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3.5.35호

체계에 맞선 새로운 반란 New Revolts against the System

이메뉴얼 월러스틴 | 번역; 정책국
내가 1970년대 “반체제 운동”이라는 용어를 고안한 것은 역사적이고 분석적인 차원에서 구별되고 많은 면에서 경쟁했던 두 가지의 대중운동을 하나로 묶기 위해서였다. 즉, ‘사회(주의)적’이라 호명되었던 것과 ‘민족적’ 운동. 사회주의적 운동들은 주로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조합들로 인식되었다: 그들은 각각의 국가 내에서 부르주아들과 고용주들에 대항하여 계급투쟁을 촉진시키려 했다. 민족적 운동들은 하나의 민족이라 여겨지지만 분리되어 있는 정치적 단위들을 묶음으로써―예를 들어, 이탈리아 내부의 여러 도시들처럼― 또는 자신들의 민족성에 대해 제국주의적이거나 억압적이라고 간주되는 국가들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예를 들어, 아시아 또는 아프리카의 식민지들― 민족국가를 창조하기 위해 투쟁했다.

두 유형의 운동은 19세기 후반 50년 동안 유의미한 관료적 구조들로 등장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강력해졌다. 양자는 어떤 종류의 정치적 목표보다―특히, 사회(주의)적 운동은 민족적 목표보다, 민족적 운동은 사회(주의)적 목표보다― 자신의 목표들에 우선권을 두었다. 이들은 종종 서로에 대한 맹렬한 비판을 낳았다. 이 두 유형의 운동들은 정치적으로 거의 협력하지 않았고, 협력했던 경우에도 그런 협력은 기본적인 동맹이 아니라 일시적인 전술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50년에서 1970년 사이에 이 운동들의 역사는 서로 공유했던 일련의 특성들을 보여준다.

▶ 대부분의 사회주의자들의 운동과 민족주의자들의 운동들은 반복적으로 스스로를 ‘혁명적’이라고, 즉 사회적 관계에 있어서 근본적인 변혁을 지지한다고 주장했다. 두 유형은 보통 좀더 점진적인 접근을 주장하고, 그럼으로써 혁명적 수사를 삼갔던 당파―때때로 이 당파들은 분리된 조직에 위치하고 있었다―를 가지고 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처음부터―그리고 종종 수십 년 동안― 권력자들은 이 모든 운동들을, 심지어 좀 더 온건한 판형이라도, 권력의 안정성 혹은 정치적 구조의 생존 자체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 두 번째로, 처음에 두 운동의 다양한 변종들은 정치적으로 매우 취약했고, 단지 살아남기 위해 매우 힘든 싸움을 해야만 했다. 정부는 그 운동들을 탄압하거나 불법으로 간주했고, 그들의 지도자들은 체포되었으며, 구성원들은 종종 국가나 사적인 물리력에 의해 체계적인 폭력을 겪었다. 이 운동들의 초기 판형들의 대다수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 세 번째로, 19세기의 마지막 30년 동안 두 유형의 운동은 전략을 둘러싼 일련의 대논쟁을 겪었다. 그 논쟁은 ‘국가-지향적’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을, 국가를 본래적인 적으로 간주하고 국가 대신에 개인적 변형에 강조를 두는 사람들의 반대편에 세웠다. 사회(주의) 운동에 있어서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 사이의 논쟁이었으며; 민족적 운동에 있어서는 정치적 민족주의자들과 문화적 민족주의자들 사이의 논쟁이었다.

▶ 역사적으로 이 논쟁들에서 벌어진 일―이것은 네 번째 유사점이다―은 ‘국가-지향적’ 관점을 유지하는 자들이 승리했다는 것이다. 각각의 경우에서 결정적인 논거는 실제적인 권력의 근원이 국가 장치들에 부여되어 있다는 것, 이로 인해 국가는 무정부주의 혹은 문화적 민족주의를 지향하는 반역을 성공적으로 제압할 수 있기 때문에 국가의 정치적 중요성을 무시하는 어떠한 시도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19세기 말, 이 그룹들은 소위 2단계 전략을 명확히 했다; 우선 국가 구조 내에서 권력을 쟁취하라; 그런 다음 세계를 변혁하라. 이것은 민족적 운동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적 운동에게도 사실이다.

