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3.10.39호
첨부파일
0310철학에세이_최원.hwp

헤겔의 법과 안티고네의 법

최원 | 회원, 미국 뉴스쿨 대학 철학 박사과정
헤겔은 정신(Spirit)에 도달하기 이전, 의식이 통과하게 되는 그 모든 형상들은 정신 그 자신의 추상적인 자기-분석을 구성할 뿐이라고 말한다. ‘실제’ 역사는 정신과 함께 시작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헤겔은 정신의 그 긴 여행의 출발점에 ‘허구’의 분석, 즉 소포클레스의 문학작품 『안티고네』의 분석을 위치시킨다. 따라서, 앞서의 진술 속에서 ‘실제’(“실제 역사...”)라는 수식어가 의미하는 바는 통상적인 이해를 벗어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역사는 의식이나 자아(the Self)로부터 독립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객관적’인 역사를 지시하지 않는다. 반대로 정신은 정확히 자아와 세계가 더 이상 그렇게 대립된 것으로 다루어지지 않을 때 출현한다. 정신은 이 같은 반-정립의 극복이다. 그리하여 헤겔이 문학작품을 정신의 출발점에 위치시켰다는 것이 정당화된다. 왜냐하면 세계가 의식에 맞서있는 관찰해야할 사물이나 대상의 단순한 집합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자아의 경험된 세계(lived world)로 나타나게 되는 것은 정확히 문학작품 속에서이기 때문이다. 정신은 개별적 자아들의 활동의 결과로서 생산되는 동시에 그 활동에 든든한 기반을 제공해주는 보편적인 실체로 존재한다. 바꿔 말해서, 정신은 개인들의 활동에 선행하거나 그로부터 분리되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들의 활동에 내재적인 정신은 한 개인의 삶이 그 안에서 다른 모든 개인들의 삶과 조화되어 있는, 상호적 연관의 체계로서 정의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정신은 ‘공동체’다.
그러나 정신은 그것이 개인들의 행위들로 끊임없이 분절되는 한에서만 살아 있는 존재가 된다. 따라서 정신은 실체와 그 실체에 대한 의식으로 나뉜다. 혹은 차라리 개인들의 행위가 정신을 보편적 본질과 개별화된 현실들로 나눈다. 이 때 자기-의식은 그 중간 항으로 작동하면서 양자의 암묵적인 통일성을 명백한 것으로 만든다. 그리하여 자기-의식은 대립물의 상호이행의 장소를 구성하며, 그 속에서 개별화된 현실들은 보편적인 윤리적 의미를 확보하게 되는 반면, 보편적 본질 혹은 실체는 지상으로 내려와 개인들의 행위 속에 구체적으로 실현된다. 그러나 바로 이 과정을 통해서 실체 자체가 인간의 법과 신법에 의해 각각 지배되는 윤리적 영역들로 나뉘게 된다. 자기-의식도 이를 따라 분할되며, 각각 하나의 영역에 속하게 된다. 이렇게 단 하나의 영역에만 배타적으로 소속된 자기-의식은 일종의 기만적인 지식을 획득하게 되는데, 그 지식이 기만적인 이유는 그것이 다른 법에 대한 무지에 기반을 둔 반쪽 짜리 지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두 윤리적 영역 및 그에 속한 특수한 자기-의식들은 마침내 서로 충돌하게 되며, 그에 따른 공멸을 경험한다. 사실상 이것이 기본적으로 비극 『안티고네』에서 발생하는 일이다. 결국, 헤겔이 관심을 두고 있는 비극은 물론 『오이디푸스 왕』에서처럼 단 하나의 법만을 알고 있는(의식하고 있는) 무고한 개인이 또 다른 법의 초월적인 힘(무의식)에 의해 불행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상이한 소속들 간의 경합이 발발하게 되는, ‘내란’으로서의 비극인 것이다.
『안티고네』를 분석하면서, 헤겔은 인간의 법을 보편적인 국법으로 규정하고 그 담지자를 정부에서 찾는다. 그것은 자신을 의식하고 있는 공공연한 현실이라는 형식으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정부의 권위는 모든 시민에 의해 보편적이고 공적인 방식으로 인정된다. 반면 이에 대립되어 있는 신법이 갖는 현실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에 의해 의식적으로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단순하고 즉자적인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구성된다. 결국 신법은 국가의 공적 질서 하에 은폐되어 있는 자연적이고 무의식적인 법, 즉 하계의 법이며 그 담지자는 바로 가족이다.
