평가함에 있어서 정치와 경제의 이분법을 지양하고 억압 뿐 아니라 동원의 기제도 분석하려는 학계의 논의는 사장되고 흑백논리가 강화된다. 민주당의 박근혜 비판이 이를 잘 보여준다. 민주당과 문재인 후보는 7월 5.16쿠데타 발언부터 인혁당 사건, 부마항쟁, 장준하 의문사, 정수장학회 문제를 연속해서 제기하면서 박정희와 박근혜를 동일화하고, 박근혜의 과거사 인식을 공격하고 있다.
‘유신은 온 국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군사독재세력의 발악’이라든가 박근혜는 ‘긴급조치 시리즈로 99%의 국민을 피해자로 만든 유신독재의 퍼스트레이디’라는 것이 민주당의 주장이다. 정치적인 공격에서는 상대방을 악의 화신으로 만드는 흑백논리가 동원되기 일쑤고, 종종 실체보다 이미지가 부각되어야 하기 때문에 과장된 표현이 남발된다. 또한 박근혜의 지지율 하락이 목표이기 때문에 비판의 결론은 항상 박근혜를 향할 수밖에 없고, 대부분 박근혜의 ‘진정성 있는’ 사과를 요구하며 끝을 맺는다. 박근혜의 과거사에 대한 사과 이후에도 이슈를 바꿔가며 비슷한 논지가 반복해서 재생산된다.
이렇게 과거사 논란이 다른 쟁점을 압도할 만큼 반복되는 이유는 실질적인 여야 간 정치이념 대결이 부재한 상태에서 다분히 허구적인 대결 구도를 만들어내야 할 필요성 때문이다. 여야 공히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말하지만, 신자유주의 정책기조를 포기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그 실제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이런 지형에서 과거사 논란은 사실상 정책적으로 수렴하고 있는 여야가 극명하게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효과를 낳는다. 또 박정희를 절대 악으로 규정하며 박근혜의 당선을 마치 독재의 부활로 동일시함으로써,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에 대한 비판을 무화하는 효과를 낳는다.
한편, 야권은 과거사 논란을 통해 박근혜를 공격하는 것 외에 다른 부수적 효과도 노리고 있다. 이들은 과거사 청산을 위해 유신체제에 저항했던 사건과 인물들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필요하다고 밝히며 노무현 정부 당시의 과거사정리위원회를 높게 평가한다. 구체적으로는 부마항쟁에 대한 특별법 제정을 통한 국가기념일 지정과 피해자 보상이라는 공약이 문재인 캠프에서 제기되었다. 물론 과거사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은 필요하다. 그러나 민주당의 과거사 평가는 광주항쟁이 그러했듯이 자신의 역사적 정통성과 정치적 정당성을 구축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들은 국가의 피해보상을 통해 사회변혁을 위해 희생했던 이들을 단순한 독재의 피해자로 전락시킨다. 이렇게 국가가 대중적 저항의 역사를 ‘민주화’라는 제한된 이름으로 포섭함으로써, 이를 계승하는 사회운동의 급진성을 관리 혹은 억압하는 효과도 낳는다.