▶ 다섯 번째 공통적인 특징은 덜 명확하지만, 위와 마찬가지로 실제적이다. 사회주의자들의 운동은 종종 그들의 논거에 민족주의적인 수사들을 포함했으며, 민족주의자들의 담론은 종종 사회주의적인 요소를 가졌다. 그 결과 두 입장의 차이는 그것을 제안한 사람들이 인식한 것보다 훨씬 더 흐릿해졌다. 유럽에서는 사회주의자들의 운동이 종종 보수파들이나 국가 그 자체보다 민족 통합을 위한 세력으로서 훨씬 더 효과적인 기능을 했다; 중국과 베트남, 쿠바에서 권력을 장악한 공산당들은 확실히 민족해방운동으로 작용하고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동원의 과정에서 두 그룹들은 점차 인구의 광범위한 부문들을 끌어들여야 했고, 수사학의 범위를 확장하는 것은 이런 관점에서 유용했다. 둘째, 두 운동의 지도자들은 종종 무의식중에 그들이 현재의 체계에서 공통의 적을 가지고 있다―그러므로 그들은 공식적인 선언에 드러난 것보다 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인식했다.

▶ 두 종류의 운동이 전개한 군중 동원의 과정들은 기본적으로 상당히 비슷했다.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두 유형들은 대개 한줌의 지식인들에 각기 다른 계층에서 유입된 약간의 투사들이 더해진 작은 그룹으로 출발했다. 성공한 운동들은 그들이 오랜 교육과 조직화의 힘으로 활동가들, 동조자들, 수동적 지지자들의 핵심적인 집단들 내에 대중적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성공했다. 모택동의 시대에 외곽의 지지자들이 점점 커져서 투사들이 마치 물 만난 물고기처럼 활동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때, 운동들은 정치 권력을 향한 중대한 투쟁자가 되었다. 물론 우리는 일반적으로 스스로를 민족해방운동이라 묘사했던 운동들이 반주변과 주변부에서 융성했던 반면에, 스스로를 ‘사회민주주의’라 부르던 그룹들이 세계-경제의 핵심 지역에 위치한 국가들에서 처음부터 강력했던 것을 알아야만 한다. 전자는 대개 [반주변부의] 공산당들에서도 사실이다. 그 이유는 명확한 것처럼 보인다. 좀더 약한 지역의 운동들은 평등을 위한 투쟁이 직접적인 혹은 간접적인 제국주의적 권력으로부터 국가 구조의 통제를 떼어내는 그들의 능력에 달려있다고 보았다. 중심부의 운동들은 이미 강력한 국가들 안에 있었다. 평등을 향한 그들의 투쟁을 진전시키기 위해서 그들은 그들의 지배계급으로부터 권력을 탈취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바로 이 국가들이 강하고 부유했다는 이유 때문에, 봉기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전술이었고, 이 당들은 선거를 통한 경로를 사용했다.

▶ 일곱 번째 공통적인 특성은 이 운동들 모두 주된 변형 양식으로서 ‘혁명’과 ‘개혁’ 사이의 긴장감 속에서 투쟁했다는 점이다. 두 운동 모두에서 수많은 담론이 이 논쟁을 둘러싸고 진행되었다―그러나 결국 양자 모두 현실에 대한 오해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혁명주의자들은 실제 그렇게 혁명적이지 않았고, 개혁주의자들이 항상 개혁주의자였던 것은 아니었다. 확실히, 운동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궤도를 추구해 갈수록 두 가지 접근 사이의 차이는 점점 불투명해졌다. 혁명주의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많은 양보를 해야만 했다. 개혁주의자들은 변화를 위해 가설적으로 설정했던 합법적 경로가 종종 실천적으로 차단된다는 것, 그리고 장애물을 넘기 위해서는 힘 또는 힘의 위협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소위 혁명적 운동들은 보통 스스로 봉기를 수행하기보다는 기존 권력들이 전시에 붕괴됨으로써 권력을 장악했다. 1917년 러시아에서 볼셰비키가 말했다고 알려진 것처럼, ‘권력은 거리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일단 권력을 잡자, 어떻게 그들이 그 곳에 도달했는지와 상관없이 운동들은 권력을 유지하길 바랬다; 이것은 종종 다른 나라에 있는 동지들과의 연대뿐만 아니라 전투성도 희생시킬 것을 요구했다. 처음에 이 운동들에 대한 대중적 지지는 그들이 총알로 승리했든 투표함으로 승리했든 똑같이 거대했다―긴 기간의 투쟁 후에 권력에 도달한 것을 환영하는 거리의 춤은 같았다.