하지만 가족은 자연적이면서도 동시에 윤리적인 공동체이기 때문에 그 자신의 고유한 보편적 기능을 가져야만 한다. 가족이 수행하는 기능 가운데 ‘사랑’이나 ‘경제’는 감각과 욕구의 영역에 관련되므로, 그 자체로는 보편적인 윤리의 기능이라 규정될 수 없다. 또한 ‘교육’을 포함하여 가족 내 개인들에게 제공되는 다양한 서비스들도 마찬가지인데,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그 효과가 우연에 종속되어 있으며 단지 그 개인에게 제한된 효과만을 발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누구나 자신의 자식을 잘 키우고자 결심하지만 아무도 그 일에 완전히 성공할 수는 없는 법이다). 가족의 윤리적 행위가 개인을 자신의 개별성과 우연성 그 자체로부터 해방된 하나의 보편적 전체로서 상대해야 하는 한에 있어서 그것은 더 이상 살아있는 개인에 관한 것일 수 없다. 그것은 ‘죽은 자’에 관련된다.
그리하여 헤겔은 가족의 보편적인 윤리적 기능을 ‘장례식’에서 찾게 된다. 시체의 매장은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이 죽었을 때, 나머지 가족이 죽은 자에 대한 관계를 즉시 끊어내고 그/녀를 단순한 하나의 ‘사물’로 취급할 수 없기 때문에 행해진다. 다시 말해서, 매장은 죽은 자의 부패하는 시체를 눈앞에서 치우고, 들짐승이나 새의 먹이가 되지 않도록 보호함으로써, 죽은 자를 정신화시키는 행위이며, 그/녀의 영혼을 가족적 공동체에 귀속시키는 행위다. 매장행위를 통해 죽은 자의 이름은 윤리적 공동체로서의 가족의 계보에 영원히 새겨지게 된다.
여기서 국가와 가족의 관계는 또한 전체와 부분간의 관계이기도 하다. 국가 권력은 자신보다 열등한 권력인 가족을 자신의 지배 영역으로부터 단순히 배제하거나 제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가족이 자신의 하위권력으로 포괄되도록 허용함으로써 작동한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헤겔의 놀라운 권력 개념을 발견하는데, 그에게 있어 권력은 (이후 푸코가 말하게 될 것처럼) 언제나 다른 권력에 대해 행사되는 권력일 뿐이다. 권력은 타자의 권력을 통해서 작동하며, 타자의 권력이 자신의 내부에서, 즉 자신이 생산하는 위계질서 속에서 일정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작동한다. 단적으로 권력은 타자의 권력을 그 자신의 것으로 활용하고 그렇게 함으로써만 상위의 권력이 된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헤겔에게 있어 상위 권력의 하위 권력들에 대한 총체화 작용은 결코 전체주의적이지 않다. 이는 사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의 핵심이기도 하다. 타자와 갖게 되는 첫 번째 결투에서 자기-의식이 이끌어내는 교훈은 타자의 파괴를 통해서는 자신이 욕망하는 것(타자로부터의 ‘인정’)을 얻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삶’의 중요성이 인식되어지며, 권력은 타자의 죽음이 아닌 삶을 통해서만 형성된다는 것이 이해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헤겔의 권력개념은 이미 ‘생-권력’ 개념의 특정한 측면을 예상한다고 까지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전체로서 정부의 권력은 때때로 부분들을 단일성 속에 통합시켜야할 필요성을 느끼며 부분들의 삶이 자신의 주권적 권력에 여전히 의존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야할 필요성을 느낀다. 헤겔이 훌륭하게 주장하듯, 정부는 바로 이 목적을 위해 타국과의 전쟁을 벌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쟁(적어도 고전적인 전쟁)의 가장 흔한 원인은 사실 국가간에 형성되는 갈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내부를 가로지르는 모순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전쟁은 국가 내 부분들의 복수성을 뒤흔들어 다시 민족적 공동체로 (재)통합하려는 정부의 시도다. 따라서 전쟁은 부분들의 삶의 자립성을 침해한다. 이는 레닌이 나중에 제국주의 전쟁을 규정하는 방식과도 동일한데, 레닌에 의하면 제국주의 전쟁은 지배계급으로서의 부르주아지가 상대편 국가의 힘을 이용해 자국의 프롤레타리아트를 제압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정부의 침해행위로부터 상이한 법(『안티고네』 안에서는 인간 법과 신법으로 표상되는)에 지배되는 두 영역 사이의 잠재적인 갈등이 전면적인 것으로 드러나게 될 가능성이 생겨난다. 