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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1.11.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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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HWP

현대미술 엮기-설치미술과 대안공간

이병희 | 미술사
현대미술전시에는 (특히, 비엔날레급 국제전과 중급 이상의 전시형태에서) 갖가지 매체를 이용한 설치전과 오브제 설치가 많다. 회화나 사진 판화 등의 평면전시에 비하면, 공간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설치성격의 전시는 소통의 내용과 방식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일종의 텍스트로서의 전시 공간은 어떤 하나의 통합을 이뤄나가는 공간이다. 그럼으로써 작품과 그 공간을 읽는 정도와 읽는 자의 태도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만드는 장의 역할을 한다. 설치전시는 이러한 역할을 보다 뚜렷하게 드러내는 전시이다.
소통의 방식 또한, 큰 규모의 미술관이나 화랑, 대안공간, 개성적인 소규모 공간에 따라 다르다. 잘 알려진 미술관(혹은 동급의 기관)은 대가의 작품들과 잘 알려진 사조의 전시로 모종의 교육적인 성격을 가지는 반면, 대안공간이나 갖가지 소규모의 전시공간은 새로운 작가를 발굴하고 개성적인 기획전을 하면서, 미술전시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 넣고 있다.
전시 형태와 공간의 측면에서 다양한 의미를 생산할 가능성을 보이는데, 특히 대안공간의 경우, 문예진흥기금과 같은 지원금 외에는 재정을 해결하기 어려운 열악한 조건과 공간의 협소함, 작가군과의 다양한 소통 채널이 없다는 환경하에서도 전시 활동을 할 수 있다.
상업적인 유통구조 상 거의 판매가 불가능한 설치전의 경우, 작가들은 전시 한번에 몇 백만원에서 몇 천만원 이상을 버리다시피 한다. 이들의 존재 의미가 지난 80년대를 넘기면서 미술과 전시가 적극적인 소통의 가능성과 역할을 갖는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으나 그 기반이 약한 것은 사실이다.
이제 대안공간이나 미술 그룹과 같은 일종의 전위성과 신선함을 가진 단위들은 몇 되지 않는다. 서울의 경우 홍대 앞의 대안공간 루프, (거의 대안공간이라고 보기 어렵지만) 쌈지 스페이스, 인사동의 대안공간 풀, 사루비아 다방, 대학로 살이 있다. 얼마전까지도 지속되었던 오리진이나 로고스와 파토스와 같은 그룹들은 아직도 작가 혹은 작가 지망생들이 스쳐가는 단위로 남아있다. 지금 남아있는 공간들의 기원적 형태는 8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 사이사이 90년대 초반부터 나온 신세대논쟁과 신세대 등장 이후의 현상들이 자리하고 있다.



90년대 초반(혹은 80년대 후반) 소그룹을 중심으로 신세대 그룹이라 일컬어진 이들이 있었다. 그들이 표방한 바는 탈모던적 감성, 키치적 통속성, 대중매체 친화성, 아방가르드적 비판의식이다. 이들이 전시를 하는 형태는 멤버가 일정하지 않았으며, 일종의 프로젝트형이었다. 작가들은 개인을 단위로 그 다음의 단위를 각각의 그룹으로 확산시키면서 유동하였다.
90년대 초반 홍대 주변을 중심으로 하여 카페 예술과, 카페 문화, 카페 예술 전파가 이루어졌다. <스페이스 오존>, <발전소>, <올로올로>, <살> 등의 카페는 음악, 퍼포먼스, 영상 등의 행위 미술적인 요소를 소화하였다. 어설프게나마 보자면 지금도 이들 대안공간에서는 전시와 더불어 지속적으로 소규모의 파티를 행하고 있는데, 당시 미술인들이 행위하였던 태도와 정신성을 연장하고, 이런 카페활동의 흔적과 형태를 담아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카페 문화는 작가들의 미술활동을 위한 여러 단체들과 더불어 양산되었는데, 이들을 신세대 그룹이라 불렀다. 1987년 창립전을 가진 ꡔ뮤지엄ꡕ, ꡔ프린트 컨셉(1987)ꡕ, ꡔUAO(1988)ꡕ, ꡔ선데이서울(1990)ꡕ, ꡔ서브 클럽(1990)ꡕ, ꡔ황금사과(1989-1990)ꡕ, ꡔ오프 앤온(1991)ꡕ 등.