▶ 마지막으로, 두 운동 모두 2단계 전략을 수행하는데 문제가 있었다. 일단 ‘첫 번째 단계’가 완성되고 그들이 권력을 잡자, 추종자들은 그들이 2단계의 약속을 실현할 것으로 기대했다: 세계를 변혁하는 것. 만약 그들이 그 전에 몰랐다면, 그들이 발견한 것은 국가 권력이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제한적이라는 것이었다. 각 국가들은 국가간 체계의 일원으로써 압박받고 있었고, 그 체계 안에서는 어떤 국가의 주권도 완전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정권에 오래 머무르면 머무를수록, 그들은 약속의 실현을 더욱 더 연기하는 것처럼 보였다; 전투적인 대중운동(mobilizing movement)의 핵심 간부들은 권력을 잡은 당에서 요직을 맡았다. 그들의 사회적 지위가 바뀌었고, 그래서 불가피하게 그들의 지위는 개별적인 심리상태였다. 소비에트에서 노멘클라투라로 알려진 것이, 운동이 권력을 잡은 모든 국가에서 일정한 형태로 출현하는 것처럼 보였다―즉, 나머지 대중들보다 더 많은 권력과 더 많은 부를 가진 더 높은 공직자들의 배타적 특권 계층. 동시에 평범한 노동자들은 더욱 힘든 노역에 참여해야했고, 민족적 발전이라는 미명 하에 더욱 희생해야 했다. 일단 운동이 정권을 잡자, 사회(주의) 운동의 일용식이었던 전투적, 생디칼리즘적 전술들은 ‘반혁명적’인 것으로 간주되었고, 매우 위축되었으며, 보통 탄압을 받았다.

1960년대의 세계 상황에 대한 분석은 이 두 종류의 운동이 전보다 더욱 닮아 있음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그들은 사실상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2단계 전략 중 1단계를 완성했다. 공산당들은 엘베강[역자 주-체코와 독일을 거쳐 북류하여 북해로 흐르는 강]에서 압록강(Yalu)까지 세계의 1/3을 지배했다: 민족해방운동들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정권을 잡았고, 인민주의 운동은 라틴아메리카에서 정권을 잡았으며, 사회민주주의 운동들 또는 그들의 사촌들이 유럽전역에서 정권을 잡았거나, 최소한 대안적인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세계를 변혁하지는 않았다.


1968과 그 이후

1968년 세계혁명의 중요한 특징들의 기초가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요소들의 조합이다. 혁명주의자들은 다양한 국지적 요구들을 가졌지만, 거의 모든 곳에서 두 가지 근본적인 논거를 공유했다. 우선, 그들은 미국의 헤게모니와 소비에트의 미국 헤게모니에 대한 공모 양자를 모두 반대했다. 둘째로, 그들은 구 좌파를 ‘해법의 일부가 아니라 문제의 일부’가 되었다고 비난했다. 이 두 번째 공통적 특징은 권력을 잡은 전통적인 반체제 운동 세력들이 실제로 수행한 것에 대한 대중적 지지자들의 환상이 깨지면서 나타났다. 그들이 운영했던 국가들은 확실히 수많은 개혁들을 보여 주었다 ― 대개 교육과 의료 시설의 증가와 고용의 보장이 있었다. 하지만 상당한 불평등이 남아 있었다. 소외된 임노동은 사라지지 않았다; 반대로, 임노동은 노동활동의 비율에서 오히려 증가되었다. 정부 차원에서도, 작업장 차원에서도 실질적인 민주적 참여는 거의 혹은 전혀 확장되지 않았다; 종종 그 반대였다. 국제적인 차원에서, 이 나라들은 세계-체계에서 이전에 해 왔던 것에 비해 매우 작은 역할만을 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므로 쿠바는 혁명 이전에 설탕 수출 국가였으며, 그 이후에도 최소한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될 때까지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간략히 말해서, 충분하게 변하지 않았다. 그 불평들은 쉽게 달라질 수도 있었을 테지만, 그것들은 실제가 되었고, 대개는 광범위한 것이었다. 권력을 잡은 운동들은 역사가 그들의 편에 있다는 이유로 인민들에게 참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들의 인내는 닳아서 엷어져 갔다.
세계 인민들이 권력을 잡은 고전적 반체제 운동들의 성과로부터 끌어낸 결론은 부정적이었다. 그들은 이런 정당들이 영광스러운 미래나 좀더 평등한 세상을 가져올 것이라 믿는 것을 포기했고, 더 이상 그들에게 합법성을 부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운동들에 대한 확신을 잃어감에 따라 그들은 변혁의 도구로써 국가라는 믿음을 철회했다. 이것은 광범위한 부문의 인민들이 선거에서 더 이상 그런 정당들에게 투표하지 않을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데올로기나 기대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차악을 위한 방어적인 투표였다.