전쟁이 내전으로 전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두 법 사이의 모순 이외에 또 다른 모순이 있는데(그리고, 나중에 더욱 분명해지겠지만, 나는 이를 헤겔과 달리 상이한 기원들을 가진 모순들의 ‘과잉결정’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바로 신법이 지배하는 가족의 영역에서 기원하지만, 그 효과가 명백히 거기에만 한정될 수 없는 성적 노동분업의 모순이다. 헤겔에 따르면, 가족 내에 형성되는 관계는 세 가지가 있는데, 이는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그리고 형제와 자매이다. 이 가운데 헤겔이 특권화하는 것은 형제자매다. 그에게 있어, 남편과 아내가 결혼을 통해 도달하게 되는 자기-인정은 윤리적 성격을 갖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이고 자연적인 성격을 갖는 것에 불과하므로 정신 그 자체가 아닌 정신의 이미지만을 구현할 뿐이다. 그러므로 남편과 아내는 자신의 관계의 실존을 자식에게서 추구하게 되지만,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세대의 교체로 말미암아 지속성을 갖지 못하는 존재로 머문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식은 성장하여 자립을 추구하게 되며 또 다른 가족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형제자매는 남편과 아내처럼 서로를 욕망하지도 않고, 또한 부모자식지간처럼 한 편이 다른 편에 자립을 부여하면서 서로 분리되어 버리는 한시적인 관계를 형성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일종의 균형점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하여 헤겔은 “형제자매는 서로에 대해 자유로운 개인성을 갖는다”(■457)고 말한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자마자, 그는 “결과적으로, 여성적인 것은 누이의 형태 안에서 윤리적인 것에 관한 최고의 직관을 갖게 된다”고 주장한다. 바로 여기가 헤겔이 성적 노동분업과 그 내부의 성적 비대칭의 문제를 도입하기 시작하는 곳이다. 혹자는 여기서 헤겔이 남성적인 것에 관해서도 유사한 진술을 하리라고 예상할지 모르나 그러한 일은 발생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누이의 의식은 가족, 비-시민의 사적 영역, 신법에 묶여 있는 반면, 오라비의 의식은 가족에 머물지 않고 국가, 시민의 공적 영역, 인간 법을 향한 이행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유로운 개인성”으로부터 결혼을 매개로 하여 성적으로 분할된 개인성/비개인성으로의 형제자매들의 이행/비이행이 발생한다.
헤겔은 이렇게 말한다. “윤리적 가족 안에서 [여성에게] 이는 이(this) 특정한 남편, 이 특정한 아이의 문제가 아니라, 단순히 일반적 남편과 일반적 아이의 문제다. 여성의 관계는 감성에 기초하지 않고 보편적인 것에 기초한다. 아내와 남편의 인륜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즉 개인으로서 아내의 윤리적 사명과 쾌락 안에서 아내의 관심은 보편적인 것에 집중되어 있으며 욕망의 특수성에 외적인 것으로 남는 반면, 남편에게서 이 두 측면은 분리되어 있다. 그는 시민으로서 보편성의 자기-의식적 권력을 소유하기 때문에, 욕망의 권리를 획득하며 동시에 그에 관한 자유를 유지한다. 아내의 이 관계에는 특수성의 섞임(admixture)이 있으므로 그녀의 인륜은 순수하지 않다 ... 아내는 자신의 배우자 안에서 이 특수한 자아로서 자신을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갖지 못한다.”(같은 곳)
그러므로 사랑은 여성에게 ‘의무’인 반면, 남성에게는 ‘권리’이다. 여성은 특수한 개인으로서의 배우자에 대해 무관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녀는 공적인 영역 내에 자신의 감성과 이해관계를 갖고 등장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사적인 영역에서조차 배우자를 통한 자기-인정을 추구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가족 내에서 자신의 역할(role), 즉 남편과 아이들에게 제공하는 자신의 보편적 기능 자체에 동화되어야만 한다. 반대로 남성은 공적인 영역에서 자신의 특수한 자아를 ‘기각’함으로써 성적으로 중립적인 인간 종 전체의 보편성을 대표하게 되며, 이러한 “자기희생”의 대가로 밤에는 자신의 자연적 즉자성으로 돌아갈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게 된다. 가족 영역 내에서 그는 특수한 이해관계를 갖는 개인으로 등장할 수 있으므로 자신의 욕망과 쾌락의 대상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갖게 된다.