한국에서 자유주의의 취약성

야권은 과거사 논란을 통해 여야대립을 민주-반민주의 대립으로 치환시키려 하지만, 현재의 야권을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일관되게 노력해온 자유주의 세력이라 보기는 힘들다. 한국에서 보수주의와 자유주의는 그 태동부터 취약했다. 한국전쟁과 민족분단, 토지개혁으로 인하여 사회주의 세력과 토지귀족 세력이 모두 몰락함으로써 계급적 토대를 갖춘 정당정치의 발전 가능성이 봉쇄되었다. 지주계급의 몰락은 보수주의 세력이 안정적인 통치체제를 구축할 수 있는 사회 경제적 토대가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정치적 무능과 부정부패로 일관한 이승만 정부가 물러난 뒤,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반공주의와 발전주의를 새로운 통치이념으로 제시하면서 공화당을 창당하는데, 이는 지배층을 정당으로 통합하고 의회 민주주의라는 최소한의 형식을 갖추기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재야세력은 개발독재에 저항했지만, 군사정부의 반공주의와 발전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 독자적인 정치이념을 제시하지 못한다. 대신 이들은 미국과 일본에 종속적인 경제구조와 이에 따른 지역적 불균등 발전을 문제 삼고, 이것이 학연지연 등 연고주의에 기초한 개발독재에서 비롯된다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개발독재에 대한 인민주의적 비판은 일부 야당세력에 의해 수용된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김대중은 재야세력과 연대를 강화하면서 낙후된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견고한 지지기반을 형성하였다. 이처럼 박정희 시기의 야당은 자유주의 이념을 명확히 했다기보다, 낙후된 지역과 소외된 대중의 불만과 원한을 동원하면서 지지를 확산했던 것이다.
박정희 시대가 끝난 뒤 부마항쟁과 5.18 광주항쟁을 폭력적으로 진압하며 정권을 잡은 신군부는 민정당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당질서를 강제적으로 도입하면서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을 추진하는데, 신군부에 맞선 재야운동과 사회운동은 이념적으로 분화하게 된다. 사회운동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수용하면서 노동자계급의 역할을 강조하는 사회주의적 정치이념을 갖게 된다. 그러나 1987년 항쟁의 성과가 직선제 쟁취로 수렴되고, 소련을 비롯한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로 인해 사회주의 이념이 설득력을 잃자, 자유주의가 진보진영 내에서 헤게모니를 획득하게 된다. 이는 일부 사회운동의 제도권으로의 투항, 자유주의적 NGO의 부상, 노동자운동의 선별적 포섭으로 상징된다.
그런데 1992년 14대 대선에서 군사정부는 3당합당을 통해 김영삼을 필두로 한 자유주의 세력과 통합함으로써 지배분파는 군부와 자유주의 세력의 연합으로 변모한다. 3당 합당 이후 여당은 비교적 안정적으로 제도화되는 반면, 자유주의 세력 일부를 여권으로 흡수당한 야당은 정치이념이라기보다는 사실상 지도자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존하여 창당, 재창당되다 1997년 외환위기를 기회로 대선에서 승리한다.
1997년 집권에 성공한 김대중은 개혁이라는 이름 하에 사회구조를 끊임없이 신자유주의적 방식으로 전환시켰다. 뒤를 이은 노무현 역시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을 추진하면서 정부에 대한 비판은 곧 한나라당 및 조중동과 결합된 보수주의 세력에 대한 지지로 매도하면서 장기불황에 대한 대중적 불만을 차단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확산에 따라 사회 불안정성이 고조되고, 더불어 자유주의 세력과 함께 체제를 유지해 온 자유주의적 NGO에 대한 대중적 지지가 점차 철회되고, 급기야 각종 부패 스캔들이 늘어나면서 노무현 정부는 위기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조건에서 통치를 유지하기 위해 노무현 역시 보수주의적 정치세력과의 연대를 시작한다. 2005년 한나라당에 제안했던 대연정이 이를 극적으로 상징한다.
이처럼 남한에서 자유주의는 그 이념적 지향이 불명확했고,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세력들은 끊임없이 지역주의나 보수주의와 제휴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자유주의 세력이 독자적인 정치적 지지 기반을 확보하고 이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물질적 토대가 남한 자본주의에 부재했기 때문이다. 야권은 정권을 잡은 뒤에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노동자민중을 적절히 포섭하고 관리할 수 없었다. 그로 인해 설사 집권에 성공하더라도 이들은 안정적인 통치기반 확보를 위해 보수주의 세력과 연대했다가 이것이 위기에 빠지면 다시 파기하는 행태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정치공학만 남은 후보단일화 논의