마오주의에서 포르투 알레그레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8년 이래로 좀 더 나은 종류의 반체제 운동―세상을 실제로 좀 더 민주적이고 평등한 세계로 이끌 운동―을 위한 오랜 탐색이 있어 왔다. 여기에는 4가지 종류의 시도가 있었고, 그 중 몇몇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첫 번째는 다양한 마오주의의 개화였다. 1960년대로부터 1970년대의 중반 정도까지 마오주의자임을 주장하는 각기 다르고 서로 경쟁하는 많은 수의 운동들이 출현했는데, 그것들은 보통 소규모였지만 때때로 인상적일 정도로 대규모인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마오주의자임을 주장함을 통해서 그들이 중국의 문화혁명의 사례로부터 어느 정도 영감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고자 했다. 본질적으로 그들은 구좌파가 혁명의 순수한 교리를 설파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실패했고, 그들은 지금 그 교리를 제기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운동들은 모두 두 가지 이유로 어이없이 끝나버렸다. 첫째, 그들은 무엇이 순수한 교리인가에 관해 내부에서 심각하게 싸웠고, 그래서 종파적인 그룹으로 고립되어 급속하게 왜소해졌다; 혹은 인도에서처럼 그들이 매우 거대했다면, 그들은 구좌파 운동의 새로운 판형으로 진화하였다. 둘째, 좀 더 근본적으로는 마오쩌둥의 죽음과 함께 중국에서 마오주의가 붕괴했고, 그들의 영감의 원천은 사라졌다. 오늘날, 그런 운동들 중 중요한 것은 남지 않았다.

두 번째로 반체계적 지위를 주장한 보다 오래 지속된 변종은 새로운 사회운동들이었다―녹색당과 환경주의자들, 페미니스트들, 미국의 흑인들이나 프랑스의 Beurs[역자 주-프랑스로 이민 온, 특히 북아프리카에서 이민 온 부모들에게서 태어난 2세들] 같은 인종적이거나 민족적인 ‘소수자들’의 캠페인들이었다. 이 운동들은 자신들이 오랜 역사를 가졌다고 주장했지만, 사실 그들은 1970년대에 처음으로 두각을 나타냈거나, 혹은 그때서야 갱신되고 좀더 전투적인 형태로 다시 출현했다. 그들은 세계-체계의 다른 어떤 지역에서보다 범-유럽 세계에서 강했다. 그들의 공통적인 특성은 무엇보다 구좌파의 2단계 전략과 내부적인 위계 및 우선 순위―여성, ‘소수자들’ 그리고 환경에 대한 요구는 2차적인 것이고, ‘혁명 이후에’ 제기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대한 강력한 거부에 있다. 다음으로 그들은 국가와 국가-지향적 행동에 대해 매우 의심스러워했다.