따라서 누이에게 오라비는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 나타난다. 아동기와 성년기 사이의 짧은 기간 동안 그녀는 오라비와의 관계 속에서만 유일하게 “자유로운 개인성”을 소유하도록 허락되기 때문이다(물론 그와 같은 자유로운 개인성은 여전히 ‘자연적 욕망’을 배제하는 것이기에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동일한 규칙이 오라비 자신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가족의 틀 내에 머무를 필요가 없으며 그 경계를 넘어 시민의 영역으로 들어서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욕망과 향유의 권리를 전혀 상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극 『안티고네』는 바로 이러한 모순들의 과잉결정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 안티고네는 단지 자신의 두 오빠의 누이일 뿐 아니라, 동시에 (그녀의 삼촌이기도 하며 테베의 국왕이기도 한) 크레온의 아들 하이몬의 약혼녀로 등장한다. 바꿔 말해서, 그녀는 절대적인 방식으로 하나의 가족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가족에서 다른 가족으로의 이행, 혹은 차라리 가족 그 자체를 벗어날 수 없는 비(非)이행의 과정 안에 있는 존재다. 그리고 크레온이 에테오클레스의 죽음을 기리는 성대한 장례식을 명하면서 폴리네이케스의 주검을 매장하지 못하도록 금하는 법령을 선포하는 것도 바로 이 이행/비이행의 와중이라는 점에 주목하자. 물론 이 같은 크레온의 법령은 일차적으로 국가의 입장을 대표한다. 에테오클레스는 테베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지만, 폴리네이케스는 그 전쟁에서 적국의 편을 든 자이기 때문이다. 반면 크레온의 법령에 불복하는 안티고네의 행위가 가족의 입장을 대표하는 것도 자연스러워 보인다.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는 모두 그녀의 오라비들이고, 그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을 매장한다는 것은 불공평할 뿐 아니라 가족의 인륜을 위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표면적 구조 아래 그러나 또 다른 구조가 발견된다. 안티고네는 지금 바로 결혼을 통해 크레온 가족의 구성원이 되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단지 에테오클레스만을 장례 지낼 수 있다는 크레온의 법령은 그 자체로 남성적 가족의 계보를 위해 여성적 가족의 계보가 희생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결국 죽은 자의 장례식은 헤겔 그 자신의 규정을 따른다고 할지라도 국가의 관심사가 아닌 가족의 관심사일 뿐이다. 만일 크레온이 순수하게 국가의 입장을 대표한다면, 그는 죽은 자의 장례식에 관하여 그 어떤 개입도 할 수 없어야 마땅하다. 전쟁은 이미 끝났으며 게다가 테베의 승리로 끝났다. 그렇다면 왜 죽은 자의 장례식이 크레온에게 그토록 중요하단 말인가? 따라서 크레온의 법령은 그 자신의 가족적 특수성의 “돌출-행위”(acting-out)에 불과하다. 헤겔 또한 이를 희미하게 인지한다. “균형 잡힌 전체로부터 떨어져 나간 대자적 존재, 즉 독립적 계급들과 개인들의 요소를 보편성 안에서 다시 모아내는 것은 인간 법의 정의(Justice)이다 ... 그러나 똑같이 정의는 해를 입은 개인의 단순한 정신이기도 하다. 정의는 해를 입은 자와 저 멀리 이편에 있는 실체로 나뉘지 않는다. 그 개인 자신이 하계의 권력이며 복수를 가하려는 그의 분노다. 왜냐하면 그의 개인성과 피가 여전히 그의 가족 내에 살아남아 있기 때문이다.”(■462)
헤겔은 여기서 단지 크레온이 그의 개인적 분노로 인해 복수를 가하려 한다고 말하지 않고, 그의 분노에 찬 개인성 자체가 그의 가족, 그의 혈육관계에 뿌리내리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헤겔은 이러한 문제를 제대로 가공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공동체를 대표하는 의식으로 하여금 사물(맹목적인 복수심에 찬 자연적 존재)의 수준으로 타락하게 만드는 것은 “단순한 존재의 추상적 보편성”으로서의 자연이라고 말함으로써 쟁점을 흐려버린다. 하지만 나의 관점에서 문제는 자연의 추상적 보편성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 법을 대표하며 일하는 남성에게 복귀한 그 자신의 억압되었던 특수성이 그의 보편성에 ‘섞여’ 드는 것이다. 이제 남성의 시민적 보편성은 그 자신의 피로 물들게 되고, 그의 보편성과 특수성이 더 이상 헤겔이 주장하듯 단순하게 분리될 수만은 없게 된다. 남성의 보편성 또한 여성의 보편성만큼이나 순수하지 못하며, 남성의 국가적 보편성을 향한 이행은 여성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또 하나의 비-이행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날 뿐인 셈이다. 