각각의 그룹들은 프로젝트형 설치전시를 했는데, 이것은 70년대부터 행위로서 반 모던을 내세웠던 퍼포먼스같은 행위미술과 더불어 성숙해 나갔다. 그들은 일상의 단편들과 개인적인 고민들을 심화시키고, 그 흔적들을 일종의 알레고리적 패러다임을 형성하듯 표출해왔다. 그러나 단체활동을 하였던 작가들은 어떤 이념과 거점을 두기를 거부하면서 프로젝트형으로 움직였는데, 그 결과 이제 개별 작가로 흩어지고 포스트모던 현상과 논쟁 속으로 휘말려들어가는 나약함을 남겼다.
미술양식과 전시 형태면에서는 설치 오브제 미술 영상 디지털 아트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그 장르와 매체 중요성에 대한 심화로 이후로도 오브제 설치형태의 전시, 전시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이분법의 논리 허울에 쌓였던 모더니즘에 대한 저항으로서 아방가르드의 출현과 더불어 새로운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들은 모더니즘의 부정과 모더니즘이 배제시킨 사실성, 현실성, 일상성을 부각시키면서 안티하였고, 이후 해체를 방법으로 하여 포스트 모던적 다양성과 다국성의 텍스트장으로 이행해가는 과정 속에 자리한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의 태도와 방식의 측면에서 고리를 엮어가다보면, 때아닌 현실감각의 표출, 분출을 보였던 그 이전 세대들의 연장선에 있으면서 그 문제의식을 변형시키는 과정에서의 80년대 소그룹들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ꡔTA-RA(타블로 라사 1981-1990)ꡕ, ꡔ난지도(1985-1988)ꡕ, ꡔMeta Vox(1985-1989)ꡕ, ꡔ로고스와 파토스(1986-1999)ꡕ, ꡔ뮤지엄(1987-1988)ꡕ, ꡔ3월의 서울(1987-1989)ꡕ, ꡔ레알리떼 서울(1987-1993)ꡕ, ꡔ황금사과ꡕ 등. 이들은 기성미술의 순수성과 정신주의를 지양하면서 삶, 현실에서의 건강한 일상성을 내세웠다.
80년대는 미술의 주제, 양식, 역할에 대해 어쩌면 미술내적 현장과 사회와의 관련성을 고민한 결과로 너무도 분명한 입장을 표명했던 시기라고도 볼 수 있다.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대립구도속에서 민중미술운동 진영과 소그룹활동진영이 두드러지는데, 당시 사회참여적 성격을 가진 세력들을 한편으로, 이와 반대로 정신주의를 표방한 모노크롬등의 추상흐름 속에서 순수 미술 사조가 있었다. 민중미술의 경우, 행위로서의 운동과 운동적 마인드가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마치 지속 불가능할 것처럼, 운동적 내성을 가지지 않을 것처럼, 지난 94년경의 국립현대미술관 민중미술 15년전을 통해 당시의 활동이 마치 행위로서의 운동에 그친 것이라는 씁쓸한 인상을 남기고 말았다. 반면, 모노크롬이나 앵포르멜 등의 형태는 서구사조의 무비판적 수용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변화하였는데, 지금까지 대가들의 손에서 개인적 양식으로 지속되고 있다.
민중미술운동과 기성의 모더니즘 계열을 비판하면서 나왔던 소그룹활동 단체들은 80년대 민중미술진영과 홍대파와 서울대파로 나뉜 모더니즘 계열에 대한 부정을 토대로 하였다. 당시를 회고하는 작가들의 말을 들어보면 민중미술운동이 마치 중앙 정부에서 지령을 떨어뜨리면 그것을 거부해서는 안되는, 개성과 자유로움을 억압하는 단체처럼 보였던 것 같다. ‘모두 목판화, 걸개를 그려야하는 것은 아니다’에서 출발하여 오브제 설치, 현장 설치와 행위미술 등을 통해 개성과 자유로움을 강조하였다. 분명 기존의 세력다툼과 권력화의 과정을 부정하는 것을 토대로 하였던 이들은 그 자체로 활기가 있었다. 구호, 아이디어, 새로움, 비평의 부재 상태에서 나오는 각축의 장 속에서, 자유로움, 향연장으로서의 전시, 감성이 부딪치는 장으로서의 전시장, 그 속에서 개인적 고민과 현실의 고민을 일상성을 중심으로 풀어갔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지향점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저 현실 그 자체를 당위로서 내세운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物, 물자체를 강조하였고 物性이라는 애매한 이야기들이 중심개념으로 떠돌기도 하였다. 아웃사이더. 언더. 아방가르드. 솔직함. 강렬함. 그 자체로서의 충격과 강한 언어. 억압된 욕망의 표출. 시대를 반영하기를 스스로 거부함. 이들은 태도라든가 분위기와 구호가 중요했다.