1980년대에 이르러 이 모든 새로운 운동들은 독일 녹색당이 근본주의자(the fundis)와 현실주의자(the realos)라 부르는 것으로 내부에서 분열되었다. 결국 이것은 20세기 초반에 있었던 ‘혁명주의자 대 개량주의자’ 논쟁의 재현과 같은 것이었다. 논쟁의 결과, 근본주의자들이 모든 경우에서 완전히 실패하여 어느 정도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승리한 현실주의자들은 점점 일종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외양을 띠었는데, 비록 그들이 생태주의, 성차별주의(sexism), 인종주의 혹은 이 세 가지 모두에 대해 좀 더 화려한 수사를 가지긴 했지만,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고전적인 변종과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오늘날, 어떤 나라들에서는 이 운동이 계속해서 중요한 것으로 남아 있지만, 구 좌파들의 운동과 마찬가지로 거의 반체제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특히 구 좌파들이 1968년으로부터 도출해낸 하나의 교훈은 그들도 생태, 성(gender), 성적 선호, 인종주의 등에 대한 관심을 자신들의 강령적 진술 속에 통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반체제적 지위를 주장했던 세 번째 유형은 인권 조직들이었다. 물론 국제 엠네스티와 같은 몇몇의 조직들은 1968년 이전부터 존재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 조직들은 1980년대가 되어서야 주요한 정치적 힘이 되었는데, 그것은 중앙아메리카 문제를 처리에 있어서 인권이란 술어법을 채택한 카터 대통령과 동유럽과 중앙유럽의 공산주의 국가들에 관한 1975년의 헬싱키 협정 조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가 당시 시민의 권리를 표방하고 있었던 수많은 조직들에게 합법성을 확증해 주었다. 1990년대에 미디어는 상당한 공론을 일으킨 인종 청소, 그 중에서도 르완다와 발칸에서 벌어진 인종 청소에 주목했다.

인권 조직들은 ‘시민사회’의 이름으로 발언한다고 주장했다. 그 용어 자체가 전략을 드러내준다: 시민사회는 정의상 국가가 아니다. 그 개념은 19세기에 법적인 국민(le pays legal)과 실제적인 국민(le pays reel)―권력에 있는 사람들과 인민들의 정서를 대표하는 사람들― 사이를 구분했던 것에서 연원하는데, 그러한 구분은 질문을 제기한다: 어떻게 시민사회가 그 자신과 국가 사이의 간극을 메꿀 수 있는가? 어떻게 시민사회가 국가를 통제하거나 국가가 시민사회의 가치를 반영하게 만들 수 있는가? 그 구분은 ‘시민사회’는 대체로 계몽된 인민들로 구성된 반면에, 국가는 소수의 특권 집단들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고 치부하는 듯이 보인다.

이 조직들은 몇몇 국가들―아마 그게 전부였을 것이다―이 그들의 정책 방향을 인권지향적인 것으로 바꾸도록 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들은 국가의 반대자보다는 국가의 보조자처럼 되었고,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반체제적이지도 않은 듯이 보였다. 그들은 대개 중심부 국가들에 있으면서 주변부 국가들에서 자신의 정책들을 실행하려고 노력하는 NGO가 되었다. 주변부 국가들에서 그들은 종종 자신들의 국가를 비판하는 세력보다는 그 국가들의 대리자로 간주되었다. 이 조직들은 거의 대규모 지지자들을 동원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중심부에 있는 그들의 엘리트 활동가들이 가진 권력과 지위를 이용하는 능력에 의존했다.

네 번째이자 가장 최근의 변종은 소위 반-세계화 운동―이 운동들 스스로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그들의 적들에 의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미디어에서 반-세계화라는 용어는 1999년 시애틀에서 열린 WTO 각료회의에 대한 항의시위를 보도할 때에서야 쓰이기 시작했다. 물론 상품과 자본의 자유로운 거래에 대한 신자유주의적인 옹호를 나타내는 수사로서 ‘세계화’는 1990년대 동안 강력한 힘이 되어 왔다. 미디어의 초점은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 있었으며, 세계화의 제도적 실행은 워싱턴 컨센서스와 IMF의 정책, WTO의 강화를 통해 이루어졌다. 시애틀은 WTO의 역할을 확장하려는 결정적인 순간이었으며, 실제로 회의의 진행을 중단시켰던 그 중요한 항의시위들은 많은 이들의 놀라움을 자아냈다. 그 시위대에는 구 좌파, 노동조합, 새로운 운동들, 아나키스트 그룹 출신의 대규모 북아메리카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실제, AFL-CIO가 그렇게 전투적인 행동 속에서 환경주의자들과 같은 편에 있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바로 그 사실 자체가 새로운 무엇이었으며, 특히 미국에게 있어서 그러했다.