사실 이렇게 봤을 때, 애초에 성적으로 중립적인 ‘인간’ 법의 보편성을 지향했던 남성적 의지 자체가 그의 성별화 된 유한 존재를 초월하려는 시도였음이 분명해진다. 그러나 성별화 된 존재의 유한성이야말로 ‘삶’의 본질을 이루는 것(뤼스 이리가레는 성별이 없는 것은 단지 ‘기계’일 뿐이라고 말한 바 있다)이라면, 그 유한성에 대한 극복은 삶 그 자체의 극복이며, ‘죽음’을 향한 도약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그 어떤 진정한 개인의 행위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 무시무시한 운명의 운동이 전개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윤리적 질서에 내재한 모든 모순들이 현실적 자아의 행위에 의해 한데 모아지고 응축되어야만 한다. 헤겔은■그리고 나는 이 점에서만큼은 그가 옳다고 믿는다■이러한 운명적 운동의 기반은 실체로서의 인륜이지만, 여기서 능동적인 것은 오히려 자기-의식이라고 주장한다. 즉 정신은 이미 죽었으며, 죽은 사물에 지나지 않는다. 맑스적인 방식으로 유비하자면, 그것은 축적된 죽은 노동에 불과하다. 따라서 자신의 살아있는 노동을 통해 그 죽은 사물로서의 정신에 생명을 주는 것은 그것의 담지자들이지 정신 그 자체가 아니다. 물론 정신의 담지자들은, 의식이 항상 그렇게 하듯, 이러한 정신과 자신의 관계를 전도시켜 정신이 그/녀들을 호명하고 있다고 믿는다(‘신’이 나를 부른다, ‘조국’이 나를 부른다). 사실은 그/녀들 자신이 정신을 호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따라서 자기-의식들의 인식(그가 ‘나를’ 부른다)은 그 자체로는 ‘오인’일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오인 이전에 정신은 자신의 발로 설 수 없으며, 오직 ‘주체’(소문자 주체)의 오인과 함께 그것은 살아있는 명령으로 그 오인의 자리에서 구성된다(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에 관한 그의 논의에서 헤겔이 아닌 스피노자적 모델을 도입했지만, 적어도 이 점에 있어서는 헤겔과 동의할 수 있다고 보이는데, 왜냐하면 그 또한 이데올로기가 어떤 실체로서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호명의 ‘사건’ 안에서만 존재하게 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정신은 인간 법과 신법으로 나뉘어 있다. 그리고 헤겔은 두 개의 성이 이러한 법의 영역에 각각 배치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하나의 법에 소속된 자기-의식은 타자를 그 자신의 고유한 법과 권리를 지닌 존재로 보지 않고, 현실의 장벽 혹은 기껏해야 우연적이고 고립된 개인의 자의적인 의지에 불과한 것으로 보게 된다. 이로부터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의 변증법이 시작된다. 알려진 것은 윤리적 자기-의식이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는 법이며, 반면 알려지지 않은 것은 그에 맞선 객관적 세계로 등장한다. 물론 세계는 상이한 법칙과 진실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이 추구하는 법의 정당성만을 믿는 완고한 자기-의식은 자신의 행위 속에서 오직 그 법의 실현만을 보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비타협적인 윤리적 자기-의식은 또한 자기 자신의 반-정립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의 법을 실현하려고 현실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순간, 순수한 자기확신, 앎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윤리적 자기-의식은 법의 자명성과 그에 맞선 무의식적 현실로 스스로 쪼개지며, 현실을 지배하는 또 다른 법의 필연성에 의해 마침내 뒷덜미가 잡히고 만다. 예기치 못했던 결과가 뒤따른다. 윤리적 의식이 타자의 법을 어기고 ‘범죄’를 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기치 못한 결과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행위라는 개념 그 자체에 장착된 필연적 결과이다. 왜냐하면 모든 행위는 항상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의 통일성 속에서만 수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윤리적 자기-의식은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할 수 없다. 결백함이란 “단지 돌멩이의 존재와도 같은, 비-행위”(■468)에 불과하다고 헤겔은 말한다.