80년대 기성세력에 대한 부정으로부터 출발했던 오브제 설치와 현장 설치, 행위미술의 작가군들은 일상성과 역동성, 자유로움, 개인적 고민의 심화 등을 내용으로 하면서 활동하였다. 비슷한 태도로 볼 수 있는 90년대로 이어지는 이들 설치미술과 행위미술의 형태는 프로젝트형태를 띠면서 어디에 적을 두지 않고 유동하면서 단위들을 옮겨나갔다. 그 과정에서 신세대 미술 그룹들이 생겨나고 그들이 향유한 카페미술문화는 지금까지도 비슷한 형태를 띠면서 잔재를 남기고 있기도 하다.
작가들은 “신세대 네 멋대로 해라”와 같은 구호 속에서 자유로움을 만끽하고자하였고 부정과 권위적 이미지의 해체를 생산하였다. 소그룹단체들에서 활동했던 그야말로 개성적인 작가들은 이후 개별의 장으로 흩어져버리고 말았다. 이 판을 부정하고 떠난 유학과 유학에서의 비난한 생활과 격동을 거쳐서 살아남은 이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부유한 집안의 작가는 언어와 물질, 부인할 수 없는 끼와 그것을 구현할 수 있는 토대를 가지고 지금은 대가가 되어 활발하게 활동중이기도 하다. 어쩌면 작가들은 향수처럼 지난 시절의 철없음 혹은 유치함을 논하면서 그 의미성에 대해서 조명하려할 지도 모르고 비평적 재조명이라는 타이틀로서 의미화, 역사화, 세력화하고자 할지도 모른다.
카페미술문화를 형성했던 미술기획과 작가군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당시 이들 카페를 운영했던 주자들은 개인 작업에 몰두하거나 근거지를 가지지 않은 채 주장 없는 생계유지를 위해 카페의 주인이 되기도 하였다. 지금 남아있는 공간과 흩어진 작가들, 새롭게 이합 집산하는 단위들, 이들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 지난 몇 십년 간의 활동과 흐름을 토대삼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새로이 20대 30대의 기수로 단위를 형성하고자 하는 이들의 토대가 어디에 있는지, 과연 있기는 했는지에 대해서도 반문해볼 수 있다. 진행형이라는 점. 하지만 불투명한 방향성과 서로 얽혀있는 진행형의 작업들과 단위들에 대해 처음부터 부정하고 담보하지 않았던 명확한 이념의 부재 문제라고 볼 수도 있지만, 전체적인 흐름으로 본다면 가정할 수 없는 과거이다.
아쉬움은 지난 시간 동안의 에너지이다. 그 에너지가 단지 개별 작가들의 토대로만 남아있고 다른 작가들은 언더그라운드답지 못한 언더, 허망한 신세대론과 실체 없는 포스트모더니즘론속에 묻혀버려 있는 지금의 현상이 아쉬운 것이다. 당시의 흔적들로 남아있는 공간은 운영과 존속 자체를 의심하는 처지에 있다. 그 공간에서 전시하는 작가들은 공간의 역사와 의미성에 대한 고찰없이 전시 경력을 쌓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아직 드러나지 않음, 드러나도록 유도하는 메카니즘의 문제는 항상 중요한 화두처럼 남아서 해결을 기다리고 있다. 구조에 대한 반성이 없이 명멸해버리고 마는 것이 아닌가하는 우려가 남으며 작가들은 단위와 존재의 토대가 희미한 가운데 작업의 구체성이 없어진다는 걱정을 한다. 하지만 아직 사람들은 소통의 가능성과 방식, 그것이 이루어지는 장으로서의 전시에 대해서 진지함을 풀어내고 싶어한다. 어쩌면 지난 80-90년대를 거치면서 구호와 의지, 부정이 지금까지 남아서 활기를 떨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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