시애틀을 따라서, 신자유주의적 의제에 의해 추동된 정부간 회의들에 맞서 세계 곳곳에서 계속된 일련의 시위들은 세계사회포럼의 구성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그 첫 회의는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열렸다; 2002년의 두 번째 포럼에는 천 개 이상의 조직들이 파견한 5만 명 이상의 대표단이 모였다. 그 이후로 2003년 세계사회포럼을 준비하기 위한 수많은 지역 회의가 있었다.

반체제 운동의 역할을 자임하는 이 새로운 주장자들의 특징은 이전의 시도가 보인 특징들과는 꽤 다르다. 우선 세계사회포럼은 이전의 모든 유형들―구 좌파, 새로운 운동들, 인권 조직체들 그리고 쉽게 범주를 나눌 수 없는 여타의 운동들― 을 결합하고자 하며, 지방적, 지역적, 민족적, 초민족적 형태로 조직된 집단들을 포함하고 있다. 참여의 기반은 공통의 목적―신자유주의의 결과로 나타난 사회적 재난들에 맞서는 투쟁―과 서로의 즉각적인 우선 과제들에 대한 공통의 존중이다. 중요한 것은 세계사회포럼이 남과 북의 운동을 하나의 단일한 틀 속에 결합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아직까지 유일한 슬로건은 ‘또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이다. 좀 더 이상한 것은 세계사회포럼은 총괄적인 상부 구조를 만들지 않고, 이러한 활동을 하려한다는 점이다. 지금 그것은 다양한 운동과 지리적 위치를 대표하는 50개의 강력한 단위들로 구성된 하나의 국제조정위원회(international coordinating committee)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세계사회포럼은 개량주의자들의 얼굴이라고 구 좌파들이 불평을 해대지만, 지금까지 그 불평들은 매우 작은 것이었다. 불평하는 사람들은 문제를 제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들은 아직 비판하지 않았다. 물론 이 수준의 성공이 이데올로기에 있어서 그리고 제도적 실천에 있어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거부에 기반을 두고있다는 점은 널리 인정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세계사회포럼이 좀 더 명확하고 좀 더 긍정적인 강령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 핵심적인가를 두고 논쟁을 벌여왔다. 세계사회포럼이 그렇게 할 수 있는지 그리고 통일성의 수준과 총괄적인 (필연적으로 위계적인) 구조의 부재를 여전히 유지할 수 있는지는 향후 10년간 중요한 문제이다.

이행의 시기

내가 계속해서 주장했던 것처럼 만약 세계-체계가 구조적 위기에 처해있고 우리가 ‘이행의 시대’―분기와 혼돈의 시기―에 진입했다면, 반체제운동들이 직면한 문제들은 19세기와 20세기 대부분의 운동들이 직면했던 문제와는 다른 형태로 제기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2단계 전략이나 국가-지향 전략은 부적합하게 되었는데, 이는 이전에 장기적이거나 즉각적인 일련의 정치적 목표들을 주창했던 반체제적 운동들의 후손들 대부분이 겪는 곤란함을 설명해준다. 거의 남아있지 않은 후손들은 지지자이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회의주의에 직면하고 있다; 더 나쁘게는 무관심에 직면하고 있다.

그런 이행의 시기는 반체제 전략의 관념을 지배하는 두 가지 특성을 가진다. 첫째, 권력에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현존하는 체제를 유지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을 것이다(마치 그것이 운이 다해 스스로 파괴될 것처럼); 오히려, 그들은 그 이행이 현재 체제의 가장 나쁜 특징들―계급, 특권, 불평등―을 복제할 새로운 체계의 구성으로 귀결될 것을 확실히 보장하려고 애쓴다. 그들이 아직은 현존하는 구조들의 해체를 반영하는 언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가정에 기반하여 전략을 실행하고 있다. 물론, 소위 중도-우파적인 ‘전통주의자들’과 극우의 군사주의적인 매파들 사이의 분쟁을 통해 증명되고 있는 것처럼 그들의 진영은 통합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변하지 않을 변화, 즉 현존 체계만큼이나 나쁜 ―혹은 더 나쁜― 새로운 체계를 보장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다. 두 번째 근본적인 특징은 체제의 이행 시기는 깊은 불확실성의 시기 중 하나인데, 그 속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역사는 누구의 편도 아니다. 우리 모두는 미래에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이 미래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는 알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다. 세계사회포럼의 기본적인 틀은 이러한 딜레마를 반영하는 것이고, 그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전략적 고려들