이러한 막다른 골목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윤리적 자기-의식은 자신의 행위의 ‘범죄성’을 인정하고 사태에 대한 그 모든 책임을 져야만 한다. 심지어 그것이 자신의 죽음을 의미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이것이 바로 안티고네가 행하는 것이다. 여동생 이스메네에게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네가 선택한 대로 있거라. 그러나 나는 폴리네이케스 오빠를 묻을 것이다. 그러다 죽는다 해도 좋지. 나는 오빠가 나를 사랑했듯 그를 사랑하며 오빠 곁에 누우리라. 나는 범죄자가 될 것이다■그러나 종교적 범죄자가 될 것이다.” 이러한 그녀의 발언은 자신의 행위가 가져올 결과를 생각지 않고 단순히 자신의 목적만을 달성하려 듦으로써, 이후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할 수 있게 되는 맹목적 자기-의식과 그녀를 결정적으로 구별해준다. 이미 알려지지 않은 것, 즉 또 다른 법의 존재를 알고도 여전히 자신의 생각을 실천에 옮기는 그녀의 자기-의식은 더 이상 무고함을 주장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그녀의 행위는 단순한 범죄가 아니라, 인간 법의 보편성 그 자체를 넘어서는 신성한 봉기의 행위이며 내란의 시작을 알리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헤겔 또한 이러한 안티고네의 행위의 급진성을 말한다. “안티고네처럼 ... 만일 사전에 자신이 대항하는 법과 권력의 존재를 알았다면, 그 윤리적 의식은 더욱 완전하며, 더욱 용서할 수 없는 것이 된다 ... 윤리적 의식은 반드시 대립물을 자신의 현실로 인지해야하며 자신의 죄를 인지해야만 한다 ... 이러한 인지와 함께 더 이상 윤리적 목적과 현실(actuality) 간의 갈등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470-1) 도덕성에 관한 장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헤겔은 ‘위선’의 아포리아에 동일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행위하는 의식(이는 또한 ‘악한 의식’이기도 하다)에게 유일한 탈출구는 자신의 악함을 시인하는 것이다. “악이 자신의 악을 시인하게 될 것이라는 점은 맞다. 그러나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악은 자신을 폐기하고 위선이길 멈추며 그렇게 자신의 가면을 벗어 던질 것이다. 사실 악은 자신이 기존의 보편에 반대하여 자기 자신의 고유한 내적 법칙과 양심에 따라 행위한다는 것을 단언함으로써 자신의 악함을 시인할 것이다.”(■662)
물론 안티고네는 자신의 행위로 말미암아 법 앞에 불려올 것이지만, 그녀는 동시에 하계의 법, 신법의 존재를 인간 법 및 그것의 담지자로서의 크레온에게 폭로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헤겔은 행위하는 의식과 심판하는 의식의 관계를 논하면서 전자가 자신을 개별성으로부터 보편성으로 상승시키는 것은 바로 언어의 효과를 통해서라고 설명한다(■656). 사실 헤겔은 종종 ‘얼굴표정’과 같은 관상학적 표현들과 언어를 구별하고 후자를 특권화시킨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로고스중심주의’라고 섣불리 비판해서는 안될 것이다(적어도 이는 긴 토론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그의 관심은 언어의 교통적이거나 기술적인 측면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의 수행적 측면(발화와 선언)에 가있기 때문이다. 말하기(speech)는 단적으로 행위다. 언어는 발화 행위이며, 이를 통해 자아는 자신을 상승시켜 공공연한 어떤 것으로 전시하고 만인에게 자신의 존재를 폭로한다. 그것은 자신의 도덕적 진실성과 정당함에 대한 ‘약속’이다. 따라서 그것은 또한 타자들이 행위하는 양심의 내적 법칙을 ‘인정’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안티고네는 크레온에게 자신이 그의 법령을 알고도 오빠를 묻었다고 말하면서, 진정으로 보편적인 것은 그녀가 따르는 신법이라고 선언한다. “그 [매장 금지의] 명령을 선포한 자는 제우스가 아닙니다. 또 저 하계에 사는 분들과 함께 하는 정의(Justice)도 그 같은 법을 인류를 위한 법으로 반포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당신의 명령이, 글로 쓰여지진 않았으나 영원한 신의 법령들을 어기면서 누군가를 어느 날 죽게 할 만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신의 법령들은 어제오늘의 것이 아니며 영원히 살아있는 것이고 누구도 그것들이 언제 생겨났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것들이 법입니다. 그 누구의 위협 속에서도 내가 어겨 신으로부터 그 벌을 받길 원치 않는 그런 법 말입니다.”