후보단일화의 역사를 보더라도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여야대립이 단순히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대립으로 환원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민주화 세력’의 대선 승리는 두 번이었는데, 두 번 모두 후보단일화로 승리했다. 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과 자유민주연합의 ‘DJP 연합’과 16대의 노무현 대통령을 탄생시킨 민주당과 국민통합21의 후보단일화가 그것이다.
1997년 외환위기로 김영삼 정부에 대한 대중의 불신이 증폭된 상황에서 15대 대선에 임한 김대중은 역대 군사정부와 그들과 제휴한 자유주의 세력을 반민주적이고 부패한 ‘지역패권주의’ 세력이라고 공격하고, 이들을 경제위기와 외환위기의 주범으로 지목한다. 그러나 그 자신도 결국 보수주의 세력인 자민련과 제휴하여 승리하였다. 이는 당시에 ‘진보적 지역주의’의 논리로 포장되었다. 16대 대선에서 노무현과 정몽준의 후보단일화 역시 이념과 정책을 무시한 채, 재벌 정치인과 손잡는 단일화 전술이었다. 상대적으로 견고한 기반을 가진 보수정당에 맞서야 한다는 이유로, 이러한 ‘묻지마 단일화’가 진행되었다.
한국의 반복되는 후보단일화 시도를 두고 최근에는 게임이론을 적용하여 분석한 연구가 발표되기도 했다. 이 분석에서는 그간 대선에서의 정당 간 선거연합에서 ‘뭉침’을 통한 지지율 상승과 지분 배분과 같은 정치적 거래의 요소가 중요하게 작용하였다고 보고, 연합을 주도하는 정당의 대선 승리확률과 연합대상정당에 대한 지분 배분을 중요 변수로 활용한 게임모형을 적용하여 다양한 경우의 수를 따진다. 이 연구의 결론은 오로지 연합을 주도하는 정당의 당선 가능성이 상당할 때만 의미 있는 선거연합이 형성된다는 것인데, 이는 역사적으로 이념적 연합보다 당선이후의 지분 배분이 선거연합을 좌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최근 한 언론에서는 단일화를 위해 문재인과 안철수가 각각 어떤 전략을 써야하는지를 컨설팅 보고서 형태의 기사로 제출하기도 했다. 대선주자를 일종의 상품으로 보고, 11월 25일 후보 등록일까지 최대한 시장점유율(지지율)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를 분석한 글이다. 이 기사에서는 문재인에게 ‘서민’ 시장이 비어있으니 선점하라, 하지만 ‘서민’은 너무 자주 보던 것이니까 ‘적통’ 키워드로 밀고 나가라, 등의 조언을 하고 있다. 이러한 분석은 이미 한국의 선거가 일관된 이념과 정책을 시험받는 장이 아니라 당선을 위한 인민주의적 수사에서 누가 뛰어난가를 시험받는 장이라는 것을 방증한다. 현재 2012년 대선에서 문재인-안철수 후보 간의 단일화 논의도 독재심판과 민주주의 세력의 승리를 위해 당연시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지극히 정치공학적인 방식으로 추진될 가능성이 크다.

민주 대 반민주라는 허구적 구도에 갇히지 말자

신자유주의적 사회재편을 주도한 구 집권세력이 정권교체를 통해 신자유주의를 역전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민중운동의 입장에서 보면, 선거 시기 이들을 압박해서 설사 아주 작은 성과를 얻어낼 수 있다 하더라도, 운동의 주체적 역량이 없다면 이마저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대선이 끝나면 경제위기라는 객관적 제약 속에서, 그리고 이를 빌미로 한 관료와 재벌의 반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가능성이 크다.
민중운동은 여야의 허구적 대립 속에서 왜곡, 은폐되거나 굴절되는 계급대립이 우리 사회에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자신의 투쟁으로 몸소 증명해왔다. 과거사 논란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현재 여야의 대립 구도를 민주 대 반민주라는 옛 구도와 중첩시키면서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야권의 시도를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대선 이후 신자유주의 공세에 맞설 수 있는 태세를 갖추는 하나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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