그러므로 이행의 시기를 위한 전략들은 네 가지 요소를 포함해야만 한다―네 가지 모두 행하기보다 말하는 것이 쉽다. 첫 번째는 이행과 우리가 바라는 결과에 대한 지속적이고 개방적인 토론의 과정이다. 이것은 결코 쉽지 않았는데, 역사적 반체제 운동들은 이것에 결코 능숙하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날 분위기는 예전보다는 훨씬 좋고, 그 임무는 시급하고, 없어서는 안될 것으로 남아 있다―이러한 국면에서 지식인들의 역할이 강조된다. 세계사회포럼의 구조는 스스로를 이러한 논쟁을 고무하는데 제공해왔다; 우리는 이러한 개방성이 유지될 수 있는가를 알아야만 한다.

두 번째 요소는 자명해야 한다: 반체제 운동은 선거 행동을 포함하여 단기적인 방어행동을 무시할 수 없다. 세계의 인민들은 현재에 살고 있으며, 그들의 즉각적인 요구는 처리되어야만 한다. 그 요구들을 무시하는 어떠한 운동도 그들의 장기적 성공에 필수적인 광범위하고 수동적인 지지자들을 잃게 될 것이다. 하지만 방어행동의 동기와 정당화는 체제의 실패를 치유하는 것이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그 부정적인 영향이 단기적으로 더 나빠지는 것을 막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심리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매우 다른 것이다.

세 번째 요소는 옳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잠정적인 중-범위의 목표의 수립이어야 한다. 나는 가장 유용한―실질적으로, 정치적으로, 심리적으로― 것 중 하나는 선택적이지만 보다 확장된 탈상품화로 나아가려는 시도라고 제안하곤 했다. 오늘날 우리는 이전에는 거의 또는 결코 사적인 판매를 위해 전유되지 않았던 것들―인간의 육체, 물, 병원 등―을 상품화하려는 격렬한 신자유주의의 공세 하에 있다. 우리는 이것을 반대해야할 뿐만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이동시켜야 한다. 산업, 특히 부족한 산업(failing industry)들은 탈상품화되어야 한다. 이것은 그런 산업들이 ‘국유화’―대부분의 경우, 단지 상품화의 다른 판본일 뿐인―되어야 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시장에서 작동하지만 그 목적이 이윤보다는 실행과 생존인 구조를 창조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학과 병원의 역사―모든 것은 아니었지만, 최선이었던―로부터 알고 있다시피, 이것은 가능하다. 그러한 논리가 탈지역화의 위협을 받고있는 철강 산업에서는 왜 불가능한가?

마지막으로, 우리는 우리의 장기적인 강조점들의 실제적인 의미를 발전시킬 필요가 있는데, 나는 그 의미를 상대적으로 민주적이고 상대적으로 평등주의적인 세계가 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나는 ‘상대적으로’라고 말했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간극이 있을 것이다―하지만 그 간극이 넓고, 깊이 새겨져 있고, 대물림되어야만 한다는 이유는 없다. 이것은 사회주의라고 혹은 공산주의라고 불리던 것일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고, 어쩌면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논쟁의 주제를 상기시킨다. 우리는 더 좋은 (완벽한 것이 아니라) 사회는 어떤 모습일 것인가를 추측하는 것을 멈출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논쟁하고, 그것의 윤곽을 그리고,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한 대안적인 구조를 실험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체계의 이행기에 놓인 혼란스러운 세계를 위한 우리의 프로그램에서 앞선 세 부분을 실행하는 것과 동시에 진행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만약 이 강령이 불충분하다면, 아마도 불충분할 것인데, 그러면 이 불충분함은 그 강령의 최우선에 놓인 논쟁의 일부가 되어야 할 것이다. PS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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