물론 여전히 안티고네는 처벌을 받는다. 그러나 심판하는 의식 크레온에게도 예기치 않았던 결과들이 뒤따른다. 왜 행위하는 의식뿐 아니라 심판하는 의식에게도 참담한 결과들이 닥치는가? 그것은 심판하는 의식이 자신의 판단을 행위로 옮기는 한에 있어서, 즉 자신의 판단을 처벌로 실현하는 한에 있어서 자기 자신이 순수한 판단으로서의 상태를 유지할 수 없으며 타자의 법에 지배되는 현실 속으로 어쩔 수 없이 발을 들여놓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행위하는 의식(특수성)으로 전도된 심판하는 의식은 다시 의식과 무의식으로 분할되며,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의 변증법이 거기에서 시작된다. 크레온은 자신의 아들 하이몬이 약혼녀 안티고네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그녀가 생매장된 동굴 앞에서 목숨을 끊을 지 알지 못한 채, 또 하이몬을 따라 자신의 아내 에우류디케가 가슴에 비수를 꽂고 죽어갈지 알지 못한 채, 안티고네를 처벌한다. 이것이 바로 국가 정신이 그 뿌리를 두고 있는 하계(가족)의 권력이다. 지하의 권력은 적대감에 가득 차 지상으로 올라와 인간 법에 기반한 공동체를 파괴해 버린다.
보편성으로서의 심판하는 의식이 특수성으로서의 행위하는 의식으로 전도되는 이러한 과정을 헤겔은 다시 성적 분할의 측면에서 잡아낸다. 인간 법은 그것의 일반적 활동 속에서 공동체의 남성성으로 나타나며, 그것의 현실적 활동 속에서는 정부로 나타난다. 정부는 “여성이 지배하는”(헤겔) 가족들의 힘을 흡수하고 소비함으로써 자신을 유지한다. 따라서 국가 그 자체의 핵심적 요소로서 가족은 단순하게 배제될 수 없다. 그것은 포함되어야 할 것이면서 동시에 배제되어야 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정부는 여성일반을 “내부의 적”으로 창출한다. 여성이 내부의 적인 이유는 그녀가 단순하게 배제될 수 없으며(따라서 그녀는 내적이며) 그렇다고 공동체의 구성에 절대적으로 허용될 수도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따라서 그녀는 적이다). 그러므로 여성은 언제나 “내적 배제”(발리바르)의 대상이다. 헤겔이 여성을 “공동체의 영원한 아이러니”(■475)로 규정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실 여성의 가족으로의 유폐와 시민권에의 접근 불허가 표현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닌가?
헤겔의 이와 같은 분석은 그 자체로는 가부장제적 사회구조에 대한 명쾌한 분석이며 그 대상은 단지 고대 그리스 사회로 한정될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소포클레스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 성적 경제는 아직 채 안정성을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그려진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여전히 모계사회에서 가부장제로의 이행의 과정 속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행은 자신의 가족에서 크레온의 가족으로 이행해 가는 안티고네의 예정된 결혼 속에서 그 완벽한 사례를 찾아낸다. 또한 안티고네가 크레온의 명령에 불복하여 땅에 묻는 폴리네이케스는 사실 안티고네와 단지 어머니만을 공유하고 있는 오빠이다. 따라서 특별한 의미가 폴레네이케스에게 부여된다. 그는 안티고네의 오빠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녀의 어머니의 계보를 표현하고 있는 존재로 형상화된다. 따라서 폴리네이케스의 주검을 묻지 않고 내버려둔다는 것은 안티고네에게 있어 단지 오빠에 대한 불명예를 의미할 뿐 아니라, 자신의 시아버지, 혹은 차라리 아버지 일반을 위해 어머니를 희생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바로 이 같은 이유에서 이리가레는 「공동체의 영원한 아이러니」라는 글에서 “안티고네가 자신의 혈육관계를 희생하거나, 어머니의 아들을 들개와 새에게 넘겨주기보다는 어떤 남자와도 결혼하지 않은 채 처녀로 죽을 것을 결심”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헤겔이 안티고네에게 “여성”이라는 이름 하에 일괄적으로 부여하는 특징은 사실 안티고네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그것은 순종적이고 연약하며 ‘여성스러운’ 이스메네에게나 어울린다. 왜냐하면 마침내 크레온의 가족-집-궁궐 안에 갇히는 것은 바로 이스메네이며 그리하여 다른 여자들과 함께 크레온의 내부의 적이 되는 것도 바로 그녀이기 때문이다. 크레온은 자신의 부하에게 이렇게 명령한다. “이스메네를 안으로 데려가라. 지금부터 여자는 자유롭게 바깥에 나와 돌아다니지 못하도록 하라.” 그러나 진정으로 바깥에 있는 여자는 크레온의 “내부의 적”이 되길 거부한 안티고네이다.
따라서 헤겔이 결코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안티고네의 행위가 단지 가족 전체를 윤리적으로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가족 그 자체를 다시 나누고 차이화하고 있다는 점이며, 더 나아가 그녀의 행위가 공적인 장소 안에서 성차화 된 가족의 윤리라는 쟁점을 제기함으로써 성차화 되지 않은 시민권 그 자체를 문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행위가 정신을 나눈다고 말할 때, 헤겔은 절대적으로 옳다. 그러나 그가 성적 분할을 전적으로 국가-가족의 분할에 일치하게 만들어 각각의 성이 단 하나의 영역에만 속한다고 사고할 때 그는 오류를 범한다. 나는 앞에서 국가-가족 분할과 성적 분할의 모순의 관계가 상응이나 일치가 아닌 ‘과잉결정’의 관계라고 말한 바 있다. 헤겔은 이를 단지 상응의 관계로만 바라보기 때문에, 안티고네의 이행/비이행(결혼)이 그녀 자신의 신성한 봉기의 행위로 인해 단절되고 만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헤겔에게 있어 그녀는 단지 민족적 공동체의 통일성을 뒤집는 개인주의, 분열주의의 화신으로만 나타날 뿐이며, 가족 안에 존재하는 (때때로 유혹 받기 쉬운 젊은 남성들을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내부의 적”으로 이해될 뿐이다. 이리가레는 헤겔의 “단순 삼단논법의 체계”를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녀에 대한 강간-범죄는] “본질”의 반란으로 귀결될 것이다. 그토록 다르고 그토록 타자이기 때문에 그것이 “외부에서 작동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조차 동일성으로 환원하는 것이 되고, 인간의 법만을 아는 자의 무의식으로 환원하는 것이 되고 마는 “본질”의 반란으로 말이다. 이는 적어도 범죄[강간]가 알려지지 않은 채 쉽게 발생할 수 있으며, 결코 사실로 번역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이들/그것의 항들 각각이 급진적으로 이중화되어 더 이상 단일한 변증법으로는 이들의 결합(copulation)을 표현하기에 충분치 않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 한 말이다.”
헤겔은 도덕성에 관한 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비극의 문제로 돌아온다. 그는 (비록 보다 더 추상적인 항들 속에서 사고하지만) 안티고네를 논하면서 제시했던 그의 생각들을 하나하나 반복한다. 유일한 차이점은 그가 대립해서 싸우고 있는 의식들의 ‘공멸’을 막기 위해 심판하는 의식에게 일정한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사실이다. 그의 해결책은 행위하는 의식에 대한 ‘용서’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용서는 ‘처벌 없는 용서’를 의미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것은 적절한 처벌을 통해 획득되어야할 결과다. 이는 죄를 지은 자와 그 죄는 구별해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진다(따라서 사형(死刑)은 처벌이 아니라 ‘처벌의 부재’를 의미할 뿐이다). 용서의 행위를 통해 심판하는 의식은 죄를 지은 자와 또 다른 새로운 관계를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게 한다. 물론 이는 훌륭한 휴머니즘의 표현이다. 그러나 이러한 ‘용서’가 과연 심판하는 의식의 ‘심판’ 그 자체를 변화시키거나 대립하는 의식들 사이의 위계관계의 일방성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 이리가레 식으로 말한다면, 의식과 무의식으로 완전히 분할된 두 의식(혹은 두 성)이 어떻게 서로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단 말인가? 그렇다면 헤겔의 용서라는 해결책은 차라리 질문의 단순한 봉쇄인 것이 아닐까? 하지만 다른 한 편, 행위하는 의식(악한 의식)의 ‘반란’을 통해 심판하는 의식에 대한 권력관계의 역전을 도모하는 것은 극한에서 어떤 다른 위험들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이러한 질문들을 우선은 열린 질문들로 남겨두고자 한다. 아직 우리는 그 많은 고민의 첫 걸음을 겨우 내디뎠을 뿐이기 때문이다.PSSP
주제어
태그